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베오기 하권 풀어 읽기 · 10장

이 장의 자리 · 8–13장 · 되찾은 성전

되찾은 성전, 회복 중인 공동체

성전을 되찾았지만, 그곳으로 돌아갈 공동체는 아직 회복 중이었습니다

마카베오기 하권 10장은 이 책에서 가장 기쁜 장면 가운데 하나로 시작합니다.

유다와 그의 동료들이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을 되찾았습니다. 다른 신들을 위한 제단을 허물고, 더럽혀진 성전을 깨끗하게 하며, 새로운 제단을 세웁니다.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제사가 다시 드려지고, 등불이 켜지고, 빵이 제자리에 놓입니다.

그렇게 성전 봉헌의 축제가 끝나자 이야기는 곧바로 전쟁으로 돌아갑니다.

새로운 왕이 등장하고, 여러 군대가 유대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심지어 유다의 군대 안에서는 돈을 받고 적군을 놓아주는 배신까지 일어납니다.

성전을 깨끗하게 했다고 해서, 그곳에서 하나님을 섬길 사람들까지 깨끗해진 것일까요?

읽는 시간 24분소단락 910장 본문 읽기 →

다시 불이 붙고, 다시 빵이 놓이다

마카베오기 하권 10:1–3 본문 →

성전을 되찾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절은 성전을 되찾은 일을 매우 간결하게 기록합니다.

마카베오와 동료들은 주께서 앞서 이끄시는 가운데 성전과 도시를 되찾았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0:1 · 두루새김

문장의 주어는 마카베오와 그의 동료들이지만, 그들이 성전과 도시를 되찾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주의 이끄심이 놓여 있습니다. 출애굽기 13장 21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보다 앞서 가시며 길을 이끄십니다. 다만 출애굽기에서는 백성이 낯선 땅을 향해 나아갔다면, 여기서는 이미 자기들의 땅에 있었지만 빼앗겼던 성전으로 돌아옵니다.

그들이 되찾은 것은 처음 보는 새로운 장소가 아닙니다. 조상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던 바로 그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곳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2절에는 다른 민족들이 장터에 세운 제단들과 신들을 섬기도록 따로 마련한 곳들을 허무는 일이 등장합니다. 장터는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팔고 만나는 일상적인 공공장소였습니다. 그곳에 세워진 제단은 외부 세력의 종교적 지배가 성전 건물에만 한정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성전의 회복은 단순히 건물의 소유권을 되찾는 일이 아닙니다. 그 도시에서 어떤 하나님을 섬기며 어떤 질서에 따라 살아갈 것인지를 다시 정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무너진 제단을 고치는 대신 새 제단을 세우다

3절에서 그들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고 새 제단을 만듭니다.

마카베오기 상권 4장 44–47절은 이 부분을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이 더럽힌 번제단을 어떻게 할지 의논합니다. 결국 그 제단을 허물고, 그 돌들은 장차 예언자가 나타나 처리 방법을 알려 줄 때까지 따로 보관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율법에 따라 다듬지 않은 돌로 새 제단을 만듭니다.

성전이 더럽혀졌다고 해서 그 장소를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더럽혀진 제단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대로 사용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장소를 되찾되, 훼손된 예배의 중심을 새롭게 세웁니다.

성전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질서에 따라 예배드리는 장소입니다.

제사와 향과 등불과 빵

3절은 성전에서 다시 시작된 일을 차례로 기록합니다.

제사를 드리고, 향을 피우고, 등불을 켜고, 빵을 차려 놓았습니다. 제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중심 행위입니다. 향은 출애굽기 30장 7–8절에 정해진 성소의 봉사와 연결됩니다. 등불은 성소를 밝히고, 빵은 출애굽기 25장 23–30절에 정해진 상 위에 놓입니다.

특히 빵은 단순히 제사장들이 먹을 음식을 가져다 놓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늘 차려 놓도록 명령받은 빵입니다. 예배의 질서가 회복되면서 그 빵도 다시 제자리에 놓인 것입니다.

3절에는 「2년 만에」라는 시간이 등장합니다. 그 기간 동안 성전의 정상적인 제사와 봉사가 중단되었다는 뜻입니다.

한동안 향이 피어오르지 않았던 성소에 다시 향이 피어오릅니다.

등불이 꺼졌던 곳에 다시 불빛이 들어옵니다.

비어 있던 상에는 다시 빵이 놓입니다.

성전의 회복은 군대가 그곳을 점령한 순간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다시 시작되는 순간에 완성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사람들은 다시 엎드립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그들이 돌에서 불을 얻었다고 기록하지만, 정확히 어떤 기술적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이 절 자체가 기적적으로 불이 내려왔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훗날 하누카 전승에서 중요해진 기름이 여드레 동안 타올랐다는 이야기도 10장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전을 되찾은 사람들이 다시 징계를 두려워하다

마카베오기 하권 10:4 본문 →

그들은 다시 죄를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이 일을 마친 뒤 그들은 땅에 엎드려 주께 간청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재앙을 겪지 않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혹시 죄를 짓더라도 주께서 직접 너그럽게 다루시고, 하나님을 모욕하는 잔인한 민족들에게 넘기지 말아 달라고 빌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0:4 · 두루새김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옳았다는 사실을 강하게 확신하기 쉽습니다. 특히 종교적인 이유로 싸운 사람들은 승리를 하나님이 자신들을 온전히 인정하셨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하지만 4절의 기도에는 그러한 태도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역대하 6장에 기록된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와 연결되는 주제가 있습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봉헌하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죄를 짓고 그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을 이야기합니다. 특히 역대하 6장 36–39절에서는 백성이 죄 때문에 적들에게 끌려가더라도 하나님께 돌아와 간청하면 그 기도를 들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마카베오기 하권의 사람들은 실제로 그런 고난을 겪은 뒤 성전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그 같은 상황에 빠지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징계 자체를 피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다

그들은 죄를 지어도 아무 일 없이 지나가게 해 달라고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너그럽게 다루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는 6장 12–17절에서 저자가 제시한 신학적 설명과 이어집니다. 거기서 저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징계하시는 일을 그들을 완전히 버리시는 일과 구별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다른 민족의 지배 아래 놓이는 일은 종종 하나님의 심판과 연결되어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하나님께 돌아올 기회를 얻기도 전에 극심한 모욕과 파괴를 겪을 수 있었습니다. 이 기도의 사람들은 바로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바로잡으시는 일을 거부하지 않지만, 다시 그와 같은 참혹한 박해를 당하지 않기를 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잘못을 다루실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분의 손길이 자신들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회복시키는 손길이기를 구합니다.

여기에는 시편 51편과 연결되는 중요한 신학적 주제가 있습니다. 시편 51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단지 겉으로 드리는 제사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자신을 낮추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마카베오기 하권 10장의 사람들도 제단을 회복하는 것으로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제단 앞에 엎드려 자신들의 미래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동굴에서 지내던 초막절을 성전에서 다시 지내다

마카베오기 하권 10:5–8 본문 →

모독당한 날이 회복의 날이 되다

5절은 성전을 깨끗하게 한 날짜를 강조합니다.

성전을 깨끗하게 한 날은 마침 다른 민족들이 성전을 더럽혔던 날과 같은 날짜인 기슬르월 25일이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0:5 · 두루새김

상권 1장 59절과 4장 52–54절도 이 날짜의 의미를 기록합니다. 다른 민족들이 제단을 더럽힌 날과 같은 날에 새 제단이 봉헌되었습니다.

어떤 날은 그날 일어난 사건 때문에 공동체의 기억 속에 깊이 새겨집니다. 특히 큰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는 특정한 날짜가 고통의 기억을 불러오는 날이 되기도 합니다. 고통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기억에 새로운 의미가 더해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그날을 떠올릴 때마다 파괴뿐 아니라 회복도 함께 기억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의 고통을 없었던 일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 고통으로 기억되던 날에 새로운 사건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12장에서 유월절은 이집트에서 구원받은 사건을 해마다 기억하도록 주어진 절기입니다. 구원은 한때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것을 기억하는 일은 다음 세대까지 이어집니다. 성전 봉헌의 날짜도 그렇게 공동체의 기억 속에 자리 잡게 됩니다.

왜 초막절처럼 여드레 동안 축하했을까

그들은 초막절을 지내듯 기뻐하며 여드레 동안 축제를 지냈습니다. 얼마 전 초막절에는 산과 동굴에서 들짐승처럼 지냈던 일을 기억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0:6 · 두루새김

초막절은 원래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지냈던 일을 기억하는 절기였습니다. 레위기 23장 39–43절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수확의 기쁨을 누리면서 초막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 목적은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나왔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초막에서 지내게 하셨음을 후손들에게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조상들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을 따라 광야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조상들의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자기 땅에서 쫓겨나 산과 동굴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성전을 되찾는 일은 단순히 종교시설의 문을 다시 여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들짐승처럼 숨어 지내야 했던 삶에서 벗어나, 다시 사람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삶으로 돌아오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얼마 전에 제대로 지낼 수 없었던 절기를 떠올리면서, 이제 성전을 되찾은 기쁨을 초막절처럼 표현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마카베오기 하권 1장 9절과 18절에서도 확인됩니다. 그곳에서는 기슬르월에 성전을 깨끗하게 한 일을 기념하는 축제를 초막절과 연결하여 지키도록 권합니다.

그들의 최근 고난과 이스라엘의 오랜 절기 전통이 함께 만나는 축제입니다.

산과 동굴에서 들던 가지를 이제는 기쁨으로 들다

7절에서 사람들은 덩굴로 장식한 지팡이와 아름다운 나뭇가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장면은 레위기 23장 40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거기서 이스라엘은 아름다운 나무의 열매와 종려나무 가지, 무성한 나무의 가지 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도록 명령받습니다.

7절은 「그분의 처소를 깨끗하게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신 분」께 감사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분의 처소」는 하나님께 속한 장소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성전을 되찾은 것을 자기들의 능력만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처소가 깨끗하게 되도록 길을 열어 주셨다고 찬양합니다.

하루의 승리를 해마다 기억할 절기로

8절에서는 이 축제를 해마다 지키기로 결정합니다.

성전을 깨끗하게 한 일은 한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기억은 그날을 경험한 사람들만의 소유가 되지 않습니다.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도 해마다 그날을 기억하도록 정한 것입니다.

이 축제가 훗날의 봉헌절, 곧 하누카로 이어집니다.

훗날 요한복음 10장 22절에서도 예루살렘에서 지키는 봉헌절이 언급됩니다. 그것은 이 절기의 기억이 이후 시대에도 계속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연결이지, 마카베오기 하권 10장이 예수님의 특정한 사건을 직접 예고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10장의 이야기는 이 축제를 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제공된 두루새김은 「열째 날들」이라고 옮겼지만, 표준 인쇄본의 원문은 「이 날들」이라는 뜻입니다. 문맥에서는 5–7절의 여드레 축제를 가리키는 표현이 자연스럽습니다. 따라서 「열째 날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해마다 봉헌 축제를 지키기로 했다는 전체 의미는 분명합니다.

성전은 깨끗해졌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마카베오기 하권 10:9–15 본문 →

저자는 왜 갑자기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는가

9절은 앞 장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의 죽음을 마무리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거스른 그 왕의 아들, 최고 통치자 안티오코스에 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도시들을 짓눌렀던 재앙을 간추려 전하겠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0:10 · 두루새김

이는 마카베오기 하권 2장 19–32절에서 자신이 방대한 역사를 간추려 기록하겠다고 밝혔던 서술 방식과 이어집니다. 앞서 마카베오기 하권 2장 19절은 이 책이 다루는 중요한 사건 가운데 성전을 깨끗하게 하고 제단을 다시 봉헌한 일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10장 1–8절은 그 약속을 이루는 중심 장면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그 뒤에도 이야기를 이어 갑니다.

성전을 되찾는 일과 성전이 안전하게 유지되는 일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새 왕이 등장하고, 권력을 잡으려는 사람들이 움직이고, 여전히 유대를 공격하는 군대들이 있습니다. 성전에서 예배가 다시 시작되었다고 해서 그 예배를 방해하려는 세력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공정하게 대하려던 관리가 죽다

11절에서는 안티오코스 5세 에우파토르가 왕위를 이어받고 리시아스에게 나랏일을 책임지게 했다는 사실이 기록됩니다.

이어서 12–13절에는 마크론이라고 불리던 프톨레마이오스라는 관리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는 유대 사람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들을 공정하게 대하려고 했습니다. 또한 유대 사람들과의 일을 평화롭게 풀어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뜻밖입니다.

그는 왕의 친구들에게 고발당합니다. 과거에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필로메토르가 맡긴 키프로스를 떠나 셀레우코스 왕국으로 넘어왔다는 이력 때문에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습니다.

마침내 그는 스스로 독을 먹고 삶을 마칩니다.

그가 유대 사람들을 공정하게 대하려 했다는 사실이 고발의 직접적인 배경으로 제시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가 정치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빠진 이유에는 이전에 편을 바꾼 문제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오직 유대 사람들에게 호의적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민족에 속한 왕의 관리라고 해서 모두 똑같이 행동하지 않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 부당한 일을 당하게 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 부당함을 바로잡으려 했던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람이 정치적 압력 속에서 죽음을 맞습니다. 누가 어떤 민족에 속했는가 못지않게,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는가가 중요합니다.

마크론이 죽자 그 지역에서는 고르기아스와 이두매 사람들의 공격이 계속됩니다. 평화를 위해 움직이던 관리는 사라지고, 전쟁을 일으키는 사령관들이 다시 등장합니다.

이처럼 성전의 회복과 정치적 평화는 아직 서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돈을 받고 형제들을 팔아넘긴 사람들

마카베오기 하권 10:16–23 본문 →

외부의 공격보다 뜻밖인 내부의 배신

16절에서 마카베오와 동료들은 하나님께 함께 싸워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뒤 이두매 사람들의 요새들을 공격합니다.

이두매는 유다 남쪽 지역과 관련된 지명입니다. 그곳의 세력들은 전투에 중요한 요새들을 차지하고 있었고, 예루살렘에서 달아난 사람들까지 받아들여 유대 사람들을 상대로 전쟁을 이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마카베오는 요새들을 공격해 차지합니다. 본문은 매우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기록합니다. 18절에서는 구천 명 이상이 튼튼한 두 망대로 달아났고, 그곳에는 포위당해도 버티는 데 필요한 물자가 충분히 있었다고 말합니다. 마카베오는 부대를 나누어 시몬과 요셉, 삭개오와 그의 부하들에게 포위를 맡기고 더 급한 일이 있는 곳들로 떠납니다.

그런데 마카베오가 떠난 사이 문제가 발생합니다.

포위를 맡은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돈을 받고 적군 몇 사람을 빠져나가게 해 줍니다. 20절은 그들이 칠만 드라크마를 받았다고 기록합니다. 그 결과 자기 형제들이 다시 공격받을 위험에 놓였습니다.

무엇을 팔았기에 형제를 팔았다고 하는가

그 소식을 들은 마카베오는 백성의 지도자들을 모았습니다. 그는 돈을 받은 자들이 적들을 풀어 주어 동족을 치게 했으니, 돈을 받고 형제들을 팔아넘긴 것이라고 고발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0:21 · 두루새김

이 말은 문자 그대로 형제들을 노예로 팔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이 실제로 받은 돈은 적군을 놓아주는 대가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켜야 할 공동체의 안전을 돈과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형제들」은 단순히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함께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동족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성전을 깨끗하게 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시 죄를 지을 수 있음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공동체 안에서 탐욕 때문에 형제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4절의 기도가 왜 중요했는지 이제 드러납니다.

성소를 더럽히는 일이 외부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공동체가 지켜야 할 신뢰를 돈과 바꾸는 행위도 그 공동체의 거룩함을 무너뜨립니다.

저자는 자기 편에 속한 사람들의 잘못도 기록합니다.

배신자들을 죽이고 요새를 점령하다

22절에서는 마카베오가 배신한 자들을 죽이고 두 망대를 점령합니다.

공동체는 강한 적군 때문에만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을 저버릴 때에도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끝나자 곧바로 새로운 적군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드라크마는 그리스 세계에서 널리 쓰이던 은화의 단위입니다. 정확한 현대 화폐 가치로 바꿔 계산할 수는 없지만, 칠만 드라크마는 개인적인 작은 선물이라고 보기 어려운 큰돈입니다. 본문은 그들이 배신했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그러나 이 사건의 모든 법적 절차나 구체적인 심문 과정을 알려 주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마카베오가 어떤 재판 절차를 거쳤는지, 모든 책임자가 누구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또한 「시몬 일행」이라는 표현을 근거로 시몬 자신이 돈을 받고 배신했다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이 표현은 시몬 본인을 제외하지도 않습니다. 18절은 구천 명 이상이 두 망대로 달아났다고 기록하지만, 23절에서는 그 두 요새에서 이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죽였다고 말합니다. 두 숫자 사이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병력이 더 합류했다고 가정할 수도 있겠지만, 본문은 그런 일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수치들이 정확히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새롭게 정화된 제단 앞에 다시 엎드리다

마카베오기 하권 10:24–28 본문 →

예배를 회복한 사람들이 전쟁을 앞두고 어디로 가는가

24절에서는 티모테오스가 다시 군대를 모아 유대를 공격합니다.

그는 이전에 유대 사람들에게 패배한 적이 있는 인물입니다. 이번에는 많은 용병과 기병을 동원합니다. 그의 목표는 유대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카베오와 동료들은 적군이 다가오자 독특한 행동을 합니다.

머리에 흙을 뿌리고, 허리에 굵은 베옷을 두릅니다. 그리고 제단 맞은편 층계에 엎드립니다. 이 행동은 전쟁을 앞둔 군대의 모습이라기보다 하나님께 죄와 슬픔을 아뢰는 사람들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머리에 흙을 뿌리거나 베옷을 입는 행위는 구약에서 슬픔과 낮아짐, 회개와 간절한 기도를 표현할 때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에스더 4장 1–3절에서 유대 사람들이 멸망의 위협을 받았을 때 금식하고 울며 베옷을 입었습니다.

그들이 다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던 장소가 이제 전쟁을 앞두고 간절히 기도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성전은 승리를 기념하는 건물로만 남지 않습니다.

새로운 위기 앞에서 하나님께 돌아갈 장소가 됩니다.

율법을 근거로 하나님께 싸워 달라고 구하다

26절에서 사람들은 하나님께 자신들의 원수를 원수로 대하고 자신들에게 맞서는 자들에게 맞서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요청은 출애굽기 23장 22절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라고 하시면서, 그들의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대적하는 자에게 대적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도움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고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기도를 어떤 집단이든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원수라고 선언할 수 있다는 일반적인 허락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서 유대 사람들이 호소하는 것은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려는 공동체를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지켜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편이시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공동체 자신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지 않아야 합니다.

기도를 마친 뒤 무기를 들다

기도를 마친 뒤 그들은 무기를 들고 도시에서 멀리 나아갔습니다. 적군 가까이 다가가서는 따로 자리를 잡았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0:27 · 두루새김

기도와 행동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순서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제단 앞에서 하나님께 간청하고, 그다음 무기를 듭니다.

동이 막 트자 양쪽이 서로 공격했습니다. 유다 일행은 용기를 내었고, 주를 의지하기에 싸움이 잘 풀리고 이기리라 확신했습니다. 적들은 분노를 싸움의 길잡이로 삼았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0:28 · 두루새김

앞서 1절에서는 주께서 마카베오와 동료들을 앞서 이끄셨습니다. 28절에서는 적군이 자기들의 분노를 싸움의 길잡이로 삼습니다. 이렇게 장의 시작과 전투의 중심에서 서로 다른 인도자가 대비됩니다.

무엇이 사람을 움직이는가에 따라 그 사람이 걸어가는 길도 달라집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다섯 사람

마카베오기 하권 10:29–31 본문 →

전투 한가운데 나타난 하늘의 군대

격렬한 전투 중에 다섯 사람이 하늘에서 나타납니다.

그들은 금 재갈을 물린 말을 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둘은 마카베오를 자기들의 갑옷과 무기로 감싸 다치지 않게 보호합니다. 또한 적군을 향해 화살과 벼락을 쏟아붓습니다. 그 결과 적군은 눈이 멀고 혼란에 빠집니다.

우선 저자는 이것을 하나님이 마카베오의 군대를 도우셨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초자연적 개입으로 서술합니다. 그는 군대를 이끄는 지도자이지만, 자기 몸을 스스로 완벽하게 보호할 수 있는 존재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를 가운데 두고 감싸는 것은 하늘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마카베오의 용맹을 더 크게 만드는 이야기라기보다, 마카베오 자신도 하나님의 보호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싸우신다는 것은 인간의 힘을 무효화하는가

적군도 싸우고, 마카베오의 군대도 무기를 들고 맞섭니다. 그런데 저자는 그 전쟁의 결과를 설명하면서 하늘의 도움을 이야기합니다.

여호수아 10장 10–11절에서는 이스라엘이 적군과 싸우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적들을 혼란에 빠뜨리시고 큰 우박으로 치십니다. 열왕기하 6장 15–17절에서는 엘리사의 종이 적군의 위협을 보고 두려워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눈을 열어 불말과 불수레를 보게 하십니다.

이 이야기들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은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눈에 보이는 군사력만으로는 사건의 의미를 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마카베오기 하권 10장도 같은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의 목적을 모든 전쟁에서 하나님이 특정 집단의 승리를 보장하신다는 주장으로 확대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특정한 역사적·종교적 상황 속에서 유대 공동체가 경험한 전쟁을 하나님의 도움이라는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3장 24–26절에서 헬리오도로스가 성전의 재물을 빼앗으려 했을 때, 무서운 기마자와 두 청년이 나타나 그를 쓰러뜨립니다. 5장 2–4절에서는 예루살렘 상공에 무장한 기병들의 모습이 나타났다고 기록됩니다. 이러한 장면들은 모두 하늘의 권능이 지상의 사건들에 개입할 수 있다는 생각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 의지한 사람들의 「사나운 짐승처럼」 분노하는 모습

마카베오기 하권 10:32–38 본문 →

요새를 믿고 모욕하는 사람들

티모테오스는 패배한 뒤 가자라라는 튼튼한 요새로 달아납니다.

마카베오의 군대는 그곳을 포위합니다. 요새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벽과 방어시설을 믿고 자신만만하게 행동합니다. 34절은 그들이 온갖 모욕과 해서는 안 될 말을 쏟아 냈다고 기록합니다.

유다 일행은 주께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요새 안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있는 장소가 튼튼한 것을 믿습니다. 그들에게는 높은 성벽이 안전의 근거입니다.

분노를 길잡이로 삼은 사람은 누구였는가

35절에서 마카베오 일행의 젊은이들은 모욕하는 말들 때문에 격분하여 성벽을 공격합니다.

본문은 그들이 「사나운 짐승처럼 분노하며」 맞닥뜨리는 자들을 내리쳤다고 기록합니다. 28절에서 저자는 적군이 「분노」를 싸움의 길잡이로 삼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35절에서는 마카베오 일행의 젊은이들도 「분노하며」 싸웁니다.

하나님께 의지하며 전쟁에 나선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들의 감정과 행동이 언제나 평온하고 온화했던 것은 아닙니다.

마카베오의 군대는 하나님을 위해 싸운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싸우는 과정 역시 피와 죽음, 격렬한 분노로 가득했습니다. 그 사실을 지워 버리면 본문이 실제로 묘사하는 전쟁의 모습을 잃게 됩니다.

불타는 망대와 죽은 지휘관

36–37절에서는 요새가 무너지는 과정이 기록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벽을 공격하고, 다른 사람들은 요새 안 사람들이 정신이 팔린 사이 망대들에 불을 지릅니다. 성문도 부수어 나머지 병력이 들어오게 합니다. 그 과정에서 모욕하던 사람들이 산 채로 불에 타 죽습니다.

티모테오스는 웅덩이에 숨어 있다가 발견되어 죽임을 당합니다. 그의 형제 카이레아스와 아폴로파네스도 죽습니다.

티모테오스 역시 튼튼한 요새로 달아났지만, 마지막에는 웅덩이에 숨어야 하는 처지가 됩니다. 처음에는 유대를 무력으로 정복하겠다고 왔던 사람이 이제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 숨어 있습니다.

전쟁의 방향이 완전히 뒤바뀐 것입니다.

저자는 이를 하나님의 승리로 기록하면서도 전쟁의 참혹한 모습을 감추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회복되었지만, 그 예배를 지키려는 사람들은 여전히 폭력적인 세계 한가운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자신도 그 폭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마지막에는 다시 찬양이 울려 퍼진다

이 일을 마친 뒤 그들은 찬송과 감사를 드리며, 이스라엘에 큰 은혜를 베풀고 자기들에게 승리를 주신 주를 찬양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0:38 · 두루새김

앞에서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장소를 되찾은 기쁨이 중심이었습니다. 뒤에서는 그 회복된 장소와 공동체를 위협하는 적군을 물리친 기쁨이 중심입니다.

첫 번째 찬양은 되찾은 예배를 향합니다.

마지막 찬양은 계속되는 위험 속에서도 도움을 주신 하나님을 향합니다.

조금 더 깊이

한 가지 읽기는 저자가 두 분노의 성격을 구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적군의 분노는 유대를 정복하려는 적대감에서 비롯됩니다. 반면 마카베오 일행의 젊은이들이 분노한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모욕입니다. 따라서 저자는 마카베오 일행의 젊은이들이 느끼는 분노를 정당한 열심의 표현으로 묘사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읽기도 가능합니다. 「사나운 짐승처럼」이라는 표현은 아무리 거룩한 목적을 위해 싸운다고 하더라도 전쟁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격렬하고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본문은 이 분노를 따로 비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승리의 이야기 속에 포함시킵니다. 저자가 의도적으로 자기 편의 폭력성을 비판하려 했는지까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제공된 두루새김은 요새를 사십 일 동안 포위한 뒤 스물다섯째 날에 공격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대로 읽으면 시간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반면 그리스어 본문에서는 포위 기간이 나흘이며, 닷새째 날 새벽에 스무 명의 젊은이가 공격했다고 읽습니다. 이 차이는 사본마다 본문이 다른 데서 생긴 것이 아니라 번역문의 숫자 오류입니다.

다시 켜진 등불이 비추는 것

마카베오기 하권 10:1–38 본문 →

이 장이 보여 주는 것은 완성된 거룩함을 가진 공동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예배할 길을 열어 주셨지만, 여전히 그분의 자비와 인도가 필요한 공동체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자신들이 이제 완전해졌다는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계속 돌보아 주셔야 한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새 제단을 만듭니다. 불을 얻어 제사를 드립니다. 향을 피우고, 등불을 켜고, 빵을 차려 놓습니다.

오랫동안 사라졌던 예배의 모습이 하나씩 돌아옵니다.

그 불빛이 처음으로 밝혔던 것은 완벽하게 회복된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밖에는 여전히 적군이 있었고, 사람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탐욕과 두려움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다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었습니다.

성전의 등불이 다시 켜졌다는 것은 어둠이 모두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그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께 돌아갈 길이 다시 열렸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그 등불이 켜진 곳에서, 자신들을 다시 이끌어 주실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