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135편
이 장의 자리 · 107–150편 · 다섯째 권
숨 없는 우상과 역사를 움직이시는 여호와야훼
시편 135편에는 두 종류의 신이 등장합니다.
한쪽에는 하늘과 땅에서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시고, 바람을 내보내시며, 역사 속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여호와야훼가 계십니다. 다른 한쪽에는 은과 금으로 만들어졌지만 말하지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우상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단순히 여호와야훼가 우상들보다 더 강하시다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한쪽은 세상을 움직이시는 분이고, 다른 한쪽은 사람이 움직여 주어야만 하는 물건입니다. 여호와야훼는 자기 백성을 선택하셨습니다(4절). 그러나 우상은 사람이 직접 만든 것입니다(15절). 여호와야훼를 믿는 백성은 자신들을 선택하신 분을 찬양합니다. 반면 우상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것을 의지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위대함을 능력과 승리만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자기 백성의 처지를 돌아보시고 가엾이 여기시는 분이라는 사실까지 말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이시기 때문에만 찬양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힘을 지닌 분이 자신의 백성을 선택하시고, 역사 속에서 구원하시며,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기 때문에 찬양받으십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는 하나님 자신에게 있습니다
할렐루야!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찬양하라. 찬양하라, 여호와야훼의 종들아,시편 135:1 · 두루새김
여호와야훼의 집에, 우리 하나님의 집 뜰에 서 있는 이들아!시편 135:2 · 두루새김
할렐루야! 여호와야훼는 선하시니, 그 이름을 노래하라, 노래는 즐거우니.시편 135:3 · 두루새김
시편은 「할렐루야」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에서 온 것으로, ‘야를 찬양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야’는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짧게 부르는 형태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할렐루야라고 외친 뒤 곧바로 같은 요청을 반복합니다. 찬양하라는 부름이 거듭됩니다. 마치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모으듯 노래가 시작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히 부르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름은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셨으며, 자기 백성과 어떤 관계를 맺으셨는지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출애굽기 3:15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시며, 그것이 영원히 기억될 이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찬양한다는 것은 소리나 글자 자체를 높이는 일이 아닙니다. 그 이름으로 자신을 알리시고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행동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시편이 곧바로 출애굽과 가나안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성전의 종들에게서 시작되는 찬양
1~2절은 특별히 「여호와야훼의 종들」을 부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집과 그 뜰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앞의 시편 134편에서도 여호와야훼의 집에 서 있는 종들에게 찬양하라는 권면이 주어졌습니다. 시편 134편이 밤의 성전과 복을 비는 장면을 보여 주었다면, 시편 135편은 그곳에서 찬양받으시는 여호와야훼가 어떤 분이신지를 창조와 역사 전체를 통해 설명합니다.
앞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집」이라고 하다가, 이어서 「우리 하나님의 집 뜰」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말에 공동체의 관계가 더해집니다. 여호와야훼는 그저 성전에 모셔진 신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을 왜 찬양해야 할까요? 시인은 먼저 하나님의 성품을 말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로 제시합니다.
3절 마지막의 「그렇게 노래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기 때문입니다」는 히브리어의 짧은 표현을 풀어 옮긴 것입니다. 두루새김은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노래하는 일이 즐겁다는 뜻으로 옮겼습니다. 원문의 표현은 그 이름 자체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강조한다고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시인은 찬양을 무거운 의무로만 제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므로 그분을 찬양하는 일은 마땅하며, 동시에 즐거운 일입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구체적으로 드러났는지가 밝혀집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을 위해 야곱을 고르시고 이스라엘을 귀한 소유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시편 135:4 · 두루새김
야곱과 이스라엘은 여기서 두 민족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은 조상이며(창세기 32:28), 그의 이름은 후손 전체를 가리키는 데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시인은 같은 백성을 두 이름으로 반복하여 부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의 중심은 이스라엘이 어떤 선택을 했는가가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가 그들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소중한 소유」가 된다는 것
「자신의 소중한 소유」(סְגֻלָּה)에 해당하는 말은 특별히 아끼는 소유물이나 귀중하게 여기는 재산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9:5에서 여호와야훼는 온 땅이 자신의 것이지만, 이스라엘이 언약을 지키면 모든 민족 가운데 특별한 소유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7:6에서도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로 선택하셨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시편 135편은 이러한 언약의 언어를 찬양으로 옮깁니다. 이스라엘이 특별한 까닭은 다른 민족보다 본래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신을 위해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인간의 뛰어남으로 바꾸어 버리면 찬양의 중심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던 사람이 결국 자신의 특별함을 찬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말에서 선택하시는 분은 여호와야훼입니다.
그분이 선택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바다 깊은 곳까지
참으로 나는 압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크시고 우리 주님은 모든 신보다 크십니다.시편 135:5 · 두루새김
여기서 시편의 목소리가 잠시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여러 사람에게 찬양하라는 명령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는」이라는 말로 자신의 고백을 합니다. 시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찬양을 요구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자신도 여호와야훼가 위대하시다는 사실을 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여호와야훼가 위대하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찬양을 부릅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하늘과 땅에서, 바다와 모든 깊은 물속에서 원하시는 일은 무엇이든 하셨습니다.시편 135:6 · 두루새김
이 구절은 5절의 선언을 설명합니다. 여호와야훼는 단지 다른 신들보다 조금 더 큰 능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십니다. 그분이 하시는 일은 어떤 특정한 지역이나 자연의 한 부분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 바다와 모든 깊은 물속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이것은 고대인이 이해하던 세계의 여러 영역을 두루 아우르는 표현입니다. 높은 하늘부터 땅과 바다, 그리고 깊은 물속까지 모두 여호와야훼의 뜻과 능력이 미치는 세계입니다.
시인이 「모든 신보다 위대하시다」고 말하는 것을 다른 신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철학적 진술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표현은 고대 세계에서 신으로 섬김받던 모든 대상과 비교해 여호와야훼가 그 누구보다 위대하시다고 선포하는 찬양의 언어입니다.
땅끝에서 구름을 올리시고 비를 위해 번개를 만드시며 곳간에서 바람을 내보내십니다.시편 135:7 · 두루새김
여기에는 세 가지 움직임이 있습니다. 시인의 눈앞에서 하늘의 공기와 날씨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자연을 움직이시는 하나님
시인이 말하려는 중심은 날씨가 생겨나는 과학적인 원리가 아닙니다. 땅끝에서 수분을 머금은 것이 올라오고, 번개가 나타나며, 바람이 불어오는 자연의 움직임이 모두 여호와야훼의 능력 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바람이 어디서 생겨나고 어디로 가는지 쉽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마치 하나님에게 바람을 보관해 두는 창고가 있고, 필요할 때 그곳에서 꺼내시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시편 135편의 창고도 실제로 하늘 어딘가에 바람을 보관하는 건물이 있다는 설명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연을 자유롭게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인간에게 익숙한 이미지로 표현한 것입니다.
「바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루아흐(רוּחַ)입니다. 이 말은 바람을 뜻하지만, 문맥에 따라 숨이나 영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시인은 아직 그 대조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먼저 자연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 속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는지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7절의 「구름」은 구름이나 수증기와 관련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원문이 구름과 안개 가운데 어느 모습을 더 정확히 가리키는지는 완전히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비를 위해 번개를 만드시며」라는 표현도 번개가 비를 발생시키는 물리적 원인이라는 뜻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번개와 비가 함께 나타나는 폭풍의 장면을 묘사하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욥기 38:22에서도 하나님은 눈과 우박의 창고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자연현상이 인간의 통제를 넘어선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창고라는 이미지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예레미야 10:13과 51:16에도 거의 같은 언어로 등장합니다. 두 본문은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는 가운데 이 표현을 사용합니다. 어느 본문이 다른 본문의 표현을 먼저 사용했는지는 이 유사성만으로 확정할 수 없지만, 창조주 여호와야훼를 찬양하는 성경의 언어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집트의 맏이들에서 가나안의 땅까지
이집트의 맏이들을 사람부터 짐승까지 치신 분이십니다.시편 135:8 · 두루새김
시편은 자연 세계에서 역사 속으로 이동합니다.
조금 전까지는 하늘과 땅, 바다와 깊은 물속에서 여호와야훼가 하시는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제는 이집트와 파라오가 등장합니다. 이 사건은 출애굽기 12:29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파라오의 맏아들부터 갇힌 사람의 맏아들, 가축의 첫 새끼까지 죽임을 당한 마지막 재앙입니다.
시인은 마지막 재앙을 먼저 말한 뒤, 9절에서 이집트에 행해진 표징과 놀라운 일들 전체를 언급합니다. 이것은 출애굽기의 사건을 처음부터 차례대로 이야기하려는 방식이 아닙니다. 출애굽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인 심판을 먼저 떠올린 뒤, 이집트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전체적으로 돌아보는 것입니다.
왜 이집트를 직접 부를까요?
9절에는 갑작스러운 말투의 변화가 있습니다.
이집트야, 네 한가운데로, 파라오와 그 모든 신하에게 표징과 놀라운 일들을 보내셨습니다.시편 135:9 · 두루새김
「이집트야」 하고 직접 부릅니다. 그 순간 오래전에 일어난 사건이 현재의 찬양 안으로 들어옵니다. 이집트는 더 이상 이야기 속에만 등장하는 과거의 나라가 아닙니다. 시인이 직접 말을 건네는 대상으로 묘사됩니다.
이스라엘이 경험한 구원은 막연한 옛 전설이 아니라, 구체적인 장소와 통치자들의 이름을 통해 기억되는 사건입니다. 그 사건에는 파라오가 있었고, 그의 종들이 있었으며, 이집트 한가운데에서 행해진 심판이 있었습니다.
다만 이 장면을 읽을 때 출애굽기의 역사와 생명의 문제에서 느끼는 어려움을 지워서는 안 됩니다. 맏아들과 첫 새끼의 죽음은 실제로 수많은 생명의 상실을 포함하는 무서운 심판으로 묘사됩니다. 출애굽기에서 그 심판은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놓아주지 않던 파라오의 통치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이라는 문맥에 놓여 있습니다(출애굽기 5~12장). 그러나 그 문맥을 이해하는 것과 죽음에 관한 모든 윤리적 질문이 사라진다고 말하는 것은 다릅니다.
시편 135편은 그 어려운 문제를 따로 논의하지 않습니다.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당시 강대한 이집트의 권력조차 이스라엘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파라오의 허락이나 호의에서 비롯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야훼가 역사 속에서 행동하셨습니다.
땅을 유산으로 주시기까지
시편은 출애굽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아모리 사람들의 왕 시혼을, 바산 왕 옥을, 가나안의 모든 왕국을.시편 135:11 · 두루새김
시혼은 아모리 사람들의 왕이었고, 옥은 바산의 왕이었습니다. 민수기 21:21-35에는 이스라엘이 이 두 왕과 싸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왕의 땅은 요단강 동쪽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이름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기에 앞서 거쳐야 했던 전쟁의 역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두 왕의 이름을 나열한 뒤, 「가나안의 모든 왕국」을 덧붙입니다. 특정한 왕들과의 전쟁에서 시작하여 가나안의 여러 왕국에 이르는 역사 전체를 하나의 흐름으로 묶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 모든 사건이 어디로 이어지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들의 땅을 유산으로 주셨습니다.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유산으로 주셨습니다.시편 135:12 · 두루새김
12절은 「물려주셨습니다」라는 말을 두 번 사용합니다. 원문에서는 물려받는 땅을 가리키는 ‘유산’이라는 낱말이 두 번 나옵니다. 이 반복은 전쟁과 승리의 이야기가 결국 어디에 도달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은 단순히 이집트에서 빠져나온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살아갈 땅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땅은 정복자가 자신의 힘으로 얻어 낸 전리품으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시인은 여호와야훼가 그것을 물려주셨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받은 땅은 하나님이 주신 유산입니다.
신명기 9:4-6에서도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하는 이유를 자신의 의로움에서 찾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스라엘의 땅은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더 옳게 살았음을 증명하는 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 담긴 전쟁과 살해의 언어를 가볍게 취급해서도 안 됩니다. 시편 135편은 고대 이스라엘이 자신의 출애굽과 정착을 하나님의 구원 역사로 기억하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이 서술을 후대의 어느 민족이나 국가가 다른 사람의 땅을 빼앗거나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일반적인 명령으로 확대할 근거는 본문에 없습니다. 시편이 직접 말하는 것은 특정한 역사 속에서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에게 땅을 물려주셨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위대함을 막연한 능력으로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 능력이 자기 백성의 실제 역사와 삶에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제 그 기억을 하나님의 영원한 이름과 연결합니다.
영원한 이름과 가엾게 여기시는 하나님
여호와야훼, 당신의 이름은 영원합니다. 여호와야훼, 당신은 대대로 기억되십니다.시편 135:13 · 두루새김
여기서 시인은 다시 말의 방향을 바꿉니다.
지금까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여호와야훼가 하신 일을 설명했습니다. 이제는 여호와야훼께 직접 말씀드립니다. 찬양의 내용이 하나님에 관한 설명에서 하나님을 향한 고백으로 바뀝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과 가나안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그저 자기 민족의 과거를 기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역사를 통해 자신들과 관계를 맺으신 여호와야훼를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름과 기억이 함께 등장하는 이유
13절에는 「이름」과 「기억」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에 대한 기억」은 기억하거나 언급하는 일과 관련된 말입니다. 하나님을 부르고 기억하게 하는 그분의 이름과 명성을 가리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은 출애굽기 3:15와 특별히 가깝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시며 그것이 영원한 이름이고 대대로 기억될 이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135:13은 그때의 선언을 찬양의 언어로 되살립니다.
시편은 앞에서 출애굽의 사건을 기억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 하나님의 이름이 영원하고 그분에 대한 기억이 대대로 이어진다고 고백합니다. 출애굽의 역사를 통해 알려진 여호와야훼의 이름이 다음 세대에도 기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고 왕조가 바뀌며 나라의 형편이 달라져도, 여호와야훼의 이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시인은 과거의 사건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을 과거에만 활동하신 분으로 가두지 않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영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이 영원하다는 것은 단지 사람들이 그 이름을 오랫동안 기억한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다음 절이 그 이유를 밝혀 줍니다.
여호와야훼께서 그 백성의 편에 서서 판결하시고 그 종들을 가엾이 여기시기 때문입니다.시편 135:14 · 두루새김
여호와야훼의 위대함은 힘을 행사하시는 능력뿐 아니라, 그 힘을 지닌 분이 자기 백성을 어떻게 대하시는가에서 드러납니다.
「판결하시고」와 「가엾이 여기실」
앞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집트 사람들의 맏아들과 짐승들의 첫 새끼를 치시고 힘센 왕들을 죽이시는 분으로 묘사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시인은 그분이 자기 종들을 가엾이 여기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맞서는 세력을 무너뜨릴 능력을 지니셨을 뿐 아니라, 약해진 자기 백성을 돌아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본문의 두 동사는 하나님이 무조건 자기 백성의 모든 행동을 옳다고 인정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분은 정의롭게 판결하시는 분이시며, 동시에 자기 종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야훼의 위대함은 자기 뜻을 이루실 능력에 있고, 그분의 변함없는 신실하심은 자기 백성을 잊지 않으시는 데 있습니다.
여호와야훼는 판결하시고 가엾이 여기십니다.
우상들은 말하지도, 보지도, 듣지도 못합니다.
조금 더 깊이
14절에는 중요한 해석상의 갈림이 있습니다. 「판결하시고」로 옮긴 동사는 재판하거나 판단한다는 뜻을 지닙니다. 이 동사는 문맥에 따라 누군가에게 잘못을 묻는 심판을 나타낼 수도 있고, 억울한 사람의 권리를 지켜 주는 판결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여호와야훼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판결하시고」라는 번역은 하나님이 백성을 위해 정의로운 판결을 내리신다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하지만 이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심판하신다는 뜻으로 읽는 것도 문법적으로 가능합니다. 「가엾이 여기실」로 옮긴 동사는 문맥에 따라 마음을 돌이키다, 뜻을 바꾸다, 안타깝게 여기다, 위로하다 등의 의미와 관계되는 동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기 종들을 가엾이 여기실 것이라는 읽기와, 그들을 향한 처분을 돌이키신다는 읽기가 가능합니다. 신명기 32:36은 시편 135:14와 거의 동일한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맥에서는 자기 백성의 힘이 사라지고 그들이 아무 힘도 쓰지 못하는 상황이 묘사됩니다. 이 문맥을 고려하면 시편 135:14도 우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처지를 돌아보시고 그들의 편에 서 주시는 방향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는 측면과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측면을 완전히 분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명기 32장에서는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자기 백성을 다시 돌아보시는 하나님의 행동이 함께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손이 만든 신에게는 숨조차 없습니다
민족들의 우상은 은과 금,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입니다.시편 135:15 · 두루새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합니다.시편 135:16 · 두루새김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그 입에는 숨조차 없습니다.시편 135:17 · 두루새김
이 부분에서 시편의 설명은 더욱 날카로워집니다.
지금까지 시인은 여호와야훼가 무엇을 하셨는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우상에 관해서는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우상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요?
고대 세계에서 은과 금은 귀한 금속이었습니다. 신상에 값비싼 재료를 사용하는 것은 그 신의 위엄과 영광을 표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값비싼 재료가 우상을 실제로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고 지적합니다.
그것은 여전히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보다 위대하다고 여기는 존재를 표현하려고 우상을 만듭니다. 그런데 완성된 우상은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에 그곳에 존재합니다. 우상은 인간의 손을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만든 우상을 의지하고 거기에서 도움을 구합니다.
시인은 이 모순을 드러냅니다.
눈과 귀와 입은 있지만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우상에는 입이 있습니다. 그러나 말하지 못합니다.
눈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지 못합니다.
귀가 있습니다. 그러나 듣지 못합니다.
겉으로는 인간의 모습을 지녔지만,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행동조차 할 수 없습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조각상의 기능을 설명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을 신으로 섬기는 행위를 비판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신에게 말을 걸고, 자신의 처지를 보아 달라고 구하며, 기도를 들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출애굽기 3:7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집트에 있는 자기 백성의 고통을 보셨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으며, 그들의 괴로움을 알고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그들의 처지를 아실 뿐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 내려오겠다고 선언하십니다(출애굽기 3:8).
이것이 이스라엘이 기억하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반면 우상들은 인간과 비슷한 얼굴을 지니고 있어도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바람을 내보내시는 분과 숨이 없는 우상
앞에서 7절의 바람에 사용된 히브리어 루아흐가 17절 마지막 문장 「그 입에는 숨조차 없습니다」에서는 숨이라는 뜻으로 등장합니다. 7절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창고에서 바람을 내보내십니다. 17절에서는 우상의 입에 숨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한쪽에는 자연 세계에서 바람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이 계시고, 다른 한쪽에는 숨도 쉬지 못하는 우상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창조와 생명의 문제가 걸려 있습니다. 창세기 2:7에서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빚으신 뒤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십니다. 그 결과 사람은 살아 있는 존재가 됩니다. 반면 시편 135편에서 인간은 금속으로 우상을 만들지만, 그 우상에 생명을 줄 수는 없습니다.
형태를 만들 수는 있지만 살아 있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시고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은 이미 존재하는 재료로 형상을 만들 뿐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것들을 만드는 이들도, 그것들을 의지하는 모든 이도 그것들처럼 되기를.시편 135:18 · 두루새김
사람이 자신이 의지하는 대상처럼 된다는 것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인간이 금속 조각상으로 변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우상이 말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열한 뒤, 그것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도 그와 같은 무능함이 닥친다고 경고합니다. 이것은 의지하는 대상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관한 통찰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의지하는 대상에게 도움과 방향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실제로는 아무것도 보고 듣고 말할 수 없다면, 그 대상에게 자기 삶을 맡기는 사람은 참된 도움을 얻을 수 없습니다.
두루새김이 「될 것입니다」로 옮긴 히브리어 표현은 앞으로 닥칠 결과를 선언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으며, 문맥에 따라 우상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경고의 표현으로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시인은 우상을 의지하는 일이 결코 아무 영향도 없는 행동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믿음은 사람을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이 부분은 시편 115:4-8과 매우 가깝습니다. 그러나 시편 135편은 그 전해 내려온 표현을 특별한 자리에 놓습니다. 바로 앞에서 여호와야훼가 자기 백성을 가엾이 여기실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놓이면서 우상에 대한 비판은 단순히 다른 종교의 조각상을 비웃는 말이 아닙니다.
이 시편이 묻는 것은 더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를 위해 실제로 행동할 수 있는 분은 누구인가요?
이스라엘이 기억하는 여호와야훼는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그분은 이집트에서 자기 백성의 고통을 들으셨고, 역사 속에서 행동하셨으며, 앞으로도 자기 종들을 가엾이 여기실 것입니다.
이를 오늘날의 삶에 연결할 때, 돈이나 권력 또는 인간이 만든 기술을 무조건 우상이라고 부르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시편에서 비판하는 대상은 명확합니다. 사람들이 만든 형상을 신으로 섬기며 그것을 의지하는 행위입니다. 현대의 다른 대상들을 이 본문에 연결하려면 그 차이를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인정한 뒤에도 본문이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실제로 무엇을 가장 깊이 의지하는가요?
이제 모든 집안이 찬양하십시오
이스라엘 집안아, 여호와야훼를 높이라. 아론 집안아, 여호와야훼를 높이라.시편 135:19 · 두루새김
레위 집안아, 여호와야훼를 높이라.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이들아, 여호와야훼를 높이라.시편 135:20 · 두루새김
긴 설명이 끝나자 시인은 다시 찬양을 명령합니다.
처음에는 여호와야훼의 집에 서 있는 종들을 불렀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 집안 사람들, 아론 집안 사람들, 레위 집안 사람들,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차례로 부릅니다. 여기에는 공동체의 범위를 넓혀 가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집안 사람들은 언약 백성 전체를 가리킵니다. 아론 집안 사람들은 제사장 가문입니다. 레위 집안 사람들은 성전에서 여러 가지 일을 맡는 레위 사람들과 관계됩니다. 마지막의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 표현이 반드시 이스라엘 밖에서 여호와야훼를 섬기는 이방인들만을 뜻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포함하는 넓은 호칭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마지막에 특정한 혈통이나 맡은 일이 아니라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부른다는 점은 의미가 있습니다. 찬양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성전에서 맡은 일이나 가문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자신에게 맡겨진 거룩한 일을 수행하지만, 여호와야훼를 찬양하는 일에는 온 이스라엘이 함께 참여합니다.
또한 19~20절에서는 「여호와야훼를 찬양하십시오」라는 명령이 네 번 반복됩니다. 시편은 마지막에 새로운 설명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미 충분히 이유를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남은 일은 그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시온에서 시작되는 마지막 찬양
예루살렘에 계시는 여호와야훼께서 시온에서 높임을 받으시기를. 할렐루야!시편 135:21 · 두루새김
시편의 중간에서는 하늘과 땅, 바다와 깊은 물속까지 하나님의 능력이 미치는 세계를 펼쳐 보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다시 시온으로 돌아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시온에만 제한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온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자신의 이름을 두시고 예배받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시편 132편에서 여호와야훼는 시온을 자신이 머무실 곳으로 선택하셨다고 선언하셨습니다(132:13-14). 시편 135편의 마지막은 그 사실을 바탕으로 예루살렘에 계시는 여호와야훼가 시온에서 찬양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134:3에서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여호와야훼가 시온에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기를 빕니다. 시편 135:21에서는 시온에서 여호와야훼가 찬양받으시기를 빕니다. 복을 주시는 방향과 찬양이 향하는 방향이 서로 마주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과 찬양을 주고받는 거래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먼저 선택하시고, 그들의 역사 속에서 행동하셨습니다. 백성은 그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 숨 없는 우상들 앞에서 울려 퍼지는 찬양
시편 135편은 아주 조용한 대조 하나를 마음에 남깁니다.
사람이 만든 우상에는 입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눈이 있지만 보지 못하고, 귀가 있지만 듣지 못합니다. 심지어 입에는 숨조차 없습니다. 그 우상들은 값비싼 은과 금으로 만들어졌고 정교한 형상을 지녔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반면 여호와야훼는 바람을 창고에서 내보내시는 분이십니다. 하늘과 땅에서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시고, 이집트의 강대한 왕권을 무너뜨리셨으며, 이스라엘에게 살아갈 땅을 물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의 힘이 약해질 때에도 그들을 위해 판결하시고 가엾이 여기실 분으로 노래되십니다.
시편은 이 두 모습을 나란히 놓고 누가 참으로 찬양받기에 합당한지 보여 줍니다.
우상은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자기 백성을 선택하셨습니다.
우상은 사람이 움직여야 움직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하늘과 땅을 움직이십니다.
우상은 사람의 부르짖음을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자기 종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시편이 찬양하는 하나님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힘을 가진 분이시면서, 동시에 자기 백성의 연약함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분을 기억하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 마지막 말은 처음과 같습니다.
「할렐루야!」
처음의 할렐루야는 찬양하라는 부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독자는 왜 찬양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창조 세계가 펼쳐졌고, 이집트와 가나안의 역사가 지나갔으며, 하나님의 영원한 이름과 자기 백성을 가엾이 여기시는 마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만든 우상들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 소리는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우상들과 선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우상들은 침묵합니다.
그러나 살아 계신 여호와야훼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이름을 부릅니다.
숨조차 없는 우상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지만, 생명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신 여호와야훼를 찬양합니다.
시온에서 그 찬양이 울려 퍼집니다.
할렐루야.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