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7장 · 예루살렘에서 시작
떠나신 예수님, 계속되는 하나님의 나라
사도행전은 이상한 방식으로 시작합니다.
앞으로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땅끝까지 퍼져 나가는 이야기를 들려줄 책인데, 첫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떠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그들을 떠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더는 그분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받은 마지막 말씀은 분명합니다. 「너희는 힘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땅끝에 이르기까지 내 증인이 될 것이다.」(1:8)
눈앞에서 사라지신 분의 증인이 되어 세상 끝까지 가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곁에 계실 때에도 제자들은 그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무너졌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질지 묻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제 어떻게 예수님의 일을 이어 갈 수 있다는 것일까요?
이 물음이 사도행전 1장을 읽는 열쇠입니다.
누가는 이 장에서 대단한 기적이나 성공적인 선교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습니다. 대신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 하늘로 올라가시는 장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기도, 그리고 비어 있는 사도의 자리를 채우는 일을 기록합니다. 겉으로 보면 큰일이 일어나기 전의 준비 과정이지만, 누가는 바로 여기서 앞으로 펼쳐질 모든 이야기의 바탕을 놓습니다.
사도행전의 주인공은 예수님께서 떠나신 뒤 그 일을 대신하게 된 사도들이 아닙니다.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 자신의 일을 계속해 가시는 것이 이 책의 중심입니다. 이것은 본문 전체의 흐름에서 드러나는 신학적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고 가르치기 시작하신 모든 일」
앞의 책은 끝났지만, 예수님의 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먼저 쓴 책을 떠올리게 하며 사도행전을 시작합니다.
데오빌로님, 나는 첫 번째 책에서 예수께서 행하고 가르치기 시작하신 모든 일을 기록했습니다.사도행전 1:1 · 두루새김
먼저 쓴 책은 누가복음입니다. 누가복음 1:1–4에서 누가는 전해 내려온 증언들을 살펴 사건을 차례대로 기록하겠다는 목적을 밝힌 바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같은 사람에게 보내는 다음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말은 「시작하신」입니다. 누가복음이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일을 기록했다면, 사도행전은 그 일이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보여 주는 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이야기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길을 걸으시며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습니다. 이제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 스데반과 빌립, 바울과 그 동료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일을 계속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누가는 벌써 2절에서 한 가지 실마리를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성령을 통해」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5절과 8절에서는 사도들 자신이 성령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하신 일과 사도들이 앞으로 하게 될 일이 성령을 통해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끝나고 이제 제자들이 스스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것을 가지고, 자신들을 부르신 분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부활은 증인들의 출발점입니다
누가는 먼저 한 가지 사실을 강조합니다.
예수께서는 고난을 겪으신 뒤 여러 확실한 증거로 자신이 살아 있음을 사도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나타나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사도행전 1:3 · 두루새김
「확실한 증거」는 사실임을 보여 줄 만한 근거를 뜻합니다. 누가는 그 증거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하나하나 기록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일이 사십 일에 걸쳐 반복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이후 사도들이 전할 말의 성격을 보여 줍니다. 그들이 선포할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훌륭했다는 평가도, 예수님의 정신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았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들이 증언할 것은 고난받아 죽으신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십 일에 걸쳐 말씀하신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나라와 무관한 별개의 기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죽음을 넘어 자신의 다스림을 이루신다는 사실이 예수님의 부활에서 뚜렷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병든 사람을 고치시고, 죄인들과 식탁을 나누셨습니다. 이제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그분이 살아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약속은 십자가에서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그 나라를 다시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배웠다는 것과 이해했다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곧이어 나오는 제자들의 질문이 그것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시작하신」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낱말은 ‘시작했다’는 뜻이지만, 그리스어에서 이런 표현은 어떤 행동을 이야기하기 시작할 때 흔히 쓰이기도 하므로 이 말 자체만으로 누가가 뜻한 모든 것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 「확실한 증거」에 해당하는 낱말이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곳은 이 구절뿐입니다.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려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장 세상으로 나가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는 사도들과 함께 모여 계실 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려라. 너희가 나에게서 들은 그 약속이다.」사도행전 1:4 · 두루새김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신 곳이며, 누가복음의 마지막 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들이 다시 모인 곳입니다. 제자들에게는 이미 전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분의 기적을 보았으며, 부활하신 예수님까지 만났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기다려야 합니다.
왜일까요?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이제 며칠 지나지 않아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사도행전 1:5 · 두루새김
누가복음 3:16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기보다 강한 분이 오셔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그때 요한이 가리킨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약속이 제자들에게 곧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영을 부어 주실 일을 약속하셨습니다. 에스겔 36:26–27은 하나님이 새로운 마음을 주고 자신의 영을 사람들 안에 두어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하실 것을 말하고, 요엘 2:28–29는 하나님이 여러 사람에게 자신의 영을 부어 주실 날을 바라봅니다. 사도행전은 그 약속들이 부활하신 예수님 이후의 공동체 안에서 새롭게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여 주게 됩니다.
아직 성령을 받기 전의 제자들을 무능력하거나 가치 없는 사람들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직접 뽑으셨고, 부활 후에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에게는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일은 경험이나 열정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첫 번째 명령은 행동이 아니라 기다림입니다. 그저 가만히 있는 기다림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들이 하게 될 일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인정하는 기다림입니다.
그들이 받은 사명은 크지만, 그 사명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때를 묻고,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리키십니다
이스라엘의 나라를 회복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질문합니다.
함께 모인 사도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주님, 지금 이스라엘의 나라를 다시 세워 주시는 것입니까?」사도행전 1:6 · 두루새김
이 질문은 흔히 제자들이 아직도 정치적인 메시아 왕국을 꿈꾸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로 해석됩니다. 그러한 기대가 질문 속에 있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고, 하나님의 백성이 자유와 회복을 경험하는 문제는 결코 막연한 주제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 나라를 자기들이 세우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 다시 세워 주실 것인지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을 어리석다고 꾸짖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기대 자체가 성경과 동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누가복음 첫머리에서 마리아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기억하셨다고 노래했고(누가복음 1:54–55), 사가랴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와 구해 주셨다고 찬양했습니다(1:68–75).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해 주실 분이라고 기대했다고 말했습니다(24:21).
따라서 제자들의 질문을 단순히 ‘유대인들이 자기 민족만 생각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한 장면’으로 읽으면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 나라가 어떤 범위와 방식으로 나타날지는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부정하셨습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자신의 권한으로 정하신 때와 시기는 너희가 알 일이 아니다.」사도행전 1:7 · 두루새김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려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땅끝에 이르기까지 내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행전 1:8 · 두루새김
여기서 가장 중요한 연결어는 「그러나」입니다. 질문의 중심은 때인데, 답변에서는 사명과 장소가 중심이 됩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부정하셨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나라가 다시 세워지는 일은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그 회복이 언제 어떤 정치적 형태로 이루어질지 설명하지도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알아야 할 것과 맡아야 할 것을 구별하십니다. 미래의 때와 시기는 아버지의 권한에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주어진 일은 성령을 받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명의 범위가 예루살렘, 온 유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입니다.
예루살렘과 유대는 이스라엘의 중심 지역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는 유대인들과 종교적·역사적 갈등을 겪어 온 사람들의 땅입니다. 누가복음 9:52–56에는 사마리아의 한 마을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일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마리아도 증언을 들을 사람들의 땅에 포함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땅끝이 나옵니다.
처음 질문에서는 이스라엘이 중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에서는 이스라엘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갑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무시하거나 버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확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 안에 이미 들어 있던 더 넓은 세계를 드러냅니다.
이사야가 바라본 회복은 이스라엘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 49:5–6에서 이사야의 종은 흩어진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고 야곱의 지파들을 회복하는 사명을 받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종을 민족들의 빛으로 세워 하나님의 구원이 땅끝에 이르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과 민족들의 구원은 서로 경쟁하는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8은 이사야 49:6을 직접 인용한다고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땅끝에 이르기까지」라는 표현과 구원이 이스라엘 바깥으로 넓어지는 흐름은 두 본문을 강하게 연결합니다. 훗날 사도행전 13:47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이사야 49:6을 직접 인용하여 민족들에게 향하는 사명의 근거로 제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기대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없던 것으로 돌리지 않으십니다. 그 나라가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은 세계를 향하고 있음을 보여 주십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땅끝까지 가서 증언을 전하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내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증언은 그들이 할 일이지만, 증인은 그들이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지를 보여 줍니다. 그들은 자기 생각이나 종교적 경험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속한 증인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처음부터 제자들의 능력으로 시작하지 않고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려오시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이 받게 될 힘은 사람들을 지배할 정치적 권력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 목적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지십니다.
구름이 예수님을 감쌌다 — 예수님께서는 어디로 가셨습니까?
승천은 단순한 이별입니까?
예수께서는 이 말을 마치시고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들려 올라가셨습니다. 구름이 예수를 감싸 더는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으셨습니다.사도행전 1:9 · 두루새김
누가는 예수님의 승천을 놀라울 만큼 간결하게 묘사합니다. 그 장면의 한가운데 구름이 있습니다.
다니엘 7:13–14에서 다니엘은 환상 속에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옛적부터 계신 분에게 나아가는 모습을 봅니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가 주어지고, 모든 민족과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됩니다. 그 인물은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가 권세를 받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승천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제자들 곁을 떠나 먼 곳으로 가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셨고 부활하신 그분이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에 속한 자리로 높임받으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2:32–36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셨고 자신의 오른편으로 높이셨으며,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서 약속된 성령을 받으셔서 부어 주셨다고 선포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했던 시간은 끝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위와 활동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말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사라지신 뒤에도 하늘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고난받아 죽으신 스승이 살아 돌아오셨는데, 이제 다시 그들의 눈앞에서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흰옷을 입은 두 남자가 나타납니다.
두 사람이 말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왜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느냐? 너희 곁을 떠나 하늘로 들려 올라가신 이 예수께서는 너희가 하늘로 가시는 모습을 본 그대로 오실 것이다.」사도행전 1:11 · 두루새김
누가복음 24:4–7에서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을 때에도 빛나는 옷을 입은 두 남자가 나타나,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본문은 사도행전의 두 남자를 직접 천사라고 부르지 않지만, 두 장면은 분명히 서로를 떠올리게 합니다. 무덤에서 여자들은 죽으신 예수님을 찾았고, 승천 장면에서 제자들은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두 경우 모두 그들이 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안 계시다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행하신 일입니다.
11절의 「이 예수님께서는」이라는 표현은 다시 오실 분이 제자들이 알고 지냈던 바로 그 예수님이심을 말합니다. 갈릴리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고, 예루살렘에서 고난받으셨으며, 부활하신 그분이십니다.
동시에 두 남자의 말은 예수님의 떠남이 마지막 장면이 아님을 알려 줍니다. 다만 본문은 그때가 언제인지 말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자들에게는 시기를 계산할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왜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느냐?」라는 질문은 미래에 대한 소망을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졌으니, 이제 그들이 받은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제자들이 바라보던 하늘은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가야 할 곳은 하늘이 아니라 예루살렘입니다.
조금 더 깊이
성경에서 구름은 단순한 날씨 현상 이상의 의미를 지닐 때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40:34–35에서는 구름이 성막을 덮고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가득합니다. 구름은 하나님이 그곳에 계심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그 영광을 사람의 눈에서 가립니다. 사도행전 1장이 다니엘 7장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구름, 하늘,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는 두 본문을 연결해서 읽을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위층 방에 모인 사람들 — 새로운 공동체의 첫 모습
사도행전의 첫 번째 순종
그 뒤 사도들은 올리브산이라고 불리는 산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산은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었으며, 안식일에 걸어가도록 허용된 거리만큼 떨어져 있었습니다.사도행전 1:12 · 두루새김
안식일에 걸어가도록 허용된 거리는 당시 유대인이 안식일에 이동하던 관습과 관련된 표현으로, 그 산이 도시 가까이에 있었다는 설명입니다. 그들은 먼 곳으로 떠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물라고 하신 도시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함께 보인 순종입니다.
누가는 이제 그들이 머무는 위층 방으로 독자를 데려가 사도들의 이름을 기록합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 빌립, 도마, 바돌로매,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심당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열한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6:12–16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뽑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한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적는 동안,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함께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4절은 우리의 시선을 열한 사도에게만 머무르지 못하게 합니다.
이들은 모두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예수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꾸준히 기도했습니다.사도행전 1:14 · 두루새김
누가복음 8:1–3에서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실 때 열두 제자뿐 아니라 여러 여자들도 그분과 함께했고, 자신들의 재산으로 그 일행을 섬겼습니다. 그런 여자들의 존재를 기록했던 누가는 사도행전의 출발점에서도 여자들을 분명히 언급합니다.
예수님의 가족도 이 공동체 안에 있습니다. 누가복음 8:19–21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혈육인 가족과 그분을 따르던 사람들이 함께 기도합니다.
누가는 누가 더 중요한 사람인지 순위를 정하지 않습니다. 이 공동체를 특징짓는 것은 그들이 「한마음으로 꾸준히 기도했습니다」라는 사실입니다. 「꾸준히」는 어떤 일에 계속 마음과 힘을 쏟는다는 뜻으로, 잠깐 모여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기도를 계속하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기도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령을 보내 달라고 기도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본문은 그 내용을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직 무엇이 일어날지 모두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신 자리에 남겨진 공동체의 첫 모습은 회의를 이끌거나 조직을 키우는 모습이 아닙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공동체에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비어 있는 열두 번째 자리입니다.
유다의 빈자리 —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를 왜 다시 꺼냅니까?
베드로는 유다를 남이었던 사람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누가는 이때 함께 모인 사람이 백스무 명쯤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그들 가운데 일어나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유다는 예수를 붙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길을 안내했습니다.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통해 그에 관해 미리 하신 성경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했습니다.」사도행전 1:16 · 두루새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고 곧 성령을 보내실 것이라면, 왜 이야기는 다시 유다에게 돌아가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배반한 사람의 실패를 굳이 다시 꺼내야 할까요?
「그는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우리와 함께 이 섬김의 일을 맡았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1:17 · 두루새김
유다는 원래부터 바깥에 있던 적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뽑으신 열두 사람 가운데 하나였고, 같은 섬김의 일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베드로는 그가 범한 잘못을 설명하기 전에 이 사실을 먼저 인정합니다. 그 때문에 유다의 배반은 더 비극적입니다.
예수님을 붙잡은 사람들은 바깥에서 왔지만, 그들에게 길을 안내한 사람은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유다는 사람들을 예수님에게 인도했지만, 예수님을 따르도록 인도한 것이 아니라 그분을 붙잡도록 인도했습니다.
그가 맡았던 위치와 실제로 한 행동 사이에 깊은 모순이 생긴 것입니다.
피의 밭에 남은 기억
18–19절에서는 누가가 베드로의 연설 도중에 유다의 비참한 최후를 독자에게 덧붙여 설명합니다. 유다는 악한 일을 하고 받은 돈으로 밭을 얻었고, 그의 몸은 참혹하게 터져 죽었습니다. 그 밭은 아람어로 ‘피의 밭’을 뜻하는 아겔다마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누가는 유다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관한 호기심만 채워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배반이 가져온 비참한 결과와, 그 때문에 생긴 공동체의 빈자리를 보여 줍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주는 데서 어떤 대가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얻은 땅에는 피의 흔적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 남았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함으로써 얻은 것은 결국 자신이 맡았던 섬김의 자리를 지켜 주지 못했습니다.
시편은 어떻게 유다의 이야기와 연결됩니까?
베드로는 유다의 일을 설명하면서 두 시편을 인용합니다.
베드로가 말을 이었습니다. 「앞서 말한 성경 말씀은 시편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살던 곳이 텅 비어 아무도 거기 살지 않게 하라.』 또 『그가 맡았던 일은 다른 사람이 맡게 하라.』」사도행전 1:20 · 두루새김
첫 번째는 시편 69:25, 두 번째는 시편 109:8에서 가져온 말입니다. 이 시편들은 처음부터 유다를 예언하기 위해 기록된 것일까요?
시편 69편은 고난받는 사람이 자신을 미워하고 해치는 원수들 가운데서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는 시입니다. 25절은 그 원수들이 살던 곳이 황폐해지기를 바라는 말로, 본래 문맥에서는 여러 원수를 가리키지만 사도행전에서는 한 사람인 유다에게 적용됩니다. 시편 109편 역시 악한 적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하나님의 공정한 판단에 호소하는 시이며, 8절은 다른 사람이 그 적이 맡았던 일을 맡게 되기를 바라는 내용입니다.
두 시편 모두 본래 문맥에서 유다라는 이름이나 예수님의 열두 사도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시편들에서 의로운 이를 배반하고 해치는 사람의 운명, 그리고 그 사람이 맡았던 일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는 그 말씀이 성령을 통해 미리 주어졌고, 유다의 사건에서 이루어져야 했다고 이해합니다.
그 이해를 살필 때에도 두 가지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편의 본래 문맥은 고난받는 의인과 그의 적에 관한 것이고, 베드로의 해석은 그것을 예수님과 유다의 사건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유다를 저주하자고 사람들을 모은 것이 아닙니다. 유다가 떠난 자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시편은 텅 빈 자리를 떠올리게 하고, 두 번째 시편은 누군가 그가 맡았던 일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유다의 실패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맡았던 사명까지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공동체는 그 자리를 채우려 합니다.
조금 더 깊이
18–19절을 누가의 설명으로 읽는 단서는 「그 지역 말로 아겔다마」라는 표현입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 청중 앞에서 그들이 쓰는 말을 설명한다면 어색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마태복음 27:3–10에서는 유다가 돈을 성전에 던지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며, 제사장들이 그 돈으로 밭을 삽니다. 두 기록을 맞추기 위해 목을 맨 뒤 시신이 떨어졌다고 설명하거나, 제사장들이 유다를 대신하여 밭을 샀다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연결 과정은 두 본문에 직접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실제 사건이 정확히 어떤 순서로 일어났는지는 이 기록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해야 합니다」 — 사도에게 필요한 자격
왜 사도의 자리를 채워야 했을까요?
베드로는 한 사람이 유다의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단순히 숫자를 맞추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신 것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떠올리게 합니다. 누가복음 22:28–30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함께한 이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는 일에 참여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전 제자들은 이스라엘의 나라가 다시 세워질 때를 물었고, 이제 그들은 열두 사도의 무너진 자리를 회복하려 합니다.
다만 누가는 열두 사도의 자리를 채우는 일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나타낸다고 직접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누가복음의 다른 말씀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는 해석입니다. 본문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사도의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는 베드로의 판단과, 그 자리를 맡을 사람의 자격입니다.
그 자격이 뜻밖입니다.
베드로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나 사람들을 이끄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찾지 않습니다. 종교적 열정이나 사회적 지위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걸어온 사람을 찾습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다닌 사람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예수께서 우리 곁을 떠나 하늘로 들려 올라가신 날까지 함께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의 부활을 증언해야 합니다.」사도행전 1:21–22 · 두루새김
그들이 맡을 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증언하려면 누구의 부활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분이 어떻게 사람들을 가르치셨고, 어떤 일을 하셨으며, 어떻게 고난받으셨는지 아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그분의 삶 전체와 연결하여 증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1:8). 베드로는 이제 「예수의 부활을 증언해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1:22). 두 표현은 서로를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그분에 관한 좋은 가르침을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분이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다만 베드로가 제시한 조건은 모든 시대의 신앙인이나 지도자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자격 조건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땅에서 하신 일을 처음부터 지켜본 증인이라는, 그 시대의 사도들에게 주어진 독특한 역할을 설명합니다.
이름은 알려졌지만 이야기는 남지 않은 두 사람
공동체는 바사바라고 불리며 유스도라는 이름도 가진 요셉, 그리고 맛디아를 후보로 세웁니다. 누가는 이 두 사람이 어디 출신인지, 어떤 일을 했는지, 예수님과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제시한 조건에 따르면 두 사람은 요한의 세례 때부터 예수님의 승천까지 사도들과 함께 다닌 이들입니다.
복음서가 모든 제자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곁에는 우리가 이름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사건을 함께 겪었지만 이야기의 중심인물로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중 두 사람이 사도의 자리를 맡을 후보로 등장합니다.
누가는 두 사람 중 누구의 능력이 더 뛰어났는지 평가하지 않습니다. 대신 공동체가 찾는 것이 새로운 가르침을 만들어 낼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고 부활을 증언할 사람임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뽑으신 사람이 누구인지」
두 사람을 세운 뒤 공동체는 기도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두 사람 가운데 주님께서 뽑으신 사람이 누구인지 보여 주십시오.」사도행전 1:24 · 두루새김
사람들은 두 후보가 겉으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예수님과 함께 다녔는지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마음까지 완전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분께 선택을 맡깁니다.
여기서 「주님」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에서 기도의 대상으로 하나님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1장 2절에서 사도들을 뽑으신 분은 예수님이시고 바로 앞 21절에서도 「주 예수님께서」가 언급되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 드리는 기도로 읽을 근거도 있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처음에 사도들을 뽑으셨던 예수님께서 지금도 자신이 세우실 사람을 알고 계시며, 공동체는 그분의 선택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기도의 상대가 누구인지 직접 밝히지 않으므로 어느 한쪽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로 읽든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읽든, 공동체가 최종적인 선택의 근거를 자신들의 판단만으로 삼지 않는다는 사실은 같습니다.
그들이 두 사람을 두고 제비를 뽑자 맛디아가 뽑혔습니다. 이렇게 맛디아는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의 수에 들었습니다.사도행전 1:26 · 두루새김
오늘날 독자들에게 제비뽑기는 다소 낯설게 보입니다. 구약에서 제비는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결정 방식으로 사용되곤 했습니다. 여호수아 18:10에서는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땅을 나누는 과정에 제비가 사용되고, 잠언 16:33도 제비를 던지는 일과 하나님의 결정 사이의 관계를 말합니다.
그렇다고 사도행전이 모든 공동체의 결정에 제비뽑기를 사용하라고 가르친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특정한 상황에서 공동체가 어떻게 결정을 내렸는지를 기록할 뿐, 그것을 모든 시대의 지도자 선출 규칙으로 삼을 근거는 없습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기 전에 이미 사도에게 필요한 자격을 확인했고, 두 사람을 후보로 세웠으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제비는 그들이 할 수 있는 판단을 한 뒤, 자신들이 알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과정의 마지막에 등장합니다.
처음 받은 몫과 새롭게 주어진 몫
17절에서 베드로는 유다가 「우리와 함께 이 섬김의 일을 맡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원문에서는 이 섬김의 ‘몫’을 받았다는 표현을 쓰며, 이때 ‘몫’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클레로스(κλῆρος)입니다. 그런데 26절에서 사람들이 뽑는 「제비」도 같은 낱말입니다. 이 말은 본래 제비를 가리키기도 하고, 제비로 나누어 받은 몫을 뜻하기도 합니다.
유다는 그 섬김의 몫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그 일을 저버렸습니다. 이제 공동체는 제비를 뽑아 새로운 사람을 그 자리에 세웁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몫을 버렸지만, 그 몫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누가는 특별한 환호나 축하를 묘사하지 않습니다. 맛디아가 앞으로 어떤 업적을 이루었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유다 때문에 열한 명이 되었던 사도들의 무리가 다시 열두 명이 되었을 뿐입니다.
누가의 첫 장이 보여 주는 하나님의 나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시고, 성령과 증인의 사명을 약속하신 뒤 하늘로 들려 올라가십니다. 남겨진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함께 기도하고, 유다의 빈자리에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할 사람을 다시 세웁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던 이 장면들은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떠남은 그분의 일이 끝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분이 시작하신 일이 증인들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는 새로운 단계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사람들의 열심이나 조직의 힘으로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사도들은 그 나라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증언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1장에는 아직 아무런 성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약속을 듣는 사람들, 기다리는 사람들, 함께 기도하는 사람들, 자신들에게 맡겨진 책임을 성실하게 정돈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공동체는 유다의 실패를 지울 수 없지만, 그 실패 때문에 예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사도행전 1장은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내려오시는 장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누가는 그보다 앞선 자리에 이야기를 멈춥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하늘로 들려 올라가셨고, 제자들은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약속된 성령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내려오시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어느 위층 방에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예수님의 어머니도 있고, 그분의 형제들과 여자들도 있으며, 오래전부터 예수님을 따라온 제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함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맛디아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의 수에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맡기신 증인의 자리가 갖추어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