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풀어 읽기 · 29장

이 장의 자리 · 27–30장 · 복과 저주

보았으나 깨닫지 못한 백성

신명기 29장은 뜻밖의 모순으로 시작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직접 보았다고 말합니다. 이집트에서 일어난 큰 표징과 놀라운 일들을 보았고, 광야에서 사십 년을 살아남았으며, 강력한 왕들을 물리치는 일까지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바로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는 오늘까지 너희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지 않으셨다.」

분명히 보았는데, 보는 눈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경험하는 것과 그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놀라운 일을 목격한 사람이 반드시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백성은 무엇을 더 보아야 합니까? 이미 수많은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더 하실 수 있습니까?

모세는 이 질문에 새로운 기적을 약속하는 것으로 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이미 경험한 일을 다시 들려주고, 자신들이 누구 앞에 서 있는지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누구도 하나님의 언약을 가볍게 여기지 못하도록 경고합니다.

읽는 시간 24분소단락 629장 본문 읽기 →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았으나 깨닫지 못하다

신명기 29:1–8 본문 →

놀라운 일들을 보고도 보는 눈이 없었다

모세는 먼저 이스라엘의 기억을 불러냅니다.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불러 말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야훼께서 이집트 땅에서 파라오와 그의 모든 신하와 온 나라에 하신 일을 모두 눈앞에서 보았다.」신명기 29:1 · 두루새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무엇을 이루었느냐가 아니라, 여호와야훼께서 무엇을 하셨느냐입니다. 모세는 파라오와 맞선 이스라엘의 용기나 지도자의 능력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께서 하신 일의 목격자였습니다.

이어지는 2절에서는 그 경험을 「그 큰 시험들과 표징들과 놀라운 일들」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출애굽 사건이 단순한 정치적 해방이 아니라, 이집트의 왕과 그 체제 앞에서 여호와야훼의 능력이 드러난 사건이었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3절은 예상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는 오늘까지 너희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지 않으셨다.」신명기 29:3 · 두루새김

1–2절에 반복되던 「보았다」는 말이 3절의 「보는 눈」을 「주지 않으셨다」는 말과 충돌합니다.

히브리어에서 마음은 감정뿐 아니라 생각하고 판단하며 의지를 정하는 내면의 중심을 가리킵니다. 자신들이 경험한 사건의 의미를 알아보고, 그에 맞게 판단하고 살아갈 내면의 능력이 부족했다는 말입니다.

더욱 어려운 것은 모세가 그 마음을 주지 않으신 분으로 여호와야훼를 지목한다는 점입니다.

이 말씀을 하나님이 일부러 백성을 무지하게 만들어 놓으시고 그 무지를 꾸짖으신다는 뜻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깨달음에 관여하지 않으시고 인간만 자신의 힘으로 깨닫는다는 식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모세는 참된 깨달음이 인간의 경험이나 관찰만으로 완성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일하심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동시에 이스라엘이 책임 없는 피해자로 그려지는 것도 아닙니다. 신명기 9장은 이 백성이 광야에서 거듭 여호와야훼를 거역했다고 돌아봅니다. 경험은 풍성했지만 그 경험에 걸맞은 믿음은 부족했습니다.

모세는 백성에게 마음을 바꾸라고 명령하면서도(신명기 10:16), 참으로 변화된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셔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긴장은 뒤의 30:6에서 하나님이 백성의 마음을 새롭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으로 이어집니다.

29장은 그 문제를 아직 해결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이 스스로를 지나치게 믿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광야에서 배우도록 하신 것

이어서 모세는 광야의 사십 년을 돌아봅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를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이끌었다. 너희가 입은 겉옷은 해어지지 않았고 신발도 닳지 않았다.』」신명기 29:4 · 두루새김

여기서는 말하는 주체가 바뀝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다가 「나는 너희를」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두루새김은 「여호와야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를 덧붙여 이 부분을 모세를 통해 전달되는 여호와야훼 자신의 말씀으로 읽도록 했습니다.

겉옷과 신발은 하루를 살아갈 때 필요한 가장 평범한 물건입니다. 사람들은 극적인 구원의 순간은 기억하면서도, 그 이후 계속 살아갈 수 있었던 일을 당연하게 여기기 쉽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바로 그 평범한 지속을 하나님이 하신 일로 제시합니다. 사십 년 동안 백성을 이끄신 하나님은 위기의 순간에만 나타나신 분이 아니셨습니다. 길을 걷는 날마다 그들을 돌보신 분이셨습니다.

5절은 조금 더 낯섭니다.

「『너희는 빵을 먹지 않았고 포도주나 다른 술도 마시지 않았다. 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신명기 29:5 · 두루새김

이 말은 광야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뜻일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 16장은 만나를 먹은 일을 기록하고, 신명기 8:3은 하나님께서 조상들이 알지 못했던 만나를 먹이셨다고 돌아봅니다. 따라서 여기서 빵과 포도주가 없었다는 말은 평소의 식량과 생산물에 의존하는 생활과 구별하여, 광야에서 하나님이 공급하신 방식으로 살아왔음을 강조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목적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었습니다.

3절에서는 백성에게 「깨닫는 마음」이 없다고 했는데, 5절에서는 하나님이 그들을 광야에서 이끄신 목적이 자신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원문에서도 두 표현은 모두 안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을 살아남게만 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누구의 손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게 하려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십 년이 지난 지금도 모세는 그들이 참으로 깨닫는 마음을 갖추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광야의 문제는 하나님의 돌보심이 부족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돌보심을 경험하고도 그 의미를 받아들이지 못한 인간의 마음에 있습니다.

이미 받은 땅을 기억하라

모세는 광야의 이야기를 마친 뒤 이스라엘이 현재 서 있는 장소로 시선을 옮깁니다.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나왔지만 패배했고, 그들의 땅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지파 절반에게 몫으로 주어졌습니다(29:6–7; 신명기 2:26–3:17). 이스라엘은 아직 요단강을 건너지 않았지만, 이미 일부 지파는 자신들이 차지할 땅을 받았습니다.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일이 눈앞에서 현실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직 모두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 역시 아니었습니다. 백성은 이미 받은 것을 보면서 앞으로 받을 것을 신뢰하도록 요청받습니다.

「그러니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이 잘되도록,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여라.」신명기 29:8 · 두루새김

여기서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이 잘되도록」이라는 말은 누구든 언약을 지키면 세상에서 원하는 모든 일을 이룬다는 보편적인 보장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 살아갈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언약의 권면입니다. 그 땅에서 삶을 올바르게 이어 가려면, 자신들을 그곳까지 이끄신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이제 언약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을 한 사람씩 불러 세웁니다.

조금 더 깊이

4절의 말하는 주체에 대해서는, 5절의 「내가 너희 하나님 야훘임을」이라는 표현도 이런 읽기를 뒷받침합니다. 다만 히브리어 본문에 새로운 인용을 시작한다는 표시가 분명하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긴장은 구약성경 안에서도 계속 전개됩니다. 예레미야 24:7은 하나님이 백성에게 자신을 아는 마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예레미야 31:31–34는 하나님의 가르침이 사람들의 마음에 기록될 새로운 언약을 말합니다. 신명기 29장에서 드러난, 하나님을 경험하고도 깨닫지 못하는 인간의 문제가 새로운 언약의 약속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새 언약을 말씀하시는 장면(누가복음 22:20)은 이러한 언약의 주제를 이어받습니다. 이것은 신명기 29장이 그 장면을 직접 예언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새롭게 하시는 일이 성경 전체에서 어떻게 발전하는지를 보여 주는 정경적 연결입니다.

오늘 여호와야훼 앞에 서 있는 사람들

신명기 29:9–14 본문 →

이 자리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누구인가?

9절에서 모세는 선언합니다.

「오늘 너희 모두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 앞에 서 있다. 너희 지파의 우두머리들과 장로들과 관리들,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가 서 있다.」 「너희 어린아이들과 아내들, 너희 진영에 함께 사는 외국인도 서 있다. 너희를 위해 나무를 패는 사람부터 물을 긷는 사람까지 모두 여기에 있다.」신명기 29:9–10 · 두루새김

지금까지 백성은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됩니다.

언약은 과거에 하나님이 하신 일을 관찰하거나 평가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일을 행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삶을 결정해야 하는 관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모세는 공동체 안에서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부터 열거한 뒤, 어린아이와 아내들, 진영에 함께 사는 외국인과 일상적인 노동을 하는 사람들까지 언급합니다.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일은 공동체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노동이었습니다. 이 표현은 언약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범위를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까지 넓혀 보여 줍니다.

다만 이들이 당시 사회에서 모두 동등한 권리와 지위를 누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사회적 차이가 사라진다는 것이 아니라, 언약에 대한 책임과 소속이 지도자나 성인 남성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있지만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이스라엘은 하나의 백성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각자 고립된 상태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은 뒤에서 개인의 숨겨진 불순종이 공동체 전체의 문제가 되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언약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

모세는 그들이 왜 모였는지를 설명합니다.

「너희가 이곳에 선 것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오늘 너희와 맺으시는 언약과 그분의 저주를 담은 맹세에 참여하기 위해서다.」신명기 29:11 · 두루새김

두루새김이 언약에 「참여하기 위해서」라고 옮긴 자리는 히브리어에서 특별한 움직임을 나타냅니다. 원문은 레오브레카 비브리트로(⁨עָבַר⁩), 기본적으로 「언약 안으로 건너 들어가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스라엘은 곧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땅을 건너기 전에 먼저 언약 안으로 건너 들어가야 합니다.

백성은 하나님과의 관계 바깥에서 그분의 도움만 받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관계가 요구하는 충성과 책임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언약에는 「저주를 담은 맹세」가 따릅니다.

언약은 관계를 세우면서 그 관계에 충실할 책임도 부여합니다. 맹세에 포함된 저주는 그 책임을 저버릴 경우 어떤 결과가 따르는지를 분명히 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저주를 언약의 목적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다음 절에서 진짜 목적을 밝힙니다.

「그분께서는 오늘 너희를 그분의 백성으로 세우시고 친히 너희 하나님이 되시려는 것이다.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또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시는 것이다.」신명기 29:12 · 두루새김

하나님께서 그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가 오늘 모압 평야에 서 있는 백성에게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7:7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출애굽기 6:7에서는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선택하여 자신의 하나님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먼저 약속하셨고,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으며, 이제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세우십니다.

언약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공로가 아니라, 자신들을 백성으로 세우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응답입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도 이 자리에 있다

모세는 여기서 언약의 범위를 한 번 더 넓힙니다.

「오늘 여기에서 우리와 함께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 앞에 서 있는 사람뿐 아니라, 오늘 여기에 우리와 함께 있지 않은 사람과도 이 언약을 맺고 맹세를 하는 것이다.」신명기 29:14 · 두루새김

모세의 눈앞에는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언약은 이들의 생애와 함께 끝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음 세대에게 단순히 땅이나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기억과 말씀, 그리고 그 관계에 따르는 책임까지 전합니다.

신명기 6:20–25에서 모세는 훗날 자녀가 하나님의 명령들이 무슨 뜻인지 물으면 부모가 출애굽과 하나님의 구원을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음 세대는 과거 이야기를 듣는 관객이 아니라, 그 언약의 역사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장에서 반복되는 「오늘」이라는 말은 단순한 날짜를 가리키는 표현이 아닙니다. 조상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고, 그 관계가 아직 오지 않은 세대까지 이어지는 순간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어려운 문제가 생깁니다.

언약이 한 개인을 넘어 공동체와 세대 전체를 묶는다면, 그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 은밀하게 하나님을 버리는 일은 어떤 의미를 갖게 됩니까? 모세는 이제 공개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볼 수 없는 마음속에서 다른 길을 선택하는 사람을 상상하게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언약 안으로 건너 들어가다」라는 표현이 실제로 특정한 언약 체결 의식을 가리키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고대에는 짐승을 둘로 나누고 그 사이를 지나가면서 언약을 맺는 의식도 있었지만(예레미야 34:18–19), 신명기 29장은 그런 의식이 이 자리에서 행해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 여기에 우리와 함께 있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본문은 그 대상을 분명하게 한정하지 않습니다. 그날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동시대 사람들을 포함한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에서 어린아이들까지 언급하고, 뒤에서는 다음 세대와 자손들의 운명을 다룬다는 점을 고려하면, 앞으로 태어날 후손들까지 염두에 둔 표현으로 이해할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자라나는 독초의 뿌리

신명기 29:15–20 본문 →

가장 위험한 일은 마음에서 시작된다

모세는 백성이 이집트에서 살았고 여러 민족의 땅을 지나왔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너희는 그들이 지닌 역겨운 것들과 우상들, 곧 나무와 돌과 은과 금으로 만든 것들을 보았다.」신명기 29:16 · 두루새김

재료의 가치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나무와 돌로 만든 우상도 있고, 귀한 은과 금으로 만든 우상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차이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어떤 재료로 만들었든 그것은 이스라엘이 섬겨서는 안 될 다른 신을 나타내는 물건입니다.

신명기 4:28에서도 모세는 사람이 만든 신들이 보지도 듣지도 먹지도 냄새 맡지도 못한다고 경고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고 광야에서 먹이신 분입니다. 반면 다른 민족들의 우상은 사람이 재료를 선택하고 손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우상 자체보다 그것을 향해 움직이는 사람의 마음을 더욱 걱정합니다.

「너희 가운데 남자든 여자든 집안이든 지파든, 오늘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에게서 마음을 돌려 그 민족들의 신들을 섬기러 가는 일이 없게 하여라. 너희 가운데 독초와 쓴쑥을 맺는 뿌리가 없게 하여라.」신명기 29:17 · 두루새김

모세는 행동이 시작되는 지점, 곧 여호와야훼에게서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섬기러 가는 일을 문제 삼습니다. 겉으로는 여호와야훼 앞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백성과 함께 언약의 말씀을 듣고, 그 언약 안에 속한 사람처럼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몸은 언약의 자리에 서 있지만, 마음은 이미 그 자리를 떠나 있을 수 있습니다.

뿌리는 땅속에 있어서 겉으로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뿌리가 자라면 언젠가 그 성질에 맞는 것이 땅 위에 나타납니다. 모세가 우상숭배를 「뿌리」에 비유한 것은 그 일이 은밀하게 시작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해로운 결과를 낳는다는 특징을 드러냅니다.

스스로에게 복을 선언하는 사람

그런데 다음 절에서 모세는 더욱 뜻밖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런 사람이 이 저주를 담은 맹세의 말을 듣고도, 『내 고집대로 살아도 나는 평안할 것이다』 하며 마음속으로 자기에게 복을 빈다면, 물이 넉넉한 땅과 메마른 땅을 함께 쓸어 버리는 것처럼 파멸이 닥칠 것이다.」신명기 29:18 · 두루새김

앞선 28장에서 복은 여호와야훼께서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관계에 충실하게 살아갈 때 누릴 언약의 복이었습니다.

그런데 29장의 이 사람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스스로에게 복을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되는 길을 걸으면서도 자신이 평안하리라고 확신합니다. 문제는 그가 평안을 바라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저버리면서도 그 관계가 주는 안전은 계속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만은 무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모세는 도리어 쓸어 버리는 재앙을 말합니다.

마음속에서 스스로 만들어 낸 축복은 하나님의 언약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공동체에 속했다고 해서 저주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19절에서는 여호와야훼의 반응이 매우 강한 언어로 그려집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그를 용서하려 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때 여호와야훼의 분노와 질투가 그 사람을 향해 연기를 뿜듯 타오를 것이다.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모든 저주가 그에게 내려앉고, 여호와야훼께서 그의 이름을 하늘 아래에서 지워 버리실 것이다.」신명기 29:19 · 두루새김

이 구절은 하나님이 회개하는 죄인을 결코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일반적인 원칙을 세우려는 말이 아닙니다. 바로 앞에서 그려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고집스럽게 다른 길을 걸으며, 자신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는 사람입니다. 뒤의 신명기 30:1–10에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백성에게 회복의 길이 제시된다는 점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여기서 여호와야훼의 「질투」는 단순한 감정적 경쟁심이 아닙니다. 자신이 먼저 세우신 언약 관계를 다른 신을 섬기는 행위가 깨뜨리는 데 대한 반응입니다. 출애굽기 34:14에서도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백성이 다른 신에게 절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자신의 질투와 연결하십니다.

20절에서는 언약을 배반한 사람을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가운데서 따로 가려 내어 재앙을 당하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9–10절에서 모두가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기 위해 함께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언약을 저버린 사람이 그 공동체에서 따로 가려질 것이라는 경고가 주어집니다.

이스라엘에 속했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신분이 언약의 모든 책임에서 그를 면제해 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이스라엘의 각 구성원이 서로의 숨겨진 마음을 모두 알아내고 심판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세는 뒤에서 오히려 인간이 알 수 없는 영역과 하나님께 속한 영역을 구별합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나 한 집안의 은밀한 마음을 이야기하던 모세가, 이제 온 땅이 황폐해진 미래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쓴쑥은 성경에서 쓴맛과 고통을 나타내는 이미지로 사용됩니다. 예레미야 9:15에서도 여호와야훼의 심판을 설명하면서 백성에게 쓴쑥을 먹이겠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18절의 히브리어는 「물이 넉넉한 것」과 「목마른 것」에 해당하는 두 표현을 사용하지만, 각각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처럼 물이 충분한 땅과 메마른 땅을 가리킨다는 해석도 있고, 서로 다른 상태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라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함께 멸망한다거나, 특정한 죄인이 다른 사람들까지 반드시 파멸시킨다는 한 가지 의미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모든 민족이 바라보게 될 황폐한 땅

신명기 29:21–27 본문 →

미래의 사람들이 무엇을 보게 되는가?

모세는 갑자기 시점을 먼 미래로 옮깁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다음 세대와 먼 나라에서 온 외국인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땅을 보면서 그곳에 닥친 재앙을 목격합니다.

처음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집트에서 여호와야훼께서 하신 일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다음 세대와 외국인들이 이스라엘의 땅에서 여호와야훼께서 하신 일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미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보게 됩니다.

「온 땅은 유황과 소금으로 뒤덮인 불탄 터가 되어, 씨를 뿌릴 수도 없고 싹이 나지도 않으며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야훼께서 분노하시고 몹시 노하셔서 뒤엎으신 소돔과 고모라, 아드마와 츠보임처럼 될 것이다.」신명기 29:22 · 두루새김

이 표현은 28장에서 약속의 땅에 주어지는 복과 뚜렷하게 대조됩니다. 이스라엘이 들어갈 땅은 본래 그들이 먹고살 수 있는 곳이어야 했습니다.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고, 짐승을 기르고, 자녀들을 키울 수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모든 가능성이 사라졌습니다.

이스라엘이 땅을 받은 목적은 그 땅을 소유했다는 사실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며 그분이 주시는 복을 누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될 때, 땅을 소유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삶을 지켜 주지 못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성읍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의 땅도 그와 같은 모습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사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을 특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폐허 앞에서 민족들이 던지는 질문

23절에서 모세는 미래의 사람들이 할 말을 미리 들려줍니다.

「모든 민족이 이렇게 물을 것이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왜 이 땅을 이렇게 하셨을까? 무엇 때문에 이토록 크게 노하셨을까?』」신명기 29:23 · 두루새김

이 질문은 단순히 무슨 재난이 일어났는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왜 여호와야훼께서 그렇게 하셨는지를 묻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이 땅의 사람들이 자기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언약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실 때 맺으신 언약이다.』」신명기 29:24 · 두루새김

여기서 심판의 이유는 단순히 몇 가지 종교적 규정을 어겼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들을 구원하시고 자신과의 관계 안에 세우신 하나님을 저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고 그 앞에 엎드렸다. 자기들이 알지도 못했고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에게 몫으로 나누어 주시지도 않은 신들이었다.』」신명기 29:25 · 두루새김

「자기들이 알지도 못했고」라는 말은 다른 신들의 이름이나 존재를 전혀 들어 본 적이 없었다는 뜻으로 한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앞서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여러 민족의 땅에서 그들의 우상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신들이 여호와야훼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 관계에 속한 대상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본문은 미래에 이스라엘의 땅이 황폐해지는 상황을 언약의 배반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구절을 근거로 오늘날 발생하는 모든 가뭄, 질병, 전쟁, 자연재해를 특정한 사람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본래 하나님께서 하신 구원의 일을 다른 민족들에게 드러낼 수 있는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언약을 버린다면, 다른 민족들은 그들의 황폐한 땅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땅에서 뽑혀 다른 땅으로 던져지다

모세가 보여 주는 마지막 재앙은 땅의 황폐함만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께서 크게 분노하시고 불같이 노하셔서 그들을 자기 땅에서 뽑아내어 다른 땅으로 던져 버리셨다. 그래서 오늘처럼 되었다.』」신명기 29:27 · 두루새김

처음에는 이집트에서 나오는 일이 구원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른 땅으로 내던져지는 일은 심판의 결과가 됩니다.

이 장에서 땅은 단순히 소유하고 관리하는 재산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주어진 삶의 터전입니다. 그래서 땅에서 뽑혀 나가는 일은 단순한 영토 상실을 넘어, 하나님이 주신 삶의 질서가 무너지는 사건이 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미래를 무조건적인 파멸로 확정하는 선언과는 구별해야 합니다. 29장은 언약을 저버렸을 때 일어날 재앙을 극적으로 보여 주며, 뒤의 30장은 그러한 재앙을 경험한 뒤에도 하나님께 돌아오는 길을 이야기합니다.

이처럼 엄중한 미래의 모습을 보여 준 뒤, 모세는 예상 밖의 문장으로 장을 마무리합니다.

조금 더 깊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창세기 1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드마와 츠보임 역시 창세기 14:2, 8에서 소돔과 고모라와 함께 언급되는 성읍들입니다. 호세아 11:8에서도 아드마와 츠보임은 심판과 멸망을 떠올리게 하는 지명으로 사용됩니다.

숨겨진 일들과 드러난 일들

신명기 29:28 본문 →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이미 들은 말씀은 있다

「숨겨진 일들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께 속한다. 그러나 드러난 일들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한다. 우리가 이 가르침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려는 것이다.」신명기 29:28 · 두루새김

「숨겨진 일들」에는 적어도 두 가지 해석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의 내면에 숨겨진 죄와 배반을 가리킨다는 이해입니다. 바로 앞에서 은밀한 마음의 이탈을 경고했다는 점이 근거가 됩니다. 이 경우 모세는 공동체가 알 수 없는 내면의 문제는 여호와야훼께 맡기고, 자신들에게 드러난 말씀에 책임을 다하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아직 밝히지 않으신 미래의 일과 그분의 뜻을 가리킨다는 이해입니다. 앞 단락에서 먼 미래의 심판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세부적인 과정은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두 해석은 서로 배타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본문이 「숨겨진 일들」의 범위를 명확하게 지정하지 않으므로, 어느 하나만이 유일한 의미라고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반면 「드러난 일들」이 무엇을 위해 주어졌는지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핵심은 단순히 인간이 무엇을 알 수 있고 무엇을 알 수 없는지를 분류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마지막의 「지켜 행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목적 표현이 전체 문장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려 주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 주신 말씀에 응답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모세는 이제 자신도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인 것처럼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으로 백성 위에 서서 말하지 않습니다. 그 역시 하나님께 속한 영역과 인간에게 맡겨진 영역의 구별 안에서 말합니다.

지도자와 백성,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과 다음 세대가 모두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끝맺으며 — 아직 보이지 않는 사람들까지

신명기 29:1–28 본문 →

모세는 그들 모두에게 모든 미래의 비밀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전합니다. 언약은 모든 것을 아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모압 평야에 이스라엘 백성이 서 있습니다.

그 자리에는 우두머리와 장로가 있고, 어린아이와 아내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진영에 함께 사는 외국인도 있고,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여호와야훼 앞에 서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아직 그 자리에 있지 않은 사람들까지 언약의 말씀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먼 훗날 태어날 자손들이며, 오늘 모세의 말을 직접 듣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아직 요단강을 건너지 않은 백성은 이제 선택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들이 밟고 있는 땅 너머에는 약속의 땅이 있습니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미래에는 다음 세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숨겨진 일들은 여전히 여호와야훼께 속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그들은 이미 들었습니다.

「우리가 이 가르침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모세는 백성을 미래의 비밀 앞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세워 놓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