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서 풀어 읽기 · 19장
이 장의 자리 · 16–19장 · 갈라진 두 백성의 길
바다가 길이 되고 창조 세계가 노래하다
바다 한가운데 푸른 풀이 돋아난 들판이 나타납니다. 조금 전까지 거센 물결이 일던 곳을 사람들이 걸어갑니다. 그들은 말처럼 풀을 뜯고 어린양처럼 뛰놀며 자신들을 구해 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지혜서 19장이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을 묘사하는 모습입니다.
출애굽기에서는 바닷물이 갈라지고 마른 땅이 드러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혜서의 저자는 그 길을 「푸른 풀이 돋은 들판」이라고 부릅니다. 위험한 바다가 생명이 자라나는 땅처럼 변한 것입니다.
온 창조 세계가 하나의 악기처럼 묘사됩니다. 물과 불, 땅과 생물들이 제각기 다른 역할을 하면서도 하나의 새로운 가락을 이루는 것입니다.
왜 저자는 출애굽 이야기의 결말을 이렇게 표현했을까요?
저자는 바다가 갈라진 사건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대했는지, 오래전에 찾아온 나그네들을 어떻게 노예로 만들었는지도 다시 살펴봅니다. 심지어 소돔 사람들이 나그네를 대했던 모습까지 가져와 이집트와 비교합니다.
자연 세계의 놀라운 변화와 인간 사회의 불의가 한 장 안에서 만납니다.
그 둘을 연결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통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다를 길로 바꾸실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억누르는 권력이 얼마나 잘못된 질서를 만들어 놓았는지도 드러내십니다. 지혜서는 출애굽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며 인간은 그 세계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상을 치르면서도 다시 노예들을 뒤쫓는 사람들
그러나 하나님을 무시하는 이들에게는 자비 없는 분노가 끝까지 닥쳤습니다. 당신은 그들이 앞으로 할 일까지도 미리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9:1 · 두루새김
이 장은 「그러나」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앞 장의 끝에서는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닥친 재앙이 오래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제사장이 백성을 위해 나서면서 죽음이 멈추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집트 사람들이 끝까지 심판을 받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 차이를 단순히 하나님께서 한 민족에게는 자비로우시고 다른 민족에게는 자비가 없으셨다는 일반 원리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 장의 초점은 이집트 사람들이 여러 차례 재앙을 겪고도 이스라엘에 대한 억압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이 백성을 떠나보내기로 마음을 돌려 서둘러 보내고서도, 후회하며 뒤쫓으리라는 것을 말입니다.지혜서 19:2 · 두루새김
출애굽기 12:31–33에서는 이집트 사람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이스라엘을 데리고 떠나라고 재촉합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14:5에서는 파라오와 신하들이 자신들이 이스라엘을 놓아주었다는 사실을 후회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떠나자 자기들을 섬기던 노동력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추격에 나섭니다.
그들은 아직 죽은 이들을 두고 슬퍼하며 무덤 곁에서 울면서도, 또다시 어리석은 생각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떠나 달라고 애원하며 내보낸 이들을 도망자처럼 뒤쫓았습니다.지혜서 19:3 · 두루새김
저자는 그들이 고통스러운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가 있는 백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재앙 때문에 잠시 놓아주었을 뿐, 상황이 달라지자 다시 자신들이 소유하고 통제해야 할 사람들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재앙의 고통은 경험했지만, 그 고통을 낳은 자신의 불의를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받아 마땅한 피할 수 없는 운명이 그들을 이런 끝으로 몰아가며, 이미 겪은 일들을 잊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겪던 고통에 더해 남은 벌까지 모두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지혜서 19:4 · 두루새김
그들은 이전 재앙들을 경험했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끔찍한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같은 잘못을 반복합니다.
여기서 잊는다는 것은 단순히 기억에서 사건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경험이 자신의 판단과 행동을 바꾸도록 허용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죽은 자녀들을 두고 슬퍼하면서도 그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이 무엇을 고집했는지는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슬픔 자체를 비난하는 말이 아닙니다. 저자가 문제 삼는 것은 고통을 겪은 뒤에도 타인을 억압하려는 의지를 버리지 못한 태도입니다.
5절에서 마침내 두 무리의 길이 갈라집니다.
또 당신의 백성은 놀라운 길을 지나게 하고, 원수들은 기이한 죽음을 맞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지혜서 19:5 · 두루새김
이스라엘과 이집트 군대는 모두 바다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다에 들어가는 목적은 다릅니다. 이스라엘은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다를 건너야 합니다. 이집트 군대는 그들을 다시 붙잡기 위해 뒤쫓습니다.
같은 바다이지만, 그 바다가 그들에게 가져오는 결과는 달라집니다.
조금 더 깊이
「떠나보내기로 마음을 돌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표현은 그들이 마음을 바꾸어 떠나보냈다는 뜻과, 이스라엘을 떠나라고 재촉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여지가 있습니다. 따라서 4절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은 그들의 선택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운명이라기보다, 그들의 고집이 마침내 피할 수 없는 심판의 결말로 이어졌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문맥에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다를 다시 빚으시다
온 창조 세계가 저마다의 종류에 따라 처음부터 다시 빚어지며, 각각 주어진 명령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아무 해도 입지 않고 보호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지혜서 19:6 · 두루새김
특히 「처음부터 다시」라는 표현 때문에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물을 한곳으로 모으시고 마른 땅을 드러내셨습니다(창세기 1:9–10). 창조 때 하나님께서 물과 땅을 구별하셨듯이, 출애굽의 순간에도 물과 땅의 관계를 새롭게 정하시는 것입니다.
저자는 출애굽을 창조주께서 자신의 세계 안에서 다시 일하시는 사건으로 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전에 세상을 만드신 뒤 그 세계를 떠나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금도 그 세계를 다스리시며,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지으신 세계를 사용하십니다. 또한 「저마다의 종류에 따라」라는 표현은 창조 세계가 무질서한 혼돈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로서 그분의 명령에 응답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백성이 머물던 곳에 그늘을 드리우는 구름이 보였습니다. 전에 물이 있던 곳에서는 마른 땅이 솟아나는 것이 보였습니다. 홍해에서는 막힘없는 길이, 거센 물결에서는 푸른 풀이 돋은 들판이 나타났습니다.지혜서 19:7 · 두루새김
저자는 바다가 생명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땅처럼 변했다는 사실을 시적으로 묘사합니다. 이 이미지는 시편 114:3–4에서 바다가 도망하고 산들이 숫양처럼 뛰는 장면과도 연결됩니다. 그 시편 역시 출애굽을 자연 세계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에 응답하는 사건으로 노래합니다.
당신의 손으로 보호받는 온 민족은 놀라운 기적들을 보며 함께 그곳을 지나갔습니다.지혜서 19:8 · 두루새김
이것은 출애굽이 공동체 전체가 함께 겪은 사건임을 보여 줍니다. 물론 출애굽기는 그 공동체 안에도 믿음이 약한 사람과 원망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바다가 갈라졌을 때 그들은 함께 그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9절에서는 그들이 바다를 건넌 뒤의 모습이 뜻밖의 비유로 표현됩니다.
주님, 그들은 말처럼 풀을 뜯고 어린양처럼 뛰놀며, 자기들을 구해 내시는 당신을 찬양했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9:9 · 두루새김
저자는 구원받은 백성의 기쁨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동물의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이들은 조금 전까지 죽음의 위협을 피해 바다를 건넜습니다. 그런데 이제 두려움에 질려 숨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유롭게 뛰노는 어린양처럼 묘사됩니다.
물이 갈라진 기적의 마지막 모습은 거대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그 길을 지나 자유롭게 움직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입니다.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에는 바다 밑에서 실제로 초원이 자라났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바다 밑바닥에 어떤 식물이 자랐는지에 관한 역사적 관찰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9절은 출애굽기 15:1–21의 승리의 노래를 떠올리게 하지만, 그곳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말처럼 풀을 뜯거나 어린양처럼 뛰놀았다는 묘사는 없습니다. 출애굽기 14장에서는 이집트의 말들이 전차를 끌고 이스라엘을 추격합니다. 그러나 지혜서 19장에서는 이스라엘이 말처럼 자유롭게 움직입니다. 다만 본문이 의도적으로 이집트의 군마와 직접 대조했다고 밝히지는 않습니다. 이는 출애굽 이야기의 문맥을 고려할 때 가능한 문학적 연결입니다.
땅과 강이 전혀 다른 것을 내놓던 날들
그들은 나그네로 살던 때의 일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땅이 짐승들을 낳는 대신 모기를 내놓고, 강이 물속에 사는 것들 대신 개구리 떼를 토해 냈던 일입니다.지혜서 19:10 · 두루새김
출애굽기 8장에는 개구리 재앙과 모기 재앙이 등장합니다. 개구리들은 강과 물에서 올라와 이집트 땅을 뒤덮었습니다. 모기들은 땅의 먼지와 관련하여 등장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땅과 물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생물들을 내놓습니다. 그것은 생명이 번성하는 창조의 질서입니다. 그런데 이집트의 재앙에서는 땅과 강에서 나온 생물들이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저자는 정상적인 생명의 번성과 재앙을 일으키는 생물들의 출현을 대조합니다.
강은 평소에 물고기와 여러 물속 생물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러나 재앙의 순간에는 개구리 떼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와 이집트 사람들의 생활 공간을 침범합니다. 이 모습은 창조 세계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심판의 역할을 하는 장면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11절에서는 반대 방향의 일이 나타납니다.
나중에는 새들이 새롭게 생겨나는 일도 보았습니다. 먹고 싶은 마음에 이끌려 맛있는 음식을 청했을 때였습니다.지혜서 19:11 · 두루새김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고기를 요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메추라기를 보내셨습니다(출애굽기 16:13; 민수기 11:31). 그런데 지혜서에서는 이 사건을 「새들이 새롭게 생겨나는 일」로 묘사합니다.
이 표현 역시 창조의 말과 연결됩니다. 창세기 1:20–22에서 하나님께서는 물에 생물이 번성하게 하시고, 새들이 땅 위 하늘을 날게 하십니다. 이제 광야에서는 하나님께서 새들을 통해 백성의 먹을 것을 마련하십니다.
그들을 위로하려고 바다에서 메추라기들이 올라왔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9:12 · 두루새김
메추라기가 바다에서 왔다는 표현은 민수기 11:31에서 하나님께서 바람을 일으켜 바다 쪽에서 메추라기를 몰아오신 장면과 연결됩니다. 이집트의 강에서는 재앙을 일으키는 개구리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반면 이스라엘에게는 바다 쪽에서 먹을거리가 찾아왔습니다.
민수기 11장에서는 메추라기가 주어진 뒤 백성의 탐욕에 대한 재앙이 이어집니다. 반면 여기서는 메추라기가 하나님의 위로로 소개됩니다. 저자는 그 사건 가운데 먹을 것을 마련해 주신 면을 선택하여 이집트의 재앙과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대목이 이스라엘의 욕망을 전적으로 긍정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겪었던 일을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기억에는 이집트의 재앙과 광야에서 받은 먹을거리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두 사건을 나란히 떠올리면서, 그들은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손 안에서 자신들을 어떻게 보호하고 먹였는지를 새롭게 이해합니다.
이제 저자는 이집트 사람들이 왜 그러한 심판을 받았는지 다시 묻습니다.
그런데 그 답은 자연현상이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발견됩니다.
처음에는 손님으로 맞이했다가 나중에는 노예로 삼다
또 죄인들에게 벌이 닥쳤습니다. 맹렬한 벼락으로 그 벌을 알리는 징조가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악행 때문에 마땅히 고통을 겪었습니다. 나그네를 더욱 사납게 미워하는 일을 일삼았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9:13 · 두루새김
이집트의 잘못을 단순히 하나님을 알지 못한 종교적 무지나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일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들의 죄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의 능력을 인정하는 일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분이 만드신 세계 안에서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와 연결됩니다.
13절의 「맹렬한 벼락」은 이집트에 내려진 우박 재앙을 떠올리게 합니다(출애굽기 9:23–24). 그런데 저자는 그 벼락을 「그 벌을 알리는 징조」라고 부릅니다. 이집트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행동을 돌아볼 기회가 주어졌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끝내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앞의 사람들은 낯선 이들이 찾아왔을 때 맞아들이지 않았지만, 이 원수들은 자기들을 도와준 나그네들을 노예로 삼았습니다.지혜서 19:14 · 두루새김
「앞의 사람들」은 소돔 사람들입니다. 창세기 19장에서는 두 방문자가 소돔에 도착하고 롯이 그들을 자기 집으로 맞이합니다. 그런데 소돔 사람들이 그 집으로 몰려와 손님들에게 폭력을 가하려고 합니다(창세기 19:1–9).
다만 창세기 19장의 사건을 단순히 낯선 사람을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은 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야기에는 손님들을 향한 집단적인 폭력과 성폭력의 위협이 등장합니다. 지혜서의 저자는 그 이야기에서 나그네를 받아들이지 않고 적대했다는 면을 선택하여 이집트의 죄와 비교합니다.
소돔 사람들이 적대했던 이들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나그네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 사람들이 노예로 삼은 이들은 자기들을 도와준 나그네들이었습니다.
요셉은 이집트에서 높은 지위에 올라 기근에 대비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곡식을 저장하고 나누어 이집트가 기근을 견딜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창세기 41:46–57). 그 뒤 요셉의 가족이 이집트에 왔을 때 파라오는 그들을 받아들이고 좋은 땅에 정착하도록 허락했습니다(창세기 45:16–20; 47:1–6).
그런데 시간이 흘러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이 등장하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출애굽기 1:8–14).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위협적인 집단으로 여기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들에게 강제로 일을 시켰습니다. 지혜서가 「자기들을 도와준 나그네들을 노예로 삼았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역사를 압축한 표현입니다.
이집트의 죄는 나그네를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은 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미 맺어진 관계와 받은 은혜를 저버리고, 함께 살던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앞의 사람들에게도 반드시 벌이 닥칠 것입니다. 낯선 이들이 왔을 때 미워하며 대했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9:15 · 두루새김
저자는 이집트의 죄가 더 무겁다고 말하기 위해 소돔의 죄를 가볍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잘못에는 더욱 깊은 배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원수들은 잔치를 벌여 맞아들였던 사람들, 곧 이미 자기들과 같은 권리를 누리던 사람들에게 견디기 힘든 일을 시켜 괴롭혔습니다.지혜서 19:16 · 두루새김
본문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이집트 사회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함께 살아갈 자리를 얻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때 누렸던 관계와 지위가 뒤집혔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변화를 단순한 정치적 상황의 변화로 보지 않습니다. 사람을 대하는 도덕적 질서가 무너진 사건으로 판단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그분의 뜻을 따라 생명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움직이지만, 이집트의 권력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이스라엘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다른 민족의 나그네를 억압해도 된다는 권리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억압받던 나그네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합니다. 출애굽기 22:21과 레위기 19:33–34에서는 이스라엘에게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라고 명하며, 그들 자신도 이집트에서 나그네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합니다.
그들이 경험한 구원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할 이유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배우는 근거가 됩니다.
조금 더 깊이
15절의 「벌이 닥칠 것입니다」라는 그리스어 동사는 실제로 미래형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이루어질 심판을 가리키는 말로 읽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알려진 소돔 사건을 돌아보면서 그들의 행동이 마땅히 심판받을 일이라는 판정을 미래의 말투로 표현했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 구절만으로 두 해석 가운데 하나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16절의 「같은 권리」가 현대적 의미의 완전한 시민권이나 법률상 동일한 권리 전체를 뜻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남의 문을 위협하던 사람들이 자기 문도 찾지 못하다
이 원수들은 눈이 멀게 되는 벌도 받았습니다. 의로운 이의 문 앞에 있던 그 사람들이 당한 것과 같았습니다. 끝없는 어둠에 둘러싸였을 때, 그들은 저마다 자기 집 문으로 통하는 길을 찾았습니다.지혜서 19:17 · 두루새김
이 절은 창세기 19장의 소돔 이야기와 출애굽기 10장의 어둠 재앙을 연결합니다.
소돔에서는 사람들이 롯의 집에 찾아온 방문자들을 해치려고 했습니다. 그때 방문자들은 롯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고, 문밖에 있던 사람들의 눈을 멀게 했습니다. 창세기 19:11에 따르면 그들은 문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집트 사람들도 어둠 속에서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출애굽기 10:23은 이집트 사람들이 서로를 보지 못했고, 아무도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지 못했다고 기록합니다. 지혜서는 이 두 사건을 나란히 놓습니다. 두 사건 모두 다른 사람의 자유와 안전을 침해하려는 사람들에게 일어났습니다.
소돔 사람들은 남의 집에 들어가려 했지만 문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빼앗았지만 자기 집에서 나가는 길조차 찾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의 출입과 자유를 마음대로 통제하려 했던 사람들이, 이제 자신들의 이동조차 통제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길을 막던 사람들이 자기 길을 잃었고, 다른 사람을 가두던 사람들이 스스로 갇혔습니다.
창조 세계는 거문고처럼 새롭게 조율되었습니다
세상을 이루는 요소들이 저마다의 소리는 언제나 그대로 간직한 채 서로 새롭게 조율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줄을 튕기는 악기에서 음들이 가락의 이름을 바꾸는 것과 같았습니다. 일어난 일들을 살펴보면 이를 정확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지혜서 19:18 · 두루새김
「세상을 이루는 요소들」은 고대 세계에서 자연을 이루는 기본적인 요소들을 가리키는 말로, 이 문맥에서는 땅과 물, 불 같은 것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줄을 튕기는 악기는 여러 음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음들을 어떤 순서와 관계로 배열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음악이 만들어집니다.
저자는 창조 세계의 변화를 이러한 음악적 조율에 비유합니다.
물은 여전히 물입니다.
불은 여전히 불입니다.
땅과 생물들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에 속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서로 맺는 관계와 맡는 역할이 달라집니다. 물이 길을 내고, 불이 물속에서 타오르며, 새들이 바다 쪽에서 먹을거리가 되어 찾아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세계를 파괴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으로만 묘사되지 않으십니다. 이미 만드신 세계를 새롭게 배열하고 조율하여 구원을 이루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이것은 앞의 6절에서 「온 창조 세계가 저마다의 종류에 따라 처음부터 다시 빚어지며」라고 말한 것을 음악의 언어로 풀어낸 설명입니다.
땅에 사는 것들이 물에 사는 것들로 바뀌고, 헤엄치는 것들이 땅 위로 옮겨 갔기 때문입니다.지혜서 19:19 · 두루새김
그러나 지혜서가 앞에서 설명한 사건들을 고려하면, 이것은 생물의 종류가 생물학적으로 바뀌었다는 과학적 설명보다 자연 세계의 영역과 역할이 뒤바뀌는 모습을 시적으로 표현한 말로 읽는 것이 적절합니다. 평소에 서로 구별되어 있던 영역들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 속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불과 물이 등장합니다.
불은 물속에서도 제 힘을 발휘했고, 물은 불을 끄는 힘을 잊었습니다.지혜서 19:20 · 두루새김
이것은 이집트의 우박 재앙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박과 함께 불이 나타났고, 물과 불이 평소의 관계와 다르게 움직이는 모습이 묘사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나타납니다.
반대로 불꽃은 쉽게 죽을 수 있는 짐승들이 그 속을 돌아다녀도 그 몸을 태워 버리지 않았습니다. 쉽게 녹는 얼음 같은 하늘의 먹을거리도 녹일 수 없었습니다.지혜서 19:21 · 두루새김
「얼음 같은 하늘의 먹을거리」는 만나를 가리킵니다. 출애굽기 16:14에서는 만나가 땅 위에 나타난 서리 같은 것으로 묘사됩니다. 만나는 햇살이 뜨거워지면 녹았지만, 지혜서는 그 음식이 불의 열기 속에서도 보존될 수 있었다고 묘사합니다.
또한 불꽃이 쉽게 죽을 수 있는 짐승들을 태우지 않았다는 표현은 앞서 재앙을 일으키는 생물들이 불에 타서 없어지지 않도록 했다는 설명과 연결됩니다(지혜서 16:18). 저자는 같은 불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어떤 때에는 파괴하는 힘을 발휘하고, 어떤 때에는 생명을 해치지 않도록 묘사합니다.
이집트 사람들에게 그 변화는 재앙이었습니다. 농작물은 파괴되었고, 생활 공간은 생물들로 뒤덮였으며,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같은 창조 세계가 구원의 길을 열고 먹을거리를 마련했습니다.
저자는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라는 큰 이야기 안에서 이해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음들이 가락의 이름을 바꾸는 것」이라는 표현은 음악의 박자나 가락의 구조가 달라지는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고대 음악 용어의 정확한 관계를 이 구절만으로 완전히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그대로 간직한 채」에 해당하는 분사(μένω)는 문법적으로 「세상을 이루는 요소들」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각 음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식으로만 설명하기보다, 세상을 이루는 요소들이 서로 새롭게 조율되면서도 자신들의 성격을 간직한다는 뜻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곁에 서 계셨습니다
주님, 당신은 모든 일에서 당신의 백성을 높이고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언제 어디서나 곁에 서 계셨습니다.지혜서 19:22 · 두루새김
지혜서의 마지막 문장은 뜻밖에도 조용합니다.
「곁에 서 계셨습니다」라는 표현은 단순히 멀리서 지켜보고 계셨다는 뜻보다 적극적으로 함께 계시며 도우신다는 의미를 담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영광은 단순히 다른 민족보다 더 높은 권력을 얻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지 않으셨고, 억압받던 자리에서 일으켜 세우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집트의 권력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자유를 억압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세계를 통해 그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창조 세계가 새롭게 조율된 것은, 그 안에서 억압받던 사람들이 다시 자유롭게 걸으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바다가 갈라지고, 그 자리에 길이 열립니다. 조금 전까지 거센 물결이 일던 곳은 마치 푸른 풀이 돋은 들판처럼 묘사됩니다.
사람들은 그 길을 지나갑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뒤쫓던 권력에서 벗어나, 말처럼 자유롭게 움직이고 어린양처럼 뛰놉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바다는 다시 바다가 되었고, 사람들이 지나온 길은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열어 주셨던 하나님께서는 사라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이 이집트에 있을 때에도, 바다를 건널 때에도, 광야를 지나갈 때에도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걸어갈 길을 여셨고, 그 길을 걷는 동안에도 언제 어디서나 그들 곁에 서 계셨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