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26장

이 장의 자리 · 26–29장 · 예언자가 겪은 고난

죽여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예레미야 26장은 낯선 역설로 시작합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야훼의 명령에 따라 여호와야훼의 성전에서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들은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은 그를 붙잡아 죽이려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워진 성전과 그 성전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다면, 무엇이 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까?

이 질문은 예레미야의 재판을 통해 구체적인 모습을 얻습니다. 성전을 비판한 예언자는 죽어야 할 사람으로 몰리고, 성전을 지킨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죄 없는 사람을 죽일 위험에 놓입니다.

읽는 시간 17분소단락 726장 본문 읽기 →

심판을 선포하라는 명령 속에 담긴 뜻밖의 가능성

예레미야 26:1–6 본문 →

한마디도 빼지 마라

이 사건은 여호야김이 다스리기 시작할 무렵에 일어납니다.

여호야김은 요시야의 아들입니다. 요시야는 율법책이 발견되었을 때 그 말씀을 듣고 옷을 찢으며 여호와야훼 앞에 자신을 낮추었던 왕입니다(열왕기하 22:11–13, 19). 반면 여호야김은 여호와야훼의 눈에 악한 일을 행한 왕으로 평가됩니다(열왕기하 23:36–37).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성전 뜰에 서라. 유다의 모든 성읍에서 여호와야훼의 성전으로 경배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내가 전하라고 명령한 말을 모두 전해라. 한마디도 빼지 마라.」예레미야 26:2 · 두루새김

성전 뜰은 제사장들만 모이는 장소가 아닙니다. 경배하러 온 백성이 함께 있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예레미야의 선포는 예루살렘 주민에게만 향하지 않고 유다 전역에서 모인 사람들에게 향합니다.

이 명령은 예언자가 자신의 판단에 따라 말씀을 조절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예레미야에게 전달할 내용은 사람들이 듣기 싫어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성전의 파괴와 예루살렘의 몰락을 경고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빼면 여호와야훼가 맡기신 말씀은 달라집니다.

그렇다고 심판의 경고만 강조하고 그 안에 담긴 회복의 가능성을 빠뜨려도 온전한 선포가 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듣고」

「어쩌면 그들이 듣고 저마다 악한 길에서 돌아설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도 마음을 바꾸겠다. 그들의 악한 행동 때문에 내리려고 계획한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예레미야 26:3 · 두루새김

3절의 첫마디는 「어쩌면」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처럼 죄에서 돌이키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악에서 돌아설 때, 여호와야훼는 그들의 악 때문에 내리려던 재앙을 거두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레미야 18:7–10에서 이미 제시된 원리와 일치합니다. 여호와야훼가 어떤 민족을 멸하시겠다고 선언하셨더라도 그 민족이 악에서 돌아서면 재앙을 내리려던 마음을 바꾸실 수 있습니다. 반대로 복을 약속받은 민족도 악을 행하면 그 복을 당연하게 여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언의 말씀은 때로 미래에 일어날 일을 바꿀 수 없다고 통보하는 선언이 아니라, 그 미래를 맞이하기 전에 지금의 삶을 바꾸도록 부르는 말씀입니다.

요나서 3:4–10에서도 니느웨의 멸망이 선포되지만, 니느웨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자 하나님은 예고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이 사건과 예레미야 26장은 서로 다른 역사적 상황을 다루지만, 심판의 경고가 회개를 향한 부름이 될 수 있다는 공통점을 보여 줍니다.

실로처럼 만들겠다

4–6절에서 여호와야훼는 경고의 내용을 밝히십니다.

백성이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거듭 보내신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여호와야훼는 성전을 실로처럼 만드시겠다고 하십니다. 실로는 이스라엘의 오래된 성소였습니다. 사무엘상 1–3장에서 엘리와 어린 사무엘이 섬기던 곳이며, 언약궤가 머물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무엘상 4장에서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언약궤를 빼앗깁니다. 시편 78:60은 여호와야훼께서 실로의 거처를 버리셨다고 돌아봅니다.

실로의 역사는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불편한 기억이었습니다.

한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곳이자 예배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이 그 장소의 영원한 안전을 보장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예외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전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그 장소에 나아온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삶이 대신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무엘상 15:22에서 사무엘은 제사보다 여호와야훼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이사야 1:10–17에서도 하나님은 불의한 삶을 지속하면서 드리는 제사를 책망하시고 정의를 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예레미야 7:1–15에도 성전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장면과 실로에 대한 경고가 나타납니다. 두 본문은 내용상 밀접하지만, 정확히 같은 날의 사건을 기록한 것인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7장이 성전 경고의 내용과 의미를 길게 보여 준다면, 26장은 그 경고를 들은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집중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반응은 뜻밖에도 회개가 아니라 체포였습니다.

말씀의 내용보다 말씀을 전한 사람이 문제가 되다

예레미야 26:7–11 본문 →

모두 들었지만, 모두 같은 것을 듣지는 않았다

7절은 제사장들과 예언자들과 모든 백성이 예레미야의 말을 들었다고 기록합니다.

8절에서는 예레미야가 여호와야훼께서 명령하신 모든 말씀을 마쳤을 때 사람들이 그를 붙잡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예레미야가 말을 시작하자마자 막은 것이 아닙니다. 본문의 서술에 따르면 그가 전해야 할 말씀을 마친 뒤 그를 붙잡았습니다.

「왜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이 성전이 실로처럼 되고, 이 성읍이 폐허가 되어 아무도 살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느냐?」 모든 백성이 여호와야훼의 성전에서 예레미야에게 몰려들었습니다.예레미야 26:9 · 두루새김

여기에는 앞서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신 중요한 내용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악한 길에서 돌아서면 마음을 바꾸셔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경고를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보다, 자신들이 의지하는 장소를 위협하는 발언에 집중한 것입니다.

물론 본문은 그들이 자비의 약속을 일부러 빼 버렸다고 분명히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에서 그 약속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말씀을 들었지만, 그 말씀을 전한 사람을 없애는 데 관심을 쏟았습니다.

단순히 종교적인 사람들과 종교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충돌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와, 성전의 권위를 지키려는 종교 지도자들 사이의 충돌입니다.

성전 뜰이 재판의 자리로 바뀌다

10절에서 유다의 높은 관리들이 왕궁에서 여호와야훼의 성전으로 올라옵니다.

그들은 성전의 새 문 입구에 앉습니다. 예레미야 26장 역시 관리들이 자리에 앉고, 고발하는 사람과 고발당한 사람의 발언을 듣는 재판 장면으로 전개됩니다.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관리들과 모든 백성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에게 사형을 내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직접 들으셨듯이, 이 성읍을 거슬러 예언했기 때문입니다.」예레미야 26:11 · 두루새김

예루살렘을 거슬러 말하는 것이 곧 여호와야훼를 거슬러 말하는 일입니까?

이 둘은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야훼 자신이 예루살렘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면, 그 말씀을 전하는 것이 오히려 여호와야훼께 충실한 행동이 됩니다.

결국 재판에서 정말 따져야 할 것은 성전과 성읍을 비판했느냐가 아닙니다. 누가 예레미야를 보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자신을 변호하는 말을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성문이나 문 앞의 공개된 공간은 분쟁을 듣고 판결을 내리는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신명기 21:18–21과 룻기 4:1–12에서도 이러한 관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이 예언자들을 죽인 역사를 탄식하시는 말씀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마태복음 23:37; 누가복음 13:34). 이는 예레미야 26장의 직접 인용이라기보다, 예언자들의 경고를 거부하는 예루살렘의 역사가 계속해서 신앙의 의미를 돌아보는 대상이 되었음을 보여 주는 연결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26장 자체의 중심은 끝까지 여호야김 시대의 유다에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변호하면서도 백성에게 돌아설 길을 제시하다

예레미야 26:12–16 본문 →

예레미야가 끝까지 바꾸지 않은 말

사형을 요구하는 사람들 앞에서 예레미야가 가장 먼저 하는 말은 자신의 억울함에 대한 호소가 아닙니다.

예레미야가 모든 관리와 백성에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저를 보내셨습니다. 이 성전과 이 성읍에 관해 여러분이 들은 모든 말을 예언하게 하셨습니다.」예레미야 26:12 · 두루새김

예레미야는 자신이 성전과 예루살렘에 관해 그들이 문제 삼는 말을 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말이 자신의 판단이나 미워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여호와야훼의 명령이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의 삶과 행동을 바르게 고치고,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러면 여호와야훼께서 마음을 바꾸셔서, 여러분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실 것입니다.」예레미야 26:13 · 두루새김

자신을 고발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들도록 말씀의 내용을 바꾸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복수를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살 수 있는 길을 다시 제시합니다.

예레미야가 두 번째로 회개의 가능성을 전하는 것은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람들에게도 여호와야훼의 경고와 자비가 여전히 열려 있음을 보여 주는 행동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손에 있습니다」

14–15절에서 예레미야는 자신의 처지를 인정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손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좋고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저를 대하십시오.」예레미야 26:14 · 두루새김

그러나 곧바로 이렇게 덧붙입니다.

「다만 이것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저를 죽이시면, 여러분 자신과 이 성읍과 여기 사는 사람들에게 죄 없는 사람을 죽인 책임을 지우는 것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참으로 저를 여러분에게 보내셔서, 이 모든 말을 직접 전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예레미야 26:15 · 두루새김

그들은 예레미야를 죽일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힘이 그들의 행동을 옳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재판의 상황이 뒤집힙니다.

겉으로는 예레미야가 성읍을 위태롭게 만든 혐의로 재판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성읍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 행동은 죄 없는 사람을 죽이려는 재판자들의 선택입니다.

이것은 예레미야 개인의 생존 문제가 아닙니다. 백성이 과연 정의롭게 판단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람들의 판단이 달라지다

관리들과 모든 백성이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에게 사형을 내릴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말했기 때문입니다.」예레미야 26:16 · 두루새김

앞서 모든 백성은 제사장들과 예언자들과 함께 예레미야를 붙잡았습니다(8절). 같은 「모든 백성」이라는 집단이 이야기의 앞뒤에서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개인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뜻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집단의 공개적인 판단이 달라졌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은 예레미야가 성읍을 거슬러 말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요구했습니다. 관리들과 백성은 그가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말했다는 이유로 사형에 반대합니다.

본문은 예레미야가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지만, 백성이 실제로 자신의 악한 길에서 돌아섰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예언자를 죽이지 않는 결정과 예언자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재판의 흐름은 바뀌었지만, 여호와야훼께서 처음에 원하셨던 회개가 이루어졌는지는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스라엘의 율법에서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일은 단순히 한 사람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공동체가 책임져야 할 심각한 죄로 다루어집니다(신명기 19:10; 21:8–9).

미가의 예언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다

예레미야 26:17–19 본문 →

과거의 말씀을 현재의 재판에 가져오다

17절에서 그 땅의 장로들 가운데 몇 사람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약 한 세기 앞선 히스기야 시대의 예언자 미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미가도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했습니다.

「모레셋 사람 미가는 유다 왕 히스기야 시대에 예언했습니다. 그는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온은 밭처럼 갈아엎어지고, 예루살렘은 무너진 돌무더기가 되며, 성전이 있는 산은 숲이 우거진 언덕들이 될 것이다.』」예레미야 26:18 · 두루새김

이 말씀은 미가 3:12에 나오는 예언입니다. 미가 3:9–11을 보면, 그 예언이 선포된 이유가 나옵니다. 지도자들은 정의를 왜곡하고, 제사장들은 대가를 받고 가르치며, 예언자들은 돈을 받고 예언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여호와야훼께서 자기들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재앙이 닥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가 시대의 문제는 성전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말하면서도 정의를 행하지 않는 지도자들이 문제였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도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은 여호와야훼의 성전을 지키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생명을 위협합니다.

과거의 예언은 현재의 재판을 비추고 있습니다.

장로들은 예레미야가 이전에 없던 위험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이미 선포했던 말씀의 전통 안에 서 있음을 보여 줍니다.

히스기야는 미가를 죽였는가?

장로들은 계속해서 묻습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와 모든 유다 사람이 그를 죽였습니까? 히스기야는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며 그분께 은혜를 구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여호와야훼께서 마음을 바꾸셔서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큰 재앙을 불러들이려 하고 있습니다.」예레미야 26:19 · 두루새김

이때 히스기야의 행동을 미가서 3장 자체에서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미가서에는 심판 예언이 기록되어 있지만, 그 예언을 들은 히스기야가 어떻게 응답했는지는 이 장로들의 증언을 통해 알려집니다.

3절에서 여호와야훼는 사람들이 돌아서면 마음을 바꾸셔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13절에서 예레미야는 백성이 삶과 행동을 바르게 고치면 여호와야훼께서 마음을 바꾸실 것이라고 다시 말했습니다. 그리고 19절에서 장로들은 과거에 여호와야훼께서 실제로 마음을 바꾸셔서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던 일을 증언합니다.

따라서 그들이 기억하는 히스기야의 이야기는 예레미야를 살려야 하는 이유일 뿐 아니라, 아직 예루살렘에 회개의 길이 열려 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누가 진정으로 성읍을 위험에 빠뜨리는가

장로들의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큰 재앙을 불러들이려 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은 앞서 예레미야가 경고한 죄 없는 사람을 죽인 책임과 연결됩니다. 예레미야를 죽이면 성읍이 안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장로들은 새로운 계시를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선포되었던 말씀과 그 말씀에 사람들이 어떻게 응답했는지를 기억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기억이 예레미야의 생명을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에서 과거의 말씀을 기억한다는 것은 옛날 이야기를 보존하는 일만이 아닙니다. 오늘의 선택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잃지 않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히스기야와 정반대의 일을 행한 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사건이 일어난 시대의 왕, 여호야김입니다.

우리아의 죽음: 똑같은 말씀, 전혀 다른 결과

예레미야 26:20–23 본문 →

또 한 사람의 예언자

20절에서 갑자기 새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기럇여아림 출신인 스마야의 아들 우리아입니다. 본문은 우리아가 「예레미야와 같은 내용」으로 예언했다고 밝힙니다. 이 표현은 두 예언자가 전한 말씀의 핵심이 같았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 일어난 일은 달랐습니다.

여호야김 왕은 우리아의 말을 듣고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우리아는 두려워하여 이집트로 도망쳤지만, 왕은 엘나단과 사람들을 보내 그를 붙잡아 오게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아를 이집트에서 끌어내어 여호야김 왕에게 데려왔습니다. 왕은 그를 칼로 죽이고, 그 시신을 일반 백성의 무덤에 내던졌습니다.예레미야 26:23 · 두루새김

이 사건은 예레미야의 위험이 단지 군중의 일시적인 분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왕의 권력 자체가 예언자의 생명을 빼앗는 데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전하면 반드시 위험에서 벗어난다는 결론은 본문에 없습니다. 우리아가 도망친 것을 예레미야보다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근거도 없습니다. 본문은 그가 두려워하여 도망쳤다고 기록하지만, 그의 믿음에 대한 평가를 내리지 않습니다.

히스기야와 여호야김이라는 두 왕

미가와 우리아의 이야기를 나란히 놓으면 두 왕의 행동이 뚜렷하게 대조됩니다.

두 왕은 모두 심판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한 왕은 그 말씀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고, 다른 왕은 말씀을 전한 사람을 없애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한다는 것은 반드시 그 말씀이 듣기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때로는 자신과 자신이 지키려는 것들을 비판하는 말씀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반면 여호야김은 자신의 권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예언자를 없앨 수 있었지만, 그 행동이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무효로 만들지는 못합니다.

우리아 이야기는 누가 들려주는가?

20–23절에는 한 가지 해석상의 갈림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장로들이 우리아의 사건까지 언급했다는 읽기입니다. 두 번째는 장로들의 발언이 19절에서 끝나고, 20절부터 이야기하는 이가 우리아의 사건을 덧붙였다는 읽기입니다.

예레미야의 생존은 예언자가 언제나 보호받는다는 원칙의 증명이 아니라, 실제로 죽을 수 있었던 상황에서 얻은 구체적인 보호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은 그 보호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의 이름을 밝힙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원문에는 현대적인 인용부호가 없기 때문에, 19절에서 장로들의 말이 끝난 것인지, 아니면 우리아 이야기도 장로들이 계속 말하는 것인지 문장만으로 완전히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첫 번째 읽기의 경우 우리아의 죽음은 여호야김이 실제로 예언자를 죽였다는 위험한 사례로 제시됩니다. 같은 일을 예레미야에게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가 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읽기의 경우 미가의 이야기는 예언자를 살린 사례이고, 우리아의 이야기는 그와 정반대의 결과를 보여 주는 사례가 됩니다.

아히감의 손이 예레미야와 함께 있었다

예레미야 26:24 본문 →

그러나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 예레미야의 편에 서서 그를 보호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백성의 손에 넘겨지지 않아 죽임을 면했습니다.예레미야 26:24 · 두루새김

아히감은 이 장에서 처음 등장하는 이름 없는 인물이 아닙니다. 열왕기하 22:12–14에 따르면 그는 요시야 왕이 발견된 율법책에 관해 여호와야훼의 뜻을 알아보려고 여예언자 훌다에게 보냈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왕실과 가까운 위치에 있는 사람이 반드시 예언자를 적대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전 지도자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는 상황에서, 왕실과 연결된 인물이 그를 보호할 수도 있었습니다.

14절에서 예레미야는 사람들에게 「저는 여러분의 손에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원문에서는 24절에도 아히감의 ‘손’이 예레미야와 함께 있었고, 예레미야가 백성의 ‘손’에 넘겨지지 않게 되었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두루새김은 앞의 표현을 「예레미야의 편에 서서 그를 보호했습니다」로 풀어 옮기고, 뒤의 표현은 「백성의 손에 넘겨지지 않아」로 옮깁니다.

예레미야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손이 있고, 그 생명을 보호하는 손이 있습니다.

말씀을 지키는 일과 자신이 지키려는 것을 구별하기

예레미야 26:1–24 본문 →

여호와야훼께서 보내신 말씀은 사람들이 아직 돌아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었습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선택에 달려 있었습니다. 여호와야훼를 경외한다는 것은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모든 비판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태도가 아닙니다. 예레미야의 재판처럼 무엇이 참으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일인지 신중하게 분별하는 태도입니다.

이 장의 마지막에서 예레미야는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말씀을 전했던 우리아는 이미 죽었습니다. 예루살렘이 회개했다는 소식도 들리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환호나 승리의 선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성전에서 시작된 소란이 죽음의 위협으로 번졌지만,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 예레미야를 보호했다는 짧은 기록으로 끝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무엇을 선택했는지, 그 마지막 장면에는 예레미야의 편에 서서 그를 보호한 아히감이 남아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