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풀어 읽기 · 23장

이 장의 자리 · 4–24장 · 예루살렘 심판 예고

사랑하던 제국이 심판의 군대가 되다

한 여자가 벽에 그려진 남자들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화려한 옷을 입고 허리에 띠를 두른 그들은 먼 나라의 군대 지휘관들입니다. 여자는 그 모습에 마음을 빼앗기고, 사람을 보내 그들을 불러들입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끝날 무렵, 그 남자들은 더 이상 매력적인 애인이 아닙니다. 전차와 방패와 칼을 들고 여자를 에워싸는 군대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단순히 외국과 동맹을 맺었다가 배신당한 나라의 비극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두 여자의 이야기를 통해 이스라엘과 유다가 무엇을 믿고, 무엇을 사랑하며, 어디에서 안전을 찾으려 했는지를 드러내십니다.

앞 장에서 예루살렘 내부의 피와 불의가 고발되었다면, 23장은 그 도시가 하나님을 떠나 강대국과 우상들에게 마음을 내주었던 역사를 두 자매의 이야기로 펼쳐 보입니다.

이 장의 성적 표현과 폭력 묘사는 성경에서도 유난히 노골적입니다. 그것들은 실제 여성들의 행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이라는 두 도시를 여성으로 그린 예언적 비유에 속합니다. 그렇다고 그 표현들이 지닌 폭력성을 가볍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이야기는 두 여자의 이름에서 시작됩니다.

읽는 시간 20분소단락 1023장 본문 읽기 →

한 어머니의 두 딸, 그리고 두 개의 장막

에스겔 23:1–4 본문 →

「사람의 아들아,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두 여자가 있었다.」에스겔 23:2 · 두루새김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는 갈라지기 이전에 하나의 백성이었습니다. 같은 조상에게서 나왔고, 같은 출애굽의 기억을 나누며, 같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자기 역사의 기초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두 자매의 어린 시절을 이집트에서 시작하십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음행했다. 젊은 시절부터 음행했다. 거기서 사람들이 그들의 가슴을 누르고, 처녀 시절의 젖가슴을 주물렀다.」에스겔 23:3 · 두루새김

여기서 두 도시는 이스라엘 백성의 긴 역사를 대표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이집트에서의 젊은 시절은 민족의 시작을 가리키는 상징적 시간입니다.

에스겔 20:5–8에서도 하나님은 이집트에 있던 이스라엘이 그곳의 우상들을 버리지 않았다고 고발하십니다. 23장의 첫 장면은 그 고발을 두 여자의 젊은 시절이라는 비유로 다시 보여 줍니다. 이집트는 단순히 과거에 살던 장소가 아니라, 이후에도 반복해서 돌아가려는 오래된 의존의 출발점으로 나타납니다.

「언니의 이름은 오홀라이고 동생의 이름은 오홀리바였다. 그들은 내 아내가 되어 아들딸을 낳았다. 오홀라는 사마리아이고,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이다.」에스겔 23:4 · 두루새김

오홀라는 일반적으로 「그 여자의 장막」 또는 「자기 장막」이라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오홀리바는 「내 장막이 그 여자 안에 있다」라는 뜻입니다.

북왕국은 예루살렘 성전과 분리된 예배 체계를 세웠습니다. 여로보암이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두고 제단과 제사 제도를 마련한 일이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열왕기상 12:26–33). 오홀라의 이름은 이런 별도의 예배 체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반면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습니다. 오홀리바라는 이름은 그 특별한 지위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이 이름에는 곧 드러날 역설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자기 안에 있다고 해서, 그 도시가 반드시 하나님께 충실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두 자매를 처음부터 낯선 여자로 대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백성입니다. 그 관계 속에서 아들딸이 태어났습니다. 뒤에서 하나님이 그 자녀들을 가리켜 자신의 자녀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이야기는 먼저 언니 오홀라, 곧 사마리아에게 향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에스겔 23장을 이해할 때 가장 가까운 본문은 에스겔 16장입니다. 두 장은 모두 하나님과 예루살렘의 관계를 혼인과 성적 불충실함의 비유로 표현합니다. 16장이 하나님이 먼저 베푸신 은혜와 그 은혜를 배신한 관계를 길게 보여 준다면, 23장은 국제정치의 역사와 우상숭배를 하나의 비유 안에 결합합니다.

오홀라 — 의지하던 제국의 손에 넘겨지다

에스겔 23:5–10 본문 →

「오홀라는 나에게 속해 있으면서도 음행했다. 가까이 있는 아시리아 사람들을 애인으로 삼아 그들에게 음란한 마음을 품었다.」에스겔 23:5 · 두루새김

오홀라의 잘못은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상태에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해 있으면서 다른 대상에게 마음을 내주었습니다.

「그들은 푸른빛 옷을 입고 지방을 다스리는 총독들과 관리들이었다. 모두 매력적인 젊은이들이며 말을 탄 군인들이었다.」에스겔 23:6 · 두루새김

아시리아는 당시 근동의 강력한 제국이었습니다. 아시리아의 관리와 군대는 국제정치에서 막대한 힘을 행사했습니다. 푸른빛 옷과 말을 탄 군인들은 그 힘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드러냅니다.

오홀라가 마음을 빼앗긴 것은 단지 낯선 나라의 문화가 아닙니다. 그 문화 뒤에 있는 권력과 위세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의 세력권 안에서 살아남을 길을 찾았다는 사실은 열왕기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므나헴은 아시리아 왕에게 막대한 은을 바쳐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려 했고(열왕기하 15:19–20), 마지막 왕 호세아 역시 처음에는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쳤습니다(열왕기하 17:3).

7절은 오홀라가 아시리아의 우상들로 자신을 더럽혔다고 말합니다. 정치적 의존과 우상숭배가 하나의 이야기 안에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외국과 관계를 맺는 모든 행동이 죄라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는 다른 나라의 힘을 의지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향한 충실함을 버리고, 그 나라의 신들과 권력에 자기 운명을 맡기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 결과는 끔찍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홀라를 애인들의 손에 넘겼다. 그녀가 음란한 마음을 품었던 아시리아 사람들의 손에 넘겼다.」에스겔 23:9 · 두루새김

그녀가 의지하던 제국이 그녀를 파괴합니다.

아시리아는 북왕국의 수도 사마리아를 함락하고 주민들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열왕기하 17:5–6). 10절에서 아들딸을 데려가고 여자를 칼로 죽이는 장면은 이러한 왕국의 멸망과 강제 이주를 성적 수치와 폭력의 언어로 표현합니다.

비유 속 여성이 폭력을 당하는 장면을 현실에서 성폭력 피해자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자초했다는 뜻으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이 장에서 심판받는 대상은 한 개인 여성이 아니라 국가와 그 정치적·종교적 행위입니다. 본문의 강렬한 성적 비유는 그 관계의 파괴를 드러내지만, 그 때문에 현실의 피해자에게 폭력의 책임을 돌릴 근거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이야기는 더 비극적입니다.

동생은 언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았습니다.

오홀리바 — 보았지만 배우지 않았다

에스겔 23:11–13 본문 →

「동생 오홀리바는 이 일을 보고도 언니보다 더 타락한 욕심을 품었다. 음행도 언니보다 더 심하게 저질렀다.」에스겔 23:11 · 두루새김

예루살렘에는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경고해 주는 역사가 이미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의 몰락은 먼 나라에서 일어난 관계없는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조상에게서 나온 자매 왕국의 멸망이었습니다.

예레미야 3:6–11에서도 비슷한 고발이 나옵니다. 유다는 이스라엘의 불충실함과 그에 따른 심판을 보고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역사를 아는 것과 역사에서 배우는 것은 다릅니다.

12절에서는 오홀리바 역시 아시리아의 총독들과 관리들, 화려한 옷을 입고 말을 타는 군인들에게 마음을 빼앗겼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유다 왕 아하스가 아시리아에 도움을 청했던 역사와도 연결됩니다. 아하스는 아시리아 왕 디글랏빌레셀에게 자신을 그의 종이자 아들이라고 부르며 구원을 요청했습니다(열왕기하 16:7–9).

이후 그는 다마스쿠스에서 본 제단의 모습을 예루살렘에 들여오기도 했습니다(열왕기하 16:10–16). 정치적 의존이 종교적 변화와 연결되는 모습을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욕망은 아시리아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더 멀리 있는 새로운 강대국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벽에 새겨진 남자들 — 권력의 이미지를 사랑하다

에스겔 23:14–21 본문 →

「오홀리바는 음행을 더해 갔다. 그녀는 벽에 새겨진 남자들의 모습을 보았다. 붉은 물감으로 그린 칼데아 사람들의 모습이었다.」에스겔 23:14 · 두루새김

그들은 허리에 띠를 두르고, 머리에는 길게 늘어진 두건을 쓰고, 군대 지휘관의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바벨론이 어떤 나라인지 깊이 경험하기 전에 그 나라가 보여 주는 화려한 권력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녀는 실체보다 먼저 이미지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바로 행동으로 옮깁니다.

「오홀리바는 그 모습을 보자 그들에게 음란한 마음을 품고, 칼데아에 있는 그들에게 심부름꾼들을 보냈다.」에스겔 23:16 · 두루새김

단순한 호기심이 외교적 접촉으로 발전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그녀에게 와서 사랑의 잠자리를 같이하고, 음행으로 그녀를 더럽혔다. 그녀는 그들 때문에 더러워졌고, 마음이 그들에게서 돌아섰다.」에스겔 23:17 · 두루새김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는 하나님도 같은 행동을 하십니다.

「그녀가 음행을 드러내고 알몸을 드러내자, 내 마음도 그녀에게서 돌아섰다. 내가 그 언니에게서 마음을 돌렸던 것과 같았다.」에스겔 23:18 · 두루새김

예루살렘은 강대국을 향한 욕망이 식으면 다른 대상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는 그렇게 바꿔 가며 유지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그녀가 바벨론에게서 마음을 돌린 뒤 돌아간 곳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이집트 땅에서 음행하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음행을 더욱 심하게 저질렀다.」에스겔 23:19 · 두루새김

어린 시절에 시작된 이집트와의 관계가 다시 나타납니다. 예루살렘은 아시리아를 의지하다가 바벨론으로, 다시 이집트로 관심을 옮깁니다.

20절에는 이집트의 남자들을 나귀와 말의 성적 특징에 비유하는 매우 노골적인 표현이 등장합니다. 본문은 동물의 과장된 성적 이미지를 통해 욕망의 강도와 절제하지 못하는 모습을 극단적으로 묘사합니다. 여기서 묘사된 신체적 특징이 이집트 사람들에 관한 실제적인 인종적·신체적 진술인 것은 아닙니다.

그녀가 돌아가는 곳은 언제나 하나님이 아니라 또 다른 힘의 중심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에스겔의 비유는 여러 시대에 걸친 정치적 관계를 하나의 인물 이야기로 압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 말기의 역사에서도 이집트는 바벨론에 맞서려는 세력이 기대하던 중요한 외부 지원자였습니다. 예레미야 37:5–10에는 이집트 군대의 출동으로 바벨론 군대가 한때 예루살렘에서 물러났지만, 예레미야가 그 희망을 경계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이 모든 외교적 사건을 정확한 연대순으로 배열한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던 자들이 군대가 되어 돌아오다

에스겔 23:22–30 본문 →

「그러므로 오홀리바야,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네 마음이 돌아섰던 애인들을 일으켜 너를 치게 하겠다. 사방에서 그들을 데려와 너를 치게 하겠다.』」에스겔 23:22 · 두루새김

이 문장은 17절의 반전을 완성합니다.

23절은 침공할 사람들을 다시 「매력적인 젊은이들」, 「총독들과 관리들」, 「말을 타는 자들」이라고 묘사합니다. 앞서 여자가 마음을 빼앗겼던 바로 그 모습입니다.

마음을 빼앗았던 군사력이 마침내 멸망의 수단이 됩니다.

강대국의 힘은 누군가를 보호할 수도 있지만, 언제든 그 사람을 공격하는 힘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힘 자체에는 하나님의 백성을 끝까지 지켜 주겠다는 언약이 없습니다.

「『그들은 무기와 전차와 수레를 갖추고 여러 민족의 군대와 함께 너를 치러 올 것이다. 큰 방패와 작은 방패와 투구로 무장하고 너를 에워쌀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재판을 맡기겠다. 그들은 자기들의 법에 따라 너를 심판할 것이다.』」에스겔 23:24 · 두루새김

예루살렘은 자기 운명을 강대국과의 관계에 맡겼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 강대국에게 재판을 맡기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스라엘의 율법에 따라 재판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법에 따라」 심판합니다.

예루살렘이 의지하던 국제정치의 세계가 이제 예루살렘을 판단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25–26절은 코와 귀를 자르고, 옷을 벗기고, 장식품들을 빼앗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이 장면에는 전쟁의 폭력과 공개적인 굴욕이 겹쳐 있습니다. 도시의 패배가 여성의 신체를 훼손하고 벌거벗기는 모습으로 표현된다는 사실은 이 비유의 가장 불편한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을 실제 사람에 대한 신체 훼손이나 성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규범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묘사되는 것은 예루살렘이 겪을 국가적 파멸과 수치입니다.

「『나는 네 음란한 짓과 이집트 땅에서부터 해 온 음행을 그치게 하겠다. 너는 더는 그들을 바라보지 않고, 이집트를 기억하지도 않을 것이다.』」에스겔 23:27 · 두루새김

3절에서 이야기가 이집트의 젊은 시절로 시작되었는데, 27절에서는 그때부터 이어진 행동을 끝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본문이 보여 주는 그 끝은 평화로운 변화가 아닙니다. 전쟁과 파괴를 통해 강제로 끝내는 것입니다.

그 심판은 다음 장면에서 하나의 잔으로 표현됩니다.

조금 더 깊이

25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질투를 쏟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하나님의 질투를 인간의 소유욕이나 통제욕과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출애굽기 34:14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명령하면서 하나님이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말합니다. 에스겔 23장에서도 질투의 대상은 단지 다른 존재에게 관심을 기울인 감정이 아닙니다. 우상숭배와 하나님을 잊는 행동, 그리고 그와 결합된 피 흘림입니다. 그러나 이 설명이 본문의 폭력적인 이미지 자체를 지워 주지는 않습니다.

언니가 마셨던 잔을 동생에게 건네다

에스겔 23:31–35 본문 →

「『너는 네 언니의 길을 따라갔다. 그러므로 내가 네 언니의 잔을 네 손에 주겠다.』」에스겔 23:31 · 두루새김

앞에서는 군대가 예루살렘을 에워싸는 장면이었습니다.

이제 갑자기 한 여자의 손에 잔이 들려 있습니다.

구약에서 잔은 종종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과 그로 인한 고난을 상징합니다. 예레미야 25:15–29에서는 민족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며, 이사야 51:17에서도 예루살렘이 진노의 잔을 마신 것으로 묘사됩니다.

동생은 언니가 그 잔을 마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11절은 그 사실을 분명히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언니와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그리하여 31절에서 그 잔이 동생의 손으로 옮겨집니다.

32–34절은 그 잔의 모습을 길게 묘사합니다. 깊고 넓은 잔입니다. 슬픔과 공포와 황폐함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마시는 사람은 취하게 되고, 바닥까지 비운 뒤에는 깨진 잔 조각까지 깨물게 됩니다.

잔은 끝까지 비워집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네가 나를 잊고 네 등 뒤로 내던졌으니, 너도 네 음란한 짓과 음행의 대가를 치러라.』」에스겔 23:35 · 두루새김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완전히 모르는 민족으로 변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성전이 있었고, 제사가 있었고, 종교적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순간에는 하나님의 뜻보다 강대국의 힘이 더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삶에서 뒤로 밀려나셨습니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는 듯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시 에스겔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번에는 두 자매 모두를 법정에 세우십니다.

조금 더 깊이

잔의 조각을 깨문다는 표현은 실제로 술을 마시는 장면을 설명하기보다 심판의 극단적인 고통을 시적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두 자매의 손에 묻은 피 — 비유의 가장 무거운 고발

에스겔 23:36–39 본문 →

지금까지 우리는 강대국과의 관계를 통해 두 나라의 불충실함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그 관계가 실제로 어떤 죄를 낳았는지 밝히십니다.

「그들은 간음했고, 그들의 손에는 피가 묻어 있다. 그들은 자기 우상들과 간음했고, 나에게 낳아 준 아들들까지 그 우상들에게 먹이로 바쳤다.」에스겔 23:37 · 두루새김

그 피는 단지 전쟁에서 흘린 피가 아닙니다. 바로 자신들의 자녀들에게서 흘린 피입니다.

두 자매는 하나님께 속해 있었고, 그 관계 속에서 아들딸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녀들을 다른 신들에게 제물로 바쳤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우상에게 바친 아이들을 단순히 그 부모에게 속한 재산으로 취급하지 않으십니다. 그 아이들을 자신에게 속한 생명으로 말씀하십니다.

문제의 중심에는 실제로 희생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아들들을 죽여 우상에게 바친 바로 그날, 그들은 내 성소에 들어와 그곳을 더럽혔다. 그들이 내 집 안에서 이런 짓을 했다.」에스겔 23:39 · 두루새김

우상에게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사람들과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집단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은 바로 그 사람들이 두 행동을 함께 했다고 고발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종교적 행위가 옳다고 확인하는 장소처럼 남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예배를 받아들일 수 있는 거룩한 행위로 묘사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들이 성소를 더럽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집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그 집의 주인에게 충실했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에스겔 23장은 종교적 위선이라는 추상적인 문제를 말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실제 사람의 생명을 빼앗으면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를 계속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공동체의 모순을 고발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에스겔 16:20–21에서도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자신에게 낳아 준 아들딸을 우상에게 제물로 넘겼다고 고발하셨습니다. 열왕기하 21:6과 예레미야 7:30–31에도 유다에서 자녀를 불 가운데 지나가게 하거나 자녀들을 불사르는 행위에 관한 고발이 나옵니다. 이 때문에 에스겔 23장을 단순히 개인의 마음속 우상이나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취미에 대한 교훈으로 축소하면 본문이 고발하는 실제적인 죄를 놓치기 쉽습니다. 본문이 문제 삼는 불충실함은 정치적 결정과 종교적 행위, 그리고 사람들의 생명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화려한 침상과 하나님의 향과 기름

에스겔 23:40–44 본문 →

다시 사람을 보내 부르는 일이 등장합니다.

16절에서는 바벨론의 그림을 보고 심부름꾼들을 보냈습니다. 이제는 먼 나라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해 몸을 씻고, 눈을 화장하고, 장신구로 꾸밉니다. 마치 중요한 손님을 맞이하는 잔치처럼 보입니다.

「너는 화려한 침상에 앉았다. 그 앞에는 상이 차려져 있었고, 너는 그 위에 내 향과 내 기름을 놓았다.」에스겔 23:41 · 두루새김

성막과 성전의 예배에서 향과 기름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출애굽기 30:22–38). 그런데 여기서는 그 향과 기름이 외부에서 불러들인 애인들을 위한 상 위에 놓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다른 관계를 위한 잔치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자녀들을 우상에게 바치고 같은 날 성소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이제 하나님의 향과 기름을 다른 애인들과의 잔치에 가져다 놓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기는 일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행동이 아니었던 듯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배의 형식이 섞였다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충실함을 다른 신들과 권력에 나누어 주는 행동입니다.

42절에서는 떠들썩한 무리가 등장합니다. 광야에서 온 사람들까지 모이고, 여자들의 손목에는 팔찌가 끼워지며 머리에는 관이 씌워집니다.

그런데 독자는 이미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시 군대로 돌아올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잔치는 단순한 즐거움의 장면이 아닙니다. 아직 재앙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의 안전을 확신하며 벌이는 잔치처럼 읽힙니다.

이미 언니의 몰락을 보았고, 동생도 같은 길의 끝을 경고받았지만, 여전히 그 관계를 되풀이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야기는 마지막 판결로 넘어갑니다.

조금 더 깊이

호세아 2장 역시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혼인의 비유로 다룹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은 자신이 누리는 양식과 포도주와 기름이 다른 애인들에게서 왔다고 여기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자신이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호세아 2:5–8). 이는 에스겔 23:41에서 하나님의 향과 기름이 외부의 애인들을 위한 상 위에 놓인 장면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그분을 떠나는 데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판결과 피 묻은 손

에스겔 23:45–49 본문 →

「그러나 의로운 사람들이 그 여자들을 심판할 것이다. 간음한 여자들과 사람들의 피를 흘린 여자들에게 내리는 판결에 따라 심판할 것이다. 그들이 간음했고, 그들의 손에 피가 묻어 있기 때문이다.」에스겔 23:45 · 두루새김

하나님께 대한 불충실함과 사람의 생명을 빼앗은 죄가 함께 심판받습니다.

46–47절에서는 무리가 올라와 돌을 던지고 칼로 베며 자녀들을 죽이고 집들을 불태웁니다. 도시의 멸망을 법정과 신체적 형벌의 이미지로 묘사하는 예언적 심판 선언입니다.

「『내가 그 땅에서 음란한 짓을 그치게 하겠다. 모든 여자가 경고를 받아 너희의 음란한 짓을 따라 하지 않을 것이다.』」에스겔 23:48 · 두루새김

여기서 「모든 여자」는 앞서 두 도시를 여성으로 그린 비유의 세계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다른 도시와 공동체들이 이 두 나라의 파멸을 보고 같은 길을 걷지 않기를 바라는 경고입니다. 이를 실제 여성 전체가 특별히 음란한 존재라는 일반적 진술로 읽는 것은 비유의 대상을 혼동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너희가 저지른 음란한 짓의 대가를 너희에게 치르게 할 것이다. 너희는 우상을 섬기며 지은 죄의 책임을 질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주 여호와야훼임을 알 것이다.』」에스겔 23:49 · 두루새김

에스겔서에서 반복되는 이 표현은 하나님이 누구신지가 그분의 행동을 통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몰랐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알면서도 다른 힘을 자신의 안전과 미래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심판을 통해 결국 자신들이 의지하던 것들의 한계와 하나님의 주권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바로 회개와 회복이 완성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23장은 아직 그 장면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깨닫는 일이 심판의 언어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의로운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올바르게 판단하는 재판자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초점은 두 자매의 죄가 정당한 판결의 대상이라는 데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앞서 등장한 침공 세력과 연결해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그들이 스스로 의롭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실행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의미가 강조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을 구체적인 이름으로 지목하지 않으며, 그들이 행하는 모든 폭력을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레위기 20:10에는 간음에 대한 사형 규정이 있으며, 피 흘림은 율법에서 무거운 범죄로 다루어집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공동체의 죄를 이유로 현실의 여성이나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해도 된다는 명령이 아닙니다. 에스겔 16:60–63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에스겔 20:41–44에서는 흩어진 백성을 모으시고 자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23장은 왜 이스라엘과 유다가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뒤에 이어지는 회복의 약속들은 그런 백성을 하나님이 어떻게 새롭게 하실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맺음말 — 벽에 그려졌던 군대

에스겔 23:1–49 본문 →

그들은 강대국의 화려함을 보았지만 그 힘의 위험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에게 속한 백성인지 잊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 다른 힘에 자신의 운명을 맡겼고, 마침내 그 힘에 무너졌습니다.

그들이 안전을 찾으려 바라보았던 곳에서, 결국 자신들을 멸망시키는 군대가 왔습니다.

에스겔 23장의 마지막에 이르면 처음 벽에 새겨져 있던 화려한 군대 지휘관들의 모습이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한때 그 그림은 희망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림 밖으로 나와 도시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