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풀어 읽기 · 25장

이 장의 자리 · 17–26장 · 거룩한 삶의 규정

땅과 백성은 여호와야훼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가난해져 조상에게 물려받은 밭을 팔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정당한 값을 치르고 그 밭을 샀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새 주인은 그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수확물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온 땅에 뿔나팔 소리가 울립니다.

그날부터 그 땅은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지금 주인이 정당한 값을 지불했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밭을 되돌려주는 것은 특별히 너그러운 사람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그 땅을 영원히 가질 권리를 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25장은 이처럼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소유의 개념을 뒤집는 명령으로 가득합니다.

왜 하나님은 땅을 사고파는 일과 노동, 빚과 생계에 이처럼 깊이 관여하시는 것일까요?

땅은 여호와야훼의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도 여호와야훼의 것입니다.

이 두 선언이 레위기 25장 전체를 떠받칩니다.

그러나 이 장을 아름다운 해방의 선언으로만 읽을 수는 없습니다.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영원히 노예로 삼지 못하도록 제한하면서도, 외국 출신 노예는 사들이고 자녀에게 물려주며 영원히 부릴 수 있다고 허용하기 때문입니다.

희년의 해방과 영구적인 노예 소유가 같은 장에 등장합니다.

이 장의 말씀은 시나이산에서 주어집니다. 이스라엘은 아직 가나안에서 밭을 일구지도, 조상의 땅을 물려받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땅에 정착하기도 전에, 그 땅을 어떻게 소유하고 언제 되돌려주어야 하는지부터 말씀하십니다.

읽는 시간 32분소단락 1125장 본문 읽기 →

사람이 아니라 땅이 안식한다

레위기 25:1–7 본문 →

땅은 왜 쉬어야 하는가

여호와야훼의 첫 명령은 뜻밖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너희가 내가 주는 땅에 들어가면, 그 땅도 여호와야훼를 위해 쉬어야 한다.』」레위기 25:2 · 두루새김

레위기 23장에서 이스라엘은 매주 일곱째 날에 쉬도록 명령받았습니다. 이제 그 일곱이라는 리듬이 해마다 반복되는 농사의 시간으로 확대됩니다.

「『그러나 일곱째 해는 그 땅이 완전히 쉬는 해가 되어야 한다. 여호와야훼를 위해 쉬는 해다. 네 밭에 씨를 뿌리지 말고 포도나무의 가지도 치지 마라.』」레위기 25:4 · 두루새김

일곱째 해는 단지 농사일을 조금 줄이는 해가 아니라, 땅을 일상적인 경작과 수확의 질서에서 벗어나게 하는 해입니다. 땅은 인간의 생산을 위한 자원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땅입니다. 하나님은 그 땅이 일정한 주기로 인간의 농사 활동에서 벗어나 쉬도록 명령하십니다.

사람이 일주일에 하루 쉬는 것과 땅을 일 년 동안 일구지 않는 것은 경제적으로 매우 다른 일입니다. 특히 농업에 의존하는 공동체에서는 한 해의 씨뿌리기와 수확을 멈춘다는 것이 생활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식에 하나님의 명령이 개입하는 것입니다.

수확하지 말라면서 먹으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5절에서 하나님은 땅이 쉬는 해에 저절로 자란 곡식을 베어 거두거나 가지치기하지 않은 포도나무의 포도를 따서 거두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땅이 쉬는 동안 난 것은 너희의 먹거리가 되어야 한다. 너와 네 남자 노예와 여자 노예, 너와 함께 지내는 고용된 일꾼과 머물러 사는 사람도 그것을 먹을 수 있다.』」레위기 25:6 · 두루새김

수확하지 말라고 하면서 어떻게 그 땅에서 난 것을 먹을 수 있을까요? 5절은 평소처럼 밭에서 난 것을 자신의 수확물로 거두어들이는 행위를 금지합니다. 그러나 6–7절은 그해 저절로 자란 것을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12절의 희년 규정에서도 밭에서 나는 것을 먹도록 허용합니다.

따라서 금지되는 것은 식량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거두는 모든 행위라기보다, 그해의 생산물을 평상시의 농업 수확처럼 혼자 차지하여 거두고 처리하는 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잘 맞습니다. 평소에는 밭의 주인이 씨를 뿌리고 수확물을 거두며 그 수확물을 관리합니다. 그러나 일곱째 해에는 자기 밭에서 자란 것이라도 평소와 같은 방식으로 혼자 차지할 수 없습니다.

그 땅에서 난 것은 여러 사람의 먹거리가 됩니다.

여기에는 밭의 주인뿐 아니라 남자 노예와 여자 노예, 고용된 일꾼과 머물러 사는 사람이 함께 등장합니다. 심지어 가축과 들짐승도 포함됩니다. 이 제한에는 하나님과 땅의 관계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람과 동물의 관계까지 포함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해의 쉼에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일곱 해가 일곱 번 지나면, 땅과 사람의 관계 자체를 다시 정리해야 하는 해가 찾아옵니다.

쉰째 해, 돌아갈 수 있는 날을 선포하라

레위기 25:8–13 본문 →

해방은 왜 속죄일에 선포되는가

8절에서 하나님은 땅이 쉬는 해가 일곱 번 돌아오는 햇수를 세라고 명령하십니다. 일곱 해씩 일곱 번이므로 마흔아홉 해가 됩니다.

「『일곱째 달 십 일에 뿔나팔을 크게 울려라. 속죄의 날에 너희 온 땅에 뿔나팔 소리가 울리게 하여라.』」레위기 25:9 · 두루새김

레위기 16장에서 이스라엘의 죄와 부정함을 위한 속죄가 이루어지는 날이며, 23장에서는 백성이 자신을 괴롭게 하고 모든 일을 멈추도록 명령받은 날입니다.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속죄의 날에, 이스라엘이 살아가는 온 땅에서 새로운 일이 선포됩니다.

「『너희는 쉰째 해를 거룩하게 구별하고, 그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그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다. 너희는 저마다 자기 땅으로 돌아가고 자기 친족들에게 돌아가야 한다.』」레위기 25:10 · 두루새김

해방은 단지 지금의 속박이 끝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돌아갈 곳을 되찾는 사건입니다.

희년을 맞은 사람이 자기 친족들에게 돌아가고 자기 땅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가난과 빚 때문에 잃어버린 가족의 생계 기반과 사회적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날에는 자유를 흔히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는 상태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이 강조하는 자유에는 구체적인 소속이 있습니다.

「그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의 해방은 실제로 모두에게 적용되는가

뒤의 44–46절에서는 외국 출신 노예를 영원히 소유하고 물려줄 수 있다고 허용합니다. 따라서 「그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이라는 선언을 오늘날의 의미에서 그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이 신분과 출신에 관계없이 완전한 자유를 얻는다고 이해하면, 같은 장의 후반부와 충돌합니다.

본문은 자유를 널리 선포하지만, 그 구체적인 적용에서는 같은 이스라엘 백성과 외국 출신 노예 사이에 차이를 둡니다. 그럼에도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 경제적인 이유로 조상의 땅과 친족들에게서 영원히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한다는 점에서, 희년의 해방은 매우 구체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희년은 정확히 49년마다 오는가, 50년마다 오는가

본문은 일곱 해씩 일곱 번, 곧 49년을 세라고 한 뒤, 쉰째 해를 거룩하게 구별하라고 합니다. 본문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희년이 거룩하게 구별된 해이며, 그해에는 평소의 경작과 수확을 멈추고 사람은 자기 친족들과 땅으로 돌아가며 팔린 땅도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땅을 돌려줄 수 있으려면 땅을 사고파는 방식부터 달라져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문장에 적힌 대로 50년째를 별도의 희년으로 보는 읽기는 10–11절의 분명한 표현에 근거합니다. 반면 희년과 마지막 안식년을 겹치는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읽기는 연속해서 농사를 멈추는 일과 주기 계산의 문제에 주목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쉰째 해를 거듭 밝히므로, 후자의 이해를 이 구절이 직접 말하는 내용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정확한 역사적 시행 방식에 관해서도 이 장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34:8–17에서는 유다 백성이 노예로 부리던 히브리 남자와 여자를 풀어 주기로 언약을 맺었다가, 다시 그들을 종으로 삼는 사건이 기록됩니다. 이 사건은 레위기 25장의 희년이 실제로 그때 시행되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아닙니다. 그러나 해방을 선포하고도 그 해방을 실제로 지키지 않는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 준다는 점에서 레위기 25장과 연결됩니다. 이사야 61:1에는 가난한 사람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고, 사로잡힌 사람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이곳에 사용된 해방의 표현은 레위기 25:10의 「자유를 선포하여라」와 원문에서 중요한 언어적 연결을 가집니다. 그러나 이사야 61장이 레위기 25장의 희년 제도를 그대로 다시 시행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는 포로와 억압, 회복의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실 구원의 소식을 선포합니다. 신약의 누가복음 4:18–21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의 이 말씀을 읽으시고 그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레위기 25장을 직접 인용한 장면이라기보다, 레위기에서 사용된 해방의 말이 이사야를 거쳐 예수님의 사역을 설명하는 데 이어지는 성경 안의 연결입니다. 후대의 의미가 풍성해진다고 해서 레위기 25장의 실제적인 땅을 돌려주는 일과 사람을 풀어 주는 일에 관한 내용을 단순한 영적 비유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땅을 사는 것이 아니라 수확할 시간을 산다

레위기 25:14–17 본문 →

희년까지 남은 햇수가 가격을 결정한다

14절은 땅을 사고파는 일에 관한 원칙을 제시합니다.

「『이웃에게 무엇을 팔거나 이웃에게서 무엇을 살 때에는 서로 부당하게 대하지 마라.』」레위기 25:14 · 두루새김

이어지는 15–16절은 사고파는 값을 어떻게 정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희년이 지난 뒤의 햇수와 앞으로 수확할 수 있는 햇수를 따져 값을 정해야 합니다.

「『수확할 햇수가 많이 남았으면 값을 높이고, 적게 남았으면 값을 낮추어라. 그가 네게 파는 것은 수확할 수 있는 횟수이기 때문이다.』」레위기 25:16 · 두루새김

일반적으로 땅을 산다는 것은 그 땅 자체를 소유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법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땅은 영원히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돈을 주고 무엇을 사는 것일까요?

희년까지 그 땅에서 수확할 수 있는 권리를 사는 것입니다.

사는 사람은 돈을 지불했더라도 영원한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파는 사람 역시 땅을 팔았다고 해서 그 땅과의 관계를 영원히 잃는 것은 아닙니다.

공정한 가격은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일인가

17절은 거래의 원칙을 다시 강조합니다.

「『서로 이웃을 부당하게 대하지 마라. 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공경하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이기 때문이다.』」레위기 25:17 · 두루새김

여기서 경제적인 거래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공경하는 태도가 직접 연결됩니다. 상대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터무니없이 낮은 값을 제시하거나, 희년까지 남은 기간을 무시하고 영원한 소유권을 사는 것처럼 값을 매긴다면 그것은 단순히 영리한 거래가 아닙니다. 본문의 기준에서는 이웃을 부당하게 대하는 행위가 됩니다.

거래하는 사람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어느 정도의 압박을 받고 있는지는 거래 문서에 모두 드러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러한 거래에 대해서도 「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공경하여라」라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공경하는 태도가 성소 안의 제사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땅값을 정하는 일에도 적용된다는 뜻입니다.

땅을 사고파는 행위 자체는 허용됩니다. 다만 그 거래가 상대방의 가족이 대대로 이어받은 생계 기반을 영원히 빼앗는 결과로 굳어지지 않도록 제한합니다.

땅을 거래할 수는 있지만, 사람의 미래까지 완전히 사들일 수는 없습니다.

농사를 멈추면 무엇을 먹을 것인가

레위기 25:18–22 본문 →

하나님은 인간의 현실적인 질문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지금까지 안식년과 희년의 규정을 읽으면 한 가지 현실적인 문제가 떠오릅니다.

「『너희가 일곱째 해에 씨도 뿌리지 않고 수확물도 거두어들이지 않을 텐데 무엇을 먹고 살지 묻는다면,』」레위기 25:20 · 두루새김

농업 사회에서 한 해 동안 씨를 뿌리지 않고 평소와 같은 수확을 하지 않는다면 식량이 부족해질 수 있다는 걱정은 충분히 현실적입니다. 본문은 그 질문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걱정에 직접 답하시는 형식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여섯째 해에 너희에게 복을 내리도록 명령하겠다. 그해에는 세 해 동안 먹을 수확물이 날 것이다.』」레위기 25:21 · 두루새김

하나님은 단지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이 복을 명령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본문은 안식년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인간의 계산만으로 해결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 명령을 주신 하나님께서 필요한 식량을 공급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섯째 해에 충분한 수확을 얻고, 일곱째 해에는 농사를 쉬며, 여덟째 해에 다시 씨를 뿌립니다. 그러나 여덟째 해에 씨를 뿌렸다고 해서 곧바로 새로운 수확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새 수확이 들어오기까지는 전에 거두어 둔 것을 먹어야 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특별한 언약의 명령과 그 명령을 지킬 수 있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말합니다. 그 약속을 오늘날 개인이 일을 쉬거나 경제적인 결정을 내릴 때마다 반드시 똑같은 방식으로 적용되는 재정 보장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그들이 땅에서 안전하게 살아갈 것이라는 약속도 함께 주십니다(18–19절).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생산해야만 안전해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정하신 때에 생산을 멈추는 삶 안에서도 그들을 먹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명령은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신뢰를 요구합니다.

땅은 내 것이다 — 소유권을 뒤집는 선언

레위기 25:23–28 본문 →

이스라엘도 하나님 앞에서는 머물러 사는 외국인이다

23절에 이르면 앞의 규정들이 왜 필요한지 결정적으로 밝혀집니다.

「『땅을 영원히 넘겨주는 조건으로 팔아서는 안 된다. 그 땅은 내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내 곁에 머물러 사는 외국인들이다.』」레위기 25:23 · 두루새김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갈 백성입니다. 그들은 그 땅을 물려받고, 각 친족 집단과 가족이 자신들의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들에게 「내 곁에 머물러 사는 외국인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표현의 힘은 그들이 땅을 소유하지 못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실제로 본문은 그들에게 소유한 땅이 있다고 말하며, 그 땅이 희년에 돌아와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핵심은 그 소유권의 한계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땅에서 살아가는 외국인들을 만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들 자신도 머물러 사는 외국인입니다.

이스라엘은 땅을 받은 사람이지,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가난 때문에 판 땅을 되찾는 세 가지 길

24절은 이 선언을 실제적인 법으로 연결합니다.

「『너희가 소유한 모든 땅은 팔린 뒤에도 되살 수 있게 하여라.』」레위기 25:24 · 두루새김

이어지는 25–28절은 사람이 가난해져 자기 땅의 일부를 팔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그 땅이 다시 원래의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는 길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가장 먼저 가까운 친척이 땅을 되살 수 있습니다. 친척이 나서지 못하더라도, 땅을 판 사람이 이후 형편이 나아져 충분한 돈을 마련하면 직접 되살 수 있습니다. 둘 다 불가능하다면 희년에 땅이 돌아옵니다.

가난해진 사람이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땅을 팔면, 당장의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동시에 앞으로 살아갈 생산 기반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 땅이 영원히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된다면, 한 번의 경제적 위기가 다음 세대의 삶까지 결정할 수 있습니다.

희년은 바로 그런 영구적인 상실에 한계를 둡니다.

여기서 「되사야 한다」의 되사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가알(⁨גָּאַל⁩)입니다. 이 단어는 친척이 나서서 잃어버린 소유를 회복하거나, 몸값을 치르고 사람을 풀어 주는 행위에 사용됩니다. 룻기 4장에서 보아스는 나오미 집안의 땅과 관련된 친척의 권리를 행사합니다. 룻기의 상황은 레위기 25장의 규정과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가족의 소유와 생계가 친척의 책임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배경을 제공합니다.

레위기 25장의 특징은 그러한 친척이 전혀 없더라도 희년이 마지막 회복의 길로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족이 도울 수 없고, 자기 힘으로도 되살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도 희년이 오면 땅은 돌아가야 합니다.

희년까지 오랜 기간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원래 주인은 실제로 땅을 사용할 수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빼앗기지는 않는다는 것이 이 법의 핵심입니다.

되사는 값은 어떻게 계산되는가

27절은 직접 되살 경우 땅을 판 뒤의 햇수를 계산하고, 남은 햇수에 해당하는 돈을 돌려주도록 합니다. 이 규정은 앞에서 땅을 사고팔 때 수확 가능한 햇수에 따라 값을 정하라는 원칙과 연결됩니다.

중요한 것은 되사는 권리가 있다고 해서 산 사람이 그동안 정당하게 얻은 수확의 가치를 모두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법은 한쪽의 회복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거래의 상대방이 이미 지불한 값과 사용한 기간도 고려합니다.

희년 이전의 되사기에는 계산과 돈을 돌려주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희년이 오면 별도로 되살 능력이 없는 사람도 땅을 돌려받게 됩니다.

이 규정이 지키려는 것은 단지 땅의 소유권이 아닙니다.

그 땅을 통해 한 가족이 앞으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게림 베토샤빔은 거류민과 거주자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두 단어는 완전히 같은 의미가 아니지만, 여기서는 함께 사용되어 이스라엘이 땅의 절대적인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머물러 사는 외국인들」로 풀어 옮겼습니다.

왜 성벽이 있는 도시의 집은 예외인가

레위기 25:29–34 본문 →

모든 부동산이 희년에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땅은 영원히 팔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모든 집도 희년에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야 할까요?

「『누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살림집을 팔면, 판 날부터 한 해가 다 지날 때까지 그 집을 되살 수 있어야 한다. 되살 수 있는 기간은 한 해다.』」레위기 25:29 · 두루새김

그 집을 한 해 안에 되사지 않으면 산 사람의 영원한 소유가 되고, 희년에도 돌려주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은 도시의 집과 농촌의 땅을 다르게 취급하실까요? 본문은 그 이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31절을 보면 어떤 차이가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둘레에 성벽이 없는 마을의 집은 밭과 같이 여겨야 한다. 그런 집은 되살 수 있어야 하고, 희년에는 돌려주어야 한다.』」레위기 25:31 · 두루새김

농촌의 집은 주변의 경작지와 연결된 생계 기반으로 여겨졌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집은 밭과 같은 방식으로 취급되지 않습니다.

이 구별은 희년의 목적이 모든 재산 거래를 일정한 시점마다 원래대로 돌리는 데 있는 것은 아님을 보여 줍니다. 본문은 특별히 조상의 땅과 그에 연결된 생계 기반을 영원히 잃지 않도록 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레위 사람들의 집은 왜 다시 예외가 되는가

32–34절에서는 또 다른 특별 규정이 등장합니다.

레위 사람들의 도시에 있는 집은 언제든 되살 수 있고, 희년에도 돌아와야 합니다. 그 도시에 딸린 주변 들판은 아예 팔아서는 안 됩니다.

민수기 18:20–24에서 레위 사람들은 다른 지파들과 같은 방식으로 땅을 물려받지 않는다고 규정됩니다. 그러나 민수기 35:1–8과 여호수아 21장에서는 그들이 살 도시와 가축을 위한 목초지를 받습니다. 따라서 레위 사람들에게 주어진 도시와 주변 들판은 그들의 거주와 생계에 중요한 기반이었습니다.

이곳까지 영원히 넘겨주는 거래의 대상이 된다면, 다른 지파들처럼 넓은 땅을 물려받지 않은 레위 사람들의 생활 기반이 더욱 약해질 수 있습니다. 본문은 바로 그 도시의 집과 주변 들판에 특별한 보호를 부여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성벽이 있는 도시인지에 관한 30절의 히브리어 전승에는 자음으로 전해진 본문과 전통적으로 읽어 온 형태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문맥과 전통적인 읽기를 따라 「성벽이 있는 도시」로 옮겼습니다. 31절이 성벽 없는 마을을 별도로 구분하고 있다는 점도 이 읽기와 어울립니다. 다만 33절에서 누가 되사는 행위의 주체인지, 팔린 집을 돌려주는 일을 어떤 문장 구조로 설명하는지에는 원문상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 세부적인 법적 상황은 확정하기 어렵지만, 레위 사람들의 도시에 있는 집이 일반적인 성벽 있는 도시의 집과 다르게 취급되며 희년에 돌아온다는 큰 원칙은 분명합니다.

가난해진 형제를 붙들어 주어라

레위기 25:35–38 본문 →

땅을 잃기 전에 사람부터 붙들어야 한다

35절에서는 관심이 다시 바뀝니다.

앞에서는 땅을 팔았을 때 어떻게 되찾을 것인지를 설명했습니다. 이제는 한 사람이 가난해져 스스로 버티기 어려워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네 백성에 속한 사람이 가난해져 네 곁에서 제힘으로 살아가기 어려워지면, 그를 도와주어라. 머물러 사는 외국인처럼 그도 너와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하여라.』」레위기 25:35 · 두루새김

그는 아직 완전히 공동체 밖으로 쫓겨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스스로 삶을 유지하기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기반이 약해져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이 완전히 무너진 뒤에야 돌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앞의 되사기 규정은 이미 팔린 땅을 회복하는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이 명령은 가난한 사람이 더 깊이 다른 사람에게 얽매이기 전에 그를 지탱해 주는 일을 요구합니다. 경제적 어려움을 다루는 방식이 일이 벌어진 뒤의 회복뿐 아니라, 더 심하게 무너지는 것을 막는 책임으로 확대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 요구하는 도움의 목표는 단순히 한 번의 음식을 건네는 일에 그치지 않습니다. 같은 백성에 속한 사람이 공동체 안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자가 왜 금지되는가

36–37절은 매우 구체적인 금지를 내립니다.

「『그에게서 이자나 웃돈을 받지 마라. 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공경하여라. 네 백성에 속한 그 사람이 너와 함께 살아가게 하여라.』」레위기 25:36 · 두루새김
「『그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이자를 받지 마라. 먹거리를 빌려주면서 더 많이 돌려받으려 하지 마라.』」레위기 25:37 · 두루새김

이 규정은 같은 백성에 속한 가난한 사람에게 돈이나 먹거리를 빌려주는 상황을 전제합니다. 본문은 지나치게 높은 이율만 금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맥에서는 이자와 웃돈 자체를 받지 말라고 합니다.

그 사람은 이미 가난해져 스스로 살아가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돈이나 먹거리를 빌려주면서 추가적인 이익을 얻는다면, 그의 위기는 돈을 빌려주는 사람의 수익 기회가 됩니다. 도움의 목적은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통해 이익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가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종류의 상업적 대출이나 현대 금융 거래에 대한 세부 규칙을 곧바로 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특별히 같은 백성에 속한 사람이 가난해져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울 때 돈이나 먹거리를 빌려주는 상황을 다룹니다.

상대방이 생존의 위기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이익을 얻어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는 땅을 거래할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같은 백성에 속한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줄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공경하라고 합니다. 두 경우 모두 사람의 경제적인 약함을 이용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가난한 형제를 돕는 이유는 출애굽이다

38절은 이 단락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합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다. 너희에게 가나안 땅을 주고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냈다.』」레위기 25:38 · 두루새김

그들이 새로운 땅에서 살아가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에게 행하신 구원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노예 상태에서 이끌어 내셨는데, 그들은 같은 백성에 속한 가난한 사람의 어려움을 이용하여 그를 더욱 깊은 종속으로 밀어 넣어서는 안 됩니다.

출애굽의 기억은 단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는 종교적인 의무만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경제적 어려움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결정합니다.

그런데 다음 단락에서는 이 가난이 더욱 심각한 단계에 이릅니다. 이제 사람은 땅을 파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팔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35절에서 두루새김이 「머물러 사는 외국인처럼」으로 옮긴 원문의 표현은 해석이 갈립니다. 그 사람이 실제로 거류민이나 거주자와 비슷한 지위로 살아가게 하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는 거류민과 거주자를 돌보듯 그를 붙들어 주어야 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원문의 연결 방식만으로 어느 해석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마지막 방향은 같습니다. 그도 「너와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형제를 노예처럼 부리지 마라

레위기 25:39–43 본문 →

사람을 팔았어도 사람의 소유권까지 넘긴 것은 아니다

39절은 가난의 가장 심각한 결과 가운데 하나를 다룹니다.

「『너와 함께 사는 네 백성에 속한 사람이 가난해져 네게 팔리면, 그에게 노예가 하는 일을 시키지 마라.』」레위기 25:39 · 두루새김

이제 그 사람은 자신의 노동과 몸을 다른 사람의 지배 아래 두게 되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극심한 가난과 빚은 이처럼 다른 사람에게 매인 삶으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본문은 그런 상황 자체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정합니다.

「『그는 고용된 일꾼이나 머물러 사는 사람처럼 너와 함께 지내야 한다. 희년까지 네 곁에서 일하게 하여라.』」레위기 25:40 · 두루새김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경제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매였다고 해서 일반적인 노예와 똑같이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일정한 기간 동안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그러나 희년이 되면 그 관계는 끝나야 합니다.

「『희년에는 그와 그의 아들들이 함께 네게서 떠나야 한다. 그는 자기 친족들과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레위기 25:41 · 두루새김

한 사람이 가난해져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며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을 때, 단지 그를 풀어 주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끝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가 돌아갈 가족과 먹고살 기반이 없다면, 자유를 얻더라도 다시 비슷하게 다른 사람에게 매인 처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25장은 사람을 풀어 주는 일과 땅을 돌려주는 일을 연결합니다.

「그들은 내가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내 노예들이기 때문이다」

42절은 이러한 제한의 근거를 밝힙니다.

「『그들은 내가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내 노예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노예처럼 사고팔아서는 안 된다.』」레위기 25:42 · 두루새김

이스라엘을 노예로 삼지 말라는 이유가 그들이 이미 하나님의 노예라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은 파라오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이끌어 내어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은 다른 이스라엘 사람을 자신에게 영원히 속한 노예처럼 다룰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삶에는 다른 인간의 소유권보다 앞서는 하나님의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 속한다는 사실은 인간의 소유권을 제한하는 근거가 됩니다.

「『그를 혹독하게 부리지 마라. 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공경하여라.』」레위기 25:43 · 두루새김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들의 땅에서 가난해진 형제를 같은 방식으로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들이 과거에 겪었던 억압은 다른 사람에게 반복해도 좋은 지배 방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고, 그 구원의 기억을 동족에 대한 지배를 제한하는 근거로 삼으십니다. 그 과거는 오늘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단락은 이 원칙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이스라엘 동족에게 적용되는 희년 규정을 출애굽기 21:2–6이나 신명기 15:12–18의 히브리 종 해방 규정과 비교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 본문들에는 여섯 해 동안 일하고 일곱째 해에 풀려나는 규정이 등장합니다. 반면 레위기 25장은 희년까지 일하고 풀려나도록 정합니다. 이 차이를 무시하고 모든 법이 언제나 같은 해방 시점을 정한다고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서로 다른 법 규정이 어디까지 적용되며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남습니다.

희년의 가장 불편한 대목 — 외국 출신 노예는 영원히 부릴 수 있는가

레위기 25:44–46 본문 →

이스라엘 동족과 외국 출신 사람에게 적용되는 서로 다른 규정

44절은 앞 단락과 뚜렷하게 대조됩니다.

「『너희가 소유할 남자 노예와 여자 노예는 너희 둘레의 민족들에게서 사들일 수 있다.』」레위기 25:44 · 두루새김

이어서 45절은 이스라엘과 함께 머물러 사는 외국인들의 자손과 친족들도 사들일 수 있으며, 그들이 소유물이 된다고 말합니다. 46절은 더욱 분명합니다.

「『너희는 그들을 너희 뒤를 이을 아들들에게 물려주어 소유물로 받게 할 수 있다. 그들을 영원히 노예로 부릴 수 있다. 그러나 너희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끼리는 누구도 다른 사람을 혹독하게 부려서는 안 된다.』」레위기 25:46 · 두루새김

이것은 단순히 사람을 고용하는 계약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법은 출신에 따라 서로 다른 신분과 해방의 권리를 인정합니다. 앞서 희년이 그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자유를 선포한다고 말했더라도, 여기서는 외국 출신 노예를 영원히 소유할 수 있다는 제한이 나타납니다.

이 긴장을 없애서는 안 됩니다.

출애굽의 해방은 왜 모든 노예에게 적용되지 않는가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이끌어 내신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에게 다른 민족 출신 사람을 노예로 소유하는 일을 허용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 본문은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동족을 영원히 부릴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 속한 노예이며,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 이유가 외국 출신 노예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법의 적용 범위를 이스라엘 동족과 외국 출신 사람으로 구별합니다.

이 장이 제시하는 해방은 실제로 제한적입니다.

창세기 1:26–27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표현은 이스라엘 동족에게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레위기 19:33–34에서는 이스라엘이 머물러 사는 외국인을 학대하지 말고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레위기 24:22에서는 외국인과 본래 그 땅에 사는 사람에게 하나의 법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본문들과 레위기 25:44–46을 함께 읽으면, 이스라엘의 법 안에는 머물러 사는 외국인에 대한 보호와 외국 출신 노예 소유의 허용이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물론 머물러 사는 외국인과 노예는 법적으로 같은 부류가 아닙니다. 외국인에 대한 보호 명령이 외국 출신 노예의 법적 지위를 모두 같게 만든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해방 경험은 동족이 영원히 다른 사람에게 매여 살지 않도록 제한하는 근거가 되었지만, 레위기 25장의 법에서는 그 해방 원칙이 모든 노예에게 똑같이 확대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분명한 한계입니다.

이 법을 오늘날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이런 규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그 규정을 오늘날 인간을 소유해도 좋다는 도덕적 허가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릅니다. 레위기 25장은 고대 이스라엘의 사회와 법질서 속에서 노예 소유를 규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날 사람을 재산처럼 사고팔고 자녀에게 물려주는 행위를 정당화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령 외국 출신 노예들은 스스로 좋은 생활 조건을 얻기 위해 계약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라거나, 실제로는 일반적인 가족 구성원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들의 뜻을 설명하지 않으며, 영원히 소유하고 물려줄 수 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성경의 여러 법이 당시 사회 안에서 특정한 억압을 제한한다는 사실과, 그 법이 그 사회의 모든 불평등을 없앤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동시에 참일 수 있습니다. 이 차이를 지우지 않을 때, 희년이 실제로 무엇을 회복하고 무엇을 회복하지 않는지도 더욱 뚜렷해집니다.

다른 사람의 손에 팔린 형제를 되찾다

레위기 25:47–55 본문 →

가난해진 사람과 부유해진 거류민

「『너와 함께 머물러 사는 외국인이 형편이 넉넉해지고, 그 곁에 사는 네 백성에 속한 사람은 가난해져서, 그 외국인이나 외국인의 친족 가운데 한 사람에게 팔리면,』」레위기 25:47 · 두루새김

이것은 외국 출신 사람은 언제나 가난하고 이스라엘 사람은 언제나 경제적으로 더 힘이 있다는 생각을 뒤집습니다. 본문은 머물러 사는 외국인이 경제적으로 부유해질 수 있으며, 이스라엘 사람이 그에게 매여 사는 상황도 생길 수 있다고 인정합니다.

「『팔린 뒤에도 몸값을 치르고 풀려날 수 있어야 한다. 그의 형이나 남동생 가운데 한 사람이 몸값을 치르고 풀어 줄 수 있다.』」레위기 25:48 · 두루새김

앞에서는 가난 때문에 팔린 땅을 되사는 일을 설명했습니다. 이제는 가난 때문에 팔린 사람의 몸값을 치르고 풀어 주는 일을 설명합니다. 원문에서는 두 경우 모두 히브리어 가알에서 나온 말이 사용됩니다.

땅을 되찾는 일과 사람을 풀어 주는 일은 서로 다른 행위입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한 가족이 가난 때문에 잃은 것을 회복하도록 돕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땅을 잃었을 때는 가까운 친척이 나설 수 있습니다. 사람이 팔렸을 때도 형이나 남동생, 큰아버지나 작은아버지, 또는 그들의 아들이나 같은 집안의 다른 가까운 친척이 나설 수 있습니다. 친척이 나서지 못하더라도, 그 사람이 나중에 형편이 나아지면 스스로 몸값을 치르고 풀려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몸값도 남은 햇수에 따라 계산한다

50–52절은 몸값을 어떻게 계산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그 사람이 팔린 해부터 희년까지 남은 햇수를 따져야 합니다. 남은 기간이 길면 돌려주어야 할 몸값도 커지고, 기간이 짧으면 몸값도 줄어듭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을 산 사람이 영원한 소유권을 산 것으로 계산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그 사람을 일하게 할 수 있는 기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는 해마다 고용되는 일꾼처럼 그 사람과 함께 지내야 한다. 그를 산 사람이 네가 보는 앞에서 그를 혹독하게 부려서는 안 된다.』」레위기 25:53 · 두루새김

「네가 보는 앞에서」라는 말은 이스라엘 공동체에도 책임을 지우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가난해진 이스라엘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팔렸다는 이유로, 이스라엘 공동체가 그의 처지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를 도울 수 있는 친척이 있다면 몸값을 치르고 풀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더라도 그가 혹독하게 부림을 당하는 일을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친족도 돈도 없다면,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무엇인가

54절은 이 장에서 가장 중요한 마지막 보호 장치를 말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풀려나지 못하더라도, 희년에는 그와 그의 아들들이 함께 풀려나야 한다.』」레위기 25:54 · 두루새김

그는 형이나 남동생, 큰아버지나 작은아버지가 없어도 풀려나야 합니다. 몸값을 마련하지 못했어도 풀려나야 합니다. 그를 산 사람이 계속 부리고 싶어 하더라도 풀려나야 합니다.

이것은 그가 충분한 경제적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받는 보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왔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해방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내 노예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내 노예들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다.』」레위기 25:55 · 두루새김

이 장은 땅의 소유권을 제한하는 선언으로 중간의 규정들을 설명했고, 마지막에는 사람의 소유권을 제한하는 선언으로 끝납니다. 인간의 소유권과 지배권보다 먼저 존재하는 하나님의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54절에서 「이런 방법으로」라는 말이 앞의 여러 해방 방법 전체를 가리키는지, 특히 몸값을 치러 줄 친척들을 가리키는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결론은 분명합니다. 희년에는 그가 풀려나야 합니다.

결론 — 속죄일에 온 땅으로 퍼지는 뿔나팔 소리

레위기 25:1–55 본문 →

레위기 25장은 가난 때문에 한 사람이 땅을 잃고, 먹고살 길을 잃고, 마침내 자유까지 잃어 가는 과정을 거꾸로 되돌리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소유의 궁극적인 근거로 자신을 제시하시기에 인간의 소유권도 제한됩니다. 땅을 많이 가진 사람도 최종적인 주인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해야 하는 사람도 인간 주인에게 완전히 속한 존재가 아닙니다.

희년의 해방을 지나치게 이상화하면, 그 해방에서 제외된 사람들을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영원한 노예 소유의 문제만 보고 이스라엘 동족이 영원히 다른 사람에게 매여 사는 일을 제한하고 가난한 가족의 먹고살 기반을 되찾게 하는 규정의 의미까지 지워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법의 중심에는 숫자를 세는 일이 있습니다.

일곱 해를 세고, 그 일곱 해를 다시 일곱 번 셉니다. 그렇게 마흔아홉 해가 지나면, 쉰째 해를 거룩하게 구별합니다. 그리고 일곱째 달 십 일, 속죄의 날에 뿔나팔을 울립니다.

그 소리는 이스라엘 온 땅에 퍼져야 합니다.

누군가는 그 소리를 자기 밭에서 듣게 될 것입니다. 이미 다른 사람이 소유하게 된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땅에서 다시 농사할 날이 가까워집니다.

다른 누군가는 자신을 산 사람의 집에서 그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가 이스라엘 동족이라면 희년의 규정에 따라 친족들과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땅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돈을 주고 사들인 땅을 이제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정당한 값을 치르고 얻은 권리였지만, 처음부터 영원한 권리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잃어버린 미래를 영원히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 땅의 궁극적인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쉰째 해의 뿔나팔은 바로 그 사실을 이스라엘 온 땅에 다시 들려주도록 명령받았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