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36장

이 장의 자리 · 32–37장 · 엘리후의 말

고난은 심판인가, 배움의 자리인가?

욥기 36장에는 쉽게 지나칠 수 없는 한 문장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받는 사람을 그 고난으로 건져 내시고, 짓눌리는 괴로움을 통해 그들의 귀를 여십니다」(15절).

고난받는 사람을 고난으로 건져 낸다는 말은 이상하게 들립니다. 고난에서 구출한다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고난을 끝내 주시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바로 그 고난을 통해 사람을 구하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욥의 세 친구는 대체로 고난을 죄에 대한 벌로 이해했습니다. 하나님은 옳게 사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악한 사람에게 벌을 내리시므로, 욥이 큰 고통을 당한다면 그에게도 그만한 잘못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엘리후는 여기서 타이르는 가르침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고난은 과거의 죄를 벌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사람이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을 가르치고 앞으로의 잘못에서 돌이키게 하는 수단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설명은 곧 중요한 질문을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사람을 가르치실 수 있다는 말과, 지금 어떤 사람이 겪는 고난이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주어졌다는 말은 같습니까?

엘리후는 앞의 주장을 하면서 점차 뒤의 주장을 욥에게 적용합니다. 바로 여기에 그가 꿰뚫어 본 점과 한계가 함께 놓여 있습니다.

이 장은 세 번 방향을 바꿉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공정하시다고 변호하고(1–7절), 이어서 고난이 사람을 가르치는 과정을 설명한 뒤 욥에게 경고합니다(8–21절). 마지막에는 욥의 처지를 직접 판단하던 자리에서 벗어나 구름과 비와 번개를 바라보게 합니다(22–33절).

그런데 마지막 전환이 특별합니다. 엘리후는 처음에 자신이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자연 세계를 바라보면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다 알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확신에 찬 변론으로 시작한 말이, 끝에서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천둥소리 앞에 이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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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변호하겠다는 사람의 확신

욥기 36:1–4 본문 →

엘리후는 욥에게 조금만 더 들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습니다」(2절). 그는 자신이 단순히 욥의 주장에 반박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옳으심을 밝혀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먼 곳에서 지식을 가져와, 저를 만드신 분께서 옳으심을 밝히겠습니다.」욥기 36:3 · 두루새김

엘리후는 자신이 눈앞의 사건만 보고 판단하지 않고, 더 넓은 세계에서 지식을 가져오겠다고 선언합니다. 뒤에 이어지는 자연 현상에 대한 설명을 생각하면, 그는 인간의 경험을 넘어 창조 세계 전체를 통해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모습을 설명하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나오는 말은 상당히 대담합니다.

「참으로 제 말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지식을 온전히 갖춘 사람이 당신 곁에 있습니다.」욥기 36:4 · 두루새김

「지식을 온전히 갖춘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테밈 데오트라는 표현입니다. 문맥상 엘리후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는 자기가 하는 설명의 정확성과 완전함을 강하게 확신합니다.

그런데 조금 뒤인 37장 16절에서 엘리후는 하나님을 가리켜 지식이 온전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두 구절의 히브리어 표현은 형태에 작은 차이가 있지만 매우 가깝습니다. 그렇다고 엘리후가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겼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설명이 충분하고 정확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특히 이 장의 후반부에서 엘리후는 하나님이 위대하시므로 우리가 그분을 다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36:26). 두 진술은 반드시 모순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없어도 하나님에 관한 어떤 사실은 정확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에서 어디까지 결론을 내릴 수 있는지는 여전히 문제로 남습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을 변호하려 합니다. 그것은 진지한 목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옳으심을 변호한다는 확신이 자기 설명까지 틀림없다고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큰 힘을 지니셨지만 업신여기지 않으시는 하나님

욥기 36:5–7 본문 →

엘리후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면서 뜻밖의 특징을 먼저 내세웁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큰 힘을 지니셨지만 아무도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 깨닫는 힘도 크십니다.」욥기 36:5 · 두루새김

인간 사회에서 힘이 강한 사람은 종종 약한 사람을 하찮게 여깁니다. 권력이 커질수록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하나님이 그런 분이 아니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다른 사람을 짓누르며 자신이 더 높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인간의 권력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사람을 살려 두지 않으시고, 고난받는 사람들에게 공정한 판결을 내려 주십니다」(6절).

「옳게 사는 사람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고, 왕들과 함께 왕좌에 영원히 앉히십니다. 그렇게 그들은 높아집니다.」욥기 36:7 · 두루새김

옳게 사는 사람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신다는 표현은 그들이 세상에서 잊히더라도 하나님께는 잊힌 존재가 아니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7절의 왕좌 이미지는 극적인 신분의 변화를 보여 줍니다. 낮은 곳에 있던 사람이 왕들과 나란히 앉습니다.

그러나 이 진술을 옳게 사는 모든 사람이 현실에서 반드시 높은 지위를 얻는다는 보장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욥기의 이야기는 바로 그러한 단순한 공식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친히 옳게 산다고 인정하신 사람이지만, 지금은 재산과 가족과 건강을 잃고 고통받고 있습니다(욥 1:8; 2:3).

하나님께서 옳게 사는 사람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신다면, 그들이 쇠사슬에 묶여 있는 현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쇠사슬에 묶인 옳게 사는 사람 — 고난은 어떻게 가르침이 되는가?

욥기 36:8–12 본문 →

8절에서 이야기의 방향이 바뀝니다.

「그들이 쇠사슬에 묶이고 고난의 줄에 붙잡히면,」욥기 36:8 · 두루새김

여기서 「그들」은 앞 절에 등장한 옳게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엘리후는 악한 사람들이 고난받는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눈길 아래 있는 옳게 사는 사람들조차 쇠사슬에 묶이고 고난의 줄에 붙잡힐 수 있다고 말합니다.

쇠사슬과 줄은 행동의 자유를 빼앗는 도구입니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고, 자신의 뜻대로 빠져나올 수도 없습니다. 고난이 인간을 얼마나 무력하게 만드는지 드러내는 이미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한 일과 저지른 잘못을 알려 주십니다. 그들이 얼마나 거만하게 굴었는지 깨닫게 하십니다.」욥기 36:9 · 두루새김
「타이르는 말씀을 듣도록 그들의 귀를 여시고, 악에서 돌아서라고 명령하십니다.」욥기 36:10 · 두루새김

고난은 단순히 죄를 지은 뒤에 받는 형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게 하시고,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도록 깨우치시는 과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귀를 여시고」는 단순히 소리가 들리도록 귀를 열어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전에는 받아들이지 못했던 가르침을 듣고 깨닫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욥기 33장 16절에서도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꿈과 밤의 환상을 통해 사람의 귀를 여시고 경고를 주신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36장에서는 고난이 그 역할을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이유가 언제나 가르침을 몰라서인 것은 아닙니다. 알면서도 듣지 않거나, 자신이 옳다고 확신해서 더 이상 배우려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고난은 그러한 자기 확신을 흔들고, 이전에는 듣지 않았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몸은 묶여 있지만 귀는 열립니다. 움직일 자유를 잃은 자리에서, 이전에는 받아들이지 못했던 가르침을 들을 가능성이 생깁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섬기면, 남은 날들을 행복하게 보내고 남은 세월을 즐겁게 마칠 것입니다.」욥기 36:11 · 두루새김
「그러나 듣지 않으면 무기에 목숨을 잃고, 깨닫지 못한 채 숨을 거둘 것입니다.」욥기 36:12 · 두루새김

앞에서는 고난의 의미를 설명했지만, 이제는 고난에 대한 인간의 반응에 따라 서로 다른 결말이 찾아온다고 말합니다.

엘리후는 고난 속에서 듣고 순종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 자체는 의미 있는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옳게 사는 사람이 당하는 모든 고난이 그 사람의 거만함을 고치기 위한 것인지는 이 구절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독자는 욥의 경우를 알고 있습니다. 욥의 시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서 거만함을 발견하셨기 때문에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엘리후가 제시하는 것은 고난을 이해하는 한 가지 가능성이며, 모든 고난의 원인을 설명하는 보편적인 법칙으로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고난 속에서 사람을 가르치실 수 있다는 사실은, 고난을 무조건 형벌로만 이해하는 생각보다 넓은 시야를 열어 줍니다.

조금 더 깊이

「그들의 귀를 여시고」의 히브리어는 ‘그들의 귀를 드러내신다’는 표현이며, 두루새김의 「타이르는 말씀을 듣도록 그들의 귀를 여시고」는 그 뜻을 풀어서 옮긴 것입니다. 11–12절에는 신명기 30장 15–20절의 생명과 죽음, 복과 저주 사이에서 선택하라는 권고와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인간의 삶에 중대한 차이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다만 신명기에서 언약에 따라 주어진 권고를 욥 개인의 고난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고난받는 사람을 그 고난으로 건져 내신다

욥기 36:13–15 본문 →

엘리후는 이제 하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저버린 사람들은 분노를 쌓아 갑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묶으셔도 도와 달라고 외치지 않습니다.」욥기 36:13 · 두루새김
「그들은 젊어서 목숨을 잃고, 신전에서 돈을 받고 몸을 파는 남자들 가운데서 삶을 마칩니다.」욥기 36:14 · 두루새김

앞의 옳게 사는 사람들도 쇠사슬에 묶여 있었습니다. 여기의 하나님을 저버린 사람들도 하나님께 묶이는 상황에 놓입니다. 그러나 두 부류를 가르는 것은 쇠사슬 자체가 아닙니다. 고난에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다릅니다.

한쪽은 하나님께서 귀를 열어 주실 때 듣고 돌이킵니다. 다른 쪽은 분노를 쌓으며 도움을 구하지 않습니다. 13절의 「분노를 쌓아 갑니다」라는 표현은 고난을 겪으면서 자신의 분노를 계속 키우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기보다 마음을 더욱 굳게 닫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14절의 그들 가운데서 삶을 마친다는 표현은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르침을 끝까지 거절하는 삶의 비참한 결말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받는 사람을 그 고난으로 건져 내시고, 짓눌리는 괴로움을 통해 그들의 귀를 여십니다.」욥기 36:15 · 두루새김

사람은 고난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고난 자체를 사용하여 사람을 건져 내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을 구출하신다는 뜻과, 고난을 통해 구출하신다는 뜻이 서로 맞닿아 있는데, 엘리후의 주장 전체를 보면 뒤의 의미가 특히 두드러집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출은 단순히 고통스러운 상황을 제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고통 속에서 사람이 무엇을 듣고 깨닫느냐까지 포함합니다.

이 생각은 시편 119편 67절과 71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인은 고난을 겪기 전에는 잘못된 길로 갔지만, 고난을 겪은 뒤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렇다고 고난 자체가 선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시편의 고백은 자신이 겪은 고난을 돌아보며 그 가운데 발견한 유익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겪은 사람이 훗날 자신이 배운 것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옆에 있는 사람이 고난의 원인과 목적을 대신 확정할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조금 더 깊이

14절의 「신전에서 돈을 받고 몸을 파는 남자들」은 히브리어 케데쉼(⁨קָדֵשׁ⁩)을 풀어서 옮긴 것입니다. 이 말은 ‘거룩하게 구별하다’라는 어근과 연결되며, 신명기 23장 17절과 열왕기상 14장 24절에도 관련 표현이 등장합니다. 전통적으로는 이들을 이방 신전에서 성적 행위를 담당하던 남성들로 이해해 왔습니다. 그러나 해당 집단이 실제로 맡았던 일과 성적 관행은 이 낱말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15절의 「그 고난으로」(⁨עֳנִי⁩)에 해당하는 원문은 고난을 뜻하는 명사에 도구나 상황을 나타낼 수 있는 전치사가 붙은 표현이어서 두 뜻이 함께 열려 있으며, 엘리후는 고난이 사람의 귀를 열어 하나님의 가르침을 듣게 한다고 거듭 설명했기 때문에 ‘고난을 통해’라는 뜻이 두드러집니다.

고난의 입에서 넓은 곳으로 — 욥에게 주어진 약속과 경고

욥기 36:16–21 본문 →

엘리후는 이제 욥에게 직접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도 고난의 입에서 이끌어 내어, 옥죄는 것이 없는 넓은 곳으로 옮겨 주셨습니다. 당신의 식탁에는 기름진 음식이 가득 차려졌습니다.」욥기 36:16 · 두루새김

원문은 고난을 입을 벌린 존재처럼 그립니다. 마치 사람을 삼키려는 짐승의 입속에 들어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 입에서 이끌어 내십니다. 도착하는 곳은 「넓은 곳」입니다.

고난은 사람을 좁은 곳에 가둡니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도 없고, 미래를 내다보기도 어렵습니다. 반대로 구원은 다시 숨 쉴 수 있고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얻는 일로 표현됩니다. 기름진 음식이 가득한 상은 단순히 굶주림을 해결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풍요와 안정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욥에게 이미 이루어진 일을 가리키는지, 지금 하나님께서 이끌고 계시는 과정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욥이 가르침에 응답했더라면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묘사하는지에 관해서는 해석이 갈립니다. 욥은 아직 고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욥의 실제 상황을 그대로 묘사한 말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엘리후가 욥에게 하나님의 구원 가능성을 제시하는 말로 이해하면 문맥이 자연스러워집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고난에서 벗어나게 하실 수 있지만, 욥이 그 뜻에 어떻게 응답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엘리후의 말투가 바뀝니다.

「그러나 당신은 악한 사람이 받을 판결을 가득 받았고, 판결과 심판에 붙잡혀 있습니다.」욥기 36:17 · 두루새김

원문의 표현은 짧고 뜻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욥이 악한 사람이 받을 판결에 사로잡혀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악한 사람이 받을 심판을 받아 마땅한 상태에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엘리후가 욥의 현재 태도를 위험하게 보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분노에 이끌려 조롱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아무리 큰 몸값이라도 당신을 곁길로 이끌지 못하게 하십시오.」욥기 36:18 · 두루새김
「당신의 재산이 당신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온 힘을 쏟는다고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욥기 36:19 · 두루새김

18–19절은 낱말의 뜻과 문장 연결이 어려운 부분입니다. 이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경고의 방향은 비교적 분명합니다. 엘리후는 욥이 분노에 끌려가거나 인간적인 수단으로 자신의 처지를 해결하려는 길을 경계합니다.

하지만 이 말을 욥에게 적용할 때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욥은 자신의 재산으로 하나님을 움직이려 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미 엄청난 재산을 잃었습니다. 친구들의 비난에 분노하고 자신의 결백을 강하게 주장했지만, 그것이 곧 악을 선택했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민족들이 제자리에서 사라지는 그 밤을 애타게 바라지 마십시오.」욥기 36:20 · 두루새김
「조심하십시오. 악으로 돌아서지 마십시오. 당신은 고난을 겪는 것보다 악을 택하셨기 때문입니다.」욥기 36:21 · 두루새김

20절의 밤은 민족들이 사라지고 파멸을 맞는 시간으로 묘사됩니다. 욥이 앞서 죽음을 갈망했던 말들(욥 3:20–23; 7:15)과 연결하여 읽을 여지가 있지만, 이 구절이 정확히 그 죽음의 소원을 겨냥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21절은 더욱 직접적입니다. 그가 보기에 욥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하나님을 비난하고 자신의 판단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욥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억울함을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르침 앞에서 돌이키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욥은 실제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그의 말에는 지나친 표현이 있을 수 있으며, 그 자신도 이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지식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합니다(욥 42:3). 그러나 그것이 욥의 고난을 악에 대한 징계로 규정할 근거는 되지 않습니다.

엘리후는 고난을 통해 사람이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서, 욥이 고난을 통해 반드시 어떤 잘못을 고쳐야 한다는 판단으로 나아갑니다.

고난을 통해 배우는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과, 배워야 할 잘못 때문에 고난이 주어졌다는 주장은 같지 않습니다.

엘리후가 두 주장 사이의 거리를 충분히 지키지 못할 때, 그의 가르침은 고난받는 욥을 다시 죄인으로 몰아붙이는 말로 들리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욥의 선택을 강하게 경고하던 엘리후가 갑자기 시선을 돌립니다.

조금 더 깊이

16절의 「넓은 곳」은 넓음과 넉넉한 공간을 나타내는 말로, 앞에서 묘사한 쇠사슬과 짓눌림, 옥죄는 상황의 반대편에 놓인 이미지입니다. 이 이미지는 시편 18편 19절과도 연결됩니다. 두루새김은 하나님께서 욥을 이미 넓은 곳으로 옮겨 주셨다고 읽습니다. 히브리어 동사의 형태는 완료형이지만, 그것만으로 세 읽기 가운데 하나로 정해지지는 않습니다. 19절의 「재산」에 해당하는 말은 히브리어의 모음과 낱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재물’ 또는 ‘도움을 구하는 외침’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뒤의 뜻으로 읽으면 인간의 간절한 호소와 강한 힘도 스스로 고난을 제거하지 못한다는 말이 됩니다.

누가 하나님께 길을 가르칠 수 있는가?

욥기 36:22–26 본문 →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힘으로 높이 드러나십니다. 그분처럼 가르치는 이가 누구겠습니까?」욥기 36:22 · 두루새김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고난으로 사람의 귀를 여신다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그 하나님처럼 가르치는 이가 누구겠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설명하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세상에서 실제로 일하시며 사람에게 자신이 다스리시는 모습을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누가 그분께 가실 길을 정해 드렸습니까? 누가 그분께 『주님께서는 옳지 않은 일을 하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까?」욥기 36:23 · 두루새김

두 질문은 하나님의 행동을 판단하는 인간의 위치를 문제 삼습니다. 하지만 두 질문은 완전히 같은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길을 결정할 권한이 인간에게 없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실 권한에 관한 주장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행동이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는 주장은 하나님께서 공정하신지에 관한 것입니다.

욥은 바로 이 두 번째 문제를 두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자신보다 강하신 분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너무나 강하시기 때문에 자신이 그분 앞에서 어떻게 정당한 판결을 받을 수 있는지 걱정했습니다(욥 9:19–20).

엘리후는 하나님의 능력과 공정하심이 분리될 수 없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강하시기 때문에 인간에게 책임을 지지 않으시고 마음대로 다스리시는 분이 아니라, 강하시면서도 옳게 다스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 고백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경험하는 현실 속에서 그 고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묻고 있습니다.

엘리후는 여기에서 논쟁의 방식을 바꿉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높이 찬양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24절).

「모든 사람이 그 일을 보았습니다. 사람은 그것을 멀리서 바라봅니다.」욥기 36:25 · 두루새김

사람은 자신의 경험만을 기준으로 하나님을 판단하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한 사람의 삶보다 훨씬 넓은 세계에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3절에서 엘리후는 자신이 먼 곳에서 지식을 가져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25절에서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멀리서」 바라본다고 말합니다. 처음의 거리는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넓은 범위를 암시했습니다. 나중의 거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관찰하는 위치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같은 거리의 이미지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작용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위대하시며, 우리는 그분을 알지 못합니다. 그분께서 살아오신 햇수는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욥기 36:26 · 두루새김

여기서 「우리는 그분을 알지 못합니다」라는 말은 하나님에 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엘리후 자신도 지금까지 하나님의 여러 성품과 행동을 설명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그러한 지식에도 한계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함과 영원하심은 인간의 이해로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고 그 일부를 이해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의 이유와 범위까지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가르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하나님께서 지금 한 사람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계시는지 모두 아는 것은 다릅니다.

그 차이를 가장 생생하게 보여 주는 것은 이제 등장하는 구름과 비입니다.

빗방울에서 천둥까지 — 하나님의 일은 눈앞에 있지만 다 이해할 수 없다

욥기 36:27–33 본문 →

엘리후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을 하나씩 묘사합니다.

「그분께서 물방울을 끌어 올리시면, 그 물방울들이 그분의 안개에서 비로 걸러져 내립니다.」욥기 36:27 · 두루새김

장면은 작은 물방울에서 시작됩니다. 물이 움직이고, 안개와 구름이 생기며, 구름에서 비가 내려 「많은 사람 위에 쏟아」집니다(28절). 엘리후의 목적은 날씨가 변하는 모든 과정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비는 사람에게 가까운 현상입니다. 밭을 적시고, 마른 땅에 생명을 공급하며,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을 줍니다. 그러나 그 비를 만들어 내는 하늘의 움직임은 인간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날마다 경험하는 가장 일상적인 현상에도 나타납니다.

이제 엘리후는 구름을 올려다봅니다.

「구름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그분의 장막에서 어떻게 우렁찬 소리가 울리는지 누가 이해하겠습니까?」욥기 36:29 · 두루새김

하늘에 구름이 퍼지는 모습은 누구나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구름이 어디까지 펼쳐질지, 언제 비를 쏟을지, 어디에서 천둥이 울릴지를 인간이 모두 이해하거나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장막은 덮개가 있는 거처입니다. 구름이 하늘을 가리면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처 안에 계시는 것처럼 묘사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울려 나오는 천둥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활동을 알리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하나님의 일은 눈에 보입니다. 비가 내리고 구름이 펼쳐지는 것을 사람이 관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은 그 구름에 가려져 계십니다.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고, 완전히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비가 심판도 되고 양식도 된다

「보십시오. 그분께서는 자기 위로 빛을 펼치시고, 바다의 깊은 밑바닥을 덮으십니다.」욥기 36:30 · 두루새김

여기서 빛은 이어지는 번개 묘사와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번쩍이는 빛과 바다의 깊은 곳이 한 장면 안에 놓이면서 하나님의 활동이 미치는 넓고 큰 범위를 보여 줍니다.

「그분께서는 이것들로 민족들을 심판하시고, 먹을 것을 넉넉히 주십니다.」욥기 36:31 · 두루새김

비는 땅을 적셔 곡식을 자라게 합니다. 사람은 그 곡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비는 심판과 파괴의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창세기 7장에서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물이 홍수 심판의 일부가 됩니다.

인간은 하나의 사건을 보고 그 결과를 쉽게 판단하고 싶어 합니다. 비가 내리면 복이라고 생각하고, 폭풍이 닥치면 심판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후가 바라보는 하늘에서는 자연 현상이 그렇게 단순하게 나뉘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특정한 자연재해를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자연 세계를 통해 심판과 공급을 행하신다고 말하지만, 개별 사건의 원인을 판정하는 기준까지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번개를 손에 쥐신 하나님

마지막 장면에서 하늘은 더욱 격렬해집니다.

「두 손으로 번개를 감싸시고, 목표를 향해 내리치라고 명령하십니다.」욥기 36:32 · 두루새김

번개는 하늘에서 제멋대로 움직이는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존재처럼 그려집니다. 인간은 번개를 붙잡을 수 없습니다. 언제 어디에 떨어질지도 마음대로 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 속의 하나님은 그것을 자신의 손에 담으시고, 원하는 곳을 향해 보내십니다.

「천둥이 그분을 알리고, 가축도 다가오는 폭풍을 알립니다.」욥기 36:33 · 두루새김

하나님의 일은 천둥처럼 들리고 번개처럼 보입니다. 인간뿐 아니라 가축까지도 그 움직임에 반응합니다.

조금 더 깊이

27절은 물방울과 비와 안개가 어떤 관계로 이어지는지를 나타내는 원문의 표현 자체가 짧고 다소 어렵습니다. 따라서 물이 증발하고 물방울로 맺히고 비로 내리는 현대적인 설명을 구절에 정확히 맞추어서는 안 됩니다. 29절의 장막 이미지는 시편 18편 11–13절과도 통합니다. 30절의 「바다의 깊은 밑바닥」은 원문에서 ‘바다의 뿌리들’로 표현되며, 빛과 바다의 깊은 곳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원문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32절의 「두 손」은 두 손바닥을 가리키는데, 이 묘사는 하나님을 인간과 같은 몸을 가진 존재로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33절은 히브리어 본문에서 특히 해석이 어려운 부분입니다. 원문에는 알린다는 동사와 소리, 가축, ‘올라오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 이어지지만, 무엇이 누구에게 무엇을 알리는지 모두 밝혀져 있지는 않습니다. 두루새김이 「다가오는 폭풍」으로 옮긴 원문의 ‘올라오는 것’이 폭풍을 뜻하는지, 하나님의 분노나 다른 현상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은 분명하지만, 고난의 뜻은 쉽게 단정할 수 없다

욥기 36:1–33 본문 →

욥기 36장은 하나님께서 고난 속에서 사람의 귀를 여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줍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사람을 가르치실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욥의 고난도 바로 그런 이유로 주어졌다고 판단하려 합니다. 독자는 욥기의 첫머리에서 욥의 고난이 단순히 그의 죄에 대한 벌로 시작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고통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 고통에 어떤 목적이 있는지 모두 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존중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밝히지 않으신 뜻에 관하여 함부로 확정하지 않는 일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엘리후 자신이 후반부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위대하시며 인간은 그분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이 고백은 욥에게만 필요한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변호하고 있는 엘리후 자신에게도 필요한 말입니다.

처음에 엘리후는 자신이 지식을 온전히 갖추었다고 말하며 욥에게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점점 더 높은 곳으로 향합니다. 사람을 가르치시는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 구름과 빗방울로 옮겨 가더니, 마침내 번개를 손에 쥐신 하나님의 모습에 이릅니다.

이제 작은 물방울들이 구름에서 떨어지고, 구름 사이에서는 번개가 번쩍입니다. 하늘에서 천둥이 울리자 가축들까지도 다가오는 변화를 알아차립니다.

하나님의 일을 설명하던 사람 앞에서, 이제 하나님의 일이 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엘리후의 설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보다 훨씬 크고, 누구도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는 천둥소리가 하늘에 울리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