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서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5장 · 의와 죽지 않는 삶
하나님은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다
지혜서는 뜻밖의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지혜를 얻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지식을 쌓거나 올바른 판단력을 기르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첫 번째 명령은 이것입니다.
「땅을 다스리는 너희, 의를 사랑하여라.」
지혜를 다루는 책이 왜 지혜가 아니라 의를 사랑하라는 말로 시작할까요? 그리고 왜 그 말을 모든 사람이 아니라 땅을 다스리는 이들에게 먼저 건넬까요?
처음에는 지혜와 어리석음의 차이처럼 보였던 문제가 마지막에는 생명과 죽음의 문제로 바뀝니다. 그러나 저자는 사람에게 죽음을 경고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에 관하여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살아 있는 것들이 멸망하는 일을 즐기지도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지혜서 1장의 중심에는 죽음을 피하라는 명령보다 더 바탕이 되는 선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기 전에 의를 사랑하라
첫 절에는 세 가지 명령이 이어집니다.
땅을 다스리는 너희, 의를 사랑하여라. 선한 마음으로 주를 생각하고, 꾸밈없는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라.지혜서 1:1 · 두루새김
세 명령은 서로 다른 종교적 행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를 점점 깊이 보여 줍니다. 첫 명령의 대상은 「땅을 다스리는 너희」입니다. 여기에는 정치적으로 다스리는 일뿐 아니라 재판하고 판결하는 권한도 포함됩니다.
저자는 권력자들에게 먼저 지혜로운 정책이나 뛰어난 통치 기술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의를 사랑하라고 요구합니다. 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그런 능력을 갖는다면, 그 능력은 오히려 불의를 더욱 효과적으로 실행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첫 절에서 의를 뜻하는 말은 개인의 도덕적 올바름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공정하게 대하는 정의의 의미도 담을 수 있습니다. 다스리는 사람을 향한 호소라는 문맥에서는 이 사회적 의미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의를 행하라고만 하지 않고 사랑하라고 합니다.
의로운 판결을 내리는 것과 의를 사랑하는 것은 언제나 같지 않습니다. 사람은 좋은 평판이나 보상을 얻기 위해 올바른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의를 사랑한다면, 올바른 일이 자신에게 불리할 때에도 그것을 소중하게 여길 것입니다.
이어서 주를 생각하고 찾으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의를 사랑하는 삶과 하나님을 찾는 삶이 나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마음에는 선함과 꾸밈없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를 시험하지 않는 이들은 그분을 만나고, 주를 의심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그분께서 모습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2 · 두루새김
하나님을 아는 일은 사람이 뛰어난 지적 능력으로 감추어진 비밀을 밝혀내는 과정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관계를 열어 주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여기에서 「시험하지 않는」이라는 표현을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관하여 질문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금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17:2–7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시험한 사건을 떠올려 봅시다. 그들은 물이 없는 현실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고, 마침내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계시는지 따져 물었습니다. 그 사건의 문제는 단순히 질문했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자기들이 정한 조건에 따라 증명해야 하는 대상으로 삼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지혜서 1:2도 이와 비슷한 관계의 문제를 다룹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찾는 태도와 하나님을 불신하면서 시험하는 태도는 같지 않습니다.
3절은 그 반대의 길을 보여 줍니다.
비뚤어진 생각은 사람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면, 그 능력은 어리석은 이들의 잘못을 드러냅니다.지혜서 1:3 · 두루새김
여기서 말하는 비뚤어진 생각은 단순한 판단 착오가 아닙니다. 뒤이어 나타나는 속임수와 불의를 고려하면, 자기 욕망에 맞추어 사물을 해석하고 하나님까지 자기 판단 아래 두려는 태도가 포함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평가하려 하지만, 오히려 그 과정에서 자기 생각의 어리석음이 밝혀지는 것입니다.
지혜서가 말하는 어리석음은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이 부족한 상태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판단할 수 있다고 여기는 뒤틀린 관계입니다.
지혜는 속임과 함께 살지 않는다
악한 일을 꾸미는 영혼에는 지혜가 들어가지 않고, 죄에 얽매인 몸에도 머물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4 · 두루새김
특히 「머물지 않을 것」이라는 표현은 잠깐 방문하는 것보다 오래 함께 있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지혜는 필요할 때 꺼내 사용하는 지식이 아니라, 사람 안에 머물며 그의 삶을 이끄는 존재처럼 묘사됩니다.
이 구절의 영혼과 몸을 서로 맞서는 두 영역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영혼은 선하고 몸은 악하다는 주장도 아닙니다. 저자는 사람의 내면과 실제 삶을 함께 가리키면서, 지혜가 그 사람 전체와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5절은 지혜를 새로운 이름으로 부릅니다.
사람을 가르쳐 바르게 이끄는 거룩한 영은 속임수를 피해 달아나고, 깨달음 없는 생각에서 떠나며, 불의가 닥쳐오면 책망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5 · 두루새김
「사람을 가르쳐 바르게 이끄는」은 가르침, 훈련, 바로잡음, 인격을 길러 주는 일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지혜가 사람에게 정보를 더해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잘못된 삶을 바로잡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지혜가 속임과 함께 머물 수 없는 이유입니다. 속임은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 하고, 지혜의 가르침은 그 잘못을 드러내어 바로잡으려 합니다. 두 태도는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지혜는 불의를 적당히 덮어 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지혜가 이처럼 악에서 떠난다면, 지혜는 결국 의로운 사람들만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조금 더 깊이
마지막 표현인 「불의가 닥쳐오면 책망을 받을 것이기 때문」은 원문에서도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그리스어 엘렝크테세타이는 드러나거나 책망받는다는 뜻의 수동형입니다. 문법적으로 앞에서 말한 거룩한 영과 연결되지만, 거룩한 영 자체가 잘못을 저질러 책망받는다고 해석하면 문맥이 어색해집니다. 그래서 불의가 들어올 때 그 영이 부끄러움을 당하듯 물러난다는 뜻으로 읽기도 합니다. 이 경우 앞의 「달아나고」, 「떠나며」와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반면 수동형의 책망 또는 드러냄이라는 의미를 더 직접적으로 살리는 번역도 가능합니다. 두루새김은 「책망을 받을 것」이라고 옮겼습니다. 어느 쪽이 정확한 의미인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지혜가 사람의 말을 심판한다
지혜는 사람을 사랑하는 영이지만, 모욕하는 말을 한 사람을 죄 없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속마음을 아는 증인이시며, 그 마음을 정확히 살피고 그가 하는 말을 들으시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6 · 두루새김
우리는 종종 사랑과 책망을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 구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불의를 가볍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사람의 말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때, 그 말을 무조건 용서하거나 못 들은 척하는 것이 언제나 사랑은 아닙니다.
원문에서 속마음에 해당하는 말은 콩팥입니다. 고대 성경의 언어에서 콩팥은 감추어진 감정과 내면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17:10에서도 하나님은 마음을 살피시고 내면을 시험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감추어진 내면을 아시고, 마음의 방향을 살피시며, 입 밖으로 나온 말도 들으십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감출 수 있습니다. 실제 동기를 감추고 선한 말을 할 수도 있으며, 마음속으로는 다른 의도를 품으면서 겉으로는 의롭게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 구분이 유지되지 않습니다.
주의 영은 사람이 사는 온 세상을 가득 채우셨습니다. 모든 것을 함께 붙들고 있으신 그 영은 사람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으십니다.지혜서 1:7 · 두루새김
앞에서는 지혜가 한 사람의 영혼과 몸에 들어가거나 머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제 시야가 사람이 사는 온 세상과 모든 것으로 넓어집니다.
여기에서 독자는 앞의 5절과 긴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의 영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우셨다면, 어떻게 속임수를 피해 떠나신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영이 모든 것을 붙들고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의 활동과 앎이 창조 세계 전체에 미친다는 뜻입니다. 반면 지혜가 불의한 마음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지혜의 가르침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세상 전체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은 그 안에서 들리는 사람의 작은 목소리도 놓치지 않으십니다.
아무도 듣지 못한 말도 사라지지 않는다
8절부터 11절까지는 듣는다는 주제가 반복됩니다.
우선 8절에서 불의한 말은 결국 드러난다고 선언합니다. 9절에서는 사람이 꾸미는 일과 그가 한 말이 조사를 받는 장면을 제시합니다.
저자는 땅을 재판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도 하나님의 조사와 심판 앞에 서는 존재로 나타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다스리는 사람과 재판관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 판단권을 행사하는 사람의 생각과 말까지 조사를 받습니다.
사람의 권력은 최종적인 판단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질투하는 귀로 모든 것을 들으시고, 투덜거리는 소리도 숨겨지지 않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10 · 두루새김
「질투하는 귀」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신체를 설명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말에 얼마나 예민하게 주의를 기울이시는지 보여 주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질투는 자기 백성과의 관계에 대한 열심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출애굽기 34:14). 이 구절에서도 하나님이 불의를 무심하게 흘려듣지 않으신다는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이야기에서는 투덜거림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출애굽기 16:7–12와 민수기 14:26–29에서 백성의 불평은 단순한 불편의 표현을 넘어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연결됩니다.
그렇다고 지혜서가 모든 불평이나 고통의 호소를 죄라고 규정한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시편에는 하나님께 억울함을 호소하고, 고난의 이유를 묻고, 도움을 구하는 기도가 많습니다. 시편 13편처럼 하나님이 자신을 잊으셨는지 묻는 기도도 있습니다.
지혜서의 문맥에서는 불의한 말, 모욕하는 말, 속임수, 남을 헐뜯는 말이 함께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경계하는 투덜거림은 고통을 정직하게 말하는 행위 일반보다 하나님을 불신하고 다른 사람을 해치는 말과 연결해서 이해하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11절의 경고는 더욱 강해집니다.
그러니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투덜거림을 조심하고, 혀로 남을 헐뜯지 마라. 몰래 한 말도 아무 결과 없이 사라지지 않으며, 거짓말로 남을 헐뜯는 입은 목숨을 빼앗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11 · 두루새김
말은 다른 사람의 명예와 삶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거짓말과 남을 헐뜯는 말은 공동체의 관계를 파괴하고 실제적인 고통을 일으킵니다. 동시에 그런 말을 하는 사람 자신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말은 사람이 품고 있는 생각을 바깥으로 드러내며, 그 생각이 실제 삶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는 자리입니다.
조금 더 깊이
11절의 「목숨을 빼앗기 때문」이 누구의 생명을 주로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문맥의 심판 경고를 고려하면 거짓말하는 사람 자신에게 돌아오는 멸망이 강조된다고 읽을 수 있지만, 말이 다른 사람에게 끼치는 피해 역시 빼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잠언 18:21이 죽음과 생명이 혀의 권세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도 이와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다
그릇된 삶을 살며 죽음을 찾아 나서지 마라. 너희의 손으로 하는 일로 멸망을 끌어들이지 마라.지혜서 1:12 · 두루새김
앞 단락에서는 혀를 조심하라는 명령이 중심이었습니다. 이제 저자는 손으로 하는 일을 말합니다. 사람의 말과 행동이 함께 나타나면서,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 전체가 문제로 떠오릅니다.
여기서 죽음을 찾아 나선다는 말은 반드시 의식적으로 죽기를 원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 삶의 방향을 잘못 정하여 결과적으로 죽음에 속한 길을 선택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살아 있는 것들이 멸망하는 일을 즐기지도 않으시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13 · 두루새김
세상이 고통스럽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만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그런 멸망을 원하시기 때문에 세상을 그렇게 만드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서는 세상의 고통과 죽음을 곧바로 하나님의 본래 의도와 같은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존재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세상에 생겨난 것들은 생명에 이롭고, 그 안에는 멸망시키는 독이 없습니다. 하데스의 왕국도 땅 위에 있지 않습니다.지혜서 1:14 · 두루새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창조하신 세계를 좋게 보십니다. 특히 창세기 1:31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매우 좋았다고 말합니다. 지혜서는 그 창조 이야기가 지닌 의미를 생명의 관점에서 다시 밝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본래 생명을 위해 존재합니다.
또한 「독」과 「하데스(ᾅδης)의 왕국」이라는 표현은 죽음의 파괴적인 지배를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하데스는 그리스어 성경에서 죽은 사람들의 영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애초부터 죽음의 왕국으로 주어지지 않았다는 선언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 구절을 세상에 실제로 독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생물학적 죽음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관찰 보고처럼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저자는 지금 눈앞에 있는 세상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본래 목적과 죽음의 지배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다면, 사람이 실제로 죽는 현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1장만으로 이 문제에 대한 완전한 대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지혜서는 뒤에서 사람이 멸망하지 않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과 죽음이 세상에 들어온 문제를 더 다룹니다(2:23–24). 또한 의로운 사람들이 죽는 현실도 외면하지 않습니다(3:1–4; 4:7).
따라서 이 장의 선언을 개인의 모든 죽음이 그 사람 자신의 잘못 때문에 일어났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다음 장에는 불의한 사람들이 의로운 사람을 죽이려 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2:12–20).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생명의 파괴가 아니라 생명이 존재하고 지켜지는 일입니다.
이것은 에스겔 18:23과 18:32에서 하나님이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돌이켜 살기를 원하신다고 선언하시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의는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15 · 두루새김
첫 절에서는 의를 사랑하라고 했고, 이제 의는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의를 사랑하는 것은 단순히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행동을 선택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의 목적과 일치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15절이 곧바로 의로운 개인은 육체적으로 죽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자는 아직 그런 주장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의와 죽음의 관계를 대조하며, 의가 죽음의 지배 아래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신명기 30:15–20에서는 이스라엘 앞에 생명과 죽음의 길이 놓입니다. 지혜서는 그 오래된 선택을 새로운 언어로 제시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의 길과, 사람이 스스로 불러들이는 죽음의 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세상에 생겨난 것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표현은 창조 세계에서 생겨난 것들을 가리킬 수도 있고, 세상에 생명을 낳는 힘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더라도 이 문장의 중심은 하나님의 창조가 본래 파괴가 아니라 생명을 향한다는 데 있습니다.
죽음을 친구로 삼은 사람들
그러나 하나님을 무시하는 이들은 손과 말로 죽음을 불러들였습니다. 죽음을 친구로 여겨 그리워하며 애를 태웠고, 죽음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몫에 속할 만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16 · 두루새김
죽음이 사람을 찾아온다는 일반적인 모습과 달리, 여기에서는 사람들이 죽음을 직접 불러들입니다. 앞에서 계속 등장했던 사람의 말과 행동이 이 구절에 다시 모입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불리한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좋은 것처럼 여길 수 있습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권력을 얻으면서 성공했다고 생각할 수 있고, 남을 해치면서 자신의 이익을 지켰다고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당장은 원하는 것을 얻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자의 관점에서 그러한 선택은 죽음과 가까워지는 길입니다.
여기서 「몫」은 누구에게 속하는지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고 선택하는 것과 관계를 맺습니다. 의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에 참여하지만, 불의를 선택하고 죽음을 친구로 삼는 사람은 결국 죽음의 몫에 속하게 됩니다.
이 마지막 절은 다음 장을 준비하기도 합니다. 2장에서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삶이 짧고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판단하며, 그 생각을 근거로 가난한 사람과 의로운 사람을 억압하려 합니다(2:1–20).
조금 더 깊이
특히 「죽음과 계약을 맺었습니다」라는 표현은 이사야 28:15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서에서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죽음과 계약을 맺고 스올과 협정을 맺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거짓과 속임을 자신의 피난처로 삼으면서도 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지혜서의 표현은 이사야의 이미지를 다시 사용하는 것으로 볼 만합니다. 두 본문 모두 사람들이 멸망을 가져올 선택을 안전한 길인 것처럼 착각한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의를 사랑하는 삶과 죽음을 사랑하는 삶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는가는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말하며 행하는지를 결정하고, 결국 그가 어느 길에 속하게 되는지를 드러냅니다. 의는 생명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좋게 여기시는 것을 우리도 좋게 여기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장을 읽으면서 자신의 모든 생각을 두려워하거나, 모든 고난과 죽음을 개인의 죄에 대한 벌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속임을 모르고 지나치시는 분이 아니며, 동시에 사람의 멸망을 기뻐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그분은 생명을 위해 창조하셨고, 그 생명을 파괴하는 불의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1장은 그 반대편의 모습을 보여 주며 끝납니다.
사람들은 손과 말로 죽음을 불러들이고, 죽음을 친구로 여기며, 마침내 죽음과 계약을 맺습니다. 그들은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선택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자는 그들이 누구와 손을 잡고 있는지 독자에게 보여 줍니다.
의를 사랑하라는 초청으로 시작한 지혜서의 첫 장은, 죽음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의 모습으로 끝납니다. 그 사이에서 하나님은 생명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신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