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27장

이 장의 자리 · 26–29장 · 예언자가 겪은 고난

살아남으려면 멍에를 메어라

한 나라가 강대국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왕은 독립을 되찾을 기회를 찾고, 주변 나라의 사신들이 모여듭니다. 사람들은 적국의 힘이 약해지기를 기대하고, 예언자들은 머지않아 빼앗긴 것들을 되찾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한 예언자가 목에 멍에를 메고 나타납니다.

그는 저항하라고 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벨론 왕을 섬기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께서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해 내신 백성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 여호와야훼께서 스스로 다른 나라의 멍에를 메라고 명령하십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바벨론 왕에게 힘을 주셨기 때문에 그를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자유가 아니라 굴복을 명령하실 때, 그 말씀은 어떻게 구원의 말씀이 될 수 있습니까?

예레미야 27장은 이 질문을 멍에라는 물건 하나로 풀어 나갑니다.

읽는 시간 17분소단락 727장 본문 읽기 →

예언자의 목에 놓인 멍에

예레미야 27:1–4 본문 →

말씀이 아니라 멍에를 먼저 보여 주다

여호와야훼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묶는 끈과 멍에 막대들을 만들어 네 목에 얹어라.」예레미야 27:2 · 두루새김

멍에는 농사를 짓거나 짐을 운반할 때 소의 목에 얹는 도구입니다. 나무로 된 막대와 그것을 고정하는 끈을 사용하여 짐승의 움직임을 통제합니다. 다른 이의 지시와 통제 아래 놓이는 상태를 눈에 보이게 합니다.

예언자의 몸이 예언의 일부가 되는 셈입니다.

예레미야서에는 이처럼 말보다 먼저 행동으로 메시지를 보여 주는 장면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13장의 허리띠, 19장의 깨뜨린 옹기병이 그 예입니다. 이러한 상징 행동은 막연하게 들릴 수 있는 경고를 사람들이 눈앞에서 마주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이 멍에를 유다 사람들만 보게 하지 않으십니다.

에돔, 모압, 암몬, 두로, 시돈의 왕들에게도 보내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나라들의 사신들은 시드기야를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에 와 있었습니다.

유다는 이미 바벨론에 굴복하여 왕까지 교체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독립을 되찾을 가능성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벨론에 맞서 함께 대응할 방안을 논의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27장은 그들의 회의 내용이나 실제 합의 여부를 밝히지 않습니다.

유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시는 여호와야훼께서 유다 왕에게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주변 민족의 정치적 선택까지 자신의 말씀 아래 두십니다.

여호야김인가, 시드기야인가?

요시야의 아들인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리기 시작할 무렵, 여호와야훼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이런 말이 왔습니다.예레미야 27:1 · 두루새김

그런데 3절에는 유다 왕 시드기야가 등장하고, 12절에서는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직접 말합니다. 20절은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가 이미 바벨론으로 끌려간 사건을 돌아봅니다.

따라서 이 장의 중심 사건은 여호야김이 다스리던 때가 아니라 시드기야가 다스리던 때에 속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에는 여호야김이 기록되어 있지만, 일부 히브리어 사본과 시리아어 역본은 시드기야를 전합니다. 칠십인역에는 27:1에 해당하는 구절 자체가 없습니다. 따라서 첫 절이 앞 장의 표현에서 영향을 받아 베껴 쓰는 과정에서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처음부터 어떻게 이루어졌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레미야 28:1은 이어지는 사건을 시드기야 통치 사 년째로 소개합니다. 따라서 27장의 사건도 그 무렵, 대략 기원전 594–593년의 상황에 놓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땅을 만드신 하나님이 바벨론 왕에게 땅을 주셨다

예레미야 27:5–7 본문 →

출애굽의 언어로 바벨론의 지배를 설명하다

여호와야훼는 주변 나라의 왕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먼저 밝히십니다.

「『내가 큰 힘과 쭉 뻗은 팔로 땅과 그 위에 있는 사람과 짐승을 만들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사람에게 그 땅을 준다.』」예레미야 27:5 · 두루새김

이스라엘에게 이 표현은 낯설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일을 돌아볼 때 큰 능력과 뻗은 팔이 자주 등장합니다(신명기 4:34; 5:15; 9:29).

과거에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능력으로 이집트의 지배에서 이스라엘을 해방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능력으로 땅을 만드시고, 그 땅을 바벨론 왕에게 주셨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차이가 중요한 이유는 여호와야훼의 능력이 언제나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는 데 사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권한은 유다의 국경을 넘어 온 땅과 모든 사람에게 미칩니다.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지만 이스라엘 왕의 소유물은 아니십니다.

5절은 하나님께서 땅을 만드신 일과 그 땅을 다스릴 권한을 직접 연결합니다. 땅을 만드신 분이 그 땅을 누구에게 맡길지 결정하신다는 것입니다.

「내 종인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이제 내가 이 모든 땅을 내 종인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겨주었다. 들짐승까지 그에게 주어 그를 섬기게 했다.』」예레미야 27:6 · 두루새김

이스라엘에게 종이라는 표현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세와 다윗 같은 인물들이 여호와야훼의 종으로 불렸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여호와야훼의 종은 유다를 정복하고 왕과 백성을 포로로 끌고 간 이방 왕입니다.

여기서 종이라는 표현은 느부갓네살의 믿음이나 도덕성을 평가하는 말이 아니라, 그가 여호와야훼께서 정하신 역사적 역할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레미야 25:9에서도 느부갓네살은 여호와야훼의 종으로 불립니다. 그곳에서는 바벨론이 유다와 주변 나라들에 대한 심판의 도구가 된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사용하신다는 말과 바벨론이 행하는 모든 일이 옳다는 말은 구별해야 합니다.

바벨론에도 때가 온다

「『그의 나라에도 심판이 닥칠 때까지 모든 민족이 그와 그의 아들과 그의 손자를 섬길 것이다. 그때는 많은 민족과 강대한 왕들이 그를 종으로 부릴 것이다.』」예레미야 27:7 · 두루새김

본문은 그와 그의 아들과 그의 손자를 언급하며 바벨론의 지배가 한순간에 끝나지 않을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곧이어 「그의 나라에도 심판이 닥칠 때」가 올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처음에는 여러 민족이 바벨론을 섬깁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다른 민족들과 왕들이 바벨론을 종으로 부립니다. 섬김을 받던 자가 다시 다른 이들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땅을 바벨론에 주셨지만, 바벨론이 그 땅의 영원한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유다와 주변 민족은 바벨론이 영원하기 때문에 섬겨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지금 그들에게 주신 길이 그것이기 때문에 섬겨야 합니다.

멍에를 벗는 길이 아니라 땅에 남는 길

예레미야 27:8–11 본문 →

저항하면 잃고, 굴복하면 남는다

8절에서 여호와야훼는 바벨론을 섬기지 않는 민족의 운명을 말씀하십니다.

칼과 굶주림과 전염병이 그들을 덮칠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예레미야서에서 전쟁과 포위 공격, 그에 따른 사회적 재앙을 나타내는 반복적인 표현입니다(예레미야 14:12; 21:7; 24:10).

「『그러나 바벨론 왕의 멍에에 목을 넣고 그를 섬기는 민족은 내가 자기 땅에 남겨 두겠다. 그들은 그 땅을 일구며 거기서 살 것이다.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27:11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바벨론 왕을 「섬기는」이라는 말과 땅을 「일구며」라는 말에 같은 히브리어 어근 아바드(⁨עָבַד⁩)가 사용됩니다. 앞에서는 왕의 지배 아래서 섬기는 관계를 뜻하고, 뒤에서는 땅을 일구는 노동을 뜻합니다.

사람들은 바벨론 왕을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자기 땅을 일구며 계속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반대로 바벨론 왕을 섬기지 않겠다고 나서면, 결국 자기 땅에서 쫓겨나 아무것도 일굴 수 없게 됩니다.

이 말씀은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는 것 자체를 좋은 것으로 찬양하지 않습니다. 그저 지금의 역사적 상황에서 어느 길이 생명을 보존하는 길인지를 밝힙니다.

여기서 살아남는다는 말은 막연한 영적 상태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전쟁으로 죽지 않는 것, 고향에서 쫓겨나지 않는 것, 농사를 짓고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것과 연결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보호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러한 구체적인 삶입니다.

왜 거짓 예언은 듣기 좋았을까?

「『너희의 예언자들과 점치는 사람들, 징조를 살피는 사람들과 주술사들의 말을 듣지 마라. 너희 꿈에도 귀를 기울이지 마라. 그들은 너희에게 바벨론 왕을 섬기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예레미야 27:9 · 두루새김

이미 굴욕을 겪은 나라들이라면 더 이상 바벨론을 섬기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서 희망을 발견하기 쉽습니다. 꿈은 고대 세계에서 신의 뜻이나 미래에 대한 단서를 얻는 수단으로 여겨지곤 했습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말씀하시는 장면이 있습니다(창세기 37:5–11).

따라서 여호와야훼께서 꿈이라는 방식 자체가 언제나 거짓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는 바벨론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꿈과 예언을 거부하라는 명령입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이 어떤 방식으로 전달되었느냐보다 그 내용이 여호와야훼께서 지금 선언하신 뜻과 일치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너희에게 거짓을 예언하고 있다. 그 거짓 예언은 너희를 너희 땅에서 멀리 떠나게 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쫓아내고, 너희는 멸망할 것이다.』」예레미야 27:10 · 두루새김

땅을 지킬 수 있다고 안심시키는 말이 결국 그 땅을 잃게 만듭니다.

희망을 주는 말과 실제로 생명을 지키는 말은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백성에게 듣기 좋은 미래를 약속하시는 대신,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그 길은 사람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길이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레위기 26:13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해 내셨으며 그들의 멍에 막대를 꺾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반면 예레미야 27장에서 유다는 오랫동안 여호와야훼의 말씀에 불순종해 왔고, 이제 바벨론의 지배 아래 놓였습니다. 신명기 28:47–48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를 섬기지 않을 경우 원수의 멍에를 메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따라서 예레미야 27장의 멍에는 구원의 출발점이었던 출애굽을 단순히 뒤집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거역한 백성이 맞게 된 심판의 현실과 연결됩니다. 더 나아가 예레미야 29:4–7에서는 이미 바벨론으로 끌려간 사람들에게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꾸고, 가정을 이루며, 자신들이 사는 성읍의 평안을 구하라는 말씀이 주어집니다. 27장의 「그들은 그 땅을 일구며 거기서 살 것이다」라는 선언과 29장의 말씀은 서로 다른 처지의 사람들에게 주어졌지만, 중요한 방향을 공유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린다는 것은 현재의 삶을 중단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왕에게 주어진 질문: 왜 죽어야 합니까?

예레미야 27:12–15 본문 →

시드기야에게 직접 향하는 말씀

12절부터 말씀의 대상이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외국 왕들에게 전할 메시지가 주어졌습니다. 이제 예레미야는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직접 말합니다.

나는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도 이 모든 말을 전했습니다. 「임금님께서는 백성과 함께 바벨론 왕의 멍에에 목을 넣으십시오. 그와 그의 백성을 섬기고 살아남으십시오.」예레미야 27:12 · 두루새김

왕에게 이것은 특별히 어려운 명령이었을 것입니다. 왕의 지위는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보호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나라를 정복한 다른 왕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드기야의 왕권은 이미 바벨론의 개입으로 세워진 왕권이었습니다(열왕기하 24:17). 그가 바벨론에 반기를 든다고 해서 자동으로 잃어버린 독립이 회복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임금님과 임금님의 백성이 왜 칼과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죽어야 합니까? 여호와야훼께서는 바벨론 왕을 섬기지 않는 민족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예레미야 27:13 · 두루새김

예레미야의 관심은 바벨론 왕의 명예가 아닙니다. 유다 왕과 그의 백성이 살아남는 일입니다.

바벨론에 굴복하라는 명령이 단지 정치적 현실에 따르라는 충고였다면, 그 근거는 바벨론의 군사력이나 유다의 군사력 부족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제시하는 근거는 다릅니다.

여호와야훼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어느 시대의 모든 제국이나 권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 명령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이 명령은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예레미야를 통해 주어진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근거로 모든 억압에 대한 저항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말하지만 여호와야훼가 보내지 않은 사람들

14–15절에서 예레미야는 또다시 거짓 예언자들을 경고합니다.

그들은 유다가 바벨론을 섬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예언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한다. 그 때문에 내가 너희를 쫓아내고, 너희와 너희에게 예언하는 자들이 함께 멸망하게 될 것이다.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27:15 · 두루새김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그 이름을 가진 분이 그를 보내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레미야 23:21–22에서도 여호와야훼는 자신이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달려가며 예언한 사람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들이 참으로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들었다면 백성을 악한 길에서 돌아서게 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단순히 미래를 잘못 예측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말이 하나님의 권위를 지닌 말이라고 하여 사람들이 잘못된 길을 선택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자신이 말한 거짓된 미래의 결과로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

빼앗긴 성전 기물이 곧 돌아온다는 약속

예레미야 27:16–18 본문 →

왜 성전 기물들이 중요한가?

16절에서 예레미야는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에게 말합니다.

나는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에게도 말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예언자들은 여호와야훼의 성전 물건들이 이제 곧 바벨론에서 돌아온다고 예언한다. 그들의 말을 듣지 마라. 그들은 너희에게 거짓을 예언하고 있다.』」예레미야 27:16 · 두루새김

바벨론은 이미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여고냐를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성전과 왕궁의 보물도 가져갔습니다(열왕기하 24:13–16).

이것은 단순한 재산의 손실이 아니었습니다.

성전 물건들은 여호와야훼께 드리는 예배에 사용되는 물건이었습니다. 그것들이 이방 왕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은 유다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물건들이 돌아온다는 말은 단순히 빼앗긴 귀중품을 돌려받는다는 뜻을 넘어섭니다. 유다가 회복되고, 바벨론의 지배가 끝나며, 예배의 질서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와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그 약속을 거짓이라고 선언합니다.

본문의 마지막에서 그분은 물건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참된 예언과 거짓 예언의 차이는 단순히 회복을 말하느냐 말하지 않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회복의 때를 누가 정하는가에 있습니다.

참된 예언자라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들이 정말 예언자이고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받았다면, 만군의 여호와야훼께 간청해야 합니다. 여호와야훼의 성전과 유다 왕궁과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물건들마저 바벨론으로 옮겨지지 않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예레미야 27:18 · 두루새김

사람들은 이미 잃어버린 것들이 곧 돌아오리라는 이야기에 몰두해 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아직 잃지 않은 것들마저 위험하다는 사실을 보게 합니다.

회복을 장담하기 전에 지금의 위험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예레미야는 참된 예언자의 역할을 단지 미래를 선언하는 일로만 제시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께 간청하는 일도 예언자의 역할에 속합니다. 이 말은 진정한 예언자에게는 하나님의 권위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일뿐 아니라, 백성의 위기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며 여호와야훼께 나아가는 책임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씀은 그 간청으로도 막을 수 없는 일이 다가오고 있음을 밝힙니다.

남아 있는 물건들 역시 바벨론으로 옮겨질 것입니다.

성전 기물들은 어디로 가는가?

예레미야 27:19–22 본문 →

아직 남아 있는 것들

19절에서 여호와야훼는 성전에 남아 있는 물건들을 구체적으로 하나씩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께서 기둥들과 바다라는 큰 물통과 받침대들, 그리고 이 성읍에 남은 다른 물건들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예레미야 27:19 · 두루새김

여기서 「바다라는 큰 물통」은 실제 바다가 아닙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만든 커다란 청동 물통을 가리킵니다. 기둥들은 성전 앞에 세운 두 청동 기둥이며, 받침대들은 물통들을 받치던 이동식 청동 구조물입니다(열왕기상 7:15–39).

이 물건들은 솔로몬 시대부터 성전에 있던 중요한 시설들이었습니다. 그것들은 화려하고 값비싼 금속 제품인 동시에, 여호와야훼께 드리는 예배의 역사와 연결된 물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것들도 바벨론으로 옮겨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느부갓네살이 여고냐와 유다의 귀족들을 끌고 갈 때 가져가지 않은 것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남아 있는 것들을 보며 안심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앞으로도 안전하다는 보장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물건들이 거룩하다는 사실과 그것들이 바벨론의 손에 넘어갈 수 없다는 주장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자신의 성전에 속한 물건들조차 바벨론으로 옮겨지는 일을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 충격적인 선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돌보는 날까지」

「『그것들은 바벨론으로 옮겨져 내가 돌보는 날까지 거기 있을 것이다.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그때 내가 그것들을 가져와 이곳에 되돌려 놓겠다.』」예레미야 27:22 · 두루새김

사람들이 기다리던 회복이 완전히 부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회복에 이르기 전에 반드시 지나야 할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바벨론을 몰아내고 빼앗긴 것들을 되찾을 수 있다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돌아올 때를 자신이 정하시고, 돌아오게 하는 분도 자신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물건들이 돌아올 때를 결정하는 일은 여호와야훼께 속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원문에는 파카드(⁨פָּקַד⁩)라는 동사가 사용됩니다. 이 동사는 문맥에 따라 찾아보다, 돌보다, 주의를 기울이다, 벌하다 등 여러 의미를 나타냅니다. 흥미롭게도 원문에서는 8절에서 여호와야훼께서 바벨론을 섬기지 않는 민족을 벌하시겠다고 하실 때도 같은 어근이 사용됩니다. 22절에서는 바벨론에 있는 물건들에게 여호와야훼의 관심이 향하고, 그 결과 그것들이 다시 돌아옵니다. 열왕기하 25:13–17과 예레미야 52:17–23은 바벨론 군대가 성전을 파괴할 때 청동 기둥들과 바다라는 큰 물통과 받침대들을 부수어 그 청동을 바벨론으로 가져갔다고 기록합니다. 반면 에스라 1:7–11에서는 페르시아 왕 키루스가 느부갓네살이 가져갔던 여호와야훼의 성전 물건들을 돌려주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예레미야 27:22의 약속을 모든 물건이 손상 없이 원래 모습 그대로 돌아왔다는 역사적 진술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칠십인역의 이 단락은 히브리어 본문보다 짧으며, 마지막의 구체적인 반환 약속도 같은 형태로 전하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이 따르는 히브리어 본문에서 여호와야훼는 빼앗길 물건들이 돌아올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그 약속이 역사 속에서 어떤 물건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실현되었는지는 다른 성경 기록들과 함께 신중하게 살펴야 합니다.

결론 — 목에 멍에를 메고 서 있는 예언자

예레미야 27:1–22 본문 →

그렇기에 이 장에서 희망은 곧바로 승리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굴욕적인 상황 속에서도 생명을 보존하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회복을 기다릴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나타납니다.

사람은 자신이 바라는 미래를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문제는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반드시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이라고 단정할 때 생깁니다. 현실을 인정하는 것은 희망을 포기하는 일이 아닙니다. 희망이 있다는 이유로 현실을 부정해서도 안 됩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멍에를 벗으려 하지만, 여호와야훼는 그들에게 지금 멍에를 메라고 명령하십니다. 사람들은 빼앗긴 것들이 당장 돌아오기를 바라지만, 여호와야훼는 자신이 돌보실 날을 말씀하십니다.

이 장에서 생명의 길은 멍에가 사라졌다고 선언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지금 주신 말씀을 따라 살아남는 데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끝내 멍에를 목에 얹은 채 서 있습니다. 그가 전한 말씀의 무게는 바로 그 목 위에 놓여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