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33장
이 장의 자리 · 32–37장 · 엘리후의 말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욥기 33장에는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질문을 품고 마주 서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고통을 아시면서도 왜 대답하지 않으시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고 계시는데 인간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묻습니다. 그 차이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말이 「하나님께서는 한 번, 또 두 번 말씀하시지만,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14절)입니다.
세 친구는 주로 고난의 원인을 물었습니다. 의로운 하나님이 악인을 벌하신다는 원칙에서 출발하여, 욥의 고난에도 그에 걸맞은 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고난의 목적에 주목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벌하시기 위해서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잘못된 길로 나아가지 않도록 막으시고 죽음에서 구하시기 위해 고통을 사용하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이미 저지른 죄에 대한 판결일 뿐 아니라, 아직 닥치지 않은 파멸에서 사람을 돌이키게 하는 경고일 수도 있습니다.
세 친구 중 엘리파즈도 고난을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그 설명이 욥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이 어떤 죄 때문인지 밝히라고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이 일반적으로 고난을 통해 사람을 가르치실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욥의 고난 역시 그 목적 때문에 주어졌다고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차이를 놓치지 않는 것이 33장을 읽는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설명의 출발점은 의외로 욥이 오래전부터 바라던 한 가지 조건과 맞닿아 있습니다.
나도 당신처럼 진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엘리후가 욥에게 말을 이었습니다. 「욥, 부디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제가 하는 모든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욥기 33:1 · 두루새김
엘리후는 처음으로 욥의 이름을 직접 부릅니다.
앞 장에서는 주로 세 친구들을 향해 말하며 자신이 말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이제는 욥을 대화의 상대방으로 세웁니다. 그는 자신의 말이 정직한 마음에서 나온다고 밝히고, 자신이 아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겠다고 약속합니다(2–3절).
「하나님의 영이 저를 만들었고, 샤다이의 숨결이 저를 살게 합니다.」욥기 33:4 · 두루새김
앞 장에서는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준다고 말했습니다(32:8). 이제는 「샤다이의 숨결」이 자신을 살게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셨다는 사실은 엘리후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그는 정반대 방향으로 이야기를 펼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저도 당신과 같습니다. 저 역시 진흙에서 빚어진 사람입니다.」욥기 33:6 · 두루새김
엘리후는 자신이 욥보다 더 높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에게 대답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도 욥과 똑같은 재료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욥은 이미 하나님께, 자신을 진흙처럼 빚으신 하나님이 왜 다시 자신을 티끌로 돌리려 하시느냐고 물었습니다(10:9). 욥에게 진흙의 모습은 창조의 은혜를 떠올리게 할 뿐 아니라,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무너뜨리시는 것처럼 느끼는 고통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엘리후는 같은 모습을 다른 목적으로 사용합니다.
자신도 진흙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욥이 자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당신을 두려움에 떨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신을 무겁게 짓누르지도 않을 것입니다.」욥기 33:7 · 두루새김
이 말은 욥이 오래전에 했던 요청에 놀라울 만큼 가깝습니다. 욥은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서 양쪽에 손을 얹을 수 있는 판정자가 없다고 탄식했습니다(9:33). 또한 자신을 누르는 하나님의 손과 두려움이 사라진다면 겁내지 않고 말할 수 있겠다고 했습니다(9:34–35; 13:20–22).
하나님과 직접 다투는 일은 너무 두렵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힘의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같은 진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이라면, 욥은 두려움 없이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최종 판결을 내릴 수 있다고 증명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하나님과 욥 사이에서 양쪽 모두에게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정식 중재자로 임명되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욥이 두려움 없이 논쟁할 수 있는 인간의 상대방이 되겠다고 제안합니다.
그런데 그가 실제로 얼마나 열린 대화를 할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바로 다음 절부터 엘리후는 욥이 잘못 말했다고 지적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6절의 「하나님 앞에서는 저도 당신과 같습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욥이 요청한 바에 따라 자신이 하나님과의 논쟁에서 대화 상대가 되어 주겠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하나님 앞에서 두 사람이 같다는 뜻으로 옮겼습니다. 뒤에 이어지는 진흙의 모습을 함께 읽으면, 두 사람이 똑같이 하나님이 만드신 존재라는 의미가 두드러집니다. 어느 쪽이든 엘리후가 욥보다 본질적으로 더 높은 존재가 아님을 밝힌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진흙에서 빚어진 사람」이라는 표현은 인간이 흙으로 빚어진 존재라는 창세기 2:7의 창조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욥은 정말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했는가
엘리후는 자신이 들었던 욥의 말을 인용합니다.
「『나는 깨끗하고 잘못이 없어. 나는 죄가 없고 아무 악도 저지르지 않았어.』」욥기 33:9 · 두루새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를 공격할 구실을 찾으시고, 나를 원수로 여기셔.』」욥기 33:10 · 두루새김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고, 내가 가는 모든 길을 감시하셔.』」욥기 33:11 · 두루새김
이 요약은 욥의 실제 발언과 상당 부분 연결됩니다. 욥은 자신이 결백하다고 주장했습니다(9:21; 10:7; 13:18). 하나님께서 자신을 원수처럼 대하신다고 탄식하기도 했습니다(13:24; 19:11). 특히 자신의 발을 차꼬에 채우고 가는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는 표현은 욥기 13:27과 거의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습니다.
따라서 엘리후가 욥의 말을 완전히 꾸며 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요약에서 무엇이 빠졌는지 살펴보면 중요한 문제가 나타납니다.
욥의 결백 주장은 자신이 인생에서 어떠한 잘못도 저지른 적이 없다는 선언과 반드시 같지는 않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어떤 죄가 있는지 하나님께 알려 달라고 요청했습니다(13:23). 동시에 자신에게 닥친 엄청난 고난이 어떤 악행에 대한 정당한 벌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엘리후의 인용에서는 그 맥락이 다소 좁아집니다. 욥은 죄가 전혀 없는 완전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면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신다고 비난하는 사람처럼 보이게 됩니다. 물론 욥의 말에는 실제로 대담하고 위험하게 들릴 수 있는 항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요약이 욥의 입장 전체를 균형 있게 보여 주는지는 따로 살펴야 합니다.
여기서 엘리후는 자신의 첫 번째 판단을 내립니다.
「하지만 이 점에서는 당신이 옳지 않다고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욥기 33:12 · 두루새김
욥은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행동을 설명해 주셔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하나님이 인간과 대등한 위치에서 모든 행동을 해명하셔야 할 의무를 지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아무 설명도 해 주지 않으신다고, 왜 그분께 따지십니까?」욥기 33:13 · 두루새김
이 구절의 히브리어는 누가 누구의 말에 대답하지 않는지를 두고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두루새김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설명하지 않으신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고, 하나님이 인간의 말에 일일이 대답하지 않으신다는 방향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엘리후의 주장은 하나님의 위대함이 인간의 요구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욥의 질문이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보다 크시다는 사실은 욥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 엄청난 차이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없다고 탄식했습니다(9:14–20).
욥의 문제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인정하지 않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위대하신 하나님이 왜 자신을 원수처럼 대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데 있었습니다.
엘리후는 이제 그 문제에 새로운 설명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여러 방식으로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 또 두 번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또 두 번 말씀하시지만,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욥기 33:14 · 두루새김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일을 인간에게 설명하실 의무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하나님이 대답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실제로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말씀하십니까? 엘리후가 처음으로 제시하는 것은 꿈입니다.
「사람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거나 잠자리에서 졸고 있을 때, 꿈이나 밤의 환상 속에서,」욥기 33:15 · 두루새김
「그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귀를 여시고, 타이르시는 말씀을 확실히 새겨 주십니다.」욥기 33:16 · 두루새김
사람은 낮 동안 자신의 생각과 계획에 몰두합니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때로는 다른 사람의 경고를 듣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잠든 동안에는 평소처럼 모든 것을 스스로 다스리기 어렵습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이 바로 그런 시간에 사람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목적입니다.
「사람이 하려던 일에서 돌아서고, 스스로를 높이는 마음을 버리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욥기 33:17 · 두루새김
「그의 목숨을 구덩이에서 지키시고, 무기에 목숨을 잃지 않도록 붙들어 주십니다.」욥기 33:18 · 두루새김
여기서 「구덩이」는 죽음과 파멸을 가리킵니다. 「무기에 목숨을 잃지 않도록」이라는 말은 폭력적인 죽음의 위험을 떠올리게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꿈을 통해 사람에게 경고하시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시려는 행동이 아닙니다.
사람이 잘못된 길을 계속 가다가 생명을 잃지 않도록 막으시는 행동입니다.
친구들은 사람이 악을 행하면 그 결과로 고난이 온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악한 길로 깊이 들어가기 전에 그를 돌이키기 위해 말씀하실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경고는 파멸이 정해졌다는 선언이 아니라,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주시는 기회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욥기 안에서 꿈은 이처럼 긍정적인 의미로만 등장하지 않습니다.
욥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꿈으로 자신을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두렵게 하신다고 탄식했습니다(7:14). 같은 꿈을 두고 욥은 하나님의 위협을 경험했다고 말합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경고와 보호의 가능성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옳습니까?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경고하실 수 있다는 사실은 구약의 여러 이야기에서 확인됩니다. 엘리후는 욥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지만, 아직 그 경험 자체를 해명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다음으로 꿈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방식의 가르침을 이야기합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이스라엘의 이야기에서 꿈은 때때로 하나님이 뜻을 알려 주시는 통로로 등장합니다. 창세기 20:3에서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꿈으로 경고하십니다. 창세기 31:24에서는 라반에게 꿈에 나타나셔서 야곱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사건에서 꿈은 이미 일어난 잘못을 처벌하기보다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잘못을 막는 역할을 합니다. 또 16절에서 두루새김이 「확실히 새겨 주십니다」(חָתַם)로 옮긴 원문 낱말은 봉인하거나 인장을 찍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타이르는 말과 결합된 이 구절은 정확한 의미를 확정하기 어렵지만,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경고를 확실하게 전달하시거나 마음에 새겨 두게 하신다는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침상에서 받는 징계 — 고통은 구원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
「또 사람은 잠자리에서 아픔을 겪으며 바로잡히기도 합니다. 뼈 곳곳에 심한 통증이 그치지 않습니다.」욥기 33:19 · 두루새김
엘리후가 제시하는 두 번째 방식은 질병과 고통입니다.
꿈에서는 사람이 잠든 동안 귀가 열립니다. 여기서는 잠자리에 누워 고통을 겪습니다. 잠자리는 쉬는 곳이어야 하지만, 이 사람에게는 고통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는 빵도 역겨워하고, 먹음직한 음식도 싫어합니다.」욥기 33:20 · 두루새김
「살은 다 빠지고, 전에는 보이지 않던 뼈들이 드러납니다.」욥기 33:21 · 두루새김
여기에는 단순한 상징 이상의 몸의 현실이 담겨 있습니다. 음식을 먹을 수 없고, 몸이 눈에 띄게 변하며, 생명이 점점 약해지는 과정입니다.
이 묘사를 들을 때 욥은 자신의 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밤에 뼈가 파이는 듯한 고통을 겪는다고 말했고(30:17), 살갗이 검어지고 뼈가 열기에 탄다고 탄식했습니다(30:30). 엘리후는 고통받는 사람을 설명하면서 실제로 자신 앞에 앉아 있는 욥을 떠올리게 하고 있습니다.
「그의 목숨은 구덩이에 가까워지고, 그의 생명은 죽음을 가져오는 이들에게 다가갑니다.」욥기 33:22 · 두루새김
18절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구덩이에 빠지지 않도록 붙드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22절에서는 사람이 바로 그 구덩이에 가까워집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이 처음부터 고통을 주지 않으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심각한 고통을 겪으며 죽음에 가까워지는 상황도 하나님의 가르침과 연결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죽음에 이를 만큼 극심한 고통이 어떻게 사람을 구원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까?
엘리후는 고통 자체가 구원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고통은 사람이 자기 길을 돌아보게 하고,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하며, 하나님께 돌이키도록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고통의 가능한 목적에 관한 설명이지, 모든 고통의 실제 원인을 밝힌 것은 아닙니다. 고난을 통해 사람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는 사실과, 그 교훈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그 고난을 보내셨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야기의 처음에서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소개되었습니다(1:1). 그의 고난은 친구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숨겨진 악행에 대한 단순한 벌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엘리후가 제시하는 바로잡음의 원리를 욥에게 적용하려면, 욥이 실제로 어떤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야 하는지 밝혀야 합니다. 엘리후는 아직 그 사실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파괴하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 하실 수도 있다는 말은 희망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극심한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그 고통은 스스로를 높이는 마음을 고치기 위한 것이라고 단정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비난이 될 수 있습니다.
엘리후의 설명에는 구원의 가능성과 성급한 적용의 위험이 함께 존재합니다.
그런데 23절에서 이야기는 뜻밖의 방향으로 전환됩니다.
죽음에 가까워진 사람을 위해 누군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천 명 가운데 하나 — 구덩이 앞에서 들려오는 구원의 말
「그 사람 곁에 천 명 가운데 하나인 천사가 있어, 뜻을 풀어 주며 그가 마땅히 할 일을 알려 준다면,」욥기 33:23 · 두루새김
이 존재가 하늘의 천사인지, 하나님이 보내신 인간의 전달자인지는 읽기가 갈립니다. 그러나 이 천사가 맡는 역할은 비교적 분명합니다. 그는 죽음에 가까워진 사람이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하도록 돕는 존재입니다.
「천 명 가운데 하나」라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 천 명 가운데 정확히 하나만 이런 역할을 맡는다는 통계가 아닙니다.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존재가 드물고 특별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욥은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서 자신의 사정을 들어주고 변호해 줄 존재를 간절히 바랐습니다(9:33; 16:19–21). 물론 이 천사를 욥이 바라던 중재자와 곧바로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상황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할 때 중간에서 뜻을 전달하고 도움을 주는 존재가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중요한 연결이 있습니다.
그리고 24절에서 결정적인 말이 들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쌍히 여기시며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가 구덩이로 내려가지 않도록 구해 내라. 내가 몸값을 찾았다.』」욥기 33:24 · 두루새김
한 사람이 죽음의 구덩이에 가까워져 있습니다. 그의 몸은 심하게 쇠약해졌고, 생명은 거의 끝에 다다랐습니다.
그런데 그를 구해 내라는 말이 들립니다.
사람이 죽음에 가까워졌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구원이 더는 가능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이 엘리후가 그리는 구원의 반전입니다.
문맥 전체에서 구원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26절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받아들이시고, 29–30절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구덩이에서 돌이키신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몸값」은 어떤 사람을 죽음이나 형벌에서 벗어나게 하는 대가와 연결되는 말이지만, 이 구절은 그 몸값이 정확히 무엇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한 단어만으로 특정한 제사나 죄를 씻는 의식을 확정하거나, 신약의 구속 사건을 직접 예언한 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25절부터는 앞에서 묘사한 질병의 과정이 반대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의 살은 젊었을 때보다 더 생기 있어지고, 그는 젊은 시절로 돌아갈 것입니다.」욥기 33:25 · 두루새김
21절에서는 살이 다 빠지고 뼈가 드러났습니다. 이제는 살이 다시 생기를 얻고 젊은 시절의 건강을 회복합니다. 이 장면에서 고통받던 몸은 단순히 버려야 할 육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회복시키시는 대상입니다.
그러나 엘리후가 묘사하는 회복은 몸의 변화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받아 주실 것입니다. 그는 기뻐 외치며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옳다고 다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욥기 33:26 · 두루새김
여기에는 욥이 간절히 원했던 것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응답과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원수처럼 대하시고 얼굴을 숨기신다고 탄식했습니다(13:24). 고난받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을 외면하신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회복된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을 받아 주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가 옳다고 다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라는 마지막 표현은 두루새김처럼 하나님이 그 사람을 다시 옳다고 인정하신다는 뜻으로 볼 수 있고, 하나님이 그에게 합당한 회복과 보상을 주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이 구체적으로 어떤 법적 절차를 묘사하는 것은 아니지만, 잃어버렸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된다는 의미가 중심에 있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이어지는 고백은 독자의 주의를 끕니다.
「그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할 것입니다. 『나는 죄를 짓고 바른 것을 비틀었어. 하지만 내가 한 만큼 벌을 받지는 않았어.』」욥기 33:27 · 두루새김
마땅히 받아야 할 것보다 더 큰 자비를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제시한 구원의 모습에는 잘못된 길에서의 돌이킴과 죄의 인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고백을 곧바로 욥에게 요구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엘리후는 죄를 인정한 사람이 회복되는 한 장면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욥이 그와 같은 죄를 지었다는 사실까지 입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의 설명이 다시 숨겨진 죄를 인정하라는 압박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목숨을 건져 구덩이에 들어가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는 살아서 빛을 볼 것입니다.」욥기 33:28 · 두루새김
구덩이는 죽음으로 향하는 곳입니다. 빛은 다시 살아가는 생명을 나타냅니다. 이 장면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가까워졌던 사람이 구원받아 살아서 빛을 다시 보게 되는 상황입니다.
욥은 자신의 삶이 죽음으로 끝날 것이라고 탄식했습니다(30:23). 엘리후는 하나님이 사람을 그 구덩이에서 돌이키실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직 엘리후가 설명한 회복이 욥에게 실제로 일어나리라는 보장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23절의 「천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말아크(מַלְאָךְ)입니다. 이 낱말은 문맥에 따라 인간의 전령이나 천사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뜻을 풀어 주며」에 해당하는 멜리츠(לוּץ)는 어떤 말을 전달하거나 해석하고, 다른 사람 사이에서 뜻을 풀어 주는 역할과 연결됩니다. 두루새김은 그를 하늘의 천사로 이해하여 옮겼습니다. 원문에서는 하나님이 보내신 인간의 전달자나 가르침을 설명하는 사람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또한 「마땅히 할 일」은 사람이 따라야 할 올바른 길을 가르친다는 뜻일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의 올바름을 밝힌다는 방향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원문만으로 한 가지 읽기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24절에서도 누가 불쌍히 여기며 누가 말하는지에 해석상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며 구원을 명령하시는 것으로 옮겼고, 원문에서는 앞에 등장한 천사가 중재하는 행동을 더 강조하여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몸값」을 누가 마련했는지, 무엇이 몸값으로 받아들여졌는지, 어떤 방식으로 죽음을 면하게 하는지도 본문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구원의 모습은 훗날 성경에서 발전하는 하나님의 속량과 생명 회복이라는 주제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다만 33장의 천사와 몸값을 특정한 신약 인물이나 사건의 직접적인 예언으로 읽을 근거는 본문에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이 장에서는 먼저 엘리후가 설명하는 죽음에서의 구출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의미를 존중해야 합니다.
두 번, 세 번 — 하나님이 반복해서 하시는 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을 두 번, 세 번 하십니다.」욥기 33:29 · 두루새김
「그의 목숨을 구덩이에서 돌이켜, 생명의 빛을 누리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욥기 33:30 · 두루새김
하나님은 꿈으로 사람에게 경고하실 수 있습니다. 고통을 통해 사람을 돌이키실 수 있습니다. 죽음에 가까워진 사람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실 수도 있습니다.
엘리후는 이 모든 일을 하나의 목적 아래 놓습니다.
14절에서는 하나님이 「한 번, 또 두 번」 말씀하신다고 했고, 29절에서는 하나님이 「두 번, 세 번」 이런 일을 하신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정확히 몇 번 경고하시고 몇 번 구원하시는지 정한 숫자가 아닙니다. 반복되는 하나님의 행동을 강조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파멸시키시는 데만 관심을 두시는 분이 아니라, 파멸을 막으시기 위해 반복해서 일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욥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적대하시고, 고통을 가하시며, 죽음으로 데려가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엘리후는 똑같이 두려운 경험일지라도 그 목적이 정반대일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살리시기 위해 일하신다는 것은 구약 전체에서 충분히 확인되는 신학적 주제입니다. 에스겔 18:23과 33:11에서도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시기보다 그가 돌이켜 살아가는 것을 바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강조하는 데서 중요한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욥에게 닥친 고난의 구체적인 이유는 여전히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의 주장이 가진 힘과 한계입니다.
당신이 옳다고 밝혀 주고 싶습니다
엘리후는 긴 설명을 마친 뒤 다시 욥에게 말합니다.
「욥, 귀 기울여 제 말을 들으십시오. 잠잠히 계십시오. 제가 말하겠습니다.」욥기 33:31 · 두루새김
그런데 이어지는 말이 뜻밖입니다.
「할 말이 있으시면 제게 대답하십시오. 말씀하십시오. 저는 당신이 옳다고 밝혀 주고 싶기 때문입니다.」욥기 33:32 · 두루새김
엘리후는 처음부터 욥의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했습니다(12절). 이 발언을 단순한 위선으로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엘리후는 욥이 실제로 옳은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세 친구들이 욥의 주장이 틀렸음을 제대로 밝히지 못했다고 생각했고, 자신은 더 공정하게 논쟁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에는 또 다른 모습이 나타납니다.
「할 말이 없으시면 제 말을 들으십시오. 잠잠히 계십시오. 제가 당신에게 지혜를 가르쳐 드리겠습니다.」욥기 33:33 · 두루새김
여기서 엘리후는 다시 자신을 가르치는 사람의 위치에 놓습니다. 이 장은 욥에게 귀를 기울여 달라고 요청하면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욥에게 다시 귀를 기울여 달라고 요청하면서 끝납니다.
그는 지혜가 단지 나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능자의 숨결에서 온다고 말했습니다(32:8–9). 그렇다면 자신이 지혜를 가르치겠다는 선언 역시 그 지혜의 근원에 비추어 검토받아야 합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이 다양한 방식으로 말씀하시지만 사람이 그 말씀을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독자가 듣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 아니라 엘리후 자신의 설명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직 욥에게 직접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엘리후는 자신이 욥이 옳다고 밝혀 주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일을 실제로 이루려면, 욥이 자신의 고난에 관해 제기한 질문을 끝까지 진지하게 들어야 할 것입니다.
고통을 설명하는 말은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
욥기 33장을 읽으며 우리는 고통받는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할 수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엘리후의 설명에는 분명히 위로가 될 수 있는 진리가 있습니다. 고통이 언제나 하나님의 버림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에는 죄를 심판하시는 일뿐 아니라, 사람이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돌이키시는 일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모든 행동을 설명하실 의무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엘리후 자신도 하나님이 욥에게 왜 이 고난을 허락하셨는지 전부 알 수 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인간보다 크시다는 사실은 욥의 요구를 제한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설명하려는 엘리후의 지식에도 한계를 둡니다.
고통이 때로 사람을 돌이키게 하는 계기가 된다는 사실을 근거로,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고쳐야 할 죄가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가능성을 한 사람의 구체적인 고난에 적용할 때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실 수 있는지 아는 것과, 지금 이 사람에게 하나님이 정확히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아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의 앞에는 한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엘리후는 죽음의 구덩이에서 돌아와 생명의 빛을 보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듣는 욥은 아직 그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엘리후가 이야기를 마치자, 다시 침묵이 찾아옵니다.
그는 욥에게 대답하라고 청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혜를 가르치겠다고 말합니다.
욥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가 기다리던 하나님의 대답도 아직 들리지 않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