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풀어 읽기 · 10장

이 장의 자리 · 9–11장 · 여러 민족의 앞날

흩어진 양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휘파람

스가랴 10장은 매우 소박한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늦은 비가 내리는 철에 여호와야훼께 비를 구하여라.」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비는 생존의 문제입니다. 씨앗을 뿌리고 밭을 가꾸어도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비가 필요했던 사람들이 어느새 길을 잃은 양 떼로 나타나고, 마침내 먼 나라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포로들이 됩니다.

이 변화는 우연히 여러 주제를 늘어놓은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하나의 질문이 흐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 생명을 구하고, 누구의 말을 들으며, 누구를 따라 살아갑니까?

비를 주시는 분과 양 떼를 돌보시는 분, 포로들을 불러 모으시는 분은 모두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스가랴 9장 마지막에는 곡식과 새 포도주가 사람들을 번성하게 하는 모습이 등장했습니다. 10장은 그 풍요를 가능하게 하는 비를 누구에게 구해야 하는지 묻는 데서 출발합니다.

읽는 시간 21분소단락 810장 본문 읽기 →

비를 내리는 분과 위로만 말하는 신들

스가랴 10:1–2 본문 →

늦은 비가 내리는 철에 여호와야훼께 비를 구하여라. 여호와야훼께서는 번개를 만드십니다. 그분께서 사람들에게 쏟아지는 비를 주시고, 저마다의 들에 풀이 자라게 하실 것입니다.스가랴 10:1 · 두루새김

이스라엘의 농사에서는 가을부터 봄까지 내리는 비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가을 무렵에 내리는 이른 비는 굳어진 땅을 적셔 밭을 갈 수 있게 했고, 봄에 내리는 늦은 비는 곡식이 익어 가는 데 필요한 물을 공급했습니다. 늦은 비가 중요하다는 것은, 이미 밭을 갈고 씨를 뿌렸더라도 마지막에 필요한 비가 오지 않으면 수확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께서는 비가 오기를 기다리라고만 하지 않으십니다.

이 명령은 얼핏 이상해 보입니다. 바로 뒤에서 하나님은 비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구해야 합니까?

오히려 비를 주시는 분을 알기 때문에 바로 그분께 구하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의 신앙이 자연을 바라보는 독특한 방식이 담겨 있습니다. 계절의 흐름과 농사의 조건을 알고 있더라도, 그 자연의 질서를 하나님과 상관없이 스스로 움직이는 힘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번개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한 사람의 들에서 자라는 풀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위대함은 단지 하늘을 뒤흔드는 능력에 있지 않습니다. 그 능력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데까지 미칩니다.

그런데 2절은 전혀 다른 종류의 말에 주목합니다.

드라빔은 헛된 말을 했고, 점쟁이들은 거짓 환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헛된 꿈을 이야기하며,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위로를 합니다. 그래서 백성은 양 떼처럼 떠돌며, 목자가 없어 고통을 겪습니다.스가랴 10:2 · 두루새김

드라빔은 고대 이스라엘과 그 주변 문화에서 사용되던 신의 형상 또는 가정에서 섬기는 신과 관련된 물건입니다. 창세기 31:19에서는 라헬이 아버지 라반의 드라빔을 가져가는 사건이 등장하고, 에스겔 21:21에서는 점을 치는 행위와 함께 언급됩니다.

사람들은 미래를 알고 싶어 하고, 불안한 상황에서 위로를 얻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드라빔과 점쟁이, 꿈의 해석에 귀를 기울입니다.

헛된 말, 거짓 환상, 헛된 꿈,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위로.

본문은 네 가지 표현을 거듭 사용하여 그 말들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였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두려움과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위로를 구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그 위로가 진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거짓된 말도 순간적으로는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따라 길을 선택한다면, 마침내 더 큰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농부에게는 비가 필요하고, 양에게는 목자가 필요합니다. 둘 다 살아가기 위해 자기 바깥에서 오는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이 두 모습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비는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을 공급하지만, 목자는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까지 알려 줍니다.

백성의 문제는 단지 필요한 것을 얻지 못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잘못된 목소리를 따라가다가 삶의 방향까지 잃어버린 것입니다.

예레미야 23:16–22에서도 거짓 예언자들은 자기 마음에서 나온 환상을 말하면서 백성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습니다. 그들의 말은 평안을 약속했지만,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이끌지 못했습니다.

사람을 잠시 안심시키는 말과 실제로 살 길을 알려 주는 말은 다릅니다.

백성은 왜 목자 없이 떠돌게 되었습니까? 그들을 돌보아야 할 사람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하나님은 곧 그 책임을 물으십니다.

같은 하나님이 목자들을 벌하시고 양 떼를 돌보신다

스가랴 10:3 본문 →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십니다. 「목자들을 향해 내 분노가 타올랐다. 내가 숫염소들을 벌하겠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께서 자기 양 떼인 유다 백성을 돌보시고, 그들을 전쟁터에서 자신의 위풍당당한 말처럼 만드실 것이기 때문이다.」스가랴 10:3 · 두루새김

구약에서 목자는 종종 왕과 지도자, 백성을 이끄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비유로 사용됩니다. 예레미야 23:1–4에서는 양 떼를 흩어지게 하고 돌보지 않는 목자들이 꾸지람을 듣습니다. 에스겔 34:1–10에서는 목자들이 자기 자신만 먹이고 양 떼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책임을 물으십니다.

스가랴 10장에서도 지도자들의 실패는 백성의 고통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잘못된 지도자들에게 책임을 물으시고, 그들의 손에 버려져 고통받던 양 떼는 돌보십니다. 목자가 양을 돌보지 않고 자기 이익만 좇는다면, 양을 위한 하나님의 돌봄은 잘못된 목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일과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양 떼를 잃어버린 목자들의 권위를 회복하는 데서 시작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자기 양 떼를 돌보십니다.

조금 전까지 백성은 목자가 없어 고통받는 양 떼였습니다. 이제는 전쟁터에서 위풍당당한 말처럼 됩니다. 양은 전쟁의 힘을 나타내는 동물이 아닙니다. 반면 전쟁에 사용되는 말은 빠르게 움직이는 능력과 힘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 변화를 이루시는 분은 백성 자신이 아닙니다.

그들은 스스로 강해졌다고 묘사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을 그렇게 만드십니다. 여기서 구원은 단순히 고통받는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감정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들이 더 이상 힘없는 상태에만 머물지 않도록 힘을 주시는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내가 숫염소들을 벌하겠다」와 「만군의 여호와야훼께서 자기 양 떼인 유다 백성을 돌보시고」에는 원문에서 같은 히브리어 어근이 사용됩니다. 이 동사는 문맥에 따라 누군가를 찾아 살피거나 돌보는 일, 또는 책임을 묻고 벌하는 일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에스겔 34:17에서도 하나님은 양 떼 가운데 있는 양과 양 사이, 숫양과 숫염소 사이를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곳에서도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을 밀쳐 내거나 해치는 행위가 문제로 제시됩니다. 스가랴에서 「목자들」과 「숫염소들」이 정확히 서로 다른 두 지도자 집단을 가리키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둘 모두 백성 위에서 권력을 휘두르며 그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지도층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무너진 공동체에 필요한 것은 모퉁잇돌과 말뚝이다

스가랴 10:4–5 본문 →

「유다에게서 모퉁잇돌이 나오고, 유다에게서 말뚝이 나오며, 유다에게서 전쟁의 활이 나오고, 유다에게서 모든 지배자가 함께 나올 것이다.」스가랴 10:4 · 두루새김

바로 앞에서 유다 백성이 언급되었으므로, 유다에서 이러한 것들이 나온다고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원문에서는 여호와야훼 자신을 가리킨다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문법 형태 하나만으로 완전히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유다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으면, 하나님의 돌봄을 받은 백성 가운데서 공동체를 다시 세우고 지킬 힘이 나오게 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모퉁잇돌은 건물의 구조를 안정시키는 중요한 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사야 28:16에서도 하나님이 시온에 튼튼한 기초가 되는 돌을 놓으신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말뚝은 무엇인가를 단단히 고정하는 물건입니다. 천막을 지탱하는 말뚝일 수도 있고, 건물 안에 박아 물건을 걸어 두는 못이나 고정 장치를 떠올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사야 22:23에서는 엘리아김을 단단한 곳에 박힌 못에 비유하며 그가 맡게 될 책임과 지위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두 모습은 공동체를 지탱하는 안정된 지도력이나 질서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의 두 물건이 무엇인가를 세우고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면, 활은 바깥의 공격에 맞서거나 전쟁을 치르는 도구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4절은 공동체에 필요한 안정과 방어의 힘을 함께 보여 줍니다.

하지만 마지막의 「모든 지배자」에 해당하는 원어는 해석을 복잡하게 만듭니다.

히브리어 노게스(⁨נָגַשׂ⁩)는 다른 사람에게 노동이나 의무를 강요하고 압박하는 사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5:6에서는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강제 노동을 시키는 상황과 관련하여 사용됩니다. 따라서 이 말을 단순히 「좋은 지도자들」이라고 바꾸어 읽기는 어렵습니다.

한편 이 단어가 권력을 행사하는 통치자나 감독자를 나타내는 뜻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유다에서 강한 지도자들이 나온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유다가 과거에는 억압받는 쪽이었지만 이제는 다른 세력을 제압할 만큼 강해진다는 전쟁의 모습으로 읽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 구절이 이상적인 한 지도자만을 분명하게 가리킨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모퉁잇돌, 말뚝, 활, 지배자들이 각각 서로 다른 인물인지, 하나의 지도력과 힘을 여러 비유로 설명하는지도 명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돌보시는 유다는 더 이상 지도력이 무너지고 바깥의 힘에 끌려다니기만 하는 공동체로 남지 않습니다.

「그들은 전쟁에서 거리의 진흙 속에 적을 짓밟는 용사들처럼 될 것이다. 여호와야훼께서 함께 계시므로 그들은 싸울 것이고, 말을 탄 자들은 수치를 당할 것이다.」스가랴 10:5 · 두루새김

앞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풍당당한 전쟁의 말처럼 만드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적들 가운데 말을 탄 자들은 수치를 당합니다. 이 대조는 군사적 힘이 뒤집히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당시 말과 말을 탄 군사들은 중요한 전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스가랴의 예언에서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말의 존재 자체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싸울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스가랴 9:10에서는 전쟁의 활이 끊어지고 왕이 민족들에게 평화를 말하는 장면이 등장했습니다. 반면 10:4–5에서는 다시 활과 전쟁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9장에서는 평화로운 왕의 통치가 강조되었고, 여기서는 흩어지고 억압받던 백성이 하나님의 돌봄으로 다시 힘을 얻는 모습이 강조됩니다. 두 본문 모두 사람의 힘이 궁극적인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 사실을 서로 다른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내가 내버린 적이 없는 것처럼」 — 회복은 과거를 지우는가?

스가랴 10:6–7 본문 →

「내가 유다 백성을 강하게 하고 요셉 백성을 구해 내겠다. 그들을 불쌍히 여겨 돌아오게 하겠다. 그들은 내가 내버린 적이 없는 것처럼 될 것이다. 내가 여호와야훼, 그들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에게 응답하겠다.」스가랴 10:6 · 두루새김

하나님의 행동은 단지 과거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한 군사적 계획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고통받는 자기 백성을 향한 자비에서 출발합니다.

유다는 남왕국을 대표하고, 요셉은 그의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통해 북왕국 이스라엘을 대표할 수 있는 이름입니다. 에스겔 37:15–22에서도 유다와 요셉은 나누어진 이스라엘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두 막대기를 하나로 합치는 상징 행동을 통해 갈라진 백성의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스가랴에서도 여호와야훼께서는 유다만을 강하게 하겠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요셉 백성까지 구해 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내버린 적이 없다」고 하시지 않고, 「내가 내버린 적이 없는 것처럼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실제로 심판을 겪었습니다. 왕국이 무너졌고, 백성이 흩어졌으며,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린 결과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역사를 없었던 일이라고 선언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회복이 이루어지면 그 상처가 백성의 현재와 미래를 영원히 결정하지는 못하게 됩니다. 이것은 과거를 지운다는 뜻이 아니라, 과거에 끊어진 관계가 더 이상 마지막 상태로 남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사실보다 더 깊은 곳에는 그들과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의 변함없는 신실함이 있습니다.

2절에서 드라빔과 점쟁이들은 많은 말을 했지만, 그 말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위로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여호와야훼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응답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의 응답은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시는 행동과 함께 나타납니다.

참된 하나님의 응답은 말에 머물지 않고, 무너진 관계를 다시 세우는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에브라임 백성은 용사처럼 될 것이고, 그들의 마음은 포도주를 마신 듯 기쁠 것이다. 그들의 자녀들도 이 모습을 보고 기뻐하며, 여호와야훼 안에서 마음으로 즐거워할 것이다.」스가랴 10:7 · 두루새김

북왕국의 대표적인 이름인 에브라임은 이미 오래전에 독립된 나라로서의 지위를 잃고 많은 주민이 흩어진 역사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용사처럼 된다는 것은 앞에서 유다에게 약속된 힘이 에브라임에게도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포도주가 가져오는 흥겨움에 빗대어 마음의 기쁨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다음 세대의 기억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한 세대는 흩어짐과 패배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자녀는 부모가 다시 힘을 얻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의 회복이 아닙니다. 공동체가 다음 세대에 전해 줄 이야기가 달라지는 일입니다. 고통과 상실만을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자신들을 다시 일으키신 하나님의 행동을 전해 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휘파람을 부시면 흩어진 양들이 돌아온다

스가랴 10:8–9 본문 →

「내가 휘파람을 불어 그들을 모으겠다. 내가 그들을 되찾아 풀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전처럼 다시 많아질 것이다.」스가랴 10:8 · 두루새김

2절에서 백성은 목자가 없어 고통받는 양 떼였습니다. 3절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양 떼를 돌보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8절에서는 그분이 흩어진 사람들을 불러 모으십니다.

「되찾아 풀어 주었기 때문이다」(⁨פָּדָה⁩)는 원문의 속량을 풀어 옮긴 말입니다. 속량은 대가를 치르거나 권리를 행사하여 얽매이거나 남의 지배 아래 있는 상태에서 자유롭게 하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본문은 구체적으로 어떤 대가를 치르거나 어떤 방법으로 풀어 주셨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되찾으셨다는 관계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그들은 버려진 양 떼가 아닙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여러 거짓된 목소리를 듣고 길을 잃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직접 부르시는 소리를 통해 돌아올 길이 열립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9절은 이 아름다운 장면을 예상 밖의 방식으로 펼칩니다.

「내가 그들을 여러 민족 가운데 씨앗처럼 뿌리겠다. 그들은 먼 곳에서도 나를 기억하고, 자녀들과 함께 살아서 돌아올 것이다.」스가랴 10:9 · 두루새김

모으시겠다면서 왜 다시 흩으십니까?

사람들을 여러 민족 가운데 「씨앗처럼 뿌리겠다」는 표현은 그들이 여러 나라에 흩어지는 상황을 나타냅니다. 씨를 뿌리는 일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잃어버리는 행동이 아닙니다. 씨앗은 뿌려진 곳에서 자라고 번성할 가능성을 지닙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흩어짐이 처음부터 번성을 위한 축복이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이 먼 나라로 끌려간 일은 분명히 심판과 고통의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다만 먼 곳에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백성을 영원히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고향을 기억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말이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잃어버린 땅만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을 부르시고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머릿속에 그분의 이름을 떠올리는 행위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분과의 관계, 말씀과 약속을 다시 마음에 새기고 그분께 돌아서는 행동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신명기 4:29–31에서도 이스라엘은 흩어진 곳에서 하나님을 찾고 그분께 돌아올 수 있다는 약속을 듣습니다. 하나님은 조상들과 맺으신 언약을 잊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앞선 7절의 자녀들이 다시 떠오릅니다. 그들은 부모가 회복되어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는 부모와 함께 살아남고 돌아오는 사람들로 등장합니다.

돌아오는 일은 과거를 살았던 한 세대만의 사건이 아닙니다. 멀리 흩어진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다음 세대까지 함께하는 사건이 됩니다.

하나님이 백성을 모으신다는 것은 흩어진 사람들의 위치만 바꾸는 일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기억하며 다음 세대와 함께 살아갈 미래를 여는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9절의 원문 동사는 미완료형으로, 앞으로 흩으시겠다는 뜻과 이미 흩으셨더라도라는 양보의 뜻으로 읽힙니다. 한 가지 해석은 하나님이 앞으로도 백성을 여러 민족 가운데 흩으시지만, 그곳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살아남아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다른 읽기는 장 전체의 회복 문맥과 씨 뿌림의 모습을 강조하여, 여러 민족 가운데 널리 퍼진 백성의 생존과 번성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어느 쪽이든 본문은 흩어짐과 돌아옴 사이에 정확한 시간표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23:3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자기 양 떼의 남은 사람들을 여러 나라에서 모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에스겔 34:11–16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양들을 찾아 나서시고, 흩어진 곳에서 구해 내시며, 잃어버린 양을 찾고 상한 양을 싸매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스가랴 10장은 그 약속을 휘파람이라는 간결한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돌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 땅이 모자란다

스가랴 10:10 본문 →

「내가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돌아오게 하고, 아시리아에서 모으겠다. 길르앗과 레바논 땅으로 데려오겠다. 그들이 다 살기에는 자리가 모자랄 것이다.」스가랴 10:10 · 두루새김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 두 이름은 단순한 지명이 아닙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이 종살이하던 곳이었고, 아시리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무너뜨리고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킨 제국이었습니다(열왕기하 17:5–6). 스가랴 시대에는 아시리아 제국이 이미 독립적인 세계 제국으로 존재하지 않았지만, 아시리아라는 이름은 여전히 과거의 정복과 흩어짐을 떠올리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집트와 아시리아는 실제로 백성이 흩어진 지역을 가리키는 동시에, 이스라엘이 겪었던 지배와 상실의 역사를 불러오는 이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곳에서 백성을 불러내겠다고 하십니다.

길르앗은 요단강 동쪽의 산지 지역입니다. 레바논은 이스라엘 북쪽의 산악 지역을 가리킵니다. 이 두 지명은 돌아오는 범위가 예루살렘이나 유다의 중심부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줍니다.

한때 백성은 너무 많이 흩어져서 공동체가 계속 남아 있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돌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자리가 모자랄 것이라고 합니다.

부족했던 것은 사람이고, 넘치게 되는 것도 사람입니다.

이 약속은 창세기에서 조상들에게 주어진 번성의 약속과 연결됩니다. 창세기 28:14에서 야곱의 자손은 땅의 티끌처럼 많아지고 여러 방향으로 퍼져 나갈 것이라고 약속받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옛 약속의 반복이 아닙니다. 그 사이에는 실제로 나라가 무너지고 백성이 흩어지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 역사를 지나 하나님은 다시 사람들을 모으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백성이 실패하고 상실을 경험했다는 이유만으로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6절의 「내가 내버린 적이 없는 것처럼 될 것이다」라는 선언이 실제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원문은 무엇을 찾지 못하는지 목적어를 명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백성을 땅으로 데려오겠다고 말씀하셨으므로, 그들이 모두 살기에 충분한 자리를 찾지 못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그들이 다 살기에는 자리가 모자랄 것이다」로 풀어 옮겼습니다.

바다가 다시 갈라지고,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아간다

스가랴 10:11–12 본문 →

「여호와야훼께서 고난의 바다를 건너시고, 바다의 파도를 치실 것이다. 나일강의 깊은 곳들이 모두 마르고, 아시리아의 교만은 꺾이며, 이집트의 왕권은 사라질 것이다.」스가랴 10:11 · 두루새김

이 구절을 읽으면 출애굽의 장면이 떠오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왔을 때, 그들 앞에는 바다가 있었습니다. 뒤에서는 이집트 군대가 추격했습니다. 백성 스스로는 바다를 건너거나 적을 물리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때 여호와야훼께서 바다를 가르셔서 길을 내셨습니다(출애굽기 14:21–22).

본문은 바다를 건너는 인물과 그 상황을 정확히 묘사하기보다는, 건널 수 없어 보이는 장애물이 하나님의 구원 앞에서 무너지는 장면을 강렬하게 보여 줍니다. 이집트와 아시리아는 이스라엘을 억압했던 강대한 권세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의 힘을 나타내던 것들이 무너집니다.

이스라엘은 한 번 이집트에서 구원받았지만, 이후에도 다시 여러 제국의 지배 아래 놓였습니다. 과거에 바다가 갈라졌다는 사실만으로 현재의 모든 고통이 자동으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스가랴는 과거에 바다를 다스리셨던 하나님의 능력이 지금도 변함없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한때만 구원하셨던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다시 자기 백성을 돌아오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스가랴 10장은 바다가 갈라지는 장면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그들을 여호와야훼 안에서 강하게 하겠다. 그들은 그분의 이름으로 살아갈 것이다.」 여호와야훼의 선언입니다.스가랴 10:12 · 두루새김

그들의 힘은 스스로 얻어 혼자 행사하는 권세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주어지는 힘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강하게 하시는 목적은 단지 다른 사람들 위에서 권력을 휘두르도록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어에서는 「그의 이름으로 걸어 다닐 것이다」(⁨הָלַךְ⁩)라고도 옮길 수 있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길을 걷는다는 표현이 그분의 뜻과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신명기 10:12).

하나님의 이름 아래, 그분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백성의 새로운 삶을 가리킵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11:15–16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바다와 강을 치셔서 백성이 건너갈 길을 마련하시고, 아시리아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도 돌아올 큰길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원문에서 건너는 행동과 치는 행동을 나타내는 동사의 주어는 남성 단수이지만, 그 주어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한 가지 읽기는 앞에서 백성을 모으고 돌아오게 하시는 여호와야훼께서 직접 바다를 건너시며 파도를 치시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장면에서도 하나님이 바다를 다스리셨으므로 문맥상 자연스럽습니다. 다른 읽기는 돌아오는 백성을 하나의 집단으로 보고 그들이 고난의 바다를 건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파도를 치는 행동은 하나님의 능력과 연결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원문에는 이러한 주어의 차이를 완전히 풀어 줄 만한 명시적인 설명이 없습니다. 또한 「고난의 바다」에서 고난에 해당하는 차라는 고통과 압박을 뜻합니다. 이것을 바다 자체를 꾸미는 말로 읽을 수도 있고, 고난 가운데 바다를 건너는 상황을 설명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왕권」에 해당하는 원문의 말은 통치 권력을 나타내는 물건인 왕홀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왕홀이 사라진다는 것은 이집트가 행사하던 지배와 권세가 끝난다는 표현입니다.

멀리 흩어진 사람들이 들은 소리

스가랴 10:1–12 본문 →

잘못된 목소리에 의존하던 사람들이 참된 하나님의 부름을 듣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들을 원래 있던 장소로 돌려보내는 데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다시 누구를 따라 살아갈 것인지 회복시키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내가 휘파람을 불어 그들을 모으겠다.」 그 소리를 따라 돌아오는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곳에서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예루살렘을 직접 보지 못한 다음 세대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랫동안 다른 민족들 사이에서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들은 먼 곳에서도 나를 기억하고, 자녀들과 함께 살아서 돌아올 것이다.」 먼 곳에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을 잊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은 그곳에서도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흩어진 사람들을 다시 부르시고, 그들이 돌아올 길을 여십니다. 그들이 건너야 할 바다가 있다면 바다의 파도를 치시고, 그들을 가로막는 권세가 있다면 그 교만을 꺾으십니다.

처음에는 목자가 없어 떠돌던 양들이었습니다. 이제는 자신들을 부르시는 분이 누구인지 알고 그분의 이름 아래 걸어가는 사람들이 됩니다.

멀리 흩어진 사람들을 향해 휘파람을 부르시는 하나님, 그 소리를 따라 돌아오는 사람들,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삶.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