시편 풀어 읽기 · 142편
이 장의 자리 · 107–150편 · 다섯째 권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동굴은 몸을 숨기기에 좋은 곳입니다. 바깥에서 쫓아오는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고, 돌벽은 위험으로부터 몸을 가려 줍니다. 그러나 동굴에 숨어 있다는 사실은 그 사람에게 돌아갈 안전한 곳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시편 142편의 표제는 이 노래가 다윗이 굴에 있을 때 드린 기도라고 밝힙니다. 그런데 시인은 동굴 안에서 「저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피할 곳이 사라졌습니다」라고 말합니다(5절).
몸을 숨길 장소는 있지만 피난처는 없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 역설이 시편 142편을 이해하는 출발점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에서는 정반대의 장면을 바라봅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탄식하던 사람이, 마지막에는 「의로운 사람들이 제 둘레에 모여들 것입니다」라며 의로운 사람들이 자신의 둘레에 모여드는 모습을 기대합니다(8절).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시편은 실제로 사람들이 찾아왔거나 원수들이 물러갔다고 보고하지 않습니다. 그의 상황이 바뀌었다는 설명도 없습니다. 다만 시인이 하나님께 자신의 고통을 쏟아 놓고, 그분을 자신의 피난처라고 고백하며, 그분이 베푸실 구원을 기대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시편 142편은 고립된 사람이 단순히 외로움을 견디는 기도가 아닙니다. 아무도 자신을 돌보지 않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 알려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붙들고, 다시 생명과 공동체를 기대하는 기도입니다.
동굴에 있을 때 드린 기도 — 역사적 배경과 노래의 자리
다윗의 마스길입니다. 그가 굴에 있을 때 드린 기도입니다.시편 142:1 · 두루새김
마스길은 여러 시편의 표제에 나타나는 말입니다. 히브리어의 이해나 통찰과 관련된 어근을 떠올리게 하지만, 표제에서 정확히 어떤 음악적·문학적 형식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사무엘상에는 다윗이 동굴에 머물렀던 사건이 적어도 두 번 나옵니다. 사무엘상 22:1–2에서는 다윗이 사울을 피해 아둘람 동굴로 달아납니다. 그곳으로 그의 가족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모여들고, 다윗은 약 사백 명의 지도자가 됩니다. 사무엘상 24:1–7에서는 다윗이 엔게디 일대의 동굴에 숨어 있을 때 사울이 그 동굴로 들어옵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그를 해치지 않습니다.
시편의 표제는 어느 동굴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를 아둘람 동굴이나 엔게디 동굴의 특정 순간에 확정적으로 배치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아둘람 동굴에 가족과 사람들이 모였다는 기록을 생각하면, 시편의 「저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그곳에서 다윗이 문자 그대로 혼자 있었다는 증거로 삼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역사적 불확실성을 인정하면서도, 다윗의 도피 생활은 시편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는 동안 왕의 보호를 기대할 수 없었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도 없었으며, 어디에 머물러야 안전한지 계속 판단해야 했습니다. 동굴은 그에게 잠시 몸을 숨기는 곳이 될 수 있었지만, 그곳이 그의 모든 위험을 해결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표제의 역할은 시인이 누구인지 알려 주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표제는 독자로 하여금 이어지는 기도를 동굴이라는 좁고 막힌 공간 안에서 듣게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울리는 첫 소리는 설명도, 찬양도 아닙니다.
부르짖음입니다.
말할 사람이 없을 때에도 기도는 쏟아진다
소리 내어 여호와야훼께 부르짖고 소리 내어 여호와야훼께 자비를 빕니다.시편 142:2 · 두루새김
시인은 「소리 내어」라는 표현을 두 번 반복합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고요히 하나님을 생각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소리 내어 부르짖고 간청합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긴 사람이 하나님께는 자신의 목소리를 냅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아무런 말 없이 견디는 것을 신앙의 모범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말합니다.
「호의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합니다」라는 표현은 단순히 필요한 물건이나 도움을 요청하는 것보다 간절한 의미를 가집니다.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호소하는 기도입니다.
그분 앞에 내 하소연을 쏟아 놓고 내 괴로움을 그분 앞에 아룁니다.시편 142:3 · 두루새김
이번에는 「그분 앞에」가 반복됩니다. 2절에서는 소리 내어 기도한다는 점이 강조되었습니다. 3절에서는 그 목소리가 향하는 자리가 강조됩니다.
「하소연」은 마음속의 생각이나 근심을 말로 드러내는 것과 관련됩니다. 그리고 「쏟아 놓습니다」(שָׁפַךְ)는 액체를 쏟는 행동을 나타내는 동사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하소연을 조금씩 정리해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릇에 담긴 물을 쏟아 내듯 하나님 앞에 내어 놓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고통을 먼저 분석하고, 감정을 충분히 가라앉힌 뒤, 적절한 표현만 골라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고난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알립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그 사정을 모르시기 때문에 설명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이 가는 길을 이미 아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사정을 알린다는 것은 하나님이 모르시는 일을 설명한다는 뜻이 아니라, 혼자 짊어지고 있는 고통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는다는 뜻입니다.
시인은 실제로 자신의 영이 지쳐 힘을 잃을 만큼 지쳐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중요한 차이를 발견합니다.
조금 더 깊이
「하소연」(שִׂיחַ)에 해당하는 말은 시편에서 탄식이나 묵상, 마음에 품은 사정을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시편 62:8에서도 백성에게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으라고 권하면서 그분이 우리의 피난처이심을 고백합니다. 시편 142편에서는 그 가르침이 한 사람의 구체적인 기도가 됩니다.
나는 길을 잃어도 하나님은 그 길을 아신다
내 속에서 기운이 다 빠져 갈 때에도 주님, 당신은 내 길을 아셨습니다. 내가 걷는 길에 그들이 나를 잡을 덫을 숨겨 놓았습니다.시편 142:4 · 두루새김
이 절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현실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시인의 영은 지쳐 힘을 잃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가는 길을 아십니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상황을 경험합니다. 몸을 움직일 힘뿐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하고 상황을 견뎌 낼 정신적인 힘도 부족해지는 상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그에게 어떤 길로 가야 할지 알려 주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모든 덫을 제거하셨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가 가는 길을 아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신다는 사실을 곧바로 문제의 해결이나 구체적인 인도로 넓혀 읽으면, 시인이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불확실성이 사라집니다. 그는 여전히 어디에 위험이 있는지 모두 알 수 없습니다.
그 덫은 시인이 미리 발견하지 못하도록 감춰진 것입니다. 어디에 덫이 있는지 알 수 있다면 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들이 자신을 잡으려고 함정을 놓았다는 사실만 알고, 그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면 모든 걸음이 두려워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감춰진 길과 하나님이 아시는 길은 다릅니다.
시인은 안전한 길을 모두 알고 있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길까지 하나님이 아신다는 사실을 붙듭니다.
그는 자신의 오른쪽을 바라보아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말씀은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길을 잘 아신다는 시편 139편의 고백을 떠올리게 하지만(시편 139:3), 여기서는 그 앎이 특별히 숨겨진 덫과 지쳐 힘을 잃은 영이라는 상황 속에서 의미를 얻습니다.
아무도 없는 오른쪽 —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 고통
오른쪽을 보십시오, 살펴보십시오.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습니다. 피할 곳이 내게서 사라졌고 내 목숨을 돌보는 이도 없습니다.시편 142:5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시편 142편의 가장 쓸쓸한 장면입니다.
구약에서 오른쪽은 보호와 도움을 받는 자리로 등장하곤 합니다. 시편 16:8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흔들리지 않겠다고 고백합니다. 시편 109:31에서는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의 오른쪽에 서셔서 그의 생명을 구하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므로 오른쪽을 보라는 말은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를 살펴보라는 요청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도움을 기대할 자리에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 보시라고 청하는 말로도, 시인이 스스로 오른쪽을 살펴보았다고 회고하는 말로도 읽힙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이어지는 탄식의 의미는 같습니다. 그에게는 의지할 사람이 없습니다.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알아주는」(נָכַר)에 해당하는 말은 누군가를 알아보거나 인정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가 누구인지 알고, 그를 자신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어려움에 처한 그와 관계를 맺어 줄 사람이 없다는 탄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이런 고립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아는 사람들은 있지만, 위험할 때 자신의 편에 서 줄 사람은 없을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두 문장 가운데 「제가 피할 곳이 사라졌습니다」는 장소의 상실입니다. 「제 목숨을 돌보는 사람도 없습니다」는 관계의 상실입니다. 돌아갈 곳도 없고, 자신을 돌보아 줄 사람도 없습니다.
4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이 가는 길을 아신다고 말했습니다. 5절에서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시지만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아신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무관심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무관심은 실제로 고통스럽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도 인간적인 돌봄과 관계는 필요합니다. 이 시편은 그러한 필요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절에서 시인은 앞에서 잃어버렸다고 말한 것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시 고백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은 두루새김처럼 「보십시오. 살펴보십시오」라는 명령형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칠십인역은 시인이 자신이 오른쪽을 살펴보았다고 회고하는 방향으로 옮깁니다. 이 구절만으로 고대 법정의 변호인이나 특정한 호위자가 있어야 할 자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돌보는」(דָּרַשׁ)에 해당하는 말은 찾거나 살피거나 관심을 기울이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시편 27:10에서도 부모에게 버림받는 극단적인 상황과 하나님의 돌보심이 대비됩니다. 이 두 본문은 인간의 관계가 무너지거나 기대했던 돌봄을 받을 수 없을 때 하나님께 피할 수 있다는 믿음을 공유합니다.
피할 곳을 잃은 사람이 하나님을 자신의 몫이라고 부르다
여호와야훼여, 나는 당신께 부르짖었습니다.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당신은 나의 피난처,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나의 몫이십니다.시편 142:6 · 두루새김
이 절은 시편 전체의 중심을 이루는 고백입니다.
앞에서는 「제가 피할 곳이 사라졌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주님은 제 피난처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피할 곳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피난처로 부릅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피난처라고 부르는 순간 동굴 밖의 추격자들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바로 뒤에서 그는 여전히 자신을 뒤쫓는 자들에게서 구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동굴은 그를 잠시 숨겨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영원히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도와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때도 있습니다.
이 고백의 놀라움은 안전한 곳에 도착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피난처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안전한 곳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피난처라고 부른다는 데 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제 몫이십니다
「몫」은 어떤 사람에게 돌아가는 몫을 나타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몫이라는 말은 특히 땅의 분배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땅은 가족이 살아갈 터전이었고, 공동체 안에서 누리는 소속과 안정을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레위 지파에는 다른 지파와 같은 방식의 땅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민수기 18:20에서 하나님은 아론에게 자신이 그의 몫이며 물려받을 재산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142편은 이 전통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인이 레위인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시인은 재산이나 지위, 안전한 거처와 같은 그 모든 것보다 근본적인 자신의 몫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시편 142편에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라는 독특한 표현이 덧붙어 있습니다. 시인은 죽은 다음에야 하나님을 자신의 몫으로 얻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몫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죽음의 위험에서 구원받고 싶고, 안전하게 살아갈 곳을 찾고 싶으며, 자신을 돌보아 줄 사람들과 다시 관계를 맺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현재 그것들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자신의 몫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인간적인 삶의 필요를 모두 포기하겠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필요를 하나님 앞에 내어 놓을 수 있는 근거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 고백을 한 뒤에 다시 구체적으로 구원을 요청합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10:9에서도 레위 지파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어진 몫이시라는 사실로 설명됩니다. 이는 시편 16:5에서 하나님을 자신의 몫과 잔에 담긴 몫으로 고백하는 말씀, 시편 73:26에서 몸과 마음이 약해질 수 있지만 하나님이 영원한 자신의 몫이시라는 고백과 연결됩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은 구약의 여러 본문에서 죽음의 영역과 대비되는 현재의 생명 세계를 가리킵니다. 시편 27:13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나타납니다. 이사야 38:11에서는 죽음을 앞둔 히스기야가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더 이상 하나님을 보지 못할 것을 탄식합니다.
저를 뒤쫓는 자들은 저보다 강하니
내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내가 너무나 약해졌으니. 나를 뒤쫓는 자들에게서 건져 주십시오, 그들이 나보다 강하니.시편 142:7 · 두루새김
시인은 자신의 약함을 숨기지 않습니다.
고대의 왕이나 전사에 관한 노래에서는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얼마나 용감하게 싸웠는지, 적을 어떻게 무찔렀는지를 강조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시인은 정반대의 말을 합니다. 자신보다 적들이 강하다고 고백합니다.
사무엘상에서 다윗은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전쟁에서 이름을 얻은 인물입니다(사무엘상 17:48–51; 18:6–7). 그런데 이 시편의 다윗은 자신의 용맹을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무력해졌는지를 말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자신이 적들보다 강하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적들이 자신보다 강하다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그는 자기 처지를 과장해서 하나님을 설득하려 하지도 않지만, 자신의 약함을 감추지도 않습니다.
또한 그가 요청하는 것은 단순히 마음의 위로가 아닙니다. 시인은 자신을 뒤쫓는 사람들로부터 실제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피난처이시라는 고백은 이 위험을 가볍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고백 때문에 시인은 하나님께 구체적인 구원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에서 시인의 소망은 단순히 추격자들에게서 도망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감옥에서 나와, 의로운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기까지
당신의 이름에 감사드리도록 내 목숨을 감옥에서 이끌어 내 주십시오. 의로운 이들이 나를 둘러쌀 것입니다. 참으로 당신이 내게 넉넉히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시편 142:8 · 두루새김
동굴이 어떻게 감옥이 되는가?
본문에서는 시인이 실제로 감옥에 갇혀 있는지, 아니면 도망할 곳이 없는 자신의 처지를 감옥에 비유하는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동굴은 일반적으로 감옥과 다릅니다. 그런데 동굴 밖에 자신을 잡으려는 사람들이 있고, 어디로 나가든 붙잡힐 위험이 있다면 어떨까요? 몸을 숨긴 장소가 사실상 자신을 가두는 공간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시인은 단순히 안전한 곳에 숨어 있는 상태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는 밖으로 나가기를 원합니다. 원문에서 이끌어 내 달라고 하는 대상은 시인의 생명입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저를」로 옮겼습니다. 자신의 목숨과 존재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에 감사드릴 수 있도록 자신을 이끌어 내 달라고 간구합니다. 처음에 시인은 소리 내어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서는 그 목소리로 하나님의 이름에 감사드리기를 바랍니다.
현재는 고통 때문에 부르짖지만, 앞으로는 구원 때문에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시편이 아직 그 변화를 이루어진 사건으로 보고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의 소망입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의로운 사람들
5절에서 시인은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서는 의로운 사람들이 자신의 둘레에 모여들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는 더 이상 홀로 있지 않습니다.
「제 둘레에 모여들 것입니다」는 의로운 사람들이 시인을 둘러싼다는 뜻으로도, 그를 높여 관을 씌운다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따라서 의로운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러 읽기에서 공통으로 드러나는 것은 시인의 미래가 다른 의로운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시인은 하나님 한 분만 있으면 다른 모든 사람은 필요 없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인간관계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 인간관계가 다시 세워질 미래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게 넉넉히 베풀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편의 마지막 말은 사람들의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을 가리킵니다. 시인은 의로운 사람들이 자신의 둘레에 모여들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유를 자신의 훌륭함에서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넉넉히 베풀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모여들 것입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크티루(כָּתַר)는 둘러싸거나 에워싸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지만, 왕관을 씌우거나 관을 두르는 이미지와 연결하여 읽기도 합니다. 칠십인역은 이 구절을 의로운 사람들이 시인을 기다릴 것이라는 방향으로 옮깁니다. 「감옥」(מַסְגֵּר)에 해당하는 말은 사람을 가두는 장소나 갇힌 상태를 가리킵니다. 「베풀어 주실」(גָּמַל)에 해당하는 말은 누군가에게 행하거나 갚아 주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동굴에 울리던 한 사람의 목소리
시편 142편에서 구원은 단지 동굴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던 자리에서, 자신을 아시는 하나님께 구원받아 다시 사람들 가운데서 그분의 이름에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사람에게 받은 상처나 고립이 언제나 쉽게 해결된다는 약속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 기도가 어떻게 응답되었는지,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했는지는 알려 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시편의 마지막 소망을 모든 신자가 동일한 방식과 시점에 구원받을 것이라는 보장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 「저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 말이 단순한 불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시편 142편의 처음에는 동굴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한 사람이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오른쪽을 바라보아도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피할 곳을 잃은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자신의 피난처라고 부릅니다.
시편은 그들이 실제로 도착하는 장면까지 보여 주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구원을 기다리는 기도의 자리에서 끝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시인이 바라보는 모습은 분명히 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동굴 안에서 홀로 부르짖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둘레에 모여든 의로운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께 감사할 날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은 자신이 가는 길을 아시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입니다.
동굴 안에서 울리던 한 사람의 목소리는 아직 찬양으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목소리가 언젠가 의로운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노래가 되기를 바라며 기도를 마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