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하나님의 계획

만물을 한 머리 아래 모으시는 하나님

에베소서 1장은 하나님의 구원을 이야기하지만, 인간의 죄나 고통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설명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계획하셨는지를 먼저 보여 줍니다.

그 계획은 세상이 존재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사람들을 택하시고, 자신의 자녀로 부르시고, 예수님의 피로 속량하시고, 성령으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표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설명하던 문장이 10절에 이르러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 곧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모으시는 것」이라며 갑자기 시야를 넓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야기가 어느새 우주 전체를 향한 계획으로 펼쳐집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한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일과 모든 것을 예수님 안에서 하나로 모으는 일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에베소서 1장은 세상이 생기기 전 하나님의 뜻에서 시작하여,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지나, 기쁜 소식을 들은 사람들에게 이르고, 마침내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토록 거대한 이야기를 마친 뒤 바울이 구하는 것은 새로운 능력이나 새로운 지위가 아닙니다.

그는 성도들의 마음의 눈이 밝아지기를 기도합니다.

이미 주어진 것을 제대로 알아보는 일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읽는 시간 25분소단락 81장 본문 읽기 →

편지의 시작 — 하나님의 뜻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에베소서 1:1–2 본문 →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이 짧은 표현에서 편지 전체를 움직이는 두 요소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사람들을 자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고(5절), 감추어 두셨던 자신의 뜻을 알리셨으며(9절), 자신의 뜻과 결정에 따라 모든 일을 이루십니다(11절).

바울이 사도가 된 일도 그 큰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그는 독립적으로 어떤 종교적 가르침을 만들어 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이루시는 일을 증언하도록 부름받았다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수신자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은 편지

본문에는 「에베소에 있는 성도 여러분」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른 시기의 중요한 그리스어 사본 일부에는 「에베소에」라는 지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최초 수신자의 범위를 어떻게 판단하든, 본문이 강조하는 성도가 누구인지는 분명합니다.

수신자들은 어떤 도시에 산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는 여러분」이라는 사실로 설명됩니다. 실제로 이 편지에서는 지리적 위치보다 예수님과 맺은 관계가 훨씬 중요해집니다.

이어지는 2절의 인사는 「은혜와 평화」입니다. 1장의 앞부분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이어지는 2장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평화를 이루셨는지 보여 줄 것입니다. 편지의 인사말이 앞으로 펼쳐질 기쁜 소식의 내용을 먼저 가리키고 있는 셈입니다.

조금 더 깊이

사도행전 19장에 따르면 바울은 에베소에서 오랫동안 활동했습니다. 그런데 이 편지에는 다른 바울의 편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인적인 안부 인사가 거의 없고, 15절에서는 수신자들의 믿음에 관한 「소식을 듣고」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때문에 에베소서가 처음부터 소아시아 여러 교회에 전달되도록 작성된 회람 편지라는 설명이 제기되었습니다. 반면 에베소를 원래 수신지로 보면서도 편지가 다른 교회에서 읽히기에 적합한 일반적인 형식으로 작성되었다고 설명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사본만으로 최초의 전달 방식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저자 문제 역시 논의됩니다. 편지 자체는 바울을 저자로 밝히고, 전통적으로는 바울이 감옥에서 쓴 편지로 받아들여 왔지만, 다른 견해에서는 낱말과 문체, 골로새서와의 관계 등을 근거로 바울의 제자가 그의 신학을 이어받아 작성했을 가능성도 논의합니다. 어느 쪽도 모두가 동의하는 결론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 — 창조 이전부터 시작된 그리스도 안의 선택

에베소서 1:3–6 본문 →

3절부터 문장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바울은 하나님에 관해 차분하게 논증하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며 아버지이신 분을 찬양합니다. 그분은 하늘의 세계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온갖 영적인 복을 주셨습니다.에베소서 1:3 · 두루새김

그리스어에서 3절부터 14절까지는 하나로 이어지는 긴 문장입니다. 찬양에서 출발한 문장이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차례로 쌓아 갑니다. 선택, 자녀 됨, 속량, 용서, 하나님의 계획, 물려받을 몫, 성령으로 받는 표시는 각각 따로 떨어진 구원의 항목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하나의 움직임 속에서 서로 연결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까닭은 하나님이 먼저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3절의 원문에서는 「찬양받으실」(εὐλογητός) 「복(εὐλογία)을 주신」(εὐλογέω) 「복」이 같은 어근에서 나온 말로 세 번 반복됩니다. 우리말에서는 「찬양합니다」와 「복을 주셨습니다」로 나뉘지만, 원문에서는 서로 대응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찬양받으실 분이며, 그 이유는 그분이 먼저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는가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무엇을 베푸셨는가가 먼저 등장합니다. 찬양은 그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복은 「하늘의 세계에서」 주어진 복입니다. 이 표현을 죽은 뒤에나 누릴 하늘의 보상으로 좁혀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20절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로 그 「하늘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으십니다. 따라서 3절의 복은 높아지신 예수님과 연결된 복이며, 이미 성도들에게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택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랑 안에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에베소서 1:4 · 두루새김

이 구절을 읽으면 누가 선택받고 누가 선택받지 못했을까 하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본문의 문장은 이 질문을 직접 다루지 않습니다. 4절에는 선택의 시점과 자리와 목적이 제시됩니다. 시점은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이고, 자리는 「그리스도 안에서」이며, 목적은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선택을 설명하면서 먼저 인간의 최종 운명이 어떻게 구분되는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가 되도록 택하셨는지 이야기합니다. 「거룩하고 흠 없는」이라는 표현은 구약의 제사 언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흠 없는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졌듯이, 여기서는 사람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기에 합당한 존재가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 표현은 에베소서 5:27에서 예수님께서 교회를 거룩하고 흠 없게 세우시는 장면으로 다시 나타납니다.

선택은 예수님과 무관하게 이루어진 추상적인 결정으로 소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리가 처음부터 예수님 안이라고 밝혀집니다. 이것을 근거로 하나님의 선택이 예수님 안에 있는 공동체를 중심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보는 해석이 있고,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개별 신자들의 구원까지 미리 정하셨다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본문의 복수형 「우리」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만으로 두 해석 가운데 하나를 배제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어느 읽기에서도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택하시고, 예수님을 통하여 그 선택의 목적을 이루십니다.

사랑은 어디에 연결되는가

원문에서 4절 끝에 놓인 「사랑 안에서」는 문법적으로 두 방향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처럼 앞 문장에 연결하면,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이 서는 삶의 자리가 사랑이라는 뜻이 됩니다. 5절에 연결하면, 하나님께서 사랑 안에서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앞의 해석은 성도의 삶을, 뒤의 해석은 하나님의 행위를 강조합니다. 그리스어 문장의 구조만으로 어느 하나를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두 해석 모두 에베소서 전체와 어울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구원의 출발점으로 등장하고(2:4), 성도들은 사랑 가운데 살아가라는 요청을 받기 때문입니다(4:2; 5:2).

선택의 목적은 단순한 구제가 아니라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에베소서 1:5 · 두루새김

「자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옮긴 말은 다른 사람의 자녀를 법적·사회적으로 자신의 자녀로 받아들이는 양자 됨을 가리킵니다. 로마 세계에서 입양은 단순히 불쌍한 아이를 돌보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가족에 속하게 하고 그 가족의 지위를 얻고 재산을 물려받을 관계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제도였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죄인을 처벌에서 면제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자신의 가족 관계 안으로 받아들이려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의 자녀로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단지 그 관계를 알려 주시는 교사가 아니라, 그 관계가 가능하도록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6절은 하나님의 은혜가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베풀어졌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 안으로 사람들을 받아들이시는 일입니다.

6절은 이 모든 일의 목적을 「하나님의 은혜에 담긴 영광이 찬양받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람들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가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에서 만물의 회복까지 — 은혜의 범위가 넓어지다

에베소서 1:7–10 본문 →

4–6절이 하나님의 뜻과 선택을 설명했다면, 7절은 그 뜻이 실제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이 흘리신 피로 속량을 받았습니다. 곧 우리의 잘못을 용서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풍성한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에베소서 1:7 · 두루새김

앞에서는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했지만, 이제는 예수님의 피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은 역사를 비켜 가지 않습니다. 그 계획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속량은 무슨 뜻인가

「속량」은 값을 치르는 일과 관련된 해방의 언어에서 발전한 말로,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을 설명하는 데 사용됩니다. 구약에서 중요한 배경은 출애굽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사건은 종살이하던 백성이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 살아가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해방을 구체적으로 「우리의 잘못을 용서받았습니다」라는 말과 연결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피를 통한 속량을 선언하지만, 정확히 누구에게 어떤 값을 지불했다는 거래 구조를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이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인간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7절에서 용서의 근거는 인간의 회개가 얼마나 충분한지, 이후의 삶이 얼마나 완전한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풍성한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실 뿐 아니라 자신의 뜻을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지혜와 슬기로 그 은혜를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푸셨습니다. 또 감추어 두셨던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시려고 기쁘게 세우신 계획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에베소서 1:8–9 · 두루새김

죄를 용서받는 일은 단지 과거의 잘못을 지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이루려 하시는지 알게 되는 새로운 관계로 이어집니다.

9절에서 「감추어 두셨던 자신의 뜻」이라고 풀어 옮긴 말 가운데, 원문에서 신비를 뜻하는 단어는 뮈스테리온(μυστήριον)입니다. 이것을 일상적인 의미의 신비로운 현상이나 인간이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비밀로 읽으면 본문의 의도를 놓칩니다. 여기서는 감추어져 있던 하나님의 뜻이 이제 드러났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그 감추어졌던 뜻은 무엇일까요? 본문은 다음 절에서 바로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궁극적인 일

그 계획은 정하신 때가 다 차면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 곧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모으시는 것입니다.에베소서 1:10 · 두루새김

이 절은 1장 전반부의 중심입니다.

「그 계획」으로 풀어 옮긴 말은 원래 집안의 재산과 일을 관리하거나 맡아 운영하는 일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여기서는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하고 질서를 세워 가는 일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단지 먼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라, 때가 차면 이루실 목적에 따라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로 모으시는」(ἀνακεφαλαιόω)에 해당하는 동사는 여러 내용을 하나로 종합하거나 한데 모은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로마서 13:9에서는 여러 계명이 이웃 사랑이라는 말씀 안에 요약된다는 뜻으로 같은 동사가 사용됩니다. 에베소서에서는 그 대상이 계명들이 아니라 「모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 사회의 일부를 개선하는 수준을 넘어, 온 창조 세계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의 질서 아래 놓이는 것을 향합니다.

여기서 1장에 등장하는 두 방향이 만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시고 속량하셨다는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모으신다는 방향입니다.

예수님께서 개인의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에 모든 것의 주님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바로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간의 구원도 그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모으신다는 표현만으로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구원받는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질서 있게 모이는 것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모든 존재의 동일한 구원을 의미하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뒤의 20–22절에서는 모든 것이 예수님의 권위 아래 복종하는 언어가 등장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로 모이는 일은 그분의 다스림과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주제는 골로새서 1:15–20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골로새서는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어 모든 것을 자신과 화해시키셨다고 말합니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의 표현과 설명 방식에는 차이가 있지만,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창조 세계 전체와 연결한다는 점에서 같은 주제를 다룹니다.

먼저 소망을 둔 우리와 복음을 들은 여러분 — 같은 상속에 참여하다

에베소서 1:11–14 본문 →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하나님의 몫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자신의 뜻과 결정에 따라 이루시며, 계획하신 대로 우리를 미리 정하셨습니다.에베소서 1:11 · 두루새김

하나님의 계획을 설명하는 언어가 몫을 물려받는 언어로 바뀝니다. 앞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자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정하셨고, 이제 그 관계에 몫을 물려받는다는 개념이 더해집니다. 가족으로 받아들여진 사람들은 그 가족에 속한 몫과 앞날에 참여합니다.

다만 11절에는 해석상의 갈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몫이 되었습니다」(κληρόω)에 해당하는 원문은 상속이나 제비로 정해진 몫과 관련된 표현인데, 우리가 물려받을 몫을 받도록 정해졌다는 뜻으로도, 우리가 하나님의 몫으로 지정되었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뒤의 가능성을 택했습니다. 앞의 읽기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는지가, 뒤의 읽기에서는 우리가 누구에게 속하게 되었는지가 강조됩니다.

그런데 이 둘은 에베소서 1장 안에서 서로 멀리 떨어진 주제가 아닙니다. 14절에서는 「우리가 물려받을 몫」을 말하고, 18절에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몫이 된 것」을 말합니다. 몫을 물려받을 미래를 가진 백성이 동시에 하나님께 속한 백성입니다.

「우리」에서 「여러분도」로

12절과 13절 사이에는 인칭 변화가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 먼저 소망을 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찬양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에베소서 1:12 · 두루새김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말씀, 곧 여러분을 구원하는 기쁜 소식을 듣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약속된 성령으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표시를 받았습니다.에베소서 1:13 · 두루새김

「그리스도께 먼저 소망을 둔 우리」가 누구인지는 논의됩니다. 유대인 가운데 먼저 예수님께 소망을 두었던 신자들을 가리키고 「여러분도」는 나중에 믿게 된 이방인들을 가리킨다고 보면, 2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루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가 이미 여기서 시작됩니다. 반면 「우리」를 먼저 기쁜 소식을 믿은 사도들의 공동체로, 「여러분도」를 그들이 기쁜 소식을 전하여 믿게 된 수신자들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12절의 「먼저」라는 말만으로 앞선 집단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해석이든, 앞서 소망을 둔 사람들이 있고 이제 「여러분도」 예수님 안에 참여했습니다.

3–12절이 거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말해 왔다면, 13절은 그 계획이 실제 사람들의 삶에 어떻게 도달하는지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세상이 시작되기 전부터 있었지만, 수신자들은 역사 속에서 기쁜 소식을 듣고 믿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계획과 인간의 믿음을 서로 경쟁하는 원인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미래를 보증하는 현재의 선물입니다

13절의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표시」(σφραγίζω)는 원문에서 인장 이미지입니다. 인장은 문서나 물건이 누구에게 속했는지, 어떤 권위로 확인되었는지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표시를 받았다는 것은 단순히 특별한 영적 경험을 했다는 뜻으로 축소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약속에 속한 사람들이며, 하나님은 자신의 성령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물려받을 몫을 보증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신 것은 자신의 백성을 온전히 속량하시고, 자신의 영광이 찬양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에베소서 1:14 · 두루새김

「보증하시는 분」이라고 옮긴 말은 거래에서 약속된 나머지 지급을 보증하는 선금이나 계약금을 가리킵니다. 고린도후서 1:22와 5:5에서도 성령을 설명할 때 같은 표현이 사용됩니다. 선금은 장래에 받을 것과 무관한 별개의 물건이 아니라, 앞으로 완성될 일의 일부가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7절에서는 성도들이 이미 「속량을 받았습니다」라고 했는데, 14절에서는 아직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온전히 속량하시고」 이루실 일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의 피를 통한 용서는 이미 주어졌지만,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누릴 구원의 완성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성도들은 성령을 받았습니다.

6절과 12절과 14절에는 모두 하나님의 영광이 찬양받는다는 목적이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자녀로 삼으시기로 정하신 은혜를, 다음에는 먼저 소망을 둔 사람들을, 마지막에는 성령을 받은 공동체의 미래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자리로 이어집니다.

긴 문장이 마침내 끝났지만, 바울은 여기서 설명을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찬양한 뒤, 그 계획에 참여한 사람들이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이미 받은 것을 아직 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

에베소서 1:15–19 본문 →

15절은 「이 때문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바울은 수신자들이 주 예수님을 믿으며 모든 성도를 사랑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들이 더욱 많은 것을 소유하거나 새로운 지위를 얻도록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신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기를 빕니다. 성령께서 지혜를 주시고 하나님을 드러내 보여 주셔서,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또 하나님께서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기를 빕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시며 주신 소망이 무엇인지, 성도들이 하나님의 몫이 된 것이 얼마나 풍성하고 영광스러운 일인지 알게 되기를 빕니다. 또 믿는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강하고 힘차게 일하시는 능력입니다.에베소서 1:17–19 · 두루새김

기도의 중심은 「알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무엇을 주셨는지 이야기했고, 이제는 그 선물의 의미를 알아보도록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은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일입니다

원문에서는 17절에 ‘지혜와 계시의 영’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영이 성령을 가리키는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롭고 하나님이 드러내 주시는 것을 깨닫는 마음의 성향을 가리키는지는 해석이 나뉩니다. 앞선 13–14절에 성령이 등장한다는 점은 첫 번째 해석을 뒷받침하지만, 원문의 표현 자체는 두 가능성을 모두 허용합니다. 두루새김은 성령을 가리키는 것으로 옮겼습니다.

어느 쪽이든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마음은 감정만이 아니라 생각하고 판단하며 이해하는 인간의 내면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따라서 18절의 「마음의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의 의미를 알아보는 능력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세 가지를 알기를 구합니다.

첫째, 부르심에서 비롯된 소망

성도들은 이미 부름받았지만, 그 부르심이 어떤 미래를 열어 놓았는지 충분히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소망은 현재의 어려움이 자동으로 사라질 것이라는 낙관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이 무엇을 향해 나아가는지 아는 데서 생겨나는 기대입니다.

둘째, 성도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상속

14절에서는 「우리가 물려받을 몫」이라고 했지만, 18절에서는 「하나님의 몫」이라고 합니다. 원문의 표현은 성도들이 하나님에게서 받을 몫의 영광으로 읽을 수도 있고, 하나님이 성도들을 자기 몫으로 삼으셨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신명기 32:9에서 하나님의 몫이 그의 백성이라고 말하는 구약의 배경은 두 번째 읽기를 뒷받침하며, 두루새김도 그렇게 옮겼습니다.

어느 쪽이든 성도들은 자신들의 미래만 바라보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연결된 존재들입니다.

셋째, 믿는 이들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힘

세 번째 기도는 가장 길게 펼쳐집니다. 「엄청나게 큰지」, 「강하고 힘차게 일하시는 능력」처럼, 원문에서도 능력과 일하심과 굳셈과 위력을 나타내는 낱말들이 이어집니다. 바울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힘과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능력을 설명하려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성도들이 경험할 수 있는 기적이나 놀라운 현상을 열거하지 않습니다.

대신 한 사건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사건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하려면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일한 권위나 능력을 스스로 소유하게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은 그 능력의 근원을 하나님께 둡니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오른쪽으로 — 부활은 무엇을 드러냅니까

에베소서 1:20–22 본문 →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능력으로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하늘의 세계에서 자신의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에베소서 1:20 · 두루새김

부활과 높아지심입니다.

이 둘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같은 뜻은 아닙니다. 부활은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으시는 장면은 예수님께 주어진 왕의 권위와 지위를 드러냅니다.

오른쪽에 앉으셨다는 말의 구약적 배경

시편 110:1에서 하나님은 왕에게 자신의 오른쪽에 앉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원래 시편의 문맥에서는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하나님의 권위 아래에서 다스리고 원수들을 굴복시키는 장면입니다. 에베소서는 이 말을 부활하신 예수님께 적용하여, 하나님이 예수님께 다스리는 권위를 주셨다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지배보다 훨씬 높은 자리에 계십니다. 지금 시대에 불리는 어떤 이름보다도, 앞으로 올 시대에 불릴 어떤 이름보다도 높이 계십니다.에베소서 1:21 · 두루새김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지배」는 당시 사람들이 세계를 지배하거나 움직인다고 이해할 수 있었던 여러 권위와 세력을 떠올리게 합니다(3:10; 6:12). 바울의 강조점은 그 세력들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 모든 것보다 높으시다는 사실입니다. 그 높음은 「지금 시대」에도 「앞으로 올 시대」에도 변하지 않습니다.

10절에서 말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모으시는 계획은 미래의 막연한 가능성으로만 남아 있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미 모든 권세 위에 앉아 계십니다. 다만 모든 것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선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이 예수님의 높아지심을 통하여 결정적인 근거를 얻었다는 말입니다.

만물을 발아래 두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복종시키시고, 그리스도를 모든 것 위의 머리로 교회에 주셨습니다.에베소서 1:22 · 두루새김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복종시키시고」라는 표현은 시편 8편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편은 광대한 하늘과 별들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작은 인간을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자신의 창조 세계를 맡기셨다는 사실에 감탄합니다. 에베소서는 그 표현을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여 주시는 모범이 아니십니다. 인간에게 맡겨졌던 창조 세계의 다스림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온전하게 이루실 분으로 드러나십니다.

그런데 22절 후반부에서 문장이 뜻밖의 방향으로 바뀝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수님의 발아래 두셨다는 선언 다음에, 예수님을 교회에 주셨다는 말이 나옵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8:6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의 손으로 만드신 것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두셨다고 노래합니다(히브리어 본문에서는 8:7). 이 연결은 고린도전서 15:25–27에서도 나타나는데, 거기서는 예수님께서 모든 원수를 발아래 두실 때까지 다스리시는 일과 마지막 원수인 죽음이 멸망하는 일을 이야기합니다. 또 21절의 네 단어를 각각 서로 다른 종류의 하늘에 있는 존재에 대응시키고 그들의 정확한 계급 구조를 재구성하는 것은 본문이 직접 제공하는 정보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모든 것 위의 머리이신 예수님께서 교회에 주어지셨습니다

에베소서 1:23 본문 →

1장의 마지막은 교회를 이야기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교회를 예수님께 주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교회에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주어지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 위의 머리」이십니다. 교회의 중요성은 교회라는 조직이 스스로 거대한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가 관계 맺고 있는 분이 모든 것 위에 계시는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10절의 머리와 22절의 머리

원문에서 10절의 「하나로 모으시는」과 22절의 「모든 것 위의 머리」는 같은 어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두루새김의 10절에는 머리라는 말이 드러나지 않지만, 모든 것을 예수님 안에서 하나로 모으신다는 뜻으로 옮겼습니다. 10절에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모으는 계획이 제시되었다면, 22절에서는 높아지신 예수님께서 모든 것 위에 계신 머리로 소개되십니다.

그런데 그 머리는 동시에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교회는 머리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집단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이고, 예수님께서는 교회와 무관한 멀리 있는 지배자가 아니라 자신의 몸인 교회와 결합된 머리이십니다. 에베소서 4:15–16에서는 몸의 각 부분이 머리이신 예수님께 연결되어 자라 가는 모습이 펼쳐집니다. 그러므로 몸과 머리의 관계에는 예수님의 권위와 더불어, 교회가 예수님께 생명과 성장을 의존한다는 사실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충만함이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모든 것을 모든 면에서 가득 채우시는 그분의 충만함입니다.에베소서 1:23 · 두루새김

여기서 「충만함」은 플레로마입니다. 10절의 「정하신 때가 다 차면」에 해당하는 원문에도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분의 충만함」은 크게 두 방향으로 읽힙니다. 첫째, 교회가 예수님에게서 충만함을 받는다는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채우시는 분이시고, 교회는 그분에게서 생명과 은혜를 받아 가득 차는 몸이라는 것으로, 성도들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에 이르도록 기도하는 3:19와도 관련됩니다.

둘째, 교회가 예수님의 충만함을 이루는 몸이라는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 머리이시고 교회가 그분의 몸이므로, 교회가 그분의 생명과 하시는 일이 드러나는 자리라는 뜻입니다. 두 읽기는 모두 문법적으로 논의될 수 있으며, 원문의 ‘충만함’에 해당하는 말만으로 어느 쪽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교회는 예수님과 독립하여 자기 자신의 충만함을 가진 존재가 아닙니다.

또한 교회가 예수님의 몸이라는 사실은 교회가 이미 완전하며 잘못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에베소서가 뒤에서 교회의 성장과 성숙을 계속 요청한다는 사실이 그것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모든 것을 모든 면에서 가득 채우시는」에 해당하는 원문의 분사도 중간태·수동태 형태이므로, 그 의미를 설명할 때 문맥을 살펴 판단해야 합니다.

맺으며 — 바울이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것은 교회입니다

에베소서 1:1–23 본문 →

에베소서 1장은 세상이 존재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예수님의 피가 흘려진 역사 속으로 들어옵니다. 기쁜 소식을 듣고 믿은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나시어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으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 모든 자리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자녀로 삼으시며, 예수님의 피로 속량하시고, 모든 것을 예수님 안에서 하나로 모으십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일과 모든 것을 하나로 모으는 일은 별개가 아닙니다.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더 큰 계획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사건이 아니라, 그 계획이 인간의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이쯤 되면 예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말로 장이 끝나도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은 교회를 가리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에서, 하늘의 세계에서 모든 권세 위에 앉으신 예수님과 땅에서 기쁜 소식을 듣고 믿은 사람들이 하나의 문장 안에서 만납니다. 교회가 스스로 위대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 위의 머리이신 예수님을 교회에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에 관하여 듣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들의 마음의 눈이 밝아지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바라보아야 할 것은 자신들의 보잘것없는 모습만도, 자신들이 이룬 작은 성취만도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 안에서 하나로 모으시려는 하나님께서, 바로 그 예수님을 교회에 주셨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