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2–3장 · 한 몸이 된 두 백성

담을 허물고 사람들로 성전을 세우시는 하나님

에베소서 2장에는 두 건축 장면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무너지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둘 사이를 가로막던 담, 곧 서로 원수 된 관계를 자신의 몸으로 허무셨습니다」(14절).

다른 하나는 세워지는 장면입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세워져,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서 사시는 집이 되어 갑니다」(22절).

예수님께서 허무신 것은 사람들을 갈라놓던 담입니다. 그리고 그 담이 있던 자리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건물을 세우십니다. 그런데 그 건물의 재료는 돌이나 나무가 아닙니다. 이전에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장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읽습니다. 1–10절은 개인의 구원에 관한 말씀이고, 11–22절은 교회의 하나 됨에 관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두 단락의 주제는 다릅니다. 그러나 이런 구분만으로 읽으면 바울이 두 단락을 연결하는 방식을 놓치기 쉽습니다.

앞부분에서는 잘못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살아납니다. 뒷부분에서는 서로 원수였던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창조됩니다. 두 경우 모두 하나님께서 이전에 없던 생명과 관계를 창조하시고, 그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1장 마지막에서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만물 위에 계시며 교회의 머리이시라고 선언했습니다. 2장은 예수님의 부활과 높아지심이 성도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보여 주면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첫 문장은 생명이 아니라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읽는 시간 28분소단락 92장 본문 읽기 →

죽어 있었지만 걸어 다니던 사람들

에베소서 2:1–3 본문 →

여러분은 자신의 잘못과 죄로 죽어 있었습니다.에베소서 2:1 · 두루새김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닙니다.

그는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고, 그들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도 이어서 설명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과거를 단순히 어리석거나 잘못된 삶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죽어 있던 상태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전에 그 죄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흐름을 따라 살았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지배자를 따랐습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영입니다.에베소서 2:2 · 두루새김

죽었다고 말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원문에서는 이들의 삶을 걸어 다니는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의도적인 대조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행동하고 선택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면 그 삶은 죽음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이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긋나고, 인간의 삶이 죄의 지배 아래 놓인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누구를 따라 걸었는가

2절은 먼저 「이 세상의 흐름을 따라 살았고」라고 하고, 이어서 「공중의 권세를 잡은 지배자를 따랐습니다」라고 합니다. 첫 번째 표현은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시대의 질서와 가치에 영향을 받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세상」 자체가 악하게 창조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방향으로 형성된 지금 시대의 질서입니다.

두 번째 표현은 그 질서 뒤에 있는 영적 권세를 언급합니다. 「공중의 권세를 잡은 지배자」는 에베소서 6:11–12에 등장하는 악한 영적 세력의 묘사와 연결되며,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해석은 이 지배자를 악마와 연결해 왔습니다.

바울의 목적은 악한 세력의 세계를 자세히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만의 독립적인 판단과 욕망에 따라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도, 실제로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질서에 이끌려 살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3절에서 시선이 갑자기 바뀝니다.

「여러분」에서 「우리도 모두」로

우리도 모두 한때 그들 가운데서 육의 욕심을 따라 살며, 몸과 생각이 원하는 일을 했습니다. 우리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본래 하나님의 분노를 받을 사람들이었습니다.에베소서 2:3 · 두루새김

앞의 두 절에서는 「여러분」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편지를 받는 사람들을 죄 가운데 있던 사람들로 묘사하면서 자신과 다른 유대계 신자들을 그 바깥의 안전한 위치에 세우지 않습니다. 자신들도 같은 상태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뒤에 나올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의 화해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두 집단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이방 사람만 문제가 있고 유대 사람은 완전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양쪽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3절에는 「몸과 생각이 원하는 일」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죄의 문제를 육체의 욕망과 연결하고, 이성이나 지성은 그것을 다스리는 선한 능력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몸」뿐 아니라 「생각」도 언급합니다. 앞의 「육의 욕심」에서 육도 단순히 신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인간의 욕망과 삶의 방식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이성적으로 정당화할 수도 있고, 잘못된 판단을 세심하게 계획하고 실행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몸과 정신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나쁜가가 아니라, 인간 전체가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는가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분노를 받을 사람들」이라는 말

3절의 마지막은 무겁습니다. 이 「본래」를 죄로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관한 말로 읽는 해석과, 인간이 실제로 속해 있던 상태와 삶의 조건을 강조하는 말로 읽는 해석이 있습니다.

본문 자체는 원죄가 어떤 방식으로 각 개인에게 전달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인 상태가 특정 민족이나 일부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분노는 감정적으로 통제력을 잃은 분노가 아니라, 죄와 악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죽어 있었고, 잘못된 길을 걸었으며,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세상의 질서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는 「여러분」만이 아니라 「우리도 모두」 겪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은 인간에게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공중」이라는 표현은 어떤 정확한 물리적 높이나 장소를 계산하도록 주어진 정보가 아니며, 본문은 이 지배자의 이름이나 악한 영들 사이의 서열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3절의 「본래」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퓌세이는 「본성상」 또는 「본래 상태로는」이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어서, 위의 두 해석이 갈립니다.

그러나 하나님 — 죽은 사람을 예수님과 함께 살리시다

에베소서 2:4–7 본문 →

그러나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잘못으로 죽어 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에베소서 2:4–5 · 두루새김

4절의 「그러나」는 이 장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1절에서 죽어 있던 여러분을 가리키는 표현이 2–3절의 설명을 거쳐 이어지다가, 4절에 이르러 비로소 하나님이 새로운 주어로 등장하고, 5절에서 함께 살리셨다는 동사가 나옵니다. 문장의 구조 자체가 구원을 설명합니다. 죽어 있던 사람들의 상태가 길게 이어지다가, 하나님께서 등장하시고 그들을 살리십니다.

바울은 「그러나 여러분이 마음을 고쳐먹고」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입니다.

하나님은 왜 그들을 살리셨는가

바울은 그 이유를 세 가지 표현으로 제시합니다. 자비가 풍성하셨기 때문이고,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며, 그 사랑이 컸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앞의 단락과 정확하게 대응합니다. 인간은 잘못과 죄로 죽어 있었고 하나님의 분노 아래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자비와 사랑으로 행동하셨습니다.

은혜는 인간이 생각보다 괜찮았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처한 상태가 심각했음에도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행동하셨다는 데서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용서를 선언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살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셨을 때 우리에게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5–6절에는 세 가지 동작이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살리셨고, 함께 일으키셨으며, 함께 앉히셨습니다.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자신의 오른쪽에 앉히셨다고 했습니다(1:20). 예수님께 일어난 일이 예수님과 관계를 맺은 사람들의 구원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함께 앉히셨습니다」는 성도들이 지금 육체적으로 하늘의 어떤 자리에 앉아 있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부활과 높아지심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동시에 성도들이 예수님과 동일한 통치 권세를 독립적으로 소유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도 안 됩니다. 문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행동의 주체로 두고, 모든 일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도들이 얼마나 높은 지위를 스스로 얻었는가가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 때문에 그들의 존재가 얼마나 달라졌는가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땅에서 살아가지만, 더 이상 이전의 죽음과 불순종만으로 설명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지금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친절을 통해, 앞으로 올 시대들에 자신의 은혜가 얼마나 엄청나게 풍성한지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에베소서 2:7 · 두루새김

7절에서는 시간의 방향이 미래로 열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은혜를 말로만 설명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에게 베푸신 친절을 통하여 드러내십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대상인 동시에,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 보여 주는 존재가 됩니다.

이렇게 인간의 과거를 돌아보던 문장은 하나님께서 여실 미래로 나아갑니다.

행위에서 비롯되지 않았지만 선한 일을 위해 지어졌다

에베소서 2:8–10 본문 →

여러분은 은혜로, 믿음을 통해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여러분이 한 일의 결과로 얻은 것도 아닙니다.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에베소서 2:8–9 · 두루새김

이 구절은 그리스도교의 구원 이해를 설명할 때 가장 자주 인용되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8–9절만 따로 떼어 읽으면 바로 다음 절이 일으키는 긴장을 놓치기 쉽습니다. 9절은 구원이 우리가 한 일의 결과로 얻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데, 10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한 일을 위해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행위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일까요?

바울은 행위를 부정했다가 다시 긍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위가 차지하는 자리를 바꾸고 있습니다.

은혜와 믿음은 어떤 관계인가

8절에서 구원의 근거는 은혜이고, 구원에 참여하는 통로는 믿음입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것이며, 믿음은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 구원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이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그리스어 지시대명사 투토(οὗτος)는 중성인데 앞의 은혜와 믿음은 모두 여성 명사이므로, 「이것」을 앞 문장 전체, 곧 은혜로 믿음을 통해 구원받았다는 사실로 읽는 해석이 자연스럽습니다. 반면 중성 지시대명사가 여성 명사가 나타내는 개념을 받을 가능성도 배제되지 않으므로, 믿음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가 포함된다고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문법만으로 이 신학적 질문을 모두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앞뒤 내용이 분명하게 강조하는 것은 있습니다. 구원은 인간이 만들어 내거나 자기 공로로 얻어 낸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9절은 그 이유를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이 믿음으로 응답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 자신이 믿음을 통해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 다만 그 믿음을 포함한 구원의 사건을 자기가 더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는 공로로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뒤의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의 관계에도 이어집니다. 구원이 자기 자격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어느 집단도 자기 자격을 내세워 다른 집단보다 하나님 앞에서 우월하다고 자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인간의 행동을 없애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일을 위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일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한 일들을 미리 준비해 두셨습니다.에베소서 2:10 · 두루새김

10절은 은혜가 어떤 삶을 만들어 내는지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들」은 만들어진 것, 작품, 창조된 결과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앞에서는 구원이 인간이 한 일의 결과가 아니라고 했고, 이제는 인간 자신이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가운데 살던 사람들에게 앞으로 착하게 살라고만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그들을 새로운 삶을 살도록 창조하셨고, 그 새로운 삶의 목적이 선한 일입니다.

따라서 선한 일은 구원을 얻기 위해 먼저 제출해야 하는 자격증이 아닙니다. 구원받아 새롭게 창조된 사람들이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길입니다.

처음에도 걸었고, 마지막에도 걷는다

2절에서 바울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흐름을 따라 살았고」라고 말했습니다. 10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도록」 우리를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두루새김은 두 곳을 모두 삶에 관한 말로 옮겼지만, 원문에서는 두 곳 모두 일상적인 걸음을 뜻하면서 삶의 방식을 나타내는 같은 동사가 쓰입니다.

이 반복이 1–10절을 하나로 묶습니다.

처음에 죽어 있던 사람들은 세상의 흐름과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질서를 따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예수님과 함께 살리셨고, 이제 그들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선한 일 안에서 걷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달라진 것은 단지 행동의 목록이 아닙니다. 그 걸음의 방향과 근거가 달라졌습니다.

바울은 은혜를 강조하기 위해 인간의 행동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반대로 선한 행동을 요구하기 위해 은혜가 먼저라는 사실을 약화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람들을 살리셨기 때문에, 그들은 이전과 다른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그 새로운 삶이 사람들 사이에 어떤 변화를 만들어 내는지 보여 줍니다.

구원받기 전에 그들은 누구에게서 멀리 있었는가

에베소서 2:11–13 본문 →

그러므로 여러분의 지난날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태어날 때부터 이방 사람이었습니다. 이른바 할례받은 사람들은 여러분을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이 받은 할례는 사람의 손으로 몸에 행한 의식이었습니다.에베소서 2:11 · 두루새김

이번에는 개인의 잘못과 죄를 기억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방 사람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언약과 약속에서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구원에 관한 설명이 민족과 공동체의 관계로 옮겨갑니다.

할례라는 경계

할례는 이스라엘이 어떤 백성인지를 나타내는 중요한 표지였습니다.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언약의 표지로 할례를 명하십니다. 따라서 할례를 유대 사람들이 마음대로 만들어 낸 차별 제도로 이해하면 구약의 의미를 왜곡하게 됩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2장은 그 표지가 사람들 사이를 구분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 줍니다. 「이른바 할례받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규정하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할례를 「사람의 손으로 몸에 행한 의식」이라고 설명하는 표현은 할례의 역사적 의미 자체를 부정한다기보다, 신체에 새겨진 표지가 예수님 안에서 주어지는 새로운 관계를 결정하는 최종 기준이 될 수 없음을 드러냅니다.

다섯 가지 상실

그때 여러분은 그리스도 없이 지냈고, 이스라엘 백성에 속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언약들과도 관계가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소망도 없이, 하나님도 없이 살았습니다.에베소서 2:12 · 두루새김

이 구절을 이방 사람들이 신앙심이 없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당시 이방 사람들에게도 다양한 종교와 신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의 관계 바깥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언약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과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어진 하나님의 언약을 떠올리게 합니다. 창세기 12:3의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통하여 다른 민족들에게까지 복이 미치리라는 전망을 처음부터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들이 역사 속에서 언약 안의 같은 지위를 누렸던 것은 아닙니다. 12절은 바로 그 차이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13절에서 극적인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전에 멀리 있던 여러분이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에베소서 2:13 · 두루새김

이 「그러나」는 앞의 「그러나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과 대응합니다. 앞에서는 죽음과 생명 사이에서 전환이 일어났고, 이제는 멀리 있음과 가까이 있음 사이에서 전환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피는 1:7에서 죄에서 풀려나는 일을 설명할 때 사용했던 바로 그 사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수님의 죽음이 개인의 잘못을 용서하는 일에서 더 나아가, 서로 멀리 있던 사람들을 새로운 관계로 이끄는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그 관계를 바울은 다음 절에서 「평화」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는 평화를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평화이시다

에베소서 2:14–16 본문 →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의 평화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둘을 하나로 만드시고, 둘 사이를 가로막던 담, 곧 서로 원수 된 관계를 자신의 몸으로 허무셨습니다.에베소서 2:14 · 두루새김

이 짧은 문장이 11–22절의 중심을 이룹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평화를 이루셨다고만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의 평화」라고 말합니다. 평화가 예수님께서 주시는 여러 혜택 가운데 하나라면, 사람들은 그 혜택만 얻고 예수님과는 별개의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평화 자체를 예수님과 연결합니다.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하나 되는 근거는 두 집단이 적당히 양보하여 합의한 결과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신 안에서 둘을 하나로 만드셨다는 사실입니다.

가로막은 담은 실제 성전의 담이었을까

「둘 사이를 가로막던 담」은 당시 예루살렘 성전의 구조를 떠올리게 합니다. 두 번째 성전에는 이방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구역과 그 안쪽의 제한 구역을 구별하는 낮은 돌 장벽이 있었고, 이를 어기면 죽음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이방 사람이 어디까지 가까이 갈 수 있는지가 실제 건축물에 새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담을 바로 그 장벽으로 이해하는 해석이 있지만, 본문이 그것을 직접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성전의 장벽을 떠올리게 하는 비유적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장벽이 상징할 수 있는 분리의 현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까이 갈 수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로막던 담을 허무셨다고 말합니다.

율법을 없애셨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각종 명령을 규정한 율법을 효력 없게 하신 것입니다. 이는 둘을 자신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창조하여 평화를 이루시려는 것입니다.에베소서 2:15 · 두루새김

15절은 에베소서 2장에서 가장 조심해서 읽어야 하는 구절 중 하나입니다. 이것을 모세 율법이 언약과 규정으로서 지니던 효력이 예수님을 통해 끝났다고 이해하는 해석이 있습니다. 반면 이방 사람을 구별하고 하나님의 백성에 참여하는 일을 제한하던 율법의 경계 기능이 없어졌다는 데 초점을 두는 해석도 있습니다. 차이는 예수님께서 효력 없게 하신 율법의 범위를 얼마나 넓게 이해하는가에 있습니다.

다만 본문의 직접적인 관심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목적은 「둘을 자신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창조하여 평화를 이루시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모든 조항이 앞으로 어떻게 적용되는지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이 처음부터 아무 가치도 없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을 구별하던 이전의 언약적 경계가 예수님 안에서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읽을 수도 없습니다.

왜 「하나의 새 사람」이라고 하는가

여기서 「사람」은 반드시 남성 한 사람이 아니라 인간을 가리킬 수 있어서, 「한 새로운 인간」 또는 「하나의 새로운 인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둘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시는 데 그치지 않고, 둘을 자신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창조하십니다.

유대 사람이 그대로 중심에 서 있고 이방 사람이 그 주변에 들어오는 구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두 정체성이 모두 사라져 구별할 수 없는 하나의 민족으로 변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본문의 관심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격과 관계를 결정하던 적대적인 구분이 예수님 안에서 극복되는 데 있습니다.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은 서로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 차이가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차이가 더 이상 원수 된 관계를 유지하는 근거가 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10절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여기서는 두 집단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창조됩니다.

새롭게 지어지는 일은 개인에게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새롭게 지어집니다.

십자가는 누구와 누구를 화해시켰는가

또 십자가를 통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해시키시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로 원수 된 관계를 없애셨습니다.에베소서 2:16 · 두루새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은 서로 하나가 되고, 그 둘은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해합니다. 바울은 한쪽만 하나님과 화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지 않고 「둘을」 화해시키신다고 말합니다. 3절에서 「우리도 모두」 하나님의 분노를 받을 사람들이었다고 한 말과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두 집단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도와주는 외부의 조정 장치가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맺는 관계를 새롭게 하면서, 그들 사이에 존재하던 원수 된 관계도 끝내는 사건입니다.

두루새김이 「원수 된 관계를 없애셨습니다」로 옮긴 자리를 원문은 원수 된 관계를 「죽이셨다」(ἀποκτείνω)고 표현합니다. 앞에서는 죽어 있던 사람들을 살리신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살아 있던 적대 관계를 죽이신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을 죽이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갈라놓던 원수 된 관계를 죽이셨습니다.

조금 더 깊이

성전 장벽의 경고 비문은 실제로 발견되었으며, 1871년에 발견된 완전한 비문은 현재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실제로 그 장벽의 돌을 허무셨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15절의 원문은 「계명들로 이루어진 율법」과 「조문들」을 연결하며, 두루새김은 이 자리를 「각종 명령을 규정한 율법」으로 옮겼습니다. 두 해석 모두 본문이 율법을 언급한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멀리 있던 사람과 가까이 있던 사람이 같은 길로 나아가다

에베소서 2:17–18 본문 →

그분은 오셔서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가까이 있던 사람들에게도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에베소서 2:17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이사야 57:19와 52:7의 언어를 가져와 예수님께서 이루신 평화를 설명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회복의 소식이 이제 예수님을 통하여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모두에게 선포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직접 모든 이방 사람 수신자를 찾아가셨다는 뜻일까요? 본문은 그 방문의 방식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과 그분을 전하는 복음 선포를 통하여 평화를 전하셨다고 이해할 수 있으며, 13–16절에서 죽음과 화해를 이야기한 뒤 기쁜 소식의 선포를 언급하는 흐름이 이 읽기를 뒷받침합니다.

평화는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소식이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그들은 그 소식을 통하여 새로운 관계 안으로 들어옵니다.

가까이 있던 사람도 같은 길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양쪽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2:18 · 두루새김

예수님을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본문의 강조점은 삼위일체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가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표현은 「우리 양쪽 모두」입니다. 가까워진 이방 사람들이 유대 사람과 별도의 출입구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양쪽 모두 같은 예수님을 통하여 같은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이것은 평등이라는 추상적 원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실제 관계가 달라졌다는 선언입니다. 이제 바울은 그 변화를 세 가지 이미지로 설명합니다. 나라의 시민, 하나님의 가족,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57:19의 본래 문맥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잘못을 보시면서도 그들을 고치고 회복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 장면으로, 처음부터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을 명시적으로 구별한 구절은 아닙니다. 이사야 52:7에서는 시온을 향하여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신다는 기쁜 소식이 선포됩니다.

남에서 시민으로, 시민에서 집안사람으로

에베소서 2:19 본문 →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외국인도, 시민권 없이 머무는 사람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같은 나라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에베소서 2:19 · 두루새김

시민권 없이 머무는 사람은 어떤 지역에 살고 있어도 그곳의 시민들과 같은 소속과 권리를 가진 것은 아닌 사람을 가리킵니다. 고대 도시와 제국의 사회에서는 어떤 공동체에 정식으로 속해 있는가에 따라 법적·사회적 지위가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이방 사람 수신자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 곁에 머물면서도 그 백성의 일원은 아닌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기서 12절의 표현이 뒤집힙니다. 앞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에 속하지 못했다고 했는데, 이제는 성도들과 같은 나라의 시민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시민이라는 이미지에서 멈추지 않고 곧바로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말합니다. 시민권은 공적인 소속을 설명하고, 가족이라는 말은 더욱 가까운 관계를 나타냅니다. 18절에서 이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그 아버지께 나아갈 길을 얻은 사람들이 이제 그분의 가족이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이 가족이라는 이미지가 다음 절에서 집이라는 건축물의 이미지로 발전합니다.

사람들로 지어지는 하나님의 성전

에베소서 2:20–22 본문 →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졌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그 모퉁잇돌이십니다.에베소서 2:20 · 두루새김

이제 바울은 새로운 건물을 소개합니다.

기초가 있고, 모퉁잇돌이 있으며, 건물 전체가 서로 맞물립니다. 무엇보다 이 건물은 성전으로 자라 갑니다.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터는 무엇인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라는 기초」는 두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전한 가르침과 증언이 기초라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고, 두루새김의 표현처럼 사도들과 예언자들 자신이 기초를 이루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어의 속격 구조만으로는 어느 쪽인지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습니다.

어느 해석에서든 이 건물은 제멋대로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증언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집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3:11에서는 예수님 외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두 표현을 서로 모순된 설계도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고린도전서는 교회의 궁극적인 기초가 예수님이시라는 점을 강조하고, 에베소서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증언 위에 공동체가 세워진다고 하면서도 예수님께 특별한 지위를 부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기초 가운데 하나가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모퉁잇돌이십니다.

왜 모퉁잇돌인가

모퉁잇돌은 건물의 모퉁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돌입니다. 이사야 28:16에서 하나님께서는 시온에 견고하고 귀한 모퉁잇돌을 두신다고 말씀하시는데, 거짓된 안전장치에 의존하는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사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메시지입니다. 에베소서는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이 건축 이미지를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예수님께서 모퉁잇돌이시라는 것은 건물의 모든 부분이 그분을 기준으로 관계를 맺는다는 뜻입니다.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은 서로 다른 역사와 배경을 지녔지만, 예수님 안에서 함께 세워집니다.

그들의 하나 됨을 결정하는 기준은 어느 집단이 다른 집단을 자기 모습에 맞추는가가 아닙니다. 모퉁잇돌이신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자란다는 말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맞물려, 주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 갑니다.에베소서 2:21 · 두루새김

일반적으로 건물은 지어진다고 말하고, 생명체는 자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건축물에 관한 표현과 성장에 관한 동사를 함께 써서, 교회를 완성품이 아니라 지금도 형성되고 성장하는 공동체로 보여 줍니다.

교회의 기초는 이미 주어졌고 모퉁잇돌도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예수님께 합당하게 세워지는 과정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정체성은 예수님 안에서 결정되지만, 그 정체성이 공동체의 삶에서 드러나고 성숙하는 일은 계속됩니다.

교회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성전 자체가 된다

이야기는 이방 사람들이 마침내 성전 안으로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결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 자신이 거룩한 성전으로 세워집니다.

21절의 「성전」은 성전의 건물, 특히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곳과 관련된 성소를 가리킬 수 있는 말입니다. 이것이 14절의 담과 연결될 때 그림이 완성됩니다. 이전에 성전의 안쪽에 자유롭게 다가갈 수 없던 사람들이, 이제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지어지는 하나님의 성전에 함께 참여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세워져,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서 사시는 집이 되어 갑니다.에베소서 2:22 · 두루새김

앞에서 바울은 이방 사람 수신자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 속하지 못했던 과거를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절에서 그들을 향해 「여러분도」 함께 세워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새 공동체의 가장자리에 참여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시는 건물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이 건물은 특정 민족이 독점하는 소유물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서로 화해한 사람들이 한 성령 안에서 함께 세워지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조금 더 깊이

20절의 예언자들이 구약의 예언자들인지 그리스도교 초기 공동체의 예언자들인지도 견해가 나뉩니다. 에베소서 3:5에서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 하나님의 신비가 드러났다고 말하므로 초기 공동체의 예언자들로 보는 해석이 문맥상 설득력을 갖지만, 2:20의 표현 자체가 구약 예언자들과의 연결을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모퉁잇돌이 건물에서 정확히 어느 자리에 놓이는지에 관해서도 해석의 차이가 있습니다. 21절은 명사 앞에 관사가 없어 「건물 전체」로도 「건물마다」로도 읽을 여지가 있는데, 앞뒤가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를 강조한다는 점이 「건물 전체」라는 읽기를 뒷받침합니다. 하나님이 머무시는 집이라는 주제는 성경 전체를 관통합니다. 출애굽기 25:8에서 하나님께서는 성소를 만들게 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머무시겠다고 말씀하셨고, 열왕기상 8:27에서 솔로몬은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도 하나님을 모실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에스겔 37:26–28에서 하나님은 평화의 언약을 맺으시고 백성 가운데 자신의 성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고린도전서 3:16–17도 교회 공동체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에베소서의 특징은 이 성전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 화해하여 함께 세워지는 성전이라는 데 있습니다.

담이 있던 자리에 사람들이 함께 세워진다

에베소서 2:1–22 본문 →

에베소서 2장은 구원이라는 주제를 두 번 설명하는 장이 아닙니다. 한 번은 죄와 죽음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일을, 또 한 번은 분리와 적대 관계에서 벗어나는 일을 설명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를 보여 줍니다. 개인이 죄에서 용서받았다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향한 적대와 배제를 계속 정당화한다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하나의 새 사람으로 창조하셨다는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그 화해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놓친다면, 본문이 말하는 평화를 단순한 사회적 타협으로 축소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을 살리십니다.

그리고 서로 원수였던 사람들을 하나로 지으십니다.

이 장의 실제 역사적 배경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의 관계이며, 본문이 말하는 화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의 역사와 예수님의 십자가에 근거합니다. 그 위에서 오늘의 공동체에도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는 경제적 지위나 교육 수준, 문화적 배경, 익숙한 관습을 기준으로 누군가를 가까운 사람이나 먼 사람으로 구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이 모든 갈등을 무조건 덮거나 잘못에 대한 책임을 묻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에베소서는 뒤에서 진실을 말하고 불의한 행동을 버리라고 권면합니다(4:25–32). 예수님의 평화는 진실과 정의를 희생해서 얻는 겉모습의 평온함이 아닙니다. 또 22절은 자신들의 힘만으로 성전을 완성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함께 세워 가신다는 선언입니다.

장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한 건물을 보게 됩니다. 기초가 놓여 있고, 모퉁잇돌이 제자리에 있으며, 건물의 여러 부분이 서로 맞물리고 있습니다.

아직 모든 것이 완성된 건물은 아닙니다. 건물은 계속 자라고 있습니다.

그 건물 안에는 이전에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니, 그들은 건물 안에 들어온 손님이 아니라 건물의 일부입니다.

예수님께서 허무신 담은 사람들을 갈라놓던 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건물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성전입니다. 이제 그들은 서로를 가로막는 담의 양쪽에 서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시는 집으로 함께 세워지는 사람들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