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3장 · 디모데를 보낸 일
복음을 전한 사람이 복음을 듣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위해 수고했고, 신앙이 흔들리지 않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3장에 이르면 뜻밖의 일이 일어납니다.
이번에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소식이 바울에게 복음이 됩니다.
디모데가 돌아와 그들의 믿음과 사랑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εὐαγγελίζω)을 때(3:6), 원문에는 복음을 선포한다는 뜻으로 쓰이는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에게서, 이제 바울 자신이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그 소식에 바울은 「여러분이 주님 안에 굳게 서 있다면, 우리는 이제야 살 것 같습니다」(3:8)라고 고백합니다.
그들도 여전히 고난을 겪고 있었고, 바울 역시 어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 장은 복음으로 사람들을 세우려 했던 사도가, 그 사람들의 믿음을 통해 다시 힘을 얻는 이야기입니다.
그 과정은 세 번의 움직임으로 전개됩니다. 처음에는 믿음이 무너졌을까 두려워하며 사람을 보냅니다. 중간에는 그 믿음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위로받습니다. 마지막에는 그들의 믿음이 더욱 자라나도록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 흐름을 따라가면 바울이 생각하는 믿음의 돌봄이 무엇인지, 또한 하나님이 한 사람의 믿음을 어떻게 지켜 가시는지 발견하게 됩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사람을 보내다
그래서 우리는 더는 견딜 수 없어 아테네에 우리만 남기로 했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3:1 · 두루새김
2장 마지막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신자들을 다시 만나려 했지만 길이 막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3장은 그때 바울이 무엇을 했는지 보여 줍니다.
무엇을 견딜 수 없었다는 뜻일까요?
그들과 헤어져 있는 외로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바울이 특히 견디기 어려워한 것은 그들의 형편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고난을 당하고 있었지만, 바울은 자신이 떠난 뒤 그들이 여전히 믿음을 지키고 있는지 직접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아테네에 자신들만 남기로 합니다. 당시에는 먼 도시의 소식을 즉시 주고받을 수 없었고, 사람을 보내거나 직접 방문해야 했습니다. 디모데를 보낸다는 것은 그가 바울 일행과 떨어져 상당한 거리를 이동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를 보내기로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형제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굳게 하고 여러분을 격려하도록 보낸 것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3:2 · 두루새김
바울은 그들을 다시 만나고 싶어 했지만, 그들을 돕기 위해 반드시 자신이 직접 가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심부름꾼으로만 소개되지 않습니다. 형제이며,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입니다. 디모데가 하는 일은 바울 개인의 일을 대신 처리하는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에 속한 일입니다.
디모데가 해야 할 일은 새로운 교회를 세우거나 많은 사람을 모으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믿고 있는 사람들의 믿음을 굳게 하고, 그들을 격려하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일만큼,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 그 믿음 안에 머무는 일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디모데를 보내고 자신은 남습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신자들의 믿음을 그토록 굳게 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조금 더 깊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라는 자리는 사본에 따라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뜻 등으로 달리 전해지며,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인지 하나님의 일을 함께 수행하는 것인지에도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디모데의 일이 하나님의 복음에 속한 일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또 사도행전 17:14–16은 바울이 베뢰아에서 아테네로 이동하고 실라와 디모데가 뒤에 남았다고 서술하고, 18:5에서는 두 사람이 마케도니아에서 바울에게 합류합니다. 디모데가 그 사이 아테네에서 바울을 만났다가 다시 마케도니아로 돌아갔다고 볼 수도 있고, 바울이 아테네에서 지시를 보내 디모데가 갈 곳을 바꾸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정확한 이동 순서는 확정하기 어렵고, 두 기록이 전하는 정보의 범위가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고난보다 두려웠던 것은 믿음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이런 고난 때문에 아무도 흔들리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이런 고난을 겪도록 정해져 있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3:3 · 두루새김
바울은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고난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거나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가 디모데를 보낸 목적은 고난을 끝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흔들리지」로 옮긴 그리스어 사이네스타이(σαίνομαι)는 신약성경에서 이곳에만 나타나는 표현입니다. 본래 흔들거나 꼬리를 흔드는 동작과 관련된 말인데, 사람을 달래거나 꾀어 넘어뜨린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난 때문에 마음이 흔들린다는 뜻으로도, 믿음을 버리면 어려움을 피할 수 있다는 달콤한 말이나 유혹에 넘어간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흔들리지」는 고난이라는 문맥에 잘 어울리지만, 유혹의 가능성까지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실제로 어떤 말을 들었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두려워한 결과는 분명합니다. 그들이 믿음을 잃는 것입니다.
「정해져 있습니다」라는 표현은 신중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이 모든 개인적 불행이나 모든 폭력이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세밀하게 배정하신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맥에서 말하는 고난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가운데 경험하는 고난이며, 바울은 그런 고난이 복음의 진실성을 부정하는 뜻밖의 사건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도 우리가 고난을 겪게 될 것이라고 미리 말하곤 했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3:4 · 두루새김
「미리 말하곤 했습니다」에는 반복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고난이 닥친 뒤에야 뒤늦게 설명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함께 있을 때부터 거듭 이야기했습니다.
사람은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을 겪을 때, 그 어려움 자체뿐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 더욱 흔들릴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곧바로 안전하고 편안한 삶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고 미리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어려움을 만났다는 사실만으로 그 길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에게 고난이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나도 더는 견딜 수 없어 여러분의 믿음이 어떤지 알아보려고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유혹하는 자가 여러분을 유혹한 것은 아닌지, 우리의 수고가 헛일이 되지는 않을지 걱정되었기 때문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3:5 · 두루새김
5절에서 1절의 「더는 견딜 수 없어」가 다시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우리는」이었지만, 이번에는 「나도」라고 하며 바울 자신의 불안을 드러냅니다. 이 반복 사이에 디모데를 보낸 목적과 고난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어, 바울이 그들이 실제로 믿음을 지키고 있는지 확인하기를 간절히 원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유혹하는 자」는 사탄을 가리킵니다. 그가 어떤 구체적인 방법으로 유혹했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걱정은 그들이 고난과 유혹 앞에서 복음에 대한 믿음을 버렸을 가능성이었습니다.
「우리의 수고가 헛일이 되지는 않을지」라는 걱정은 2장 첫머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거기서 바울은 자신들이 데살로니가를 찾아간 일이 헛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2:1). 그러나 당시에는 그 결과를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끝까지 믿음을 지킬지는 아직 알 수 없었습니다.
바울에게 헛되지 않은 수고란 많은 사람이 복음을 들었다는 기록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계속해서 그리스도 안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들의 믿음을 자신의 힘으로 붙들어 둘 수 없었습니다.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을 보내고, 형편을 알아보며, 그들이 굳게 서도록 돕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디모데가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6절에서 편지의 분위기가 단번에 바뀝니다.
조금 더 깊이
3:4의 가르침은 마가복음 8:34–35에서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시며,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고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과 주제가 이어집니다. 그 말씀은 고난을 일부러 찾아 나서라는 명령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자신의 안전과 이익이 언제나 최우선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또 3:5의 「유혹하는 자」는 마태복음 4:3에서 예수님을 시험하는 존재를 가리키는 표현과 원문에서 같습니다.
디모데가 돌아와 복음을 전하다
그런데 디모데가 방금 여러분에게서 돌아와 여러분의 믿음과 사랑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여러분이 늘 우리를 좋게 기억하며, 우리가 여러분을 보고 싶어 하듯 여러분도 우리를 몹시 보고 싶어 한다는 소식도 전했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3:6 · 두루새김
이 문장에서 가장 먼저 눈여겨볼 표현은 「방금」입니다.
앞에서는 그들의 믿음이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 견딜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디모데가 돌아왔고, 그가 가져온 소식은 바울이 가장 듣고 싶었던 소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여전히 좋게 기억하고 있었고, 바울이 그들을 보고 싶어 하듯 그들 역시 바울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로 옮긴 동사는 신약성경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가리키는 데 널리 사용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미 복음을 전했던 바울에게 데살로니가 신자들의 소식을 전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디모데가 가져온 소식을 단순한 보고가 아니라 복음에 비길 만큼 기쁜 소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갔을 때에는 자신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번에는 데살로니가에서 돌아온 디모데가 바울에게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그렇다고 데살로니가 신자들의 믿음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신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이 살아 있다는 소식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그들 가운데서 여전히 일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고, 그들이 받은 말씀이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소식이었습니다.
디모데가 전한 내용은 먼저 믿음과 사랑, 그다음 바울 일행에 대한 좋은 기억과 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믿음을 알아보려고 디모데를 보냈는데, 그들이 여전히 믿고 있다는 사실뿐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었습니다.
좋게 기억한다는 말은 앞 장과 이어집니다. 바울은 2장에서 자신이 그들 가운데 있을 때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여러 차례 기억해 달라고 했습니다. 다만 이것을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한때 바울을 의심했다가 마음을 바꾸었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런 갈등이 있었는지 밝히지 않으며, 분명한 것은 헤어져 있는 동안에도 두 편의 신뢰와 애정이 유지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소식은 바울에게 예상보다 훨씬 큰 영향을 미칩니다.
위로하러 사람을 보냈는데, 자신이 위로받다
그래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온갖 어려움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여러분의 믿음 덕분에 위로를 받았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3:7 · 두루새김
바울은 디모데를 보내면서 데살로니가 신자들을 「격려하도록」 했습니다(3:2). 그런데 7절에서는 자신이 「위로를 받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원문에서는 두 표현에 같은 그리스어 동사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동사는 문맥에 따라 권하다, 격려하다, 위로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2절에서는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신자들을 격려합니다.
7절에서는 데살로니가 신자들의 믿음이 바울을 위로합니다.
바울은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하려고 사람을 보냈지만, 돌아온 것은 자신의 마음을 굳게 하는 소식이었습니다. 바울 역시 고난 가운데 있었기에 이 반전은 더욱 인상적입니다. 그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만큼 모든 문제가 해결된 상황에 있지 않았습니다.
흔히 우리는 신앙이 성숙한 사람이 연약한 사람을 일방적으로 돕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바울과 데살로니가 신자들의 관계에도 그런 면이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했고, 디모데를 보내 그들을 세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이제 바울을 일으켜 세웁니다. 바울은 사도였지만, 다른 신자들의 믿음으로 위로받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이 주님 안에 굳게 서 있다면, 우리는 이제야 살 것 같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3:8 · 두루새김
바울이 실제로 생명을 잃을 위기에 있었고 그 소식 때문에 목숨을 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깊은 염려를 품고 있었는지, 그 염려가 풀렸을 때 얼마나 큰 안도와 기쁨을 경험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굳게 서 있다면」은 조건절이지만, 바울은 이미 디모데에게서 그들의 믿음에 관한 좋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가능성을 묻기보다, 그들이 실제로 주님 안에 서 있다는 사실이 바울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표현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바울 일행 안에 굳게 서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 굳게 서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바울과 떨어져 직접적인 지도와 돌봄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바울이 곁에 있어야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중심에 계신 주님께 그들이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그들의 믿음을 지켜 낸 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주님 안에 서 있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 원문의 「굳게 서 있다면」은 보통 예상되는 가정법이 아니라 직설법을 사용합니다. 이 문법적 특징이 위의 이해를 뒷받침합니다.
기쁨이 너무 커서 감사를 다 표현할 수 없다
여러분 때문에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이 모든 기쁨을 생각하면, 여러분을 두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다 드릴 수 있겠습니까?데살로니가전서 3:9 · 두루새김
바울은 이 장에서 가장 기쁜 순간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그가 선택한 표현은 질문입니다. 「감사를 다 드릴 수 있겠습니까」(ἀνταποδίδωμι)에 해당하는 원문의 동사는 받은 것에 대해 되갚거나 보답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빚을 지우셨다는 뜻이 아니라, 감사를 되돌려 드릴 방법을 찾을 수 없을 만큼 기쁨이 크다는 표현입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어떻게 감사를 다 드릴 수 있겠습니까」로 풀어 옮겼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신자들 때문에 기뻐하면서 그 감사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들의 믿음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는 확신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들 때문에 기뻐하지만, 그 기쁨을 하나님 앞에서 누립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직접 만나 여러분의 믿음에 부족한 부분을 채워 줄 수 있도록 밤낮으로 더없이 간절히 기도합니다.데살로니가전서 3:10 · 두루새김
조금 전까지 바울은 그들의 믿음 때문에 다시 살아나는 듯한 기쁨을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들의 믿음에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말합니다.
믿음이 굳게 서 있다면서, 무엇이 부족하다는 것일까요?
믿음이 진실하다는 것과 그 믿음이 아직 자라야 한다는 것은 동시에 참일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믿음이 무너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채워 줄」(καταρτίζω)로 옮긴 원문의 동사는 부족한 것을 보충하거나, 어긋난 것을 바로잡아 제 기능을 하도록 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들의 믿음은 고난 중에도 굳게 서 있는 참된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이 아직 있고, 삶에서 더욱 성장해야 할 부분도 남아 있습니다. 실제로 이어지는 4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거룩함, 형제자매 사랑, 일상생활의 질서에 관해 권하고, 죽은 신자들과 예수님의 오심에 관한 문제를 설명합니다(4:13–18). 3:10의 「부족한 부분」이 특정한 하나의 교리나 행동을 가리킨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뒤의 가르침은 바울이 어떤 성장을 염두에 두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바울은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이유로 그들의 믿음을 의심하거나 기쁨을 거두지 않습니다. 반대로 믿음이 굳게 서 있다는 이유로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지금 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일을 기뻐하면서, 아직 이루어져야 할 성장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성장을 돕기 위해 직접 만나고 싶어 합니다. 편지로도 많은 것을 가르칠 수 있었지만, 그가 바라는 것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상황을 직접 알고, 함께 살피고, 그들이 온전하게 자라도록 돕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에게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간절한 바람을 하나님께 아뢰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채워 줄」로 옮긴 동사는 마가복음 1:19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장면에도 사용됩니다. 그물을 손질한다는 것은 그물이 쓸모없다는 선언이 아니라, 계속 사용할 수 있도록 필요한 부분을 정돈하고 고치는 일입니다.
막힌 길을 열어 달라는 기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그리고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가 여러분에게 갈 길을 열어 주시기를 빕니다.데살로니가전서 3:11 · 두루새김
이 기도에는 앞에서부터 이어져 온 바울의 답답함이 담겨 있습니다. 디모데를 보내 그들의 믿음을 확인할 수는 있었지만, 그들을 직접 만나고 싶은 소망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님을 함께 부릅니다. 원문에서는 두 분을 함께 언급한 뒤 「갈 길을 열어 주시기를」(κατευθύνω)에 해당하는 단수 동사가 이어집니다. 이 문법적 특징 하나만으로 후대의 삼위일체 교리 전체를 증명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바울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님께 함께 자신의 길을 맡기며 기도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바울에게 예수님은 과거에 죽으신 스승으로만 존재하시지 않습니다. 지금 살아 계시며, 바울의 기도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언급되시는 주님이십니다.
길을 열어 달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자신이 그 길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과 계획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것을 강제로 밀어붙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기도는 여행 문제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11절에서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 갈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12절에서는 데살로니가 신자들 안에서 사랑이 자라도록 기도합니다.
13절에서는 그들의 마음이 거룩함 가운데 굳게 서도록 기도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원하는 만남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자신이 만나지 못하는 동안에도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가 직접 갈 수 있느냐 없느냐에 그들의 믿음의 미래가 달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자라서 마음이 굳게 선다
또 주님께서,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듯 여러분도 서로를, 또 모든 사람을 더욱 넘치게 사랑하도록 해 주시기를 빕니다.데살로니가전서 3:12 · 두루새김
믿음이 굳게 서 있는 그들에게 이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더 많은 지식일까요? 더 큰 담대함일까요?
바울은 먼저 사랑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것도 사랑이 유지되는 정도가 아니라 더욱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에게 믿음의 성숙은 혼자 얼마나 강해졌는가에만 달려 있지 않고, 다른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는가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사랑에는 두 방향이 있습니다. 첫째는 믿는 사람들이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향하는 사랑입니다. 둘째는 공동체의 경계를 넘어 모든 사람을 향하는 사랑입니다.
데살로니가 신자들은 같은 민족의 사람들에게서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끼리 더욱 단단히 뭉치는 일이 자연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랑이 공동체 안에만 머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물론 이 한 절만으로 반대자들과의 관계가 실제로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모든 행동을 승인하거나 부당한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이 사랑을 인간의 노력만으로 만들어 내야 할 과제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성장을 이루어 주실 분으로 주님을 부릅니다. 신자들은 서로 사랑하도록 권하는 말을 듣겠지만, 그 사랑의 궁극적인 근거와 능력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굳게 하셔서, 우리 주 예수가 그분께 속한 거룩한 모든 이들과 함께 오실 때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데살로니가전서 3:13 · 두루새김
거룩함은 사랑과 떨어져 있지 않다
바울은 사랑이 자라기를 기도한 다음, 그 결과로 마음이 굳게 되는 일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거룩함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단순화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거룩함은 하나님께 속하고 그분의 뜻에 어울리는 삶과 관련되며, 4장에서 바울은 신자들이 성적인 부도덕을 멀리하고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4:3–8).
그러나 이 절의 순서를 보면, 사랑이 거룩함과 무관한 별도의 덕목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함이 하나의 기도 안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삶은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방어적인 태도에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일을 포함합니다.
바울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만이 아니라 「마음」을 위해 기도합니다. 「흠 없게」라는 말도 신자들이 지금 스스로 완전한 상태에 도달했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은 살아 있지만 여전히 성장해야 하고, 그들의 사랑은 존재하지만 더욱 넘쳐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바울은 예수님께 구합니다.
처음에는 디모데가, 마지막에는 예수님께서 굳게 세우십니다
2절에서 바울은 「여러분의 믿음을 굳게 하고」 격려하도록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13절에서는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굳게 하셔서」라고 기도합니다. 원문에서도 두 구절에 굳게 세운다는 같은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앞에서는 사람이 사람의 믿음을 굳게 합니다.
마지막에는 예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굳게 하십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굳게 세우신다고 믿었기 때문에 디모데를 보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디모데를 보냈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람이 하는 일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그 일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지는 하나님께 맡깁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한 모든 이들과 함께 오실 때
13절의 마지막은 주 예수님의 오심을 향합니다. 여기서 「거룩한 모든 이들」이 누구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한 견해는 천사들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스가랴 14:5가 하나님께서 모든 거룩한 이들과 함께 오실 날을 말하고, 데살로니가후서 1:7이 주 예수님께서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나타나실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견해는 예수님께 속한 신자들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거룩한 이들이라고 부르고, 4:14에서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잠든 사람들을 예수님과 함께 데려오실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이 더 적절한지 견해가 갈리며, 「그분께 속한 거룩한 모든 이들」은 두 가능성을 모두 열어 둔 번역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기도에서 중심에 있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주 예수님께서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이 서도록, 지금 그들의 마음이 굳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린다는 것은 현재의 관계와 삶을 무의미하게 여기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미래를 바라보기 때문에 지금 서로 사랑하고, 믿음 안에서 성장하며,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살아가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의 사랑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과 깊이 연결됩니다. 로마서 5:6–8에서 바울은 예수님께서 아직 죄인이었던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사람들이 먼저 합당한 모습을 갖추었기 때문에 베풀어진 사랑이 아니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사랑도 상대방이 이미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조건에만 갇힐 수 없습니다.
서로를 살리는 믿음
이 장에는 서로 연결된 세 번의 도착이 있습니다. 디모데가 돌아오는 일, 바울이 바라던 데살로니가 방문, 그리고 주 예수님의 오심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디모데를 보내고, 하나님께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자신도 그들의 믿음에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려 애씁니다. 믿음은 다른 사람의 격려와 돌봄을 통해 세워지고 다른 사람의 믿음을 통해 위로를 받지만, 그 궁극적인 토대는 특정한 지도자나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이 함께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그들의 믿음은 계속될 수 있었고, 동시에 믿음이 굳게 서 있다는 것은 더 이상 돌봄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계속 자라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이르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로 가는 길이 실제로 열렸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그들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지만, 그 길은 자신의 힘으로 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길을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님께 맡깁니다. 그리고 자신의 발걸음이 아직 그들에게 닿지 못하는 동안, 주님께서 그들이 더욱 넘치게 사랑하도록 하시고 마음을 굳게 하셔서 거룩하고 흠 없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는 아직 그들에게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지 못하는 곳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굳게 세우실 수 있습니다.
그 확신 속에서 바울의 간절한 그리움은 기도가 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