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38장
이 장의 자리 · 36–39장 · 히스기야와 아시리아
되돌아온 그림자, 다시 주어진 날들
히스기야는 예루살렘을 위협하던 아시리아의 군대 앞에서 여호와야훼께 기도했던 왕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에게는 군대도 성벽도 소용없는 위기가 찾아옵니다. 죽을병에 걸린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운명을 두고 하나님께 호소했던 왕이 이제 자기 목숨을 두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이 장에는 놀라운 기적이 두 가지 등장합니다. 죽을병에 걸린 왕이 회복되고, 해가 비추어 만든 그림자가 지나온 계단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기적을 기록하는 데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장의 절반 가까이를 히스기야가 병상에서 느낀 두려움과 회복 후의 고백에 할애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 장의 관심은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하실 수 있는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돌려주신 생명을 인간이 어떻게 이해하게 되는가에도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병에서 회복되기 전에도 여호와야훼를 알았고, 여호와야훼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왔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죽음의 문턱을 지나 돌아온 뒤, 그가 하나님에 관해 말하는 방식에는 이전과 다른 깊이가 생깁니다. 그는 자신의 올바른 삶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했던 자리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등 뒤로 던져 버리셨다고 노래하는 자리까지 나아갑니다.
그 변화가 이 장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왕에게 내려진 마지막 명령
이야기는 느닷없이 시작됩니다.
그 무렵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아모츠의 아들인 예언자 이사야가 그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집안일을 정리해라. 너는 죽고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이사야 38:1 · 두루새김
여기서 집안은 단순히 거처를 뜻하지 않습니다. 왕이 죽은 뒤에도 남아 있을 가족과 왕실의 일을 포함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18:3–6은 히스기야가 여호와야훼를 신뢰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킨 왕이었다고 평가합니다. 그런 왕에게 죽음의 선고가 내려집니다. 이사야 38장은 그의 병이 특정한 죄에 대한 벌이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먼저 그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히스기야는 얼굴을 벽 쪽으로 돌리고 여호와야훼께 기도했습니다.이사야 38:2 · 두루새김
왜 벽을 향했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여 혼자 기도하려는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더 이상 자신의 왕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 앞에 가져갑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아, 여호와야훼, 제가 주님 앞에서 신실하게, 온전한 마음으로 살아오며 주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을 했다는 것을 부디 기억해 주십시오.」 히스기야는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이사야 38:3 · 두루새김
여기서 「온전한 마음」은 죄가 전혀 없는 상태보다는 하나님을 향해 나뉘지 않은 마음, 곧 온 마음으로 하나님께 충실한 태도를 가리킵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의 과거를 하나님 앞에 내어 놓습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온 길이 무의미하게 끝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는 「제가 이렇게 살았으니 반드시 살려 주셔야 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부디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호소합니다. 자신의 삶을 판단하실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분의 기억에 자신을 맡깁니다.
본문은 왕의 눈물을 감추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를 신뢰했던 왕도 죽음을 앞두고 웁니다. 그것이 믿음이 없다는 증거로 제시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신 것은 왕의 눈물이었다
히스기야의 기도 직후 여호와야훼의 말씀이 다시 이사야에게 전해집니다.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렇게 전해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가 말한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보아라, 네가 살 날에 십오 년을 더해 주겠다.』」이사야 38:5 · 두루새김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히스기야의 공적을 하나하나 평가하는 방식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고통받는 사람의 기도와 눈물에 대한 응답으로 표현됩니다.
왕은 자신이 행한 일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했고, 하나님은 자신이 보고 들으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응답을 전하시는 하나님은 자신을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야훼」라고 소개하십니다. 히스기야는 다윗 왕조에 속한 왕입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 개인에게만 관계된 분이 아니라, 다윗과 그 왕조를 향한 약속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밝히십니다.
「『내가 너와 이 도시를 아시리아 왕의 손에서 구해 내고, 이 도시를 지키겠다.』」이사야 38:6 · 두루새김
한 장에서는 예루살렘이 멸망의 위기에 처했고, 다음 장에서는 그 도시를 다스리는 왕이 죽음의 위기에 처합니다. 어느 쪽에서도 끝내 구원하는 이는 왕 자신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단순히 회복을 약속하시는 데서 그치지 않으십니다. 약속을 이루실 것을 확인해 주는 표징까지 주십니다.
「『보아라, 햇빛에 따라 아하스의 계단을 내려간 그림자를 내가 열 계단 뒤로 되돌리겠다.』」 그러자 해가 내려갔던 계단에서 열 계단 뒤로 되돌아갔습니다.이사야 38:8 · 두루새김
그림자가 되돌아간 것은 왕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날들이 다시 주어진다는 약속을 눈에 보이게 하는 표징입니다.
왕이 받는 것은 끝이 없는 시간이 아니라,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이 히스기야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는 이제 그의 노래에서 밝혀집니다.
조금 더 깊이
38장 앞에 놓인 37장은 이미 예루살렘이 아시리아의 위협에서 구원받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런데 38장에서는 도시를 지키겠다는 약속이 앞으로 하실 일로 등장합니다. 이는 두 장의 사건이 반드시 기록된 순서대로 일어난 것은 아님을 보여 줍니다. 아하스의 계단이 정확히 어떤 구조였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햇빛과 그림자의 위치를 관찰할 수 있는 계단 또는 계단 모양의 시간 측정 장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현상이 물리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일어났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는 이사야 7:11–12에서 표징을 구하라는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의 이름이 붙은 계단에서 이제 아들에게 표징이 주어집니다. 두 장면을 일부러 대비하여 썼는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같은 왕조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표징이 다시 등장한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죽음 앞에서 왕은 무엇을 잃을까
9절에서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이 갑자기 바뀝니다.
다음은 유다 왕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회복된 뒤에 쓴 글입니다.이사야 38:9 · 두루새김
회복된 뒤에 쓴 글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지만, 노래는 감사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앞두고 경험했던 두려움으로 돌아갑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삶이 고요하던 때에 나는 스올의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구나. 남은 세월을 빼앗겼구나.」이사야 38:10 · 두루새김
히스기야는 자신에게 남아 있어야 한다고 여겼던 날들이 사라졌다고 느낍니다. 스올은 구약에서 죽은 이들의 영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기서 문이라는 표현은 생명의 세계를 떠나 죽음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경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히스기야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단순히 자신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생각에만 있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야를, 야를 다시는 뵙지 못하겠구나. 이 덧없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다시는 보지 못하겠구나.」이사야 38:11 · 두루새김
「야를, 야를」이라는 반복에는 강한 탄식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야훼의 짧은 이름인 야를 두 번 부르는 표현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을 뵙는다는 표현은 예배와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경험하는 일과 연결됩니다(시편 42:2 참조).
히스기야가 두려워하는 죽음은 자신이 알던 세계와 끊어지는 일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예배하는 살아 있는 공동체에 참여하지 못하고, 함께 살아오던 사람들의 얼굴도 볼 수 없게 됩니다.
제 거처는 목자의 천막처럼 뽑혀 제게서 옮겨졌습니다. 저는 천을 짜는 사람처럼 제 삶을 말아 놓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베틀에서 천을 잘라 내듯 제 삶을 끊으십니다. 하루 사이에 주님께서는 제 생명을 끝내십니다.이사야 38:12 · 두루새김
천막은 사람이 오래 살더라도 영원히 한곳에 머물도록 만들어진 집이 아닙니다. 천막을 붙잡고 있던 말뚝을 뽑으면 거처 전체가 옮겨집니다. 자신이 견고한 기반 위에 있다고 여겼던 왕도 죽음 앞에서는 걷어 낼 수 있는 천막처럼 느껴집니다.
삶은 베틀 위에서 만들어지던 천과 같습니다. 실들이 엮이고 무늬가 생기며 하나의 길이가 만들어져 갑니다. 그런데 천이 완성되기도 전에 베틀에서 잘려 나갑니다.
본문에서 자기 삶을 말아 놓는 이는 히스기야 자신이지만, 그 삶을 끊으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했던 왕이 이제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끝내시는 일처럼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완성된 교리의 설명이라기보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의 절박한 말입니다. 실제로 히스기야는 이 노래 앞부분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살리실 것이라고 아직 알지 못하던 사람으로 노래합니다.
그의 밤은 길고 고통스럽습니다. 아침까지 마음을 가다듬어도 고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결국 히스기야의 목소리는 새의 울음으로 변합니다.
저는 제비처럼, 두루미처럼 가늘게 울고, 비둘기처럼 신음합니다. 높은 곳을 바라보느라 제 눈은 지쳤습니다. 주님, 저는 고통에 짓눌려 있습니다. 저를 책임져 주십시오.이사야 38:14 · 두루새김
왕의 언어가 무너집니다. 왕은 명령하던 사람이었지만 이제 겨우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를 냅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을 더 이상 지탱할 힘이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맡아 주시기를 구합니다.
왕이 자기 삶을 책임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입니다.
조금 더 깊이
「내 삶이 고요하던 때에」(דְּמִי)는 히브리어 표현 자체가 해석하기 어려운 자리입니다. 삶이 고요하게 흘러가던 때로 읽을 수도 있고, 생애의 중간이나 날들이 멎는 때와 연결하여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13절의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שָׁוָה)는 목적어가 분명하게 제시되지 않아 정확한 동작에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저를 책임져 주십시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르베니(עָרַב)는 누군가의 책임을 보증하거나 그를 위해 담보를 서는 행위를 떠올리게 합니다.
쓰라렸던 일이 평안을 위한 것이었다
15절에서 노래의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주님께서 제게 말씀하셨고, 주님께서 이루셨습니다. 제 마음의 쓰라림 때문에 저는 평생 천천히 걷겠습니다.이사야 38:15 · 두루새김
그런데 그는 곧바로 모든 슬픔이 사라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회복은 고통의 기억을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병에서 나은 사람도 병상에서 겪었던 두려움을 기억합니다. 히스기야의 노래에서 그 기억은 이후의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 영향을 줍니다.
주님, 주님께서 하신 말씀과 일로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제 영의 생명도 온전히 거기에 달려 있습니다. 저를 건강하게 하시고 살려 주십시오.이사야 38:16 · 두루새김
회복 후에 기록한 노래 속에 회복을 구하던 기도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노래는 사건을 단순히 시간 순서대로 기록하지 않고, 병상에서의 절박함과 회복 후의 깨달음을 함께 담고 있습니다.
그 깨달음은 17절에서 가장 선명해집니다.
참으로 그 쓰라리고 쓰라린 고통은 제 평안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 목숨을 사랑하셔서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제 모든 죄를 주님의 등 뒤로 던져 버리셨기 때문입니다.이사야 38:17 · 두루새김
「쓰라리고 쓰라린 고통」이라는 표현에서 같은 말이 반복됩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의 병을 가볍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쓰라린 경험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결과를 알게 된 뒤 자기 고통을 다시 이해합니다. 이전에는 오직 자신의 생명을 끝내는 일로만 보였던 경험에서 이제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을 지키신 일을 발견합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을 모든 질병과 고통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일반 법칙으로 넓혀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히스기야가 자신에게 일어난 구체적인 일을 돌아보며 고백한 내용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가 발견한 평안은 단순한 몸의 회복보다 깊은 곳까지 나아갑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겼던 사람에게도 죄가 있을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온 길을 진실하게 고백하면서도 자신에게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등 뒤로 던져 버리십니다.
이것은 죄를 정면에 두고 계속 바라보며 따지시는 모습과 반대되는 그림입니다. 죄를 자신과의 관계에서 치워 버리시는 행동입니다. 이사야 43:25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의 허물을 지우고 그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본문 모두 죄를 처리하시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행동을 강조합니다.
그에게 다시 주어진 생명은 단지 죽음을 면한 결과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새롭게 이해하게 된 삶입니다.
조금 더 깊이
15절은 문맥상 병에서 회복시키겠다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이 이루어진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동시에 앞서 자신에게 닥친 고통까지 하나님 앞에서 이해하려는 고백으로도 들립니다. 「평생 천천히 걷겠습니다」라는 표현의 정확한 느낌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조심스럽고 겸손하게 걷겠다는 뜻으로도, 겪었던 고통 때문에 무겁고 느린 걸음으로 살아가겠다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두루새김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바탕을 「주님께서 하신 말씀과 일」로 풀어 옮겼습니다. 원문에서는 이를 복수 대명사로 가리키지만, 그 대명사들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은 앞 절의 하나님의 말씀과 행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 셈입니다. 그러나 이를 유일하게 확정된 의미로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평안」은 히브리어 샬롬(שָׁלוֹם)에 해당합니다. 단순히 고통이 없는 상태만이 아니라 온전함과 안녕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살아 있는 자가 할 수 있는 일
이제 히스기야는 자신이 왜 그토록 살고 싶었는지를 분명하게 말합니다.
스올은 주님께 감사하지 못하고, 죽음은 주님을 찬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구덩이로 내려가는 이들은 주님의 신실하심을 바라지 못합니다.이사야 38:18 · 두루새김
이 구절을 죽음 이후의 모든 상태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히스기야는 죽음이 눈앞에 닥쳤을 때 자신이 무엇을 잃게 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의 신실하심을 찬양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탄식은 시편 6:5과 88:10–12에서도 나타납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죽음의 세계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한편 이사야 25:8과 26:19는 죽음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구원과 생명에 대한 소망을 말합니다. 이사야 38장의 히스기야는 그 문제를 논리적으로 정리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 사라질 것 같은 자신의 삶과 예배의 자리를 붙잡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이, 살아 있는 이가 주님께 감사합니다. 오늘의 저처럼 말입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주님의 신실하심을 알립니다.이사야 38:19 · 두루새김
히스기야는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를 기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이 살아 있는 까닭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기회와 연결합니다.
여기서 감사는 한 사람의 경험을 넘어 다음 세대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아는 사람이 그것을 자녀들에게 전합니다. 이는 신명기 6:6–7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명령이나, 시편 78:4에서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다음 세대에 알리겠다는 고백과 맞닿아 있습니다.
마지막 구절에서 그 감사는 공동체의 예배로 이어집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저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살아 있는 모든 날 동안 여호와야훼의 집에서 제 노래들을 현악기로 연주하겠습니다.이사야 38:20 · 두루새김
히스기야는 「저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어서는 「우리는」 연주하겠다고 말합니다. 9절에서 히스기야 개인의 글로 시작한 노래가 20절에서는 공동체가 여호와야훼의 집에서 연주할 노래로 바뀝니다. 한 사람의 병상에서 시작된 기도가 예배의 자리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그때 히스기야는 남은 세월을 빼앗겼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는 「살아 있는 모든 날 동안」 찬양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의 신실하심을 알리는 날들입니다.
왕이 다시 올라가고 싶었던 곳
노래가 끝난 뒤, 이사야서는 다시 짧은 산문으로 돌아옵니다.
이사야가 말했습니다. 「무화과를 뭉친 덩이를 가져다가 곪아 부어오른 종기에 발라라. 그러면 왕이 살아날 것이다.」이사야 38:21 · 두루새김
무화과를 뭉친 덩이를 종기에 바르는 것은 병을 치료하기 위한 실제적인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사람이 행하는 치료 행위가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그려지지는 않습니다. 히스기야의 회복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이사야가 전한 구체적인 처방이 함께 등장합니다.
히스기야가 말했습니다. 「내가 여호와야훼의 집으로 올라가게 될 표징은 무엇입니까?」이사야 38:22 · 두루새김
히스기야는 살아 있는 모든 날 동안 여호와야훼의 집에서 자신의 노래들을 연주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장의 마지막에는 자신이 바로 그 집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묻는 말이 남습니다.
그에게 병에서 회복된다는 것은 단지 침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다시 여호와야훼의 집으로 올라가는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열왕기하 20:7–11에서는 무화과를 뭉친 덩이를 종기에 바르는 일과 히스기야가 표징을 묻는 대화가 그림자의 표징보다 먼저 등장합니다. 이사야서에서는 그 이야기의 두 부분이 히스기야의 노래 뒤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이 두 절은 20절 이후에 일어난 새 사건이라기보다 앞서 있었던 회복 과정의 일부를 전하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시 주어진 시간의 의미
반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를 영원히 붙잡아 둘 수 없다는 사실은 그 하루의 의미를 없애지 않습니다. 오히려 히스기야의 노래에서 살아 있는 시간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람들과 함께 노래하며, 다음 세대에게 그분의 신실하심을 전할 수 있는 시간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삶의 중심에는 자신의 신실함을 내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기도를 들으시고 눈물을 보시며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가 기도한 뒤 십오 년의 생명을 더 받았다고 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에게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치유가 주어진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이 기록하는 것은 다윗 왕조의 왕 히스기야에게 실제로 주어진 특별한 약속과 표징입니다.
죽음의 문에 들어갈 것을 두려워하던 왕이 이제는 여호와야훼의 집으로 올라갈 날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돌려주신 날들은 바로 그 길을 다시 걸어갈 수 있는 날들이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