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1–2장 · 서로를 부르는 노래
봄과 사랑의 기다림
사랑하는 사람이 산을 넘어 달려옵니다. 겨울은 지나갔고, 땅에는 꽃이 피었으며,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립니다. 그는 창문 너머에 서서 여자를 부릅니다. 「일어나, 내 사랑아, 내 아름다운 사람아. 함께 가자.」
그러나 이 장을 단순히 사랑이 꽃피는 계절의 노래로 읽으면 중요한 긴장을 놓치게 됩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합니다. 여자는 남자의 품에 안기는 기쁨을 노래하고, 남자는 여자를 찾아와 함께 가자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사랑을 억지로 깨우지 말라는 당부가 놓여 있습니다. 꽃이 피었다는 기쁨의 노래 뒤에는 포도밭을 망치는 작은 여우들이 등장합니다.
왜 사랑을 이토록 아름답게 노래하면서, 동시에 사랑을 서둘러서는 안 된다고 말할까요?
아가 2장은 사랑의 기쁨만이 아니라, 사랑이 자라나는 데 필요한 시간과 그 사랑을 지키는 일까지 함께 노래합니다.
이 장은 크게 세 움직임으로 이루어집니다. 먼저 두 사람은 서로를 아름다운 나무와 꽃에 비유하며 가까이 함께하는 기쁨을 누립니다(1–7절). 이어 사랑하는 사람이 찾아와 겨울이 끝났음을 알리고, 여자를 바깥세상으로 초대합니다(8–14절). 마지막에는 막 꽃이 핀 포도밭을 지켜야 한다는 말과 함께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지만, 만남과 거리의 긴장을 완전히 풀지 않은 채 끝납니다(15–17절).
이 흐름에서 자연은 단순한 배경이 아닙니다. 꽃과 나무, 열매와 새, 가젤과 여우들이 모두 사랑의 서로 다른 모습을 드러냅니다.
가시덤불 사이에 핀 백합, 숲속 나무들 사이의 사과나무
평범한 꽃이 특별한 존재가 되다
나는 샤론의 크로커스, 골짜기에 핀 백합이야.아가 2:1 · 두루새김
1장 마지막에서 두 사람이 함께 머무는 푸른 공간을 그렸다면, 2장은 그 자연 속에 피어난 꽃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샤론은 성경에서 기름진 평야와 목초지를 떠올리게 하는 지명입니다. 여자의 말은 자신을 대단히 보기 드문 꽃이라고 자랑하는 표현일 수도 있지만, 자연 속에서 자라는 한 송이 꽃이라고 묘사하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 구절에서 남자는 그 꽃을 새롭게 바라봅니다.
여자들 사이에 있는 내 사랑은 가시덤불 사이에 핀 백합 같아.아가 2:2 · 두루새김
여자가 자신을 백합이라고 말했다면, 남자는 그 백합을 가시덤불 사이에 놓습니다. 남자는 단순히 여자가 꽃처럼 아름답다고 되풀이하지 않습니다. 주변의 다른 식물들과 비교하면서 그녀가 자신에게 얼마나 특별한지를 말합니다.
가시덤불과 백합은 모습도 다르고, 사람이 가까이 다가갈 때 느끼는 인상도 다릅니다. 가시는 찌를 수 있지만, 꽃은 아름다움을 감상하게 합니다. 이 비유의 주된 목적은 다른 여자들을 비난하는 데 있지 않고,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에게 얼마나 두드러지는 존재인지 표현하는 데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사랑하는 이의 눈에는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여기서 아름다움은 객관적인 순위를 매기는 언어라기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특별함을 발견하는 언어입니다.
여자는 같은 방식으로, 그러나 다른 나무로 응답한다
남자들 사이에 있는 내 연인은 숲속 나무들 사이의 사과나무 같아. 나는 그 그늘이 좋아 그 아래 앉았어. 그 열매는 내 입에 달콤해.아가 2:3 · 두루새김
여자는 남자의 비유를 그대로 받아 응답합니다. 그러나 여자의 비유에는 남자의 말에 없던 것이 더해집니다. 그늘과 열매입니다.
꽃의 아름다움은 바라보는 사람에게 기쁨을 줍니다. 그런데 열매를 맺는 나무는 그늘을 만들어 주고 먹을 것도 줍니다. 여자는 단순히 남자의 모습을 아름답다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와 가까이 있을 때 자신이 무엇을 누리는지 말합니다.
그녀는 그늘이 좋아서 그 아래 앉습니다. 누군가가 억지로 데려다 놓은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장소를 발견하고 그 안에 머뭅니다.
그 열매가 입에 달콤하다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얻는 기쁨이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실제로 맛볼 수 있는 즐거움처럼 묘사됩니다.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나무 그늘은 머물 만한 공간이 되고, 열매는 먹는 즐거움을 줍니다.
이 비유를 남자가 여자를 보호하거나 먹여 살리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역할 규정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러한 사회적 의무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느끼는 기쁨을 감각적인 언어로 표현할 뿐입니다.
여자가 누리는 이 기쁨은 다음 장면에서 더 강렬해집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35:2와 65:10에서도 샤론은 땅의 풍요와 회복을 나타내는 배경으로 등장합니다. 크로커스와 백합으로 옮긴 히브리어가 오늘날 식물 분류상 어떤 종을 정확하게 가리키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특정 꽃의 학명이 아니라, 들판과 골짜기에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의 모습입니다.
사랑으로 앓는 사람 — 기쁨의 한가운데서 들려오는 당부
포도주를 마시는 집에 걸린 사랑의 깃발
그가 나를 포도주를 마시는 집으로 데려갔어. 내 위에 있는 그의 깃발은 사랑이야.아가 2:4 · 두루새김
사과나무 그늘에 앉아 있던 여자의 노래는 갑자기 포도주를 마시는 집으로 옮겨 갑니다.
이 표현은 잔치나 포도주를 즐기는 장소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어떤 건물이나 잔치하는 곳이었는지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깃발에 해당하는 말은 민수기 2장에서 이스라엘 지파들이 진영을 구분할 때 사용하는 깃발을 가리키는 말과 같습니다. 깃발은 누가 어디에 속하는지, 어떤 집단의 표시 아래 모이는지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남자가 자신에게 베푸는 사랑의 뚜렷한 표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잔치의 기쁨과 연결되면서도, 자신이 누구에게 소중한 존재인지를 분명하게 느끼는 경험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에서 예상하지 못한 말이 나옵니다.
사랑이 너무 커서 아프다
나는 사랑으로 앓고 있으니까, 건포도를 뭉쳐 만든 과자로 내 기운을 북돋워 줘. 사과로 내 힘을 되찾게 해 줘.아가 2:5 · 두루새김
그렇다고 이것을 현대적인 의미의 질병이나 정신적 이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강렬하여 몸이 힘을 잃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태를 시적으로 표현합니다.
말린 과일을 이용해 만든 먹을거리는 기운을 북돋울 수 있습니다. 사과는 앞 구절의 사과나무와 연결됩니다. 연인의 열매가 달콤하다고 노래하던 여자가 이제 사과로 자신의 힘을 되찾게 해 달라고 합니다.
사랑은 포도주보다 즐겁지만, 동시에 사람을 견디기 어려울 만큼 흔들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까이 있고 싶은 마음은 기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그 기쁨 자체가 너무 커서 감당하기 어려워집니다.
이 감정의 절정에서 여자는 연인의 팔을 묘사합니다.
그의 왼손은 내 머리 아래에 있고, 그의 오른손은 나를 껴안아.아가 2:6 · 두루새김
이 장면은 두 사람이 몸으로 나누는 친밀함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그런데 아가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랑의 열기를 계속 높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뜻밖의 당부를 들려줍니다.
왜 사랑을 깨우지 말라고 하는가?
예루살렘의 딸들아, 가젤들이나 들의 암사슴들을 두고 너희에게 맹세로 당부할게. 사랑이 원할 때까지 사랑을 깨우지도, 흔들어 깨우지도 마.아가 2:7 · 두루새김
여기에는 중요한 해석상의 갈림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직 시작되지 않은 사랑을 억지로 일으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랑할 준비가 되지 않았거나 사랑이 자연스럽게 생겨나지 않았는데도 그것을 강요하지 말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미 시작된 사랑을 그 자체의 때가 이르기 전에 지나치게 자극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바로 앞에 강렬한 사랑의 감정과 포옹이 등장하므로, 사랑의 열기를 서둘러 더 높이지 말라는 경계로 읽을 수 있습니다.
두 읽기는 각각 문맥적 근거가 있습니다. 어느 하나로만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랑이 원할 때까지」(חָפֵץ)에서 뒤따르는 동사는 그 사랑이 원하거나 기뻐하는 때를 나타냅니다. 원문의 문법은 사랑을 사람처럼 표현하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에도 무르익는 때와 흐름이 있음을 시적으로 표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사랑을 느끼지 말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앞에서는 사랑의 기쁨을 마음껏 노래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랑을 반드시 특정한 사회적 절차에 맞추라는 구체적인 규정도 아닙니다.
사랑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은 그 감정을 크게 만드는 일만이 아니라, 사랑이 스스로 무르익을 시간을 존중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가젤과 암사슴은 둘 다 들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동물입니다. 그런 동물들을 두고 맹세하며 사랑의 때를 이야기합니다. 꽃이 피는 것을 억지로 재촉할 수 없듯이, 사랑에도 함부로 바꿀 수 없는 흐름이 있습니다. 이 당부는 아가 3:5와 8:4에서도 되풀이됩니다.
그런데 이 당부 뒤에 장면이 완전히 바뀝니다. 조용히 사랑의 때를 말하던 시가 갑자기 산을 뛰어넘는 발소리와 움직임으로 가득해집니다.
조금 더 깊이
건포도를 뭉쳐 만든 과자는 사무엘하 6:19에서도 등장하는 음식입니다. 이 음식들을 특정한 고대의 사랑 의식이나 정해진 최음제로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6절의 포옹은 실제 포옹의 묘사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히브리어의 동사 형태 때문에 바라는 포옹의 모습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전도서 3:1–8과의 주제적 연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전도서는 모든 일에 때가 있다고 말하며, 특히 3:8에서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를 언급합니다. 그러나 두 본문이 완전히 같은 내용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도서는 인간이 경험하는 여러 시간과 사건을 폭넓게 바라봅니다. 아가서는 사랑이라는 하나의 경험 안에서 때를 존중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산을 넘어오는 사람 — 사랑은 기다리는 자리에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내 연인의 소리가 들려! 저기 그가 와. 산을 뛰어넘고 언덕을 뛰어오르며 와.아가 2:8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아가 2장의 극적인 전환점입니다.
앞 장면에서 여자는 연인의 팔에 안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가 멀리서 다가오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 장면들이 시간상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여자는 먼저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가 오는 모습을 봅니다. 남자는 산과 언덕을 넘어옵니다. 이 표현은 연인의 움직임을 빠르고 거침없이 묘사하는 시적 과장입니다.
내 연인은 가젤이나 어린 사슴 같아. 저기 우리 집 벽 뒤에 서 있어. 창문으로 들여다보고 창살 틈으로 엿보고 있어.아가 2:9 · 두루새김
조금 전에는 사랑을 서둘러 깨우지 말라는 맹세에 가젤과 암사슴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자가 가젤이나 어린 사슴처럼 움직입니다. 7절에서 가젤은 사랑의 때를 함부로 거스르지 말라는 당부 속에 있었습니다. 9절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빠르게 다가오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사랑을 억지로 일으키지 말라는 당부와,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기쁨이 함께 존재합니다.
벽이 가로막아도 목소리는 닿는다
산을 넘어오는 남자의 모습은 이제 아주 가까운 거리로 바뀝니다. 그는 집 벽 뒤에 서 있습니다.
아직 여자와 같은 공간에 들어온 것은 아닙니다. 둘 사이에는 벽이 있고 창문과 창살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틈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먼 산에서는 남자의 온몸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지만, 가까이 오자 오히려 그의 모습이 벽과 창문에 가려집니다.
거리가 가까워졌다고 해서 모든 장벽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그 벽이 왜 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두 사람 사이에 아직 넘어야 할 경계가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남자는 벽을 부수거나 강제로 안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대신 여자에게 말을 건넵니다.
조금 더 깊이
8절의 장면은 실제로 다른 날에 일어난 사건일 수도 있고, 사랑의 경험을 서로 다른 시적 장면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남자가 여자를 떠났다가 돌아왔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벽도 반드시 가족의 반대나 사회적 금지, 또는 특정한 장애물의 상징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어나, 함께 가자 —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계절을 바꾸다
남자가 부르는 것은 여자의 발걸음이다
내 연인이 내게 말했어. 「일어나, 내 사랑아, 내 아름다운 사람아. 함께 가자.」아가 2:10 · 두루새김
일어나라는 말과 함께 가자는 말은 매우 간단하지만, 앞에서 그려진 장면을 움직이게 만듭니다. 여자는 사과나무 그늘에 앉아 있었고, 연인의 품에 안기는 기쁨을 노래했습니다. 이제 남자는 그녀에게 일어나 함께 가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함께 가자고만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들려줍니다.
「겨울이 지나고 비도 그쳐 물러갔으니까.」아가 2:11 · 두루새김
이스라엘 땅에서는 겨울철이 중요한 비의 계절과 겹칩니다. 따라서 겨울비가 끝났다는 것은 바깥으로 나가 활동하기에 좋은 계절이 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가 계속 내리는 계절에는 사람의 활동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비가 그쳤고, 땅은 새롭게 살아나고 있습니다.
「일어나」라는 초대가 먼저 나오고, 겨울이 지났다는 설명은 그 뒤에 나옵니다. 남자는 풍경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관찰자에 머물지 않습니다. 변한 계절을 여자가 자신과 함께 경험하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꽃과 새와 열매가 모두 같은 계절을 알린다
「땅에는 꽃이 피고 노래할 때가 왔어. 우리 땅에 산비둘기 소리가 들려.」아가 2:12 · 두루새김
꽃은 눈에 보입니다.
산비둘기의 소리는 귀에 들립니다.
이어지는 13절에서는 꽃 핀 포도나무가 향기를 풍깁니다.
「노래할 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에트 하지미르입니다. 여기서 자미르는 노래와 관련된 말로도, 가지치기와 관련된 말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노래로 읽으면 꽃이 피고 새들이 노래하는 계절이 왔다는 뜻입니다. 가지치기로 읽으면 꽃이 피고 포도나무를 돌볼 시기가 찾아왔다는 뜻입니다.
바로 뒤에 산비둘기의 소리가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노래라는 읽기가 자연스럽고, 앞뒤에 포도나무와 열매가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가지치기도 자연스럽습니다. 두루새김은 이 자리를 「노래할 때」로 옮겼습니다. 다만 원문에서는 한 가지 뜻만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두 의미가 겹쳐 들리도록 의도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봄은 자연이 노래하는 계절이면서, 사람이 다시 포도밭을 돌보는 계절입니다.
「무화과나무의 풋열매가 익어 가고, 꽃 핀 포도나무는 향기를 풍겨. 일어나, 내 사랑아, 내 아름다운 사람아. 함께 가자.」아가 2:13 · 두루새김
꽃이 피었고 열매가 익어 가지만, 모든 것이 완성된 상태는 아닙니다.
사랑이 원할 때까지 억지로 깨우지 말라는 말과, 봄이 왔으니 일어나 함께 가자는 말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봄이 왔다고 해서 꽃을 억지로 열매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꽃이 피었는데도 계절이 바뀌지 않은 것처럼 행동할 이유도 없습니다.
사랑에는 기다려야 할 때가 있고, 이미 찾아온 기쁨을 향해 움직여야 할 때도 있습니다.
남자는 바로 그 새로운 시간을 여자와 함께 보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 했던 「일어나, 내 사랑아, 내 아름다운 사람아. 함께 가자」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이 반복은 봄의 풍경을 단순한 자연 묘사로 남겨 두지 않습니다. 모든 꽃과 새와 열매가 여자를 부르는 말의 근거가 됩니다.
산비둘기의 소리가 여자의 목소리로 바뀌다
「바위틈, 가파른 벼랑의 숨은 곳에 있는 내 비둘기야, 네 모습을 보여 줘. 네 목소리를 들려줘. 네 목소리는 달콤하고 네 모습은 아름다우니까.」아가 2:14 · 두루새김
12절에서는 산비둘기의 소리가 들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14절에서는 남자가 여자를 「내 비둘기」라고 부르며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 말합니다.
자연에서 들려오던 새의 울음이 이제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로 연결됩니다.
남자에게 봄이란 단순히 산비둘기가 노래하는 계절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계절입니다.
비둘기는 바위틈이나 높은 곳에 몸을 숨길 수 있는 새입니다. 이 비유는 여자가 다가가기 어려운 곳에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자의 수줍음 때문인지, 실제로 몸을 숨기고 있기 때문인지,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표현한 것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는 여자를 자기 앞으로 끌어내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목소리를 들려 달라고 청합니다.
여자의 목소리는 단순히 상대방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남자에게는 그 자체로 듣고 싶은 소리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외모를 좋아하는 것과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후자는 상대방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말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포함합니다.
그가 산을 넘어 여기까지 달려온 목적이 이제 분명해집니다. 그는 봄의 풍경을 혼자 즐기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봄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에서 노래의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집니다.
조금 더 깊이
13절의 히브리어 표현을 열매가 맺히는 단계로 볼지, 이미 맺힌 풋열매가 자라는 단계로 볼지는 조금 다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풋열매가 익어 가고」로 옮겼습니다. 예레미야 48:28에서도 바위와 동굴 곁에 둥지를 트는 비둘기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창세기 1:11–12에서 하나님은 땅에 식물이 자라게 하시고, 각기 종류에 따라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창세기 1:14에서는 하늘의 빛들이 계절과 날과 해를 구분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는 자라고 열매 맺는 과정과 시간이 있습니다. 아가 2장은 이 창조 세계를 인간의 사랑을 표현하는 언어로 사용합니다. 그렇다고 자연의 성장 과정이 인간관계의 모든 문제를 자동으로 해결해 주는 법칙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작은 여우들이 포도밭을 망친다 — 피어나는 것에는 지켜야 할 것이 있다
우리를 위해 여우들을, 포도밭을 망치는 작은 여우들을 잡아 줘. 우리 포도밭에는 꽃이 피어 있어.아가 2:15 · 두루새김
남자의 봄 노래가 절정에 이른 순간, 뜻밖에도 여우가 등장합니다.
지금까지 자연은 사랑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배경이었습니다. 꽃과 열매, 나무와 새들이 모두 사랑의 기쁨에 참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자연에는 아름다운 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포도밭을 망치는 동물도 있습니다.
왜 하필 작은 여우들인가?
여우는 포도밭에 들어가 식물을 망가뜨릴 수 있는 동물입니다. 그런데 시는 단순히 여우를 잡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작은 여우들」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들이 망치는 포도밭은 이미 포도를 풍성하게 수확하는 밭이 아닙니다. 꽃이 핀 상태는 열매가 맺히기 위한 중요한 단계이지만, 아직 수확할 열매가 완전히 자란 것은 아닙니다. 지금 포도밭이 손상되면 앞으로 맺힐 열매에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완성된 열매를 훔쳐 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앞으로 열매를 맺을 포도밭을 망가뜨리는 이야기입니다.
이 장면을 실제 포도밭을 돌보라는 말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봄의 자연을 묘사하는 문맥에서 충분히 가능한 읽기입니다. 하지만 아가서에서 포도밭이 사랑과 연관되어 사용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두 사람의 관계를 위협하는 무언가를 나타내는 비유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경우 작은 여우들은 아직 자라나는 사랑을 해칠 수 있는 방해 요소들입니다. 여기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본문은 말하지 않습니다. 특정한 문제를 작은 여우와 일대일로 연결하는 것은 본문을 넘어서는 해석입니다.
사랑이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그 사랑이 아무런 방해 없이 자랄 것이라는 보장은 아닙니다.
오히려 꽃이 피었기 때문에 지켜야 할 것이 생깁니다.
사랑을 서두르지 않는 것과 아무렇게나 내버려 두는 것은 다릅니다.
포도밭은 이제 누구의 것인가?
이 구절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 포도밭」입니다.
아가 1:6에서 여자는 자신의 포도밭을 돌보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때는 다른 사람들의 포도밭과 자신의 포도밭이 대비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우리」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두 구절의 포도밭이 반드시 동일한 대상을 뜻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사랑의 노래 안에서 포도밭이 이제 두 사람에게 속한 것으로 표현됩니다.
여우를 잡으라는 말도 「우리를 위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두 사람의 사랑을 지키는 문제는 어느 한쪽만의 일이 아니라 함께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일로 나타납니다. 다만 이 말을 누가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여자가 말했을 수도 있고, 남자가 말했을 수도 있으며, 다른 목소리가 끼어든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남자의 초대가 끝나고, 두 사람이 서로에게 속한다는 고백이 나오기 직전에 포도밭을 보호하라는 말이 놓여 있습니다.
사랑을 기뻐하는 것과 사랑을 지키는 것이 나란히 놓이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호세아 2:14–23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시 부르시고 관계를 회복시키시는 일이 광야와 포도밭의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를 남녀 사이의 관계에 비유합니다. 아가 2장은 그와 반대로 실제 남녀의 사랑을 노래합니다. 두 본문은 사랑과 포도밭이라는 공통된 이미지를 사용하지만, 각각의 직접적인 의미는 구별해야 합니다.
내 연인은 나의 것이고 나는 그의 것이야 — 서로에게 속한다는 고백
내 연인은 나의 것이고 나는 그의 것이야. 그는 백합 사이에서 풀을 뜯어.아가 2:16 · 두루새김
아가 2장의 가장 분명한 서로를 향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두 문장은 서로를 향해 대칭을 이룹니다. 여자는 먼저 연인이 자신에게 속한다고 말한 뒤, 자신도 그에게 속한다고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서 일방적인 소유 관계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자기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도 아니고, 여자 혼자 남자의 소유물이 되겠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자는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는 관계를 기뻐합니다.
이러한 표현을 문자적인 재산 소유권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물건처럼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서로에게 속하는 기쁨은 한쪽이 다른 쪽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소중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관계의 언어입니다.
이 구절은 아가서 뒤에서도 형태를 바꾸어 나타납니다. 6:3에서는 두 문장의 순서가 바뀌고, 7:10에서는 또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표현합니다.
백합 사이에서 풀을 뜯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여기서 히브리어 동사는 가축이 풀을 뜯는 행동을 나타낼 수 있고, 목자가 양 떼를 먹이는 행동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첫째, 남자를 목자로 이해하는 읽기입니다. 1:7–8에서 목자와 양 떼가 등장했으므로, 연인이 꽃이 핀 곳에서 양 떼를 먹이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둘째, 남자를 가젤이나 어린 사슴에 비유한 흐름을 이어받아, 그가 백합 사이에서 풀을 뜯는 모습을 상상하는 읽기입니다. 2:9에서 이미 남자가 가젤이나 어린 사슴으로 묘사되었고, 17절에서도 그 비유가 반복된다는 점에서 두 번째 읽기도 자연스럽습니다.
어느 경우든 백합은 중요한 배경입니다. 2장 처음에 여자는 자신을 백합에 비유했습니다. 이제 연인은 백합 사이에 있습니다. 이것을 여성의 아름다움이나 몸에 관한 친밀한 비유로 읽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 절만으로 구체적인 신체 행위를 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서로에게 속한다고 선언한 뒤에도 여자는 놀라운 말을 덧붙입니다.
날이 서늘해지고 그림자들이 사라질 때까지
날이 서늘해지고 그림자들이 사라질 때까지, 돌아서 줘, 내 연인아. 갈라진 산들 위의 가젤이나 어린 사슴처럼 되어 줘.아가 2:17 · 두루새김
아가 2장의 마지막은 쉽게 설명되지 않는 장면입니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으니 두 사람이 계속 함께 머물렀다고 이야기할 법합니다. 그러나 시는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여자는 연인에게 다시 움직이라고 말합니다.
이 명령은 여러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바라는 요청일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지금은 떠나거나 몸을 돌리라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상대방에게 방향을 바꾸어 자신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라고 말하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시간 표현도 새벽으로 읽을 수도, 저녁으로 읽을 수도 있어서, 여자가 남자에게 새벽까지 머물라고 하는지, 날이 저물기 전에 돌아오라고 하는지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동물은 익숙합니다. 가젤과 어린 사슴입니다.
2:8–9에서 남자는 산을 넘어 달려오는 가젤이나 어린 사슴처럼 나타났습니다. 이제 여자는 다시 그에게 가젤이나 어린 사슴처럼 되어 달라고 말합니다. 시의 후반부는 사랑하는 사람이 달려오는 장면으로 시작해, 그가 다시 움직이는 모습으로 끝납니다.
남자가 실제로 떠났는지, 돌아오고 있는지, 두 사람이 헤어지는 중인지 본문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순간에 이야기를 완전히 닫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들의 사랑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움직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돌아서라는 동사는 돌아서거나 방향을 바꾸는 움직임을 나타내지만, 그 방향을 이 절만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두루새김은 이 자리를 「돌아서 줘」로 옮겼습니다. 원문에서는 날이 숨을 쉰다고 하여 하루를 살아 있는 존재처럼 묘사합니다. 이 표현을 새벽이 밝아오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둠이 걷히면서 그림자가 사라지는 모습과 잘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날이 저물고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저녁으로 읽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칠십인역도 날이 숨 쉬고 그림자가 움직이는 이미지를 보존하므로, 시간대를 하나로 확정해 주지는 않습니다. 히브리어 하레 바테르는 갈라진 산이나 골짜기가 있는 산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테르의 산들이라는 지명으로 읽는 길도 있습니다. 칠십인역은 골짜기나 움푹 파인 곳이 있는 산이라는 방향으로 이해합니다. 정확한 지형은 알 수 없습니다.
꽃이 피었다고 해서 기다림이 끝난 것은 아니다
꽃이 피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꽃이 피었다고 해서 곧바로 열매를 수확할 수는 없습니다. 아가 2장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까이 가는 기쁨을 충분히 노래하면서도, 사랑을 재촉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봄이 왔다는 사실을 기뻐하면서도, 아직 꽃이 피는 단계에 있는 포도밭을 보호하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자란다는 것은 더 강렬해지는 것만이 아니라, 무르익을 시간을 얻고 그 시간을 지켜 나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장에서 산을 넘어오는 남자가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자를 교회나 이스라엘로, 남자를 하나님이나 메시아로 일대일 대응시키는 것은 본문의 직접적인 의미를 넘어섭니다. 대신 창조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이 서로를 사랑하고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기쁨을 누리는 삶도 성경이 귀하게 다루는 주제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가 2장의 봄은 생기로 가득합니다.
겨울비가 그치고, 땅에는 꽃이 피었습니다. 무화과나무에는 풋열매가 익어 가고, 포도나무는 향기를 풍깁니다. 산비둘기의 소리가 들립니다.
그 풍경 속에서 한 남자가 산을 넘어 달려옵니다. 그는 집 벽 뒤에 서서 여자를 부릅니다. 「일어나, 내 사랑아, 내 아름다운 사람아. 함께 가자.」
그런데 시는 꽃과 향기만 노래하지 않습니다. 포도밭에는 작은 여우들도 있습니다.
마지막에 여자는 연인을 가젤이나 어린 사슴에 비유하며 다시 움직이라고 부릅니다. 날은 서늘해지고 그림자들은 사라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지, 두 사람이 다음에 언제 만나는지 시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이미 꽃을 피웠지만, 아직 모든 이야기를 끝낸 것은 아닙니다.
산과 들판에는 봄이 찾아왔고, 포도밭에는 꽃이 피어 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 꽃이 열매가 되기까지 아직 지나야 할 시간이 있는 사랑의 계절 속에 서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