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20장
이 장의 자리 · 13–27장 · 민족들에 관한 말씀
벗겨진 옷, 드러난 헛된 희망
이사야 20장에는 설교가 거의 없습니다. 예언자가 긴 말씀을 전하지도 않고,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직접 명령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옷을 벗고 맨발로 다니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삼 년 동안 그렇게 다닙니다.
왜 하나님은 자신의 예언자에게 이처럼 수치스러운 행동을 요구하셨을까요? 말로 경고하면 될 일을 왜 사람의 몸으로 보여 주셔야 했을까요?
사람들이 의지하던 나라의 영광을 걷어 내자, 그 안에서 나타난 것은 그 나라 역시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아스돗의 함락 — 눈앞에서 확인된 앗시리아의 힘
아시리아 왕 사르곤이 보낸 군사령관이 아스돗에 온 해였습니다. 그 사령관은 아스돗을 공격해 점령했습니다.이사야 20:1 · 두루새김
아스돗은 유다 서쪽, 지중해 연안의 블레셋 지역에 있던 중요한 도시입니다. 여호수아 13:3에 등장하는 블레셋의 다섯 주요 도시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대에 이 지역은 아시리아 제국이 세력을 넓히면서 큰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아시리아는 여러 나라에 조공을 요구하고, 저항하는 왕들을 몰아내거나 도시들을 점령하며, 주민들을 다른 지역으로 옮겼습니다.
아스돗은 단순히 아시리아의 공격을 당한 도시가 아닙니다. 아시리아에 맞서려는 정치적 움직임이 있었던 곳입니다.
아시리아의 압박을 받는 작은 나라들에는 다른 강대국의 도움이 절실했을 것입니다. 그때 남쪽의 이집트와 쿠시는 중요한 대안으로 보일 수 있었습니다. 쿠시 출신의 왕들이 이집트의 정치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와 쿠시는 서로 아무 관계가 없는 두 나라가 아니라, 나일강 유역을 따라 정치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강력한 남쪽 세력이 있다면 아시리아에 맞설 수 있지 않을까요? 아스돗의 위기를 바라보던 주변 나라들이 충분히 품을 만한 기대였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를 시험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아스돗이 함락된 것입니다.
제국의 왕은 멀리 있어도 그의 군대는 아스돗에 도착하고, 도시를 공격하며, 그곳을 점령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사건을 통해 사람들이 아직 보지 못한 다른 나라들의 미래를 생각하게 하십니다.
그 미래를 보여 주기 위해 이사야에게 매우 특별한 일을 명령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에 등장하는 사르곤은 아시리아 왕 사르곤 2세입니다. 그는 기원전 722년 무렵부터 705년까지 다스렸으며, 아스돗을 공격한 일은 일반적으로 기원전 711년의 사건으로 이해됩니다. 사르곤 2세의 왕실 비문에는 아스돗의 통치자 아수리가 아시리아에 반기를 들고 주변 나라들의 지원을 얻으려 했으며, 이후 왕이 바뀌고 다시 반란이 일어난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국 아시리아 군대가 아스돗과 주변 도시들을 점령했습니다. 다만 왕실 비문은 왕의 업적을 선전하는 기록이므로, 그 안에서 왕이 자신을 평가한 내용을 모두 그대로 객관적인 사실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예언자의 옷을 벗기시다 — 말이 아니라 몸으로 전하는 말씀
그때 여호와야훼께서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네 허리에 두른 굵은 베를 풀어 벗고,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이사야는 그대로 하여 벌거벗은 채 맨발로 다녔습니다.이사야 20:2 · 두루새김
지금까지 이사야는 주로 말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달했습니다. 때로는 자기 자녀들의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내는 표징이 되기도 했습니다(이사야 7:3; 8:3–4, 18).
그런데 여기서는 예언자 자신의 몸이 표징이 됩니다.
이사야에게 요구된 것은 특별한 옷차림으로 시선을 끄는 행동이 아니라, 포로가 겪을 벌거벗음과 아무 보호도 없는 상태를 자신의 몸으로 드러내는 행동입니다. 신을 벗은 몸은 평소 누리던 생활의 안정과 사회적 체면을 잃은 사람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 명령을 받은 이사야의 감정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가 부끄러웠는지, 두려웠는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염려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이사야의 행동만 나란히 놓입니다.
조금 더 깊이
굵은 베로 된 옷은 거친 재질의 옷으로, 구약에서 슬픔과 애도, 자신을 낮추는 마음을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사무엘하 3:31이나 열왕기상 21:27에서 그런 쓰임을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예언자들이 거친 옷을 입는 관습과 연결하여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스가랴 13:4에는 예언자와 관련된 털옷이 언급됩니다. 따라서 이사야가 당시 특별한 슬픔 때문에 굵은 베로 된 옷을 입고 있었는지, 평소 예언자로서 입던 옷이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히브리어 아롬(עָרוֹם)은 몸이 벗겨진 상태를 가리키지만, 문맥에 따라 완전히 아무 옷도 입지 않은 상태를 뜻할 수도 있고 정상적인 겉옷을 벗어 몸이 드러난 상태를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사야가 완전히 아무 옷도 입지 않았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속옷이나 최소한의 옷만 남긴 상태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 장면을 단지 겉옷 한 벌을 벗어 평범하게 가볍게 입은 모습으로 줄여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뒤의 4절에서 같은 표현은 포로들이 엉덩이까지 드러낸 채 끌려가는 수치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신을 벗는 행동은 문맥에 따라 여러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5에서 모세는 거룩한 땅에 서 있기 때문에 신을 벗으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20장에서는 거룩함보다 포로 상태가 중심입니다. 사무엘하 15:30에서는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달아날 때 맨발로 걸으며 웁니다. 미가 1:8에서도 예언자가 맨발과 벌거벗음으로 슬픔을 나타냅니다.
세 해 동안 이어진 표징 — 하루의 충격이 아니라 오래된 경고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종 이사야가 이집트와 쿠시에 대한 표징과 징조로 삼 년 동안 벌거벗은 채 맨발로 다녔듯이,」이사야 20:3 · 두루새김
특별한 행동이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전하시는 말씀을 눈에 보이게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이사야 8:18에서도 이사야와 그의 자녀들이 이스라엘 안에서 표징과 징조가 된다고 말합니다.
삼 년이라는 시간이 붙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가 한 번의 극적인 행동으로 백성들의 주의를 끈 뒤 설명을 마쳤다는 뜻이 아니라, 오랜 시간 자신의 모습을 통해 경고를 전달했다는 의미입니다. 정확히 어떤 장소에서 얼마나 자주 사람들 앞에 나타났는지, 삼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같은 상태를 유지했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왜 이처럼 오랜 기간이 필요했을까요?
이사야의 몸이 단순한 상징을 넘어 사람들의 일상적인 기억 속에 남아야 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그의 모습을 보고 놀랐을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그 모습이 익숙해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익숙해졌다고 해서 그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아시리아의 위협을 경험하고, 이집트와 쿠시의 도움에 관한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이사야의 모습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표징은 사람들이 자신의 희망을 다시 판단할 수 있도록 그들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4절에서 마침내 그 표징의 뜻이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
조금 더 깊이
1절에서는 아스돗이 점령된 해가 언급됩니다. 2절에서는 「그때」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명령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이사야가 삼 년 동안 그 모습을 유지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2절의 명령이 아스돗 함락보다 어느 정도 앞서 내려졌고, 3절에서 그동안의 행동을 돌아보며 의미를 설명하는 구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본문이 사건의 시작과 설명을 하나의 역사적 장면 속에 묶어 서술한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정확한 시작 날짜와 종료 날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삼 년은 이사야가 표징을 보인 기간이지, 이집트와 쿠시가 반드시 삼 년 뒤에 멸망한다는 기한이 아닙니다.
강대국의 포로들 — 보호자라고 믿었던 나라의 수치
「아시리아 왕도 이집트에서 포로로 잡은 사람들과 쿠시에서 강제로 끌어낸 사람들을 벌거벗은 채 맨발로 끌고 갈 것이다. 젊은이든 노인이든 엉덩이가 드러난 채 끌려갈 것이다. 이집트는 벌거벗은 수치를 당할 것이다.」이사야 20:4 · 두루새김
이사야의 행동은 단순히 가난이나 겸손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상징이 아닙니다. 이집트와 쿠시가 맞이할 포로 상태를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젊은이든 노인이든
나라가 패배하면 왕과 군사 지도자만 고통받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도 포로가 될 수 있습니다. 젊은이는 앞으로의 삶을 빼앗기고, 노인은 자신이 살아온 터전에서 쫓겨납니다.
아시리아는 정복한 지역의 주민들을 다른 지역으로 강제로 옮기는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열왕기하 17:6에 기록된 북이스라엘 주민들의 이주도 그와 관련된 사례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을 강제로 옮기는 것은 단순히 사는 곳을 바꾸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고향과 가족의 생활 기반, 지역 공동체의 관계를 파괴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엉덩이가 드러난 채
포로들이 수치스러운 행동을 저질렀기 때문에 몸이 드러난 것이 아닙니다.
정복자에게 붙잡혀 자신을 보호할 능력과 자유를 빼앗겼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고대의 정복자는 포로의 몸과 이동을 마음대로 통제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옷을 벗기는 행동은 상대방의 존엄과 사회적 지위를 강제로 짓밟는 방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집트는 벌거벗은 수치를 당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포로 개개인의 도덕적 잘못에 대한 비난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제국의 패배와 굴욕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 굴욕을 실제로 몸으로 겪는 사람들은 포로들입니다.
나라의 영광이 무너진다는 것은 단지 왕의 권위가 사라지는 일이 아닙니다. 그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 자신의 몸조차 자유롭게 가릴 수 없게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사야는 그 현실을 사람들 앞에 미리 드러냅니다.
이집트와 쿠시를 의지하는 사람들은 그 나라들의 군대와 자원, 오랜 역사와 위세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 강대국의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왕의 옷과 군대의 갑옷을 모두 벗겨 낸 뒤의 모습입니다.
그 나라들도 포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나라들도 자기 몸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 놓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다른 나라를 끝까지 보호해 줄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얼마나 불안정한 희망인지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는 3절의 비교가 4절의 그에 대응하는 말로 이어집니다. 이 비교가 이사야의 몸과 포로들의 몸을 하나로 연결합니다. 1절의 아스돗 함락은 이미 일어난 사건이고, 4절의 포로 행렬은 앞으로 일어날 일로 선포됩니다. 또한 이 말씀의 모든 세부 사항이 어느 한 역사적 전쟁에서 정확히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희망과 자랑이 부끄러움으로 바뀌다
여호와야훼께서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쿠시에 희망을 걸고 이집트를 자랑하던 사람들은 그 두 나라 때문에 겁에 질리고 부끄러워할 것이다.」이사야 20:5 · 두루새김
희망은 앞으로 무엇을 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대상과 관련됩니다. 자랑은 자신이 이미 어떤 강력한 존재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에서 얻는 자신감과 관련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사야가 그리는 사람들은 쿠시의 도움을 기대하면서, 이집트의 위세를 자신들의 안전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여기고 있었던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본문은 두 나라가 실제로 어떤 외교적 약속을 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쿠시에 희망을 거는 일과 이집트를 자랑하는 일을 정확히 서로 다른 정치적 역할로 구분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 나라들에 자신의 앞날과 체면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들이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때 느끼는 부끄러움은 단순히 자신들의 정치적 판단이 틀렸다는 감정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믿었던 근거가 실제로는 안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데서 오는 충격입니다.
4절에서는 이집트가 「벌거벗은 수치」를 당합니다. 5절에서는 그 나라를 의지했던 사람들이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포로가 된 나라의 수치가, 그 나라를 자랑했던 사람들의 부끄러움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옷을 빼앗기고 몸이 드러났다면, 그들을 의지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확신이 드러납니다. 이사야가 벗은 몸으로 보여 주었던 것은 단지 포로들의 앞날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의지하던 사람들의 믿음이 얼마나 허약한 기초 위에 놓여 있는지도 드러낸 것입니다.
「쿠시에 희망을 걸고 이집트를 자랑하던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본문은 그들이 어느 지역 사람들인지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6절에서 「이 해안의 주민들」이 등장하므로, 그들과 같은 집단이거나 그들을 포함한 주변 나라의 주민들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아스돗과 그 주변 해안 지역의 주민들이 직접적인 역사적 배경으로 떠오르며, 유다 역시 이러한 경고를 들어야 할 나라였습니다. 이사야 30:1–5과 31:1–3에서 유다가 이집트의 도움을 의지하려는 모습을 비판하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하지만 20:5가 반드시 유다 사람들만을 가리킨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서는 그들이 직접 입을 열어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19장 마지막에서 이집트는 「내 백성」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런데 20장에서는 이집트가 포로로 끌려가는 나라로 묘사됩니다. 19장은 이집트가 심판을 받고 하나님을 알게 되며, 마침내 이스라엘과 아시리아와 함께 복을 받는 미래를 보여 주었습니다. 반면 20장은 아시리아가 세력을 넓히는 일이 현실적인 위협이던 상황에서 이집트와 쿠시의 정치적 힘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합니다. 두 본문이 다루는 시간과 초점이 다릅니다. 하나님이 어떤 나라를 자신의 구원 역사 안에 포함시키실 수 있다는 사실과, 그 나라의 현재 권력을 구원의 보증으로 신뢰해도 된다는 주장은 전혀 다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벗어나겠느냐?」 — 대답 없이 남겨진 질문
「그날에 이 해안의 주민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보아라.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곳이 이렇게 되었구나! 아시리아 왕에게서 벗어나려고 그곳으로 달려가 도움을 구했는데, 이제 우리는 어떻게 벗어나겠느냐?』」이사야 20:6 · 두루새김
아시리아의 군사적 압박은 상상 속의 위험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아스돗이 함락되었고, 주변 여러 나라가 제국의 공격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도움을 찾으려 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을 어리석거나 비겁한 사람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위험에 처한 사람이 도움을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나라와 자신들을 확실히 구원할 수 있는 나라를 혼동하고 있었습니다.
이집트와 쿠시는 현실적인 군사력을 가진 나라였습니다. 문제는 그 힘이 아시리아의 위협 속에서 주변 나라들의 안전을 끝까지 보장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기대가 무너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벗어나겠느냐?」
이 질문은 단순히 다음으로 어느 나라의 도움을 구해야 하는지를 묻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생각했던 구출의 길 자체가 사라졌다는 절망의 표현입니다.
이사야 20장은 어떤 경우에도 다른 나라와 협력해서는 안 된다는 일반적인 정치 원칙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구체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아시리아의 위협 앞에서 이집트와 쿠시의 힘에 자신의 구원을 맡긴 사람들의 잘못된 확신입니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역사와 나라들을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인간이 어떤 판단도 하지 않거나 현실적인 책임을 포기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그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1절의 아스돗과 연결하면 블레셋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곳과 정치적·지리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된 유다도 이 말씀을 들어야 할 위치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그곳으로 달려가 도움을 구했는데」라는 표현은 실제로 모든 주민이 이집트로 피난했다는 뜻으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나라에 의지하거나 그곳에 보호를 구하는 정치적 행동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다른 본문들을 보면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이사야 7:9에서는 믿음과 굳게 서는 일이 연결되고, 30:15에서는 돌아와 안식하는 데 구원이 있으며 잠잠하고 신뢰하는 데 힘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20장 자체는 그 답을 끝까지 말하지 않습니다.
이사야의 몸이 보여 준 하나님의 뜻
이사야는 그 포로들의 모습을 먼 곳에서 안전하게 설명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몸으로 그들의 앞날을 보여 주는 사람입니다. 나라가 패배할 때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정치적 결정의 결과를 누가 몸으로 겪어야 하는지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나라에 자신의 희망을 걸었던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모든 전쟁의 피해를 면할 것이라는 보장도 덧붙이지 않습니다.
해안의 주민들은 아시리아의 군대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남쪽의 이집트와 쿠시를 바라보며 자신들을 구해 줄 힘이 있다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곳에서도 포로들이 끌려갑니다.
젊은이와 노인이 함께 끌려가고, 그들의 몸은 옷으로 충분히 가려져 있지 않습니다. 한때 영광과 자랑의 대상이었던 나라가 수치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질문이 나오기까지 이미 삼 년 동안 한 사람이 그들의 눈앞을 걸었습니다.
허리에 두른 굵은 베를 풀어 벗고, 신을 벗은 이사야입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이상하게 여겼을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모습이 무엇을 말하고 있었는지 드러납니다.
자신들을 구해 주리라 믿었던 강대국도, 옷을 빼앗기고 맨발로 끌려가는 포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 20장은 그 나라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나라를 의지했던 사람들이 더 이상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 알지 못하는 자리에서 끝납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벗어나겠느냐?」
그 물음에는 아직 답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물음 뒤에는, 오랫동안 벌거벗은 채 맨발로 걸어 다녔던 이사야의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