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29편
이 장의 자리 · 107–150편 · 다섯째 권
상처를 입어도 이기지 못한 적들
시편 129편은 승리의 노래이지만, 그 승리를 이야기하는 방식이 뜻밖입니다. 시인은 적들이 무너진 장면을 먼저 보여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심하게 짓밟혔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그는 자신의 등을 밭에 비유합니다. 적들은 그 위를 갈아엎었고, 길게 고랑을 냈습니다. 땅이 아니라 사람의 등을 갈아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이 「그들은 내가 어릴 때부터 나를 몹시 괴롭혔다. 그래도 나를 이기지는 못했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등에 깊이 남은 고통을 기억하면서도, 그 고통이 자신의 마지막 이야기가 되지는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시편 129편에서 승리는 상처가 없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상처를 입히려던 자들이 끝내 자신을 무너뜨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고통받은 사람이 구원을 고백한 다음, 자신을 괴롭힌 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말라 버리기를 바랍니다. 처음에는 그의 등이 밭이 되었지만, 마지막에는 적들이 지붕 위의 풀처럼 묘사됩니다. 그리고 그 풀은 거둘 가치조차 없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축복의 인사를 받지 못합니다.
왜 시인은 자신의 등에 새겨진 고랑을 이야기한 뒤, 적들에게는 열매 없는 풀의 운명을 바라게 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을 따라가면 시편 전체를 관통하는 대조가 드러납니다. 악한 자들은 이스라엘을 짓밟으며 자신들의 힘을 길게 뻗으려 했지만,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의 밧줄을 끊으셨습니다. 반대로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의 번영은 지붕 위의 풀처럼 뿌리내리지 못하고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시편은 세 장면으로 움직입니다. 1–2절에서 이스라엘은 오래된 고난과 살아남은 역사를 고백합니다. 3–4절에서는 그 고난을 밭갈이에 비유하고, 여호와야훼께서 악한 자들의 힘을 끊으신 일을 기억합니다. 5–8절에서는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의 미래를 지붕 위의 마른 풀과 수확 없는 밭의 모습으로 그립니다.
시편 128편이 열매 맺는 포도나무와 자라나는 올리브나무를 통해 복을 보여 주었다면, 129편에는 뿌리내리지 못하고 말라 버리는 풀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이여, 이제 이렇게 말하십시오 — 한 사람의 목소리로 기억하는 공동체의 고난
오름의 노래. 「내가 어릴 때부터 그들은 나를 몹시 괴롭혔다.」 이스라엘아, 이제 이렇게 말하라.시편 129:1 · 두루새김
시편은 이스라엘을 향한 요청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시인이 혼자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노래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함께 말해야 할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말하도록 요청받은 문장은 이상하게도 복수형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우리를 괴롭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한 사람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공동체가 오랜 세월 동안 겪은 경험을 한 사람의 생애처럼 묘사합니다. 한 나라가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자라면서 괴롭힘을 당하며, 그럼에도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어릴 때부터」라는 표현을 실제 시인의 어린 시절로만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이 분명하게 이스라엘에게 말하도록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의 초기 역사, 곧 그 민족의 어린 시절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라는 표현은 한 번의 사건을 넘어 이스라엘의 긴 역사에 반복되어 온 고난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내가 어릴 때부터 그들은 나를 몹시 괴롭혔다. 그래도 나를 이기지는 못했다.」시편 129:2 · 두루새김
이번에는 뒤에 새로운 문장이 붙습니다. 시인은 고난에 관한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한 뒤에야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먼저 자신의 고난을 충분히 인정합니다. 그것을 축소하지 않습니다. 지나간 역사를 아름답게 꾸미거나, 하나님이 보호하셨으니 사실은 별로 힘들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고난은 실제였고,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이기지는 못했다」는 말은 적들이 자신을 상대하여 이기거나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실제로 침략과 억압을 겪었습니다. 성경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과 남왕국 유다의 멸망,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백성의 포로 생활까지 기록합니다. 그러한 역사를 알고 있는 독자에게 「그래도 나를 이기지는 못했다」는 말은 모든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선언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고백은 하나하나의 패배와 고난을 넘어서는 차원을 바라봅니다. 적들은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무너뜨리려 했지만,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끝내지는 못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남아 그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괴롭힘을 당했던 공동체가 이제 스스로 그 역사를 증언합니다. 그들을 침묵시키거나 없애려던 힘은 그 목적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시인은 이 사실을 추상적인 역사 평가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자신들이 당한 고난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장면으로 바꿉니다.
조금 더 깊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한 사람의 생애처럼 표현하는 언어는 구약의 다른 곳에서도 나타납니다. 호세아 11:1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이 어린아이였을 때 그를 사랑하셨고 이집트에서 자신의 아들을 불러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2:2에서도 이스라엘의 젊은 시절이 회상됩니다. 「어릴 때부터」에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겪었던 억압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출애굽기 1:11–14에서는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무거운 노동을 강요하고 그들의 삶을 고되게 만듭니다. 출애굽기 2:23–25에서는 그들의 신음이 하나님께 이르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고통을 보시며 자기 언약을 기억하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어 출애굽기 6:6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무거운 짐 아래에서 이끌어 내시고 구해 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시편 129편은 이집트라는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습니다. 시편 129편이 출애굽 사건을 직접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랜 억압과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주제는 그 역사와 깊이 연결됩니다.
내 등을 밭처럼 갈아 — 사람의 몸을 밭으로 만든 폭력
「밭 가는 이들이 내 등 위를 갈아 자기들의 고랑을 길게 냈다.」시편 129:3 · 두루새김
시편에서 가장 거칠고 고통스러운 이미지입니다.
밭을 가는 일은 본래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릴 준비를 하는 활동입니다. 농부는 땅에 고랑을 내고, 그 고랑을 따라 씨앗이 심어질 자리를 마련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밭을 가는 사람들이 갈아엎는 것은 땅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등입니다.
밭을 가는 사람은 땅을 자신의 뜻대로 사용합니다. 그는 어디에 고랑을 낼지 결정하고, 얼마나 길게 갈아엎을지도 결정합니다. 땅은 그 과정에서 자신의 뜻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시인이 이스라엘의 등을 밭에 비유한 것은 그들이 억압 속에서 얼마나 무력한 처지에 놓였는지를 보여 줍니다. 적들은 이스라엘을 동등한 사람이나 공동체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뜻대로 갈아엎고 사용할 수 있는 땅처럼 취급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그들이 「긴 고랑을 냈다」고 말합니다. 왜 고랑의 길이를 강조할까요? 짧게 한 번 상처를 낸 것이 아니라, 등에 길게 이어지는 자국을 남기는 모습을 그리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은 고통이 오래 이어졌고 가혹했다는 사실을 함께 전달합니다.
밭을 가는 사람은 대개 어떤 열매를 기대하며 땅을 갑니다. 그의 노동은 미래의 수확을 향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밭갈이는 생명을 기르기 위한 활동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몸에 고통을 새기는 행위입니다.
본래 생명을 위한 노동의 이미지가 파괴의 이미지로 뒤집힌 것입니다.
이 뒤집힘은 시편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그때 시인은 이스라엘의 등을 갈아엎었던 자들이 오히려 아무런 수확도 남기지 못하는 풀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 장면으로 가기 전에 시인은 결정적인 사실을 한 가지 더 말합니다. 밭을 가는 자들이 긴 고랑을 냈지만, 그 일을 끝까지 계속하지는 못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의 밧줄을 끊으셨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 「긴」(אָרַךְ)은 길게 만들었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이어지는 레마아니탐은 밭을 가는 자리나 그 결과 생기는 고랑과 관련된 드문 표현입니다. 정확한 의미를 하나로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앞의 「내 등을 밭처럼 갈아」라는 표현과 연결하면 긴 고랑을 내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이미지가 실제 채찍질로 인해 등에 길게 난 상처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시편은 특정한 고문 방법이나 형벌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도구로 몇 차례 맞았는지를 되살려 내려는 시도는 본문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이와 가까운 표현이 이사야 51:23에도 나타납니다. 그곳에서는 억압하는 자들이 이스라엘에게 몸을 땅처럼,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는 길처럼 만들라고 요구한 일이 회상됩니다. 두 본문은 같은 문장을 반복하지는 않지만, 사람의 몸이 다른 사람의 발밑에 놓이거나 땅처럼 취급되는 모습을 공유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의로우시다 — 길게 이어지던 고통을 끊으시는 하나님
「여호와야훼는 의로우시다. 악한 이들의 밧줄을 끊으셨다.」시편 129:4 · 두루새김
이 절은 시편 전체의 전환점입니다.
앞의 세 절에서는 이스라엘의 고난만 이야기했습니다. 적들이 어린 시절부터 괴롭혔고, 등을 밭처럼 갈아엎었습니다.
그런데 4절에 이르러 처음으로 여호와야훼의 행동이 등장합니다.
고대의 밭갈이에서는 소와 쟁기를 연결하거나 멍에를 고정하기 위해 줄과 끈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악한 자들의 밧줄」을 앞 절의 밭 가는 자들이 사용하던 도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적들은 이스라엘의 등을 계속 갈아엎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께서 그 쟁기를 움직이게 하던 줄을 끊어 버리셨습니다.
물론 이 해석만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밧줄은 사람을 묶어 두는 줄이나 억압의 도구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야훼께서 이스라엘을 붙들고 있던 속박을 끊으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두 읽기는 강조점이 다르지만, 본문이 전하려는 핵심에서는 만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악한 자들이 이스라엘을 계속 괴롭힐 수 있게 하던 힘을 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모습은 앞선 2절의 고백 「그래도 나를 이기지는 못했다」를 설명합니다. 왜 적들은 끝내 이스라엘을 이기지 못했습니까? 이스라엘에게 상처를 입힐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미 그들은 등에 긴 고랑을 낼 만큼 강한 힘을 행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힘은 끝없이 이어질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그것을 중단시키셨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여호와야훼의 행동을 말하기 전에 먼저 그분의 성품을 선언합니다. 왜 여기에서 의로움이 등장할까요? 시인은 여호와야훼께서 강하시기 때문에 밧줄을 끊으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의로우시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여호와야훼의 의로움은 옳고 그름을 공정하게 판단하시는 성품뿐 아니라, 자기 백성의 억울함을 바로잡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행동과도 연결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편애하신다는 말과 다릅니다. 시인은 앞에서 적들이 다른 사람의 몸을 마치 밭처럼 갈아엎는 폭력을 묘사했습니다. 이제 그러한 폭력을 중단시키시는 여호와야훼의 행동을 의롭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은 이 장면에서 억압의 힘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의 등에서 고랑이 생기기 전에 밧줄을 끊으신 것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시인은 이미 등에 긴 고랑이 생긴 뒤에야 여호와야훼께서 끊으신 밧줄을 이야기합니다. 물론 이것이 하나님께서 반드시 오랜 고난을 허용하신 뒤에만 구원하신다는 일반 원리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시인은 고난의 정확한 기간이나 구원의 시점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둘 중 하나를 지우지 않습니다.
구원받았다는 이유로 고난의 역사를 없던 일처럼 말하지도 않고, 고난이 극심했다는 이유로 여호와야훼의 구원을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등에 고랑이 생길 만큼 괴롭힘을 당한 공동체가 여호와야훼의 의로움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기억하는 하나님은 자신들에게 어떤 고통도 일어나지 않게 하신 분으로만 묘사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자신들을 짓누르던 힘을 끊어 내신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런데 이제 시인은 과거를 회상하는 자리에서 미래를 바라보는 자리로 옮겨 갑니다. 이미 여호와야훼께서 밧줄을 끊으셨는데도, 시인은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에게 앞으로 부끄러움과 실패가 닥치기를 바랍니다.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이 뒤로 물러나기를 — 과거의 구원에서 미래의 소망으로
시온을 미워하는 이들은 모두 부끄러워하며 뒤로 물러나기를.시편 129:5 · 두루새김
여기에서 시편의 말하는 방식이 바뀝니다.
1–4절에서는 이스라엘이 자신의 고난과 여호와야훼의 구원을 회상했습니다. 그러나 5절부터는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의 앞날에 대한 소망이 등장합니다. 시인은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적들이 패배했다고 선언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이 앞으로도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오랜 억압을 겪었고, 여호와야훼께서 악한 자들의 밧줄을 끊으시는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앞으로 어떤 적대도 없을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앞에서는 단지 「그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성격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입니다.
시온은 예루살렘과 여호와야훼께서 함께하심, 그리고 그분이 자기 백성과 맺으신 관계를 나타내는 중요한 장소입니다. 따라서 시온을 미워한다는 말은 단순히 특정한 지리적 장소를 싫어한다는 의미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 시편의 문맥에서는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그 공동체를 무너뜨리려는 적대적인 행동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모든 다른 민족이나 이스라엘 밖의 사람들을 시온의 원수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본문이 문제 삼는 것은 그들이 어느 민족 출신인지가 아니라 시온을 향한 적대입니다.
「뒤로 물러나기를」이라는 말은 뒤로 물러나거나 물러서게 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앞선 3절과 대조됩니다. 앞에서는 밭 가는 자들이 이스라엘의 등에 긴 고랑을 내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뜻대로 폭력을 계속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인은 그들이 뒤로 물러나기를 바랍니다.
더 이상 이스라엘의 삶 위에서 마음대로 전진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추구하던 목적에서 물러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부끄러움 역시 이러한 실패와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을 무너뜨리려던 자들이 오히려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오늘날 독자에게 불편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부끄러움을 당하기를 바라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을 본문이 묘사한 억압의 상황에서 떼어 놓아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단지 자신을 불쾌하게 만든 사람에게 불행이 찾아오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사람의 등을 밭처럼 갈아엎는 폭력을 행사한 자들이 더 이상 그 힘을 사용하지 못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시인은 자신들이 직접 보복하겠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그는 악한 자들의 밧줄을 끊으신 여호와야훼의 의로움을 먼저 고백한 뒤,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의 실패를 바랍니다. 시인의 소망은 이미 고백한 여호와야훼의 의로운 구원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적들이 이스라엘의 등을 갈아엎었으니, 이스라엘도 적들의 등을 갈아엎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적들의 힘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고, 그들의 번영이 열매를 맺지 못하기를 바랍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 시편이 모든 종류의 개인적 보복 감정을 정당화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억압을 겪은 공동체가 가해자의 지배와 번영이 끝나기를 바라는 기도를 담고 있으며, 그 감정의 거칠음도 감추지 않습니다. 본문의 대상은 단순한 의견 차이나 사소한 갈등의 상대가 아닙니다. 오랫동안 공동체를 억압하고, 그 존재 자체를 위협해 온 자들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그들이 어떤 모습이 되기를 바라는지 하나의 비유로 보여 줍니다. 그들은 지붕 위의 풀처럼 되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러한 소망은 시편 94:1–7에서 악한 자들이 약한 사람들을 짓밟는 현실을 고발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구하는 기도와 연결됩니다. 두 시편 모두 악한 자들이 지금 누리는 힘이 영원히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을 품고 있습니다.
지붕 위의 풀처럼 — 뿌리내리지 못하는 악인의 번영
그들은 뽑히기도 전에 말라 버리는 지붕 위의 풀처럼 되기를.시편 129:6 · 두루새김
시인은 악한 자들의 멸망을 불길이나 무너지는 성벽, 전쟁터의 시체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대신 풀이 등장합니다. 그것도 넓은 들판이나 기름진 밭에서 자라는 풀이 아니라 지붕 위의 풀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일부 집에는 평평한 지붕이 있었고, 지붕을 만드는 데 흙과 식물 재료가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지붕에는 비가 내린 뒤 풀이 돋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붕 위의 얕은 흙은 깊게 뿌리내리기에 좋은 환경이 아닙니다. 풀이 잠시 자랄 수는 있어도 쉽게 말라 버립니다.
시인은 바로 그 모습을 악한 자들의 미래에 적용합니다. 겉으로는 풀이 돋아났지만, 오래 자라 열매를 맺거나 충분히 거둘 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여기서 「뽑히기도 전에」라는 표현에는 번역상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두루새김처럼 풀이 뽑히기도 전에 말라 버리는 모습으로 읽을 수도 있고, 풀이 충분히 자라나거나 뻗어 나오기도 전에 말라 버린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 읽기가 보여 주는 장면의 핵심은 같습니다.
풀은 충분히 자라 거둘 만한 상태가 되지 못합니다.
시인은 악한 자들의 생명이 짧기를 바란다는 말에서 더 나아가, 그들이 이루려는 일이 열매 없는 것으로 끝나기를 바랍니다. 3절에서 악한 자들은 밭 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등을 밭처럼 갈아 긴 고랑을 냈습니다.
그러나 6절에 이르면 그들은 지붕 위의 풀이 됩니다.
다른 사람을 갈아엎을 만큼 강해 보였던 자들이, 정작 자신들은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는 풀처럼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제 다음 절은 그 풀이 얼마나 쓸모없는지를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거두는 이는 그 풀로 제 손을 채우지 못하고 단을 묶는 이는 제 품을 채우지 못한다.시편 129:7 · 두루새김
한 사람은 곡식을 거두고, 다른 사람은 거둔 곡식을 모아 묶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손은 비어 있습니다. 거두는 사람은 손에 쥘 만한 것을 얻지 못합니다. 묶는 사람도 자기 옷자락의 품에 담을 만한 것을 얻지 못합니다.
이것은 완전히 열매 없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악한 자들의 힘이 약해진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결과 자체가 아무런 풍성함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이 이스라엘의 등에 고랑을 냈다는 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의 삶을 자기들의 목적을 위한 도구처럼 다루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얻기를 바라던 결과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끝내 무너뜨리지 못했고, 이제 시인은 그들 자신도 아무런 수확을 남기지 못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아직 시편의 마지막 장면이 남아 있습니다. 시인은 손이 비어 있는 수확하는 사람들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 밭 곁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입까지 바라봅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의 샬라프(שָׁלַף)는 기본적으로 끌어내거나 뽑아내는 의미를 지닌 동사입니다. 두루새김은 이 자리를 「뽑히기도 전에」로 옮겼고, 이 표현을 풀이 충분히 자라나거나 뻗어 나오기도 전에 말라 버린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번역도 있습니다. 원문의 표현이 드물고 문맥에 따른 해석이 필요하므로 어느 한쪽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러한 비유는 이사야 37:27에서도 나타납니다. 그곳에서는 힘을 잃은 사람들이 들의 풀이나 지붕 위의 풀처럼 묘사됩니다. 지붕 위의 풀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힘과 번영을 나타내기에 적절한 이미지였습니다.
아무도 여호와야훼의 복을 빌지 않는다 — 열매 없는 밭에 남은 침묵
지나가는 이들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여호와야훼의 복이 너희에게 있기를. 우리가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복을 빈다.」시편 129:8 · 두루새김
시편의 마지막 절에는 또 다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밭을 갈거나 곡식을 거두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수확이 이루어지는 곳을 지나가며 그곳의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수확은 개인의 노동인 동시에 공동체의 생활과 연결된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밭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며 인사를 나누고 복을 빌어 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들판에서 풍성한 수확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지나가는 사람이 일꾼들에게 축복의 인사를 건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축복할 만한 수확이 없습니다.
시인은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이 결국 아무런 풍성한 열매를 남기지 못하고, 여호와야훼의 복을 받은 삶으로 인정받지도 못하는 모습을 바랍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시편 전체를 관통하는 말의 대조도 있습니다. 첫 절에서 시인은 「이스라엘이여, 이제 이렇게 말하십시오」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말합니다. 자신의 고난을 기억하고, 여호와야훼의 의로움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에서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복을 비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고난을 겪은 공동체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마지막에는 열매 없는 풀 앞에서 축복의 인사가 들리지 않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모든 원수에게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저주를 선언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축복의 인사를 하지 않는 장면을 그립니다. 다만 여기서 모든 원수가 영원히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수 없다는 교리적 결론을 끌어내서는 안 됩니다. 시편은 억압하는 자들의 번영과 지배가 끝나기를 바라는 소망을 표현하지, 각 개인의 최종적인 운명을 상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밭고랑과 밧줄, 그리고 지붕 위의 풀
시편 129편에는 세 가지 인상적인 사물이 등장합니다. 밭고랑, 밧줄, 그리고 지붕 위의 풀입니다.
밭고랑은 이스라엘이 겪은 고난의 깊이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밧줄은 끊어졌습니다. 적들의 폭력이 실제였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지만, 그들이 그 폭력을 영원히 계속할 수 있다는 생각은 무너집니다. 마지막에 나타나는 지붕 위의 풀은 그들이 추구하던 번영이 어떻게 끝나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억압하는 자는 다른 사람을 짓밟으면서 자신의 권세를 길게 이어 가려 합니다. 시인은 바로 그 권세가 지속되지 못하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다시는 다른 사람의 삶을 자기들의 밭처럼 갈아엎을 수 없게 되는 것, 그것이 시인이 바라보는 미래의 중요한 모습입니다.
고난의 기억은 공동체를 침묵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고백하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장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실은 여전히 첫 부분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살아남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나를 이기지는 못했다」는 말은 인간이 어떤 상처도 받지 않을 만큼 강해질 수 있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을 무너뜨릴 듯한 힘 앞에서도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의 백성을 위해 일하셨다는 고백입니다.
이스라엘의 등에 고랑을 내던 자들은 오랫동안 그 일을 계속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고랑을 끝없이 이어 가지 않습니다.
4절에서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의 밧줄을 끊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는 다른 밭이 펼쳐집니다.
그곳은 기름진 들판이 아니라 메마른 지붕입니다. 풀은 자라나지만 오래가지 못합니다. 거두는 사람의 손은 비어 있고, 묶는 사람의 품에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축복 소리조차 들리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등에 긴 고랑을 내던 자들. 시인은 그들의 밧줄이 끊어지고, 그들의 수확은 텅 비어 있는 모습을 보여 주며 노래를 끝맺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