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풀어 읽기 · 15장
이 장의 자리 · 12–15장 · 새로운 삶
예수님께서 받아들이신 사람들
로마서 15장에는 뜻밖의 방향 전환이 있습니다. 바울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하는지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자신의 선교 활동과 여행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예루살렘에 가져갈 헌금 이야기까지 길게 이어집니다. 교회를 향한 권면은 끝났고, 이제 편지를 마무리하기 위한 개인적인 소식이 시작된 것일까요?
그런데 자세히 읽으면 두 이야기는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신자들에게 서로 받아들이라고 권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자신이 이방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제물로 드리기 위해 일한다고 말하고, 마지막에는 이방 교회들이 모은 헌금을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받아들이신 일이, 서로 다른 사람들의 환대와 나눔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강한 사람은 누구를 위해 강한가
바울은 먼저 자신을 포함하여 말합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함을 짊어져야 하며, 자신을 기쁘게 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로마서 15:1 · 두루새김
여기서 말하는 힘은 몸의 힘이나 사회적 권력이 아닙니다. 앞 장에서 바울은 음식과 특정한 날을 지키는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폭넓게 이해하지만, 어떤 사람은 양심의 문제 때문에 여전히 특정한 행동을 삼갑니다.
바울은 자신을 자유를 폭넓게 이해하는 사람들 가운데 놓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자유를 더 적극적으로 행사하라고 권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약함을 짊어지라고 합니다. 「짊어져야」(βαστάζω)는 짐을 들어 옮기거나 부담을 떠맡는다는 뜻의 동사로, 상대방의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참아 주라는 말보다 적극적입니다. 다른 사람의 약함 때문에 생기는 부담을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사람은 무엇이든 할 수 있기 때문에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자유를 다른 사람을 위해 제한할 수도 있기 때문에 강한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약한 사람의 생각을 언제나 옳다고 인정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2절에는 분명한 목적이 붙어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이웃에게 유익을 주고 그를 세워 주기 위해 이웃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로마서 15:2 · 두루새김
이웃을 기쁘게 한다는 것이 무조건 상대방의 요구에 맞추는 일이라면, 공동체는 누구의 요구를 따라야 할지 결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웃에게 유익을 주고 그를 세워 주기 위해」라고 범위를 정합니다. 상대방의 기분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신앙 안에서 자라도록 돕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왜 자유를 가진 사람이 이런 부담을 져야 할까요? 바울은 곧바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된 대로였습니다. 「주님을 모욕하는 사람들의 모욕이 나에게 쏟아졌습니다.」로마서 15:3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시편 69:9에서 왔습니다. 시편에서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모욕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고난받는 사람의 그 탄식을 예수님의 삶에서 새롭게 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편안함을 추구하시는 대신 하나님께 충실하셨고, 그 때문에 모욕을 감당하셨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희생을 단순한 도덕적 모범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이익을 포기하신 훌륭한 사람이라는 차원을 넘어,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삶이 무엇인지 결정적으로 보여주신 분입니다. 바울은 공동체가 살아갈 방식을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에 연결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셨습니다.
이전에 기록된 것은 모두 우리를 가르치려고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주는 참고 견디는 힘과 격려를 통해 우리가 희망을 갖게 하려는 것입니다.로마서 15:4 · 두루새김
바울은 방금 시편을 인용했습니다. 오래전에 기록된 한 사람의 탄식이 어떻게 오늘의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지 설명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충실한 사람들이 겪었던 고난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언함으로써, 지금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참고 견디는 힘과 격려를 줍니다. 그 힘과 격려가 향하는 희망은 막연히 상황이 좋아지리라는 기대가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신실하시다는 사실을 붙드는 데서 나오는 기대입니다.
바울은 방금 「성경이 주는 참고 견디는 힘과 격려」를 말했는데, 바로 다음에는 하나님을 「참고 견디는 힘과 격려를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이 그런 힘을 주는 까닭은 그런 하나님을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공동체가 의지해야 하는 분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명령을 이어가기보다 기도합니다.
참고 견디는 힘과 격려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 서로 한마음을 품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한마음 한목소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며 아버지이신 분께 영광을 돌리게 되기를 빕니다.로마서 15:5–6 · 두루새김
「한마음을 품게」 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똑같은 의견을 갖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논의 자체가 서로 다른 양심과 판단을 가진 사람들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바라는 일치는 의견을 똑같이 맞추는 것보다 서로를 대하는 마음의 일치에 가깝고, 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을 지키는 데 몰두한다면, 그 공동체에서는 여러 목소리가 서로 경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하신 일을 중심에 놓으면, 서로 다른 사람들도 한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꿈꾸는 공동체의 일치는 모두가 똑같아지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받아들이셨는가
이제 바울은 앞선 권면을 하나의 문장으로 모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처럼 서로 받아들이십시오.로마서 15:7 · 두루새김
바울은 서로를 받아들여야 예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그들을 받아들이셨기 때문에 서로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명령을 설명하면서 개인적인 관계를 넘어,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의 역사 전체로 시야를 넓힙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참되심을 드러내시려고 할례받은 사람들을 섬기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굳게 세우시고,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그분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된 대로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의 이름을 노래하겠습니다.」로마서 15:8–9 · 두루새김
먼저 예수님께서는 할례받은 사람들, 곧 이스라엘을 섬기는 분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굳게 세우시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참되심」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실제로 이루시는 신실하심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에는 처음부터 모든 민족에게 복이 미칠 것이라는 전망이 들어 있었습니다(창세기 12:3).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을 이루시는 일과 이방 민족에게 구원이 이르는 일은 서로 경쟁하는 두 계획이 아닙니다.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드러나는 하나의 구원 역사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이스라엘에게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굳게 세우시고」라고 말하고, 이방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그분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방 사람들이 약속과 무관하다거나 이스라엘에게 자비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에 신실하신 것과 자비를 베푸시는 것이 예수님 안에서 함께 나타난다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폐기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일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울타리 안에 머물지도 않습니다.
네 번의 인용이 만들어 내는 한 장면
바울은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구약성경을 네 번 연속으로 인용합니다. 각각 다른 시대와 상황에서 나온 말씀이지만, 차례대로 읽으면 찬양의 범위가 넓어지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첫 번째는 9절의 「나는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주님을 찬양하고」라는 다윗의 노래입니다(사무엘하 22:50, 시편 18:49). 본래 다윗은 자신을 원수들에게서 건지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감사의 노래가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도 울려 퍼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민족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입니다.
성경은 또 말합니다. 「이방 사람들아, 그분의 백성과 함께 기뻐하라.」로마서 15:10 · 두루새김
모세의 노래인 신명기 32:43에서 온 이 말씀에서, 이방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찬양을 듣는 데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기뻐하라는 초대를 받습니다. 신명기 32장은 이스라엘의 불순종, 하나님의 심판과 자비를 다루는 노래이고, 그 결말에 등장하는 민족들의 기쁨은 하나님의 구원과 정의가 드러나는 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민족아, 주님을 찬양하라. 모든 백성아, 그분을 찬양하라.」로마서 15:11 · 두루새김
시편 117:1에서 찬양의 초대는 모든 민족과 모든 백성에게 직접 주어집니다. 시편 117편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신실하심을 찬양의 이유로 제시합니다.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민족의 찬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이사야도 이렇게 말합니다. 「이새의 뿌리, 곧 일어나 이방 사람들을 다스리실 분이 나타나실 것이다. 이방 사람들은 그분께 희망을 둘 것이다.」로마서 15:12 · 두루새김
이사야 11:10이 속한 11장은 다윗 왕조가 무너진 듯한 상황에서도 이새의 집안에서 새로운 통치자가 나타날 것이라는 희망을 제시합니다. 그가 정의롭게 다스리는 가운데 민족들이 그를 찾게 됩니다.
다윗의 집안에서 오시는 분이 이스라엘만의 희망으로 머물지 않으십니다. 이방 사람들의 희망이 되십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다음에는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기뻐합니다. 이어서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초대받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민족들이 다윗의 후손에게 희망을 둡니다.
각 본문의 역사적 의미가 모두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은 서로 다른 성경의 증언을 하나로 엮어, 민족들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성경의 오랜 희망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가 서로를 받아들이는 일은 교회의 분위기를 좋게 만드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래전부터 이루고자 하신 일을 그들의 공동체 안에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여전히 서로를 업신여기거나 판단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을 하나로 묶어 주신 예수님의 일을 삶에서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바울은 이 긴 인용을 마친 뒤 다시 기도합니다.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믿는 가운데 온갖 기쁨과 평화로 여러분을 채워 주시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여러분에게 희망이 넘치기를 빕니다.로마서 15:13 · 두루새김
5절에서는 「참고 견디는 힘과 격려를 주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이제는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함께 말하는 기쁨과 평화는, 하나님의 나라가 먹고 마시는 문제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에 있다는 앞 장의 말씀(14:17)과도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가져오시는 일치는 억지로 갈등을 억누르는 데서 나오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사람들을 희망으로 채우시고, 그 희망 안에서 서로를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하시는 데서 나옵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에서 바울이 사용하는 표현은 그리스어 구약성경의 문구를 반영하며, 특히 이방 사람들이 그 통치자에게 희망을 둔다는 결말이 바울의 논의에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뜻밖의 제물
14절에 이르면 바울은 직접적인 권면을 마무리하고 자신이 왜 이 편지를 썼는지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시작이 뜻밖입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나도 여러분에 대해 이렇게 확신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선함으로 가득하고 온갖 지식을 충분히 갖추어, 서로 타이를 수도 있습니다.로마서 15:14 · 두루새김
그렇다면 왜 이렇게 길고 대담한 편지를 썼을까요? 15절에서 바울은 새로운 지식을 처음부터 가르치기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기억하도록 썼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일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은혜와 관련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은혜」는 바울 개인이 구원받았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이방 민족을 위한 사도로 부름받은 직분도 가리킵니다(로마서 1:5).
그런데 자신의 사도직을 설명하는 16절에서 바울은 독특한 비유를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방 사람들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며 제사장처럼 섬기도록 그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방 사람들이 성령으로 거룩해져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제물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로마서 15:16 · 두루새김
「제사장처럼 섬기도록」은 일반적인 봉사만이 아니라 제사와 관련된 섬김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일을 제사장이 제물을 드리는 일에 빗댑니다.
그렇다면 그 제물은 무엇일까요? 두루새김은 이방 사람들 자신이 제물이라는 뜻으로 옮겼습니다. 구약의 제사에서는 하나님께 드릴 제물이 정결하고 흠이 없어야 했는데, 바울의 비유에서는 이스라엘 바깥에 있던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제물이 됩니다.
그들이 스스로 거룩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들이 「성령으로 거룩해져」 제물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방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성령으로 변화되는 일이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이 하나님께 나아와 찬양한다는 약속이, 이제 그 민족들 자신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다만 이 구절에는 해석상의 갈림이 있습니다. 「이방 사람들의 제물」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표현(헤 프로스포라 톤 에트논(προσφορά))은 문법적으로 두 가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방 사람들 자신이 제물이라는 뜻으로, 바울의 복음 선포와 성령께서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일을 강조합니다. 다른 하나는 이방 사람들이 바치는 제물이라는 뜻으로, 이방 교회들의 헌금을 예배로 드리는 제물로 이해하며 곧이어 등장하는 예루살렘 헌금과 긴밀하게 연결합니다. 어느 쪽을 택하든, 이방 사람들의 참여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와 연결된다는 점은 공통적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자신이 하는 일을 자랑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자랑에는 분명한 제한이 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 이루신 일 외에는 감히 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이방 사람들이 순종하게 하시려고 말과 행동으로,로마서 15:18 · 두루새김
복음을 통해 일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고, 바울은 그 일꾼입니다. 19절에 등장하는 표징과 놀라운 일도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의 능력으로 이방 사람들을 믿음의 순종으로 이끄셨다는 설명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 두루 다니며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마쳤다고 말합니다.
나는 이처럼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직 전해지지 않은 곳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힘썼습니다. 다른 사람이 놓은 기초 위에 건물을 세우지 않으려는 것입니다.로마서 15:20 · 두루새김
그가 일했던 지역마다 신앙 공동체가 세워지고 스스로 성장할 바탕이 마련되었다면, 바울은 다른 지역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일해야 한다는 명령이 아니라, 바울이 자신의 특별한 부르심을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오히려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려는 것입니다. 「그분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한 사람들이 볼 것이고, 듣지 못한 사람들이 깨달을 것이다.」로마서 15:21 · 두루새김
이사야 52:15는 하나님의 종이 겪는 고난과 높아짐을 다루는 이사야 52:13–53:12에 속하며, 그 종을 통해 민족들과 왕들이 이전에 알지 못했던 일을 보게 되는 장면입니다. 이사야가 바울의 여행 경로를 예언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이 민족들에게 알려지는 일을 이사야가 바라보았던 하나님의 역사와 연결하여 이해합니다. 앞서 이방 사람들이 다윗의 후손에게 희망을 두리라는 이사야 11장을 인용했던 바울은, 이제 자신이 그 희망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에게 선교는 새로운 종교를 널리 퍼뜨리는 사업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이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이르도록 섬기는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일루리곤은 아드리아해 동쪽, 발칸반도 서부의 로마 시대 지역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동쪽 지중해 지역을 중심으로 넓은 지역에 복음을 전했다고 설명하는 것이며, 이 표현만으로 그가 일루리곤의 안쪽까지 직접 들어가 활동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또한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마쳤습니다」라는 말이 그 지역의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들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페인으로 가고 싶은 사람은 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가
이제 바울은 자신의 여행 계획을 이야기합니다.
오랫동안 로마에 가고 싶었지만, 자신이 맡은 선교 사역 때문에 여러 차례 방문이 막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 지역들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개척 사역이 마무리되었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목적지를 바라봅니다.
스페인입니다.
스페인으로 갈 때 여러분에게 들르려고 합니다. 지나는 길에 여러분을 만나 먼저 얼마간 함께 지내는 기쁨을 누린 뒤, 여러분의 도움을 받아 그곳으로 가기를 바랍니다.로마서 15:24 · 두루새김
바울에게 스페인은 아직 복음을 전해야 할 새로운 서쪽 지역입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 교회를 지나가는 길에 잠깐 들를 곳으로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원문에서 여행자를 떠나보낸다는 표현에는 당시 여행 준비와 필요한 지원이 포함되기도 했기에, 두루새김은 「여러분의 도움을 받아」(προπέμπω)라고 옮겼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신자들이 자신의 다음 사역에 함께 참여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는 먼저 그들과 「함께 지내는 기쁨」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1:11–12에서도 바울은 영적인 은사를 나누고 싶다고 말한 뒤, 서로의 믿음으로 함께 격려받고 싶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인 동시에 공동체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스페인보다 먼저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성도들을 섬기러 예루살렘으로 갑니다.로마서 15:25 · 두루새김
지리적으로 보면 이상한 움직임입니다.
스페인으로 가려면 서쪽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바울은 동쪽의 예루살렘으로 향하겠다고 합니다.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의 신자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헌금을 모았기 때문입니다. 이 헌금은 고린도전서 16:1–4와 고린도후서 8–9장에도 등장합니다. 갑자기 등장한 곁가지 이야기가 아니라, 바울이 여러 교회와 함께 오랫동안 준비해 온 사역입니다.
그들은 기꺼이 그렇게 하기로 했고, 사실 그 성도들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이방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들의 영적인 복을 함께 나누어 받았다면, 생활에 필요한 것으로 그 성도들을 섬길 의무도 있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5:27 · 두루새김
자발적인 선물인데 어떻게 빚을 갚는 일이 될 수 있을까요? 이방 신자들에게 전해진 복음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무관하게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과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역사 안에서 이방 사람들도 그 은혜를 함께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영적인 복을 함께 나누어 받았다면」, 이제 자신들이 가진 「생활에 필요한 것」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빚이라고 부르지만, 마지못해 지불하는 세금 같은 의무가 아닙니다. 이미 받은 은혜를 깨닫기 때문에 기꺼이 감당하는 책임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은혜의 근원을 소유할 수 없지만, 자신이 받은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는 있습니다.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은 서로 다른 역사와 관습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한 공동체가 되었다고 말하기는 쉬울지 몰라도, 실제 삶에서 그 일치를 드러내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데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의 신자들이 다른 지역, 다른 문화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을 위해 자신들의 소유를 내어놓고 있습니다. 서로를 받아들이라는 권면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을 마치고 그들에게 이 열매를 확실히 전달한 뒤에, 여러분을 거쳐 스페인으로 떠나겠습니다.로마서 15:28 · 두루새김
열매는 나무와 무관하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뿌리와 가지에서 생명이 자라 마침내 맺히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이 헌금은 여러 교회에서 복음이 맺은 열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방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제 그 사랑을 생활에 필요한 것을 나누는 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로마서 12:1에서 바울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살아 있는 제물로 드리라고 권했습니다. 이제 그 예배는 가난한 성도들에게 전달되는 실제 헌금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고백은 예배의 말에만 머물지 않고, 서로의 어려움을 함께 감당하는 손길로 이어집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에서는 이미 복음을 받은 공동체들이 서로 하나임을 드러냅니다. 스페인으로 향하려는 길에서는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그 은혜에 참여할 기회가 열리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어느 한쪽을 위해 다른 쪽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도가 교회에 도움을 청하다
바울은 자신의 계획을 충분히 설명한 뒤, 로마의 신자들에게 간절한 부탁을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힘입어, 또 성령의 사랑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나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에 나와 함께 힘써 싸워 주십시오.로마서 15:30 · 두루새김
「함께 힘써 싸워 주십시오」는 함께 힘을 다해 싸우거나 겨룬다는 의미를 담은 강한 표현입니다. 바울은 기도를 형식적인 인사나 가벼운 응원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감당해야 할 어려움에 로마의 신자들이 기도로 함께 참여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첫째, 유대에 있는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구출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어 예루살렘에 가는 일이 위험할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둘째, 예루살렘을 위한 자신의 섬김을 성도들이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방 교회들은 기꺼이 참여했지만, 그 헌금을 받을 예루살렘의 성도들도 기쁘게 받아들일지 바울은 걱정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정확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 사이의 긴장, 바울의 사도직과 이방 선교를 둘러싼 논쟁을 생각하면, 헌금이 아무런 문제 없이 받아들여지리라고 당연하게 여길 수 없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선물을 기쁘게 받는 것은, 그것을 보내 온 이방 교회들과의 관계를 인정하고 그들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정확히 어떤 반응을 예상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특별히 기도를 요청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일이 그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15장 전체를 관통하는 연결이 선명해집니다.
7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처럼 서로 받아들이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16절에서는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제물이 되는 일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31절에서는 자신이 전하는 섬김을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 장에서 말하는 받아들임은 단순히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이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실제 관계가 되는 일입니다.
이제 바울은 세 번째 기도를 요청합니다.
그리하여 내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쁜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가서 함께 쉴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로마서 15:32 · 두루새김
앞에서는 로마의 신자들이 자신을 스페인으로 보내 주기를 기대했는데, 여기서는 그들과 함께 쉬고 싶다고 합니다. 바울에게 공동체는 사역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만이 아닙니다. 그 자신도 그 안에서 사랑을 받고, 격려를 얻고, 쉼을 누리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또 바울은 자신의 선교 계획을 하나님의 뜻과 같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계획은 분명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 로마에 가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통해 예수님께서 많은 일을 이루셨다고 확신하면서도,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안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계획합니다. 그리고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아멘.로마서 15:33 · 두루새김
그는 5절에서 「참고 견디는 힘과 격려를 주시는 하나님」을, 13절에서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을 부릅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참고 견디는 힘이 필요합니다. 민족의 경계를 넘어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희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서로를 받아들이고 함께 교제하기 위해서는 평화가 필요합니다.
바울은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하나의 일
처음에 서로 다른 이야기처럼 보였던 권면과 여행 계획은 하나의 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회복할 뿐 아니라, 서로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 사이에도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냅니다. 그 관계는 서로의 차이를 지우는 데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유대인은 여전히 유대인이고, 이방인은 여전히 이방인이며,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이 같은 판단을 하게 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함께 경험했기 때문에 서로를 받아들이고, 서로의 필요를 돌보고, 함께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자기희생을 무조건 아름답게만 보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바울은 강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부담을 짊어지라고 하면서도, 그 자신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과 쉼을 구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공동체는 누군가가 끝없이 주기만 하고 다른 누군가는 받기만 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들로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로마서 15장의 끝에서 바울은 아직 로마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스페인으로 가는 일도 여전히 그의 계획 속에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로마와 스페인 사이에는 먼 길이 놓여 있고, 언어도 문화도 역사도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먼 길을 하나의 복음이 이어 주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는 먼저 예루살렘으로 가서 사랑의 열매를 전하려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과 능력을 자랑하는 대신, 함께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며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로마의 공동체에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라는 마지막 축복을 보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