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9장 · 지혜를 찾으라는 권면
지혜는 왜 거리에서 외치는가
잠언은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이름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왕의 이름을 내세운 책이 처음 독자를 데려가는 곳은 왕궁도, 학자들이 모인 자리도 아닙니다. 한 가정의 부모 곁에서 시작하여, 악한 일을 꾸미는 사람들의 무리로 옮겨 가고, 마침내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와 성문 입구에 이릅니다.
그곳에서는 서로 다른 목소리가 들립니다.
한쪽은 젊은이에게 「우리와 함께 가자」라고 말합니다(1:11). 함께하면 값진 재물을 얻고 돈주머니 하나를 함께 쓸 수 있다고 약속합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지혜가 공개적으로 외칩니다. 「내 꾸지람을 듣고 돌아서라」(1:23). 지혜 역시 사람을 부릅니다. 그러나 재물을 약속하는 대신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라고 요구합니다.
잠언 1장은 어느 쪽의 목소리가 더 매력적으로 들리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 목소리를 따라갔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 줍니다. 재물을 약속한 사람들은 결국 자기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되고, 꾸지람으로 시작한 지혜의 말은 안전과 평온의 약속으로 끝납니다.
잠언이 처음 가르치려는 것은 세상을 잘 이용하는 방법이 아니라, 서로 다른 목소리 가운데 무엇을 듣고 누구를 따라갈 것인가를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첫 장 전체를 움직이는 질문입니다.
지혜는 무엇을 위해 필요한가
지혜의 목표는 성공보다 먼저 정의에 있다
1절은 이 책을 「다윗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왕인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소개합니다.
솔로몬의 이름은 지혜로운 왕의 전통과 연결됩니다. 열왕기상 3:9에서 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한 것은 백성을 다스릴 때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열왕기상 4:32는 그가 수많은 잠언을 말한 인물이었다고 전합니다.
다만 이 첫머리의 소개만으로 현재 잠언 전체를 솔로몬 한 사람이 썼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잠언 25:1에는 히즈키야 왕의 사람들이 솔로몬의 잠언을 옮겨 적었다는 설명이 있고, 30장과 31장에는 다른 인물들의 이름도 나타납니다. 잠언은 솔로몬의 이름을 중심에 두면서 여러 지혜 전승을 모은 책입니다.
2–6절은 책의 목적을 여러 표현으로 펼쳐 보입니다. 지혜와 훈계를 배우고, 깨달음을 주는 말을 이해하며, 슬기와 지식과 신중하게 생각하는 힘을 얻고, 어려운 잠언과 수수께끼까지 이해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목적들을 읽다가 3절에 이르면 눈에 띄는 표현이 나옵니다.
슬기롭게 살도록 훈계를 받아, 바르고 정의롭고 공평하게 행동하게 하려는 것입니다.잠언 1:3 · 두루새김
이는 잠언이 말하는 지혜의 성격을 결정합니다. 지혜는 단순히 어떤 선택이 나에게 유리한지 계산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무엇이 옳은지,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공동체 안에서 어떤 판단이 공평한지를 배우는 능력입니다.
2절과 3절에 반복되는 「훈계」(מוּסָר)는 히브리어로 훈계·훈련·교정을 뜻하는 낱말입니다. 이 말에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만이 아니라 잘못된 태도와 행동을 바로잡아 사람을 길러 낸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지혜를 얻는 사람은 단순히 더 많은 것을 알게 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을 때 그것을 고칠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은 잠언 첫 장의 후반부를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지혜가 거리에서 외칠 때 사람들이 거부하는 것은 몰랐던 지식만이 아니라 자신들을 바로잡으려는 꾸지람이기 때문입니다(1:23–25).
미숙한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이 함께 배우는 책
4절은 이 책이 「판단이 서툰 사람」과 「젊은이」에게 슬기와 신중하게 생각하는 힘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판단이 서툴다는 것은 반드시 도덕적으로 악하거나 지능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경험과 분별력이 충분히 자라지 않아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정보보다 판단력입니다. 무엇을 믿을지, 누구를 따를지, 어떤 결과를 예상해야 할지를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독자의 범위가 넓어집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듣고 더 배워야 합니다. 깨달음이 있는 사람도 바른 판단을 위한 조언을 얻어야 합니다.잠언 1:5 · 두루새김
5절의 히브리어 동사들은 지혜로운 사람이 실제로 더 배운다는 설명으로도, 더 배우라는 권고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본문은 지혜로운 사람을 배움이 끝난 사람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역설이 있습니다. 판단이 서툰 사람은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아직 배워야 할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6절은 이해해야 할 대상으로 잠언과 비유, 지혜로운 사람들의 말과 수수께끼를 제시합니다. 지혜의 말은 언제나 한 번 듣는 것으로 뜻이 드러나는 단순한 명령이 아닙니다. 때로는 비교하고, 깊이 생각하고, 겉으로 드러난 말 너머의 의미를 헤아려야 합니다.
지식의 시작은 왜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것인가
지금까지는 지혜 교육의 일반적인 목적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7절에 이르면 잠언은 이 교육의 바탕을 분명히 밝힙니다.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지혜와 훈계를 업신여깁니다.잠언 1:7 · 두루새김
「시작」(רֵאשִׁית)으로 옮긴 히브리어 낱말은 시간적으로 처음이라는 뜻을 가지며, 문맥에 따라 어떤 것의 근본이나 첫째 되는 원리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것은 지식을 얻기 전에 잠깐 거치는 종교적 준비 과정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판단 전체를 지탱하는 출발점이자 근본적인 태도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을 단순히 벌을 받을까 봐 겁내는 것으로 이해하면 잠언의 가르침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 판단이 최종 기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동이 평가받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그분이 세우신 정의와 선의 기준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잠언 1:7의 두 문장도 서로를 설명합니다. 첫 문장은 지식의 시작을 말하고, 둘째 문장은 미련한 사람이 지혜와 훈계를 업신여긴다고 말합니다.
미련함의 본질은 단순히 지식이 부족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을 바로잡을 수 있는 진실 앞에 서기를 거부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제 잠언은 이 원리를 실제 생활 속으로 가져갑니다. 젊은이가 처음 마주하는 문제는 어려운 수수께끼가 아닙니다. 누군가가 함께 가자고 손을 내밀 때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조금 더 깊이
6절에서 「비유」로 옮긴 히브리어 낱말은 뜻을 풀어야 하는 비유적이거나 함축적인 표현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반드시 남을 비꼬는 말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7절에서 말하는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함의 뜻은 욥기 28:28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주를 경외하는 것과 악에서 떠나는 것이 지혜와 분별력에 연결됩니다.
부모의 훈계와 죄인들의 초대
가르침은 먼저 가정에서 들려온다
8절부터 말하는 사람이 바뀝니다.
내 아들아, 네 아버지의 훈계를 들어라. 네 어머니의 가르침을 버리지 마라.잠언 1:8 · 두루새김
앞에서는 책의 목적을 설명하던 목소리가 이제 한 젊은이를 직접 부릅니다.
아버지는 훈계를 주고 어머니는 단순히 마음을 위로한다는 식으로 역할을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두 사람의 가르침을 나란히 두며, 자녀가 모두 귀 기울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네 어머니의 가르침」은 여기서 어머니가 자녀에게 주는 권위 있는 가르침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가정교육은 신명기 6:6–7에서 부모 세대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에게 가르치도록 명령받는 전통과도 연결됩니다. 다만 잠언은 여기서 하나님의 계명을 일상적인 판단과 삶의 태도로 익히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9절은 그 가르침을 특별한 이미지로 설명합니다.
그 가르침은 네 머리에 두르는 아름다운 관이며, 네 목에 거는 목걸이다.잠언 1:9 · 두루새김
훈계는 듣기에 불편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고 원하는 행동을 제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것을 무거운 짐이 아니라 아름다운 장신구에 비유합니다.
아름다운 관과 목걸이는 몸에 지니는 것입니다. 부모의 가르침 역시 잠깐 듣고 잊어버리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에 함께하며 그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곧바로 정반대의 약속이 등장합니다.
부모는 가르침을 아름다운 장신구로 묘사하지만, 죄짓는 사람들은 값진 재물로 집을 채우자고 유혹합니다. 양쪽 모두 무언가를 얻는 삶을 제안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지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와 함께 가자」라는 말의 매력
10절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경고합니다.
내 아들아, 죄짓는 사람들이 너를 꾀어도 따라가지 마라.잠언 1:10 · 두루새김
여기서 가장 먼저 요구하는 행동은 싸우는 것도, 논쟁에서 이기는 것도 아닙니다. 꾀는 사람들을 따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왜 이처럼 단순한 명령으로 시작합니까?
11–14절은 그 이유를 보여 줍니다. 아버지는 악한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말할지를 길게 들려줍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우리와 함께 가자. 숨어 기다리다가 사람을 죽이자. 아무 까닭 없이 죄 없는 사람을 노리고 숨어 있자.」잠언 1:11 · 두루새김
그들은 먼저 재물에 관한 계산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함께 행동하자는 초대를 건넵니다. 이어지는 문장에서도 「사람을 죽이자」, 「삼켜 버리자」, 「얻고」, 「채우자」라는 공동의 행동과 성과가 강조됩니다.
14절에서는 「우리 모두 돈주머니 하나를 함께 쓰자」라고 약속합니다. 그들은 함께 위험을 감수하고, 함께 재물을 얻고, 함께 나누는 집단이 되자고 합니다. 젊은이가 얻도록 약속받는 것은 재물만이 아닙니다. 자신을 받아 주는 무리에 속한다는 느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공동체가 하나로 뭉치는 방식은 죄 없는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11절의 「아무 까닭 없이」라는 표현은 피해자를 공격할 정당한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원한을 갚거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죄 없는 사람을 공격해서 이익을 얻으려 합니다.
모두가 돈주머니 하나를 함께 쓴다는 약속은 매력적이지만, 그 돈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누군가는 목숨과 재산을 잃어야 합니다. 잠언은 공동의 목적이나 강한 결속 자체가 그 모임을 선하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스올처럼 삼키겠다는 사람들
12절에서 그들의 말은 더욱 거칠어집니다.
「스올처럼 그들을 산 채로 삼켜 버리자. 그들을 통째로 삼켜, 구덩이로 내려가는 사람들처럼 되게 하자.」잠언 1:12 · 두루새김
스올은 구약에서 죽은 사람들의 영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폭력을 죽음이 생명을 삼키는 일에 비유합니다. 「산 채로」와 「통째로」라는 표현은 공격의 완전함을 강조하며, 피해자에게 벗어날 여지를 남기지 않겠다는 폭력성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뒤에 재물에 관한 약속이 따라옵니다.
「온갖 값진 재물을 얻고, 빼앗은 물건으로 우리 집들을 채우자.」잠언 1:13 · 두루새김
그들은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 재물이 남으리라고 계산합니다. 하지만 잠언은 곧 이 계산이 결정적인 것을 빠뜨렸다고 밝힙니다.
남을 삼키려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에 삼켜지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에서 「통째로」로 옮긴 히브리어 단어는 온전한 상태뿐 아니라 흠 없음을 뜻할 수도 있으므로 죄 없는 피해자를 다시 묘사한다고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 문장과 나란히 읽으면 그들을 남김없이 삼키겠다는 위협으로도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어느 쪽이든 피해자에게 벗어날 여지를 남기지 않겠다는 폭력성이 드러납니다.
남을 위해 친 덫에 자신이 걸리다
아버지는 죄짓는 사람들의 말을 충분히 들려준 다음, 아들에게 다시 직접 말합니다.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을 가지 마라. 그들의 길에 발을 들이지 마라.잠언 1:15 · 두루새김
「따라가지 마라」라는 10절의 명령이 「그들의 길에 발을 들이지 마라」라는 구체적인 행동의 명령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잠언에서 앞으로 반복될 이미지의 시작입니다. 사람의 삶은 하나의 길과 같으며, 매일의 선택은 그 길을 따라 발을 옮기는 일과 같습니다.
16절은 그들의 발이 악한 일을 향해 달려가고 사람을 죽이려고 서두른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단순히 잘못된 일을 마지못해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폭력으로 재물을 얻겠다는 확신이 그들을 재촉합니다.
그런데 17절은 갑자기 새를 잡는 그물 이야기로 옮겨 갑니다.
새가 보는 앞에서 그물을 펼쳐 놓는 것은 헛일이다.잠언 1:17 · 두루새김
흔히 이 구절은 새가 보는 앞에서 그물을 펼쳐 봐야 새가 위험을 알아차리고 피하므로 소용없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이런 이해를 따르면 이어지는 악한 사람들은 새보다도 자기 위험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가능성도 있습니다. 위험을 알아도 욕망에 이끌려 덫에 걸리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는 해석입니다. 다만 본문은 새가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지 말하지 않으므로, 이 구체적인 장면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쪽이든 다음 절에서 비유의 핵심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그들은 정작 자기 피를 노리고 숨어 기다리며, 자기 목숨을 노리고 있는 셈이다.잠언 1:18 · 두루새김
11절에서 그들은 사람을 죽이려고 숨어 기다리며 죄 없는 사람을 노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18절에서 실제로 노리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피와 목숨입니다.
그들은 남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면서 자신들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셈입니다.
19절은 이 장면의 의미를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부당한 이익을 얻으려는 모든 사람의 길이 이와 같다. 그렇게 얻은 이익이 그것을 가진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다.잠언 1:19 · 두루새김
앞에서는 강도들이 죄 없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그들이 얻으려던 이익 자체가 그들의 목숨을 빼앗습니다. 여기서 부당한 이익은 단순히 나쁜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는 재물이 아닙니다. 그것을 얻는 방식 자체에 다른 사람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폭력이 들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재물을 얻기 위해 생명을 빼앗습니다. 그러나 끝에서는 그 재물이 자기 생명을 빼앗습니다.
악이 반드시 외부에서 내려오는 벌을 통해서만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자신이 추구한 목적과 사용한 수단 안에 이미 파멸의 씨앗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이러한 길을 어떻게 피할 수 있습니까?
잠언은 이제 아버지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도시 전체에 울려 퍼지는 또 하나의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조금 더 깊이
11절의 「아무 까닭 없이」와 17절의 「헛일」에는 똑같은 히브리어 힌남이 쓰입니다. 이 단어는 문맥에 따라 이유가 없다는 뜻도, 헛되다는 뜻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죄 없는 사람을 아무 까닭 없이 공격하려던 계획이 결국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헛된 계획이 됩니다. 이러한 뒤바뀜은 구약의 다른 본문에서도 나타납니다. 시편 7:15–16은 함정을 판 사람이 자신이 판 구덩이에 빠지는 모습을 그리고, 하박국 2:9–11은 부당한 이익으로 집을 높이 세우려는 사람이 오히려 심판받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지혜는 숨어 있지 않다
집 안의 가르침이 거리의 외침으로
20절에서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지혜가 거리에서 외칩니다. 광장에서 목소리를 높입니다.잠언 1:20 · 두루새김
히브리어에서 지혜를 뜻하는 단어는 여성형이며, 잠언은 지혜를 목소리를 내고 사람을 부르는 인물로 묘사합니다. 이러한 문학적 표현을 의인화라고 합니다.
이 장면을 곧바로 하나님 자신이 등장하신 사건으로 읽거나, 독립된 신적 존재가 나타났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지혜를 인물처럼 그려 사람들이 지혜의 부름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보여 줍니다.
중요한 것은 지혜가 등장하는 장소입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길목에서 소리칩니다. 성문 입구에서 성안 사람들에게 말합니다.잠언 1:21 · 두루새김
고대 이스라엘의 성문은 단순한 출입구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거래하고 공동체의 중요한 일을 논의하며 법적 문제를 처리하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룻기 4:1–2에서 보아스가 성문에 앉아 장로들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장면이 그 한 예입니다.
지혜는 특별한 장소에 숨어서 소수에게만 비밀을 전하지 않습니다. 일상적인 거래와 판단이 이루어지고,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부딪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말합니다.
앞에서는 죄짓는 사람들이 한 젊은이를 자신들의 무리로 불렀습니다. 이제 지혜는 누구나 들을 수 있는 곳에서 사람들을 부릅니다.
지혜의 말이 들리는 데 필요한 것은 특별한 신분이 아니라 듣고자 하는 태도입니다.
미숙함은 언제부터 어리석음이 되는가
지혜가 가장 먼저 외치는 말은 꾸지람입니다.
「판단이 서툰 사람들아, 언제까지 너희는 분별없이 사는 것을 좋아하겠느냐? 비웃는 자들은 언제까지 비웃기를 즐기고, 어리석은 자들은 언제까지 지식을 미워하겠느냐?」잠언 1:22 · 두루새김
앞서 4절에서 판단이 서툰 사람은 가르침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 등장했습니다. 아직 판단력이 충분히 자라지 않았기에 배움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판단이 서툰 사람들이 「분별없이 사는 것을 좋아하겠느냐」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판단이 서툰 상태에 있다는 것과 분별없이 사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다릅니다. 처음에는 경험이 부족해서 잘못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배우고 바로잡을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그것을 거절한다면 문제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비웃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보다 비웃는 태도 자체를 즐깁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지식이 자신을 바로잡을 수 있음에도 그것을 미워합니다. 세 부류의 공통점은 능력이 부족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배움을 향한 마음이 닫혀 있다는 데 있습니다.
지혜의 문제는 단순히 얼마나 알고 있는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듣기 불편한 말 앞에서도 태도를 바꿀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꾸지람 뒤에 주어진 약속
그렇지만 지혜의 첫 외침은 비난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내 꾸지람을 듣고 돌아서라.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내 생각을 쏟아 놓고, 내 말을 알려 주겠다.」잠언 1:23 · 두루새김
「돌아서라」(שׁוּב)로 옮긴 히브리어 동사는 ‘돌아오다’, ‘돌이키다’라는 뜻을 가진 슈브에서 나온 말입니다. 단순히 새로운 정보를 듣는 것보다 방향을 바꾸는 행동에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꾸지람은 상대방을 모욕하기 위한 말이 아닙니다. 잘못된 길에서 돌아설 기회를 주는 말입니다.
원문에서는 「내 생각」(רוּחַ)에 해당하는 자리에 ‘내 영’이라는 표현이 쓰입니다. 곧바로 「내 말」이 나란히 나오기 때문에 지혜가 자신의 생각과 뜻을 충분히 드러낸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으며, 두루새김은 이 뜻을 「내 생각」으로 풀어 옮겼습니다. 문맥에서 분명한 것은 지혜가 자신의 가르침을 기꺼이 나누겠다고 약속한다는 점입니다.
잠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지혜는 사람에게 숨겨진 비밀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듣고 받아들여야 할 가르침으로 나타납니다. 잠언 2:6은 이어서 여호와야훼가 지혜를 주시며 그분의 입에서 지식과 분별이 나온다고 밝힙니다.
지혜의 꾸지람은 사람을 밀어내는 소리가 아니라, 돌아올 수 있도록 방향을 알려 주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다음 구절에서 분위기가 급격히 바뀝니다. 지혜가 아무리 크게 외쳐도 사람들이 반드시 듣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21절의 「사람들로 북적이는 길목」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떠들썩한 장소를 가리킬 수도 있고,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무리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어도 지혜가 사람들의 일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23절의 영을 쏟는다는 표현에 더 깊은 신학적 의미를 부여할 가능성도 있지만, 이 구절만으로 특정한 신적 실체나 후대의 성령 강림 사건을 가리킨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거리에서 외치는 지혜의 모습은 잠언 안에서 이어집니다. 잠언 2장은 지혜를 은처럼 구하고 감추어진 보화처럼 찾으라고 권하는데(2:4), 1장에서 지혜가 사람을 부르는 장면이 먼저 나왔기에 2장의 적극적인 탐구는 그 부름에 응답하는 사람의 태도로 읽을 수 있습니다. 잠언 8장에서는 지혜가 다시 길목과 성문 곁에서 외치고(8:1–3), 9장에 이르면 지혜와 어리석음이 각각 사람들을 초대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9:1–6, 13–18). 신약에서는 바울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라고 부릅니다(고린도전서 1:24, 30). 이는 지혜라는 구약의 주제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이해하는 신학적 연결입니다. 잠언 1장에서 거리에서 외치는 지혜가 곧바로 역사적 예수님의 직접적인 묘사라는 뜻은 아닙니다.
듣기를 거절한 사람들이 다시 부르짖을 때
거절은 한순간의 실수가 아니라 반복된 선택이다
24–25절에서 지혜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돌아봅니다.
「내가 불렀지만 너희는 거절했고, 내가 손을 내밀었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잠언 1:24 · 두루새김
「너희는 내 조언을 모두 내버렸고, 내 꾸지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잠언 1:25 · 두루새김
지혜는 한 번 말하고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불렀고, 손을 내밀었고, 조언했고, 꾸짖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가르침을 듣지 못해서만 잘못된 길에 들어선 것이 아닙니다.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습니다. 본문에는 「거절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내버렸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라는 표현이 연이어 나오며, 이 반복은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합니다.
지혜가 처음부터 사람들을 외면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지혜를 외면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재난은 단 한 번의 판단 실수에 대한 지나친 처벌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충분히 주어진 경고를 계속 거절한 결과로 묘사됩니다.
왜 지혜는 재난 앞에서 웃는가
26절은 잠언 1장에서 가장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는 구절입니다.
「그러니 너희가 재난을 당할 때 나도 웃겠다. 너희가 두려워하는 일이 닥칠 때 비웃겠다.」잠언 1:26 · 두루새김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우선 이 구절은 거리에서 말하는 지혜를 사람처럼 그린 장면 속의 발언입니다. 하나님이 고통받는 모든 사람을 향해 비웃으신다는 일반적인 선언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앞서 22절에서는 비웃는 자들이 비웃기를 즐긴다고 말했습니다. 자신들이 지혜의 경고보다 더 현명하다고 여기며 꾸지람을 거절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재난이 닥치면 그들의 확신은 완전히 뒤집힙니다. 자신들이 옳다고 믿었던 판단이 자신들을 보호하지 못하고, 어리석다고 여겼던 경고가 실제로 옳았음이 드러납니다. 이러한 뒤바뀜을 지혜의 비웃음이라는 강렬한 시적 표현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이는 고통받는 사람을 조롱하라는 윤리적 명령과 다릅니다. 실제로 잠언 24:17은 원수가 넘어질 때에도 기뻐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27절에서는 재난이 거대한 자연현상에 비유됩니다.
「두려운 일이 거센 폭풍처럼 덮치고, 재난이 회오리바람처럼 밀려오며, 고통과 괴로움이 너희에게 닥칠 때에 말이다.」잠언 1:27 · 두루새김
폭풍은 사람이 뜻대로 멈추거나 돌려세울 수 없는 위협을 떠올리게 합니다. 앞서 죄짓는 사람들은 죄 없는 사람을 덫에 가두고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신들이 다스릴 수 없는 재난 앞에 놓입니다. 자신이 다스릴 수 있다고 믿었던 삶이 감당할 수 없는 위기로 바뀌는 모습을 폭풍의 이미지로 그립니다.
부르던 이와 거절하던 이의 자리가 바뀌다
28절에서는 또 하나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때 그들이 나를 불러도 나는 대답하지 않겠다. 그들이 나를 애써 찾아도 만나지 못할 것이다.」잠언 1:28 · 두루새김
24절에서 지혜는 사람들을 불렀지만 사람들이 듣지 않았습니다. 28절에서는 사람들이 지혜를 부르지만 지혜가 대답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지혜가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지혜를 찾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하나님이 늦게 회개하는 사람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까?
그렇게 일반화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장에서 직접 말하는 이는 사람처럼 그려진 지혜이며, 본문의 관심은 회개의 모든 가능성이나 하나님의 용서에 관한 교리 전체를 세우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지혜의 가르침을 거절한 뒤에도 그 거절의 결과를 언제나 마음대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잘못된 선택으로 무너진 신뢰는 그 선택을 후회한다고 즉시 회복되지 않습니다. 이미 행한 폭력이나 불의도 뒤늦은 깨달음만으로 없던 일이 되지 않습니다. 잠언은 이러한 현실을 대답 없는 외침이라는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사람이 선택한 길이 결국 그 사람을 먹인다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함은 선택의 문제다
29절에서 지혜는 사람들이 왜 이러한 결과를 맞았는지 다시 설명합니다.
「그들이 지식을 미워하고,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고,」잠언 1:29 · 두루새김
여기서 첫머리의 7절이 다시 등장합니다.
7절은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라고 선언했습니다. 29절은 사람들이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지식을 얻을 능력이 완전히 없었던 사람들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지혜의 부름을 듣고도 다른 길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죄짓는 사람들은 아들에게 자신들과 함께 가자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길을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혜는 돌아서라고 불렀습니다.
결국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의 문제가 남습니다.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막연한 종교적 감정을 품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대하는 방식, 조언을 받아들이는 태도, 잘못을 인정하는 선택 속에서 드러납니다.
자신의 길에서 난 열매를 먹다
「그들은 자기들이 걸어온 길의 열매를 먹고, 자기 꾀로 배가 부를 것이다.」잠언 1:31 · 두루새김
여기에는 외부에서 누군가 마음대로 내려 주는 벌보다 자신이 행한 일의 결과를 스스로 감당한다는 의미가 강조됩니다. 앞서 죄짓는 사람들은 죄 없는 사람을 통째로 삼키자고 말했습니다(1:12). 그러나 그들이 부당하게 얻은 이익은 도리어 그들의 목숨을 빼앗는다고 했습니다(1:19).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자신을 채우려던 욕망이 결국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결과에 이릅니다.
길은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것이고, 열매는 자라나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처럼 보이는 결과도 그동안 걸어온 길과 연결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고난의 원인을 당사자의 잘못으로 돌릴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잠언 1장은 지혜를 계속 거절하는 사람의 길을 다루고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서 당한 폭력이나 설명할 수 없는 고난 전체를 해석하는 원리를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의 초점은 자신이 선택한 악한 길에 대한 책임입니다.
지혜를 향해 돌아서지 않으면 어디를 향하게 되는가
「판단이 서툰 사람은 내게 등을 돌려 목숨을 잃고, 어리석은 사람은 아무 걱정 없이 지내다가 망하기 때문이다.」잠언 1:32 · 두루새김
23절에서 지혜는 「돌아서라」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32절에서는 「내게 등을 돌려 목숨을 잃고」라고 말합니다. 원문에서 이 두 표현에는 같은 히브리어 어근 슈브, 돌이키다가 사용됩니다.
문제는 단순히 돌아서느냐 마느냐가 아닙니다. 어느 쪽으로 돌아서느냐입니다.
지혜의 꾸지람을 향해 돌아서면 배움이 시작됩니다. 지혜를 등지고 돌아서면 자신을 바로잡을 기회를 버리게 됩니다.
「아무 걱정 없이 지내다가 망하기 때문이다」의 어리석은 사람들은 반드시 언제나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판단을 확신하며 평안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평안은 위험을 분별하지 못한 채 걱정 없이 지내는 태도입니다.
같은 평온처럼 보이지만 다른 삶
마지막 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그러나 내 말을 듣는 사람은 안전하게 살며,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고 평온하게 지낼 것이다.」잠언 1:33 · 두루새김
32절의 어리석은 사람은 아무 걱정 없이 지냅니다. 33절의 지혜를 듣는 사람도 평온하게 지냅니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평온의 근거는 정반대입니다.
한 사람은 경고를 듣지 않기에 불안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경고를 듣고 자신의 길을 바로잡았기에 안정을 얻습니다.
7절에서는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33절에서는 지혜를 듣는 사람이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고」 평온하게 지낼 것이라고 합니다.
두려워해야 할 대상을 올바르게 아는 것이 다른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 약속을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결코 사고나 질병이나 부당한 고난이 닥치지 않는다는 보장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구약의 욥기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도 극심한 고난을 겪을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욥기 1:1, 1:13–19). 따라서 33절의 안전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고난이 결코 없다는 약속으로 단순화하기보다, 지혜를 거절한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파멸과 대조되는 삶으로 읽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29절의 두 길의 선택은 구약성경의 중요한 주제들과 맞닿아 있습니다. 신명기 30:15–20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앞에 생명과 복, 죽음과 재앙을 제시하고 생명을 선택하라고 권합니다. 신명기가 언약 백성 전체를 향해 말한다면, 잠언은 한 젊은이가 어떤 동료를 선택하고 어떤 가르침을 들을 것인가라는 일상의 장면에서 그 문제를 보여 줍니다. 시편 1편에서도 악한 사람들의 꾀를 따르는 사람과 여호와야훼의 가르침을 기뻐하는 사람이 서로 다른 길을 걷고, 그들의 삶은 마지막에 서로 다른 결과를 맺습니다. 잠언 1장에서는 이 두 길이 서로 다른 목소리로 나타난다는 점이 두드러집니다.
거리에는 아직 목소리가 들린다
잠언 1장에서 죄짓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악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감추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젊은이가 유혹에 넘어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아버지는 그 말을 길게 인용하며 경고합니다. 무엇이 잘못인지 어느 정도 알면서도, 그 잘못을 정당화하는 관계와 이익의 약속 때문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지혜의 말은 언제나 듣기 좋지만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계획을 세우는 능력이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계획을 무엇을 위해 사용하는지 판단하는 지혜가 없었습니다. 잠언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순종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죄짓는 사람들의 꾐에는 따라가지 말라고 명령하면서, 지혜의 꾸지람에는 응답하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목소리에 열려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들어야 할 말에 마음을 열고, 따라서는 안 되는 길 앞에서는 발을 멈출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 분별의 기준은 처음부터 제시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며 바르고 정의롭고 공평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잠언 1장은 마지막에 특별한 사건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젊은이가 실제로 죄짓는 사람들의 무리에 들어갔는지, 부모의 말을 따랐는지, 거리에서 외치는 지혜의 말에 응답했는지도 알려 주지 않습니다.
대신 두 길의 끝을 보여 줍니다.
한쪽에는 죄 없는 사람을 해쳐 재물을 얻겠다고 약속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을 위해 놓았다고 생각한 덫이 사실은 자기 생명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다른 한쪽에는 거리에서 외치는 지혜가 있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잘못을 지적하고 돌아서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거절한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걸어온 길의 열매가 기다리고 있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안전과 평온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지혜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찾아오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이미 살아가고 있는 자리로 나와 목소리를 높입니다. 길목에서도, 광장에서도, 성문 입구에서도 외칩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아주 단순한 행동입니다.
듣는 것입니다.
잠언은 수많은 잠언과 가르침으로 이어질 책이지만, 그 긴 여정의 첫 장은 「그러나 내 말을 듣는 사람은 안전하게 살며,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고 평온하게 지낼 것이다」라는 하나의 목소리 앞에서 끝납니다.
지혜는 거리에서 이미 외치고 있습니다. 이제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어느 길로 발을 옮길 것인가가 남아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