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서 풀어 읽기 · 11장
이 장의 자리 · 10–12장 · 역사를 이끈 지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모든 이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
지혜서 11장은 물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이집트에는 커다란 강이 있었습니다. 그 강은 끊임없이 물을 공급했고, 사람들은 그 물에 의지하여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집트를 심판하실 때 강물은 피로 변했습니다.
반대로 광야를 걷던 이스라엘에게는 강도 우물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마주한 것은 깎아지른 바위와 단단한 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돌에서 물이 나오게 하셨습니다.
물을 가진 사람들은 목말라했고, 물이 없는 곳을 걷던 사람들은 물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더욱 큰 역설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실 능력이 부족해서 기다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모든 것을 파괴하실 필요도 없는 분이십니다.
광야에는 물이 없었지만, 바위에서 물이 나왔습니다
지혜는 거룩한 예언자를 통해 그들이 하는 일이 잘되게 했습니다.지혜서 11:1 · 두루새김
10장 마지막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바다를 건넌 뒤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11장은 그 이후의 광야 여정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거룩한 예언자」는 모세를 가리킵니다. 모세는 백성을 인도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며, 여러 가지 일을 수행합니다. 그러나 그 일을 이루어 가는 근본적인 능력은 지혜에서 나옵니다.
그들은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를 지나가고,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천막을 치며, 적들과 맞섭니다. 이 묘사에서 광야는 단순히 도시가 없는 장소가 아닙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조건들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지 않은 곳입니다.
그들은 목이 말라 당신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깎아지른 바위에서 물을 얻었고, 단단한 돌에서 나온 물로 목마름을 풀었습니다.지혜서 11:4 · 두루새김
이 장면은 출애굽기 17:1–7에서 하나님께서 호렙의 바위에서 물을 내신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민수기 20:2–13에도 물이 없어 백성이 모세와 아론에게 항의하고, 바위에서 물이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혜서는 이 사건들의 세부 사항을 모두 구별하여 설명하지 않습니다. 광야에서 바위를 통해 물을 공급받은 전통을 하나님의 구원 행위로 묘사합니다.
하나는 「깎아지른 바위」이고, 다른 하나는 「단단한 돌」입니다. 두 표현 모두 쉽게 물을 얻을 만한 장소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물은 단순한 공급품이 아니라 목마름의 치료입니다
이아마는 치료나 치유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원문에서는 단순히 마실 물이 주어졌다고만 하지 않습니다. 목마름을 치료할 것이 주어졌다고 표현합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물을 가지고 있었지만 마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물이 없었지만 목마름을 치료받았습니다.
물이 있다는 사실과 생명을 살리는 물을 마실 수 있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세상을 통하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자연적 조건만으로 생명이 보장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단순히 이스라엘이 도움받았다는 사실을 넘어, 이집트가 받은 심판을 다시 이해하도록 만듭니다.
이집트의 강과 광야의 바위 — 같은 것이 심판과 구원의 도구가 됩니다
원수들을 벌하는 데 쓰인 바로 그것들로, 당신의 백성은 어려움에 빠졌을 때 도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1:5 · 두루새김
저자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전혀 별개의 사건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같은 피조물이 어떤 사람에게는 심판의 도구가 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구원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 사례는 물입니다.
풍부한 강물이 피로 변합니다 (6절)
끊임없이 흐르던 강의 샘물 대신 엉긴 피가 가득해지자, 원수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지혜서 11:6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출애굽기 7:14–25의 첫 번째 재앙과 연결됩니다.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나일강을 치자 강물이 피로 변합니다. 물고기들이 죽고 강에서 악취가 나며, 이집트 사람들은 그 물을 마실 수 없게 됩니다.
나일강은 이전에도 죽음의 도구였습니다 (7절)
아기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꾸짖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백성에게 뜻밖에도 넉넉한 물을 주셨습니다.지혜서 11:7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출애굽기 1:22를 떠올리게 합니다. 바로는 자기 백성에게 히브리 남자아이를 나일강에 던지라고 명령했습니다.
나일강은 이집트 사람들에게 생명을 유지해 주는 강이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아이들이 죽임당하도록 명령받은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강 자체가 피로 변합니다.
생명을 주어야 할 물을 죽음의 도구로 삼았던 사람들이, 자기들의 물에서 죽음의 흔적을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출애굽기 7장은 나일강이 피로 변한 사건을 설명하면서 이처럼 아기들을 죽이라는 명령과 직접 연결해 주지는 않습니다. 이 연결은 지혜서가 출애굽의 여러 사건을 함께 읽으면서 제시하는 신학적 해석입니다.
이스라엘의 목마름도 의미가 있었습니까? (8절)
그때 백성이 겪은 목마름을 통해, 그들에게 맞서던 원수들을 어떻게 벌하셨는지 보여 주셨습니다.지혜서 11:8 · 두루새김
이스라엘은 물이 없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자신의 몸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 사람들이 겪은 재앙이 어떤 고통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목마르던 당시 이미 모든 사건의 의미를 깨달았다는 역사적 진술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지혜서 저자가 두 경험을 연결하여 해석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목마름은 공급받는 경험으로 이어졌고, 이집트의 목마름은 자신들이 저지른 악에 대한 심판으로 제시됩니다.
한쪽에는 아버지처럼, 다른 쪽에는 왕처럼
백성은 자비로운 징계를 받으며 시험을 겪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무시하는 이들이 당신의 분노 속에서 심판받으며 얼마나 고통을 겪는지 알게 되었습니다.지혜서 11:9 · 두루새김
두 집단 모두 고통을 경험했지만, 저자는 그 고통의 목적과 성격을 같게 보지 않습니다. 10절에서는 이 차이를 두 인물의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당신은 아버지처럼 백성을 타이르며 시험하셨지만, 가차 없는 왕처럼 원수들에게 죄가 있다고 판결하며 그들을 심문하셨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1:10 · 두루새김
여기서 아버지는 자녀를 돌보며 바로잡는 사람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왕은 죄를 심문하고 판결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장은 23절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이를 불쌍히 여기십니다」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왕의 대비를 하나님께서 어떤 민족은 본질적으로 사랑하시고 다른 민족은 본질적으로 미워하신다는 원칙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는 특정한 구원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르게 행동하셨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인도하시는 백성입니다. 이집트는 그 백성을 억압하고 아이들을 죽이도록 명령한 세력입니다.
고통은 언제나 하나님의 심판을 뜻합니까?
본문은 이집트의 재앙과 이스라엘의 광야 경험이라는 특정한 사건들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지금 어떤 사람이 고통받는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벌하고 계신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욥기는 의로운 사람도 극심한 고난을 겪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욥의 친구들은 고난을 죄의 결과로 단정하지만, 그들의 설명은 결국 하나님의 책망을 받습니다(욥기 42:7).
지혜서 11장은 고통의 원인을 일반적으로 판정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두 번 슬퍼했습니다 (11–13절)
두 배의 슬픔이 그들을 사로잡았고, 지난 일을 떠올릴 때마다 탄식이 나왔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1:12 · 두루새김
「두 배의 슬픔」이 정확히 어떤 두 종류의 고통을 가리키는지는 문장만으로 완전히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12–13절의 흐름을 보면 적어도 두 측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었던 재앙을 기억하며 괴로워했습니다. 동시에 자신들에게 재앙이 되었던 것이 이스라엘에게는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자기들이 벌받는 데 쓰인 것들로 백성이 도움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원수들은 주를 알게 되었습니다.지혜서 11:13 · 두루새김
이집트의 심판은 단순히 그들을 괴롭히는 사건으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계기로도 묘사됩니다.
하지만 주를 알게 되었다는 말이 그들 모두가 회개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었다는 뜻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하나님의 행동을 알아보게 되었다고 말할 뿐, 그 이후에 믿음으로 어떻게 응답했는지까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강가에 놓였던 아기가 이제 놀라움의 대상이 됩니다 (14절)
원수들은 오래전에 내다 버려졌던 사람을 비웃으며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일이 어떻게 끝났는지 보고 그를 놀랍게 여겼습니다. 그들이 겪은 목마름은 의로운 이들이 겪은 목마름과 달랐습니다.지혜서 11:14 · 두루새김
여기서 가리키는 인물은 모세입니다. 출애굽기 2:3에서 모세의 어머니는 아이를 더 숨길 수 없게 되자 갈대 상자에 넣어 나일강 갈대 사이에 둡니다. 그 모세가 훗날 이집트의 왕 앞에 서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냅니다.
나일강은 히브리 아이들이 죽임당하도록 명령받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바로 그 강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그가 자라 이스라엘을 이끌었고, 이집트의 강물은 심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바위의 물을 마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죽음의 도구로 삼은 곳에서도 생명을 보존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 이 이야기들을 연결합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출애굽기 2장은 이집트 사람들이 실제로 아기 모세를 보고 비웃었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지혜서의 표현은 모세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집트의 태도를 그의 생애 전체에 걸쳐 요약하는 문학적 서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숭배하던 동물들이 심판의 도구가 됩니다
15절에 이르면 이야기는 물에서 동물로 옮겨 갑니다.
그들은 어리석고 불의한 생각에 이끌려, 판단할 줄 모르는 기어 다니는 동물들과 하찮은 짐승들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당신은 그들의 그릇된 생각에 대한 벌로, 판단할 줄 모르는 동물 떼를 보내셨습니다.지혜서 11:15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이집트가 동물들을 신으로 섬긴 일과 출애굽기의 동물 재앙을 연결합니다. 고대 이집트의 종교에서 특정 동물들은 신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나 신들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신들은 동물의 모습이나 동물 머리를 가진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이집트 사람이 모든 동물을 똑같이 숭배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지혜서가 비판하는 것은 피조물을 신으로 섬기는 태도입니다.
출애굽기에는 개구리와 이, 파리 떼 등의 재앙이 등장합니다(출애굽기 8장). 지혜서는 이런 동물 재앙을 이집트의 잘못된 숭배에 대한 심판으로 해석합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어리석고 불의한 생각」에 이끌려 「판단할 줄 모르는」 동물들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판단할 줄 모르는」 동물들을 보내 그들을 벌하셨습니다.
그들이 높였던 피조물이 그들에게 고통을 가져오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죄를 지은 바로 그것으로 벌을 받습니다 (16절)
사람은 죄를 짓는 데 쓴 바로 그것들로 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지혜서 11:16 · 두루새김
이 구절은 5절에서 처음 제시된 원리를 더욱 구체화합니다. 5절에서는 같은 것이 한편에는 심판의 도구가 되고 다른 편에는 도움의 도구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16절에서는 죄에 사용한 것 자체가 심판의 도구가 된다고 말합니다.
에스더서 7:9–10에서 하만은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준비한 나무에 자신이 매달립니다. 시편 7:15–16도 악인이 구덩이를 파다가 자신이 그 구덩이에 빠지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이것은 악이 언제나 즉시 같은 방식으로 벌을 받는다는 기계적인 법칙이 아닙니다. 악인이 저지른 일이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도덕적 역전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지혜서 11장에서 이러한 역전은 하나님의 심판이 아무렇게나 가해지는 폭력이 아니라, 인간이 저지른 악을 드러내는 일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동물 떼 같은 제한된 수단을 사용하셨는지를 묻기 시작합니다. 그 물음은 이 장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발견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훨씬 더 무서운 일을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당신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손으로, 아무 모양도 없는 물질에서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그러니 원수들에게 곰 떼나 사나운 사자들을 보내는 일도 어렵지 않으셨습니다.지혜서 11:17 · 두루새김
여기서부터 저자는 실제로 일어난 출애굽의 재앙을 설명하는 데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하실 수도 있었던 일을 상상합니다. 심지어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괴물들을 창조하여 보내실 수도 있었습니다.
또 분노로 가득 찬 낯선 맹수들을 새로 지어 보내실 수도 있었습니다. 불을 내뿜거나, 악취 나는 연기를 뿜거나, 눈에서 무서운 불꽃을 번쩍이는 짐승들 말입니다.지혜서 11:18 · 두루새김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런 존재들을 실제로 보내셨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보내실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기 위한 상상적 묘사입니다.
가장 강한 능력은 무엇을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20절)
그런 짐승들이 없어도, 원수들은 벌에 쫓기고 당신의 힘찬 숨결에 흩날려 단 한 번의 숨결에 쓰러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모든 것을 분량과 수와 무게에 따라 정하셨습니다.지혜서 11:20 · 두루새김
이 「그러나」가 결정적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무너뜨리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능력을 무제한으로 쏟아 내지 않으십니다.
「분량과 수와 무게」, 이 표현들은 모든 것을 질서 있고 일정한 기준에 따라 정하신다는 뜻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의 질서를 묘사하는 말이면서,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심판의 능력을 행사하시는 방식과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힘을 가지고 계시지만, 그 힘을 아무렇게나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조금 더 깊이
「아무 모양도 없는 물질」, 이 표현은 창세기 1:2의 창조 이전 질서가 갖추어지지 않은 땅의 모습을 떠올리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서의 표현에는 그리스어 철학의 물질 개념과 만나는 언어도 담겨 있습니다. 한 가지 해석은 하나님께서 아무 모양도 없는 물질에 질서를 부여하여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뜻으로 읽는 것입니다. 다른 해석은 이 표현이 창조의 구체적인 시작 방식을 설명하기보다, 혼돈과 무질서에서 질서 있는 세계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한다고 봅니다. 어느 경우든 이 구절만으로 그 물질이 하나님과 무관하게 영원히 존재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이 표현 하나만으로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 전체가 분명하게 설명되었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세계를 창조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이집트 사람들을 벌하실 어떤 수단도 마련하지 못하실 이유가 없다는 것이 문맥의 논점입니다.
온 세상은 저울의 작은 무게와 새벽 이슬 한 방울 같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큰 힘을 지니고 계십니다. 누가 당신 팔의 힘에 맞설 수 있겠습니까?지혜서 11:21 · 두루새김
저자는 하나님께서 힘을 절제하시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다시 하나님의 압도적인 능력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곧이어 매우 섬세한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온 세상은 당신 앞에서 저울을 아주 살짝 기울일 만큼 작은 무게와 같고, 땅에 내린 새벽 이슬 한 방울과 같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1:22 · 두루새김
인간에게 세상은 너무나 큽니다. 광야도 넓고, 강도 깊으며, 산도 높습니다. 이집트의 왕은 강력하고, 군대는 위협적입니다.
이 비유는 이사야 40:15와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민족들이 양동이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 위의 작은 티끌과 같다고 묘사됩니다. 두 본문 모두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에 비해 작은 인간 세계를 대조합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서 이처럼 작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멸하시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집트 같은 강력한 나라조차 하나님 앞에서 독립적인 힘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왜 모든 것을 곧바로 없애지 않으십니까?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모든 이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러나 당신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모든 이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사람들이 죄에서 돌아서도록 그들의 죄를 눈감아 주십니다.지혜서 11:23 · 두루새김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에서는 전능함과 자비가 서로 다른 성품으로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능력이란 원하는 일을 이루는 힘이고, 자비란 상대를 불쌍히 여겨 그 힘을 부드럽게 사용하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저자는 두 성품을 긴밀하게 연결합니다.
어떤 통치자는 자신의 권력이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상대를 즉시 제거하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불안에 사로잡히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분의 능력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기다리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보지 못하십니까?
23절에서는 「그들의 죄를 눈감아 주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을 하나님께서 악을 알아차리지 못하시거나, 죄에 아무 관심도 없으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는 죄가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은 사람에게 즉시 모든 심판을 내리지 않고 기회를 주시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자신의 길에서 돌이킬 수 있도록 시간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죄를 지은 바로 그것으로 벌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11:16). 이제는 하나님께서 모든 이를 불쌍히 여기시고 죄에서 돌아서도록 죄를 눈감아 주신다고 말합니다.
두 진술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시지만, 죄인을 곧바로 멸하시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본문이 모든 사람이 실제로 회개한다고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비를 베푸시는 것과 사람이 그 자비에 응답하는 것은 서로 구별됩니다.
이집트 사람들도 하나님의 자비에서 제외되지 않습니까?
23절의 「모든 이를」이라는 표현은 앞부분을 다시 읽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이스라엘만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 사람들을 심판하셨다는 사실과, 그들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분의 자비 아래 있다는 사실은 함께 말해질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바로 이 점을 창조의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는 마음이나 생각의 변화, 돌이킴을 뜻하며, 여기서는 죄에서 돌아서는 회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것을 미워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고, 만드신 것 가운데 어느 것도 역겹게 여기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미워하셨다면 그것을 짓지 않으셨을 것입니다.지혜서 11:24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앞서 심판받은 이집트 사람들까지 포함하는 넓은 진술입니다. 그들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악과 사랑하시는 피조물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을 사랑하신다는 것이 인간이 하는 모든 행동을 기뻐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혜서의 앞부분은 이미 악과 불의를 분명하게 비판했습니다.
지혜서 1:13–15에서는 하나님께서 죽음을 만드시지 않으셨으며, 피조물이 존재하도록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또한 의가 죽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11:24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의 존재 자체를 선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악한 행동은 심판의 대상이지만, 그 행동을 한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지으신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사람이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기를 바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까닭은 죄를 가볍게 여기시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만드신 존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지합니다 (25절)
당신께서 원하지 않으셨다면, 무엇이 계속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 당신께서 부르지 않으신 것이 어떻게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지혜서 11:25 · 두루새김
24절에서는 창조의 시작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25절에서는 창조된 존재가 계속 살아가는 문제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신 뒤 그 세상과 관계를 끊으신 분이 아닙니다. 피조물이 계속 존재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뜻에 의지합니다.
시편 104:27–30에서는 모든 생물이 하나님께 먹을 것을 바라며,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면 받아먹고, 하나님께서 생기를 거두시면 죽어 흙으로 돌아간다고 묘사합니다. 그 시편에서 하나님은 생명의 시작뿐 아니라 생명이 계속되는 일에도 관계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특별한 위기에서만 나타나는 행동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존재를 허락하시고 보존하시는 일 자체가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돌보심과 연결됩니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인님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인님, 당신은 모든 것을 아끼십니다. 모두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1:26 · 두루새김
주인이라는 말은 소유와 권위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 주인은 자신에게 속한 것들을 함부로 파괴하시는 주인이 아닙니다. 그는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은 무엇을 뜻합니까?
인간 사회에서 누군가가 무엇을 소유한다는 사실은 때로 그것을 마음대로 처분할 권한이 있다는 주장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소유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설명됩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을 아끼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다는 사실은 세상을 마음대로 파괴하셔도 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만드신 세계를 소중히 여기시고 보존하신다는 사실로 이어집니다.
물론 하나님의 심판과 인간의 판단을 그대로 같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지 못하며, 불완전한 판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한계 때문에 인간은 더욱 신중하게 힘을 사용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권한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상대에게 가능한 모든 고통을 줄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이 사람의 존엄을 무시할 이유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맺음말 — 저울 위의 작은 무게와 새벽 이슬 한 방울
그런데 지혜서의 저자는 그 작음을 인간의 무가치함으로 연결하지 않습니다. 그처럼 작은 세상조차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멸하실 수 있지만, 모든 것을 아끼십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서 새벽 이슬 한 방울처럼 작을지라도, 그 이슬은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끼십니다.
지혜서 11장은 바로 그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인의 모습에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