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풀어 읽기 · 13장
이 장의 자리 · 11–14장 · 변하지 않는 사랑
배가 부르자 그들은 나를 잊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배고팠을 때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광야에서 그들의 생명을 지키셨고, 마침내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풍요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양식이 부족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충분히 먹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그러나 호세아 13장은 풍요에 대한 일반적인 경고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었을 때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따라갑니다.
호세아 13장은 이스라엘이 무엇을 의지했는지 하나씩 드러내면서, 그들이 잊어버린 하나님만이 본래 그들을 살리신 분이었음을 밝히는 말씀입니다.
앞 장에서는 야곱의 후손이 자기 힘과 재산을 믿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13장은 그 자기 확신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풍요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마침내 모든 물의 근원이 말라 버리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높이 섰던 에브라임이 사라지는 것들처럼 되다
에브라임이 말하면 사람들이 떨었습니다. 에브라임은 이스라엘 가운데 높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알을 섬겨 죄를 짓고 죽었습니다.호세아 13:1 · 두루새김
이 장은 에브라임이 한때 어떤 존재였는지를 돌아보며 시작합니다.
그의 말이 다른 사람들에게 두려움이나 깊은 존경심을 일으킬 만큼 권위를 가졌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요셉의 아들 이름이면서, 북이스라엘의 중요한 지파를 가리키는 이름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여로보암 1세가 에브라임 지파 출신이었다는 점에서도 그 지파의 역사적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민수기 13:8, 16; 열왕기상 11:26).
그러나 이 구절의 「에브라임」이 지파의 과거 지위를 특별히 돌아보는지, 북이스라엘 왕국의 한때 강력했던 모습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어느 시대의 특정한 통치자나 사건을 지목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과거의 높은 지위와 현재의 몰락을 대조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죽었다는 말은 한 개인의 육체적 죽음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공동체가 누리던 생명력과 지위의 상실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죄를 더 짓습니다. 자기들의 은을 녹여 부어, 자기들이 생각한 모양대로 우상들을 만들었습니다. 모두 기술자들이 만든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이들을 두고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이들이 송아지 우상들에게 입을 맞춘다.」호세아 13:2 · 두루새김
에브라임은 역사 속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명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몰락은 단번에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잘못된 선택을 반복하면서 점점 깊어지는 과정입니다.
사람이 만든 신에게 사람이 입을 맞추다
여기서는 「자기들의 은」과 「자기들이 생각한 모양」이 나란히 나옵니다. 원문에서는 자기들을 위해 만들었다는 말까지 더해져, 우상의 재료와 모양과 목적이 모두 그들 자신에게서 나왔음을 거듭 드러냅니다.
자기들을 위해.
자기들의 은으로.
자기들이 생각한 모양대로.
그리고 그 결과물이 우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상은 이스라엘이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관계를 거꾸로 세웠습니다. 자신들이 만든 것을 향해 자신들의 생명과 안전을 맡겼습니다.
입맞춤은 존경과 애정, 충성을 표현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열왕기상 19:18에서도 바알에게 입맞추지 않은 사람들이 언급됩니다. 사람들은 은으로 만든 송아지에게 존경을 표합니다.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생명 없는 형상 앞에서 몸을 낮춥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침 구름처럼, 일찍 사라지는 이슬처럼 될 것입니다. 타작마당에서 거센 바람에 날아가는 겨처럼, 창문으로 빠져나가는 연기처럼 될 것입니다.호세아 13:3 · 두루새김
아침 구름은 하늘에 잠시 나타났다가 흩어집니다. 이슬은 땅에 맺혀 있다가 해가 오르면 사라집니다. 겨는 타작마당에서 바람에 날려 갑니다. 연기는 창문 밖으로 빠져나가 공기 중에 흩어집니다.
특히 「타작마당」은 풍요로운 수확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날아가는 것은 먹을 수 있는 곡식이 아니라 겨입니다. 곡식을 거둘 때 겨는 낟알과 분리되어 날아갑니다. 풍성한 수확의 자리에서조차 아무런 무게 없이 흩어지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섬기던 것은 무거운 은으로 만든 형상이었지만, 그들에게 남은 것은 무게 없이 사라지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을 실제로 붙들어 주던 분은 누구였습니까? 4절부터 하나님께서 직접 대답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히브리어 조브헤이 아담(zōḇḥê ʾāḏām)은 해석이 갈립니다. 두루새김처럼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이들로 읽을 수 있지만,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읽는 길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만으로 당시 송아지 숭배에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일이 반드시 따랐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이유는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이집트 땅에 있을 때부터 네 하나님인 여호와야훼다. 너는 나 말고 다른 신을 네 하나님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너를 구해 줄 이는 나밖에 없다.」호세아 13:4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를 이집트에서 나온 때로 되돌립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름을 몰랐기 때문에 우상을 만들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원문에서는 다른 신을 알아서는 안 된다고 표현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을 인정하고 신뢰하며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출애굽기 20:2–3의 첫 계명과 깊이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이끌어 내신 분으로 자신을 소개하신 뒤,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먼저 구원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오직 하나님을 섬기라는 요구가 있습니다.
특히 「너를 구해 줄 이는 나밖에 없다」는 선언은 곧이어 등장할 왕에 대한 질문을 준비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여러 수단을 찾았지만, 처음 그들을 구원하신 분은 왕도 군대도 우상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광야에서, 몹시 메마른 땅에서 너를 돌보았다.」호세아 13:5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이 자리에 알았다는 말이 쓰입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말은 상대를 인정하고 특별한 관계 안에서 돌보는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아모스 3:2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땅의 모든 민족 가운데 너희만 알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몹시 메마른 땅」입니다. 물이 부족하고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려운 곳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생명을 유지하기 어려운 환경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돌보셨습니다.
그런데 6절에서 그 돌봄의 결과가 뜻밖의 방향으로 바뀝니다.
「그들은 풀밭에서 먹고 배가 불렀다. 배가 부르자 마음이 거만해졌다. 그래서 그들은 나를 잊었다.」호세아 13:6 · 두루새김
여기서 결정적인 전환점은 배가 불렀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배부름이 마음을 거만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이 풍요를 누릴수록 자신들의 생존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을 덜 중요하게 여기게 된 것입니다.
신명기 8:11–18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고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먹고 배부르며 좋은 집을 짓고 재산이 늘어날 때, 자기 능력과 힘으로 재물을 얻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호세아 13:6은 그 경고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현실이 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비극은 하나님께서 풍요를 주신 데 있지 않고, 풍요를 누리던 백성이 그 풍요를 관계의 단절로 바꾸었다는 데 있습니다.
먹이시던 하나님이 이제는 삼키는 사자가 되시다
「나는 그들에게 사자처럼 되었다. 표범처럼 길가에서 그들을 노리겠다.」호세아 13:7 · 두루새김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먹이셨습니다.
이제는 그 백성을 먹어 치우시는 맹수의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새끼를 잃은 곰처럼 그들을 덮쳐 찢겠다. 거기서 사자처럼 그들을 먹어 치우겠다. 들짐승이 그들을 찢어 버릴 것이다.」호세아 13:8 · 두루새김
표범은 길가에 숨어 먹이를 노립니다. 새끼를 잃은 곰은 매우 위험한 존재로 묘사됩니다. 사자는 먹이를 찢고 삼킵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심판이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특히 새끼 잃은 곰의 이미지는 잠언 17:12에서도 등장합니다. 그곳에서는 미련한 사람보다 새끼를 빼앗긴 암곰을 만나는 것이 낫다고 할 만큼 그 위험성이 강조됩니다.
먹고 배부른 백성이 이제 먹히는 존재가 됩니다.
이스라엘은 풍요를 누리면서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잊었다는 이유로 하나님께서 무력해지신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의지하던 모든 것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이제 심판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이것은 호세아 11장의 사자 이미지와도 연결됩니다. 그 장에서는 하나님의 사자 같은 울음이 흩어진 자녀를 불러 모으는 소리가 되었습니다(11:10). 그러나 13장에서는 죄를 심판하는 맹수의 이미지가 앞에 놓입니다.
「이스라엘아, 너를 돕는 나에게 맞섰기 때문에 네가 멸망했다.」호세아 13:9 · 두루새김
여기서 「너를 돕는 나」라는 표현은 앞의 맹수 이미지와 뜻밖의 긴장을 이룹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먹이시고 구원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분께 맞섰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하나님이 심판자로 나타나십니다.
이스라엘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일은 자신보다 강한 적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살리시는 분과의 관계를 스스로 거스르는 일이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구절은 히브리어 문장이 매우 압축되어 있어 번역이 갈립니다. 두루새김처럼 하나님께 맞선 것이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하셨다는 선언과, 누가 그를 도울 수 있겠느냐는 질문으로 읽는 길도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어 칠십인역은 후자에 가까운 읽기를 보여 줍니다.
왕을 달라고 했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물으시다
「그러면 네 모든 성읍에서 너를 구해 줄 네 왕은 어디 있느냐? 네 재판관들은 어디 있느냐? 네가 『저에게 왕과 지도자들을 주십시오』라고 하며 바라던 자들 말이다.」호세아 13:10 · 두루새김
이 질문은 이스라엘이 의지했던 또 하나의 대상을 겨냥합니다.
이스라엘은 왕이 자신들을 보호해 주리라고 기대했습니다. 외적의 공격을 막고, 나라를 다스리며,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해 줄 존재로 여겼습니다.
이 말씀은 사무엘상 8장의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때 이스라엘 장로들은 사무엘에게 다른 민족들처럼 자신들을 다스릴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했습니다(사무엘상 8:4–5). 사무엘상 8:7에서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성경 전체가 인간 왕의 존재 자체를 죄라고 선언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명기 17:14–20은 왕이 세워질 경우 어떤 기준을 따라야 하는지 정하며, 하나님께서는 다윗과도 특별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사무엘하 7:12–16).
문제는 왕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구원자로 여겨지는 데 있습니다.
「나는 분노하여 네게 왕을 주고, 크게 분노하여 그 왕을 빼앗는다.」호세아 13:11 · 두루새김
이 말씀은 하나님의 허락과 하나님의 기쁨이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님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은 왕을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요구 자체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마음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왕을 얻었다는 사실이 곧 하나님의 인정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사무엘상 8장의 경고와도 맞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왕을 세우는 것이 백성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경고하셨지만, 그들의 요구를 허락하셨습니다.
호세아의 관심은 특정한 왕 한 사람의 잘잘못을 평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왕을 요구하고 의지했던 백성의 태도 자체를 문제 삼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왕을 빼앗으십니다.
왕을 달라고 요구했던 백성은 왕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왕에게 구원의 능력까지 맡겼을 때, 마침내 왕도 구원도 잃을 위기에 놓였습니다.
묶여 있는 죄, 태어나지 못하는 아들
「에브라임의 죄는 묶여 있고, 그 죄는 감추어져 있다.」호세아 13:12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얼핏 죄가 감추어졌으므로 더 이상 문제 되지 않는다는 뜻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흐름은 정반대입니다.
여기서 「묶여 있고」(צָרַר)라는 표현은 무엇인가를 묶어 보관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감추어져 있다」 역시 없어졌다는 뜻보다 저장되어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욥기 14:17의 표현과도 연결됩니다. 욥은 자신의 허물이 주머니에 봉해져 있다고 말합니다.
호세아의 흐름에서는 이스라엘의 죄가 잊히거나 용서된 것이 아니라, 심판의 때를 향해 남아 있다는 경고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죄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에브라임에게 아이를 낳는 고통이 닥칠 것이다. 그는 어리석은 아들이다. 태어날 때가 되었는데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호세아 13:13 · 두루새김
출산하는 사람과 태어날 아이의 모습이 한 문장 안에서 이어지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불편하고 어색한 장면 자체가 본문의 긴박함을 전달합니다.
출산은 새로운 생명이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산모와 아이에게 위험이 따를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특히 고대 사회에서는 아이가 쉽게 나오지 못하는 일이 생명을 위협하는 심각한 사건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지금 움직여야 할 때가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여기서 어리석다는 평가는 실제 태아의 도덕적 책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의 비유 안에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판단과 응답을 묘사합니다.
이스라엘은 위기를 맞았습니다. 자신의 죄가 드러났고, 지금까지 의지했던 것들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이 놓인 상황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새 생명이 나와야 할 순간에 이스라엘은 생명을 향해 나아가지 못합니다.
출생의 문턱에 선 아들의 이야기가, 이제 죽음의 손에서 누가 그들을 구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비유에는 두 방향의 가능성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이 회개해야 할 때를 놓치고 있다는 경고입니다. 다른 하나는 심판의 진통이 이미 시작되었으므로 이제 멸망을 피하기 어렵다는 선언입니다. 본문의 앞뒤 흐름을 고려하면 둘은 완전히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돌이킬 것을 요구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응답하지 않았고, 이제 그 거절의 결과가 출산의 진통처럼 닥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손에서 구해 내겠느냐
「내가 그들을 스올의 손아귀에서 구해 내겠느냐? 내가 그들을 죽음에서 되찾겠느냐? 죽음아, 네 전염병들은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파멸은 어디 있느냐? 나는 마음을 돌리지 않겠다.」호세아 13:14 · 두루새김
고대 이스라엘에서 스올은 죽은 사람들이 내려가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여기서 스올을 신약의 최후 심판 장소와 곧바로 같은 곳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스올과 죽음을 사람을 붙잡는 세력처럼 표현합니다. 사람이 스올의 손아귀에 붙잡혀 있다면, 스스로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손아귀에서 구해 낼 수 있는 분으로 자신을 말씀하십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여기서 구원의 약속으로 선언하시는지, 구원할 수 있으면서도 심판을 거두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지는 해석의 갈림으로 남겨 두어야 합니다. 특히 이 차이는 호세아 13장을 지나치게 서둘러 희망의 말씀으로 바꾸지 않도록 주의하게 합니다.
하나님 외에는 구원자가 없다는 사실은 평안할 때에는 신앙의 고백처럼 들리지만, 죽음의 문턱에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선택을 되묻는 질문이 됩니다.
호세아 13장은 이 문제를 가볍게 해결하지 않습니다.
곧이어 심판의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렇게 읽으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죽음의 위기에서 건져 내시지 않겠다는 뜻으로 질문하시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앞뒤 흐름에서 근거를 얻습니다. 앞에서는 이스라엘의 죄가 보관되어 있고, 출산의 위기를 맞은 아들이 제때 나오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뒤에서는 동풍이 불어와 모든 물의 근원을 말리고, 소중한 재산을 약탈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죽음과 스올을 향해 그 파괴적인 힘을 드러내라고 부르는 말이 됩니다. 이 경우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거두거나 마음을 돌리지 않으시겠다는 뜻으로 말씀하십니다. 반면 첫 두 문장을 긍정문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그 문장들이 의문문임을 확정하는 별도의 표지가 없습니다. 고대 그리스어 칠십인역은 첫 두 문장을 구출과 속량을 약속하는 미래형 진술로 옮기고 있습니다. 죽음의 힘을 불러들이는 말이 아니라, 죽음에게 그 파괴적인 능력이 어디 있느냐고 도전하는 외침이 됩니다. 이 경우 마지막의 「나는 마음을 돌리지 않겠다」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원 결정을 돌이키지 않으시겠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길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읽기에도 어려움은 남습니다. 본문 전체의 흐름이 심판을 강조하고 있고, 원문에서 마지막 문장의 후회 또는 연민과 관련된 표현이 구원의 약속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두 해석 가운데 어느 하나가 문법적으로 유일하게 가능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5:55에서 바울은 죽음과 스올을 향한 호세아 13:14의 표현을 가져와 부활의 승리를 노래합니다. 바울은 이사야 25:8의 죽음이 삼켜진다는 말씀과 연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죽음의 힘이 패배했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이것은 신약의 직접적인 인용이자 성경 전체의 흐름 안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해석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사용 방식이 호세아 13장의 원래 흐름에서 모든 해석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호세아에서는 이스라엘의 죄와 나라에 닥치는 심판, 구원의 가능성이 함께 문제 되고 있습니다.
열매 맺던 에브라임에게 불어오는 동풍
에브라임이 형제들 가운데서 열매를 맺더라도, 동풍이 불어올 것입니다. 광야에서 올라오는 여호와야훼의 바람입니다. 그 바람에 에브라임의 물 근원이 마르고 샘이 말라 버릴 것입니다. 그 바람이 온갖 귀한 물건이 든 보물 창고를 약탈할 것입니다.호세아 13:15 · 두루새김
호세아 13장의 마지막은 다시 자연의 이미지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침 구름이나 이슬처럼 사라지는 것들이 아니라, 땅의 생명을 직접 위협하는 바람이 등장합니다.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닥칠 심판을 나타내는 이미지입니다.
여기서 심판은 단순히 현재 있는 물이 줄어드는 일이 아닙니다. 물을 공급하는 근원과 샘이 마릅니다. 물이 흐르는 근원이 사라지면 지금까지 자라던 식물도 더 이상 자랄 수 없습니다. 일시적인 수확의 실패를 넘어, 앞으로 열매를 맺을 가능성까지 위협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이 없는 곳에서 그들을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잊고, 물이 있는 곳에서도 생명을 유지하지 못하는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바람은 단지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자연 현상의 차원을 넘어섭니다. 보물 창고를 약탈합니다. 이것은 실제 적군의 침입과 재산의 약탈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입니다. 동풍의 이미지는 국가의 재산과 생활의 기반이 무너지는 현실로 이어집니다.
그들이 자신들을 지켜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결국 그들을 지키지 못합니다.
조금 더 깊이
동풍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건조하고 뜨거운 바람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식물이 자라고 열매를 맺으려면 물이 필요한데, 건조한 바람은 그 생명을 위협합니다. 동시에 호세아 시대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면, 이 바람은 아시리아의 침략과 파괴를 떠올리게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이 동풍을 곧바로 아시리아라고 밝히는 것은 아니므로, 하나의 역사적 해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은 창세기 41:52에서 요셉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번성하게 하셨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입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바로 그 에브라임이 열매를 맺더라도 동풍이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에브라임의 이름에 담긴 번성의 의미가 심판의 장면과 맞부딪힙니다.
구원자를 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호세아 13장은 하나님을 잊는다는 일이 단순히 기억력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풍요를 누리면서, 그 풍요가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증거인 것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제 광야에서 바람이 올라옵니다.
과거 광야는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이스라엘을 살리셨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광야에서 동풍이 불어옵니다. 샘이 마르고, 물의 근원이 끊어지며, 소중한 것들이 약탈당합니다.
호세아는 마지막에 이스라엘이 다시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할 수 있을지 묻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주신 풍요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라 버린 샘으로 보여 줍니다.
그들은 물을 마시며 자신들이 살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물이 흐르게 하신 분을 잊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의지하던 샘이 말라 버립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