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35장
이 장의 자리 · 32–37장 · 엘리후의 말
높은 하늘과 땅 위의 부르짖음
욥기 35장에서 엘리후는 뜻밖의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이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 손해를 끼칠 수 없고, 옳게 살아도 하나님께 무엇을 보태 드릴 수 없다면, 인간이 올바르게 사는 데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 질문은 욥의 고통과 맞닿아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했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았으며, 불의를 피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가 겪는 고통은 악한 사람의 고통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선하게 살아온 그의 삶이 아무런 차이를 만들지 못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그 문제를 전혀 다른 방향에서 접근합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이익이나 손해를 주고받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엘리후의 말은 점점 더 위험한 곳으로 나아갑니다. 그는 고통받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들의 교만과 잘못된 태도를 문제 삼습니다. 마침내 욥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말까지 무지하고 헛된 말이라고 평가합니다.
이 장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엘리후의 말이 전부 옳으냐 그르냐가 아닙니다. 하나님에 관한 참된 통찰이 어떻게 고통받는 사람을 잘못 판단하는 논리로 이어질 수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욥은 정말 자신이 하나님보다 의롭다고 말했는가?
엘리후는 먼저 욥이 한 말을 문제 삼습니다.
「당신은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내가 하나님보다 옳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욥기 35:2 · 두루새김
이것은 상당히 심각한 비난입니다. 자신이 하나님보다 옳다고 주장한다면, 하나님의 정의를 판단하는 자리에 인간 자신을 올려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욥은 앞선 대화에서 자신이 하나님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직접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욥이 계속해서 주장한 것은 자신의 무죄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결백을 아실 것이라고 확신하면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적처럼 대하시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욥 10:7; 13:23–24).
히브리어 35장 2절에 나오는 짧은 표현은 치드키(צֶדֶק) 메엘입니다. 여기서 치드키는 ‘나의 의로움’ 또는 ‘나의 정당한 권리’를 가리키며, 뒤따르는 전치사 메는 비교의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이 가능성을 따라 「내가 하나님보다 옳아」라고 옮겼습니다.
그러나 이 문장은 ‘하나님 앞에서 나의 정당함’이라는 의미로도 이해될 여지가 있습니다. 실제로 칠십인역은 이 부분을 하나님보다 더 의롭다는 비교보다는 주님 앞에서 의롭다는 주장으로 옮깁니다. 어느 쪽이든 엘리후가 욥의 주장을 문제 삼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욥이 하나님의 의로움 자체보다 자신의 의로움이 크다고 선언했는지는 구별해서 보아야 합니다.
엘리후는 이어서 욥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옳게 사는 것이 내게 무슨 도움이 될까? 죄를 짓는 것보다 무슨 이익이 있을까?』」욥기 35:3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질문의 대상이 ‘당신’에서 ‘나’로 바뀝니다. 엘리후가 욥의 생각을 자기 방식으로 재구성하여 표현하는 대목입니다.
이 질문과 매우 가까운 말이 욥기 21장 15절에도 등장합니다. 그곳에서는 악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자신들에게 무슨 이익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욥은 그들의 말을 자신의 신앙고백으로 제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악한 사람들이 잘사는 현실을 설명하면서 그들의 태도를 소개했습니다.
욥 자신이 품은 의문은 조금 다릅니다. 그는 옳게 살아온 사람도 악한 사람처럼 망할 수 있다는 현실에 괴로워했습니다(욥 9:22). 올바른 삶이 무가치하다고 선언했다기보다, 올바른 삶과 고난 사이에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이 있다고 호소한 것입니다.
엘리후는 이 호소에 포함된 위험한 가능성을 끄집어냅니다. 하나님께서 옳게 사는 사람에게 즉시 보상하지 않으신다고 해서 올바른 삶이 무의미하다고 결론짓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 지적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욥이 던진 질문과 엘리후가 그에게 돌리는 주장은 완전히 같지 않습니다.
바로 이 차이가 이후 논쟁을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욥은 자신이 왜 이렇게 고통받아야 하는지를 묻는데,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할 권리가 있는지를 따지기 시작합니다.
하늘을 보라 — 하나님은 인간에게 무엇을 빚지고 계시는가?
엘리후는 이제 욥에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십시오. 당신보다 높이 있는 구름을 바라보십시오.」욥기 35:5 · 두루새김
구름은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있습니다. 엘리후는 그 거리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차이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는 두 가지 질문을 이어서 던집니다.
「당신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당신의 잘못이 많아진들 그분께 무슨 해를 입히겠습니까?」욥기 35:6 · 두루새김
「당신이 옳게 산다고 그분께 무엇을 드리겠습니까? 그분께서 당신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습니까?」욥기 35:7 · 두루새김
고대 사회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선물과 보답, 충성과 보호의 의무로 연결되곤 했습니다. 왕에게 충성을 바치면 왕의 보호를 기대할 수 있었고, 어떤 일을 해 주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후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그러한 교환 관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선행을 통해 부족한 것을 채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인간이 아무리 옳게 산다고 해도 하나님께 빚을 지우거나 하나님을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엘리후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당신의 악은 당신 같은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당신의 올바른 삶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줍니다.」욥기 35:8 · 두루새김
앞에서 하늘을 바라보라고 했던 엘리후가 이제 인간 세계로 시선을 돌립니다. 인간의 악과 올바른 삶은 하나님께 이익이나 손해를 가져다주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 세계에서는 실제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악한 행동은 다른 사람을 해치고, 올바른 행동은 다른 사람을 살립니다.
욥기 31장에서 욥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하나씩 꼽은 행동들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았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았으며, 종의 권리를 무시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욥 31:13–23). 이러한 행동이 하나님께 무엇을 더해 드린 것은 아닐지라도, 도움을 받은 사람들의 삶에는 분명한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8절은 인간이 옳게 사는 일이 하나님께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선언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엘리후의 질문은 인간이 자신의 올바른 삶으로 하나님을 이롭게 하거나 하나님께 보상을 강요할 수 있느냐는 데 집중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동을 중요하게 여기시는지 여부와 하나님께서 그 행동으로 이익을 얻으시는지 여부는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올바른 삶은 하나님께 건네는 대가가 아니며, 그 가치는 하나님에게서 얻어 낼 보상으로만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나오는 장면은 이 말이 현실에서 얼마나 어려운 질문을 불러일으키는지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엘리후는 하늘의 높이를 가리키며 하나님이 인간보다 훨씬 높이 계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구약의 다른 본문은 그 높으신 하나님께서 낮은 곳에 있는 인간을 살피신다는 사실 또한 보여 줍니다. 이사야 57장 15절은 높고 거룩한 곳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마음이 눌리고 겸손한 사람과도 함께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부르짖는가?
엘리후는 갑자기 억압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사람들은 심하게 짓눌려 부르짖고, 힘센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도와 달라고 외칩니다.」욥기 35:9 · 두루새김
앞에서 엘리후는 인간의 악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 영향이 실제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보여 줍니다. 이것은 앞의 논의와 떨어져 있는 예화가 아닙니다. 8절에서 말한 인간의 악이 9절에서 구체적인 고통으로 드러납니다.
사람을 해치는 것은 다른 사람인데, 억압받는 사람들은 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까?
인간의 행동으로 이익도 손해도 입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통에는 어떻게 관계하십니까? 엘리후는 이 질문에 답하면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렇게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실까? 나를 만드시고 밤에 노래를 주시며,』」욥기 35:10 · 두루새김
「『땅의 짐승들보다 우리를 더 가르치시고, 하늘의 새들보다 우리를 더 지혜롭게 하시는 분 말이야.』」욥기 35:11 · 두루새김
첫째는 「밤에 노래를 주시며」라는 말입니다.
밤은 사람이 자신의 힘없음을 절실히 느끼기 쉬운 시간입니다. 욥에게도 밤은 편안한 휴식의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밤이 되면 뼈가 쑤시고 고통이 그치지 않는다고 탄식했습니다(욥 30:17).
그런데 엘리후는 하나님을 밤에 노래를 주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고통과 두려움이 찾아오는 시간에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노래할 이유를 주실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을 단순히 위기에서 구출해 주시는 분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어둠 속에서도 인간의 삶을 지탱하시는 창조주로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짐승과 새보다 더 가르치시고 지혜롭게 하신다는 표현입니다. 두루새김은 이 구절을 비교하여 옮겼고, 이 읽기를 따르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동물들보다 더 큰 배움과 분별의 능력을 주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을 생각하고,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며, 자신을 만드신 분이 누구인지 물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단순히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움을 요청하는 일만이 아닙니다.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 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억압받는 사람이 먼저 구원을 요청한다고 해서 그가 창조주를 모른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절박한 상황에서 살려 달라고 외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며, 성경은 그러한 부르짖음을 모두 신앙의 잘못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출애굽기 3장 7절에서 하나님은 이집트의 감독자들 때문에 고통받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먼저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잘 정리한 고백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터져 나온 외침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단순한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행동 자체가 하나님을 수단으로 대한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왜 부르짖음에 응답하지 않으시는가?
엘리후는 이제 더욱 단호한 설명을 제시합니다.
「그들이 거기서 부르짖어도 하나님께서는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악한 사람들의 교만 때문입니다.」욥기 35:12 · 두루새김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헛된 외침을 듣지 않으시고, 샤다이께서는 그것을 살피지 않으십니다.」욥기 35:13 · 두루새김
12절에서 말하는 「악한 사람들의 교만」은 누구의 교만입니까?
그 악한 사람들이 앞에 등장한 억압자들인지, 아니면 부르짖으면서도 하나님을 올바르게 찾지 않는 사람들인지 문맥만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는 억압자들의 교만 때문에 사람들이 부르짖는다는 이해입니다. 이 경우 엘리후는 사회의 악과 인간의 교만이 고통을 만들어 내는 현실을 지적합니다.
다른 하나는 부르짖는 사람들 자신에게도 교만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신다는 이해입니다. 바로 앞에서 사람들이 창조주를 올바르게 찾지 않는다고 비판했다는 점에서는 이 읽기가 자연스럽고, 하나님께서는 헛된 외침을 듣지 않으신다는 13절도 이 이해와 연결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두 읽기는 서로 다른 의미를 낳습니다. 첫 번째가 억압의 원인을 설명한다면, 두 번째는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이유를 부르짖는 사람의 태도에서 찾습니다.
욥은 이미 자신이 부르짖어도 응답받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욥기 19장 7절에서 그는 폭력을 당한다고 외쳐도 응답이 없고, 도움을 청해도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호소합니다. 욥기 30장 20절에서는 하나님께 직접 부르짖는데도 하나님께서 대답하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그런 욥에게 엘리후의 설명은 어떻게 들릴까요? 만약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시는 이유가 부르짖는 사람의 교만 때문이라면, 욥은 자신의 고통뿐 아니라 응답받지 못하는 책임까지 자신에게 돌려야 합니다.
하지만 독자는 욥이 이런 판단을 받아도 되는 사람인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욥기 1장 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욥을 온전하고 올곧으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으로 평가하셨습니다. 욥의 고통이 그의 숨겨진 악행 때문에 시작되었다는 설명은 이야기의 출발점과 맞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이 욥의 모든 말과 판단이 옳다는 뜻은 아닙니다. 욥 역시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에 관하여 지나치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는 그의 고난이 단순한 죄의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습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응답이 없을 때 나타날 수 있는 한 가지 문제, 곧 인간의 교만과 잘못된 태도를 지적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욥의 경우에도 적용할 수 있는지 충분히 입증하지 않습니다.
응답이 없다는 사실은 관찰할 수 있지만, 그 침묵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별도의 문제입니다.
욥기는 바로 이 구별을 독자에게 요구합니다.
보이지 않아도 송사는 하나님 앞에 있다
엘리후는 이제 욥에게 직접 말합니다.
「당신이 『나는 그분을 뵐 수 없어』라고 하셔도, 판결을 구하는 일은 그분 앞에 있습니다. 그러니 그분을 애타게 기다리십시오.」욥기 35:14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앞선 비난과 달리, 욥에게 실제적인 위로가 될 수도 있는 말을 담고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만나 자기 사정을 설명하고 싶어 했습니다. 욥기 23장 3–4절에서 그는 하나님을 어디에서 만날 수 있는지만 알면 그분 앞에 나아가 판결을 구할 자신의 사건을 펼쳐 놓겠다고 말했습니다.
두루새김이 「판결을 구하는 일」(דִּין)로 옮긴 말은 재판이나 법적 판단과 관련된 말입니다. 욥이 자신의 사건을 하나님 앞에 내놓고 싶어 했던 바로 그 문제를 엘리후가 다시 꺼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신다고 해서 사건이 그분 앞에서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아직 판결을 듣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 사건을 모르신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곧 하나님의 부재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후의 권고가 모든 질문을 해결하는 것은 아닙니다.
욥이 가장 알고 싶어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이렇게 대하시는지, 그리고 언제 어떻게 자신의 억울함이 밝혀질지입니다. 엘리후는 판결을 구하는 일이 하나님 앞에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만, 그 사건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처리될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사실만으로 인간의 모든 의문이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엘리후가 욥에게 건넨 이 말은 기다림의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욥이 겪는 기다림의 고통을 가볍게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엘리후는 왜 마지막에 욥의 입을 문제 삼는가?
엘리후는 자신의 말을 날카로운 비판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 분노로 벌을 내리지 않으시고, 어리석은 짓을 크게 문제 삼지 않으시니,」욥기 35:15 · 두루새김
「욥은 헛된 말을 쏟아 내며, 알지도 못하면서 말을 늘어놓습니다.」욥기 35:16 · 두루새김
15절은 하나님께서 아직 욥의 잘못된 말에 대해 엄한 벌을 내리지 않으셨다는 뜻으로도, 하나님의 즉각적인 심판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욥이 잘못된 결론을 내린다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정확한 문장 관계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16절에서 엘리후가 욥의 발언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헛된 말을 쏟아 내며」(הֶבֶל)에 담긴 히브리어 낱말은 바람처럼 붙잡을 수 없는 것, 실체가 없거나 덧없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엘리후는 욥의 말이 지식을 갖춘 올바른 판단이 아니라 공허한 발언이라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이 장의 끝에서는 한 가지 역설이 드러납니다.
엘리후는 처음에 인간이 옳게 사는 일이 하나님께 무엇을 보탤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어서 사람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욥의 말 자체를 헛된 것으로 판단합니다.
논쟁의 초점이 조금씩 옮겨 간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말이었지만, 마지막에는 욥의 발언을 평가하고 비판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엘리후는 욥이 무엇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합니까? 적어도 이 장에서 그가 강조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행동을 자신의 이익과 손해라는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을 직접 보지 못한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정의가 없다고 결론지어서도 안 된다는 점입니다. 이 경고는 욥의 말에도 적용할 여지가 있습니다. 욥이 자신의 결백을 확신하는 것과 하나님의 모든 판단을 이해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독자는 엘리후 자신에게도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는 욥의 고난이 왜 시작되었는지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욥에게 응답하지 않으신 이유를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까? 고통 속에서 터져 나온 욥의 말에 어떤 잘못이 포함되어 있는지, 얼마나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
엘리후는 욥에게 알지도 못하면서 말한다고 비판하지만, 그 자신도 하나님의 침묵이 뜻하는 바를 완전히 알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의 말에는 하나님에 관한 중요한 통찰이 들어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에 관하여 옳은 원칙을 알고 있다는 것과, 그 원칙을 한 사람의 고난에 정확하게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이 「어리석은 짓」으로 옮긴 히브리어 파쉬는 뜻을 확정하기 어려운 드문 낱말입니다. 칠십인역에서는 이와 관련된 표현을 ‘허물’ 또는 ‘범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로 옮깁니다. 따라서 이 절을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 엄격한 심판을 내리지 않으셨다는 의미로 읽을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사용된 낱말과 절 사이의 연결이 모두 분명한 것은 아닙니다. 뒤이어 욥기 38장에서 하나님께서 마침내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대답하시지만, 그 대답은 욥이 요구한 방식으로 모든 사건의 원인을 설명하는 판결문이 아닙니다. 이후 욥기 42장 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세 친구와 욥의 말을 구별하여 평가하십니다. 다만 그 구절은 엘리후를 직접 지목하지 않으므로, 그것만으로 엘리후의 모든 말을 하나님의 최종 판결 아래 놓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로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지만, 인간의 고통에 무관심하신 것은 아니다
욥기 35장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구별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부족함이 없으시다는 사실과 인간에게 무관심하시다는 생각을 혼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충성을 필요로 하시는 불완전한 통치자가 아니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 인간의 올바른 삶과 악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훨씬 넘어서 계신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도움 없이도 온전히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으로 인간을 돌보신다는 것이 구약의 중요한 증언입니다.
하나님이 높이 계신다는 사실은 인간을 겸손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고통받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 고통을 설명하려는 사람 역시 자신의 지식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엘리후는 욥에게 하늘을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그 말에 따라 독자도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구름은 인간보다 훨씬 높은 곳에 떠 있습니다. 인간은 그곳에 손을 뻗을 수 없고, 자기 힘으로 구름을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의 발은 여전히 땅 위에 있습니다. 그 땅에는 힘센 사람들에게 억눌려 부르짖는 사람들이 있고, 밤이 지나도록 고통 속에 잠들지 못하는 욥이 있습니다.
하늘이 높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높이가 땅 위의 부르짖음에 대하여 무엇을 뜻하는지, 엘리후는 아직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욥은 여전히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가 판결을 구하는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왜 침묵하시는지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엘리후가 가리킨 높은 하늘 아래에서, 욥의 부르짖음은 아직 멈추지 않았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