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서 풀어 읽기 · 11장

이 장의 자리 · 1–23장 · 지혜의 시작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시는 하나님

사람이 잘되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 재산을 많이 모은 사람, 남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을 보면 우리는 그가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가난하고 힘이 없으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사람에게서는 특별한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눈앞의 형편을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그 형편만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람의 삶을 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남을 평가하는 일에도, 자신의 성공을 확신하는 일에도, 미래를 단정하는 일에도 신중해야 합니다.

이 가르침은 장의 마지막에서 뜻밖의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치던 지혜자가 이제는 아무나 집에 들이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겉모습으로 사람을 배척하지 않는 것과 사람의 속임수를 분별하는 것은 어떻게 함께할 수 있을까요?

읽는 시간 19분소단락 711장 본문 읽기 →

작은 벌과 왕관을 잃은 군주 — 사람의 가치는 어디에서 드러나는가

집회서 11:1–6 본문 →

첫 구절은 지혜가 가져오는 놀라운 변화를 말합니다.

지혜는 낮은 처지에 있는 사람의 머리를 높였고, 그를 높은 관리들 가운데 앉힐 것이다.집회서 11:1 · 두루새김

여기서 눈여겨볼 표현은 「머리를 높였고」라는 말입니다. 높은 지위에 오른다는 뜻도 있지만, 머리를 들지 못하던 사람이 존엄과 명예를 회복한다는 모습도 담고 있습니다.

지혜자가 말하는 지혜는 단순히 출세를 위한 능력이 아닙니다.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고, 인간의 판단과 하나님의 일하심 사이의 차이를 깨닫게 하는 능력입니다.

날아다니는 것들 가운데 벌은 작지만, 벌이 만드는 꿀은 단것들 가운데 으뜸이다.집회서 11:3 · 두루새김

벌의 몸집과 벌이 만들어 내는 꿀의 가치는 서로 비례하지 않습니다. 겉모습의 크기로 판단한다면 벌은 하찮아 보이지만, 벌이 만들어 내는 것을 알게 되면 평가가 달라집니다.

바로 앞의 2절에서 지혜자는 외모 때문에 사람을 칭찬하거나 역겨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벌의 비유는 그 명령의 이유를 설명합니다. 사람을 제대로 알려면 그가 어떻게 보이는지만 아니라, 그에게서 실제로 무엇이 나오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사무엘상 16:7에서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가르치신 원칙과 통합니다. 사무엘은 왕으로 세울 사람을 찾으면서 눈에 보이는 외모와 키를 보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본문은 서로 다른 상황을 다루지만, 인간의 눈에 드러나는 인상만으로 그 사람을 충분히 판단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만납니다.

네가 입은 옷을 자랑하지 말고, 영광을 누리는 날에 스스로를 높이지 마라. 주께서 하시는 일은 놀랍고, 그분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들 가운데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집회서 11:4 · 두루새김

지혜자는 부와 명예가 덧없기 때문에 자랑하지 말라고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지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노력과 판단, 다른 사람의 도움과 여러 기회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준 모든 원인을 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앞으로 어떻게 일하실지도 알지 못합니다.

5–6절은 이 감추어진 가능성을 역사 속에서 형편이 뒤바뀌는 모습으로 보여 줍니다. 왕들은 땅바닥에 앉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왕관을 씁니다. 권력 있는 사람들이 심한 모욕을 당하고, 이름난 사람들이 동료들의 손에 넘겨집니다.

사무엘상 2:7–8에서 한나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유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고 노래했습니다. 집회서 11장 역시 그러한 뒤바뀜을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권한과 연결하지만, 특히 그 사실이 우리의 일상적인 판단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에 관심을 둡니다.

왕관을 썼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가치를 확정해서도 안 되고, 땅바닥에 앉았다는 이유로 그의 미래를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먼저 듣고, 그다음에 판단하라

집회서 11:7–10 본문 →

앞 단락이 사람의 겉모습에 대한 판단을 경계했다면, 이제 지혜자는 판단하는 과정 자체를 가르칩니다.

살펴보기도 전에 나무라지 마라. 먼저 알아보고 나서 꾸짖어라.집회서 11:7 · 두루새김
듣기도 전에 대답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말하는 도중에 끼어들지 마라.집회서 11:8 · 두루새김

두 구절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말하고, 그 행동에 앞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과정을 제시합니다.

잠언 18:13은 듣기도 전에 대답하는 사람의 태도를 어리석음과 수치로 연결합니다. 집회서 역시 말을 잘하는 기술보다 먼저 듣고 이해하는 태도를 강조합니다.

충분히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예의를 지키는 행동이 아닙니다. 자신이 아직 모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행동입니다.

9–10절에서는 판단의 신중함이 관여하는 일의 범위에까지 확장됩니다.

네게 필요하지 않은 일로 다투지 말고, 죄인들의 재판에 함께 앉지 마라.집회서 11:9 · 두루새김

특히 잘못된 판단이나 부당한 일에 얽히는 것을 경계합니다. 다른 사람의 일에 끼어드는 것이 언제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아닙니다.

얘야, 너무 많은 일에 손을 대지 마라. 일을 늘리면 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뒤쫓아도 결코 따라잡지 못하고, 달아나도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집회서 11:10 · 두루새김

이 구절을 단순히 일을 많이 하지 말라는 권고로 읽으면 뜻이 좁아집니다. 앞의 두 구절이 다툼과 재판에 대한 부주의한 관여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자신이 감당할 범위를 넘어 여러 일에 뛰어들다가 책임과 위험까지 떠안게 되는 상황이 포함됩니다.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부지런히 뛰어다녔지만 얻지 못하고, 나중에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복잡한 상황에서 빠져나오지도 못합니다. 지혜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소극적인 삶을 권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책임져야 하고 무엇에서 물러나야 하는지를 판단하라고 가르칩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부족해지고, 힘없는 사람은 일어선다

집회서 11:11–17 본문 →

11절과 12절에는 서로 대조되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수고하고 고생하며 서두르는 사람이 있지만, 그럴수록 더욱 모자라게 된다.집회서 11:11 · 두루새김

지혜문학에서는 흔히 부지런함을 칭찬합니다. 잠언 10:4도 부지런한 손이 부유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집회서의 지혜자는 그 원칙을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적용할 수 있는 공식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첫 번째 사람과 정반대의 형편에 놓여 있습니다.

행동이 굼뜨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어, 힘은 모자라고 가난은 넘친다. 주께서는 그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눈길을 돌리셨고, 그를 낮은 처지에서 일으켜 세워, 그의 머리를 높이셨다. 많은 사람이 그를 보고 크게 놀랐다.집회서 11:12–13 · 두루새김

여기서 「행동이 굼뜨고」라는 말만 떼어 놓으면 게으른 사람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가 도움이 필요하고, 힘이 모자라며, 가난에 시달린다고 덧붙입니다. 그의 처지를 단순히 게으름의 결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가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를 기다리셨다가 인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먼저 하나님이 그에게 눈길을 돌리셨고, 그다음에 그를 일으키셨다고 말합니다.

1절의 「머리를 높였고」라는 표현이 여기서 「그의 머리를 높이셨다」로 되돌아옵니다. 처음에는 지혜가 낮은 사람을 높은 자리에 앉힌다고 했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직접 낮은 사람을 일으키십니다.

그들의 놀라움은 자신들이 예상했던 결과와 실제 일어난 일이 달랐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들은 힘없는 이에게서 별다른 가능성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일으키셨습니다.

14절은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아래 놓습니다.

좋은 일과 나쁜 일, 생명과 죽음, 가난과 부는 주께서 주시는 것이다.집회서 11:14 · 두루새김

여기서 「좋은 일과 나쁜 일」은 도덕적으로 옳거나 그른 행동보다는 인간에게 닥치는 좋은 형편과 나쁜 형편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악한 행동을 직접 일으키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의 관심은 인간의 삶에 나타나는 여러 형편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리심 밖에 있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가난한 사람이 모두 하나님의 벌을 받는 것이거나, 부자가 모두 하나님의 특별한 인정을 받는다는 뜻도 아닙니다. 바로 앞의 두 사람이 그러한 단순한 설명을 허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형편을 다스리신다는 믿음은, 우리가 그 형편만 보고 하나님의 판단을 안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17절은 주의 선물이 「하나님을 정성껏 섬기는 사람들 곁에 머물고」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지위나 재산보다 더 근본적인 삶의 바탕으로 제시됩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에서 14절 다음에 곧바로 17절이 나오는 것은 단순한 절 번호 오류가 아닙니다. 그리스어 본문의 주요 전승에는 15–16절이 없으며, 다른 고대 전승에는 지혜와 율법의 지식, 오류와 어둠을 다루는 두 절이 추가되어 전합니다.

재물을 모은 사람은 무엇을 얻었는가

집회서 11:18–22 본문 →

앞 단락이 부지런한 사람도 가난해질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면, 이제 지혜자는 실제로 재물을 많이 모은 사람을 등장시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재산을 모으기 위해 꼼꼼히 챙겼고, 인색하게 굴며 살아왔습니다. 그에게는 마침내 자신이 원하던 부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지혜자가 보여 주는 그의 보상은 예상과 다릅니다.

그는 「나는 이제 쉴 수 있다. 이제 내가 가진 것으로 먹고살겠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나 더 흐를지 알지 못한 채, 가진 것을 남들에게 남겨 두고 죽을 것이다.집회서 11:19 · 두루새김

그는 자신의 재산을 얼마나 모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그 재산으로 무엇을 할지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계획을 실행할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소유한 재산은 계산할 수 있지만, 자신에게 남은 시간은 계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전도서 2:18–21을 떠올리게 합니다. 전도자는 자신이 지혜롭게 수고하여 얻은 것을 결국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그 재산을 물려받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일지 어리석은 사람일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의 착각은 재산을 소유했다는 사실에 있지 않습니다. 재산을 확보한 것으로 자신의 미래까지 확보했다고 여기는 데 있습니다.

이 장면 다음에 나오는 20절은 뜻밖의 권고입니다.

네 언약을 굳게 지키고 그것에 힘써라. 네 일을 하며 늙어 가라.집회서 11:20 · 두루새김

부자는 현재의 수고를 언젠가 완전히 끝내고 재물로 편히 쉬려 합니다. 반면 지혜자는 자기 삶에서 맡은 책임을 계속 감당하라고 권합니다.

일은 단순히 재산을 모으고 마침내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자유를 얻기 위한 과정만은 아닙니다. 자신이 맡은 일을 충실히 해내는 것 자체에도 가치가 있습니다.

죄인이 하는 일에 감탄하지 마라. 주를 믿고 네 수고를 꾸준히 이어 가라. 가난한 사람을 순식간에 부유하게 만드시는 것은 주께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집회서 11:21 · 두루새김

죄인이 부유해졌다는 이유로 그의 방식을 본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가난하다는 이유로 자신의 성실한 수고를 포기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하나님을 정성껏 섬기는 사람이 모두 결국 부자가 된다는 보증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11절에서 이미 수고하는 사람이 계속 모자랄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주의 복은 하나님을 정성껏 섬기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다. 주께서는 짧은 시간에 그 복을 다시 꽃피우신다.집회서 11:22 · 두루새김

여기서 「그 복을 다시 꽃피우신다」는 표현은 메마르거나 생기가 없어 보이던 것이 다시 자라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스어 문장에는 주어가 분명히 드러나 있지 않아, 주께서 복을 꽃피우신다는 읽기와 복이 피어난다는 읽기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더라도 이 복은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완전히 통제하거나 보장할 수 있는 성과가 아니라 주께서 주시는 것으로 제시됩니다.

지혜자는 미래의 부를 계산하는 방법을 알려 주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무엇을 신뢰해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조금 더 깊이

20절의 「언약」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디아테케(διαθήκη)로, 언약이나 약정을 뜻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가리키는지, 일상에서 자신이 지켜야 할 약속과 의무를 가리키는지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전승에서는 자신이 맡은 일이나 과업에 가까운 표현이 전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약속을 성실히 지키는 태도와 자신이 맡은 책임을 충실히 이행하는 태도가 함께 어울립니다. 신약의 누가복음 12:16–21에 나오는 부자 비유는 이 장의 18–19절과 주제적으로 깊이 연결됩니다. 재물을 많이 모은 사람이 이제 쉬며 먹고살겠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알지 못한다는 흐름이 닮아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집회서의 직접 인용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좋은 날에는 나쁜 날을 잊고, 나쁜 날에는 좋은 날을 잊는다

집회서 11:23–28 본문 →

23–24절은 두 가지 자기 확신을 경계합니다.

이렇게 말하지 마라. 「내게 무엇이 필요한가? 앞으로 내게 무슨 좋은 것이 있겠는가?」집회서 11:23 · 두루새김

23절의 말은 두 방향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미래에 더 이상 좋은 일이 없을 것처럼 생각하는 체념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필요와 앞으로 얻을 이익을 계산하는 데 지나치게 매달리는 태도입니다. 그리스어 문장은 두 질문을 간결하게 나란히 놓고 있어, 어느 마음 상태를 더 강조하는지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말하지 마라. 「내게는 넉넉히 있다. 앞으로 내가 무슨 해를 입겠는가?」집회서 11:24 · 두루새김

두 구절을 함께 읽으면 지혜자가 경계하는 태도가 드러납니다. 자신의 현재 형편과 계산을 근거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태도입니다.

좋은 일이 있는 날에는 나쁜 일을 잊고, 나쁜 일이 있는 날에는 좋은 일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집회서 11:25 · 두루새김

사람은 현재 경험하는 형편의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모든 일이 잘될 때는 이전에 겪었던 어려움이 멀게 느껴집니다. 반대로 큰 고통을 겪을 때는 이전에 누렸던 기쁨조차 현실감 없이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 결과 현재의 상태가 마치 삶의 전부인 것처럼 보입니다.

전도서 7:14는 일이 잘되는 날에 기뻐하고 어려운 날에는 생각하라고 권하면서, 하나님이 이 두 날을 있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집회서는 한 걸음 더 들어가, 인간이 왜 그러한 균형 잡힌 판단을 잃어버리는지 설명합니다.

26–28절은 이 문제를 삶의 마지막이라는 관점에서 다룹니다.

사람이 죽는 날에 그가 살아온 대로 갚아 주시는 것은 주께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집회서 11:26 · 두루새김

21절에서도 가난한 사람을 순식간에 부유하게 만드시는 것은 「주께 쉬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표현이 두 장면을 연결합니다. 하나님께는 사람의 겉으로 드러나는 형편을 바꾸시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며, 그의 삶을 평가하시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 지혜자가 강조하는 것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삶을 끝까지 내다볼 수 없는 반면 하나님은 그가 걸어온 길을 평가하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순간의 고통은 누리던 즐거움을 잊게 하고, 사람의 마지막에는 그가 한 일들이 드러난다.집회서 11:27 · 두루새김

사람의 삶을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드러나는 것은 단순히 그가 얼마나 많은 재물을 소유했는지가 아니라 그가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이 28절의 경고로 이어집니다.

죽기 전에는 아무도 복되다고 하지 마라. 사람은 자기 자녀들을 통해 알려질 것이다.집회서 11:28 · 두루새김

여기서 「복되다고」라는 말은 순간적으로 기쁘거나 형편이 좋다는 뜻을 넘어, 그 사람의 삶 전체를 행복하고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는 말입니다. 지혜자는 그러한 최종적인 평가를 서두르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아직 삶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후반부의 「사람은 자기 자녀들을 통해 알려질 것이다」라는 말은 한 사람이 남긴 삶의 결과가 다음 세대에까지 나타날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다만 이것을 자녀의 성공이나 실패가 곧 부모의 인격을 증명한다는 공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 단락은 미래를 두려워하며 살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현재의 넉넉한 형편에 취하지 않고, 현재의 고난 때문에 모든 희망을 포기하지도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이 따르는 그리스어에는 분명히 「자녀들」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히브리어 전승에 근거한 다른 읽기에서는 사람의 「마지막」을 통해 그를 알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앞의 「죽기 전에는」이라는 표현과 더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읽기입니다. 두 전승 가운데 하나를 확정하기보다는, 삶의 일부만 보고 그 전체를 평가하지 말라는 공통된 강조점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문을 열어 줄 사람을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집회서 11:29–34 본문 →

장 마지막에서는 갑자기 집과 손님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아무나 네 집에 들이지 마라. 속이는 사람이 놓은 함정은 많기 때문이다.집회서 11:29 · 두루새김

앞에서는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부당하게 배척하거나 높이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여기서는 상대방을 충분히 알지 못하면서 무분별하게 신뢰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둘 다 충분히 알아보지 않은 채 성급하게 판단하는 태도입니다.

29절에서 「집」은 단순한 건물이 아닙니다. 가족과 재산과 일상의 삶이 이루어지는 공간입니다. 누군가를 집에 들인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자신의 생활 안으로 들어올 기회를 제공한다는 뜻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집에 손님을 맞아들이는 것은 중요한 환대의 행위였지만, 동시에 자신의 가족과 재산을 낯선 사람에게 드러내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거만한 사람의 마음은 바구니 안에서 미끼로 쓰이는 자고새와 같다. 그는 몰래 살피는 사람처럼 남이 넘어지기를 노린다.집회서 11:30 · 두루새김

자고새는 새를 잡기 위한 미끼로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잡아 놓은 자고새를 이용해 다른 새들이 가까이 오도록 유인하는 방식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새 한 마리가 실제로는 다른 새를 붙잡기 위한 함정의 일부라는 사실입니다.

거만한 사람의 마음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내는 태도와 실제로 품은 목적이 다를 수 있습니다.

몰래 살피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목적을 알리지 않고 약한 곳을 살핍니다. 여기의 속이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도우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넘어질 기회를 찾습니다.

이 장에는 눈으로 바라보는 두 태도가 대조되어 있습니다.

12절에서는 주께서 가난한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눈길을 돌리십니다. 반면 30절에서는 거만한 사람이 남을 몰래 살피며 그가 넘어지기를 노립니다.

하나님은 낮은 사람을 일으키시려고 바라보시지만, 속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넘어뜨리려고 바라봅니다.

그는 좋은 것을 나쁜 것으로 뒤집으며 숨어서 노리고, 훌륭한 것에도 흠을 잡을 것이기 때문이다.집회서 11:31 · 두루새김

2절에서는 겉모습 때문에 사람을 잘못 판단하지 말라고 했고, 7절에서는 충분히 알아보지 않은 채 나무라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31절의 사람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알고 있는 좋은 것조차 나쁘게 보이도록 만들려고 합니다.

단순한 판단 착오를 넘어 일부러 사실을 뒤틀어 놓는 것입니다.

불티 하나로 숯불이 커질 것이고, 죄인은 피를 흘리게 하려고 숨어서 노린다.집회서 11:32 · 두루새김

작은 불티가 큰불로 번지는 것처럼, 처음에는 사소해 보였던 악의가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을 앞의 「좋은 것을 나쁜 것으로 뒤집으며」라는 말과 연결하면, 거짓된 말과 남을 해치려는 비난이 인간관계를 무너뜨리고 마침내 폭력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는 위험이 드러납니다.

33절은 그러한 사람이 「영원한 흠」을 남기지 못하도록 조심하라고 합니다. 악을 저지르는 사람의 행동은 그 순간의 다툼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명예와 삶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본문을 낯선 이들에 대한 일반적인 불신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레위기 19:33–34는 함께 거주하는 외국인을 학대하지 말고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집회서가 경계하는 것은 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척해야 할 사람의 존재가 아니라, 남을 해치기 위해 일부러 접근하는 사람의 속임수입니다.

마지막 34절은 그 결과를 집 안에서 보여 줍니다.

낯선 사람을 네 집에 들여 살게 해 보아라. 그는 소란을 일으켜 너를 뒤흔들고, 너와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너를 떼어 놓을 것이다.집회서 11:34 · 두루새김

악을 저지르는 사람의 위험은 재산을 빼앗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의 관계까지 파괴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 마지막 표현은 「네 가까운 사람들」과 「네게 속한 것들」이라는 두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족이나 가까운 관계에서 멀어지는 상황뿐 아니라 소유를 잃는 상황도 포함될 여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현재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계신다

집회서 11:1–34 본문 →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인정한다는 것은 판단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이 언제나 옳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집회서의 지혜는 두 가지를 함께 요구합니다. 외모나 신분만으로 사람을 배척하지 않는 것, 그리고 실제로 드러나는 행동과 의도를 살펴 자신의 삶과 관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수고해도 계속 모자라는 사람이 있고, 도움이 없이는 일어설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의 현재 형편만을 보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향한 하나님의 눈길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주께서 그에게 눈길을 돌리셨고, 그를 낮은 처지에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사람들이 놀라는 가운데, 머리를 들지 못하던 사람이 다시 고개를 듭니다. 집회서 11장은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하나님의 일이 바로 그런 사람의 삶에도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