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풀어 읽기 · 94편

이 장의 자리 · 90–106편 · 넷째 권

불의를 법으로 만드는 왕좌 앞에서

시편 94편에는 두 개의 왕좌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왕좌입니다. 다른 하나는 법을 내세워 사람들을 해치는 「악한 왕좌」입니다. 두루새김에서 두 번째 왕좌는 단순히 법을 무시하는 권력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 권력은 「법을 내세워 해로운 일을 꾸미는」 권력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법을 내세워 해로운 일을 꾸미는 악한 왕좌가 주님과 손잡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시편 94편 전체를 꿰뚫습니다.

세상에는 스스로 정의롭다고 주장하는 권력이 있습니다. 그들은 말을 쏟아 내고 자신의 힘을 뽐내며,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행동을 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현실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땅을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부릅니다.

시편 94편이 묻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불의를 알고 계시는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알고 계신다면, 어째서 불의한 자들이 여전히 힘을 행사하도록 두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시인은 이 질문에 간단히 답하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한 일을 되갚아 달라고 간청하면서도, 하나님의 판단을 기다리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함께 보여 줍니다.

앞선 시편 93편은 하나님께서 왕으로 다스리시며 그 왕좌가 흔들리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시편 94편은 바로 그 왕권을 불의가 가득한 현실에 비추어 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왕이시라면, 그분의 백성을 짓누르는 권력을 어떻게 판단하실까요?

시의 흐름은 이 질문을 따라 움직입니다. 처음에는 악한 사람들의 폭력을 고발하고 하나님께 심판을 요청합니다(1–7절). 이어 하나님께서 보지 못하신다는 악한 사람들의 주장을 반박하고(8–11절), 하나님께 바로잡힘을 받으며 판단을 기다리는 사람의 복을 말합니다(12–15절). 그런 다음 시인은 자신이 무너질 뻔했던 경험과 하나님의 도움을 고백하고(16–19절), 마지막에는 불의한 권력과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결코 한편이 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20–23절).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심판만이 아닙니다. 심판이 늦어지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가르치시고, 붙드시고, 위로하신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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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을 갚으시는 하나님, 빛나며 나타나 주십시오

시편 94:1–3 본문 →

시편은 강렬한 호소로 시작합니다.

되갚으시는 하나님, 여호와야훼, 되갚으시는 하나님, 빛을 발해 주십시오.시편 94:1 · 두루새김
땅을 심판하시는 분이여, 일어나 주십시오. 교만한 자들에게 그들이 한 대로 갚아 주십시오.시편 94:2 · 두루새김

「악을 갚으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현대 독자에게 낯설거나 불편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악을 갚는다는 말을 들으면 흔히 분노에 휩싸여 상대에게 되갚는 행동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여기서 시인이 하나님께 요청하는 일은 개인적인 분풀이와 구별해야 합니다.

그 의미는 바로 다음 절에서 분명해집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땅을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부릅니다. 악을 갚으시는 하나님과 땅을 심판하시는 분은 서로 다른 분이 아닙니다. 같은 하나님을 두 가지 방식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시인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원한을 대신 풀어 주는 강한 후원자가 아닙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판단을 내리실 온 땅의 재판관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에서 악에 대한 마지막 판단은 개인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한에 속합니다. 따라서 시인은 스스로 보복을 실행하겠다고 선언하는 대신 하나님께 심판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1절에는 「빛나며 나타나 주십시오」라는 조금 특이한 요청이 하나 더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나타나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공의를 드러내셔서, 악한 사람들이 더 이상 그분의 판단을 무시하지 못하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이것은 「야께서는 보지 않으신다」는 7절의 악한 사람들의 말과 연결됩니다.

악한 사람들이 보지 못하신다고 여기는 하나님께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도록 자신을 드러내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3절에서는 기다림의 고통이 터져 나옵니다.

여호와야훼여, 언제까지 악한 자들이, 언제까지 악한 자들이 기뻐 날뛰겠습니까?시편 94:3 · 두루새김

시인은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뻐하며 날뛰고 있다는 사실을 문제 삼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행동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없습니다. 오히려 성공을 즐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이 아직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제까지」를 두 번 되풀이하는 이 반복 속에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불신보다, 그 공의가 언제 드러날지 알 수 없는 사람의 절박함이 담겨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조금 더 깊이

「악을 갚으시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낱말은 보복이나 응징을 가리키는 복수형 명사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악행에 대해 마땅하게 대응하시고 잘못을 바로잡으시는 행위와 연결됩니다. 신명기 32:35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악을 갚고 행한 대로 되돌리는 일이 자신에게 속한다고 선언하십니다. 「빛나며 나타나」에 해당하는 낱말은 빛나거나 찬란하게 나타나는 모습을 가리키며,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시는 모습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신명기 33:2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나타나시는 모습을 빛의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시편 50:2에서도 하나님께서 빛을 발하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보지 않으신다고 믿는 사람들이 하는 일

시편 94:4–7 본문 →

시인은 이제 악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들은 거만한 말을 쏟아 내며 떠들고 악을 일삼는 자들은 하나같이 으스댑니다.시편 94:4 · 두루새김

첫 번째 특징은 말입니다. 본문은 단순히 말이 많은 사람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힘을 뽐내고, 다른 사람을 얕보며,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제 자랑을 하는 태도를 보여 줍니다.

이 거만함은 곧 실제적인 폭력으로 이어집니다.

여호와야훼여, 그들이 당신의 백성을 짓누르고 당신의 몫인 이들을 괴롭힙니다.시편 94:5 · 두루새김
과부와 다른 나라에서 와 사는 이를 죽이고 고아들을 살해합니다.시편 94:6 · 두루새김

시인은 악한 사람들의 행동을 막연히 죄악이라고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누가 피해를 당하고 있는지 밝힙니다. 이 세 집단은 구약의 율법에서 반복적으로 특별히 보호해야 할 사람들로 등장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가족과 친족 중심 사회에서 과부와 고아는 생계를 유지하거나 권리를 주장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와 사는 사람 역시 그곳의 친족 관계와 소유한 땅이 부족하여 부당한 대우를 받기 쉬웠습니다. 사회의 보호에서 밀려나기 쉬운 사람들이었기에 율법은 그들의 권리를 특별히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이 세 집단의 등장은 단순히 시인의 동정심을 자극하기 위한 장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호하라고 명령하신 사람들에게 악한 사람들이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짓누르면서도, 그 백성이 하나님께 속한다는 사실을 무시합니다. 시인은 피해자들에게 죄가 없기 때문에만 그들을 보호해 달라고 간구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 상기시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의 생명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인이 지금 고발하는 폭력이 하나님과 백성이 맺은 관계까지 짓밟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악한 사람들은 왜 이처럼 거리낌 없이 행동할까요?

7절에서 그들의 생각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야는 보지 않으신다. 야곱의 하나님은 알아차리지 못하신다.」시편 94:7 · 두루새김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들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르신다고 믿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더라도 자신들에게 아무런 판단을 내리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정확히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낳는 실제적인 결과는 분명합니다.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책임질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더 이상 두려워할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거만한 말을 쏟아 내고, 약한 사람을 짓누르고, 심지어 생명을 빼앗으면서도 기뻐합니다.

악한 사람들의 가장 깊은 어리석음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행동을 판단하지 않으실 것처럼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 말을 듣고 다시 하나님께 간청하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악한 사람들을 향해 직접 말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 22:21–24에서는 다른 나라에서 와 사는 사람을 억누르지 말고 과부와 고아를 괴롭히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신명기 10:18에서는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를 위해 공정하게 판단하시고 다른 나라에서 와 사는 사람을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신명기 24:17에서도 다른 나라에서 와 사는 사람과 고아의 재판을 왜곡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귀를 만드신 하나님이 듣지 못하시겠느냐

시편 94:8–11 본문 →

백성 가운데 미련한 자들아, 깨달아라.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언제 슬기로워지겠느냐?시편 94:8 · 두루새김

시인은 악한 사람들이 힘이 부족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혜가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을 만큼 강합니다. 자기 생각을 실현할 수 있는 힘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근본적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신들의 행동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어리석음을 드러내기 위해 시인은 두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귀를 심으신 분이 듣지 않으시겠느냐? 눈을 빚으신 분이 보지 않으시겠느냐?시편 94:9 · 두루새김

귀에 대해서는 「심으신」이라고 표현합니다. 원문의 동사는 나무나 식물을 심는 데 사용하는 동사입니다. 그런데 눈에 대해서는 「빚으신」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야차르(⁨יָצַר⁩)라는 동사가 사용되는데, 흙으로 무엇인가를 빚거나 형태를 만드는 일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창세기 2:7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빚으셨다고 할 때에도 같은 동사가 사용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귀와 눈을 만드셨다는 사실을 서로 다른 창조의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이 질문의 힘은 인간에게 있는 능력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인간은 귀로 듣고 눈으로 봅니다. 그런데 그 귀와 눈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을 전혀 알지 못하신다는 주장은 시인의 눈에 어리석게 보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감각과 알아보는 능력을 만드신 분이므로 그분을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로 생각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10절에서는 이 질문이 더욱 넓어집니다.

민족들을 바로잡으시는 분이 꾸짖지 않으시겠느냐? 그분은 사람에게 지식을 가르치신다.시편 94:10 · 두루새김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는지가 문제였습니다. 이제는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동하시는지가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신다는 사실은 단순히 정보를 얻으신다는 뜻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분은 알고 계시는 것에 대해 올바르게 판단하시는 분입니다.

11절은 악한 사람들에 대한 반박을 마무리합니다.

여호와야훼는 사람의 생각을 아신다. 그 생각이 한낱 입김임을 아신다.시편 94:11 · 두루새김

「입김」은 숨이나 입김처럼 덧없고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모든 생각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일반적인 선언으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앞의 문맥에서 특별히 문제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지 못하시고 알아차리지 못하신다는 악한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판단을 확신하며 거만하게 행동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생각이 얼마나 덧없는지 알고 계십니다. 인간은 자신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여 오래 지속될 것 같은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 앞에서 그 계획은 한순간의 입김처럼 사라질 수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알지 못하신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까지 아십니다.

이것이 7절에 대한 시인의 대답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께서 모르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판단을 드러내지 않으셨다고 해서, 그분이 아무것도 보지 못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시인은 여기서 다시 방향을 바꿉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사람을 꾸짖으신다는 사실을 말한 직후, 하나님께 바로잡힘을 받는 사람이 복되다고 선언합니다.

조금 더 깊이

「입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전도서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낱말과 같습니다. 전도서에서는 인간의 삶과 수고가 지닌 덧없음과 이해하기 어려운 성격을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 시편 94편에서는 사람의 생각들을 묘사합니다.

심판을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께 배우는 사람

시편 94:12–15 본문 →

야여, 당신이 바로잡으시고 당신의 가르침으로 깨우치시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시편 94:12 · 두루새김

악한 사람들이 아무런 두려움 없이 날뛰는 현실에서 갑자기 복 있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복은 뜻밖입니다. 하나님께 바로잡힘을 받는 것이 복이라고 말합니다.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악한 사람들을 심판하시기를 구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가르치시는 일을 찬양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주제 전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악에 대해 행동하시는 방식이 두 방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악을 일삼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판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배우려는 사람에게는 잘못을 바로잡는 일과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바로잡으시고」는 잘못을 고치기 위해 가르치거나 징계한다는 뜻을 지닙니다. 반드시 가벼운 충고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가르침」은 지시와 가르침을 뜻하며, 문맥에 따라 하나님의 율법을 가리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바로잡으시는 일과 그분의 가르침을 함께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바로잡으실 때, 단지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무엇이 옳은지를 깨닫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바로잡힘을 받는 사람이 왜 복이 있을까요? 13절이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악한 자를 위한 구덩이가 파일 때까지 고통의 날들을 벗어나 쉬도록 그를 깨우치십니다.시편 94:13 · 두루새김

악한 사람을 위한 구덩이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악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판단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하나님의 백성이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쉼을 주십니다.

그 쉼이 재앙 자체에서 벗어나게 되는 일인지, 재앙이 계속되는 동안 누리는 마음의 평온까지 포함하는지는 엄격하게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악한 사람에 대한 판단이 완전히 이루어지기 전에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돌보십니다.

하나님의 판단이 늦어지는 시간은 그분이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분은 자신의 백성을 가르치시고, 바로잡으시고, 쉼을 주십니다.

다만 이 구절을 근거로 사람이 겪는 모든 고통을 하나님께서 그 개인의 잘못을 고치기 위해 보내신 징계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하나님께 바로잡힘을 받는 사람이 복되다고 선언하지만, 모든 고난의 원인을 하나하나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이 시에서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내용은 앞부분과 연결됩니다.

악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보지 못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로잡힘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악한 사람들은 자신의 힘이 지속될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바로잡힘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올바르게 판단하실 것임을 배웁니다.

그러한 지혜가 재앙의 날들을 견디는 쉼과 연결됩니다.

14절에서는 이 쉼의 가장 깊은 근거가 드러납니다.

참으로 여호와야훼께서는 자기 백성을 내버리지 않으시고 자기 몫인 이들을 저버리지 않으십니다.시편 94:14 · 두루새김

5절에서 시인은 악한 사람들이 「주님의 백성」을 짓누르고 「주님께 속한 사람들」을 괴롭힌다고 했습니다. 1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내버리지 않으시고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을 저버리지 않으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악한 사람들의 행동과 하나님의 행동이 정면으로 대비됩니다.

악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짓누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악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결코 고통받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이미 그들의 고통을 구체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그 대신 그 고통이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끝내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고난을 겪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닙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저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15절은 이 믿음이 향하는 미래를 보여 줍니다.

참으로 재판은 정의로 돌아오고 마음이 곧은 이들은 모두 그 뒤를 따를 것입니다.시편 94:15 · 두루새김

「재판」은 판단이나 법정에서 내리는 판결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이 「올바르게」(⁨צֶדֶק⁩)로 풀어 옮긴 낱말은 올바름과 정의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시인은 재판과 정의가 다시 일치하기를 기대합니다.

이 표현이 중요한 까닭은 당시의 현실에서 그 둘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재판이라는 이름으로 불의한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법을 이용해 다른 사람을 짓누를 수도 있습니다. 판결이 내려졌다고 해서 반드시 정의가 실현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왜곡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어지는 「그 뒤를」이 원문의 재판과 의로움 가운데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한정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문맥의 중심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올바른 판단이 회복되고, 마음이 곧은 사람들이 그 판단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악한 사람들에게 벌을 주는 것보다 넓은 희망입니다. 불의한 판단이 바로잡히고, 사람들이 다시 올바른 질서를 따라 살아가는 세계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악한 사람들의 몰락만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의가 제자리를 찾기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정의가 아직 완전히 나타나지 않은 현실에서, 시인 자신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요? 이제 그는 자신의 경험을 들려줍니다.

조금 더 깊이

「쉬게 하시려는」에 해당하는 원문은 조용하게 하거나 평온하게 한다는 뜻의 동사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두루새김은 「재앙의 날들에서 벗어나 쉬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옮겼습니다. 원문은 문맥상 하나님께서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평온함과 안정을 주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5절 원문에서는 히브리어의 압축적인 표현 때문에 이를 재판이 의로움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읽거나, 정의로운 판단의 회복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재판이 다시 올바르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풀어 옮겼습니다.

발이 미끄러질 때 붙드시는 한결같은 사랑

시편 94:16–19 본문 →

누가 나를 위해 악한 자들에게 맞서 일어나겠습니까? 누가 나를 위해 악을 일삼는 자들에게 맞서 서겠습니까?시편 94:16 · 두루새김

이 구절에서 시인은 다시 자신의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앞에서는 공동체가 당하는 폭력을 고발했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직접 위험에 처한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2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일어나십시오」라고 간청했습니다. 16절에서는 「누가 나를 위해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맞서 일어나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두 구절의 히브리어 동사가 같지는 않지만, 적대적인 세력 앞에서 누군가 일어나 행동하기를 바라는 모습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16절의 질문에는 뚜렷한 대답이 없습니다. 시인은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이 자신을 도왔다고 소개하지 않습니다. 17절에서 비로소 대답이 나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나의 도움이 되어 주지 않으셨다면 하마터면 내 영혼은 침묵 속에 머물 뻔했습니다.시편 94:17 · 두루새김

시인은 자신의 생명이 얼마나 위태로웠는지 돌아봅니다. 시편 94:17은 시인이 생명을 잃을 만큼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었다는 고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떤 사건을 겪었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는 살아남았습니다.

자신의 능력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공정한 판단을 이론적으로만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실제로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는 순간에 하나님의 도움을 경험했다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18절에는 그 경험이 더욱 생생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내 발이 미끄러진다」 하고 말할 때면 여호와야훼,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이 나를 붙듭니다.시편 94:18 · 두루새김

높은 곳이나 위험한 길에서 발이 미끄러지면 사람은 중심을 잃습니다. 발이 미끄러진다는 것은 아직 완전히 넘어지지 않았지만 곧 넘어질 수 있는 위태로운 순간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언제 나타나는가입니다. 시인이 자신의 발을 다시 굳게 세우고 난 뒤가 아닙니다. 그가 미끄러지고 있다고 말하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흔들리는 사람을 붙드십니다.

이는 앞부분에서 하나님께서 백성을 바로잡으시고 쉼을 주신다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도움은 언제나 모든 문제를 즉시 없애는 방식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붙드시는 방식으로도 나타납니다.

19절에서는 위험의 장소가 바뀝니다.

내 안에 걱정이 가득할 때 당신의 위로가 내 영혼을 기쁘게 합니다.시편 94:19 · 두루새김

앞에서는 악한 사람들이 밖에서 시인을 위협했습니다. 이제는 그의 안에 많은 걱정이 있습니다. 바깥의 위협이 마음속 고통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마음이 언제나 평온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걱정이 많았다고 고백합니다. 앞에서 하나님의 공정한 판단을 담대하게 선언했던 사람도 마음속에 걱정이 가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모순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걱정을 경험하지 않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쁘게 합니다」(⁨שָׁעַע⁩)에 해당하는 동사는 즐거움을 주거나 기쁨을 누리게 한다는 뜻을 지닙니다. 시인은 단순히 걱정이 줄어들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마음에 기쁨을 가져왔다고 말합니다.

바깥의 불의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불의를 겪는 사람의 마음을 돌보실 수 있습니다. 시인은 아직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선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이미 하나님의 도움과 위로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미래의 심판만이 아닙니다. 오늘 무너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로가 불의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체념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시인은 자신의 마음에 위로를 얻었다고 해서 악한 사람들의 행동을 잊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음 절에서 다시 가장 심각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불의가 권력과 법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깊이

「죽음의 침묵」으로 옮긴 히브리어 낱말은 고요함이나 침묵을 가리킵니다. 문맥에서는 죽음의 침묵을 떠올리게 할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이 문맥의 의미를 드러내어 옮겼습니다. 시편 115:17에서도 죽은 사람들과 침묵 가운데 내려가는 사람들이 연결됩니다. 19절의 「걱정」에 해당하는 낱말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복잡하고 불안한 생각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낱말의 정확한 의미와 어원에는 불확실한 점이 있지만, 여러 생각으로 마음이 어지러운 상태를 표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법을 내세워 해로운 일을 꾸미는 왕좌

시편 94:20–21 본문 →

법을 내세워 고통을 빚어내는 파멸의 왕좌가 당신과 손잡을 수 있겠습니까?시편 94:20 · 두루새김

시인은 불의한 개인이 저지르는 잘못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왕좌를 말합니다.

왕좌는 나라를 다스리는 권력과 공적인 권위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왕좌는 정의를 세우는 자리가 아닙니다. 사람을 파멸로 몰아가는 자리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어떤 통치자가 법을 어기고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과 다릅니다. 법과 제도를 사용하여 폭력을 정당화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겉으로는 법에 따른 판결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정해진 절차를 거쳤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제도가 죄 없는 사람을 해치는 수단이 됩니다.

「법을 내세워」라는 부분에는 알레 호크라는 구문이 사용됩니다. 호크는 정해진 규칙이나 법을 가리킵니다. 앞의 전치사를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따라, 법에 근거하여 해로운 일을 만들어 낸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법을 거슬러 해로운 일을 저지른다는 뜻으로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두 해석 가운데 두루새김은 법을 내세워 해로운 일을 꾸민다는 의미를 선택했습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죄 없는 사람에게 부당한 판결을 내리는 장면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읽기는 문맥과 잘 어울립니다. 시인이 고발하는 것은 정의를 위한 제도가 오히려 불의를 만들어 내는 상황입니다.

20절에서 「해로운 일을 꾸미는」으로 옮긴 원문의 동사는 야차르에서 나왔습니다. 바로 9절에서 하나님을 「눈을 빚으신 분」이라고 할 때 사용한 것과 같은 동사입니다.

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눈을 빚으셨습니다.

20절에서 불의한 권력은 해로운 일을 꾸밉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눈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악한 권력은 자신에게 주어진 제도의 힘을 이용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칩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분이라고 여기는 어리석음을 비판했습니다. 이제는 정의를 세우기 위해 존재해야 할 왕좌가 오히려 해로운 일을 만들어 내는 어리석음을 고발합니다.

시인은 대답을 요구하는 형식으로 말하지만, 기대하는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으로 다스리신다는 사실이 세상의 모든 권력 행사를 무조건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권력을 가진 자리가 있다고 해서 그 자리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권력이 실제로 무엇을 행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시편 94편은 모든 권력을 부정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법적으로 인정받는 권위와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을 구별하게 합니다.

권력은 법의 형식을 갖출 수 있지만, 그 형식만으로 정의로운 권력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21절은 그러한 불의한 권력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 보여 줍니다.

그들은 의로운 이의 목숨을 노려 몰려들고 죄 없는 이에게 죽음을 선고합니다.시편 94:21 · 두루새김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소한 행정적 잘못이나 불완전한 판단 정도가 아닙니다. 사람의 생명입니다. 시인은 법적 판단이 생명을 보호하기보다 빼앗는 수단이 된 현실을 고발합니다.

법은 공정한 판단과 생명의 보호를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약한 사람을 짓누르는 도구가 된다면, 그 권력은 하나님의 의로운 다스림과 일치한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시편 93편의 하나님의 왕좌와 시편 94편의 악한 왕좌는 단순히 권력의 크기만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 성격이 서로 다릅니다. 하나님의 왕좌는 공정한 판단이 나오는 곳입니다. 악한 왕좌는 법을 이용하여 해로운 일을 만들어 냅니다.

그렇기에 시인은 그 두 왕좌가 결코 한편이 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장면은 열왕기상 21장에 기록된 나봇의 사건과도 의미 있게 연결됩니다. 나봇은 자신의 포도원을 아합 왕에게 넘기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세벨은 왕의 이름으로 편지를 쓰고 도장을 찍어 나봇을 모함하는 절차를 마련했습니다. 거짓 증인들이 나봇을 고발했고, 나봇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열왕기상 21:8–13). 이 사건에서 불의는 아무런 형식도 없는 폭력으로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공적인 절차와 증언, 공동체의 판단이라는 겉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시편 94편이 이 사건을 직접 배경으로 삼았다고 말할 근거는 없습니다. 다만 두 본문은 공적 권위와 법적 절차가 어떻게 불의의 도구로 뒤틀릴 수 있는지 함께 보여 줍니다. 이사야 10:1–2에서도 불의한 법을 만들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빼앗으며 과부와 고아를 약탈하는 사람들에 대한 고발이 등장합니다. 이사야 1:17에서는 정의를 구하고 학대받는 사람을 도우며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위해 나서라고 명령합니다. 미가 6:8에서는 정의를 행하고 한결같은 사랑을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 요구됩니다. 이처럼 구약의 여러 본문은 정의를 단순히 법이 있다는 사실과 같다고 보지 않습니다. 시편 94편 자체는 이러한 행동을 세부적으로 명령하지 않지만, 그 명령들이 왜 필요한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불의를 미워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불의를 되돌리시는 분

시편 94:22–23 본문 →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는 나의 높은 요새가 되셨고 나의 하나님은 내가 몸을 피할 바위가 되셨습니다.시편 94:22 · 두루새김

20–21절에서 시인은 불의한 권력이 생명을 빼앗는 모습을 고발했습니다. 그런데 22절은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그 권력의 손에 생명이 위협받는 현실과는 다른 경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높은 피난처」는 적의 공격이 쉽게 미치지 못하는 장소를 떠올리게 합니다. 「바위」 역시 쉽게 무너지지 않는 단단함을 나타냅니다. 시인은 자신이 높은 곳에 올라가 안전을 확보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높은 피난처가 되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앞에서 자신의 발이 미끄러질 때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붙들어 주었다는 경험과 연결됩니다. 시인은 흔들리지 않는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실제로 미끄러질 뻔했고, 죽음의 침묵 속에 머물 만큼 생명이 위태로웠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바위가 되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바위라는 모습은 시인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그를 붙들어 주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굳건하신지를 고백하는 표현입니다.

마지막 23절에서는 시인의 시선이 다시 악한 사람들에게 향합니다.

그들의 악행을 그들에게 돌려주셨고 그들의 악으로 그들을 없애 버리실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을 없애 버리실 것입니다.시편 94:23 · 두루새김

시의 첫머리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교만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한 일을 되갚아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행을 되돌리셨다고 말합니다. 2절의 「되갚아 주십시오」(⁨שׁוּב⁩), 15절의 「재판이 다시 올바르게 이루어질」, 23절의 「되돌리셨고」, 이 세 표현은 원문에서 같은 어근으로 이어지며 시 전체에 하나의 흐름을 형성합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한 일을 되갚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중간에서는 재판이 다시 올바르게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마지막에는 악행이 악한 사람들에게 되돌아간다고 선언합니다.

시인은 잘못된 질서가 바로잡히기를 기대합니다. 악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판단에서는 그 악행이 자신들에게 되돌아갑니다. 자신들이 만들어 낸 악의 결과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직접 상대에게 똑같은 폭력을 행사해도 된다는 허락이 아닙니다. 시의 처음부터 끝까지 악을 되갚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시인은 개인적인 복수의 권한을 자신에게 가져오지 않습니다.

23절 앞부분의 「되돌리셨고」는 이미 이루어진 행동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이어서는 「그들을 없애 버리실 것입니다」라고 미래의 일을 선언합니다. 이미 경험하거나 확신한 하나님의 판단과 앞으로 이루어질 심판을 함께 노래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확신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악한 사람들의 현재 권세가 마지막 말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3절 끝에는 같은 선언이 반복됩니다. 이 반복은 시의 마지막을 매우 강한 어조로 마무리합니다. 불의를 끝내실 분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밝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시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도 기억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문제였던 것은 과부와 다른 나라에서 와 사는 사람과 고아들이 살해당하는 현실이었습니다. 시인이 기대하는 심판은 막연하게 힘을 과시하는 일이 아닙니다. 생명을 짓밟는 불의를 하나님께서 끝내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2절에서 「되갚아 주십시오」로 옮긴 원문에는 돌아가다·되돌리다 계열의 동사가 사용됩니다. 15절은 원문에서 재판이 의로움으로 돌아간다고 표현하며, 여기에도 같은 어근이 쓰입니다. 그리고 23절에서도 하나님께서 악행을 그들에게 「되돌리셨고」라고 말할 때 같은 어근이 사용됩니다.

두 왕좌 사이에서

시편 94:1–23 본문 →

시편 94편은 하나님께 일어나 달라는 기도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르면 불의한 왕좌가 하나님과 손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선언합니다. 시의 처음과 끝은 서로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불의한 권력은 그분의 동맹이 될 수 없습니다.

시편 94편이 특별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늦어지는 시간을 자세히 다룬다는 점입니다. 악한 사람들이 당장 사라지지 않습니다. 재판이 즉시 올바르게 이루어지지도 않습니다. 시인은 그 사이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정한 판단을 믿는다는 것은 현실의 불의를 모른 척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불의를 정확히 드러내어 하나님께 고발하는 일입니다. 동시에 그 공정한 판단이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배우고 그분의 도움을 의지하는 일입니다.

시인이 하나님께 보복을 요청한다고 해서 모든 분노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고발하는 악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있습니다. 약한 사람을 짓누르는 폭력,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행위, 법을 악용하는 권력입니다. 이 시를 자신의 경쟁 상대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저주를 퍼붓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본문의 방향과 다릅니다.

악한 왕좌는 다른 사람을 짓누르기 위해 법을 이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끄러지는 사람을 붙드십니다.

악한 왕좌는 죄 없는 사람을 죽이라고 판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생명이 위태로운 사람에게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불의한 왕좌가 여전히 높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명령이 내려지고 판결이 선고되며 사람들의 운명이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의 생명을 그 왕좌의 손에 최종적으로 맡기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을 붙들어 주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불의한 권력은 사람을 넘어뜨릴 수 있지만, 시인은 그 권력보다 높은 곳에 자신의 피난처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 높은 곳은 사람이 빼앗아 차지한 왕좌가 아닙니다.

그를 붙들어 주신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