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80편

이 장의 자리 · 73–89편 · 셋째 권

포도나무의 울타리를 왜 허무셨습니까

누군가 정성껏 나무를 심었습니다. 땅을 마련하고, 돌을 걷어 내고, 뿌리가 깊이 내리도록 돌보았습니다. 나무는 자라서 산들을 덮고, 가지를 멀리 뻗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나무를 보호하던 울타리가 사라졌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열매를 따 가고, 멧돼지가 뿌리와 줄기를 헤집으며, 들짐승들이 가지를 뜯어 먹습니다. 마침내 나무는 불에 타고 잘립니다.

이때 나무를 돌보던 사람이 다른 곳으로 떠나 버렸다면, 우리는 그에게 왜 나무를 방치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 80편의 질문은 훨씬 충격적입니다.

「왜 그 나무를 둘러싼 담들을 허무셔서, 길을 지나는 사람마다 그 열매를 따 가게 하셨습니까?」(13절) 시인은 포도나무의 울타리를 허문 사람이 바로 그 나무를 심으신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시편 80편의 가장 깊은 고통입니다.

백성은 단순히 적들에게 공격당했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을 구원하고 돌보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자신들을 보호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이 시편에는 세 번 반복되는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십시오. 주님의 얼굴빛을 비추어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가 구원받을 것입니다.」(4절) 이 기도는 시편의 처음과 중간, 마지막에 나타납니다. 하지만 시인은 단순히 같은 말을 되풀이하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포도나무의 이야기로 다시 펼쳐 보이고, 마침내 하나님 자신에게 돌아와 달라고 간구합니다.

시편 80편은 무너진 백성이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지를 묻는 노래입니다. 그 대답은 먼저 자신들의 힘을 회복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들을 심고 기르셨던 하나님의 얼굴빛이 다시 비치는 데 있습니다.

앞선 시편 79편은 예루살렘이 황폐해진 상황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습니다. 시편 80편도 공동체의 재앙을 배경으로 하지만, 이번에는 폐허의 모습을 길게 묘사하는 대신 목자와 포도나무의 이미지를 통해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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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목자여, 다시 빛을 발해 주십시오

시편 80:1–4 본문 →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요셉을 양 떼처럼 이끄시는 분, 커룹들 위에 앉아 계시는 분, 환히 빛을 비추어 주십시오.시편 80:2 · 두루새김

시편은 하나님을 세 가지 방식으로 부르며 시작합니다.

처음 두 표현은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목자와 양 떼의 관계로 나타냅니다. 목자는 양 떼를 먹이고, 보호하고, 안전한 길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스라엘」이라고 부른 뒤 곧바로 「요셉」이라는 이름을 사용합니다.

요셉은 야곱의 아들이며, 그의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이스라엘의 두 지파를 이루었습니다(창세기 48:5). 후대에 요셉이라는 이름은 에브라임을 중심으로 한 북쪽 이스라엘과도 연결되어 사용됩니다. 따라서 「요셉을 양 떼처럼 이끄시는 분」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에 그치지 않고, 요셉의 후손들이 중심이 된 공동체를 특별히 떠올리게 합니다.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당신의 힘을 깨우시고 우리를 구하러 와 주십시오.시편 80:3 · 두루새김

왜 이 세 지파가 함께 등장할까요? 민수기 2:18–24를 보면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진을 칠 때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이 성막의 서쪽에 함께 배치되었습니다. 이동할 때에도 이들은 하나의 진영으로 움직였습니다(민수기 10:22–24).

따라서 시인이 이 세 지파를 언급한 것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계시고 그들을 인도하셨던 기억을 불러오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한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요셉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2절의 「요셉」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베냐민 역시 요셉과 같은 어머니 라헬에게서 태어난 형제입니다(창세기 35:24).

시인은 하나님을 목자라고 부르면서 동시에 「커룹들 위에 앉아 계신 분」이라고 부릅니다. 커룹은 언약궤 위에 놓인 날개 달린 존재들의 형상과 연결됩니다. 출애굽기 25:18–22에서는 하나님이 언약궤 위 두 커룹 사이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을 단순히 초원에서 양을 돌보는 목자로만 그리지 않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목자이면서, 거룩한 곳에서 왕처럼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께 시인은 무엇을 요청합니까? 「빛을 비추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미 지니고 계신 능력과 영광을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나타내 달라는 간구입니다.

「주님의 힘을 깨워 주십시오」라는 다음 구절도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능력을 잃으시거나 잠들어 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백성의 처지에서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표현하는 기도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과거에 목자로서 자신들을 이끄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구하러 와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 기도가 첫 번째 후렴으로 모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되돌려 주십시오. 당신의 얼굴을 빛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구원받을 것입니다.시편 80:4 · 두루새김

이 구절에는 시편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표현 두 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다시 일으켜 주십시오」이고, 다른 하나는 「얼굴빛을 비추어 주십시오」입니다.

「다시 일으켜 주십시오」로 옮긴 히브리어 하시베누(⁨שׁוּב⁩)는 돌아오다는 뜻을 지닌 동사의 사역형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우리가 돌아가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하나님께 우리를 돌아오게 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문맥에 따라 포로나 패배한 백성을 이전 상태로 회복시키는 뜻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의미가 함께 떠오를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다시 일으켜 주십시오」라고 옮겨 회복을 구하는 뜻을 드러냅니다. 이 시편은 그 두 측면을 명확히 분리하지 않습니다. 백성이 회복되는 일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일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얼굴빛을 비추어 주십시오」라는 표현은 민수기 6:24–26의 제사장 축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얼굴을 백성에게 비추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평안을 주시기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얼굴빛이 비친다는 것은 단순히 눈부신 빛이 나타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백성을 호의적으로 바라보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모습을 나타내는 관계의 언어입니다.

따라서 이 후렴은 단순히 전쟁에서 이기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시 자신들을 은혜로운 얼굴로 바라보신다면, 자신들의 무너진 삶도 회복될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지금 백성이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세 지파가 언급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시편의 역사적 배경을 북왕국 멸망이나 특정 전쟁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지만, 시편이 언제 어떤 사건을 계기로 불렸는지는 본문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빵도 눈물이고 마실 물도 눈물인 백성

시편 80:5–8 본문 →

여호와야훼, 만군의 하나님, 언제까지 당신 백성의 기도를 향해 노여움의 연기를 뿜으시렵니까?시편 80:5 · 두루새김

하나님의 얼굴빛이 비치기를 구했던 시인은 곧바로 그 얼굴빛이 아니라 분노의 연기를 이야기합니다.

연기는 불이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면서도 시야를 가립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분노가 마치 연기를 내뿜는 불처럼 자신들의 기도를 향하고 있다고 묘사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적들의 악행에 분노하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이 드리는 기도 앞에서도 분노가 계속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호소합니다.

기도하는데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찾는데도 그분의 호의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언제까지」라는 질문의 무게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마저 막힌 것처럼 느껴지는 현실을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다음 구절에서는 그 고통이 먹고 마시는 일에까지 스며듭니다.

그들에게 눈물의 빵을 먹이셨고 눈물을 한 샬리시만큼 마시게 하셨습니다.시편 80:6 · 두루새김

빵과 마실 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양식입니다. 시인은 백성이 자주 울고 있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눈물을 음식처럼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앞에서 하나님을 목자로 부른 것과 강렬하게 대조됩니다. 목자는 양 떼를 먹이고 마시게 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의 목자가 백성에게 주시는 것처럼 보이는 음식은 눈물뿐입니다.

「샬리시」라는 분량을 나타내는 말은 눈물이 마치 정해진 그릇으로 재어 주는 음료처럼 묘사되었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고통이 잠깐의 감정이 아니라 날마다 반복되는 삶의 일부가 되었다는 표현입니다. 백성은 슬플 때만 우는 것이 아닙니다. 먹고 마시는 일상 전체가 눈물로 채워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 고통은 공동체 바깥에서도 계속됩니다.

우리를 이웃들의 다툼거리로 삼으시고 우리 원수들은 우리를 비웃습니다.시편 80:7 · 두루새김

여기서 시인의 고통은 단순히 물질적인 부족이나 전쟁의 피해에 그치지 않습니다. 백성은 주변 사람들 앞에서 수치스러운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 직접 호소합니다. 「주님께서는 저희를 놓고 이웃들이 다투게 하셨고」라는 말은 하나님이 현재의 재앙을 허용하셨다는 사실에 시인이 괴로워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불만을 감추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기도를 멈추지도 않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우리를 되돌려 주십시오. 당신의 얼굴을 빛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구원받을 것입니다.시편 80:8 · 두루새김

첫 번째 후렴에서는 단순히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번에는 「만군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군대를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고백이 더 분명해집니다. 그러나 요청의 핵심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얼굴빛이 비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시편은 이제 그 얼굴빛이 왜 다시 비쳐야 하는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어떤 역사가 있었는지를 포도나무의 이야기로 설명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샬리시(⁨שָׁלִישׁ⁩)는 이 문맥에서 양을 재는 것과 관계된 표현입니다. 이사야 40:12에서도 물이나 먼지를 재는 표현과 함께 나타납니다. 말의 뿌리를 살펴보면 삼분의 일이라는 뜻을 생각할 수 있지만, 시편 80:6에서 정확히 얼마만큼의 눈물을 뜻하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특정한 용량이나 세 배라는 숫자를 단정하기보다, 눈물이 마치 정해진 그릇으로 재어 주는 음료처럼 묘사되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옮겨 심으신 포도나무

시편 80:9–12 본문 →

이집트에서 포도나무 한 그루를 옮겨 오시고 민족들을 몰아내어 그 나무를 심으셨습니다.시편 80:9 · 두루새김

이 구절에서 시인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하나의 긴 비유로 바꿉니다.

이스라엘은 포도나무입니다.

그런데 이 포도나무는 처음부터 지금의 땅에서 자라던 나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포도나무를 다른 곳에서 가져와 새로운 땅에 심는 사람처럼 묘사되십니다. 이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땅에 정착시키신 출애굽과 정착의 역사를 나타냅니다.

이 비유에서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포도나무의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하나님이 옮겨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다른 민족들을 몰아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심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땅을 골라 뿌리내린 나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여 새로운 땅에 심으셨습니다.

포도나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하나님이 먼저 자리를 비워 주셨습니다. 그런 다음 뿌리를 내리게 하셨고, 포도나무는 땅을 가득 채웠습니다(10절). 그러나 그 성장은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자리에서, 그분이 뿌리를 내리게 하셨기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장면에는 출애굽의 구원과 가나안 정착 이후의 번성이 하나의 흐름으로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포도나무의 성장을 과장된 이미지로 그립니다.

그늘은 산들을 덮고 가지들은 하나님의 백향목들을 덮었습니다.시편 80:11 · 두루새김

실제 포도나무가 거대한 백향목보다 높이 자란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장과 번영이 얼마나 크게 여겨졌는지를 시적 과장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 나무는 가지를 바다까지, 어린순을 강까지 뻗었습니다.시편 80:12 · 두루새김

여기서 바다는 지중해, 강은 유프라테스강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구절을 특정 시대의 정확한 영토 경계를 기록한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시편은 포도나무의 무성한 가지와 어린순을 통해 하나님이 백성에게 주신 번영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인은 한때의 아름다운 모습을 충분히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은 깊이 뿌리내렸습니다.

땅을 가득 채웠습니다.

산을 덮고 먼 곳까지 가지와 어린순을 뻗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에서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조금 더 깊이

11절의 「하나님의 백향목들」은 하나님의 백향목들로 읽을 수도 있고, 하나님의 이름을 크기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이해하여 거대한 백향목들이라고 풀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 뜻은 포도나무의 가지가 놀라울 정도로 무성하게 퍼졌다는 것입니다. 12절의 지리적 범위는 이스라엘의 땅에 관한 약속과 왕국의 통치를 묘사하는 다른 본문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창세기 15:18에는 유프라테스강이 약속의 경계로 등장하며, 시편 72:8에서도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끝까지 이르는 통치를 노래합니다. 신약의 요한복음 15:1–5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참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표현한 구약의 전통과 주제적으로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80편의 포도나무가 본래 예수님 개인을 직접 예언한 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시편의 본래 문맥에서 포도나무는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옮겨 심으신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왜 당신이 울타리를 허무셨습니까?

시편 80:13–14 본문 →

어찌하여 그 담들을 허무셨습니까? 길을 지나는 이마다 그 열매를 따 갑니다.시편 80:13 · 두루새김

이 질문은 포도나무 비유의 중심입니다.

시인은 포도나무가 시들었다고 먼저 말하지 않습니다. 나무가 원래 약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 나무를 지키던 담들이 허물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담을 허문 분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포도나무를 옮겨 심으셨고, 자랄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이 그 나무를 보호하던 담들을 허무셨습니다.

시인은 바로 이 모순을 하나님께 묻습니다. 왜 직접 심으신 나무를 보호하지 않으십니까? 왜 그렇게 정성껏 돌보셨던 나무를 이제는 아무나 해칠 수 있도록 두셨습니까?

시편 80편은 백성의 구체적인 죄를 나열하지 않습니다. 울타리가 무너졌다는 사실에 집중하며, 하나님께 왜 그렇게 하셨는지 묻습니다.

시인은 이유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대신 질문합니다.

그 질문 뒤에는 보호받지 못하는 포도나무의 처참한 모습이 이어집니다.

숲에서 나온 멧돼지가 그 나무를 갉아먹고 들짐승이 뜯어 먹습니다.시편 80:14 · 두루새김

한때 산을 덮고 바다와 강까지 가지와 어린순을 뻗었던 포도나무가 이제는 짐승들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멧돼지와 들짐승은 포도나무를 파괴하는 세력을 나타내는 이미지입니다. 시편의 역사적 문맥에서는 이스라엘을 침략하고 약탈한 외적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멧돼지가 정확히 어느 민족을 가리키는지, 들짐승들이 각각 어떤 나라를 상징하는지는 본문이 알려 주지 않습니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포도나무가 더 이상 자신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나무는 저항할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심으신 포도나무의 번영도 하나님의 돌보심에서 왔고, 지금 그 나무가 보호받지 못하는 상태 역시 그분이 보호를 거두셨다는 사실과 연결됩니다.

시인은 이 모순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후렴에서 사용했던 말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표현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포도나무의 울타리가 허물어진 이유에 관해서는 구약의 다른 본문들이 배경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5:1–7에서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포도원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은 그 포도원을 정성껏 돌보셨지만, 기대했던 좋은 열매 대신 나쁜 열매가 맺혔고, 그 결과 울타리를 걷어 내고 포도원이 짓밟히도록 두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5장에서는 포도원이 왜 심판받는지가 상세히 설명됩니다. 하나님은 정의를 기대하셨지만 폭력이 나타났고, 공의를 기대하셨지만 부르짖음이 들렸다고 말씀하십니다(이사야 5:7). 그러므로 이사야 5장을 통해 시편의 배경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이 시편이 모든 재앙의 이유를 직접 설명했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 27:2–6에서는 하나님께서 포도원을 지키시고 물을 주시며 이스라엘이 다시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시편 80편은 포도나무를 돌보아 달라고 간구하지만, 이사야 27장은 하나님이 다시 포도원을 돌보시는 모습을 보다 적극적으로 묘사합니다. 두 본문은 그 나무의 회복이 결국 하나님의 돌보심에 달려 있다는 주제를 공유합니다.

저희를 돌아오게 해 달라는 기도에서, 하나님께 돌아와 달라는 기도로

시편 80:15–17 본문 →

만군의 하나님, 부디 돌아와 주십시오. 하늘에서 내려다보시고 살펴 주십시오. 이 포도나무를 돌보아 주십시오.시편 80:15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시편 전체의 방향을 바꾸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앞선 두 후렴에서 백성은 하나님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부디 돌아와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원문에서는 두 요청 모두 돌아오다는 뜻을 지닌 동사를 쓰지만, 그 형태에 차이가 있습니다. 후렴의 하시베누는 우리를 돌아오게 하거나 회복시켜 달라는 사역형이고, 15절의 요청은 하나님께 직접 돌아오시라고 요청하는 표현입니다.

처음에는 백성이 회복되기를 구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돌아오시기를 구합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기도처럼 보이지만, 시편 안에서는 하나의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백성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 회복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다시 자신들을 돌보아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는 일이 구원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돌아오심을 실제로 장소를 옮기시는 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지금 자신들을 돌보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에서, 다시 은혜로운 관심과 구원 행동을 나타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살펴 주십시오」라는 말도 같은 뜻입니다.

시인은 포도나무를 하나님께 다시 보여 드립니다. 마치 오랫동안 방치되어 죽어 가는 나무를 가리키며, 그 나무를 심은 사람에게 다시 살펴 달라고 간청하는 것 같습니다.

이 포도나무는 남의 나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직접 이집트에서 옮겨 오신 나무입니다. 그분이 자리를 비워 주시고 뿌리를 내리게 하신 나무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 나무가 누구의 것인지 다시 강조합니다.

당신의 오른손이 심으신 그 밑동을, 당신을 위해 굳세게 하신 그 아들을.시편 80:16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시편에서 해석이 가장 어려운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문맥상 「밑동」이 하나님이 심으신 포도나무를 가리킨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포도나무 이야기 한가운데서 아들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아들」은 포도나무에서 나온 가지나 새순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린 이스라엘로, 또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나 대표 인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느냐에 따라 18절의 「사람의 아들」로 이어지는 흐름도 달리 보입니다.

어느 읽기를 따르든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포도나무든, 백성이든, 그들을 대표하는 인물이든, 모두 하나님이 직접 심으시고 굳세게 하신 존재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이 먼저 일하셨다는 사실을 구원의 근거로 내세웁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은 포도나무의 처참한 현실을 드러냅니다.

그 나무는 불에 타고 잘려 나갔습니다. 당신의 얼굴이 꾸짖으시니 그들은 멸망합니다.시편 80:17 · 두루새김

포도나무는 단순히 열매를 빼앗긴 정도가 아닙니다. 앞에서는 멧돼지와 들짐승들이 나무를 훼손했습니다. 이제는 나무 자체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이 파괴를 하나님이 「노하신 얼굴로 꾸짖으시니」라는 말과 연결합니다. 후렴에서 백성은 하나님의 얼굴빛이 비치기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노하신 얼굴에서 나오는 꾸짖음입니다.

같은 하나님의 얼굴이지만, 백성이 경험하는 관계는 정반대입니다.

두루새김은 멸망하는 이들을 「주님의 백성」으로 밝혀 옮겼습니다. 시인이 포도나무의 파괴를 하나님의 꾸짖음과 연결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포도나무를 다시 회복시키실까요? 시인은 마지막에 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조금 더 깊이

「밑동」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כַּנָּה⁩)는 매우 드문 형태입니다. 포도나무의 줄기나 밑동, 심어진 나무의 기초 부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정확한 의미에는 불확실성이 남습니다. 「아들」을 가지나 새순으로 읽는 것은 식물의 비유가 계속되고 있다고 보는 읽기입니다. 이스라엘로 읽는 근거는 출애굽기 4:22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신의 맏아들이라고 부르셨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이집트에서 옮겨 심은 포도나무와 하나님이 굳세게 하신 아들은 모두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두 이미지일 수 있습니다. 지도자나 대표 인물로 읽는 근거는 18절의 「주님의 오른편에 있는 사람」과 「사람의 아들」입니다. 칠십인역은 16절에서 이미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인물의 이미지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다만 이러한 차이만으로 히브리어 본문의 아들이 처음부터 특정한 인물을 가리킨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17절에서 원문은 멸망한다는 동사의 복수 주어가 정확히 누구인지 명시하지 않습니다. 불타고 잘린 포도나무가 상징하는 백성을 가리킬 가능성이 자연스럽지만, 앞서 등장한 파괴자들과 연결하여 이해하려는 여지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백성을 가리키는 읽기를 따르지만, 원문에서 마지막 동사의 대상이 완전히 확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포도나무에서 사람으로 — 당신 오른손의 사람

시편 80:18–19 본문 →

당신의 오른편에 있는 사람 위에, 당신을 위해 굳세게 하신 사람의 아들 위에 당신의 손이 그 위에 있게 해 주십시오.시편 80:18 · 두루새김

이 구절에서 시인의 언어가 크게 달라집니다.

지금까지는 포도나무를 돌보아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손이 어떤 사람 위에 있기를 구합니다. 「주님의 오른편에 있는 사람」과 「사람의 아들」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을 가리킨다기보다, 하나님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세우신 사람을 나란히 묘사하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본문에는 이름이 없습니다. 크게 두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 공동체를 사람에 빗댄 표현일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이스라엘은 포도나무였고, 16절에서는 하나님이 굳세게 하신 아들로도 표현되었습니다. 이 읽기를 따르면 시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전체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둘째, 백성을 대표하는 왕이나 지도자를 가리키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시편 78편이 다윗을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도록 선택된 목자로 묘사한 점을 고려하면, 왕을 통해 공동체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기도로 읽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시편 80편은 다윗이나 특정 왕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이 원래부터 어떤 한 왕이나 미래의 메시아만을 가리켰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시편에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정확히 누구인지 밝히는 것보다, 그가 하나님의 손으로 세워지고 굳세게 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16절에서는 하나님의 오른손이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18절에서는 하나님의 손을 그분의 오른편에 있는 사람 위에 얹어 주시기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과거에 백성을 세우셨다면, 이제 그 손이 다시 백성을 회복시키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8절의 요청 뒤에는 중요한 약속이 따라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에게서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우리를 살려 주십시오. 우리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시편 80:19 · 두루새김

그런데 이 약속의 순서가 중요합니다.

먼저 하나님이 행동하십니다.

그런 다음 백성이 하나님께로부터 물러서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자신들이 먼저 충분히 신실한 사람들이 될 테니 그 대가로 구원해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을 살려 달라고 구합니다. 그리고 살아난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겠다고 약속합니다. 여기서 「살려 주십시오」는 실제 생명과 공동체의 회복을 구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 백성으로 하여금 새롭게 신실한 삶을 살게 한다는 순서가 드러납니다.

시편은 공동체가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포도나무의 울타리를 복구할 수 없습니다. 불에 탄 나무를 자기 힘으로 되살릴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다시 그들 위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백성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로부터 물러서지 않겠습니다」라는 약속에는 앞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신실하게 살아가겠다는 응답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백성의 책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시인은 마지막으로 후렴을 반복합니다.

조금 더 깊이

「사람의 아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도 그 자체로 반드시 특별한 메시아 칭호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에서는 일반적으로 인간 또는 사람이라는 뜻으로도 널리 사용됩니다.

세 번째 후렴 — 구원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시편 80:20 본문 →

여호와야훼, 만군의 하나님, 우리를 되돌려 주십시오. 당신의 얼굴을 빛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구원받을 것입니다.시편 80:20 · 두루새김

시편은 처음에 드렸던 기도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이제 그 기도를 듣는 독자의 마음은 처음과 같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백성이 왜 다시 일으켜져야 하는지 충분히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포도나무의 역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을 부르는 말도 더욱 풍성해집니다.

첫 번째 후렴에서는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두 번째 후렴에서는 「만군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마지막 후렴에서는 「여호와야훼, 만군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부르는 말이 달라지면서 반복되는 기도가 점점 더 간절한 고백으로 발전하는 인상을 줍니다. 중요한 것은 후렴이 세 번 반복되는 동안 그 요청 자체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시인은 군사력을 회복시켜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는 것만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얼굴빛을 비추어 달라고 합니다.

그것이 구원의 출발점입니다.

15절에서는 하나님께 돌아와 달라고 했습니다. 19절에서는 백성이 하나님께로부터 물러서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20절에서는 다시 자신들을 일으켜 달라고 구합니다. 이 세 표현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백성은 하나님께로부터 물러서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그 약속을 실현할 수 있도록 백성을 다시 일으켜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가 회복되는 일에서 하나님은 단순히 기다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관계를 다시 세우시는 분입니다.

조금 더 깊이

5절에서도 이미 「여호와야훼, 만군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사용되었으므로, 시편 전체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처음으로 점차 밝혀지는 구조라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시 그 나무를 바라보아 주십시오

시편 80:1–20 본문 →

시편 80편에서 포도나무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닙니다. 시인은 그 사실에 자신의 기도를 걸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인이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자신들의 무죄나 공로가 아닙니다. 그들을 처음 심으시고 돌보셨던 하나님 자신의 행동입니다.

하나님이 백성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그들이 무엇을 하든 안전하다는 보증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선택은 백성이 무너진 자리에서도 하나님께 자비를 구할 수 있는 관계의 근거가 됩니다. 왜 울타리를 허무셨느냐는 질문은 마지막까지 직접적인 설명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질문 때문에 기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심으신 백성이 무너졌을 때, 그들의 소망은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시 돌보아 주시는 데 있습니다.

시편 80편의 마지막에는 포도나무가 회복되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불에 탄 줄기가 다시 자라는 모습도 없고, 허물어진 담들이 다시 세워졌다는 말도 없습니다. 시인은 자신들의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그저 같은 기도를 세 번째로 드립니다.

우리는 그 포도나무가 어디에서 왔는지 압니다.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옮겨 오신 나무입니다. 그 나무가 얼마나 아름답게 자랐는지도 압니다. 산들을 덮고, 가지를 바다까지, 어린순을 강까지 뻗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어떤 상태인지도 압니다. 담들이 허물어지고, 열매를 빼앗기고, 짐승들에게 뜯기며, 불에 타고 잘렸습니다.

시인은 그 나무를 가리키며 하나님께 말합니다. 「만군의 하나님, 부디 돌아와 주십시오.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살펴 주십시오. 이 포도나무를 돌보아 주십시오.」

그는 하나님께 새로운 포도나무를 심어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지금 죽어 가는 이 나무를 다시 돌보아 달라고 합니다. 그 나무를 처음 심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직 돌아오셨다는 소식은 없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자신들을 돌보아 주실 수 있는 분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눈물의 빵을 먹고, 허물어진 담 너머에서 원수들의 비웃음을 듣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노래합니다. 「여호와야훼, 만군의 하나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십시오. 주님의 얼굴빛을 비추어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가 구원받을 것입니다.」

포도나무는 아직 불에 탄 채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를 심으신 분을 향한 기도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