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79편
이 장의 자리 · 73–89편 · 셋째 권
성전이 무너진 자리에서 부르는 이름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처로 삼으신 성전이 적들의 손에 더럽혀졌습니다.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었고,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들의 시신이 거리와 들판에 버려졌습니다. 그들을 묻어 줄 사람조차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여호와야훼, 언제까지입니까? 영원히 노하시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는 쉽게 풀리지 않는 모순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두셨을까요? 성전이 하나님의 거처라면, 그곳이 더럽혀졌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런데 시편 79편을 읽으면 더욱 뜻밖의 사실을 발견합니다.
시인은 자기 백성이 아무 잘못도 없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상들의 죄를 기억하여 자신들에게 책임을 묻지 말아 달라고 구하고, 자신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면서도 적들이 저지른 폭력을 하나님께 고발합니다.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는 일이 적들의 잔혹함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시편 79편은 죄를 지은 공동체가 부당한 폭력까지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자비를 동시에 붙드는 기도입니다.
앞선 시편 78편은 하나님이 실로를 버리시고 시온을 선택하셨다는 이야기로 끝났습니다(78:60, 68). 그런데 바로 다음 시편에서는 그 시온의 성전이 더럽혀지고 예루살렘이 폐허가 됩니다. 현재의 시편 배열에서 이 두 장면은 날카로운 긴장을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그곳이 무슨 일이 있어도 파괴되지 않는다는 보증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폐허 앞에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너진 성전과 죽어 간 백성을 가리키며, 그것들이 여전히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반복되는 「주님의」라는 말이 시편 전체를 이끄는 중요한 실마리입니다.
폐허가 된 것은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지다
아삽의 시입니다. 하나님, 민족들이 당신의 땅에 들어와 당신의 거룩한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을 돌무더기로 만들었습니다.시편 79:1 · 두루새김
시인은 인사도 없이 참혹한 현실을 하나님 앞에 내놓습니다.
시인은 침략당한 땅을 「우리의 땅」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는 「주님의 땅」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당신의 기업」 또는 「당신의 소유」를 뜻합니다.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에게 물려받을 몫으로 주어졌다는 표현은 구약에 여러 차례 등장하지만, 여기서는 그 땅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시인은 적들이 이스라엘의 땅을 침략했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땅에 들어왔다고 고발합니다. 이어서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땅도 하나님의 것이고, 성전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기 위한 말만은 아닙니다. 시인은 자기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근거로 지금 일어난 사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땅과 성전에 자신의 이름을 두셨다면, 그곳에서 일어난 참혹한 일은 하나님과 아무 관계 없는 사건일 수 없습니다.
그들은 당신 종들의 주검을 하늘의 새들에게 먹이로 주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의 살을 땅의 짐승들에게 내주고,시편 79:2 · 두루새김
예루살렘 둘레에 그 피를 물처럼 쏟았습니다. 묻어 줄 이도 없었습니다.시편 79:3 · 두루새김
시인은 성전의 파괴에서 사람들의 죽음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건물이 무너진 것만이 아닙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죽은 사람을 묻는 일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시신이 그대로 버려져 짐승들의 먹이가 되는 것은 죽음 자체에 더하여 심각한 수치와 모욕을 나타냈습니다.
신명기 28:26에서는 시신이 하늘의 새와 땅의 짐승에게 먹이가 되는 일이 언약을 거역했을 때 닥칠 재앙 가운데 하나로 언급됩니다. 예레미야 7:33에서도 백성의 시신이 새와 짐승의 먹이가 되고 그것들을 쫓아낼 사람도 없으리라고 경고합니다. 시편 79편은 그 두려운 경고가 현실이 된 것처럼 보이는 장면을 노래합니다.
시인은 죽은 사람들을 「주님의 종들」과 「주님께 충실한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주님께 충실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충실하거나 그분과의 관계에서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시인은 이들이 모든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들이었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을 단순히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들의 집단으로만 묘사하지도 않습니다.
이 참혹한 죽음 속에는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 전체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만으로, 이 사건에서 벌어진 모든 죽음과 잔혹함을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시인은 죄에 대한 심판이라는 문제와 개별 사람들에게 가해진 폭력의 문제를 구별하지 않은 채 하나로 뭉개지 않습니다.
물은 흔하게 흐르고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3절에서는 사람의 피가 물처럼 쏟아졌습니다. 생명의 귀중함이 무시되고, 사람의 피가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진 상황을 보여 줍니다.
더구나 묻어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장례 절차가 부족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을 애도하고 존중할 수 있는 공동체의 질서마저 무너졌음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모욕거리가 되었고 우리를 둘러싼 이들에게는 조롱과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시편 79:4 · 두루새김
앞에서는 죽은 사람들의 수치가 묘사되었고, 이제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수치가 드러납니다. 살아남았다고 해서 고통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단순히 자신들의 국가적 자존심이 상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백성과 성전이 이렇게 되었을 때, 그 사건이 하나님 자신에 대한 조롱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뒤에서 적들이 던지는 질문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 질문을 다루기 전에 시인은 먼저 하나님께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조금 더 깊이
예루살렘의 성전이 더럽혀지고 도시가 폐허가 되었다는 묘사는 바빌로니아가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성전을 불태운 기원전 587/586년경의 사건을 강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열왕기하 25:8–10과 예레미야 52:12–14에는 그 파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은 침략한 나라나 왕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빌로니아의 침공이 가장 자연스러운 역사적 배경이라고 볼 수는 있어도, 이 시편이 정확히 언제 누구에 의해 처음 작성되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표제의 「아삽의 시입니다」도 반드시 다윗 시대의 아삽이 이 파괴 사건을 직접 목격해 기록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역대상 25:1–2에는 아삽과 그의 자손이 성전 음악 전통과 연결되어 나타나며, 시편의 표제는 그러한 예배 전통과의 관계를 나타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시편 79편은 예레미야애가의 기도와도 가까운 자리에 있습니다. 예레미야애가 2:7에서는 주께서 자신의 제단을 버리시고 성소를 싫어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같은 책 5:19에서는 하나님께서 영원히 다스리신다고 고백하며, 5:21에서는 자신들을 돌이켜 달라고 간구합니다. 성소의 파괴와 하나님의 통치는 같은 일이 아닙니다.
적들의 폭력 앞에서 왜 하나님의 분노를 먼저 묻는가
여호와야훼여, 언제까지입니까? 영원히 노하시렵니까? 당신의 질투는 언제까지 불처럼 타오르겠습니까?시편 79:5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시편의 방향을 크게 바꿉니다.
지금까지는 적들이 한 일이 나열되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갑자기 하나님의 분노를 이야기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은 시인이 예루살렘의 재앙을 외적의 침략이라는 정치적 사건으로만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들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주님의 질투」라는 표현은 앞선 시편과 연결됩니다. 시편 78:58에서는 이스라엘이 산당과 우상으로 하나님을 노하게 하고 질투하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질투는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는 감정과 다릅니다. 자신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 다른 신들에게 마음을 돌리는 일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반응을 나타냅니다(출애굽기 34:14; 신명기 4:24).
따라서 시인은 예루살렘의 비극을 바라보며 자신들이 하나님께 충실하지 못했던 일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심판이 정당했으니 받아들이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의 핵심은 하나님의 분노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분노가 끝없이 이어질 것인지 묻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영원히」라는 말은 단순한 시간 표현을 넘어 절망의 깊이를 드러냅니다. 시인에게는 지금의 재앙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분노가 자신의 백성을 향한 마지막 말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호소합니다.
당신을 알지 못하는 민족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나라들 위에 당신의 분노를 쏟아 주십시오.시편 79:6 · 두루새김
그들이 야곱을 먹어 치우고 그가 살던 곳을 폐허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시편 79:7 · 두루새김
시인은 자신들에게 닥쳤던 분노가 침략한 민족들에게 향하기를 구합니다.
시인은 자기 백성의 죄는 용서해 달라고 하면서 다른 민족의 죄는 심판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이중 기준이 아닐까요? 이 긴장을 가볍게 없애서는 안 됩니다. 시편은 분명 자기 공동체를 위해 자비를 구하면서 적들에게는 심판을 요청합니다. 고통당한 공동체의 시각에서 나온 기도이기 때문에 그 감정과 요청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다른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심판해 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며, 야곱의 백성을 먹어 치우고 그 백성이 살던 곳을 폐허로 만들었다고 고발합니다.
특히 「야곱의 백성을 먹어 치우고」라는 표현은 극단적인 폭력의 이미지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상대를 삼켜 없애는 포식자의 행동에 비유한 것입니다. 시인은 자기 백성에게 닥친 심판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심판이 적들에게 끝없이 폭력을 행사할 권리를 주지는 않는다고 호소합니다.
이스라엘의 죄가 실제라는 사실과 침략자들의 잔혹함이 실제라는 사실은 동시에 성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한 백성이라고 해서 다른 이들에게 당하는 모든 폭력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 점을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제 자기 백성의 죄를 직접 하나님 앞에 내놓습니다.
조금 더 깊이
6–7절은 예레미야 10:25와 표현이 매우 가깝습니다. 그곳에서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민족들에게 분노를 쏟아 달라고 간구하며, 그들이 야곱을 삼키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했다고 말합니다. 두 본문이 어느 방향으로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하나님께서 야곱의 백성을 짓밟은 민족들을 심판해 주시기를 구하는 공통된 기도 언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죄가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 기도
조상들의 죄를 기억하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당신의 자비가 서둘러 우리를 맞아 주게 해 주십시오. 우리가 몹시 약해졌기 때문입니다.시편 79:8 · 두루새김
이 구절에서 시인은 민족들의 죄를 고발하던 자리에서 자기 공동체의 죄를 고백하는 자리로 이동합니다.
「조상들의 죄」라는 표현에는 번역상의 여지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아보노트 리쇼님(עָוֺן)은 앞서 있었던 죄들, 또는 이전 사람들의 죄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조상들의 죄를 가리킨다는 읽기가 자연스럽지만, 과거에 저질러진 죄 전반을 강조하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시인은 자신들의 현재 고통과 과거의 죄가 관계있다는 가능성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표현을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이 과거 세대의 죄 때문에 아무런 구별 없이 유죄 판결을 받아야 한다는 일반 원칙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에스겔 18:20에서는 아들이 아버지의 죄를 책임지지 않으며, 아버지도 아들의 죄를 책임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시편 79편은 개별 사람의 책임을 정하는 법적 원칙을 제시하는 본문이 아닙니다. 공동체가 오랫동안 하나님께 충실하지 못하여 겪게 된 재앙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시인은 자신들이 충분히 잘못을 뉘우쳤기 때문에 용서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약해졌습니다. 더 이상 스스로를 지탱할 힘이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자비가 「서둘러」 자신들을 맞이하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5절에서는 하나님의 분노가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지 물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자비가 늦지 않게 찾아오기를 구합니다. 시간을 둘러싼 기도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분노는 언제 끝납니까? 자비는 언제 오십니까?
시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무죄를 입증하는 일이 아닙니다. 멸망의 경계에 있는 백성이 하나님의 자비를 다시 경험하는 일입니다.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우리 구원의 하나님.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건져 주시고 우리 죄를 덮어 주십시오.시편 79:9 · 두루새김
이 기도에는 세 가지 요청이 담겨 있습니다. 처음 두 요청은 외적인 재앙에서의 구원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마지막 요청은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다룹니다.
여기서 두루새김이 「용서해 주십시오」로 옮긴 히브리어 카페르(כָּפַר)는 죄를 속하거나 제거하여 관계를 회복하는 의미를 지닌 동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죄를 보지 못하시도록 감춘다는 뜻으로 축소할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해 생긴 문제를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기를 구하는 말입니다. 이 구절에는 속죄를 위한 구체적인 제사나 의식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시인은 다만 하나님 자신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1절에서 성전은 더럽혀졌습니다. 3절에서는 사람의 피가 땅에 쏟아졌습니다. 죄와 폭력으로 모든 것이 오염된 듯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구합니다. 외적인 폐허를 회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무너진 도시의 구원과 하나님 앞에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일을 함께 요청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기도의 근거로 「주님의 이름」을 두 번 언급합니다. 자신들의 공로나 자격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하나님이 체면을 지키시기 위해 백성을 구원하셔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이 자신을 드러내시고 백성과 관계를 맺으시는 방식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구원해 달라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까지 자신을 알려 주신 그 성품과 관계에 근거하여 행동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께 충실했다는 것을 근거로 내세울 수 없는 공동체가 하나님의 한결같으심에 기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요청은 다음 절에서 매우 날카로운 문제로 이어집니다.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는 조롱
어찌하여 민족들이 「그들의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하고 말하겠습니까? 쏟아진 당신 종들의 피에 대한 복수가 민족들 가운데, 우리 눈앞에서 드러나게 해 주십시오.시편 79:10 · 두루새김
이 구절에서 처음으로 적들의 목소리가 직접 들립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성전이 더럽혀졌는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느냐는 조롱입니다. 적들은 눈에 보이는 결과를 근거로 하나님을 평가합니다. 성전이 무너졌다면 그곳에 계신다고 믿었던 하나님도 무력하신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자신들이 이런 말을 듣는 것이 불쾌하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 질문이 하나님의 이름에 관한 문제라는 사실을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앞서 시인은 「주님의 이름에 영광이 되도록」 자신들을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이제 그 이름이 민족들 가운데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패배했다는 사실이 곧 하나님의 실패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앞선 시편 78편은 하나님 자신이 실로의 거처를 버리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시편 79편의 질문은 더욱 복잡해집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심판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외적들은 그 심판을 자신들의 신이나 군사력이 이스라엘의 하나님보다 강하다는 증거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그 조롱을 끝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해 달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종들의 피를 흘린 자들에게 갚으시는 일이 여러 민족 가운데 드러나게 해 달라고 합니다.
여기서 「갚으시는 일」(נְקָמָה)은 원문에서 복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시인은 적들에게도 하나님의 공정한 판단이 임하기를 구합니다. 더 나아가 그 판단을 자신들의 눈으로 보기를 원합니다. 시인은 죽은 사람들의 피가 아무런 응답 없이 잊혀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국가적 승리의 요구보다 더 구체적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이었습니다. 그들의 피가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들을 묻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그 피가 하나님 앞에서 무의미하게 취급되지 않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기도를 모든 형태의 보복을 정당화하는 명령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자신들이 직접 적들에게 복수하겠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갚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차이는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기도에 담긴 강한 보복의 열망까지 없애지는 않습니다. 시인은 실제로 적들이 벌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 요청은 전쟁과 학살을 경험한 사람들이 정의를 갈망하는 자리에서 나왔습니다. 우리는 그 고통의 무게를 인정하면서도, 이 기도를 오늘의 개인이나 공동체가 자기 분노를 곧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언할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시편의 기도는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심판만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을 기억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죽은 사람들의 피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신음으로
갇힌 이의 신음이 당신 앞에 이르게 해 주십시오. 당신의 크신 팔로 죽기로 정해진 이들을 살려 두십시오.시편 79:11 · 두루새김
이 구절에서 시선이 다시 바뀝니다.
앞에서는 이미 죽은 사람들의 피가 이야기되었습니다. 이제는 아직 살아 있지만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신음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갇혀 있습니다.
성전은 더럽혀졌고, 도시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던 중심 장소가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시인은 갇힌 사람들의 신음이 하나님 앞에 이를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수 없는 처지일 수 있습니다. 자유롭게 예배할 수도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죽음의 위협과 신음만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2:23–25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고된 노동 때문에 신음하며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신음을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시편 79편에서도 고통받는 백성의 신음이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살려 두십시오」는 실제 생명을 지켜 달라고 구하는 기도입니다. 시인이 바라는 구원은 추상적인 종교적 위안이 아닙니다. 죽음의 위협에서 사람들을 살아남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그리고 그 근거는 「주님의 크신 팔의 힘」입니다. 하나님의 팔은 구약에서 출애굽의 구원과 자주 연결됩니다. 출애굽기 6:6에서 하나님은 펼친 팔과 큰 심판으로 백성을 되찾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시인은 같은 하나님의 능력을 구합니다. 과거에 이집트의 속박에서 백성을 이끌어 내신 하나님께서, 지금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살려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시편의 첫 부분에서는 수많은 죽음이 묘사되었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들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구원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잃어버린 생명을 애도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아직 구할 수 있는 생명을 하나님 앞에 가져옵니다.
심판과 복수를 구하던 기도가 구체적인 생명의 보호를 구하는 기도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말 그대로 옮기면 죽음에 속한 이들이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죽을 운명에 놓인 사람들, 죽음이 가까운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앞의 갇힌 사람들과 나란히 나오므로 포로가 되거나 붙잡혀 갇힌 채 죽음의 위협을 받는 사람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법적인 사형 판결이 내려진 죄수들이라는 뜻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일곱 배로 돌려 달라는 기도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주님, 우리 이웃들이 당신께 퍼부은 모욕을 일곱 배로 그들의 품에 돌려주십시오.시편 79:12 · 두루새김
이 구절은 현대 독자가 가장 불편하게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단순히 공정한 심판을 구하는 수준을 넘어, 일곱 배로 돌려 달라고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를 읽을 때에는 먼저 시인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도시가 파괴되고, 성전이 더럽혀지고,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사건을 겪었습니다. 시신이 묻히지 못했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은 조롱을 당했습니다.
시인은 바로 그 상황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사소한 모욕에 대한 지나친 분노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시인의 요청을 아무런 긴장 없이 이상적인 기도라고 설명해서도 안 됩니다. 그는 분명 상대가 한 일에 대해 강하게 갚아 주시기를 원합니다.
여기서 「일곱 배」는 정확한 피해액이나 처벌량을 계산하는 법률 공식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일곱이라는 수는 충만함이나 철저함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 문맥에서도 적들의 모욕을 철저히 갚아 달라고 요청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징성을 강조하면서 시인이 실제로 매우 강한 심판을 원한다는 사실까지 흐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그들의 품에」라는 표현은 가슴이나 품을 가리킵니다. 상대가 다른 이에게 가했던 모욕이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게 해 달라는 이미지입니다. 시인은 자신들이 받은 수치를 상대에게 되돌려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런데 모욕의 대상은 「주님께 퍼부은 모욕」입니다. 시인은 자신들이 모욕당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모욕당하신 일과 연결합니다. 1절에서 하나님의 땅이 침범당했고, 성전이 더럽혀졌습니다. 10절에서는 민족들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했습니다. 이제 그 모욕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구합니다.
시인은 자기 공동체가 받은 피해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시는 문제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둘을 같은 일로 보는 것은 신중하게 읽어야 합니다. 모든 공동체가 자신에게 가해진 비판이나 공격을 곧바로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시편에서는 실제 성전의 파괴와 백성의 학살, 하나님을 향한 직접적인 조롱이 함께 제시됩니다.
시인의 기도는 그러한 구체적인 역사적 폭력과 관계 속에서 나왔습니다. 이 기도가 오늘의 독자에게 주는 중요한 통찰은 자신의 분노를 하나님께 가져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긴장을 그대로 남겨 두는 것이 본문을 존중하는 읽기입니다.
그리고 시편은 그 강렬한 요청 뒤에 뜻밖의 마지막 고백을 놓습니다.
성전도 목장도 무너졌는데 자신들을 양 떼라고 부르다
당신의 백성, 당신의 풀밭에서 기르시는 양 떼인 우리는 영원히 당신께 감사하고 대대로 당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전하겠습니다.시편 79:13 · 두루새김
시편은 감사로 끝납니다.
하나님이 이미 적들을 심판하셨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갇힌 사람들이 풀려났다는 말도 없습니다. 예루살렘이 다시 세워졌다거나 성전이 회복되었다는 소식도 없습니다.
시인은 여전히 폐허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 영원히 감사하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이미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감사의 보고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앞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겠다는 약속을 드리고 있습니다.
처음에 시인은 하나님의 땅이 침범당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자신들이 「주님의 백성」이라고 고백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 충실한 사람들의 시신이 짐승들에게 먹이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자신들을 「주님께서 기르시는 양 떼」라고 부릅니다.
양 떼는 목자의 돌봄 없이는 안전하게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양 떼는 안전한 목장에서 쉬고 있지 않습니다. 많은 이들이 죽었고, 나머지 사람들도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시인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양 떼라고 부릅니다.
눈에 보이는 보호가 무너진 상황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낙관이 아닙니다. 현실은 참혹합니다. 그러나 그 참혹함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마지막 판단이 되도록 두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시편 78편은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행적을 숨기지 않고 들려주겠다는 선언으로 시작했습니다(78:4–7). 그런데 시편 79편은 그 이야기를 전하는 일이 끊어질 수도 있는 재앙 가운데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공동체의 중심이 무너졌습니다. 다음 세대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도 불확실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다시 「대대로」 이야기하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배 노래를 계속 부르겠다는 말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공동체가 살아남아야 다음 세대에게 이야기를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의 찬양 약속에는 미래의 생존과 회복을 바라는 마음도 담겨 있습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구원을 기대하면서, 그 구원을 노래할 미래 세대의 목소리까지 바라보는 것입니다.
폐허 가운데 남은 양 떼의 노래
시편 79편은 독자에게 깔끔한 결말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자기 공동체가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외부의 모든 폭력이 정당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외부에서 심각한 폭력을 당했다는 이유로 자기 공동체의 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시인은 두 현실을 모두 하나님 앞에 내놓고, 그 사이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성전은 무너졌지만 기도는 멈추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예배의 중심이 무너졌다고 해서 하나님 자신이 사라지신 것은 아닙니다. 시편 79편은 그 사실을 선언문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저 무너진 성전 앞에서 계속 하나님께 말합니다.
주님의 땅, 주님의 성전, 주님의 종들, 주님의 이름, 주님의 백성, 주님께서 기르시는 양 떼.
이것은 단순히 소유 관계를 강조하는 언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셨는지를 끝까지 붙드는 언어입니다.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어 있습니다. 성전은 더럽혀졌고, 성벽 주변에는 묻히지 못한 사람들이 남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갇혀 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주변 민족의 조롱을 듣습니다.
그 가운데 한 무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숨기지 않습니다. 자신들에게 가해진 폭력도 숨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자비와 정의를 함께 구합니다.
그리고 아직 구원의 결과를 보지 못한 채, 자신들을 하나님의 양 떼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이름으로 행하신 구원을 다음 세대에게 들려주겠다고 약속합니다.
폐허 가운데서 시작된 기도는, 아직 들리지 않는 후손들의 찬양을 바라보며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