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63편
이 장의 자리 · 42–72편 · 둘째 권
물 없는 광야에서 하나님으로 배부르다
시편 63편에는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역설이 있습니다. 시인은 물이 없는 광야에서 목말라합니다. 그런데 그가 간절히 찾는 것은 물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그는 자신의 몸까지 하나님을 애타게 그리워한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생명보다 좋다고 고백합니다. 마침내 기름진 음식으로 배불리 먹은 사람처럼 만족하게 될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목마름에서 시작한 시가 어떻게 배부름의 노래가 되는 것일까요?
시인의 처지가 실제로 나아졌다는 설명은 없습니다. 광야에 물이 솟아났다는 이야기도, 그가 안전한 곳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오히려 시의 후반부에서는 그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도 시인은 기쁨과 만족을 말합니다.
시편 63편은 어려운 현실을 잊어서 얻는 만족이 아니라, 그 현실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자신이 가장 깊이 바라는 분으로 발견한 사람의 노래입니다.
시의 움직임은 독특합니다. 물 없는 땅에서 시작하여 거룩한 곳으로 향하고, 풍성한 음식이 차려진 식탁을 떠올리게 하다가, 밤의 잠자리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꼭 붙어 뒤따르는 사람과 그를 붙드는 하나님의 손을 보여 준 뒤, 적들의 죽음과 왕의 기쁨으로 끝납니다.
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사람
다윗이 유다 광야에 있을 때의 시입니다.시편 63:1 · 두루새김
하나님,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당신을 간절히 찾습니다. 물 없이 메마르고 지친 땅에서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하고 내 몸이 당신을 애타게 그리워합니다.시편 63:2 · 두루새김
시편은 「하나님, 주님은 저의 하나님이십니다」라는 매우 개인적인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일반적인 신앙 고백에 머물지 않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직접 부르면서 그분이 자신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무엇을 요구하기 전에 관계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유다 광야는 유다 산지 동쪽에서 사해 방향으로 이어지는 건조한 지역입니다. 바위가 많은 언덕과 골짜기가 있고, 물을 안정적으로 구하기 어려운 곳이 많습니다. 그곳에서 물은 단순히 갈증을 해결하는 음료가 아닙니다. 생존과 직결됩니다.
다윗의 이야기에서는 사울을 피해 유다 광야에 숨어 지내던 시기가 등장합니다(사무엘상 23:14–15; 24:1). 압살롬의 반란으로 예루살렘을 떠나 광야 쪽으로 피하던 시기도 있습니다(사무엘하 15:23; 17:16). 표제는 이 가운데 어느 사건을 가리키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시편의 모든 표현을 특정한 도피 사건에 하나씩 맞추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장소에서 시인은 자신의 갈증을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표현합니다. 이때 영혼과 몸이 함께 등장합니다. 「영혼」으로 옮긴 히브리어 네페쉬(נֶפֶשׁ)는 몸과 분리된, 물질이 아닌 존재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문맥에 따라 생명, 자기 자신, 욕구를 지닌 살아 있는 존재를 나타냅니다. 「몸」으로 옮긴 낱말 역시 실제 육체를 가리킵니다.
시인은 영혼만 하나님을 그리워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몸까지 하나님을 갈망한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물이 없을 때 몸 전체가 갈증을 느끼듯, 자신의 존재 전체가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고 말합니다.
왜 시인은 물 없는 광야에서 물을 달라고 요청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실제로 물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 시의 관심이 생존에 필요한 것을 구하는 데서 그 생존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찾는 데로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새로 만들어 낸 장소라기보다, 그 갈망이 얼마나 깊은지를 드러내는 장소가 됩니다.
그리고 그가 찾는 하나님은 막연하게 상상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시인은 그분을 이미 바라본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조금 더 깊이
「제가 주님을 간절히 찾습니다」의 히브리어 동사는 이른 시간에 찾는다는 뜻과 간절히 찾는다는 뜻을 함께 떠올리게 합니다. 새벽을 뜻하는 말과 관련된 어근이 사용되므로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찾는다는 느낌으로 읽을 수 있지만, 반드시 기도가 새벽에 이루어졌다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목마름으로 표현하는 일은 다른 본문과도 이어집니다. 이사야 55:1–3에서는 목마른 사람들에게 물로 나아오라고 부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언약과 한결같은 사랑을 듣고 생명을 누리라고 권합니다. 시편 42:1–2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목마른 사슴의 이미지로 표현됩니다. 두 시편은 직접적인 인용 관계라기보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생명의 절실한 필요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신약의 요한복음 4:13–14와 7:37–39에서는 생수를 주시는 예수님과 그분을 통해 주어지는 생명이 이야기됩니다. 이는 시편 63편을 직접 인용한 것이라기보다 구약에서 반복되는 갈증과 하나님이 생명을 주신다는 주제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펼쳐지는 사례입니다.
광야에서 떠올리는 성소의 하나님
이렇게 나는 성소에서 당신의 힘과 영광을 보려고 당신을 바라보았습니다.시편 63:3 · 두루새김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이 목숨보다 좋기에 내 입술이 당신을 찬양합니다.시편 63:4 · 두루새김
이렇게 살아 있는 동안 당신을 높이며 당신의 이름으로 두 손을 들겠습니다.시편 63:5 · 두루새김
광야에서 하나님을 찾는 시인은 갑자기 거룩한 곳을 말합니다.
시인은 지금 광야에 있다고 소개되었는데, 어떻게 거룩한 곳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았다고 말할까요? 히브리어의 「바라보았습니다」(חָזָה)는 완료된 행동을 나타내는 형태입니다. 따라서 이전에 거룩한 곳에서 하나님을 바라본 경험을 회상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현재의 간절한 갈망 속에서 그 경험을 생생하게 다시 떠올리거나, 그 경험을 소망하는 시적 표현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이렇게」(כֵּן)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앞선 갈망과 거룩한 곳에서의 바라봄을 어떻게 연결하는지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집니다.
어느 쪽이든 시인은 하나님을 처음 알게 된 사람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을 향해 예배해 온 사람입니다. 그곳에서 시인이 바라보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의 힘과 영광입니다. 광야에서는 자신의 연약함을 경험합니다. 거룩한 곳에서는 하나님의 힘과 영광을 바라봅니다.
그러다가 뜻밖의 고백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힘과 영광을 보려고 했던 시인이 결국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한결같은 사랑」은 관계 안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신의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사랑이 생명보다 좋다고 말합니다.
시인이 생명을 하찮게 생각한다거나 죽음을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시에서는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광야의 갈증은 생존의 위협을 떠올리게 하고, 후반부에는 실제로 그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생명보다 좋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알고 그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그에게는 생존 자체보다 더 귀합니다. 시인은 생명을 잃어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유와 기쁨을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에서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이 발견은 곧 그의 입술을 움직입니다.
앞에서는 목마름을 느끼는 몸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술이 등장합니다. 5절에서는 두 손을 듭니다. 손을 드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의 기도와 찬양에서 나타나는 몸짓입니다. 시편 28:2에서도 시인은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를 향해 손을 들며 부르짖는다고 말합니다.
입술이 찬양하고, 두 손이 들립니다.
또한 5절의 「제 평생」은 4절의 「생명보다 좋기에」와 연결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생명보다 좋다고 고백하면서, 바로 그 생애를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사용하겠다고 말합니다. 생명보다 귀한 가치를 발견했다고 해서 살아 있는 시간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살아 있는 시간이 찬양으로 채워질 이유가 생깁니다.
조금 더 깊이
「거룩한 곳」을 반드시 후대의 예루살렘 성전 건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는 구체적인 건축물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이 함께하시기를 구하는 장소라는 의미입니다.
물도 없는 광야에서 풍성한 식탁을 노래하다
기름진 음식을 먹은 듯 내 영혼은 배부르고 내 입은 기쁨에 찬 입술로 당신을 찬양할 것입니다.시편 63:6 · 두루새김
시편은 여기서 다시 한번 예상 밖의 이미지로 움직입니다.
처음에는 물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기름지고 풍성한 음식을 먹은 사람의 만족을 말합니다. 시인은 실제로 음식을 먹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이 기름지고 풍성한 음식을 먹은 듯 배부를 것이라고 말합니다.
원문에서는 기름과 기름진 음식을 말하며, 두루새김은 이를 「기름지고 풍성한 음식」으로 옮겼습니다. 가난하고 초라한 식탁이 아니라 부족함이 없는 식사의 이미지입니다. 시편 36:8에서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풍성함을 누리고 그분의 기쁨의 강물을 마시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시편 63편은 그와 비슷한 만족을 광야의 한가운데서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2절의 목마름과 6절의 배부름이 서로 대응합니다. 2절에서는 영혼과 몸이 하나님을 갈망했습니다. 6절에서는 영혼이 배부르고 입술이 찬양합니다. 처음의 부족함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표현되었고, 이제 그 갈망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만족으로 표현됩니다.
그가 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실 어떤 물건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찾는 이유가 단순히 풍성한 식탁을 얻기 위해서였다면, 음식이 없는 현실은 여전히 절망의 근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자신이 가장 깊이 바라는 분으로 삼기 때문에, 그는 아직 메마른 땅에 있으면서도 풍성한 만족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현실의 굶주림이나 부족함을 가볍게 여기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실제로 물이 없으면 생명이 위태롭고, 음식이 없으면 몸이 약해집니다. 시인은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현실에서 부족한 것만으로 자신의 삶 전체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광야가 그의 몸에서 빼앗아 가는 것과, 하나님이 그의 영혼에 채워 주시는 것은 같은 저울로 잴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 시인은 갈망과 예배, 만족을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장면에서는 낮의 광야도, 거룩한 곳도, 풍성한 식탁도 사라집니다.
이제 그는 밤의 잠자리에 누워 있습니다.
밤의 파수 시간마다 하나님을 기억하다
잠자리에서 당신을 떠올릴 때면 밤새도록 당신을 되새깁니다.시편 63:7 · 두루새김
참으로 당신은 나를 도와주셨습니다. 당신의 날개 그늘에서 나는 기뻐 외치겠습니다.시편 63:8 · 두루새김
밤은 광야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낮에는 뜨거운 햇빛과 갈증이 사람을 지치게 합니다. 밤이 되면 기온이 내려가고, 어둠 속에 보이지 않는 위험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시인이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거나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밤이라는 시간에 하나님을 떠올린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떠올릴 때면」은 단순히 과거의 정보를 생각해 내는 일이 아닙니다. 앞에서 시인이 거룩한 곳에서 하나님을 바라본 경험을 말했던 것처럼, 자신이 알고 경험한 하나님을 현재의 삶 속에서 다시 생각하는 것입니다. 잠자리에 누운 사람이 밤의 여러 시간 동안 하나님을 되새기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도움을 상상하는 것에만 의존하지 않습니다. 이미 자신을 도와주신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기억은 기쁨으로 이어집니다.
광야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그늘은 귀합니다. 쉼과 보호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있다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그 그늘에서 하는 일이 단순히 쉬는 것이 아닙니다.
그늘은 위험을 피해 몸을 숨기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기뻐 외치는 소리가 나오는 장소가 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보호를 구할 뿐 아니라, 그 보호 안에서 하나님을 기뻐합니다. 이 기쁨은 상황을 모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하나님이 자신을 도와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따라서 밤에 하나님을 되새기는 일은 단순히 마음을 달래는 일이 아닙니다. 이미 경험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현재의 삶에 다시 가져오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여기서 하나님이 자신을 보호하신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다음 구절에서는 자신도 하나님을 향해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는 밤의 파수 시간을 말합니다. 고대에는 밤을 여러 파수 시간으로 나누어 경계했습니다. 시인은 그 표현을 사용하여 밤이 흘러가는 시간을 나타냅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밤이 지나는 동안」으로 풀어 옮겼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실제 파수꾼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고 볼 근거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바싹 붙어 뒤따르는 영혼
내 영혼은 당신께 바싹 붙어 따르고 당신의 오른손은 나를 붙듭니다.시편 63:9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시편 전체에서 가장 생생한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꼭 붙어」로 옮긴 히브리어(דָּבַק)는 달라붙다, 밀착하다, 굳게 결합하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단순히 멀리서 어떤 대상을 따라간다는 뜻보다 더 강한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63편의 이 표현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감정을 넘어 관계를 계속 이어 가려는 충실함을 드러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잠시 찾아가 도움을 얻고 떠나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분에게 꼭 붙어 뒤따르려는 사람입니다.
첫 부분에서는 시인이 하나님께 붙어 있습니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하나님이 시인을 붙들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꼭 붙어 뒤따르는 것은 시인의 응답입니다. 그러나 그가 안전하게 서 있도록 붙드는 힘은 하나님의 오른손에서 나옵니다.
시인이 하나님께 붙어 있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먼저 그를 놓지 않고 붙들어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시인의 영혼은 하나님을 목말라했습니다. 이제 그 영혼은 하나님께 꼭 붙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이제는 그분을 따라갑니다. 시인이 경험한 변화는 단순히 갈망이 사라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갈망이 관계를 계속 이어 가려는 움직임으로 발전했습니다.
하나님을 원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따라가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따뜻한 장면 직후에 시편은 갑자기 죽음의 위협을 이야기합니다.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과 땅의 가장 깊은 곳
그러나 나를 없애려고 내 목숨을 노리는 자들은 땅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갈 것입니다.시편 63:10 · 두루새김
그들은 칼에 넘겨져 여우들의 먹이가 될 것입니다.시편 63:11 · 두루새김
이 두 구절을 읽으면 시편의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지금까지 시인은 하나님을 목말라하고, 찬양하고, 기억하고, 그분께 붙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적들의 죽음을 말합니다. 사실 시인은 처음부터 안전한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앞에서 노래한 만족과 기쁨은 실제 위험이 존재하는 가운데 나온 고백이었습니다. 시인이 말하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위협이 없는 삶에서만 발견되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는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그 사랑을 생명보다 좋다고 고백합니다.
2절에서 하나님을 목말라하는 「제 영혼」과 10절에서 적들이 노리는 「제 목숨」은 히브리어로 같은 단어인 네페쉬입니다. 문맥에 따라 영혼과 목숨으로 달리 옮기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원문에서는 같은 단어가 반복됩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존재와 적들이 죽이려는 존재는 서로 다른 두 부분이 아닙니다.
바로 시인 자신입니다.
그의 생명이 하나님을 향해 갈망하고 있으며, 그 생명을 적들이 빼앗으려 합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단순히 자신의 마음이 평안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실제 생명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광야의 메마른 땅에서 시작한 시가 이제 땅의 가장 깊은 곳을 말합니다. 땅의 깊은 곳은 죽음과 무덤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만으로 죽은 이후의 세계에서 그들이 어떤 상태에 있게 될 것인지 구체적인 교리를 끌어내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이 말하는 핵심은 그를 없애려는 자들이 오히려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이어지는 칼과 여우들의 이미지는 그 파멸을 한층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시신이 제대로 매장되지 못하고 들짐승의 먹이가 되는 것은 수치스러운 죽음을 나타내는 이미지였습니다. 예레미야 7:33과 16:4에서도 죽은 몸이 새와 짐승의 먹이가 되는 모습은 심판의 참혹함을 드러냅니다. 본문은 앞으로 그들에게 닥칠 일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오늘날 독자에게 여전히 불편함을 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처참한 죽음을 기대하는 듯한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 불편함을 없애려고 본문의 폭력적인 이미지를 단순한 마음속 두려움이나 악한 생각에 대한 비유로 바꾸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실제로 시인의 생명을 노리는 사람들과 그들의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렇다고 이 장면을 모든 개인적인 적대 관계에 적용하여 상대방의 죽음을 바라야 한다는 교훈으로 삼아서도 안 됩니다.
시인은 적들을 향한 자신의 행동 계획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는 어떻게 보복할 것인지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누구를 공격하고 어떤 방식으로 적들을 무너뜨릴 것인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자신의 생존을 하나님의 보호에 맡긴 시인이 적들의 위협이 영원히 계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은 적들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우들」로 옮긴 낱말은 여우 또는 자칼 같은 동물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특히 죽은 몸을 먹는 동물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자칼로 이해하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또한 11절의 히브리어 문장은 누가 그들을 칼의 힘에 넘기는지, 동사의 목적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분명하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이 결과를 「그들은 칼에 죽고」로 옮겼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직접 칼을 휘두르신다거나 특정한 군대가 그들을 죽일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시인이 실제로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적들의 죽음을 보고하는 장면으로 읽을 근거도 없습니다.
목마른 입술에서 거짓된 입이 막히기까지
그러나 왕은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고 그분을 두고 맹세하는 이들은 모두 자랑할 것입니다. 참으로 거짓을 말하는 자들의 입은 막힐 것입니다.시편 63:12 · 두루새김
마지막 구절에서 시인은 「왕」을 이야기합니다.
시의 표제가 다윗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이 왕을 다윗 자신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구절이 왕을 위한 공동체의 찬양이라는 성격을 지닌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시인이 자기 자신을 삼인칭으로 가리키는지, 아니면 다른 왕을 위해 말하는지는 본문에서 밝히지 않습니다.
왕이 승리해서 기뻐한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왕이 하나님 안에서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앞에서 시인은 자신의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했고, 하나님의 날개 그늘에서 기뻐 외치겠다고 했습니다.
개인의 찬양이 왕의 기쁨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는 것은 그분을 증인으로 부르고 그분의 권위를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신명기 6:13과 10:20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며 그분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명령합니다. 어느 경우든 이 문장에서 기뻐하고 자랑하는 사람들은 거짓말하는 자들과 대조됩니다.
처음에는 물을 갈망하듯 하나님을 갈망하는 영혼과 몸이 있었습니다. 이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술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풍성한 음식으로 만족한 사람처럼 기뻐 노래하는 입술이 등장했습니다. 마지막에는 거짓말하는 사람들의 입이 막힙니다.
시인의 입은 하나님을 갈망하고 찬양합니다.
거짓말하는 사람들의 입은 마침내 막힙니다.
시인은 진실한 찬양과 거짓된 말을 대조합니다. 왕의 생존과 안정은 그와 함께 살아가는 백성의 삶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시의 마지막은 개인의 구원에 대한 기쁨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적 찬양으로 넓어지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은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으로 옮겼지만, 원문에서는 하나님을 직접 이름 붙이지 않고 대명사로 가리킵니다. 그 대명사는 문법적으로 앞의 왕을 가리킬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원문의 문장 연결만으로 모든 여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광야는 그대로인데 노래는 달라진다
시편 63편을 읽을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시인의 만족을 현실의 고통과 분리하는 일입니다. 그는 실제로 물 없는 광야에 있습니다.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하고 만족한다고 고백한 뒤에도 그 상황이 해결되었다는 설명은 없습니다.
시편 63편은 하나님을 믿으면 더 이상 물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현실의 생존 조건을 무시하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물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물만으로 인간의 모든 갈망이 채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시인은 여전히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가장 깊은 근거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시인을 도우시고, 보호하시고, 붙들어 주시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렇기에 시인은 광야에 있으면서도 만족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메마른 광야를 걷고 있습니다.
그가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언제 위험에서 벗어날지, 앞으로 무엇을 만나게 될지는 시편이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혼자 걷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 꼭 붙어 뒤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오른손이 그를 붙들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목마른 몸으로 하나님을 찾던 사람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붙드심 안에서 그분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그의 목마름이 사라졌다는 말은 없지만, 그가 누구를 따라가며 누구의 손에 붙들려 있는지는 분명합니다.
시편 63편은 물 없는 광야에서 바로 그 사실을 노래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