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풀어 읽기 · 7장
이 장의 자리 · 1–7장 · 예루살렘에서 시작
성전 밖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이야기
대제사장이 스데반에게 묻습니다.
대제사장이 물었습니다. 「이 말이 사실이냐?」사도행전 7:1 · 두루새김
짧은 질문이지만 스데반에게는 매우 중대한 질문입니다. 그는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고,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한다는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거짓 증인들은 스데반이 나사렛 예수가 성전을 허무시고 모세에게서 내려온 관습을 바꾸실 것이라고 말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성전을 존중한다고 해명할 수도 있고, 자신이 모세의 율법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설명할 수도 있고, 증인들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반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어느 것부터도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는 「영광의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라는 말로, 그것도 아브라함이 아직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스데반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처음 언급한 곳은 가나안도, 예루살렘도, 성전도 아닌 메소포타미아입니다.
이야기를 따라가면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요셉과 함께 계시고,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시며, 시나이산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다 연설의 거의 끝에 이르러서야 솔로몬이 지은 성전이 등장하고, 그때 스데반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 살지 않으십니다」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가 필요하냐는 질문보다 깊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을 사람이 정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시는 곳에서 사람이 그분을 만나는가?
그리고 이 질문과 함께 또 하나의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팔려 갔지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모세는 자기 백성에게 거절당했지만 하나님이 그를 구원자로 보내셨습니다. 예언자들은 박해받았고, 마침내 의로우신 분도 죽임당하셨습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 자신이 어떻게 거절해 왔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직접 「여러분의 조상들이 그랬듯이 여러분도 그렇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대제사장은 스데반이 하나님과 모세를 거스르는 사람인지 물었습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따라가며 오히려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슬러 왔는지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장에는 그보다 더 깊은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를 이야기하던 스데반이 마지막 순간에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고, 그곳에서 인자이신 예수님을 봅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는 말로 시작한 연설이, 스데반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장면으로 끝나 갑니다.
이 두 장면 사이에 이스라엘의 긴 역사가 놓여 있습니다.
아브라함 — 땅을 소유하기 전부터 함께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약속의 땅 밖에서 먼저 나타나셨다
스데반이 대답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어른 여러분, 들어 주십시오. 영광의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에 자리 잡기 전, 아직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였습니다.」사도행전 7:2 · 두루새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거룩한 장소를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12:1–3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부르심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땅과 친척들을 떠나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명하십니다. 스데반은 이 이야기를 압축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하란 이전,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되었다고 강조합니다.
스데반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직 약속의 땅에 들어오지 않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곳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도 아직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율법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먼저 있었고, 그 말씀을 따라가는 사람의 역사가 뒤따랐습니다.
약속은 있었지만 발 디딜 자리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아브라함에게 발 디딜 만큼의 땅도 소유로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이 땅을 아브라함과 그의 뒤를 이을 자손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에게는 아직 자식이 없었습니다.」사도행전 7:5 · 두루새김
땅이 없습니다.
자식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땅과 자손을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보여 주신 땅에 도착했지만, 그 땅이 곧바로 자기 소유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약속은 분명히 주어졌지만,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완전히 소유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지금 스데반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 살고 있고 예루살렘 성전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땅의 소유나 성전의 존재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은 아직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을 만났고, 그가 가진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이어서 그 자손이 겪게 될 고난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남의 나라 땅에서 나그네로 살 것이며, 그곳 사람들이 사백 년 동안 그들을 노예로 삼아 괴롭힐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도행전 7:6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창세기 15:13–14의 예고를 바탕으로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이집트에서 괴롭힘을 당할 것을 미리 말씀하셨고, 그들을 노예로 부리는 민족을 심판하고 자기 백성을 건져 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곧바로 편안하고 안정된 삶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자손과 땅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의 역사는 오히려 나그네 생활과 노예 생활로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실패한 것일까요?
스데반은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고난을 미리 말씀하셨고, 그들을 건져 내실 것도 약속하셨습니다. 그분이 약속을 지키신다는 사실은 백성이 한 번도 어려움을 겪지 않는 방식이 아니라, 그들이 낯선 땅에서 고난을 겪는 동안에도 하나님이 약속을 잊지 않으신다는 데서 드러납니다.
그리고 8절에서 할례의 언약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고, 그 약속의 표지로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때도 성전은 없었고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기 전이었지만,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는 이미 언약 관계가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스데반이 나중에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을 책망할 때 의미를 갖게 됩니다. 할례는 처음부터 하나님과의 언약을 나타내는 표지였지만, 그 표지를 지닌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자동으로 보장되지는 않았습니다.
스데반은 이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어떻게 살아갔는지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 11:31은 아브라함의 가족이 갈대아 사람들의 우르를 떠나 하란에 자리 잡았다고 기록하고, 창세기 12장에서는 하란 이후의 여정이 이어집니다. 아브라함의 부르심을 하란 이전으로 이해하는 것은 창세기와 사도행전을 함께 읽는 전통적인 해석 가운데 하나지만, 창세기의 서술 순서만으로 그 부르심이 정확히 언제, 몇 차례 있었는지 모두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 7절의 「이곳에서 나를 예배할 것이다」는 창세기 15장의 문장 그대로가 아니라, 창세기 15:14의 출애굽 약속에 출애굽기 3:12의 예배 약속이 결합된 형태로 읽힙니다. 출애굽기에서 그 예배의 장소는 시나이산입니다. 스데반은 서로 다른 시점에 주어진 말씀을 한데 모아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전하고 있습니다.
요셉 — 형제들이 버린 사람과 함께하신 하나님
약속을 받은 집안에서 시샘이 시작되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이삭에서 야곱으로, 야곱에서 열두 지파의 조상들로 이야기를 이어 갑니다. 그런데 열두 지파의 조상들에게 이르자 처음으로 형제들 사이의 갈등이 등장합니다.
「이 조상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이집트로 팔아넘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계셨고,」사도행전 7:9 · 두루새김
스데반의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이들의 이름은 이스라엘이 어떤 민족인지를 보여 주는 역사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그들을 이상적인 신앙의 영웅으로만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 형제를 팔아넘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말이 이야기를 뒤집습니다. 형제들에게 버림받고 약속의 땅에서도 멀어진 요셉과 하나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곳은 가나안 땅에만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고, 이제 이집트에서 요셉과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형제들에게 거절당한 요셉을 통해 그 형제들을 구원할 길을 마련하십니다.
형제들이 거절한 사람이 형제들을 살리다
요셉은 이집트에서 고난을 겪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지혜를 주시고 파라오에게 호의를 얻도록 하셨습니다. 그는 마침내 이집트와 파라오의 집안 전체를 다스리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이집트와 가나안에 먹을 것이 떨어집니다. 야곱의 가족은 곡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집트로 내려갑니다. 그곳에 자신들이 팔아넘겼던 요셉이 있습니다.
「야곱은 이집트에 곡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 우리 조상들을 처음으로 그곳에 보냈습니다.」 「그들이 두 번째로 갔을 때 요셉은 형제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밝혔습니다. 파라오도 요셉의 가족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사도행전 7:12–13 · 두루새김
형제들은 처음에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이 팔아넘긴 사람이 지금 자신들을 살릴 수 있는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두 번째 방문에서야, 자신들이 거절했던 형제가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는 사람이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이야기와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사람들이 거절하고 죽음에 넘긴 예수님을 하나님이 일으키셨고, 그분을 구원자로 높이셨다는 사도들의 선포와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가 본래부터 예수님의 생애를 일대일로 예언하는 암호였다는 뜻은 아닙니다. 창세기 37–50장은 먼저 야곱의 가족이 어떻게 이집트에 이르게 되었고, 형제들의 악한 행동 속에서도 하나님이 어떻게 생명을 지키셨는지를 들려줍니다. 창세기 50:20에서 요셉은 형제들이 자신에게 악을 행하려 했지만 하나님은 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선한 결과를 이루셨다고 고백합니다.
스데반은 그 역사를 다시 들려주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들 가운데 있는 구원의 도구를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하고 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흐름은 뒤이어 등장하는 모세 이야기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집트에서 끝난 조상들의 삶
스데반은 야곱과 그 자손들이 이집트로 내려가 「그곳에서 야곱도 우리 조상들도 죽었습니다」라고 간결하게 말합니다. 이 역시 처음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생각하게 합니다. 땅을 약속받았지만, 그 자손들은 약속의 땅 밖에서 살아가고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한 세대 안에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집트에 있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기를 멈춘 것은 아닙니다. 14절의 숫자와 16절의 무덤 이야기에는 창세기의 기록과 다른 부분이 있지만, 그 차이를 억지로 없애려 하기보다 스데반이 조상들의 역사를 어떤 방향으로 이야기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았지만 땅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거절당했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셨습니다. 야곱의 가족은 이집트에서 살아갔고, 그곳에서 여러 세대의 역사가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은 이제 그 약속의 때가 가까워지는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조금 더 깊이
14절의 「일흔다섯 명」은 창세기 46:27과 출애굽기 1:5의 히브리어 전통에 나타나는 일흔 명과 다르며, 그리스어 계열의 일흔다섯 명이라는 전승과 일치합니다. 또 16절에서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세겜에서 하몰의 아들들에게 무덤을 샀다고 말하지만, 창세기 23:16–20에서 아브라함은 헤브론의 막벨라 굴을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샀습니다. 세겜에서 하몰의 아들들에게 땅을 산 사람은 창세기 33:19의 야곱이며, 여호수아 24:32는 요셉의 뼈가 그곳에 묻혔다고 기록합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번역 문제가 아니며, 7:16에는 창세기에 따로 기록된 땅을 산 이야기와 시신을 묻은 이야기들이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연설이 여러 사건을 압축하면서 서로 다르게 전해진 이야기들을 합쳤다는 설명이 있고, 창세기에 기록되지 않은 별도의 매입 이야기가 전해졌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견해도 있지만, 후자를 확정할 독립적인 근거는 부족합니다. 실제로 어느 과정에서 이 차이가 생겼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모세 — 구원하러 온 사람을 누가 지도자로 세웠느냐고 물었다
약속이 가까워질수록 고난이 깊어진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이루어질 때가 가까워지면서, 이집트에 사는 우리 백성의 수는 점점 늘어났습니다.」사도행전 7:17 · 두루새김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이 등장합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고, 그들의 갓난아기가 살아남지 못하도록 내다 버리게 합니다. 출애굽기 1장에 기록된 고난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 고난의 한가운데서 모세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들려줍니다.
「이 무렵에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아기였습니다. 모세는 석 달 동안 아버지의 집에서 자랐습니다.」사도행전 7:20 · 두루새김
이스라엘의 남자아이들이 생명의 위협을 받던 시기에 모세는 살아남습니다. 버려진 뒤에는 파라오의 딸에게 거두어집니다. 이스라엘의 아이들을 죽이려 했던 파라오의 집안에서, 장차 이스라엘을 이끌어 낼 모세가 자랍니다.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백성을 구원할 일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모세는 이집트 사람들의 모든 지혜를 배우고 말과 행동에 힘이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는 이집트 왕실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지만,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어느 편에 설 것일까요?
모세는 이미 자기 백성을 구원하려 했다
마흔 살이 되었을 때 모세는 자기 동족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한 이스라엘 사람이 부당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보고 그를 도와주다가 이집트 사람을 쳐 죽입니다.
이 행동은 도덕적으로 간단하게 평가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부당하게 짓눌리는 사람을 보호하려는 뜻은 있었지만, 그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도 남습니다. 스데반은 그 행동을 정당화하는 논증 대신, 모세가 당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설명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 동족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그들이 알아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사도행전 7:25 · 두루새김
출애굽기 2장은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을 때리는 이집트 사람을 죽였다고 기록하지만, 그가 그때 이미 자신이 백성을 구원할 사람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고 직접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스데반은 모세가 동족을 구하려는 마음으로 행동했지만, 그들이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석합니다.
이 해석이 왜 중요한지는 다음 장면에서 드러납니다. 다음 날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끼리 싸우는 자리에 나타나 「여러분은 형제 사이인데, 왜 서로 해를 입히나요?」라며 그들을 화해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이웃에게 해를 입히던 사람이 모세를 밀치며 말했습니다. 『누가 너를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느냐?』」사도행전 7:27 · 두루새김
이 질문이 모세 이야기의 전환점이 됩니다.
모세는 자기 백성에게 다가갔지만, 그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가 자신들의 문제에 개입할 권한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스데반은 조금 뒤에 거의 같은 표현을 다시 사용할 것입니다.
모세가 물러나고 약속의 땅에서도 멀어진다
모세는 이집트 사람을 죽인 일이 알려지자 달아나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가 됩니다. 여기서 앞선 조상들의 삶과 닮은 모습이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땅을 떠났고, 요셉은 형제들에게 팔려 이집트로 갔고, 모세는 자기 백성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미디안으로 달아납니다.
세 사람의 처지가 모두 같은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떠났고, 요셉은 형제들에게 팔렸으며, 모세는 살인 사건 뒤에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과 구원의 역사가 이스라엘의 땅과 제도 바깥에서도 계속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동안 두 아들을 낳습니다. 그리고 사십 년이 흐릅니다.
자기 동족에게 거절당했던 그 사람을 하나님이 다시 부르십니다.
신발을 벗어라 — 광야가 거룩한 땅이 되다
모세가 서 있던 곳은 왜 거룩했는가?
사십 년이 지난 뒤, 시나이산 광야에서 모세는 가시덤불 가운데 타오르는 불꽃을 봅니다. 출애굽기 3장의 장면입니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자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나는 네 조상들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 모세는 두려워 떨며 감히 바라보지 못했습니다.」사도행전 7:32 · 두루새김
이 선언이 스데반의 연설 전체를 하나로 묶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과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은 같은 분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있는 곳은 이집트도 가나안도 아닌 시나이산 광야입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신발을 벗어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다.』」사도행전 7:33 · 두루새김
왜 거룩할까요?
그 땅에 성전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이미 그 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곳에서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성전을 모독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들려주는 역사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기 오래전부터 하나님이 사람들을 만나고 계시고, 이스라엘 땅 밖의 광야를 거룩한 땅이라고 부르십니다. 이 장면은 무엇이 어떤 장소를 거룩하게 하는지 묻게 합니다.
거룩함의 근원은 건물이나 땅 자체가 아니라, 그곳에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통찰이 뒤에서 성전에 관한 논증으로 발전합니다.
하나님은 멀리서 고통을 지켜보기만 하지 않으셨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그들의 신음도 들었다. 그래서 그들을 구해 내려고 내려왔다. 이제 오너라. 내가 너를 이집트로 보내겠다.』」사도행전 7:34 · 두루새김
보셨습니다.
들으셨습니다.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보내십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은 고통받는 사람들의 상황과 무관하게 그곳에 존재하신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그분은 그들의 고통을 보시고 신음을 들으시며,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행동하십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3:7–10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구해 내려고 내려왔다」고 하시면서, 이어서 「내가 너를 이집트로 보내겠다」고 하십니다. 모세가 구원을 이루는 궁극적인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모세를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의 증인들이 어떤 자리에 있는지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하나님이 보내시는 사람의 행동은 서로 분리되지 않지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독립적인 구원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과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바로 이 모세를」 하나님이 보내셨다
「사람들은 이 모세에게 『누가 너를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느냐?』라며 그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시덤불에서 나타난 천사의 도움으로 바로 이 모세를 지도자이자 백성을 해방할 사람으로 보내셨습니다.」사도행전 7:35 · 두루새김
그들이 거부했던 사람과 하나님이 지도자이자 백성을 해방할 사람으로 보내신 사람은 바로 같은 모세입니다. 「이 모세」의 반복은 사람들이 거절한 대상과 하나님이 선택하신 대상이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에게 누가 너를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느냐고 물었습니다. 스데반은 이제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사람들이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선택을 무효로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이것은 요셉의 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팔려 갔지만, 하나님은 그를 높이셔서 형제들의 생명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자기 동족에게 밀쳐졌지만, 하나님은 그를 보내 이스라엘을 해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자를 그분의 백성이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하고 거절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일은 예수님께도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아직 예수님의 이름을 직접 꺼내지 않고, 먼저 모세의 이야기 안에서 그러한 흐름이 얼마나 깊이 반복되는지 보여 줍니다.
모세는 누구의 말씀을 전했는가?
「이 사람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한 모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 동족 가운데서 너희를 위해 나와 같은 예언자를 세우실 것이다.』」사도행전 7:37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신명기 18:15를 인용한 것으로, 베드로도 사도행전 3:22에서 인용했습니다. 스데반은 이 구절을 모세가 하나님께 부름받아 이스라엘을 이끌어 낸 이야기 바로 뒤에 둡니다.
모세는 단순히 위대한 정치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에게 전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모세 자신이 장차 하나님이 자기와 같은 예언자를 세우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모세에게 충실하다는 것은 모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연결됩니다. 모세의 권위를 존중한다고 말하면서 그가 예고한 하나님의 일을 거절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스데반은 자신이 모세를 무시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로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세가 얼마나 중요한 하나님의 종이었는지를 자세히 이야기하고, 38절에서는 모세가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에게 주었다고 말합니다. 스데반은 모세의 율법을 하나님이 주신 살아 있는 말씀으로 소개합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모세의 율법 자체에 있었을까요?
스데반의 다음 이야기는 다른 곳, 곧 그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가리킵니다.
조금 더 깊이
35절의 「백성을 해방할 사람」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낱말은 속박에서 풀어 주거나 해방하는 사람을 가리키며, 이 구절에서는 출애굽의 해방을 이루도록 보냄받은 모세의 역할을 나타냅니다. 다만 이 표현이 여기서 구체적인 몸값을 누가 누구에게 지불했다는 뜻까지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몸은 이집트에서 나왔지만 마음은 돌아갔다
모세를 따라 나온 사람들이 모세를 밀쳐 냈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모세의 말을 따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밀쳐 내고 마음속으로는 이집트로 돌아섰습니다.」사도행전 7:39 · 두루새김
이 문장은 스데반의 모세 이야기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했고,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 그들을 해방하셨습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왔습니다.
몸은 이집트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그곳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지리적인 이동과 하나님을 향한 순종은 반드시 같은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실제로 이집트에서 나왔고 생활 조건도 달라졌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은 또 다른 문제였습니다.
27절에서도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에게 밀쳐지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때는 모세가 아직 이집트에 있을 때였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기적과 표징을 행하시고 백성을 해방하신 뒤입니다. 처음에는 모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해 거절했다면, 이제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행하신 일을 경험하고도 그를 거절합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이 나중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충실해졌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 뒤의 순종을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눈에 보이는 신을 만들다
「그들은 아론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앞에서 우리를 이끌 신들을 만들어 주세요.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이 모세가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몰라요.』」사도행전 7:40 · 두루새김
이 말은 출애굽기 32:1을 바탕으로 합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간 뒤 오래도록 내려오지 않자 백성은 불안해집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출애굽의 역사를 경험했지만, 모세가 보이지 않게 되자 자신들이 볼 수 있는 대상을 요구합니다.
「그때 그들은 송아지 모양의 우상을 만들어 거기에 제물을 바쳤습니다. 자기들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했습니다.」사도행전 7:41 · 두루새김
「자기들 손으로 만든 것」은 앞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들과 대조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셨고, 백성의 신음을 들으셨고, 그들을 구해 내려고 내려오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백성은 자신들이 만든 것을 예배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신 것과, 사람이 자기 손으로 신을 만들어 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바로 이 구별이 뒤에서 성전에 관한 논증의 바탕이 됩니다. 스데반이 문제 삼는 것은 사람이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끄셔야 할 자리에 사람이 만든 것을 올려놓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자기 뜻대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등을 돌리셨다는 말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등을 돌리시고, 그들이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섬기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예언자들의 책에 이렇게 기록된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아,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나에게 잡은 짐승과 제물을 바쳤느냐?』」사도행전 7:42 · 두루새김
하나님이 그들을 즉시 없애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섬기도록 내버려 두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무관심과는 다릅니다. 스데반은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문맥에서 설명하며, 하나님을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내려진 심판이 그들이 택한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게 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스데반은 이어서 아모스 5:25–27을 인용합니다.
「『너희는 몰록의 천막과 너희 신 레판의 별을 메고 다녔다. 그것들은 너희가 절하려고 만든 우상들이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너머로 옮겨 보내겠다.』」사도행전 7:43 · 두루새김
아모스는 이스라엘이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킨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께 충실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불의와 잘못된 예배를 책망하셨습니다(아모스 5:21–24). 스데반은 그 예언을 광야의 금송아지 사건과 연결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광야에서조차 우상숭배로 돌아섰고, 그 잘못은 이후의 역사에서도 반복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든 신을 메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다음 단락에서는 하나님이 명하신 장막을 메고 다녔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몰록의 천막과 하나님이 명하신 장막이 서로 다른 예배를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몰록」과 「레판」은 히브리어 아모스서의 표현을 그리스어 성경이 해석하고 전달하는 과정과 관련된 이름들입니다. 또 아모스 5:27의 히브리어 본문에는 「다마스쿠스 너머로」라고 되어 있지만, 사도행전은 「바벨론 너머로」라고 인용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아모스서의 예언을 이스라엘의 포로 역사와 연결하여 재해석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누가나 스데반이 왜 정확히 지명을 바꾸었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장막에서 성전까지 — 하나님을 위해 지은 집이 하나님을 가둘 수 있을까?
광야에는 하나님이 명하신 장막이 있었다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는 증언의 장막이 있었습니다. 모세에게 말씀하신 분이 보여 주신 모양대로 만들라고 명령하셔서 만든 것이었습니다.」사도행전 7:44 · 두루새김
스데반은 우상숭배를 책망한 뒤 곧바로 증언의 장막을 이야기합니다. 두 경우 모두 사람이 무언가를 만들었지만, 어디서 비롯되었고 무엇을 위해 만들었는지가 다릅니다. 하나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해 신을 만들어 낸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먼저 지시하신 예배의 장막이었습니다.
원문에서도 이 연결이 보입니다. 43절의 우상들을 가리키는 표현과 44절의 「모양대로」에는 그리스어 튀포스(τύπος) 계열의 낱말이 쓰이는데, 이 낱말은 문맥에 따라 형상, 본, 모형 등을 뜻합니다. 같은 계열의 낱말이 사람들이 절하려고 만든 우상과 하나님이 보여 주신 모양대로 만든 장막을 가리키면서 대비가 생깁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모든 물질적 장소나 도구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증언의 장막이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만들어졌음을 인정합니다. 그 장막은 광야에서부터 이스라엘과 함께했고,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왔습니다.
장막은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직 한곳에 정착하지 않았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예배의 자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함께하신 역사가 고정된 성전 건물보다 먼저 있었습니다.
다윗이 청했지만 솔로몬이 지었다
「다윗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고, 야곱의 집안을 위해 거처를 마련하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지은 사람은 솔로몬이었습니다.」사도행전 7:46–47 · 두루새김
다윗이 구한 거처는 사무엘하 7장과 시편 132편의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왕궁에 살면서 하나님의 궤는 장막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하 7장에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자신이 지금까지 특별한 집을 요구하셨느냐고 물으시고, 오히려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 집, 곧 왕조를 세워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마련하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인간에게 무엇을 해 주실 것인지 먼저 말씀하십니다.
46절에는 주의할 본문 차이도 있습니다. 일부 사본에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가리키는 「야곱의 집안」이, 여러 사본에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야곱의 하나님」이 있습니다. 두루새김이 따른 「야곱의 집안」은 초기의 중요한 그리스어 사본들에서 지지를 받지만 문맥상 이해가 어려운 읽기여서, 46절만으로 다윗이 정확히 어떤 거처를 구했는지 모든 세부 사항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47절에서 솔로몬이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지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 살지 않으십니다. 예언자가 전한 말씀과 같습니다.」사도행전 7:48 · 두루새김
솔로몬은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건물 안에 갇히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전 건축이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었다는 선언일까요? 그렇게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열왕기상 8장에서 솔로몬 자신도 성전을 봉헌하면서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당신을 담을 수 없는데, 제가 지은 이 집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열왕기상 8:27의 의미)라고 고백했습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지었지만 하나님이 그 안에 제한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의 발언이 얼마나 강한 성전 비판을 담고 있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성전 제도의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낸다는 읽기도 있고, 성전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건물에 가두려는 잘못된 이해를 비판한다는 읽기도 있습니다. 본문은 성전이 무엇으로 대체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제도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두 읽기 모두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문제입니다.
누구의 손이 무엇을 만들었는가?
스데반은 이사야 66:1–2를 인용합니다.
「『하늘은 내 왕좌이고 땅은 내 발 받침이다. 너희가 나를 위해 어떤 집을 짓겠느냐? 내가 쉴 곳이 어디겠느냐?』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사도행전 7:49 · 두루새김
「『이 모든 것을 내 손으로 만들지 않았느냐?』」사도행전 7:50 · 두루새김
이사야 66장의 본래 문맥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집을 지어 드리겠다는 인간의 종교적 행위보다, 자신 앞에서 겸손하고 자신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이사야 66:2).
41절에서 백성은 송아지 모양의 우상을 만들고 「자기들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내 손으로 만들지 않았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에서는 인간의 손이 만든 것이 예배의 대상이 되었고, 여기서는 하나님의 손이 온 세상을 만드셨다는 사실이 선포됩니다.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아무리 아름답고 거룩한 목적으로 사용된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손으로 지으신 세상 안에 있는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그 건물이 하나님을 소유하거나 제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스데반의 마지막 말은 아닙니다.
그는 긴 역사 이야기에서 갑자기 현재의 청중에게 돌아와, 지금까지 준비해 온 질문을 한꺼번에 던집니다. 누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거스르고 있습니까? 누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까?
마음과 귀가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
「우리 조상들」이 「여러분의 조상들」로 바뀐다
「여러분은 고집이 세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늘 성령을 거스릅니다. 여러분의 조상들이 그랬듯이 여러분도 그렇습니다.」사도행전 7:51 · 두루새김
이 말에서 스데반의 어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는 처음에 청중을 「형제 여러분, 어른 여러분」이라고 불렀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줄곧 「우리 조상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집트로 내려간 야곱도, 광야에서 모세를 거절했던 사람들도 우리 조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러분의 조상들」로 말이 바뀝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지금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행동과 직접 연결하며, 그들이 모세를 거절한 조상들과 다른 길을 가고 있는지 묻습니다.
이 표현들은 마음대로 만들어 낸 모욕이 아니라 구약에서 이미 사용된 언약의 언어입니다. 출애굽기 32:9에서 하나님은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 백성을 목이 뻣뻣한 백성이라고 부르시고, 신명기 10:16은 마음의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뻣뻣하게 하지 말라고 명합니다. 예레미야 6:10은 백성의 귀가 닫혀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고 책망합니다. 스데반은 그들의 조상들이 이미 예언자들에게 들었던 책망을 다시 들려주고 있습니다.
할례를 받았는데 마음과 귀는 할례받지 않았다
할례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의 표지였고, 스데반은 8절에서 이미 그 언약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연설의 마지막에서는 사람들의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않았다고 책망합니다.
몸에는 언약의 표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과 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몸에 할례를 베푸는 관습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표지를 지닌 사람들이 오히려 그 언약의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문제를 지적합니다. 마음은 하나님께 향하는 의지와 생각의 중심을, 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그분의 말씀을 듣고 따르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를 거절했고, 구원을 경험한 뒤에도 그를 밀쳐 냈으며,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집트로 돌아섰습니다. 스데반은 지금 그와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성령을 거스른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분과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거절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율법을 모독한 사람은 누구인가?
「여러분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예언자가 누구입니까? 그들은 의로우신 분이 오실 것을 미리 알린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은 그분을 배신하고 죽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사도행전 7:52 · 두루새김
여기서 마침내 예수님의 이야기가 직접 등장합니다.
스데반은 그분을 「의로우신 분」이라고 부릅니다. 사도행전 3:14에서 베드로도 예수님을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이라고 불렀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바라보던 의로우신 분과 연결합니다.
「여러분은 천사들을 통해 전해진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않았습니다.」사도행전 7:53 · 두루새김
이 말은 6장에서 스데반에게 제기된 혐의를 뒤집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거슬렀다는 혐의를 받은 그가, 이제 청중이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천사들을 통해 전해진 율법」은 당시 유대교에서 율법의 전달을 천사들과 연결하던 전통을 반영하며, 갈라디아서 3:19과 히브리서 2:2에서도 언급됩니다. 이 구절에서 중요한 것은 그 율법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사실입니다. 스데반은 그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율법을 받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지키지 않았다고 책망할 수 있습니다.
이제 긴 변론의 구조가 선명해집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혐의에 대해,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건물에 갇히지 않는 분이라고 성경을 인용하여 설명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거슬렀다는 혐의에 대해, 모세가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였고 살아 있는 말씀을 받은 사람이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신 모세를 거절했던 조상들의 행동이 지금 예수님을 거절한 지도자들의 행동과 닮아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심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말을 듣는 동안 오히려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의 주장을 모든 시대의 유대인에게 적용하여 유대 민족 전체를 하나님을 거절한 백성으로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스데반 자신도 유대인이며, 그가 들려준 역사는 자신의 조상들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가 책망하는 대상은 지금 예수님을 거절하고 자신을 심문하는 청중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영원히 죄인으로 단정하는 말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성경을 통해 현재의 청중에게 회개를 요구하는 예언자적 책망입니다.
그런데 청중은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귀를 막은 사람들, 하늘을 바라본 사람
그들은 마음이 찢어지는 듯 격분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분노가 치밀어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갈았습니다.사도행전 7:54 · 두루새김
「분노가 치밀어」(διαπρίομαι)로 옮긴 말은 톱으로 켜거나 잘라 내는 이미지에서 나온 말로, 마음이 격하게 흔들리고 분노에 사로잡히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 표현은 사도행전 5:33에서도 등장했습니다. 그때 공회 사람들은 사도들을 죽일 계획을 의논했지만, 가말리엘이 일어나 신중하게 판단하라고 권했고 사도들은 매질을 당한 뒤 풀려났습니다.
이번에는 가말리엘 같은 사람이 등장하여 그들을 말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분노가 행동으로 이어지기 전에, 누가는 분노한 사람들의 얼굴에서 스데반의 눈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스데반은 무엇을 보았는가?
그러나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를 보았습니다.사도행전 7:55 · 두루새김
스데반은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이제 그의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그는 하나님이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와 광야에서 자신을 나타내셨고, 예루살렘 성전 안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고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성전 안에서 제사를 드리는 장면이 아니라, 공회 앞에서 죽음의 위협을 받는 가운데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를 심문하는 지도자들이 통제할 수 있는 장소에 제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 가운데 한 분이 계십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앉아 계시지 않고 서 계실까?
스데반이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인자가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사도행전 7:56 · 두루새김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자신을 가리키실 때 자주 사용하셨던 칭호입니다. 누가복음 22:69에서 예수님께서는 심문받으시면서 앞으로 인자가 하나님의 능력의 오른쪽에 앉아 계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증인이 심문받는 자리에서 그 일을 본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앉아 계실」 것이라 하셨고, 여기서는 「서 계신」 모습이 나옵니다. 왜 서 계실까요? 스데반을 맞아들이기 위해, 스데반을 변호하는 증인으로, 심판의 권위를 행사하기 위해, 하늘에서 제사장의 역할을 하시는 모습으로 서 계신다는 읽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해석이 본문에서 분명하게 확인되는 것은 아니므로, 예수님께서 왜 서 계셨는지를 하나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이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은, 사람들에게 거절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예수님께서 지금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그 사실을 직접 보고 있다고 증언합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거절당했지만 하나님이 그를 높이셨습니다. 모세는 자기 백성에게 밀쳐졌지만 하나님이 지도자이자 백성을 해방할 사람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배신당하시고 죽임당하셨지만 하나님이 일으키시고 높이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예수님의 증인인 스데반 역시 거절당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판단했는가와 하나님이 예수님을 어떻게 높이셨는가 사이의 차이가 이 환상에서 다시 드러납니다.
귀가 할례받지 않았다는 책망이 눈앞에서 드러난다
사람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었습니다.사도행전 7:57 · 두루새김
조금 전 스데반은 그들이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실제로 귀를 막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는 책망이 눈앞의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을 거절해 온 역사를 듣던 사람들이, 이제 자신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스데반을 거절합니다. 그들이 들은 역사가 그들 자신의 행동으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일제히」로 옮긴 그리스어 호모튀마돈(ὁμοθυμαδόν)은 사람들이 함께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사도행전 1:14에서는 제자들이 이 낱말처럼 한마음으로 기도했고, 2:46에서는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성전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같은 낱말로 사람들이 스데반에게 달려듭니다. 한마음이 된다는 사실 자체가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니며, 무엇을 향해 한마음이 되는지가 중요합니다.
사울의 발 앞에 놓인 겉옷
그들은 스데반을 도시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쳤습니다. 증인들은 자기 겉옷을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놓았습니다.사도행전 7:58 · 두루새김
누가는 여기서 한 사람의 이름을 처음 소개합니다.
사울입니다.
본문은 사울이 직접 돌을 던졌다고 기록하지 않고, 증인들이 겉옷을 그의 발 앞에 놓았다고만 말합니다.
사도행전 4장에서 바나바는 자신의 밭을 팔아 가져온 돈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스데반을 돌로 치기 위해 겉옷을 벗어 사울의 발 앞에 놓습니다. 한쪽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돈을 내놓았고, 다른 쪽에서는 한 사람을 죽이는 일에 참여하기 위해 겉옷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스데반은 돌에 맞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마지막 말은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향한 저주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17:7은 사형을 집행할 때 증인들이 먼저 손을 대고 그 뒤에 백성이 참여해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스데반을 돌로 치는 장면에서 증인들이 특별히 언급되는 것은 이런 율법적 배경과 관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들이 법적 절차를 얼마나 정확하게 따랐는지, 정식 판결이 내려졌는지 밝히지 않으며, 사울이 이 장면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제한적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또 누가가 바나바의 장면과 이 장면을 의도적으로 짝지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이야기의 흐름 안에서 두 모습이 만들어 내는 대비는 인상적입니다. 「서 계신」 모습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높임받으신 일을 다루는 다른 본문들과 구별되는 특징으로 보아 하늘 성소에서 제사장의 역할을 하시는 모습과 연결하는 해석도 제시되어 왔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스데반은 누구에게 자신의 영을 맡기는가?
사람들이 스데반을 돌로 치는 동안, 스데반은 주님을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사도행전 7:59 · 두루새김
그는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께 자신의 영을 받아 달라고 청합니다. 이 장면은 누가복음 23:46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과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 앞에서 아버지께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스데반은 죽음 앞에서 예수님께 자신을 맡깁니다.
이것은 부활하시어 높임받으신 예수님께서 스데반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줍니다. 스데반은 단순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계신 예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21에서 베드로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을 것이라는 요엘의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이제 스데반은 죽음의 순간에 주 예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다만 이 표현 하나만으로 스데반이 죽은 뒤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누가가 보여 주는 것은 죽음 이후의 세계가 아니라, 죽음을 앞둔 스데반이 조금 전 하늘에서 보았던 예수님께 자신을 맡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누구를 위해 기도했는가?
그리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주님, 이 죄의 책임을 저들에게 묻지 마십시오.」 이 말을 하고 스데반은 잠들었습니다.사도행전 7:60 · 두루새김
그는 돌에 맞고 있습니다.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이 바로 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누가복음 23:34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말씀이 전해집니다. 이 구절은 초기 사본들 사이에 본문 차이가 있어 원래 누가복음에 포함되었는지 논의가 있지만, 전해지는 수난 이야기와 스데반의 마지막 기도 사이에는 분명한 주제적 유사성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스데반도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용서를 구합니다.
그는 자신에 대한 고발이 틀렸다는 사실을 입증해 달라고 요청하지도, 자신을 죽인 사람들을 당장 심판해 달라고 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행동이 잘못이 아니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이 죄를 짓고 있기에, 그 죄의 책임을 그들에게 묻지 말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의 잘못을 모른 척하지 않지만, 그 잘못에 대한 마지막 판단을 자신이 쥐고 있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그들을 맡깁니다.
조금 전까지 그는 청중이 성령을 거스르고 의로우신 분을 죽였다고 강하게 책망했습니다. 두 행동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악을 분명하게 지적하는 것과 악을 행한 사람이 용서받기를 구하는 것은 함께 존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증언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그분의 생명과 용서가 증인의 삶에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잠들었습니다」
누가는 여기서 죽었다고 하지 않고 「잠들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낱말은 본래 잠을 잔다는 뜻이지만 죽음을 에둘러 나타내는 표현으로도 쓰이므로, 이 문장은 스데반이 의식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사람들은 이를 갈았고, 큰 소리를 질렀고, 귀를 막고 달려들었고, 그를 도시 밖으로 끌어내 돌을 던졌습니다. 모든 장면이 격렬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은 매우 조용합니다.
그의 죽음은 참혹했지만, 누가는 그 참혹함을 마지막 모습으로 남기지 않습니다. 그의 마지막을 결정하는 것은 그를 향해 날아오는 돌에 관한 묘사가 아니라, 그가 부른 주님의 이름과 그가 드린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 스데반이 남긴 증언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던 곳은 메소포타미아였습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셨던 곳은 이집트였고, 모세를 부르셨던 곳은 미디안 광야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스데반에게 드러난 곳은 그가 공회 앞에서 죽음의 위협을 받던 자리였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을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시는 곳에서 사람이 그분을 만납니다.
그렇다고 예배와 공동체의 장소가 아무 의미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데반의 연설에서 하나님은 율법을 주시고 장막을 만들도록 명하셨고, 장소와 제도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 안에서 의미를 지녔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하나님 자신을 소유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 장은 또 무조건 새로운 것이 옳고 전통적인 것은 잘못되었다는 교훈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스데반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씀을 진지하게 다루었고, 자신이 물려받은 성경의 역사를 더욱 깊이 읽어 예수님께 이르렀습니다.
그는 긴 연설에서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는 그 질문에 관해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돌들이 날아옵니다. 스데반은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라고 그분을 부릅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해 「주님, 이 죄의 책임을 저들에게 묻지 마십시오」라고 마지막 기도를 드립니다.
이 말을 하고 스데반은 잠들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