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55장
이 장의 자리 · 40–55장 · 포로들에게 주는 위로
돈 없이 사라, 그리고 살아라
시장에서 물건을 사려면 돈이 있어야 합니다. 돈이 없으면 살 수 없고, 값을 치르지 않으면 물건을 가져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55장은 시장의 질서를 뒤집는 소리로 시작합니다.
돈이 없는 사람에게 사라고 하십니다. 값을 치르지 말고 가져가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살리지도 못하는 것에 값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정작 그들을 살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그 초대에 응하지 않았을까요? 자신들을 배부르게 하지 못하는 것에 왜 계속 수고를 쏟았을까요?
이 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사람이 알아야 할 정보를 전달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부르고, 돌아오게 하며, 마침내 그들이 살아갈 세계를 새롭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앞 장에서 여호와야훼는 황폐한 시온에게 자녀와 평안의 언약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55장에서는 그 회복의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십니다.
돈이 없는 사람에게 왜 사라고 하시는가
값없이 주지만, 여전히 사라고 하신다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십니다. 「자, 목마른 사람은 모두 물 있는 곳으로 오너라. 돈이 없는 사람도 와서 곡식을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아무 값도 치르지 않고 포도주와 젖을 사라.」이사야 55:1 · 두루새김
이 반복은 시장에서 사람들을 부르는 상인의 외침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보통 상인은 돈을 가진 손님을 찾습니다. 이 말씀에서는 정반대입니다.
이것은 물건을 사고파는 말을 일부러 앞뒤가 맞지 않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값을 치르고 물건을 얻는다는 일반적인 관계를 뒤집음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강조합니다.
돈이 없다는 것은 초대에 응할 수 없는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물은 생존을 위해 필요합니다. 곡식도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는 기본적인 먹을거리입니다. 그런데 포도주와 젖은 단순히 갈증과 굶주림을 해소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풍성함을 나타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포도주와 젖은 땅에서 나는 것과 풍요를 표현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신명기 33:28에서도 곡식과 포도주가 풍성한 땅의 모습이 묘사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겨우 살아남을 만큼의 음식만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만족하고 기쁨을 누릴 수 있는 풍성한 식탁으로 초대하십니다.
사람들은 왜 빵도 아닌 것을 사 먹고 있었는가
「왜 빵도 아닌 것에 돈을 쓰고, 배부르게 하지도 못하는 것에 수고해서 얻은 것을 쓰느냐? 내 말을 귀담아듣고 좋은 것을 먹어라.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즐거움을 누려라.」이사야 55:2 · 두루새김
이사야서에는 우상을 만들고 섬기는 일을 헛된 수고로 묘사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사야 44:9-20에서는 사람이 스스로 만든 우상에게 도움을 구하는 모습을 풍자합니다. 따라서 「배부르게 하지도 못하는 것」을 우상이나 잘못 의지하는 대상으로 이해할 여지는 있습니다.
또한 포로 생활과 귀환이라는 문맥에서, 백성이 생명을 주지 못하는 다른 힘에 자신의 미래를 맡기려는 태도를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55:2는 그 대상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돈을 내고 있습니다.
수고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배부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비판받는 것은 수고 자체가 아닙니다. 수고가 자신을 살리지 못하는 대상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먹을 것을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듣기를 요구하십니다.
처음에는 실제 시장에서 음식과 물을 사는 장면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음식이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것은 신명기 8:3에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배웠던 사실과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야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가르치십니다. 사람에게 빵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실제 음식이 사람을 살리듯, 하나님의 말씀도 사람의 생명에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사야 55장만의 특징은 말씀을 듣는 일이 기쁨의 식탁으로 묘사된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기름진 음식」은 부정적인 의미의 지나친 사치가 아닙니다. 풍성하고 좋은 음식의 모습을 통해 만족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목마른 사람에게 더 많은 수고를 요구하기 전에, 무엇이 그를 참으로 살리는지를 먼저 보여 주십니다.
3절에서 음식의 약속은 언약의 약속으로 이어집니다.
다윗에게 주신 약속이 왜 모든 사람에게 들려오는가
먹으라는 초대가 언약으로 이어지다
「귀를 기울이고 내게 오너라. 내 말을 들어라. 그러면 너희가 살 것이다. 내가 너희와 영원한 언약을 맺고, 다윗에게 베푼 확실한 사랑을 너희에게도 베풀겠다.」이사야 55:3 · 두루새김
하나님이 초대하시는 식탁은 그분과의 관계에서 생명을 얻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갑자기 다윗이 등장합니다.
사무엘하 7:12-16에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의 후손과 왕위를 세우고 그의 왕국을 굳게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특히 7:16에서는 다윗의 집과 왕국, 왕위가 영원히 굳게 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다윗 왕조의 통치가 중단되면서 심각한 질문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약속은 어떻게 되는가요? 왕위가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데, 영원하다고 하셨던 언약은 여전히 유효한가요?
시편 89:3-4에서는 다윗에게 주신 언약을 노래하지만, 89:38-45에서는 왕이 버림받고 그의 왕관이 땅에 떨어진 현실을 탄식합니다. 이사야 55장은 그러한 긴장 속에서 다윗에게 베푼 사랑을 다시 말합니다.
확실한 사랑이라는 표현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언약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분이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사랑입니다.
원문에서 「너희」는 복수형입니다. 과거에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은 이제 많은 사람에게 영원한 언약을 약속하십니다. 그 언약에 담긴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이 이제 백성을 향한 새로운 약속의 근거로 제시됩니다.
이 대목은 이사야 54:10에서 약속하신 평안의 언약과도 이어집니다. 앞 장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평안의 언약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하셨습니다. 이제는 다윗에게 베푸셨던 신실한 사랑을 떠올리며 그 언약이 얼마나 확실한지를 설명하십니다.
다윗은 민족들에게 무엇을 증언했는가
「보아라, 내가 다윗을 민족들에게 증인으로 세웠다. 민족들의 지도자로, 그들에게 명령하는 이로 세웠다.」이사야 55:4 · 두루새김
이 구절에서 두루새김은 원문의 「그」가 바로 앞에 등장한 다윗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어 「다윗」이라고 옮겼습니다. 이것이 가장 직접적인 읽기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었고, 주변 민족들과의 관계에서도 군사적·정치적 지도력을 행사했습니다. 사무엘하 8장에서는 다윗이 여러 주변 민족을 이기고 자신의 왕권을 넓혀 가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55:4는 단순히 다윗의 정복 활동을 회상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민족들의 「증인」이라고 불립니다. 본문은 그가 전한 구체적인 증언의 내용을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3절의 언약과 5절의 민족들에 관한 말씀을 고려하면, 다윗의 왕권과 지도력이 여호와야훼의 통치와 신실함을 민족들 가운데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4절이 역사적 다윗을 설명하면서도, 앞으로 등장할 다윗 계열의 왕을 바라보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11:1-10에서는 이새의 뿌리에서 나오는 인물이 등장하고, 민족들이 그를 찾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따라서 이사야 55:4를 그와 연결하여 미래의 다윗 계열 통치자를 가리키는 약속으로 읽을 여지가 있습니다.
다만 55:4 자체는 그 인물의 이름이나 출현 시점을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역사적 다윗을 회상하는 것인지, 다윗의 약속을 이어받을 미래의 통치자를 내다보는 것인지, 또는 양쪽 의미가 함께 담겨 있는지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이 이스라엘 내부에서만 끝나는 것으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 약속은 민족들과의 관계로 확장됩니다.
누가 민족들을 부르는가
「보아라,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민족을 부를 것이다. 너희를 알지 못하던 민족이 너희에게 달려올 것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인 나 때문에 그렇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영광스럽게 했기 때문이다.」이사야 55:5 · 두루새김
두루새김은 「너희」라고 옮겼지만, 원문에서는 남성 단수형의 「너」가 사용됩니다. 바로 앞에서 다윗이 등장했으므로, 다윗 계열의 왕이나 그 약속을 이어받는 인물을 가리킨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이사야서에서 이스라엘이나 시온을 한 사람처럼 부르는 표현이 반복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회복된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단수형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의 「너희」는 이 읽기를 따릅니다.
민족들이 달려오는 이유는 단순히 그 대상이 스스로 강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가 그들을 영광스럽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끼리만 모이는 닫힌 회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낯선 민족들까지 하나님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다가오는 미래를 바라봅니다.
6-7절은 언약의 약속을 들은 사람들에게 매우 구체적인 응답을 요구합니다.
조금 더 깊이
신약은 이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하여 읽습니다. 사도행전 13:34는 이사야 55:3의 다윗에게 베푼 확실한 사랑에 관한 말씀을 직접 인용하여 예수님의 부활과 연결합니다. 이러한 신약의 읽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먼저 이사야 55장 자체의 약속을 충분히 살펴야 합니다.
찾을 수 있을 때 찾으라는 말의 의미
왜 지금 찾으라고 하는가
여호와야훼를 만날 수 있을 때 찾아라. 가까이 계실 때 그분을 불러라.이사야 55:6 · 두루새김
그런데 이제 그 초대에 긴박함이 더해집니다.
본문은 특정한 날짜나 기한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이 말씀의 중심은 지금 주어진 초대에 응답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백성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분은 먹을 것과 언약을 약속하셨고, 자신을 찾고 부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사야 55장은 단순히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라고만 하지 않습니다. 다음 절에서 그 응답이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지 밝힙니다.
자기 길과 자기 생각을 버리다
악한 사람은 자기 길을 버리고, 악한 짓을 하는 사람은 자기 생각을 버려라. 여호와야훼께 돌아오너라. 그러면 그분께서 불쌍히 여겨 주실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 넉넉히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이사야 55:7 · 두루새김
길은 사람이 실제로 걸어가는 방향과 삶의 방식을 나타냅니다. 생각은 그 행동을 이끄는 판단과 의도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만 바꾸는 일이 아닙니다. 그 행동을 이끌었던 생각까지 다시 살피는 일입니다.
이사야 55장에서도 회개는 단순히 잘못했다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이 걷던 길에서 돌아서서 여호와야훼께 향하는 행동입니다.
처음에는 돈 없이 풍성한 음식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오는 사람에게 풍성한 용서를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풍성함은 식탁에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을 다시 받아들이시는 자비에도 나타납니다.
악한 사람은 자기 길을 버려야 하고, 악한 짓을 하는 사람은 자기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에는 실제로 방향을 바꾸는 일이 포함됩니다. 그러나 그 돌아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자기 잘못을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가 넉넉히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을 설득하여 겨우 용서를 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부르시는 자리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높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익숙한 말씀을 문맥에서 다시 읽다
여호와야훼께서 선언하십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고, 너희 길은 내 길과 다르기 때문이다.」이사야 55:8 · 두루새김
사람이 어떤 일을 이해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것을 알 수 없다고 설명하는 데 사용되곤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이해와 판단을 넘어서는 분이라는 사실은 이사야서 전체에서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55장의 문맥에서는 더욱 구체적인 의미가 드러납니다.
8절은 「다르기 때문이다」라는 말로 앞의 말씀과 연결됩니다. 바로 앞에서 하나님은 악한 사람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오면 불쌍히 여기시고, 넉넉히 용서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인간의 생각보다 높다는 것은, 이 문맥에서 무엇보다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가 인간의 판단을 넘어선다는 뜻을 포함합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쉽게 용서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잘못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어떤 사람은 다시 받아들일 자격이 없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이사야 55장의 하나님은 악한 사람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면서 풍성한 용서를 약속하십니다.
그분의 생각은 인간의 좁은 계산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길과 생각이 다시 등장한다
7절에서는 악한 사람에게 자기 길을 버리고 자기 생각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8절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길과 생각이 인간의 길과 생각과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7절은 사람이 버려야 할 길과 생각을 말합니다. 8절은 그 사람이 돌아가야 할 하나님의 길과 생각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것은 단순히 장소를 옮기는 행동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판단하는 기준이 바뀌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넉넉히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방식도 다시 살펴야 합니다.
하늘과 땅 사이의 거리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고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이사야 55:9 · 두루새김
사람은 땅 위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하늘은 자신이 손으로 닿을 수 없는 곳에 펼쳐져 있습니다. 여호와야훼는 그 차이를 통해 자신의 길과 생각이 인간의 길과 생각보다 높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바로 앞의 문맥을 따라 읽으면,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시는 방식과 그분의 용서가 인간의 좁은 판단보다 크다는 의미가 드러납니다. 또한 이사야서 전체의 문맥에서는 하나님이 역사를 다스리고 자신의 구원을 이루시는 뜻이 인간의 예상을 넘어선다는 의미도 함께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오직 용서에 관한 말씀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지만, 용서의 문맥을 떼어 낸 채 하나님의 모든 행동은 이해할 수 없다는 일반적인 설명으로만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본문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는 들을 수 있습니다. 그분은 사람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와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그렇게 높고 위대한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땅 위의 현실에서 이루어지는가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말씀과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연결되는가요?
하늘에서 내린 비는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늘과 땅 사이를 오가는 것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 땅을 흠뻑 적시고, 땅에서 싹이 돋고 열매가 맺히게 한다.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를 주고 먹는 사람에게 빵을 준 뒤에야 하늘로 돌아간다.」이사야 55:10 · 두루새김
9절에서는 하늘과 땅 사이의 거리가 강조되었습니다. 10절에서는 그 거리를 넘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 등장합니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듯,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삶으로 다가옵니다.
비가 한 번 내렸다고 그 순간 빵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비는 땅을 적시고, 땅은 식물을 자라게 하며, 사람은 거기서 자란 것을 거두어 씨와 음식을 얻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이 과정을 자신의 말씀에 비유하십니다.
씨는 다음 생명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빵은 지금 살아가는 사람을 먹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가 내리는 일은 현재의 생명을 유지할 뿐 아니라 다음의 생명을 준비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로 그려집니다. 그 말씀은 지금 사람을 살리고, 미래에 계속될 생명을 가능하게 합니다.
처음에 등장한 빵은 단지 식탁에 놓인 결과였습니다. 이제는 그 빵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의 과정이 드러납니다.
말씀은 어떻게 목적을 이루는가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와 같다. 내 말은 내게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고, 내가 바라는 일을 이루며 내가 보낸 목적을 이루어 낼 것이다.」이사야 55:11 · 두루새김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임무를 받고 보내진 사람처럼 그려집니다. 이것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로 일을 이루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창세기 1장에서도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십니다.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자 빛이 생깁니다(창세기 1:3). 이사야 55장은 그 창조의 말씀과 직접 같은 문장 구조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지닌다는 공통된 주제를 보여 줍니다.
말씀이 반드시 목적을 이룬다는 사실을, 성경 구절을 인용하거나 선포하면 사람이 원하는 모든 결과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서 목적을 결정하시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특히 이사야 55장의 흐름에서는 그 목적이 이미 드러났습니다. 목마른 사람을 살리고, 악한 사람을 돌아오게 하며, 넉넉히 용서하고, 영원한 언약을 이루는 일입니다.
말씀의 확실함은 사람이 모든 과정을 미리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말씀을 보내신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직 회복의 모든 장면을 보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이 헛되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산들과 나무들이 환영하는 귀환
돌아오는 사람들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너희는 기뻐하며 나가고, 평화롭게 이끌려 갈 것이다.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기쁨의 함성을 터뜨리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다.」이사야 55:12 · 두루새김
이 표현은 이사야 52:11-12에서 바빌로니아를 떠나 돌아오라는 명령과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서둘러 도망치듯 가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는 그 귀환이 기쁨과 평화의 행렬로 그려집니다.
여기서 「평화롭게」는 이사야 54:10의 평안의 언약과도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언약의 평안이 이제 백성이 걸어가는 길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산이 노래하고 나무가 손뼉을 친다는 것은 자연을 사람처럼 그리는 시적 표현입니다. 이사야서는 하나님의 구원을 인간의 역사 안에서만 일어나는 변화로 제한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35:1-2에서는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고 사막이 꽃을 피웁니다. 이사야 44:23에서도 하늘과 땅, 산들과 숲의 모든 나무가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이스라엘의 귀환은 단순히 한 민족이 정치적 억압에서 풀려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 귀환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창조 세계 가운데 드러나는 사건으로 그려집니다.
그래서 자연도 그 기쁨에 참여합니다.
가시덤불 자리에 다른 나무가 자라다
「가시덤불 대신 사이프러스가 자라고, 시르파드 대신 도금양이 자랄 것이다. 이 일은 나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드높이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표징이 될 것이다.」이사야 55:13 · 두루새김
사람에게 불편함을 주거나 땅의 황폐함을 떠올리게 하는 식물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아름답고 유익한 나무가 자랍니다.
땅에서 가시덤불을 뽑아내기만 하면 빈자리가 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빈자리를 새로운 생명으로 채우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기존의 문제를 제거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새로운 생명이 자라게 합니다.
특히 이사야 41:18-20에서도 하나님은 광야에 물을 내고 메마른 땅에 나무들을 자라게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곳에는 사이프러스와 도금양도 등장합니다. 그 목적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하나님의 손이 그 일을 이루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가시덤불이 사라진 자리에 새 나무가 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는 표징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시르파드」(סַרְפָּד)는 정확한 식물의 종류를 확정하기 어려운 히브리어 시르파드를 소리대로 옮긴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거칠거나 가시가 있는 식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인지 분명히 정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가시덤불의 모습은 창세기 3:17-18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땅이 인간의 죄로 인해 저주받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흐름은 창세기에서 죄와 수고의 문제를 안게 된 땅이 하나님의 구원으로 새롭게 변화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이사야 55:13이 창세기 3장의 저주가 모든 면에서 완전히 제거되는 정확한 시점과 과정을 설명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엇을 위해 수고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어떤 것은 많은 수고를 요구하지만 정작 사람의 삶을 온전하게 만들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많은 수고를 들였다는 이유로 계속 그 대상을 붙들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수고로 얻지 못했던 만족과 회복을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으로 이루십니다.
이사야 55장에서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사들이는 손님이 아닙니다. 생명을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에게 초대받은 사람입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립니다.
비가 메마른 땅을 적시고, 그 땅에서 싹이 자랍니다. 사람들은 그 땅에서 씨를 얻어 다시 뿌리고, 거둔 곡식으로 빵을 만들어 먹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뻐하며 돌아오는 사람들 앞에서 산들과 언덕들이 기쁨의 함성을 터뜨리고, 들의 나무들이 손뼉을 칩니다. 가시덤불이 자라던 자리에는 사이프러스가 자라고, 시르파드가 있던 자리에는 도금양이 자랍니다.
메마른 땅에는 생명이 남고, 굶주린 사람에게는 빵이 주어지며, 돌아오는 백성에게는 기쁨과 평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변화는 하나님이 이루신 일이라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표징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 말씀이 닿은 땅에는, 전에는 자라지 않던 생명이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