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1–7장 · 예루살렘에서 시작
식탁에서 의회까지
사도행전 6장은 교회의 성장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첫 절에서 들려오는 것은 불평입니다. 「제자들이 늘어나면서」 그리스 말을 쓰는 유대 사람들이 히브리 말을 쓰는 유대 사람들에게 불평했습니다. 날마다 생활을 돕는 일에서 자기들 쪽 과부들이 제대로 도움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뜻밖의 시작입니다.
앞 장에서 사도들은 감옥에 갇히고 매질을 당하면서도 예수님에 관해 가르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외부의 반대에도 공동체는 계속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공동체 안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문제는 교리가 아닙니다. 누가 더 훌륭한 신앙을 가졌느냐는 논쟁도 아닙니다. 사도행전 4:34에서 누가는 공동체 안에 가난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기록했는데, 이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선 기록이 거짓이었을까요? 그렇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누가는 이전의 공동체가 아무 문제도 없는 상태에 도달했다고 선언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것을 나누어 필요한 사람들을 돕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공동체가 커지면서 기존의 나눔 방식에서 문제가 드러난 것입니다. 함께 나누려는 마음이 있다고 해서 그 나눔이 반드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전달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는 이 문제를 감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불평에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끝에서는 일곱 사람 가운데 한 명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다가 의회 앞에 서게 됩니다.
식탁의 문제가 어떻게 의회에서 예수님과 성전과 율법에 관한 논쟁으로 이어지는 것일까요? 그 흐름을 따라가면 초대 교회가 어떤 공동체로 형성되어 갔는지, 그리고 성령이 어떤 사람들을 통해 예수님의 일을 드러내셨는지를 새롭게 발견하게 됩니다.
같은 예수님을 믿었지만, 같은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리스 말을 쓰는 사람들과 히브리 말을 쓰는 사람들
누가는 불평이 누구에게서 나왔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합니다.
그 무렵 제자들이 늘어나면서, 그들 가운데 그리스 말을 쓰는 유대 사람들이 히브리 말을 쓰는 유대 사람들에게 불평했습니다. 날마다 생활을 돕는 일에서 자기들 쪽 과부들이 제대로 도움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6:1 · 두루새김
원문의 두 낱말은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그리고 유대인의 전통적인 언어와 문화에 더 가까운 사람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구절은 그리스어를 주로 쓰는 유대인 신자들과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를 주로 쓰는 유대인 신자들의 구별로 이해합니다. 다만 언어만이 유일한 기준이었는지, 생활 방식과 문화적 배경의 차이까지 포함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당시 지중해 세계의 여러 지역에는 유대인 공동체가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은 그리스어를 사용했고, 그리스어로 번역된 성경을 읽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그런 지역에서 온 사람들도, 유대 땅의 전통적인 언어와 관습에 더 익숙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이 그들이 사용하던 언어나 오랫동안 형성된 생활 방식의 차이를 즉시 없애 주지는 않았습니다. 문제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차이가 공동체의 실제적인 나눔과 연결되었다는 점입니다.
왜 하필 과부들이었을까요?
하나님이 특별히 돌보라고 하신 사람들
고대 사회에서 과부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이기 쉬웠습니다. 모든 과부가 가난했던 것은 아니지만, 남편을 잃은 뒤 생계를 유지할 수단이나 자신을 보호해 줄 가족이 없는 사람에게는 공동체의 도움이 절실했습니다.
구약에서 과부가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출애굽기 22:22–24에서 하나님은 과부와 고아를 괴롭히지 말라고 명하시고, 신명기 10:18에서는 고아와 과부를 위해 공의를 행하시는 분으로 소개됩니다. 신명기 24:19–21은 추수하는 사람들이 곡식과 열매를 남겨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가 먹을 수 있도록 하라고 명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에서 과부를 돌보는 일은 단순히 개인이 베푸는 자선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인지를 보여 주는 삶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을 믿는 공동체 안에서 일부 과부들이 제대로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제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누가 일부러 그들을 차별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원문은 과부들이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수동형으로 기록하고, 두루새김도 「제대로 도움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로 옮겨 누가 그렇게 했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의도적인 차별이 확인되지 않는다고 해서 실제로 발생한 소홀함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가 제기되었고, 공동체는 그 문제를 다루어야 했습니다.
누가는 누구에게 잘못이 있는지 추적하는 대신, 공동체가 이 문제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음식을 나누는 일」과 「말씀을 전하는 일」
사도들은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을까?
열두 사도가 제자들을 모두 불러 모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제쳐 두고 음식을 나누는 일을 맡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사도행전 6:2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자칫 오해하기 쉽습니다. 사도들이 말씀을 전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식탁을 돌보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음 절들을 보면 사도들이 나눔의 문제를 가볍게 여겼다고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문제를 인정하고, 바로 그 일을 책임질 사람들을 세우자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라는 매우 높은 자격을 요구합니다. 식탁을 돌보는 일이 누구나 대충 해도 되는 하찮은 일이었다면, 왜 그렇게 높은 자격을 요구했을까요?
원문에서는 1절의 「날마다 생활을 돕는 일」과 4절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같은 그리스어 명사 디아코니아(διακονία)가 쓰이고, 2절의 「음식을 나누는 일」에도 같은 어근의 동사가 쓰입니다. 세 표현은 모두 섬김이라는 의미를 공유합니다.
둘 다 섬김입니다.
다만 무엇을 섬기는가가 다릅니다. 한쪽은 공동체의 식탁과 나눔을 책임지는 섬김이고, 다른 한쪽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섬김입니다. 사도들이 구별한 것은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책임을 가진 두 섬김입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일을 계속 맡는 것이 좋은 일이었을까?
사도들은 이미 하고 있던 일을 완전히 포기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계속 수행하기 위해 다른 역할을 맡을 사람들을 세우려 합니다.
사람이 적을 때에는 소수의 지도자들이 여러 일을 함께 맡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늘어나고 돌봄의 대상이 다양해지면 모든 일을 같은 사람들이 책임지는 방식에 한계가 생깁니다. 사도행전 6장은 그러한 조직의 문제가 드러난 사례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단순히 효율적인 업무 분담을 소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일을 나누어 맡는 방식에도 공동체의 신앙이 반영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사도들은 자신들만 중요한 일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제자들을 모두 불러 모아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남자 일곱 명을 찾아 뽑으십시오. 우리가 그들에게 이 일을 맡기겠습니다.」사도행전 6:3 · 두루새김
「여러분 가운데서」 「찾아 뽑으십시오」라는 말로 사도들은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공동체 전체를 참여시킵니다. 뽑힌 사람들에게 일을 맡기는 최종적인 역할은 자신들이 하겠다고 하지만, 누구를 뽑을지 살펴 찾는 일은 제자들에게 맡깁니다. 불평하는 사람들을 꾸짖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새로운 책임자를 세우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지도자가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하는 것이 반드시 가장 충실한 지도력은 아닙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역할을 맡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는 것이 공동체를 더 잘 섬기는 방법이 됩니다.
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어야 했을까?
과부들에게 음식을 나누거나 도움에 필요한 돈을 관리할 사람이라면 성실하고 계산을 잘하는 사람으로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본문은 그 이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지만,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하면 그 요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물품을 나누는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의 신뢰와 공평함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누가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살펴야 하고,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부당하게 소외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공동체가 그 일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일을 맡는 사람에게는 좋은 평판뿐 아니라 지혜가 필요합니다.
누가는 성령을 설교하거나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능력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식탁을 책임지는 사람들에게도 성령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강단과 기도 자리에서만 일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공평하게 돌보는 일에도 그분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이 「음식을 나누는 일」로 옮긴 표현의 원어 낱말은 음식을 먹는 식탁을 가리킬 수 있고, 돈을 다루는 상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일은 음식을 직접 나누어 주는 일일 수도 있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데 필요한 돈과 물품을 관리하는 일을 포함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 업무를 세부적으로 구분하지 않지만, 과부들이 날마다 받는 도움과 관련된 일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공동체는 일곱 사람을 세운다
일곱 사람의 이름이 모두 그리스식이라는 사실
사도들의 제안은 공동체의 동의를 얻습니다.
모인 사람들은 모두 이 제안을 좋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스데반과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그리고 안디옥 출신으로 유대교를 받아들인 니골라를 뽑았습니다. 스데반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사도행전 6:5 · 두루새김
일곱 사람의 이름은 모두 그리스식 이름입니다. 처음에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이 그리스 말을 쓰는 이들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공동체가 그들의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을 책임자로 세웠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에도 그리스식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도인 안드레와 빌립도 그런 예입니다. 따라서 일곱 사람을 전부 그리스 말을 쓰는 집단의 대표였다고 단정하기보다는, 그들의 이름이 이 사건의 언어적·문화적 배경과 잘 어울린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마지막 사람인 니골라에 대해서는 누가가 「안디옥 출신으로 유대교를 받아들인」 사람이라는 정보를 덧붙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유대인이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누가가 왜 니골라에게만 이런 설명을 붙였는지는 밝히지 않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출생과 혈통만으로 구성된 집단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작은 단서입니다.
스데반은 왜 특별히 소개되는가?
처음에 사도들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을 소개할 때에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스데반이 다른 여섯 사람보다 반드시 더 뛰어났다는 뜻이라기보다, 곧 이어질 이야기에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 주는 역할을 합니다.
8절에서 그는 은혜와 능력이 가득한 사람으로 등장하고, 10절에서는 사람들이 그가 성령에 힘입어 지혜롭게 하는 말을 반박하지 못합니다. 스데반에 관한 이야기는 이런 표현들을 따라 발전합니다. 그는 단순히 행정적인 책임을 맡은 사람이 아니라, 성령이 함께하시는 증인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이 일곱 사람을 초기 집사 직분의 출발점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6장은 그들을 직접 「집사」라고 부르지 않고, 그런 직함을 뜻하는 명사도 이 장에 쓰이지 않습니다. 이 사건을 집사 직분의 역사적 선례로 이해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직분의 모든 후대적 형태와 규정을 여기서 직접 찾을 수는 없습니다. 누가는 이 사람들의 직함보다 어떤 자격을 갖추고 무슨 일을 맡았는지에 관심을 둡니다.
손을 얹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이들을 사도들 앞에 세웠습니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손을 얹었습니다.사도행전 6:6 · 두루새김
성경에서 손을 얹는 행동은 여러 의미로 사용됩니다. 민수기 27:18–23에서는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손을 얹어 지도자로 세우고, 사도행전에서도 손을 얹는 행동은 사람을 축복하거나, 치유하거나, 사명을 맡기거나, 성령과 관련된 사건에서 나타납니다. 여기서는 공동체가 선택한 사람들을 특정한 책임에 세우면서 하나님께 그들을 맡기는 행위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원문에서는 기도하고 손을 얹은 사람들의 주어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일곱 사람을 사도들 앞에 세웠다는 문맥에서 사도들이 손을 얹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고 두루새김도 그렇게 옮겼지만, 공동체가 그 행위에 참여한 것으로 읽는 가능성도 남아 있습니다.
공동체가 사람들을 찾아 뽑았고, 그들이 맡을 일은 사도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확인되었으며, 기도와 손을 얹는 행동을 통해 그 일을 맡게 됩니다. 누가는 제도적인 조직도를 길게 설명하지 않지만, 공동체가 중요한 책임을 어떻게 함께 맡기고 인정했는지는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매우 짧은 문장 하나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점점 널리 퍼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점점 널리 퍼졌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많은 제사장도 예수를 믿고 따랐습니다.사도행전 6:7 · 두루새김
누가는 제자들의 수가 늘었다고 말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널리 퍼졌다고 기록합니다. 원문은 이 자리에 「자라다」(αὐξάνω)라는 뜻의 표현을 써서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을 살아 있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그 말씀이 전해지고 사람들 사이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 확대된다는 의미이고, 두루새김의 「점점 널리 퍼졌습니다」는 그 뜻을 풀어 줍니다.
이 문장이 놓인 자리가 중요합니다. 바로 앞에서는 말씀을 전하는 일과 음식을 나누는 일이 구별되고 각각의 섬김을 책임질 사람들이 세워졌습니다. 본문은 일곱 사람을 세운 것만이 성장의 유일한 원인이었다고 밝히지 않지만, 이야기의 배치는 공동체의 필요를 돌보는 일과 말씀을 전하는 일이 서로 경쟁하지 않고 함께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제자들이 늘어나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널리 퍼지고,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납니다.
성장은 공동체 안의 문제를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다룬 뒤에도 성장은 계속됩니다. 누가는 성장 자체를 무조건적인 성공으로만 제시하지 않고, 성장 가운데 생기는 문제와 그 문제를 다루는 공동체의 행동까지 함께 보여 줍니다.
제사장들도 믿고 따랐다
7절 마지막에는 「많은 제사장도 예수를 믿고 따랐습니다」라는 뜻밖의 정보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성전의 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붙잡고 심문하는 사람들로 자주 등장했습니다.
이 한 줄은 성전의 제사장들은 모두 예수님을 반대했고 평범한 사람들만 예수님을 믿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없게 만듭니다. 제사장들 가운데에는 사도들을 반대한 사람도,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누가는 그들이 어떤 경로로 믿게 되었는지 기록하지 않지만, 예수님에 관한 증언이 기존의 종교적 지위나 소속에 따라 한결같이 받아들여지거나 거절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처럼 희망적인 성장의 모습을 기록한 직후, 다시 새로운 갈등으로 이야기를 옮깁니다. 이번에는 제사장이나 사도가 아니라, 앞에서 세워진 일곱 사람 가운데 한 명인 스데반이 중심에 등장합니다.
식탁을 맡도록 세워진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다
스데반은 식탁만 돌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스데반은 은혜와 능력이 가득하여 백성 가운데서 큰 기적과 표징을 행했습니다.사도행전 6:8 · 두루새김
누가는 스데반이 과부들을 돌보는 일을 어떻게 수행했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기적과 표징을 행하는 사람들로 주로 등장한 이들은 사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공동체의 실제적인 돌봄을 맡도록 세워진 일곱 사람 가운데 하나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그가 맡은 일을 버리고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는 공동체 안에서 실제적인 섬김을 맡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사람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앞에서 사도들이 두 섬김을 구별한 것을, 두 종류의 사람을 엄격히 나누어 서로의 일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규칙으로 읽으면 곤란합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실제적인 필요를 다루기 위한 책임 분담이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도 기적을 행하고 말씀을 증언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활동 때문에 새로운 반대에 부딪힙니다.
이번에는 어떤 사람들이 스데반에게 맞섰는가?
그런데 이른바 ‘해방된 사람들과 구레네와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의 회당’에 속한 사람들과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이 나서서 스데반과 논쟁했습니다.사도행전 6:9 · 두루새김
이들은 유대 땅 밖의 여러 지역과 연결된 유대인들입니다. 「해방된 사람들」은 노예였다가 자유를 얻은 사람이나 그 후손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 회당은 그런 배경을 가진 유대인 공동체의 회당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들은 단순한 외국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들입니다.
처음의 갈등은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 말을 쓰는 사람들과 히브리 말을 쓰는 사람들 사이의 문제였습니다. 이제는 그리스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큰 해외 유대인 공동체와 스데반 사이에 논쟁이 일어납니다. 스데반과 그들이 비슷한 배경을 지녔을 가능성도 있지만, 본문은 스데반의 출신 지역이나 소속 회당을 밝히지 않으므로 그렇게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논쟁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데반이 성령에 힘입어 지혜롭게 하는 말을 반박할 수 없었습니다.사도행전 6:10 · 두루새김
사도들이 일곱 사람을 세우면서 요구했던 성령과 지혜가 여기서 다시 등장합니다. 처음의 자격은 막연한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스데반이 실제로 말씀을 증언하는 자리에서 그 자격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1:12–15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의 이름 때문에 붙잡혀 회당과 권력자들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대적들이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말과 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스데반에게 일어난 일은 그 말씀과 강하게 연결됩니다. 누가가 강조하는 것은 스데반의 논쟁 기술이나 지식이 아니라 「성령에 힘입어 지혜롭게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이 반대자들의 태도를 바꾸어 놓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논쟁에서 이기지 못하자 다른 방법을 사용합니다.
조금 더 깊이
9절이 하나의 회당에 속한 여러 출신 지역의 사람들을 열거하는지, 아니면 서로 다른 회당들의 구성원들을 함께 언급하는지는 원문의 문장 구조를 두고 논의가 있습니다.
좋은 증언을 받은 사람과 거짓 증인들
말을 반박하지 못하자 사람들을 사주한다
그러자 그들은 몰래 사람들을 시켜 이렇게 말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사도행전 6:11 · 두루새김
공개적으로 스데반의 주장을 반박하는 대신, 그들은 직접 논쟁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다른 사람들이 스데반을 고발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바꿉니다. 유대인들에게 모세는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인물이었고, 그 율법은 이스라엘의 삶을 규정하는 토대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혐의는 하나님이 알려 주신 말씀과 이스라엘 신앙의 근본을 거스른다는 혐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백성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을 부추기고, 마침내 스데반을 붙잡아 의회로 끌고 갑니다. 사도행전 5:26에서 성전 경비대장은 백성에게 돌로 맞을까 두려워 사도들을 힘으로 끌고 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스데반을 붙잡는 일에는 백성을 부추기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가는 여론의 변화가 어느 정도였는지 설명하지는 않지만, 개인적 논쟁이 공개적인 고발과 심문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이 장에서 가장 날카로운 원어의 반복
3절에서 사도들은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뽑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이 의회에 끌려간 뒤 누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은 거짓 증인들을 내세웠습니다. 증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르는 말을 그치지 않습니다.」사도행전 6:13 · 두루새김
원문에서 3절의 「평판이 좋고」(μαρτυρέω)는 사람들에게 좋은 증언을 받는다는 뜻이고, 13절의 「거짓 증인들」(μάρτυς)도 같은 증언 계열의 낱말을 씁니다. 스데반은 공동체에서 좋은 증언을 받은 사람으로 선택되었는데, 이제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거짓 증인들을 내세웁니다.
같은 사람이 전혀 다른 증언의 대상이 됩니다.
누가는 어느 증언이 참인지 판단할 단서를 이미 제공했습니다. 스데반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고, 반대자들은 그의 말을 반박할 수 없어 몰래 사람들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누가는 고발하는 이들을 직접 「거짓 증인들」이라고 부릅니다.
교회는 평판이 좋은 사람을 세웠습니다. 반대자들은 거짓 증인을 내세웠습니다. 그렇다면 의회는 누구의 말을 듣게 될까요?
성전과 율법을 거스른다는 고발
「이 사람이 『이 나사렛 사람 예수가 이곳을 허물고 모세가 우리에게 전해 준 관습을 바꿀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6:14 · 두루새김
고발의 내용은 성전, 그리고 모세의 율법과 관습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제사드리고 기도하는 중심 장소였고, 모세의 율법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르침의 토대였습니다.
이 말이 전부 거짓이었을까요, 아니면 스데반이 실제로 말한 내용을 왜곡한 것일까요? 누가는 고발자들을 거짓 증인이라고 부르지만, 스데반이 이전에 성전과 율법에 관해 어떤 표현으로 말했는지는 기록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고발은 실제로 논의될 수 있는 성전과 율법의 문제를 하나님과 모세에 대한 모독이라는 혐의로 바꾸어 놓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왜곡의 구체적인 정도를 이 장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고발은 예수님의 부활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율법을 이해하는 방식에도 중대한 질문을 던진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신 일이 참이라면, 이스라엘의 신앙과 역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스데반을 향한 고발은 바로 그 문제를 피할 수 없게 만듭니다.
하지만 누가는 아직 스데반의 답변을 들려주지 않습니다. 대신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시선을 묘사합니다.
조금 더 깊이
누가복음 21:5–6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장차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예고하는 것과 예수님 자신이 성전을 허무시겠다고 선언하시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또 누가복음 6:1–11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관한 사람들의 해석과 충돌하셨지만, 누가복음 16:17에서는 율법의 작은 한 부분도 함부로 무너지는 일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존의 율법 해석 사이에 실제 긴장이 있었지만, 그 긴장을 예수님께서 율법 전체를 부정하셨다는 말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바라보았다
의회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스데반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이 본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 같았습니다.사도행전 6:15 · 두루새김
사도행전 6장은 이 문장으로 끝납니다.
스데반이 무엇이라고 대답했는지, 모독했다는 고발을 어떻게 반박할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고발하는 사람들은 이미 증언을 마쳤고, 이제 모든 사람의 눈이 고발당한 사람의 자리에 선 그에게 향해 있습니다.
「천사의 얼굴」을 어떤 해석에서는 그의 얼굴에 실제로 빛나는 영광이 나타났다고 보고, 다른 해석에서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평온함과 위엄, 두려움 없는 태도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본문은 얼굴이 빛났다고도, 평온한 표정이었다고도 기록하지 않으므로, 그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해석자의 상상에 속합니다.
성경에서 천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자입니다. 그렇다면 이 표현은 스데반이 누구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른다는 혐의를 받는 사람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자처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의회에 앉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모세의 권위를 지키는 자리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마련한 고발의 자리에서,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 같았습니다. 누가는 그들이 두려워했는지, 놀랐는지, 스데반에게 죄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모두가 그 얼굴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나타내는 사건을 본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도 사람들은 기적을 보고 놀라워했지만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일을 막으려 했습니다. 누가는 그 판단을 뒤로 미룹니다.
조금 더 깊이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에 쓰인 원문의 동사는 사람들이 하늘을 바라보거나(1:10), 베드로가 걷지 못하는 사람을 바라보거나(3:4), 군중이 사도들을 바라볼 때(3:12) 쓰인 동사와 같습니다. 출애굽기 34:29–35에서 모세는 하나님과 말씀을 나눈 뒤 얼굴에서 빛이 나는 모습으로 백성 앞에 나타나고, 누가복음 9:29에서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얼굴의 모습이 달라지고 옷이 빛납니다. 모세를 모독했다는 혐의를 받는 스데반이 모세의 얼굴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점은 중요한 문학적 연결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가르치시고, 능력으로 놀라운 일을 행하시고,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하신 뒤 붙잡혀 심문받으셨습니다. 스데반의 이야기는 예수님을 따르는 증인의 삶이 어떤 모습을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기 시작하지만, 이 장에서 아직 그의 심문은 시작되지 않았으므로 그가 예수님과 완전히 같은 일을 겪는다고 미리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식탁에서 의회까지 — 한 사람을 따라 드러나는 말씀의 길
6장의 두 이야기는 같은 스데반을 따라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처음에 공동체는 제대로 도움을 받지 못하는 과부들을 돌보기 위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으로 그를 세웠고, 마지막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일 때문에 심문받고 있습니다. 식탁을 돌보는 일과 말씀을 전하는 일은 서로 경쟁하는 두 세계가 아니라, 성령이 함께하시는 한 사람의 삶 안에서 함께 나타날 수 있는 섬김이었습니다.
성령이 함께하신다는 것이 반드시 모든 갈등을 피하게 해 준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장에서 성령은 스데반이 아무런 반대를 받지 않도록 만드는 힘이 아니라, 반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게 하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누가는 6장을 한 장면에서 멈춥니다.
의회가 열려 있습니다. 스데반을 고발한 사람들은 그가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한다고 주장합니다. 스데반은 아직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의회에 앉은 모든 사람이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이 본 것은 거짓 증인들의 말이 아니라 스데반의 얼굴이었습니다.
과부들의 식탁을 돌보기 위해 세워졌던 사람이 이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앞에 서 있습니다. 의회는 그의 말을 들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천사의 얼굴과 같은 모습으로 그들 앞에 서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