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32편
이 장의 자리 · 1–41편 · 첫째 권
죄를 감추지 않자 하나님께서 감추어 주셨습니다
시편 32편에는 놀라운 역설이 있습니다.
시인은 죄가 덮인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1절). 그런데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할 때에는 정반대의 행동을 했다고 말합니다. 5절에서 그는 「제 잘못을 감추지 않았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죄가 덮여야 복이 있다고 말하면서, 왜 자신은 잘못을 감추지 않았다고 할까요?
원문에서는 두 구절에 사용된 ‘덮다’가 같은 히브리어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시인은 의도적인 것으로 읽을 만한 대조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차이는 누가 덮는가에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죄를 감추는 것과 하나님이 사람의 죄를 덮어 주시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시인이 입을 다물고 죄를 숨기고 있을 때, 그는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인정하자, 하나님은 그의 죄의 책임을 거두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시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죄를 감추지 않게 된 사람은 이제 하나님을 자신이 「숨을 곳」이라고 부릅니다(7절). 처음에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감추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감추어 보호해 주십니다.
시편 32편에서 자유는 죄를 잘 숨기는 데서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지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 시는 죄를 고백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개인적인 경험담에 그치지 않습니다. 용서를 경험한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어떻게 배워 가는지, 그리고 그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전하는지까지 보여 줍니다.
복된 사람은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다윗의 마스길입니다. 복되구나, 거역한 일을 용서받고 죄가 덮인 사람이여. 복되구나, 여호와야훼께서 죄의 책임을 묻지 않으시고 마음에 속임이 없는 사람이여.시편 32:1–2 · 두루새김
시편은 「복이 있습니다」라는 선언을 두 번 반복하며 시작합니다.
이 표현은 시편 1:1에도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이 누리는 복된 상태를 선언하는 표현입니다. 시편 1편은 악한 사람들의 길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기뻐하는 사람을 복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시편 32편은 다른 모습의 사람을 복되다고 부릅니다.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는 거역한 일이 있고 죄가 있으며 죄의 책임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러나 용서받았기 때문에 복됩니다.
복된 사람은 처음부터 죄를 지을 가능성이 없는 사람도, 한 번도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은 사람도 아닙니다.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께 용서받은 사람 역시 복된 사람입니다.
세 가지 죄의 표현, 세 가지 용서의 표현
1–2절에는 죄를 나타내는 세 가지 표현이 등장합니다. 「거역한 일」은 반역이나 정해진 규범을 어기는 행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죄」는 잘못하거나 죄를 짓는 일을 가리킵니다. 「죄의 책임」은 그릇된 행위와 그로 인한 책임까지 포괄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들은 의미가 서로 겹칩니다. 따라서 각각을 서로 다른 종류의 죄로 엄격하게 분류하려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다양한 표현을 겹쳐 사용함으로써 인간의 죄와 그 책임을 폭넓게 다룹니다.
그런데 이에 대응하여 하나님의 행동도 세 가지로 표현됩니다.
거역한 일을 용서하십니다. 죄를 덮으십니다. 죄의 책임을 묻지 않으십니다.
첫 번째 「용서받고」(נָשָׂא)는 들어 올리다, 짊어지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여기서는 거역한 일의 짐이 거두어진 상태를 나타냅니다.
두 번째는 죄가 덮이는 것입니다. 사람이 저지른 죄가 없었던 일처럼 역사 자체에서 지워졌다는 뜻이라기보다, 하나님께서 더는 그것을 죄를 묻는 근거로 삼지 않으시는 용서의 모습을 표현합니다.
세 번째 「죄(חֲטָאָה)의 책임을 묻지 않으시는」이라는 표현의 동사는 계산하다, 여기다, 어떤 것으로 간주하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책임을 그 사람에게 계산하여 돌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복을 설명하면서 재산이나 건강, 성공을 먼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가 가장 먼저 말하는 복은 하나님 앞에서 죄의 짐을 벗는 일입니다.
그런데 왜 「속임이 없는 그 사람」인가
2절의 마지막 표현은 앞의 세 가지 용서 선언에 새로운 차원을 더합니다. 여기서 「속임」은 속이는 일과 거짓을 뜻합니다.
시인은 ‘마음에 죄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속임이 없는 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죄가 없다는 것은 잘못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속임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에 관하여 거짓된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복된 이유는 죄를 지은 적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속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때 자신의 죄에 관해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침묵 속에서 그의 몸과 마음이 약해졌습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32:1–2는 로마서 4:7–8에서 직접 인용됩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의로 여기심을 설명하면서, 다윗도 하나님께서 죄의 책임을 묻지 않으시는 사람의 복을 말했다고 인용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시편이 말하는 용서를 하나님의 은혜와 의롭다 하심의 문제로 연결합니다. 그러나 이 신약의 사용을 이해할 때에도 시편의 본래 장면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시편 32편은 자신의 죄를 숨기다가 하나님께 고백한 사람이 용서받고 기뻐하는 노래입니다. 신약은 시편의 개인적인 고백을 더 넓은 구원의 신학 안에서 읽지만,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복의 근거라는 중심은 그대로 이어집니다.
입을 다물었지만 온종일 울부짖었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을 때, 온종일 울부짖느라 내 뼈들이 닳아 버렸습니다. 주님, 참으로 밤낮으로 당신의 손이 나를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내 몸의 물기는 여름 가뭄에 말라 버렸습니다. 셀라.시편 32:3–4 · 두루새김
시인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온종일 울부짖었다고 말합니다.
입을 다물었는데 어떻게 울부짖을 수 있을까요?
그가 입을 다물었다는 것은 모든 소리를 내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두루새김은 「제가 죄를 고백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을 때」라고 옮겨,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인정하지 않았다는 의미를 드러냅니다. 그는 죄에 관해서는 침묵했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이 가져온 고통 때문에 끊임없이 신음했습니다.
말해야 할 것은 말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다른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장면을 단순히 죄책감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심리적 설명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무겁게 짓누르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손은 구원과 보호를 나타낼 수도 있고, 심판과 징계의 힘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4절의 「주님의 손」은 무겁게 짓누르는 손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겪는 괴로움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경험으로 해석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압박이나 징계의 경험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가 어떤 구체적인 죄를 지었는지, 그로 인해 어떤 질병이 발생했는지는 알려 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근거로 사람이 겪는 몸의 쇠약이나 마음의 고통이 언제나 숨긴 죄 때문이라고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시편 32편은 자신의 죄를 깨달은 사람의 고백이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진단하기 위한 기준표가 아닙니다.
여름의 메마른 땅에서는 물기가 사라지고 식물이 시듭니다. 시인은 자기 마음속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느낍니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살아갈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 안에서는 생명의 활력이 말라 가고 있었습니다.
4절은 「셀라」로 끝납니다. 이곳에서는 고백 이전의 고통스러운 상태를 말한 뒤 시의 흐름이 멈춥니다.
시인이 마침내 입을 엽니다.
조금 더 깊이
「셀라」의 정확한 음악적 기능은 확정하기 어렵지만, 시편에서 노래의 흐름을 구분하는 표지로 사용됩니다.
감추지 않자 주님이 덮어 주셨습니다
내 죄를 당신께 알리고 내 잘못을 덮어 두지 않았습니다. 내가 거역한 일들을 여호와야훼께 털어놓겠다고 나는 말했습니다. 그러자 당신은 내 죄의 책임을 거두어 주셨습니다. 셀라.시편 32:5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시편 32편의 중심입니다.
앞에서는 죄를 숨기고 침묵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 사람이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알립니다. 여기서 「알리고」는 알게 하다, 알리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죄를 알렸다는 말은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죄를 모르고 계셨기 때문에 알려 드린 것일까요? 시인의 고백은 하나님께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자신이 감추고 있던 사실을 더는 감추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고백은 하나님을 설득하기 위해 자신의 죄를 자세히 설명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인정하며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누가 죄를 덮는가
5절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제 잘못을 감추지 않았습니다」입니다. 이것은 1절의 「죄가 덮인 사람」과 대응합니다. 원문에서는 두 구절에 모두 카사(כָּסָה), 곧 덮다라는 어근이 사용됩니다. 두루새김은 자신이 잘못을 숨기는 행동을 「감추다」로 옮겼습니다.
사람이 자기 죄를 덮으려고 할 때에는 그 죄가 여전히 자신을 짓누릅니다. 그러나 죄를 감추지 않고 인정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죄를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용서를 사들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의 문장을 살펴보면 고백과 용서의 행동을 누가 하는지 분명히 구별됩니다. 시인은 자신의 죄를 알리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죄의 책임을 거두어 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용서는 시인 자신의 행동과 구별되는 은혜의 행동입니다.
다만 죄를 고백한다고 해서 그 죄로 인해 생긴 모든 현실적인 결과가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었다면 그 피해에 대한 책임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시편이 말하는 용서를 그러한 책임에서 벗어나는 허가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고백하겠다」와 「주님은 제 죄의 책임을 거두어 주셨습니다」
시인은 긴 의식이나 복잡한 절차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겠다고 결심한 뒤, 하나님께서 죄의 책임을 거두어 주신 사실을 고백합니다.
여기서 「거두어 주셨습니다」는 1절에서 거역한 일을 용서받았다고 말할 때 사용한 것과 같은 어근입니다. 이 반복은 시편의 시작과 중심을 연결합니다. 1절에서는 일반적인 선언으로, 거역한 일을 용서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5절에서는 그 복이 자신의 이야기가 됩니다.
자신이 바로 그 거역한 일을 용서받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시편 32편에서 고백은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해 자신을 꾸미는 일이 아닙니다. 더는 자신을 꾸미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서는 일입니다.
여기서 두 번째 「셀라」가 등장합니다. 시편은 죄를 감추던 사람의 고통을 이야기한 뒤 한 번 멈추었고, 그 죄가 용서된 순간에 다시 멈춥니다.
이제 이야기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용서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잠언 28:13은 자기 잘못을 감추는 사람이 일이 잘 풀리지 않지만, 그것을 고백하고 버리는 사람은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시편 32편의 핵심과 매우 가깝습니다. 그러나 잠언은 한 가지를 더 분명히 말합니다. 고백하는 것뿐 아니라 잘못을 버리는 것입니다. 시편 32편에서는 이와 연결되는 의미가 8–9절의 가르침에서 드러납니다. 레위기 5:5와 민수기 5:6–7에서도 죄를 고백하는 행위가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특히 민수기에서는 죄의 고백과 함께 잘못에 대한 배상이 연결됩니다. 이러한 율법의 배경을 함께 생각하면, 시편 32편의 용서를 단순히 개인의 마음이 가벼워지는 경험으로 축소하지 않게 됩니다.
큰물이 넘쳐도 닿지 않는 숨을 곳
그러므로 신실한 이는 누구나 당신을 만날 수 있을 때 당신께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큰물이 넘쳐도 그에게는 닿지 않을 것입니다.시편 32:6 · 두루새김
6절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5절에서 고백하고 용서받은 자신의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하려는 것입니다.
그는 죄를 고백한 뒤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지위에 올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을 찾을 이유가 된다고 여깁니다.
주님을 만날 수 있을 때
「주님을 만날 수 있을 때」라는 표현은 해석상의 여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원문은 문자적으로 ‘찾음의 때’, 또는 ‘발견할 수 있는 때’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고, 무엇을 찾는지가 분명하게 적혀 있지 않습니다. 문맥상 하나님을 찾고 만날 수 있는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두루새김은 이 대상을 「주님」으로 밝혀 옮겼습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 나아갈 기회를 소중히 여기라는 요청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이 잠깐만 사람을 받아 주시고 그 기회를 놓치면 더 이상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구체적인 시간 제한으로 해석할 근거는 없습니다. 시인은 죄를 숨기며 침묵하는 시간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알기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는 일을 미루지 않기를 바란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큰물이 넘쳐흐르는 장면
시인은 자신의 죄의 책임이 거두어진 경험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큰물이 넘치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시편에서 넘쳐흐르는 물은 종종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위협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이 물이 구체적으로 어떤 재난을 가리키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고, 인간에게 닥치는 감당하기 어려운 곤경을 넓게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의 안전에 관한 고백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실제 홍수나 재난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시적인 표현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을 지키시는 그분의 보호입니다.
이제 그 보호의 장소가 7절에서 밝혀집니다.
당신은 나의 숨을 곳이십니다. 어려움에서 나를 지키시고 구원의 기쁜 외침으로 나를 둘러싸십니다. 셀라.시편 32:7 · 두루새김
죄를 숨기던 사람이 하나님께 숨는다
시인은 앞에서 자신의 죄를 감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을 감추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물론 5절의 「잘못을 감추다」와 7절의 「숨을 곳」은 히브리어에서 같은 어근으로 만들어진 표현이 아닙니다. 하지만 시의 이미지에서는 분명한 전환을 이룹니다.
죄를 숨길 때에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듯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고백한 뒤에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그분 안에서 보호를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을 피해야 할 분으로만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단지 과거의 죄의 책임을 없애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죄 때문에 두려워하던 사람이 다시 하나님께 피할 수 있게 합니다.
신음하던 사람이 구원을 기뻐하는 외침으로 둘러싸이다
앞에서 시인은 온종일 신음하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구원을 기뻐하는 외침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죄를 숨기던 때에는 신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용서받은 지금은 구원을 기뻐하는 외침이 그를 감쌉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위험을 제거하셨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머무는 자리 전체가 구원의 기쁨으로 둘러싸인 모습을 그립니다.
이 장면 뒤에서 세 번째 「셀라」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시편의 분위기가 다시 바뀝니다. 지금까지는 시인이 하나님께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8절부터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길을 가르치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69:1–2에서도 시인은 물이 목까지 차오르고 깊은 수렁에 빠진 상황을 통해 자신의 위기를 묘사합니다. 시편 32편의 큰물도 그러한 위험의 이미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 창세기 3:8–10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뒤 하나님을 피해 숨는 장면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두 본문이 서로를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죄와 숨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문제에서 의미 있는 대조를 보여 줍니다. 창세기에서는 죄를 지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숨습니다. 시편 32편에서는 죄를 인정한 사람이 하나님을 자신이 숨을 곳으로 부릅니다.
내가 너에게 길을 가르쳐 주겠다
내가 그대를 깨우쳐 주고 그대가 걸어갈 길을 가르쳐 주겠다. 그대를 눈여겨보며 일러 주겠다.시편 32:8 · 두루새김
앞에서는 시인이 하나님께 직접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네게 깨달음을 주고」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누가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가, 시인이 가르치는가
첫 번째 가능성은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7절까지 시인이 하나님께 기도한 뒤, 8절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응답하시며 앞으로 걸어갈 길을 가르쳐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너를 눈여겨보며 일러 주겠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주의 깊게 살피시며 이끄시는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읽힙니다.
두 번째 가능성은 시인 자신이 말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자신의 죄와 용서의 경험을 이야기한 사람이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그 경험에서 배운 지혜를 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표제의 「마스길」(מַשְׂכִּיל)은 깨닫다, 통찰하다, 슬기롭게 행동하다와 관련된 히브리어 어근 사칼과 연결되는데, 8절의 「깨달음을 주고」(שָׂכַל)에도 같은 어근이 사용됩니다. 또한 9절에서 「너희는」이라는 복수 명령이 등장하고, 마지막에는 공동체 전체를 향한 권유로 이어집니다.
본문에는 8절의 말하는 이를 분명하게 밝히는 표현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느 읽기가 확실하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두 해석 모두에서 중요한 것은 같습니다. 용서받은 사람은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용서는 길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길의 시작이다
8절은 단순히 죄를 용서받았으니 이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네가 걸어갈 길」을 이야기합니다.
죄를 인정하고 용서받는 경험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사람은 계속해서 선택하고 행동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길을 걸을 것인지, 무엇을 분별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나님께 응답할 것인지 배워야 합니다.
시인은 죄의 책임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내지 않습니다. 그 자유를 얻은 사람이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까지 관심을 기울입니다. 「눈여겨보며 일러 주겠다」는 말처럼, 가르침은 단지 명령을 내려 상대방을 움직이게 하는 일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살피면서 그가 바른길을 걸어가도록 돕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는 이와 정반대의 이끄는 방식이 등장합니다.
재갈과 고삐가 필요한 사람이 되지 마라
너희는 깨닫지 못하는 말이나 노새처럼 되지 마라. 그것들은 몸에 채운 재갈과 고삐로 붙들어야 하니 그렇지 않으면 그대에게 가까이 오지 않는다.시편 32:9 · 두루새김
이 비유는 다소 거칠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왜 시인은 사람들에게 말이나 노새처럼 되지 말라고 할까요?
여기서 비판받는 것은 짐승의 존재 자체가 아닙니다. 시인이 주목하는 것은 「깨닫지 못하는」 특징입니다. 말이나 노새는 사람이 원하는 방향을 말로 설명해도 사람처럼 그 뜻을 이해하여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몸에 채운 도구로 움직임을 다스려야 합니다.
시인은 이러한 모습을 통해 이해하고 깨닫는 능력 없이 밖에서 억지로 시켜야만 움직이는 태도를 경계합니다.
눈여겨보며 이끄는 것과 재갈로 다스리는 것
8절에는 깨달음을 주고 가르치고 일러 주는 일이 있습니다. 9절에는 재갈과 고삐가 있습니다. 한쪽은 이해하도록 돕는 방식입니다. 다른 한쪽은 몸의 움직임을 강제로 다스리는 방식입니다.
시인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라는 명령만을 전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을 가지고 응답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가 경험한 죄의 고백도 이러한 깨달음과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죄를 감추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무엇을 인정해야 하는지 알면서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자신의 죄를 고백했고, 이제 그 경험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해하고 분별하며 바른길을 걸으라고 권합니다.
이 점에서 시편 32편의 용서는 단순히 과거의 잘못에 대한 처리로만 남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삶을 새롭게 배우는 계기가 됩니다.
물론 이 비유를 모든 고난이 하나님이 사람을 강제로 길들이시는 과정이라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시편은 그런 보편적인 원리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핵심은 깨달음 없이 억지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가르침을 알아듣고 바른길을 선택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9절 끝의 「그렇지 않으면 네게 가까이 오지 않는다」는 부분은 히브리어의 연결과 가리키는 대상이 간결하게 표현되어 해석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재갈과 고삐로 다스리지 않으면 가까이 오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고,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방향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말과 노새가 자발적인 이해보다 밖에서 다스려 주는 것에 의존한다는 비유의 핵심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제 시인은 그러한 삶의 두 가지 결과를 대조합니다.
고통에 둘러싸인 사람과 한결같은 사랑에 둘러싸인 사람
악한 이에게는 아픔이 많으나 여호와야훼를 의지하는 이를 한결같은 사랑이 둘러쌉니다.시편 32:10 · 두루새김
10절은 매우 짧지만 시편 전체의 여러 장면을 연결합니다.
7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기뻐하는 외침으로 자신을 「둘러싸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10절에서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그분을 의지하는 사람을 「감싼다」고 말합니다. 두루새김에서는 다른 말로 옮겼지만, 원문에서는 두 구절에 사용된 히브리어가 같은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7절에서는 시인의 개인적인 경험이었습니다. 10절에서는 그 경험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가르침이 됩니다.
악한 사람과 의로운 사람의 차이는 죄를 지었는가에만 있지 않다
시편은 악한 사람에게 고통이 많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앞에서 자신도 죄를 지었고 큰 고통을 겪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자기 자신을 악한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일까요?
이 질문은 시편의 처음으로 돌아갈 때 풀립니다. 시편은 거역한 일을 용서받은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하면서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마지막의 의로운 사람과 악한 사람의 대조를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은 사람과 죄를 지은 사람의 대조로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시인은 자신도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반면 시편이 경계하는 것은 깨달음 없이 고집스럽게 행동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응답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문맥에서 의로운 삶은 자기에게 죄가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 삶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서고 그분을 의지하는 삶과 연결됩니다.
시편 32편 자체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깊은 고통을 겪을 수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여기서 대조되는 것은 단순한 생활 형편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을 감싸는 그분의 한결같은 사랑과, 그분께 등을 돌리는 삶의 고통스러운 결과입니다.
한결같은 사랑은 무엇인가
10절의 「한결같은 사랑」(חֶסֶד)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낱말은 사랑, 변함없는 호의, 관계 안에서 지켜지는 충실한 돌봄 등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지속적인 사랑과 돌보심을 표현합니다. 시인이 경험한 용서는 바로 그 한결같은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그 모든 경험을 하나의 말로 표현합니다.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시편의 처음에서 사람은 죄의 책임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까워지면 그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에 감싸인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이제 시편은 마지막 기쁨의 외침을 향해 갑니다.
마음이 곧은 모든 사람들이여, 기뻐 외치십시오
의로운 이들아, 여호와야훼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마음이 곧은 모든 이들아, 기쁨의 함성을 올리라.시편 32:11 · 두루새김
시편은 기쁨으로 끝납니다.
시편은 한 사람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사실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모든 의로운 사람과 마음이 곧은 사람들을 기쁨의 외침에 초대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경험을 공동체 전체가 함께 기뻐할 이유로 전합니다.
1–2절에서는 「마음에 속임이 없는 그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11절에서는 「마음이 곧은 모든 사람들」에게 기뻐 외치라고 명령합니다. 두 표현은 동일한 히브리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의미 있는 연결을 이룹니다.
시의 양 끝에서 사람의 마음속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흠 없는 사람들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인은 자기 죄를 고백한 사람이 복되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의 의로운 사람들과 마음이 곧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정직하게 나아가 그분을 의지하는 사람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11절에는 세 가지 기쁨의 표현이 연이어 등장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기뻐 외치십시오」.
침묵하던 사람이 기뻐 외치다
처음에 시인은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단지 사람을 죄의 책임에서 풀어 주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다시 하나님을 향하여 기뻐하고 찬양할 수 있도록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두 가지 잘못된 태도를 모두 경계하게 합니다. 하나는 자신의 죄를 감추면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다시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죄를 감추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죄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달아나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속이지 않고 죄를 인정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죄가 가볍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32편의 처음에는 입을 다문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감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침묵 속에서도 고통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의 뼈가 약해지고, 기운이 여름 가뭄에 물이 마르듯 말라 갑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는 입을 엽니다.
「내가 거역한 일을 여호와야훼께 고백하겠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죄의 책임을 거두어 주십니다.
이제 시인은 더 이상 자신을 숨기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숨을 곳이 되어 주신다고 노래합니다. 그의 주변을 채우던 신음은 구원을 기뻐하는 외침으로 바뀝니다.
죄를 감추던 입이 고백을 위해 열렸고, 그 입이 이제 하나님을 향한 기쁨의 외침으로 열립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덮어 주셨기에, 사람은 더 이상 그 죄를 감추기 위해 자신의 입을 닫아 둘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자유 안에서 시편의 마지막 외침이 울려 퍼집니다. 「마음이 곧은 모든 사람들이여, 기뻐 외치십시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