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풀어 읽기 · 9장

이 장의 자리 · 9–10장 · 더 좋은 성소와 제사

닫혀 있던 길, 단번에 들어가신 분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머무시기 위해 성막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성막에는 이상한 특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줄어들었습니다.

바깥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제물을 가지고 나아올 수 있었습니다. 성막의 첫째 칸에는 제사장들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가장 안쪽에 있는 「지성소」에는 오직 대제사장만, 그것도 일 년 중 정해진 때에 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나타내는 장소가 동시에 사람이 가까이 가는 것을 제한하는 장소였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은 이 역설에서 출발합니다.

성막의 구조와 도구들을 자세하게 설명하지만, 저자가 정말 보여 주려는 것은 건축물이 아닙니다. 그 안에서 누가 어디까지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앞에서는 한 해에 한 번, 대제사장 혼자, 다른 생명의 피를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자신의 피로 단 한 번 성소에 들어가셔서 영원한 속량을 이루셨습니다」(12절).

이 대조가 9장의 중심을 이룹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예수님의 들어가심이 사람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왜 그 일에 죽음이 필요했는지,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실 때 무엇이 이루어질 것인지까지 이어집니다. 앞 장이 새 언약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었다면, 9장은 그 약속을 실현하는 예수님의 제사장 사역을 설명합니다.

본문 전체를 관통하는 세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무엇이 사람을 깨끗하게 합니까? 그 일은 얼마나 자주 이루어져야 합니까?

히브리서 9장은 이 세 질문에 예수님 한 분을 가리키며 대답합니다.

읽는 시간 30분소단락 119장 본문 읽기 →

장막의 기구들이 보여 주는 것

히브리서 9:1–5 본문 →

저자는 첫 언약에도 예배에 관한 규정과 성소가 있었다고 말한 뒤, 성막 안으로 독자를 데려갑니다.

첫째 칸에는 등잔대와 상과 차려 놓은 빵이 있습니다. 둘째 휘장 뒤에는 「지성소」가 있고, 그곳에는 언약궤와 속죄의 자리가 있습니다. 성막의 중심으로 들어갈수록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에 직접 관계되는 물건들이 등장합니다.

언약궤 안에 있었다고 소개되는 것은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 싹이 난 아론의 지팡이, 언약을 새긴 돌판들입니다. 만나는 하나님이 백성을 먹이신 일을 떠올리게 하고(출애굽기 16장), 아론의 지팡이는 제사장 직분을 둘러싼 반역 가운데 하나님이 누구를 택하셨는지를 보여 줍니다(민수기 17장). 언약을 새긴 돌판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으신 관계의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 물건들의 상징을 하나하나 풀지 않습니다.

언약궤 위에는 영광의 그룹들이 속죄의 자리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것들을 하나하나 설명할 수 없습니다.히브리서 9:5 · 두루새김

이 말은 시간이 부족하다는 변명처럼 들리지만, 설명이 향하는 방향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저자가 관심을 두는 것은 각 도구의 신비로운 의미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이 놓인 성막에 사람이 어떻게 들어갈 수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도구의 목록은 5절에서 끝나고, 곧바로 제사장들의 출입 규정으로 넘어갑니다.

속죄의 자리 위에 드리운 그림자

5절에 나오는 「속죄의 자리」는 언약궤를 덮는 덮개를 가리킵니다. 레위기 16:14–15에서 대제사장이 피를 뿌리는 곳이 바로 이 자리입니다. 그 위에는 그룹들이 날개로 그늘을 드리우고 있고, 출애굽기 25:22에서 하나님은 속죄의 자리 위, 두 그룹 사이에서 모세와 만나 말씀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곳은 단순히 율법을 보관하는 궤의 덮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과 만나시겠다고 정하신 자리이며, 죄를 씻는 피가 뿌려지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가장 거룩한 장소에 인간은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그곳에 계신 하나님의 거룩함 때문에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 긴장이 다음 단락에서 선명해집니다.

조금 더 깊이

4절에는 해석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본문은 지성소에 「향을 피우는 금 제단」이 있었다고 말하지만, 출애굽기 30:6과 40:26에 따르면 향을 피우는 제단은 안쪽 휘장 앞, 곧 첫째 칸에 놓여 있었습니다. 한 견해는 그리스어 튀미아테리온을 고정된 제단이 아니라 향을 담아 가지고 들어가는 향로로 읽습니다. 레위기 16:12–13에서 대제사장이 향로와 향을 가지고 휘장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다른 견해는 향을 피우는 제단으로 읽되, 저자가 실제 위치보다 안쪽 성소와 예식에서 맺는 관계를 강조했다고 봅니다. 제단은 휘장 밖에 있었지만 속죄의 자리와 마주했고, 속죄일의 예식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출애굽기 30:10; 레위기 16:18). 그리스어 표현만으로 두 견해 가운데 하나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두루새김의 「향을 피우는 금 제단」은 두 번째 방향을 따르는 번역이지만, 이것만이 가능한 읽기는 아닙니다. 언약궤의 내용물에도 기록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16:33–34와 민수기 17:10은 만나와 지팡이를 증언 앞에 두도록 말하고, 열왕기상 8:9는 솔로몬 시대의 궤 안에 돌판 둘만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이 기록들의 차이를 정확히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출입을 허락하는 규정이 출입의 한계를 드러낸다

히브리서 9:6–10 본문 →

6절과 7절은 아주 정교하게 대조됩니다.

제사장들은 첫째 칸에 「늘 들어갑니다」. 여러 제사장이 반복해서 드나드는 곳입니다. 그러나 둘째 칸에는 한 사람만 정해진 때에 들어가고, 그 사람도 피 없이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것은 레위기 16장의 속죄일 규정을 배경으로 합니다. 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자신과 자기 집안을 위한 제사를 드리고, 백성을 위한 제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 피를 가지고 휘장 안으로 들어가 속죄의 자리와 그 앞에 뿌립니다.

그러나 둘째 칸에는 대제사장만 한 해에 한 번 들어갑니다. 그때는 반드시 피를 가지고 들어가서, 자기 죄와 백성이 모르고 지은 죄를 씻기 위해 그 피를 드립니다.히브리서 9:7 · 두루새김

대제사장도 자신을 위해 피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는 백성과 달리 죄의 문제에서 자유로운 인물이 아닙니다.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지만, 자신도 죄를 씻어야 합니다.

이것이 옛 대제사장 직분의 결정적인 한계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령께서 장막의 구조로 말씀하십니다

8절에서 저자는 성막의 출입 규정에 뜻밖의 해석을 붙입니다.

성령께서는 이를 통해 첫째 칸이 아직 서 있는 동안에는 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음을 보여 주십니다.히브리서 9:8 · 두루새김

성막의 두 칸은 단순히 공간을 나눈 것이 아니었습니다. 휘장은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곳을 구별하는 동시에, 그 안으로의 자유로운 출입을 막습니다. 저자는 그 구조 자체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의 한계를 보여 준다고 읽고, 이것을 자신의 독창적인 상상이 아니라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성경의 증언으로 제시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직접 명하신 성막이 왜 그런 제한을 담고 있었습니까? 저자는 그것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아직 최종적인 단계에 이르지 않았다는 표시로 해석합니다. 성막에 무엇이 있었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곳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읽어 내는 것입니다.

「첫째 칸이 아직 서 있는 동안」이라는 표현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 말한 바깥쪽 칸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고, 그 칸이 대표하는 옛 성막 제도 전체를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첫째 읽기는 문장의 직접적인 연결에 충실하고, 둘째 읽기는 11–12절에서 옛 성막과 예수님의 새로운 성소 출입이 비교되는 흐름을 잘 설명합니다. 두 경우 모두 옛 성소의 출입 질서가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가도록 허락하지 않았다는 점은 같습니다.

제사를 드렸지만 양심은 온전해지지 못했습니다

9절은 이제 그 한계가 예배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의미했는지 설명합니다.

이 첫째 칸은 지금 이 시대를 보여 주는 비유입니다. 이런 예배에서 드리는 예물과 제물은 예배하는 사람을 양심의 면에서 온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히브리서 9:9 · 두루새김

여기서 처음으로 「양심」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자신이 한 일과 자신의 상태를 의식하고 판단하는 내면의 인식으로, 이 문맥에서는 특별히 죄와 하나님 앞에서의 상태를 의식하는 인간의 내면과 관련됩니다.

옛 제사가 무의미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제사는 하나님이 율법 안에서 정하신 실제 예배였으며, 부정한 사람을 깨끗하게 하여 공동체의 예배 생활에 참여하도록 하는 역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예식상의 깨끗함과 양심을 온전하게 하는 일은 같지 않습니다. 그 제도가 인간의 죄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여 양심을 온전하게 하지는 못했다는 것이 히브리서의 판단입니다.

10절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예식에 관한 규정을 「새로운 질서가 세워질 때까지 적용되는 몸에 관한 규정」이라고 부릅니다. 「새로운 질서가 세워질 때」(διόρθωσις)로 옮긴 원문은 무엇을 바로 세우거나 제대로 정돈하는 때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옛 규정들이 무가치한 오류였으므로 버려져야 한다는 말보다, 더 온전한 질서가 세워지기 전까지 주어진 임시적인 제도였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이제 그 「새로운 질서가 세워질 때」가 무엇인지 11절에서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7절의 「한 해에 한 번」은 하루 중 실제 입장이 단 한 차례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레위기 16장의 예식에는 여러 차례의 출입이 포함됩니다. 핵심은 그 일이 매년 정해진 속죄일에만 이루어지는 특별한 직무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모르고 지은 죄」라는 표현을 너무 좁게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레위기 16:16은 속죄일의 정결 예식이 이스라엘의 모든 죄와 반역에 관련된다고 밝히므로, 히브리서가 여기서 의도적인 모든 죄를 속죄일의 범위 밖으로 배제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들어가셨습니다

히브리서 9:11–12 본문 →

11절은 앞의 내용과 대조하는 짧은 말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것들의 대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곧 이 창조 세계에 속하지 않은 더 크고 더 온전한 성막을 지나,히브리서 9:11 · 두루새김

앞 단락에서 성막의 출입은 제한되어 있었고, 제사는 반복되었으며, 예배하는 사람의 양심은 온전하게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어진 좋은 것들」의 대제사장으로 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차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알려 주시기만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저자는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약속된 좋은 것들이 이미 실현되기 시작했다고 선언합니다.

9절에서 옛 제사가 사람을 「온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는데, 이제 예수님께서 거쳐 가신 성막은 「더 온전한」 성막이라고 합니다. 완전함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예배 질서와, 더 온전한 성소에 들어가신 대제사장이 대비됩니다.

저자는 그 성막이 얼마나 넓은지, 어떤 재료로 지어졌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이 창조 세계에 속하지 않은」 성막이라고 말합니다. 하늘에 지상의 건축물과 똑같은 구조의 거대한 건물이 있다고 상상하라는 뜻이라기보다, 성막의 언어를 사용하여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속한 궁극적인 성소에 들어가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사장과 제물이 한 분입니다

12절은 예수님의 들어가심이 옛 대제사장의 들어감과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 줍니다.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자신의 피로 단 한 번 성소에 들어가셔서 영원한 속량을 이루셨습니다.히브리서 9:12 · 두루새김

옛 대제사장은 다른 생명의 피를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제사장과 제물은 서로 구별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피로 들어가셨습니다.

제사를 드리시는 분과 제물로 바쳐지시는 분이 예수님 한 분에게서 만납니다.

이것은 피라는 물질 자체에 특별한 힘이 있다는 설명이 아닙니다. 피는 생명을 바치는 희생과 연결되며,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들어가셨다는 말은 예수님 자신의 죽음과 자기희생이 제사장 사역의 근거가 된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하늘에 실제로 피를 담은 그릇을 가지고 들어가셨는지와 같은 절차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단 한 번」은 단순히 첫 번째로 들어가셨다는 뜻이 아니라,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는 결정적인 들어가심을 가리킵니다. 그 결과는 「영원한 속량」입니다. 속량은 대가를 치르고 풀어 주거나 해방하는 일을 나타낼 수 있는 말로, 출애굽에서 이스라엘이 종살이로부터 풀려난 사건과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그러나 저자는 어떤 특정한 존재에게 몸값을 지급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죄에 얽매인 사람들에게 결정적인 해방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문맥의 초점입니다. 해마다 다시 이루어지는 제사와 달리, 이 속량은 일시적인 효력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이제 저자는 그 효력이 실제로 사람에게 무엇을 가져오는지 설명합니다.

조금 더 깊이

11절에는 사본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미 이루어진」 좋은 것들로 읽는 사본이 있고, 「앞으로 올」 좋은 것들로 읽는 다른 전승이 있습니다. 어느 읽기를 채택하느냐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지지만, 히브리서 9장 전체는 예수님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일과 아직 기다리는 완성을 함께 말합니다.

깨끗해진 양심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히브리서 9:13–14 본문 →

13절에서 저자는 「암송아지의 재」라는 조금 뜻밖의 예식을 끌어옵니다. 민수기 19장의 정결 예식입니다. 시체에 접촉한 사람은 부정하게 되었고, 붉은 암송아지를 태운 재로 준비한 정결의 물로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했습니다. 죽음과의 접촉으로 생긴 부정이 예배 공동체의 생활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 그리고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리는 암송아지의 재도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몸을 깨끗하게 한다면,히브리서 9:13 · 두루새김

저자는 옛 정결 예식의 효력을 아예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런 정결의 효력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그것을 설명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영원한 영을 통해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신 그리스도의 피는 얼마나 더 큰 일을 하겠습니까? 그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할 것입니다.히브리서 9:14 · 두루새김

여기서 대비되는 것은 몸은 중요하지 않고 마음만 중요하다는 식으로 둘을 나누는 생각이 아닙니다. 옛 제도가 다루던 예식상의 깨끗함과, 예수님의 사역으로 이루어지는 양심의 깨끗함 사이의 차이입니다. 옛 예식을 통해 사람은 부정한 상태에서 벗어나 다시 예배 공동체의 생활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예수님의 희생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가로막는 죄의 문제를 다루어 그 사람의 양심까지 깨끗하게 합니다.

「흠 없는 자신을」 드리셨다는 말

14절은 예수님께서 「흠 없는」 분이셨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셨다고 말합니다.

「흠 없는」이라는 표현은 구약의 제물 규정을 떠올리게 합니다. 레위기 1:3 등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적용될 때 이 표현은 단순히 몸에 결함이 없다는 뜻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는 이미 예수님께서 죄 없이 시험을 받으셨다고 말했으며(4:15), 예수님의 흠 없음을 제물로서 알맞다는 점과 연결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에게 억지로 끌려가셔서 바쳐지신 희생자가 아니라 「자신을」 드리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이 저지른 폭력적인 사건이라는 역사적 현실을 지니지만, 히브리서는 그 사건을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신 예수님의 사역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바치셨다는 점이 옛 제사의 동물 제물과 결정적으로 구별됩니다.

「영원한 영을 통해」는 성령을 가리킨다고 읽을 수도 있고, 예수님 자신의 영원한 영적 생명을 가리킨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해석을 취하더라도 예수님의 자기희생은 단순한 겉의 예식을 넘어 영원한 효력을 지니는 제사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되는 목적

14절의 마지막은 그 피가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고 말합니다.

양심이 깨끗해지는 것은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저자는 왜 양심의 깨끗함을 말하다가 곧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말합니까? 앞에서는 성막의 출입을 다루었습니다. 누구는 들어갈 수 있고, 누구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조차 자기 죄를 위한 피가 필요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피는 사람을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합니다. 따라서 양심이 깨끗해지는 것은 과거의 잘못을 떠올려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심리적 상태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을 섬길 수 있는 관계의 회복입니다.

「섬기게」(λατρεύω)로 옮긴 원문은 신에게 드리는 예배와 섬김을 나타내는 말로, 앞에서 제사장들이 성막 안에서 행한 예배를 가리키던 말이 이제 깨끗하게 된 사람들의 하나님 섬김을 설명하는 데 쓰입니다. 저자는 예배가 무의미해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예배하는 사람에게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이 정결이 왜 예수님의 죽음을 필요로 했는지, 다음 단락에서 설명합니다.

조금 더 깊이

「영원한 영을 통해」는 원문만으로 성령인지, 예수님 자신의 영원한 영적 생명 또는 하나님으로서의 본성에 관련된 표현인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죽은 행실」에도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죄와 죽음에 속한 행동들을 뜻한다고 볼 수 있고, 생명을 주지 못하는 무력한 종교적 행동까지 염두에 두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앞의 6:1에서도 원문에서는 같은 표현이 등장합니다. 두 경우 모두 하나님께 나아가는 삶에서 벗어나야 할 것을 가리키지만, 그것을 모든 인간의 선행이나 구약의 모든 예배 행위와 동일시할 근거는 부족합니다.

영원한 유산을 받게 하는 죽음

히브리서 9:15–17 본문 →

15절에서 저자는 예수님을 다시 「새 언약의 중개자」라고 부릅니다. 이번에는 그 중개자의 직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이루는지 밝힙니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새 언약의 중개자이십니다. 첫 언약 아래에서 저지른 죄로부터 사람들을 풀어 주시려고 죽으셨습니다. 이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약속된 영원한 유산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히브리서 9:15 · 두루새김

예수님의 희생은 예수님께서 역사 속에 나타나신 이후에 저지른 죄에 대해서만 효력이 있는 사건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저자는 예수님의 죽음을 이전 언약 아래에서 벌어진 인간의 불순종까지 다루는 결정적인 구원의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앞에서 말한 「영원한 속량」의 의미가 더 넓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목적은 과거의 죄를 해결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약속된 영원한 유산」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 유산은 물질적 재산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궁극적인 구원의 몫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지나간 불순종에서 사람들을 풀어 주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약속된 미래를 열어 줍니다.

왜 갑자기 유언 이야기가 등장하는가?

16–17절에서 저자는 뜻밖의 설명을 합니다.

유언이 있을 때에는 유언을 남긴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어야 합니다.히브리서 9:16 · 두루새김

이 대목은 그리스어의 한 단어가 지닌 두 가지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디아테케(διαθήκη)는 성경에서 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을 나타내지만, 그리스어에서 「유언」이라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15절에서 「영원한 유산」이 등장한 뒤 16–17절은 유언이 효력을 얻으려면 유언을 남긴 사람의 죽음이 필요하다는 설명으로 이어지므로, 두루새김이 이 두 절에서 「유언」으로 옮긴 것은 문맥상 자연스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유산을 약속받는다고 해서 그 유산을 즉시 상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유언에는 유언을 남긴 사람의 죽음이라는 조건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죽음은 영원한 유산의 약속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유일한 해석은 아닙니다.

16–17절에서도 「언약」이라는 뜻을 유지해야 한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 경우 죽음은 유언을 남긴 사람의 사망이 아니라 언약을 맺을 때 따르는 죽음, 특히 희생 제물의 죽음과 관련하여 이해됩니다. 「유언」 읽기는 15절의 유산과 17절의 「유언을 남긴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기 때문입니다」를 자연스럽게 설명하고 고대 유언 문서들의 관행에서도 근거를 찾습니다. 반면 「언약」 읽기는 15절과 18절을 잇는 설명의 연속성, 곧 언약과 희생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강점이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저자는 예수님의 죽음이 새 언약과 유산의 약속에 꼭 필요한 사건이라는 점을 밝히려 합니다. 그리고 18절에서 곧바로 첫 언약을 세울 때의 피로 돌아갑니다. 저자의 목적은 유언에 관한 법률 논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언약이 세워지는 일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언약을 세운 피와 죄를 씻는 피

히브리서 9:18–22 본문 →

그래서 첫 언약도 피로 세워졌습니다.히브리서 9:18 · 두루새김

이제 저자는 출애굽기 24장의 사건을 다시 들려줍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고, 백성은 순종하겠다고 대답합니다. 모세는 언약의 책을 읽어 준 뒤 피를 백성에게 뿌립니다.

그때 모세가 말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다.」히브리서 9:20 · 두루새김

출애굽기 24:8을 직접 인용한 이 말에서, 피는 죄를 씻는 제사의 피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본래 문맥에서 그것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언약을 세우는 예식에 사용된 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겠다고 응답한 백성 위에 피가 뿌려집니다. 언약 관계가 말로만 선언되는 것이 아니라, 피를 사용하는 엄숙한 예식을 통해 세워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왜 출애굽기의 기록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는가?

19절에서는 모세가 피를 「물, 붉은 양털, 우슬초라는 식물」과 함께 가져다가 「율법책과 온 백성」에게 뿌렸다고 말합니다. 출애굽기 24:3–8의 기록에는 이 세부 사항이 모두 등장하지 않지만, 저자의 주된 관심은 예식 도구가 정확히 몇 개 사용되었는지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첫 언약이 피와 관계된 예식을 통해 세워졌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21절은 성막과 예배에 쓰는 모든 도구에도 피가 뿌려졌다고 말합니다. 이제 피는 사람에게만 관계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장소와 도구를 깨끗하게 하는 일에도 관련됩니다. 이것은 23절의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셨다면, 그 성소와 예수님의 희생은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피를 흘리지 않고서는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22절은 유명하지만, 자주 지나치게 단순하게 받아들여지는 구절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거의 모든 것이 피로 깨끗해집니다. 피를 흘리지 않고서는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히브리서 9:22 · 두루새김

저자는 「거의」라고 말합니다. 모든 깨끗하게 하는 예식에 반드시 피가 사용되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레위기 5:11–13에서는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 짐승 대신 고운 밀가루를 속죄 제물로 바칠 수 있고, 그 경우에도 죄를 씻고 용서받는다고 선언됩니다.

그렇다면 「피를 흘리지 않고서는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라는 말은 모순입니까? 이 문장을 율법의 모든 예외를 부정하는 절대적인 예식 규칙으로 읽으면 어려움이 생깁니다. 그러나 문맥에서 저자는 제사 제도의 중심적인 원리, 곧 피 흘림과 죄를 씻는 일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17:11에서도 피는 생명과 연결되고, 제단 위에서 죄를 씻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의 주장은 하나님이 실제 피를 보지 않으시면 어떤 경우에도 용서하지 못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저자는 죄를 다루는 제사의 중심에 생명을 바치는 희생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예수님께서 바로 자신의 생명을 바치셨다고 설명해 왔습니다.

이제 23절에서 논증은 가장 어려운 지점에 도달합니다.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 24장은 피를 제단과 백성에게 뿌린 일을 말하지만, 책에 피를 뿌렸다는 언급은 없고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도 그 장면에서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런 요소들은 레위기 14장의 깨끗하게 하는 예식과 민수기 19장의 암송아지 예식을 떠올리게 하므로, 저자가 여러 정결 예식의 요소를 언약을 세우는 장면과 함께 서술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부정확한 기억 때문인지, 알려진 제사 전승을 반영한 것인지, 여러 본문을 의도적으로 결합한 것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19절의 염소의 피 부분에도 사본 차이가 있어, 두루새김은 「송아지와 염소의 피」라고 옮겼지만 일부 사본은 송아지만 언급합니다. 두 읽기 모두 피가 언약을 세우는 데 사용되었다는 논증에는 차이를 만들지 않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도 깨끗해져야 하는가

히브리서 9:23 본문 →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을 본뜬 모형들은 이런 것으로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것들 자체는 이보다 더 나은 제물들로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히브리서 9:23 · 두루새김

이 구절은 히브리서 9장 전체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땅의 성소가 피를 통해 깨끗하게 된다는 것은 앞의 설명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늘에 있는 것들도 깨끗해져야 합니까? 하늘의 성소에도 죄나 더러움이 있다는 뜻입니까?

본문은 이 질문에 직접적인 설명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 자체가 죄로 더럽혀져 있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해석은 크게 세 방향으로 갈립니다. 새 언약의 예배 질서를 세워 하나님께 바치는 일로 보는 읽기, 하늘 성소 자체가 실제로 깨끗해지는 예식의 사건으로 보는 읽기,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이 깨끗해지는 일과 연결하는 읽기입니다.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예수님의 희생이 새 질서를 여는 일인지, 성소와 죄 사이의 더러움을 해결하는 일인지, 사람의 나아감을 가능하게 하는 일인지 강조점이 달라집니다.

어느 해석을 따르든, 저자는 땅의 성소와 하늘의 성소를 연결하면서도 예수님의 희생이 이전 제물들과 같은 수준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땅의 성소는 그에 맞는 제물을 통해 깨끗하게 되었지만, 하늘에 있는 것들 자체에는 더 나은 제물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단 한 번의 희생은 옛 제물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효력을 지닙니다.

그리고 24절은 예수님께서 어디에 계신지를 밝힘으로써 이 어려운 논증을 마무리합니다.

조금 더 깊이

첫째 읽기는 옛 성막을 피로 거룩하게 구별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희생이 제사장과 관련된 새로운 질서를 세운다고 봅니다. 둘째 읽기는 레위기 16:16에서 이스라엘의 더러움과 죄 때문에 성소를 위한 속죄 예식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게, 예수님의 희생이 하늘 성소와 인간의 죄 문제 사이에 놓인 더러움을 해결한다고 읽습니다. 셋째 읽기는 예수님의 희생으로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또 저자는 「더 나은 제물들」이라고 복수형을 썼지만, 이어지는 문맥이 예수님의 희생이 오직 한 번 이루어졌다고 거듭 강조하므로 이 복수형을 예수님께서 여러 번 희생하셨다는 뜻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앞의 제물들과 짝을 이루도록 복수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지만, 정확한 이유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이제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서신다

히브리서 9:24–25 본문 →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성소를 본떠 사람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하늘 그 자체에 들어가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서시려고 그렇게 하셨습니다.히브리서 9:24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 하늘에 들어가셨다는 것은 과거에 일어난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제」와 「우리를 위해」라는 말은 그 일이 끝난 역사로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늘에 들어가신 예수님의 제사장으로서의 지위가 지금도 우리에게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반복되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이시라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반복해서 희생하셔야 한다면

25절은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처럼 해마다 들어가셔서 자신을 여러 번 드리시는 분이 아니시라고 말합니다. 옛 대제사장은 「자기 것이 아닌 피」를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12절의 「자신의 피로」와 정반대 편에 놓인 말입니다.

26절에서 저자는 하나의 가정을 제시합니다.

그렇게 하셔야 했다면 세상이 시작된 때부터 여러 번 고난을 겪으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시대의 마지막에, 자신을 제물로 드려 죄를 없애시려고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히브리서 9:26 · 두루새김

예수님의 희생이 옛 제사처럼 반복되어야 한다면, 하늘의 성소에 여러 번 드나드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자신을 드리셔야 하고, 자신을 드리신다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고난과 죽음이 따르는 일입니다. 희생을 반복한다는 것은 고난을 반복한다는 뜻이 됩니다.

저자는 이 가정을 부정합니다.

「죄를 없애시려고」(ἀθέτησις)로 옮긴 원문은 어떤 것을 폐하거나 효력을 없애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죄를 잠시 덮어 두는 예식이 아니라, 죄의 문제를 결정적으로 처리하는 사건으로 묘사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고난을 겪으실 필요가 없다는 것은 그 희생이 부족함 없이 이루어졌다는 저자의 확신을 드러냅니다.

시대의 마지막은 이미 시작되었다

26절은 예수님의 희생이 「시대의 마지막」에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세상이 이미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오심과 희생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의 역사가 결정적인 단계에 이른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죄와 고난, 죽음의 현실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저자는 모든 것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희생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세 번 나타나시는 그리스도

히브리서 9:26 본문 →

원문에서는 24절과 26절과 28절에 모두 예수님께서 나타나신다는 뜻의 표현이 등장합니다. 두루새김은 24절을 「하나님 앞에 서시려고」, 26절을 「나타나셨습니다」, 28절을 「나타나실 때에는」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각각 가리키는 시점이 다릅니다.

24절은 예수님께서 지금 하나님 앞에 서시는 일을 말합니다.

26절은 예수님께서 이미 시대의 마지막에 나타나셔서 죄를 없애시려고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일을 말합니다.

28절은 예수님께서 앞으로 다시 나타나실 일을 말합니다.

원문의 동사도 서로 다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세 나타나심의 대상과 목적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시간 순서대로 서술하지 않고, 현재 하나님 앞에 서시는 일을 먼저 말한 뒤 그 근거가 되는 과거의 희생을 설명하고, 미래의 나타나심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 지금 계신 자리, 마지막에 이루실 일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그 중심에는 자신을 드리신 희생이 단 한 번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이미 죄를 없애시려고 자신을 드리셨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 앞에 서시는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제물을 계속 준비하셔야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다시 나타나실 때에도 이전의 희생을 반복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28절의 의미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두 번째로는 다시 죄를 짊어지시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서 9:27–28 본문 →

27절에서 저자는 다시 한번 누구나 아는 인간의 현실을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한 번 죽도록 정해져 있고, 그 뒤에는 심판을 받습니다.히브리서 9:27 · 두루새김

이 구절은 흔히 죽음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설명하는 교리 문장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저자의 직접적인 목적은 죽음 이후 세계의 질서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죽음이 한 번 주어지고 그 뒤에 심판이 있다는 질서에 비추어, 예수님의 단 한 번의 희생과 그 뒤의 나타나심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 심판을 실제로 있는 일로 말한다는 사실을 약화시킬 필요는 없지만, 저자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죽음의 횟수와 그 후에 오는 결정적인 결과 사이의 관계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려고 단 한 번 제물로 드려지셨습니다. 두 번째로 나타나실 때에는 다시 죄를 짊어지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히브리서 9:28 · 두루새김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려고」는 이사야 53:12의 고난받는 종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 53장의 본래 문맥에서 종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그들을 위해 고난을 겪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히브리서는 인용문 전체를 옮기지는 않지만, 그 표현과 주제로 예수님의 희생을 설명합니다.

원문은 두 번째 나타나심을 「죄와 상관없이」 나타나시는 일로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는 죄가 있으셨다는 뜻일 수는 없습니다. 히브리서는 이미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신 분이시라고 말했고(4:15), 이 장에서도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신」 분이라고 했습니다(9:14). 그래서 두루새김은 이를 「다시 죄를 짊어지시는 것이 아니라」로 풀어 옮겼습니다. 첫 번째 나타나심이 죄를 짊어지고 희생하는 일과 관련되었다면, 두 번째 나타나심은 새로운 속죄 제물이 아니라 구원을 완성하는 일을 위한 것입니다.

심판을 말하다가 구원을 말한다

27절에서 인간은 죽음 뒤에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2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로 나타나실 때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저자는 심판이라는 엄중한 현실을 지우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고 한 번 제물로 드려지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다시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구원의 약속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그들이 구원을 스스로 완성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신 일을 믿고, 아직 나타나지 않은 구원의 완성을 기대하는 사람들입니다. 완성된 희생이 있다고 해서 기다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희생이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에 기다림에는 확실한 근거가 생깁니다.

기다리는 사람들 앞에 다시 나타나실 분

히브리서 9:1–28 본문 →

이제 저자가 왜 성막의 구조부터 길게 설명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막에는 들어갈 수 있는 사람과 때에 제한이 있었고, 제사는 예배하는 사람의 양심을 최종적으로 온전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기 것이 아닌 피가 아니라 자신의 피로 단 한 번 성소에 들어가셔서 영원한 속량을 이루셨고, 그 피는 사람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누가 들어갈 수 있는지, 무엇이 깨끗하게 하는지, 얼마나 자주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이 모두 예수님 한 분에게 모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순종과 예배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게 만들기 위한 또 하나의 속죄 제물이 아닙니다. 이미 자신을 드리신 예수님의 희생을 근거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의 삶입니다. 양심이 깨끗해지는 일도 모든 마음의 고통이 즉시 사라지는 상태나, 스스로 아무런 잘못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자기 확신이 아닙니다. 신자의 확신은 자신의 양심이 언제나 평온한가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충분한 희생을 드리셨고 지금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계시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히브리서 9장의 첫 장면으로 돌아가 봅니다.

성막 안에는 휘장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첫째 칸에서는 제사장들이 늘 예배를 드리지만, 둘째 휘장 안쪽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닫혀 있습니다. 대제사장조차 한 해에 한 번 정해진 때에 피를 가지고서야 들어갑니다.

그런데 본문의 마지막에 이르면 시선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저자는 휘장 앞에 서 있는 제사장들이 아니라, 이미 성소에 단 한 번 들어가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분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새로운 제물이 드려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또 다른 속죄일이 돌아와야만 구원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구원하실」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시는 일입니다.

처음에는 한 사람만 정해진 때에 성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마지막에는 이미 들어가신 한 분이,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다시 나타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 사이에서 모든 것을 바꾼 사건은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드리셔서 단 한 번 들어가셨다는 사실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