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34장
이 장의 자리 · 32–37장 · 엘리후의 말
하나님의 정의를 지키려다 사람을 정죄하다
욥기 34장에서 엘리후는 누구도 쉽게 부정할 수 없는 말을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하지 않으시고, 샤다이께서는 공정한 판결을 굽히지 않으십니다.」욥기 34:12 · 두루새김
하나님은 옳지 않은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권력자의 편을 들지 않으시며, 가난한 사람의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 사람의 모든 발걸음을 보시고, 어둠 속에 감춰진 악행까지 아십니다.
그런데 장의 마지막에서 엘리후는 「부디 욥이 끝까지 시험받기를 바랍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욥의 고난이 끝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가 더 철저히 시험받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이런 결론에 이르렀을까요?
엘리후는 하나님의 정의를 변호하려 합니다. 그러면서 욥의 항의를 하나님에 대한 반항으로 해석합니다. 하나님이 정의로우시다는 사실을 지키기 위해, 그 정의에 의문을 제기하는 욥의 말을 죄로 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에 관한 올바른 원칙을 알고 있어도, 그 원칙으로 한 사람의 처지를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엘리후의 주장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는 세 친구와 달리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일을 우주 전체의 생명과 연결하고, 권력자에 대한 심판과 가난한 사람들의 부르짖음까지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가 내놓는 일반적인 진리가 욥의 잘못을 실제로 증명하는지는 끝까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그리고 우리는 그 하나님에 관해 알고 있는 진리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어디까지 판단할 수 있나요?
귀는 말을 가려낸다 — 그러나 누가 심판자가 되는가
엘리후는 이번에는 욥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향해 말합니다.
「지혜로운 분들, 제 말을 들으십시오. 아는 것이 있는 분들, 제게 귀를 기울이십시오.」욥기 34:2 · 두루새김
32장에서 그는 나이 많은 사람들의 판단이 반드시 지혜로운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지혜롭고 아는 것이 있는 사람들에게 말한다고 합니다. 이들을 실제로 그 자리에 있었던 별도의 지혜로운 사람들로 볼 수도 있지만, 그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본문은 밝히지 않습니다. 엘리후가 자신의 주장을 평가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들을 말로 불러내고 있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가 요청하는 것은 함께 판단하는 일입니다.
「입이 음식의 맛을 가려내듯, 귀는 말을 가려내기 때문입니다.」욥기 34:3 · 두루새김
이 비유는 본래 욥이 했던 말과도 연결됩니다. 욥은 12:11에서 귀가 말을 시험하고 입천장이 음식을 맛보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엘리후는 이제 같은 비유를 사용합니다.
사람은 음식을 입에 넣으면 그것이 어떤 맛인지 가려냅니다. 마찬가지로 말을 들을 때도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참된지, 올바른지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3절의 「가려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한(בָּחַן)은 조사하고 확인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엘리후는 자신이 옳다고 선언하는 대신, 일단 말을 살펴보자고 제안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함께 판단해 봅시다. 무엇이 좋은지 함께 알아봅시다.」욥기 34:4 · 두루새김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그가 무엇을 살펴보려는지 드러납니다.
「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옳아.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게서 공정한 판결을 빼앗으셨어.』」욥기 34:5 · 두루새김
이것은 욥의 실제 발언을 근거로 한 요약입니다. 욥은 27:2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리를 거두어 가셨다고 맹세하며 말했고, 27:6에서는 자신의 의로움을 굳게 붙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여기서 「공정한 판결」은 재판, 정의로운 판결, 정당한 권리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엘리후는 욥이 단지 고통스럽다고 호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정당한 판단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점을 문제 삼습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두고 거짓말을 하겠어? 나는 잘못이 없는데도 화살에 맞은 내 상처는 낫지 않아.』」욥기 34:6 · 두루새김
욥은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거짓으로 인정할 수 없으며, 잘못에 비해 벌이 크다고 말하는 정도를 넘어 자신이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알지 못한 채 낫지 않는 고통을 겪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엘리후가 인용하는 두 진술에는 욥의 실제 항의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이제 그 말에 대한 평가를 급격히 강화합니다.
「욥 같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조롱을 물처럼 마십니다.」욥기 34:7 · 두루새김
여기서 「조롱」은 다른 사람에게서 조롱받는 수치라기보다, 하나님을 함부로 대하는 말이나 비웃음의 태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앞뒤 흐름에 자연스럽습니다. 욥이 조롱을 물처럼 마신다는 말은 그가 하나님을 함부로 대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는 비난입니다.
여기에는 앞 장면과의 씁쓸한 대조도 있습니다. 욥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탄식했습니다(30:9–10). 그런데 엘리후는 이제 욥 자신이 조롱을 마시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고통 때문에 조롱받는 사람이, 하나님을 조롱하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는 악을 저지르는 이들과 어울리고, 악한 사람들과 함께 걷습니다.」욥기 34:8 · 두루새김
이것을 욥이 실제로 악한 사람들과 어울려 죄를 저질렀다는 목격담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엘리후는 욥의 발언이 악한 사람들의 태도와 같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가 9절에 나옵니다.
「그가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해도 아무 이익이 없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욥기 34:9 · 두루새김
욥기 21:14–15를 보면 매우 비슷한 말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욥은 악한 사람들의 생활을 설명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을 섬겨도 무슨 이익이 있느냐고 말한다고 인용합니다. 악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길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잘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욥은 곧바로 악한 사람들의 생각이 자신에게서 멀리 있다고 덧붙입니다(21:16).
따라서 34:9를 욥의 확정적인 신앙 고백으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중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엘리후가 욥의 여러 항의를 종합하여, 그 말의 결과가 하나님을 섬겨도 아무 이익이 없다는 주장에 이른다고 판단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주장이 결국 그런 뜻이라고 평가하는 것과, 그 사람이 실제로 그런 믿음을 선언했다고 인용하는 것은 다릅니다.
엘리후는 3절에서 귀가 말을 가려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욥에게 돌리는 말부터 정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욥이 악한 사람의 말을 인용하며 현실의 모순을 문제 삼은 것과, 그 악한 사람의 생각에 동의하는 것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장의 첫 번째 전환은 바로 여기서 일어납니다.
엘리후는 욥의 말이 위험하다고 판단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욥을 악한 사람들과 같은 길을 걷는 사람으로 여기기 시작합니다. 그런 다음 자신의 판단을 뒷받침하기 위해 하나님의 정의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정의로우시다 — 그런데 왜 그런가
「그러므로 옳고 그름을 아는 분들, 제 말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시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샤다이께서 옳지 않은 일을 하시는 일도 있을 수 없습니다.」욥기 34:10 · 두루새김
그는 이것을 확고한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한 일에 따라 갚으시고, 각 사람이 살아온 길에 맞는 결과를 겪게 하십니다.」욥기 34:11 · 두루새김
하나님은 옳지 않은 일을 하지 않으시므로 그 결과를 잘못 결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 원칙 자체는 구약의 여러 본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시편 62:12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신다고 말하고, 잠언 24:12 역시 사람이 한 일에 따른 하나님의 판단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욥기에서는 이 원칙을 어떻게 적용하는지가 핵심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한 일을 올바르게 판단하신다는 사실과, 지금 고난받는 사람의 고난이 과거의 죄에 대한 정확한 벌이라는 주장은 같지 않습니다. 엘리후는 11절에서 사람이 한 일에 따라 갚으신다는 원칙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그 원칙만으로 욥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를 밝힐 수는 없습니다.
「누가 하나님께 땅을 맡겼습니까? 누가 온 세상을 그분께 맡겼습니까?」욥기 34:13 · 두루새김
인간의 왕이나 관리에게는 다스릴 권한을 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누군가에게서 일을 맡았고, 자신보다 높은 권위에 책임을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세계를 다스릴 권한을 맡으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일은 다른 존재가 준 권한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엘리후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생명의 근원까지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자신에게로 돌리시고, 자기 영과 숨결을 거두어들이신다면,」욥기 34:14 · 두루새김
「모든 생명이 함께 숨을 거두고, 사람은 흙먼지로 돌아갈 것입니다.」욥기 34:15 · 두루새김
14절은 하나님이 숨결을 거두기로 마음먹으신다는 읽기와 인간에게 주의를 기울이신다는 읽기로 갈리지만, 어느 쪽이든 15절에서 엘리후가 강조하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생명은 하나님께 의존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2:7의 생명 창조와 연결되며, 시편 104:29–30에서 하나님이 숨을 거두시면 지으신 것들이 죽고, 영을 보내시면 생명이 새롭게 된다고 말하는 장면과도 가깝습니다.
여기서 욥과 엘리후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욥은 자신의 생명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하나님께 항의했습니다. 엘리후는 모든 생명이 하나님께 의존한다는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한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의 논리적 간격이 남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며 세계를 다스릴 권한을 가지신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위대함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어떤 개별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또한 무한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공정한 판단의 증거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권한과 정의를 밀접하게 연결합니다. 그에게는 세계를 창조하고 생명을 유지하시는 하나님이 옳지 않게 다스리신다는 생각 자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 확신은 이어지는 통치자의 비유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14절의 히브리어는 대명사가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따라 해석이 갈립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과 숨결을 거두어들이기로 마음먹으신다면 모든 생명이 죽는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의를 기울이시고, 그들에게 주신 생명의 숨결을 다시 거두어들이신다는 방향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마음을 자신에게로 돌리시고」라고 옮겨,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연결했습니다.
왕의 얼굴도 보아주지 않는 하나님
「공정한 판결을 미워하는 이가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옳으시며 큰 힘을 지니신 분께 당신이 죄가 있다고 하시겠습니까?」욥기 34:17 · 두루새김
엘리후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일을 인간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과 비교합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므로 정의를 미워하실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18–19절에서는 방향 전환이 일어납니다.
「왕에게 『쓸모없는 자야』라고, 높은 사람들에게 『악한 자들이야』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욥기 34:18 · 두루새김
「하나님께서는 높은 관리들의 편을 들지 않으시고, 가난한 사람보다 부자를 더 대우하지 않으십니다. 모두 그분의 손으로 만드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욥기 34:19 · 두루새김
18절은 문장 구조상 두 가지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에게조차 왕이나 높은 사람들을 함부로 비난하는 일이 쉽지 않은데, 하물며 옳으신 하나님께 죄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되물음입니다. 다른 하나는 왕과 높은 사람들에게도 그들의 악을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공정한 판단을 강조하는 읽기입니다.
이어지는 19절에서는 하나님이 높은 신분의 사람에게 특별한 대우를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어느 쪽으로 읽든 권력의 높낮이가 하나님의 판단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 이 단락의 중요한 주장입니다.
하나님은 왜 부자를 가난한 사람보다 더 대우하지 않으시나요?
둘 다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욥이 31:15에서 했던 주장과 닮았습니다. 욥은 자신과 종을 같은 하나님이 태 안에서 만드셨으므로 종의 권리를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엘리후 역시 지위와 재산이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이 모두 만드셨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나님의 공정함을 설명합니다.
두 사람은 지금 서로 논쟁하고 있지만, 사람의 사회적 지위보다 앞서는 창조주의 권위에 관해서는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창조주이시라는 사실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본질적으로 높은 존재로 여길 근거를 없앱니다. 신명기 10:17–18은 하나님이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않으시며,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엘리후도 그와 비슷한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순간에 죽습니다. 한밤중에 백성이 뒤흔들려 사라지고, 힘센 사람도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 사라집니다.」욥기 34:20 · 두루새김
평범한 사람뿐 아니라 힘센 사람도 하나님의 권한 아래 있습니다. 인간의 정치적 권력이 아무리 강해도 자신의 생명을 끝까지 지켜 주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높이 세운 권력의 질서를 단번에 뒤집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어떤 근거로 판단하시나요?
조금 더 깊이
17절의 「다스리다」는 본래 묶거나 억제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앞뒤 흐름에 따라 질서를 유지하거나 통제하는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발걸음, 하나님께 들리는 부르짖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가는 길을 살피시고, 그 모든 발걸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욥기 34:21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욥기 31:4와 거의 같은 내용을 말합니다. 욥도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발걸음을 세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그 사실을 사용하는 방식은 다릅니다.
욥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시므로 자신의 결백도 아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정확히 판단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시므로 악을 저지르는 사람을 반드시 찾아내실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같은 하나님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는 결백을 밝혀 줄 희망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악한 사람을 심판하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악을 저지르는 이들이 숨을 만한 어둠도, 죽음의 그늘도 없습니다.」욥기 34:22 · 두루새김
어둠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게 숨기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이 표현은 욥기 24:13–17과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욥은 악한 사람들이 어둠을 이용해 살인과 간음과 도둑질을 행한다고 말했습니다.
욥 역시 하나님이 악한 사람의 행동을 보지 못하신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이해하기 어려워했던 것은 악한 사람들의 행동이 세상에서 계속 일어나며,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현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재판에 불러 세우시려고 그를 더 살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욥기 34:23 · 두루새김
하나님은 인간의 재판관처럼 증거를 하나씩 모으고 오랜 시간 조사해야만 사람이 한 일을 알아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미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따로 조사하지 않고도 힘센 사람들을 무너뜨리시고, 그 자리에 다른 사람들을 세우십니다.」욥기 34:24 · 두루새김
「이처럼 그분께서는 그들이 한 일을 알고 계시며, 한밤에 그들을 뒤엎어 무너뜨리십니다.」욥기 34:25 · 두루새김
여기서 밤의 모습이 다시 등장합니다. 22절에서는 악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눈을 피해 어둠 속에 숨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25절에서는 바로 그 한밤에 하나님이 그들을 뒤엎으십니다.
악한 사람에게 밤은 자신의 악을 숨길 기회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에게 밤은 심판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닙니다.
그들의 잘못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27–28절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따르다가 등을 돌리고, 그분의 길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욥기 34:27 · 두루새김
「그들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이르렀고, 그분께서는 고통받는 사람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욥기 34:28 · 두루새김
여기서 하나님을 따르다가 등을 돌린다는 것은 단지 종교적 예식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문제가 아닙니다. 악한 권력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억눌러 그들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이르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22:22–24의 경고와 연결됩니다. 과부와 고아를 괴롭혀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그 부르짖음을 들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정의를 설명하면서 사회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그 중심에 놓습니다. 하나님이 악한 권력자를 심판하시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권력 아래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울음을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욥기 안에서 읽으면 곧바로 또 하나의 질문이 떠오릅니다.
욥은 24:12에서 성읍 안에서 사람들이 신음하고 상처 입은 이들이 부르짖지만, 하나님이 그 불의를 즉시 문제 삼지 않으시는 현실을 탄식했습니다. 두 사람의 말은 반드시 모순되는 것은 아닙니다. 욥은 실제로 관찰되는 현실을 문제 삼고, 엘리후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성품과 다스리심을 주장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고통받는 사람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면, 왜 그 고통이 계속되나요?
더구나 지금 이 말을 듣고 있는 욥 자신도 하나님께 반복해서 부르짖었습니다. 엘리후는 가난한 사람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앞에서 하나님께 응답을 구하는 욥의 호소는 하나님의 정의를 의심하는 위험한 말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엘리후가 말하는 하나님의 정의는 고통받는 사람의 말을 들으시는 정의입니다. 그렇다면 그 정의를 변호하는 사람 역시 고통받는 사람의 말을 충분히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분께서 평안을 주시면 누가 그분이 잘못하셨다고 하겠습니까? 그분께서 얼굴을 감추시면 누가 그분을 뵐 수 있겠습니까? 한 민족에게나 한 사람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욥기 34:29 · 두루새김
이 구절은 하나님이 얼굴을 감추신다고 탄식했던 욥의 말(13:24)과 이어집니다. 그러나 엘리후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그분이 옳지 않은 일을 하셨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원하는 때에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도록 강요받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저버린 사람이 왕 노릇 하지 못하고, 백성이 덫에 걸리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욥기 34:30 · 두루새김
하나님을 저버린 사람이 왕 노릇 하여 백성이 덫에 걸리는 상황을 하나님이 막으신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욥이 알고 싶었던 것은 그 일반적인 원칙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정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보다, 그 정의가 자신의 고통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이해하고 싶어 했습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훌륭한 말로 설명했지만, 여전히 욥의 구체적인 문제 앞에 서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23절은 원문의 문장 구조가 까다롭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더 오래 조사하실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재판을 받으러 나아갈 특별한 때를 하나님이 정하실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그를 더 살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옮겨, 하나님이 사람을 더 살피실 필요가 없다는 방향으로 읽었습니다. 30절의 문장 구조도 간결하여 목적 관계를 해석하는 데 여지가 있습니다.
제가 보지 못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 회개의 모범인가, 고백의 강요인가
엘리후는 이제 하나님께 사람이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제시합니다.
「하나님께 이렇게 말한 사람이 있습니까? 『제가 벌을 받았습니다.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습니다.』」욥기 34:31 · 두루새김
「『제가 보지 못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제가 옳지 않은 일을 했다면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습니다.』」욥기 34:32 · 두루새김
앞에서는 하나님이 정의로우신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이제는 그 정의 앞에서 인간이 취해야 할 태도를 이야기합니다.
이미 받은 벌을 인정합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잘못이 있다면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옳지 않은 일을 했다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행동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습니다. 자신이 잘못한 줄도 모르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으며,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행동하는지 제대로 깨닫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 자신이 보지 못한 잘못을 알려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겸손한 태도일 수 있습니다. 시편 19:12에서도 시인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허물에서 깨끗하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런데 욥기 34장 안에서 이 말을 읽으면 문제가 단순하지 않습니다.
욥 역시 하나님께 자신의 잘못을 알려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욥기 13:23에서 그는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죄와 허물이 있는지 알려 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욥은 그 요청과 동시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죄를 지었다고 거짓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태도도 유지했습니다.
자신이 모르는 잘못이 있을 수 있으므로 알려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정직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어떤 죄를 지었는지 밝혀지기도 전에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벌을 받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어느 쪽이든 엘리후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자기 판단을 끝까지 고집하기보다 배우고 돌이킬 준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욥에게 적용할 때에는 그가 실제로 무엇을 잘못했는지가 먼저 밝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회개를 가르치는 말이, 결백을 주장하는 사람에게 죄를 인정하라고 압박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이 거부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당신 뜻대로 갚아 주셔야 합니까? 선택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당신입니다. 그러니 아는 것을 말씀하십시오.」욥기 34:33 · 두루새김
이 구절은 히브리어의 문장 구조와 대명사의 연결이 어려워 해석이 갈립니다. 그러나 두루새김의 읽기를 따르면 중심 질문은 하나님이 인간의 뜻에 따라 갚아 주셔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욥이 원하는 방식으로 행동하셔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의 「선택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당신입니다」라는 말은 엘리후가 책임을 욥에게 돌리는 표현으로도 읽힙니다. 하나님의 행동을 받아들일지, 계속 문제를 제기할지는 욥이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욥이 원했던 대답은 단지 하나님이 인간의 뜻대로 행동하실 의무가 없다는 설명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결백을 하나님께서 직접 판단해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따라서 엘리후의 요구가 욥의 질문에 충분히 응답한 것인지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습니다.
조금 더 깊이
31절의 「제가 벌을 받았습니다」 역시 원문이 간결하여, 정확히 무엇을 받거나 감당했는지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징계를 받아들였다는 뜻으로 볼 수 있고, 이미 겪은 일을 인정한다는 방향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말을 가려내자던 사람이 사람을 시험하라고 하다
엘리후는 마지막에 다시 지혜로운 사람들을 불러냅니다.
「옳고 그름을 아는 사람들은 제게 말할 것입니다. 제 말을 듣는 지혜로운 사람도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욥기 34:34 · 두루새김
그런데 이들의 발언은 아직 실제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엘리후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할지를 자신이 제시합니다.
「『욥은 알지도 못하면서 말해. 그의 말에는 깨달음이 없어.』」욥기 34:35 · 두루새김
장 처음에 엘리후는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무엇이 옳은지 함께 판단해 보자고 제안했습니다(2–4절). 그러나 장 마지막에서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여러 사람이 실제로 논의한 뒤에 내린 판정이라기보다, 엘리후가 자신의 판단에 지혜로운 사람들도 동의할 것이라고 예상하여 붙이는 방식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욥이 어떤 사실을 몰랐다는 비판보다 강합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다스리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위험한 말을 했다는 비난입니다. 그러나 이미 9절에서 보았듯이 엘리후는 욥이 악한 사람들의 태도를 묘사한 말을 욥 자신의 주장으로 받아들이는 듯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두 절에서 비난은 한층 강해집니다.
「부디 욥이 끝까지 시험받기를 바랍니다. 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처럼 대답하기 때문입니다.」욥기 34:36 · 두루새김
「그는 자기 죄에 반항까지 더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손뼉을 치며, 하나님께 맞서 말을 늘어놓습니다.」욥기 34:37 · 두루새김
죄는 잘못된 행동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반항은 권위에 맞서 거스르는 더욱 의도적인 태도를 강조합니다. 엘리후는 욥이 고난 속에서 잘못된 말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대항하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욥은 이미 자녀와 재산을 잃고, 몸의 고통을 겪었으며, 가까운 사람들의 조롱까지 받았습니다.
그런데 엘리후는 그가 더 철저히 시험받기를 바랍니다.
36절의 「시험받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이바헨입니다. 원문에서는 이 동사가 장의 처음에 나왔던, 두루새김이 「가려내다」로 옮긴 말과 같은 어근을 가집니다.
3절에서 엘리후는 귀가 말을 가려낸다고 말했습니다.
36절에서는 욥 자신이 시험받기를 바랍니다.
처음에는 말을 살펴보자고 했는데, 마지막에는 말한 사람을 끝까지 시험하라고 합니다.
물론 말이 잘못되었다면 그 말을 한 사람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에서 문제는 엘리후가 욥의 말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얼마나 정확하게 증명했느냐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엘리후의 발언은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주장을 넘어 한 사람에 대한 판결의 성격을 띱니다.
욥이 하나님께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고 답변을 구하는 일은 엘리후에게 반항의 징표가 됩니다. 그러나 욥이 침묵하고 자신의 결백 주장을 포기한다면, 그는 자신의 진실함을 어떻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욥기 34장은 이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끝납니다.
조금 더 깊이
37절의 「손뼉을 치며」를 기쁨에 겨워 박수를 친다는 현대적인 의미로 읽으면 앞뒤 흐름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손을 마주치는 행동이 조롱이나 도전, 적대적인 몸짓과 연결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욥이 실제로 엘리후 앞에서 그런 몸짓을 했다는 장면은 서술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것 역시 욥의 태도를 해석하여 비난하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조심스럽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며 탄식하는 기도들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시편 13편과 44편은 고통과 하나님의 침묵을 숨기지 않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이런 탄식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해했다는 선언이 아니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말을 건네는 신앙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판단
엘리후의 주장에는 하나님에 관한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한 일에 따라 갚으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도 욥에게 닥친 고난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에 대한 결과인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신 앞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욥의 말은 반항으로 규정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변호하는 일이 곧 하나님의 정의를 정확히 이해했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정의로우시다는 확신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 확신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의 말을 정확하게 듣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정의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정의롭게 판단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욥기의 첫머리에서 독자는 욥이 온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소개받았습니다(1:1, 8). 이것이 욥에게 아무런 죄도 있을 수 없다는 선언은 아니지만, 그의 재앙을 숨겨진 악행에 대한 단순한 벌로 설명하는 태도를 함부로 받아들일 수 없게 합니다.
고통받는 사람이 하나님의 침묵을 탄식한다고 해서 곧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과 하나님에게 정의가 없다고 최종적으로 선언하는 것도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말하는 사람이 반드시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정당한 재판관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편에 서 있다고 확신할수록 오히려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고난을 해석하고, 그의 신앙을 평가하며, 그가 받아야 할 결과까지 단정하는 일은 가벼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엘리후는 처음에 귀를 불러냈습니다.
사람의 귀가 말을 가려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지혜로운 사람들을 향해 무엇이 옳은지 함께 판단해 보자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긴 연설이 끝날 무렵, 그의 관심은 말이 참된지 살펴보는 일에서 욥 자신을 시험하는 일로 옮겨 갔습니다.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고 말했던 바로 그 입으로, 자신 앞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의 말을 반항이라고 판정합니다.
귀는 말을 가려내야 한다고 했지만, 이제 그 귀가 욥의 말을 얼마나 정확히 들었는지는 의문으로 남습니다.
욥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습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정의를 길게 변호했습니다. 그러나 욥이 하나님께 요청한 재판은 아직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만큼이나 확신에 찬 판결이 내려진 자리에서, 욥을 향한 마지막 말은 더욱 철저한 시험을 바라는 간청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직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