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서 풀어 읽기 · 42장

이 장의 자리 · 24–43장 · 지혜의 찬양

하나님께는 감추어진 것이 없습니다

집회서 42장은 뜻밖의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처음에는 남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과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가르칩니다. 거래할 때는 정확하게 계산하고, 물건을 주고받을 때는 기록을 남기라고 합니다. 이어서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불안과 여성에 대한 가혹한 경고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15절에 이르면 갑자기 목소리가 바뀝니다.

조금 전까지 사람의 행동을 감독하던 지혜자가 이제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바라봅니다. 인간의 집안에서 우주로, 사람들의 평가에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시선이 옮겨 갑니다.

인간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통제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부족함 없이 창조 세계를 붙드십니다.

42장 후반부에서 시작되는 창조 찬양은 다음 장까지 이어집니다. 따라서 42장 마지막은 찬양의 결론이라기보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더욱 자세히 바라보기 위한 출발점입니다.

읽는 시간 23분소단락 742장 본문 읽기 →

부끄러워해야 할 일과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일

집회서 42:1–2 본문 →

잘못된 침묵도 있고, 잘못된 말도 있다

42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들은 말을 되풀이해 옮기는 일과 비밀을 드러내는 일을 부끄러워하여라. 그러면 너는 참으로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되어 모든 사람에게 호의를 얻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 일들은 부끄러워하지 마라. 사람의 체면을 봐주다가 죄를 짓지 마라.집회서 42:1 · 두루새김

바로 앞 장에서 시작된 부끄러움에 관한 가르침이 여기서 마무리됩니다. 어떤 말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 말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권리까지 주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집회서 19:6–12의 가르침과도 연결됩니다. 거기서 저자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미움을 받게 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들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정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도 판단합니다.

다만 이 경고를 모든 비밀을 무조건 지키라는 명령으로 넓혀서는 안 됩니다. 본문의 관심은 남의 말을 경솔하게 퍼뜨리거나 신뢰를 배반하는 행동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잘못을 드러내야 하는 경우까지 직접 다루지는 않습니다.

앞에서는 부끄러워해야 할 일을 가르쳤습니다. 이제는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일을 가르칩니다.

사람은 잘못된 행동을 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지만, 반대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에 주저할 수 있습니다.

42장 첫머리는 이 두 가지 위험을 구별하도록 만듭니다.

「사람의 체면을 봐주다가」라는 표현은 사람의 신분이나 관계를 고려하여 판단을 치우치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상대가 누구인지를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옳고 그름을 바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레위기 19:15와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가난한 사람이라고 편들거나 힘 있는 사람이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정하게 판단하라고 명령합니다.

사람들의 비난을 피하는 것이 항상 옳은 행동은 아닙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불편해하더라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판결? (42:2)

그런데 바로 다음 절은 해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극히 높은 이의 율법과 언약을 부끄러워하지 마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판결도 부끄러워하지 마라.집회서 42:2 · 두루새김

남아 있는 히브리어 사본에도 악한 사람을 의롭다고 하는 표현이 나타납니다. 한 가지 가능성은 종교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개별 사건에서 무죄라면 공정하게 무죄를 선고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경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평판 때문에 부당한 유죄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어 문장 자체가 그 사람이 해당 사건에서는 무죄라고 밝히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이 문구를 악한 사람을 부당하게 의롭다고 선언하는 판결에 대한 경고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잠언 17:15는 악한 사람을 의롭다고 하거나 의로운 사람을 악하다고 하는 일을 몹시 가증하다고 하며, 출애굽기 23:7에서 하나님은 악한 사람을 의롭다고 판정하지 않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경우 문제는 문장의 배열입니다. 왜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일들의 목록에 부당한 무죄 판결이 포함되어 있는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원문에 남아 있는 실제적인 어려움입니다. 문맥에 따라 어느 정도 의미를 짐작할 수 있지만, 원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1절에서 저자가 한쪽으로 치우친 판단을 경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뒤따르는 거래와 재산 관리에 관한 가르침을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장부에 기록되는 정직함

집회서 42:3–8 본문 →

믿을 수 있는 관계에도 정확한 계산이 필요하다

동료나 함께 길을 가는 사람들과 셈을 치르는 일, 벗들에게 물려받을 재산을 나누어 주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마라.집회서 42:3 · 두루새김

동료와 함께 일하거나 여행하는 사람들은 비용을 나누어 부담할 수 있습니다. 물려받을 재산을 나누는 경우에는 누가 얼마만큼 받을 권리가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까운 사람과 돈을 계산하는 일은 불편할 수 있습니다.

함께 일한 친구에게 정확하게 셈하자고 말하면 지나치게 인색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재산을 나눌 때 자신의 몫을 확인하면 욕심이 많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저자는 그런 불편함 때문에 정당한 계산과 분배를 피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저울과 저울추를 정확히 맞추는 일, 많든 적든 재산을 얻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마라.집회서 42:4 · 두루새김

고대의 시장에서는 물건의 무게를 재는 저울과 저울추가 거래의 공정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레위기 19:35–36과 신명기 25:13–16은 속이는 저울과 서로 다른 무게의 저울추를 사용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이 배경에서 정확한 저울을 사용한다는 것은 단순히 계산을 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거래에서 정당한 몫을 받도록 하는 일입니다.

저자는 부를 얻는 일 자체를 부끄러운 것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재산이 많고 적은 것보다 그것을 어떻게 얻었으며 어떻게 다루는지가 중요합니다.

차별 없이 물건을 파는 일과 상인들과 거래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마라. 자녀를 엄하게 가르치는 일과 악한 집안 종을 피가 나도록 때리는 일도 부끄러워하지 마라.집회서 42:5 · 두루새김

앞의 저울에 관한 가르침과 함께 읽으면, 거래에서 사람에 따라 부당하게 기준을 바꾸지 말라는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확한 저울은 시장에서 사용하는 도구이지만, 그 저울을 사용하는 정직함은 하나님 앞에서의 삶과 관계가 있습니다.

기록을 남기라는 지혜 (42:6–7)

6–7절에서는 재산을 지키고 관리하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무엇이든 넘겨줄 때에는 수를 세고 무게를 달아라. 주고받는 모든 일을 글로 적어 두어라.집회서 42:7 · 두루새김

말로 약속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기억은 서로 다를 수 있고, 시간이 지나면 무엇을 주고받았는지 불분명해질 수 있습니다. 기록은 다툼이 생겼을 때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지혜는 깊은 생각이나 종교적인 교훈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물건을 주고받고, 재산을 관리하고, 다툼을 예방하는 일에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6절 앞부분에는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악한 아내가 있으면 물건을 봉해 두는 것이 좋다. 여러 사람의 손이 드나드는 곳은 잠가라.집회서 42:6 · 두루새김

여기서 「물건을 봉해 두는 것」이라는 표현은 아내를 신뢰하지 않고 관리하거나 통제하려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이 구절을 바로 뒤의 잠금장치와 기록에 관한 가르침에 연결하면, 저자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자기 재산과 가정을 보호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내를 통제의 대상으로 취급한다는 점도 분명합니다. 이 표현은 당시 가부장적 가정 질서를 반영하며, 오늘날 배우자에 대한 일방적인 감시를 정당화하는 명령으로 그대로 적용할 수 없습니다.

가르침과 폭력 사이에 놓인 경계 (42:5, 8)

5절에는 자녀를 엄하게 가르치는 일과 악한 집안 종을 피가 나도록 때리는 일이 함께 등장합니다.

그러나 자녀를 가르치는 것과 종을 피가 나도록 때리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5절은 분명히 몸에 가하는 폭력을 말합니다. 이를 단순히 성실한 교육이나 부드러운 훈계로 바꾸어 읽을 수는 없습니다. 또한 본문이 그러한 폭력을 허용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그 행동이 오늘날에도 정당하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출애굽기 21:20–21에서도 종에 대한 폭력을 다루지만, 그 규정 역시 다른 사람에게 매인 신분 제도가 존재하던 사회를 전제로 합니다. 집회서 저자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위계질서 안에서 권위자가 질서를 유지하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그 안에는 정당한 책임에 관한 지혜도 있지만,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당연하게 여기는 한계도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미련한 사람을 가르치는 일, 몹시 늙어서 젊은이들과 다투는 사람을 가르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마라. 그러면 너는 참으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되어 살아 있는 모든 이에게 인정받을 것이다.집회서 42:8 · 두루새김

다른 사람에게 교훈을 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의 지혜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지혜를 단순히 권력을 행사할 줄 아는 능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앞서 제시된 정확한 계산과 공정한 거래처럼 책임 있게 판단하는 능력도 포함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단락에서 그 책임은 매우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 — 사랑인가, 명예에 대한 두려움인가?

집회서 42:9–14 본문 →

아버지가 잠들지 못하는 이유

9절은 장면을 바꿉니다.

딸 때문에 아버지는 남몰래 잠을 이루지 못한다. 딸에 대한 걱정이 잠을 몰아낸다. 젊을 때는 한창때를 넘겨 버릴까 걱정하고, 혼인한 뒤에는 미움을 받을까 걱정한다.집회서 42:9 · 두루새김

혼인 전에 아이를 갖게 될까 걱정하고, 혼인 후에는 부부의 약속을 어기거나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합니다. 딸의 삶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아버지는 걱정할 이유를 찾습니다.

아버지에게 딸의 인생은 불안이 끝나지 않는 과정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당시 혼인과 출산이 가족의 사회적 안정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결혼은 두 사람의 개인적 관계에만 머물지 않고 가족 사이의 관계와 재산을 물려받는 일, 명예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딸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삶을 행복하게 여기는지, 어떤 위험을 두려워하는지는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녀의 혼인도, 성적 행동도, 출산도 아버지의 불안과 연결됩니다.

아버지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42:11)

11절에 이르면 그 불안의 핵심이 드러납니다.

고집 센 딸은 단단히 지켜보아라. 딸 때문에 네가 원수들의 웃음거리와 마을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백성에게 따돌림받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딸이 많은 사람 앞에서 너에게 수치를 안겨 주지 않도록 하여라.집회서 42:11 · 두루새김

여기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딸이 당할 고통이 아니라 아버지가 당할 수치입니다.

물론 아버지가 딸에게 아무런 애정도 없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혼인이나 출산에 관한 걱정에는 딸의 미래에 대한 관심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의 불안에는 딸의 평안과 자신의 사회적 명예가 뒤섞여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미래를 걱정할 때, 그 걱정은 언제 자녀를 위한 배려이고 언제 자신의 체면을 지키려는 통제가 됩니까?

저자는 이러한 구별을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딸을 엄격하게 감시하도록 권합니다. 그러므로 이 단락을 오늘의 부모에게 곧바로 적용할 때에는 본문에 나타나는 부모의 걱정과 그 걱정을 해결하기 위해 제안된 통제 방식을 구별해야 합니다.

여성에게서 여성의 악이 나온다는 말 (42:12–14)

이어지는 표현들은 더욱 불편합니다.

누구의 아름다움에도 눈길을 주지 마라. 여자들 가운데 함께 앉지 마라.집회서 42:12 · 두루새김

12절은 문맥과 전해지는 본문에 따라 이해가 갈리는 구절입니다. 두루새김은 그리스어 문면을 따라 「누구의 아름다움에도 눈길을 주지 마라」로 옮겼습니다. 반면 남아 있는 히브리어 사본은 딸의 아름다움을 남자들에게 드러내지 말라는 방향의 표현을 전합니다.

따라서 이 문장이 남성에게 자신의 시선을 조심하라는 가르침인지, 아버지에게 딸의 외모와 행동을 통제하라는 가르침인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앞선 9–11절의 흐름에서는 후자의 이해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읽든 저자가 여성과 관련된 관계를 특별히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묘사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옷에서 좀이 나오듯, 여자에게서 여자의 악이 나오기 때문이다.집회서 42:13 · 두루새김

좀은 옷감을 갉아 먹는 해충입니다. 옷을 보관하는 사람에게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손상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이미지를 여성과 연결합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여성에 관한 일반적인 사실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자가 여성의 행동과 영향력을 얼마나 부정적으로 바라보는지 보여 줍니다.

14절에서는 그 관점이 더욱 극단적으로 표현됩니다.

남자의 악행이 선을 행하는 여자보다 낫다. 수치를 안기는 여자는 치욕에 이르게 한다.집회서 42:14 · 두루새김

저자는 남성의 악함과 여성의 선함을 비교하면서까지 여성이 초래할 수 있는 수치를 강조합니다. 이는 당시의 남성 중심적 사회관을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이 대목을 이해하려면 성경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와, 그 말이 성경 전체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남성의 악함을 여성의 선함보다 실제로 더 좋게 평가하신다는 결론을 이 구절 하나에서 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 1:27은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남자만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것이 아닙니다.

또한 잠언 31:10–31은 여성이 지혜롭고 능동적으로 가정을 관리하며 경제활동을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손을 펴는 모습을 찬양합니다. 그곳에서는 여성의 지혜와 선한 행동이 가정의 영예가 됩니다. 두 본문을 나란히 놓으면 구약과 제2경전의 지혜 전통 안에서도 여성을 묘사하는 방식이 한결같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집회서 42장의 여성관을 무시하거나 무리하게 정당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반대로 이 단락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저자가 실제로 말하고 있는 내용을 삭제할 필요도 없습니다. 저자의 말이 어떤 사회적 질서 안에서 형성되었는지 이해하면서, 그 판단이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존엄에 관한 더 넓은 성경적 증언과 어떤 긴장을 이루는지 살펴야 합니다.

자기 가정의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하던 인간의 시선에서, 이제 모든 것을 아시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에게로 시선이 옮겨 갑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은 「남자의 악행이 선을 행하는 여자보다 낫다」로 옮겨, 전해지는 그리스어 문장의 불편한 대조를 그대로 살렸습니다. 문맥을 고려하면 이 표현을 남성의 거친 태도가 여성의 친절하거나 유순한 행동보다 낫다는 식으로 이해하려는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해석만으로 남성과 여성 사이에 놓인 심각한 불균형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걱정에서 하나님의 창조로

집회서 42:15–17 본문 →

지혜자가 이제 자신의 말을 멈추고 하나님의 일을 이야기하다

이제 나는 주께서 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내가 본 것을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주께서 하신 일들은 그분의 말씀으로 이루어졌다.집회서 42:15 · 두루새김

그는 하나님의 본질을 추상적인 말로 정의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본 것들을 이야기하겠다고 합니다.

시편 104편은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어떻게 마련하셨는지, 물과 산과 짐승들이 어떤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지를 노래합니다. 시편 111:2 역시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이 크고 그것을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그 일을 깊이 살핀다고 말합니다.

창조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단순히 자연 현상을 관찰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 현상을 있게 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영광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창조는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됩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빛이 생기고, 물과 땅이 구별되며, 생명체들이 나타납니다. 시편 33:6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어졌다고 노래하고, 시편 33:9은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이루어졌다고 선언합니다. 집회서 42장도 그러한 창조 신앙의 전통 안에 있습니다.

다만 본문이 말하는 창조의 핵심은 단순히 하나님이 처음에 모든 것을 만드셨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그의 말로 이루어진 세계가 지금도 질서 있게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해가 모든 것을 비추지만

해는 빛을 비추며 모든 것을 내려다보았고, 주께서 하신 일은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하다.집회서 42:16 · 두루새김

해가 비추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계입니다. 하나님이 아시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계보다 훨씬 넓습니다. 이 대조를 저자가 직접적인 비교문으로 제시한 것은 아니지만, 이어지는 전개는 독자로 하여금 두 모습을 함께 바라보게 합니다.

거룩한 이들도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주께서는 거룩한 이들에게도 자기가 하신 놀라운 일들을 모두 이야기할 능력을 주지 않으셨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께서는 그 일들을 굳게 세워, 만물이 그분의 영광 안에서 굳게 서게 하셨다.집회서 42:17 · 두루새김

하나님의 일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모든 일을 빠짐없이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거룩한 이들」이 누구를 가리키는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나 성인들을 가리킬 수도 있고, 하늘의 거룩한 존재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운 존재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모든 놀라운 일을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시는 분이지만, 그 일은 무질서하거나 불안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가지만, 그 지혜로 이루어진 세계는 질서 있게 서 있습니다.

깊은 곳도, 사람의 마음도 그에게 감추어지지 않는다

집회서 42:18–21 본문 →

인간의 시선이 닿지 않는 두 장소

주께서는 깊은 곳과 사람의 마음을 샅샅이 살피셨고, 나는 그 안의 교묘한 꾀를 생각했다. 주께서는 모든 지식을 아시고, 영원의 표지를 들여다보셨기 때문이다.집회서 42:18 · 두루새김

저자는 가장 깊은 바깥 세계와 가장 은밀한 인간의 내면을 함께 언급합니다.

인간에게는 들어갈 수 없거나 들여다볼 수 없는 영역이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너무 깊은 곳도 있고, 다른 사람의 마음처럼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역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그러한 한계가 없습니다.

이것은 시편 139:1–4의 고백과도 닮아 있습니다. 거기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자신의 앉고 일어섬과 생각을 아시고, 말이 혀에 오르기도 전에 그 말을 아신다고 고백합니다.

지나간 일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18절 후반과 19절은 하나님의 지식이 시간의 한계도 넘어선다고 말합니다.

주께서는 지나간 일과 앞으로 닥칠 일을 알리시며, 숨겨진 것들의 자취를 드러내신다.집회서 42:19 · 두루새김

18절의 「영원의 표지」가 하나님의 영원한 시간에 속한 징표를 가리키는지, 시대의 흐름을 알아보는 표지를 가리키는지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특정한 종말 사건의 징조를 설명하는 말씀으로 좁히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문맥에서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과거와 미래를 모두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예상합니다. 그러나 기억은 불완전하고 예상은 틀릴 수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단지 미래에 일어날 사건의 목록을 알고 계신다는 뜻에 머물지 않습니다. 인간의 눈에 드러나지 않은 현실까지 그의 지식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 말도 감추어지지 않는다

어떤 생각도 주를 지나쳐 가지 못했고, 말 한마디도 주께 숨겨지지 않았다.집회서 42:20 · 두루새김

42장은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말을 함부로 옮기거나 비밀을 드러내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후반부에서는 어떤 말도 하나님에게 숨겨질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둘은 동일한 교훈은 아니지만, 나란히 읽으면 의미 있는 대조가 생깁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모든 생각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경솔하게 말을 옮기거나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각과 말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감추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일이 하나님 앞에서도 감추어진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는 딸의 앞날과 마음을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정에서 벌어질 일을 예측하고 통제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감시하는 기술을 통해 지식을 얻으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의 지식은 인간의 지식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물론 저자가 이러한 대조를 통해 앞부분의 딸에 대한 권고를 비판하려 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글의 흐름에 따라 두 부분을 나란히 읽을 때 생기는 의미 있는 긴장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조언자가 필요 없다

주께서는 자기 지혜로 이루신 위대한 일들을 아름답게 정돈하셨다. 그분께서는 영원 이전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며, 더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으셨다. 어떤 조언자도 필요로 하지 않으셨다.집회서 42:21 · 두루새김

저자는 하나님의 창조를 단순히 많은 사물을 만들어 낸 행위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창조물들이 질서와 아름다움을 갖추도록 세우신 행위로 묘사합니다.

창조 세계에서는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것이 변합니다. 사람은 배우면서 지식이 늘어나고, 나이가 들면서 힘이 줄어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처럼 계속 보충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40:13–14에서도 여호와야훼의 영을 누가 헤아렸으며, 누가 그에게 조언자가 되었는지를 묻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아름답게 정돈하셨다는 사실은 그가 외부의 도움 없이도 지혜롭게 일하시는 분이라는 고백과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를 설명하던 저자는 이제 자신이 볼 수 있는 창조 세계를 향해 감탄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18절의 「나는 … 생각했다」는 그리스어 디에노에텐(διανοέομαι)을 1인칭으로 읽은 결과입니다. 그러나 확인되는 그리스어 본문에는 디에노에테라는 3인칭 형태가 나타나며, 남아 있는 히브리어 사본 역시 하나님이 살피신다는 방향을 뒷받침합니다. 따라서 이 대목은 1인칭으로 말하는 사람이 갑자기 끼어드는 장면으로도 읽을 여지가 있지만, 문맥과 다른 본문 증거에 따르면 하나님이 깊은 곳과 마음을 살피시고 그 안의 숨겨진 생각까지 헤아리신다는 해석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이 차이는 중요한데, 이 단락의 초점이 저자의 통찰력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 세계는 서로를 마주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낸다

집회서 42:22–25 본문 →

우리가 보는 것은 불티 하나만큼이다

주께서 하신 모든 일은 얼마나 마음을 끄느냐! 그런데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불티 하나만큼이다.집회서 42:22 · 두루새김

지금까지 저자는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것을 아시는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자신이 얼마나 적게 볼 수 있는지를 인정합니다.

불티는 잠시 반짝이는 작은 빛입니다. 그 작은 빛을 통해 훨씬 더 크고 풍성한 실제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창조 세계를 완전히 설명할 수 없지만, 그 일부를 보면서도 경탄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침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볼 수 있는 작은 부분에서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합니다.

살아 있고, 남아 있으며, 복종한다

이 모든 것은 온갖 필요를 채우며 살아 있고, 영원히 남아 있다. 모든 것이 주께 복종한다.집회서 42:23 · 두루새김

「살아 있고」라는 표현을 모든 창조물이 문자 그대로 생물학적 생명을 지녔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계속 활동하고 그 역할을 수행한다는 찬양의 언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시편 148편과도 닮아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해와 달, 별들과 하늘, 바다와 여러 생물들이 모두 여호와야훼를 찬양하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각각의 존재가 창조주를 드러낸다는 시적인 표현입니다.

집회서 42장에서도 모든 것이 하나님께 복종한다고 말합니다. 이때 복종은 단지 명령을 듣고 따르는 인간의 도덕적 행동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창조 세계 전체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안에 있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모든 것은 둘씩 마주한다

모든 것은 둘씩 짝을 이루어 하나가 다른 하나를 마주한다. 주께서는 아무것도 모자라게 만들지 않으셨다.집회서 42:24 · 두루새김

창세기 1장의 창조 과정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구별하시고, 하늘과 땅을 마련하시며, 물과 땅의 경계를 정하시는 장면들이 떠오릅니다. 또한 집회서 33:15에서는 지극히 높은 이의 모든 일을 바라보라고 하면서, 그것들이 둘씩 서로 마주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짝을 반드시 같은 종류의 두 존재나 서로 부족한 것을 채워 주는 관계로만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 다른 것들이 마주하는 관계에는 대조와 구별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는 서로 다른 존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가 곧 창조의 결함을 뜻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여기서 개별 인간의 부족함이 아니라 창조 세계 전체의 질서를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여러 존재가 서로 다른 특성과 역할을 지니도록 정돈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은 차이가 사라지는 데 있지 않고,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함께 서 있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가 다른 하나의 좋은 점을 굳게 세운다

하나는 다른 하나의 좋은 점을 더 굳게 해 주었다. 주의 영광을 보면서 누가 이제 충분히 보았다고 하겠느냐?집회서 42:25 · 두루새김

이 문장은 창조 세계의 여러 부분이 서로 무관하게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각각의 존재는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으며 창조 세계의 질서 안에서 의미를 갖습니다.

물론 본문이 모든 관계를 갈등 없는 조화라고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집회서 33:14–15에서는 좋은 것과 나쁜 것, 삶과 죽음, 죄인과 경건한 사람처럼 서로 대조되는 관계도 언급합니다. 따라서 42:24–25를 단순히 서로 다른 것은 모두 조화롭고 좋은 것이라는 선언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두루새김의 「이제 충분히 보았다고」는 더 이상 볼 필요가 없을 만큼 충분히 채워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창조 세계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은 아무리 보아도 다 헤아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작은 불티에서 시작된 시선이 창조 세계 전체를 향해 열립니다.

조금 더 깊이

22절의 그리스어는 간결하고 다소 어려워, 「불티」의 비유가 정확히 어떤 비교를 이루는지에 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마음을 끌지만, 인간이 실제로 보고 헤아릴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지혜는 어디까지 가능한가?

집회서 42:1–25 본문 →

인간의 지혜는 배우고 판단하고 수정해야 하는 지혜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 때문에 실수할 수 있고, 자신이 속한 사회의 관습을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더해지거나 줄어들지 않습니다.

인간의 지혜로운 판단과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누가 이제 충분히 보았다고 하겠느냐고 묻는 사람은 자신이 이미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더 볼 것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보았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본 것들이 너무 아름다워, 아직 보지 못한 하나님의 일을 더 바라보고 싶어 합니다.

그에게 지혜의 마지막 말은 모든 것을 안다는 선언이 아니라, 아직 다 보지 못했다는 경탄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