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풀어 읽기 · 7장

이 장의 자리 · 7–11장 · 지혜가 닿지 못하는 곳

죽음 앞의 지혜와 지혜의 한계

장례식장에 들어간 사람은 평소와 다른 질문을 하게 됩니다. 얼마를 벌었는지, 누구보다 앞섰는지, 무엇을 더 얻어야 하는지보다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가 중요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죽음은 새로운 지식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누구나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에서 죽음을 마주하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옵니다.

전도서 7장은 이 차이에서 시작합니다.

「좋은 이름은 좋은 향유보다 낫고, 죽는 날은 태어나는 날보다 낫습니다.」 태어나는 날보다 죽는 날이 낫다니, 코헬렛은 삶보다 죽음을 더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것일까요?

그러나 이어지는 구절들을 보면 그의 관심은 죽음 자체를 찬양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장례식장을 찾은 살아 있는 사람이 무엇을 깨닫는지 이야기합니다.

이 장에는 「낫다」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좋은 이름이 좋은 향유보다 낫고, 사람이 죽어 슬퍼하는 집이 잔칫집보다 나으며, 지혜로운 사람의 꾸지람이 어리석은 사람들의 노래보다 낫습니다. 참을성 있는 사람은 거만한 사람보다 낫고, 지혜는 성을 다스리는 사람 열 명보다 더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코헬렛은 삶에서 무엇이 더 나은지 계속 가려 봅니다.

그런데 장의 후반부에 이르면 뜻밖에도 자신이 지혜를 찾으려 했지만 지혜가 여전히 멀리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무엇이 더 나은지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면서도, 모든 것을 밝혀낼 만큼 지혜롭지는 못하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7장은 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과 인간의 지혜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함께 가르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사람을 올바르게 만드셨으나 사람들이 여러 가지 꾀를 찾아냈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죽음 앞에서 인간의 삶을 바라보았던 시선이, 마지막에는 인간이 왜 그토록 복잡하게 살아가게 되었는지 묻는 자리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읽는 시간 35분소단락 107장 본문 읽기 →

좋은 이름은 좋은 향유보다 낫다 — 초상집에서 배우는 삶

전도서 7:1–4 본문 →

좋은 이름은 좋은 향유보다 낫고, 죽는 날은 태어나는 날보다 낫습니다.전도서 7:1 · 두루새김

좋은 향유는 당시 값진 향기 나는 기름을 떠올리게 합니다. 향유는 몸을 가꾸거나 손님을 정성껏 맞이하고, 특별한 기쁨을 표현하는 데 쓰일 수 있었습니다. 좋은 향유가 사람의 몸에서 향기를 내듯, 좋은 이름은 한 사람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이 기억하는 평판과 인격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향유의 향기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집니다. 아무리 값비싼 향유라도 계속 같은 향기를 낼 수는 없습니다. 반면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관한 기억은 그 사람이 떠난 뒤에도 남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문장에서 죽는 날이 태어나는 날보다 낫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 번째 문장과 연결하여 생각하면, 출생과 죽음은 한 사람의 생애를 서로 다른 방향에서 보여 줍니다.

태어나는 날에는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갈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앞으로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사람이 될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죽는 날에는 적어도 그가 살아온 생애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죽는 날이 낫다는 말은 죽음 자체가 출생보다 즐겁거나 선하다는 뜻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평가하고 그 의미를 돌아볼 수 있는 자리라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다만 본문이 이러한 이유를 직접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첫 문장의 좋은 이름과 연결하여 읽을 때 가능한 해석입니다.

코헬렛이 곧바로 제시하는 이유는 조금 다릅니다.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사람이 죽어 슬퍼하는 집에 가는 것이 낫습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의 끝이니, 살아 있는 사람은 그것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전도서 7:2 · 두루새김

여기서 코헬렛은 죽은 사람보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집중합니다.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어떤 사실을 마음에 둔다는 의미입니다. 단순히 정보를 기억하는 것을 넘어, 그것이 자기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는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잊은 듯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일 할 일과 다음 달의 계획, 앞으로 얻어야 할 것을 생각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이 끝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뒤로 미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어 슬퍼하는 집에 들어가면 그 사실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죽음이 다른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도 찾아올 현실임을 마주합니다. 코헬렛은 바로 이 경험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 지혜를 줄 수 있다고 봅니다.

잔칫집에서는 오늘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도 인간의 삶에서 좋은 일입니다. 코헬렛은 다른 곳에서 먹고 마시며 기뻐하는 일을 긍정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어 슬퍼하는 집이 낫다는 말은 잔치와 기쁨을 금지하는 명령이 아닙니다. 죽음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 삶을 더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3절은 이러한 생각을 인간의 감정으로 넓힙니다.

슬픔은 웃음보다 낫습니다. 얼굴에 슬픔이 깃들 때 마음은 더 나아지기 때문입니다.전도서 7:3 · 두루새김

코헬렛이 말하는 것은 슬픔을 느끼는 일 자체가 언제나 좋은 일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슬픔을 통해 마음이 무엇인가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웃고 즐기는 동안 자신이 놓치고 있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괴로운 일을 경험하면 평소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들의 중요성을 깨닫기도 합니다. 한 사람을 잃은 뒤에야 함께했던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거나, 삶이 흔들린 뒤에야 자신이 무엇에 지나치게 의지하고 있었는지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슬픔이 자동으로 사람을 지혜롭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슬픔은 사람에게 깊은 상처만 남길 수도 있습니다. 본문도 슬픔을 겪으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온다는 보편적인 약속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슬픔이 언제나 웃음보다 못한 경험은 아니며, 때로는 웃음이 가르쳐 주지 못하는 것을 깨닫게 한다는 것입니다.

4절은 이 차이를 마음의 방향으로 표현합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의 마음은 사람이 죽어 슬퍼하는 집에 있고, 어리석은 사람들의 마음은 즐기는 집에 있습니다.전도서 7:4 · 두루새김

여기서 코헬렛은 지혜로운 사람이 항상 장례식장에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삶에 끝이 있다는 사실을 피하지 않습니다. 반면 어리석은 사람은 기쁨과 즐거움만을 찾다가 삶의 중요한 현실을 외면할 수 있습니다.

코헬렛이 죽음을 바라보라고 하는 까닭은 삶을 가볍게 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날들의 무게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삶을 진지하게 바라본다는 것은 죽음을 생각하는 일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알려 주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1절의 첫 문장에는 히브리어의 말놀이가 담겨 있습니다. 「이름」과 「향유」에 해당하는 기름은 소리가 비슷한 두 단어이고, 코헬렛은 이 비슷한 소리를 이용해 전혀 다른 두 가지 가치를 대비합니다. 잠언 22:1도 많은 재물보다 좋은 이름을 선택하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3절의 「슬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괴로움이나 분노, 마음의 불쾌한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원문에서는 9절에도 같은 단어가 등장하지만, 그곳에서는 성급하게 화내는 태도가 문맥의 중심입니다. 반면 3절은 사람이 죽어 슬퍼하는 집의 장면 안에 있으므로 괴로움이나 슬픔의 의미가 자연스럽습니다. 4절의 장면은 시편 90:12와 연결됩니다. 그 시편은 하나님께 자신의 날들을 셀 줄 알도록 가르쳐 달라고 기도하고, 그 결과 지혜로운 마음을 얻기 원합니다. 자신의 날들을 센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생애가 제한되어 있음을 알고 그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는 일입니다.

귀에 즐거운 노래보다 불편한 꾸지람

전도서 7:5–7 본문 →

어리석은 사람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지혜로운 사람의 꾸지람을 듣는 것이 낫습니다.전도서 7:5 · 두루새김

잔칫집에서 사람은 즐거운 노래를 듣습니다.

노래는 분위기를 밝게 만들고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코헬렛은 모든 노래가 지혜로운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가 대비하는 것은 음악과 꾸지람 자체가 아닙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꾸지람은 듣기 불편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이나 부족함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꾸지람을 통해 실제로 행동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 순간적으로 기분을 좋게 해 주는 노래보다 더 유익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누군가를 심하게 비난하거나 상처 주는 말은 모두 지혜롭다는 뜻은 아닙니다. 전도서가 더 낫다고 하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의 꾸지람」입니다. 꾸지람이 주는 불편함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지혜와 바로잡음의 가능성이 중요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웃음은 솥 아래에서 가시나무가 타며 내는 소리와 같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덧없습니다.전도서 7:6 · 두루새김

가시나무를 불에 넣으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타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불길은 금방 사그라들기 쉽습니다. 소리는 크지만 오래 지속되는 열기를 제공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크고 화려하게 들리지만 오래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 웃음이 반드시 악의적인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지혜롭게 하거나 삶의 중요한 문제를 바로잡아 주는 힘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좋은 꾸지람을 들으면 충분할까요? 코헬렛은 곧바로 지혜로운 사람 자신도 쉽게 무너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힘으로 사람을 억누르는 일은 지혜로운 사람도 어리석게 만들고, 뇌물은 마음을 망가뜨립니다.전도서 7:7 · 두루새김

지혜로운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좋은 꾸지람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도 힘으로 사람을 억누르는 일과 뇌물 앞에서 지혜를 잃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힘으로 사람을 억누르는 일」은 지혜로운 사람이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거나 힘으로 누르는 일을 가리킬 수도 있고, 지혜로운 사람이 그런 일을 겪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 읽기에서는 지혜로운 사람도 불의한 이익을 추구하면 판단력이 무너질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두 번째 읽기에서는 심하게 억눌리는 일을 경험하면서 지혜로운 사람도 혼란과 분노에 휩싸일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히브리어 문장은 이 방향을 완전히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뒤따르는 뇌물의 모습은 불의한 이익이 인간의 마음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문제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뇌물은 판단해야 할 사람이 공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고 있더라도 자신의 이익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는 단순히 올바른 말을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로 보장되지 않습니다. 삶의 실제 조건과 자신의 욕망 앞에서 그 지혜를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코헬렛은 여기서 지혜로운 사람을 완전한 사람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그 역시 흔들릴 수 있고, 그 역시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제 관심은 지혜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또 다른 성품으로 옮겨 갑니다.

참을성입니다.

조금 더 깊이

잠언 27:5–6에서도 숨겨진 사랑보다 드러난 꾸지람이 낫고, 사랑하는 사람의 상처가 신실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6절에는 히브리어 특유의 말놀이도 있습니다. 「가시나무」와 「솥」은 서로 비슷한 소리의 단어여서, 가시나무가 솥 아래서 타닥거리는 장면을 더욱 생생하게 만듭니다.

끝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과거에 매달리지 않는다

전도서 7:8–12 본문 →

일의 끝은 시작보다 낫고, 참을성 있는 사람은 거만한 사람보다 낫습니다.전도서 7:8 · 두루새김

이 구절의 두 문장은 서로를 설명합니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사람은 기대를 품습니다. 계획을 세우고, 원하는 결과를 상상하며, 그 일이 잘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시작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일이 좋은 결과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과정에는 어려움과 지연,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코헬렛은 시작보다 끝이 낫다고 말합니다. 코헬렛이 관심을 두는 것은 시작할 때의 기대만으로 일의 전체 가치를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결과가 드러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 시간을 기다리기 어려워합니다. 그래서 두 번째 문장에서는 참을성 있는 사람이 거만한 사람보다 낫다고 합니다.

「참을성 있는 사람」은 히브리어로 글자 그대로 영이 길다는 뜻을 가진 표현입니다. 마음의 여유가 있고 쉽게 조급해하지 않는 상태, 곧 참을성을 나타냅니다. 반대로 「거만한 사람」에는 영이 높다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두 사람은 시간을 대하는 태도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참을성 있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즉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반면 거만한 사람은 일이 자기 뜻대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보면 참을성은 단순히 오래 견디는 능력만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자기 뜻과 속도에 맞추려 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성급하게 화내지 마라. 분노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품에 머물기 때문이다.전도서 7:9 · 두루새김

코헬렛은 단순히 화를 한 번 내는 행동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분노가 사람의 품에 자리를 잡고 머무는 모습을 그립니다. 어떤 일에 분노를 느끼는 것과 그 분노를 계속 품고 살아가는 것은 다릅니다.

앞서 7절에서는 힘으로 사람을 억누르는 일과 뇌물이 지혜로운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불의한 일을 보면 분노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모든 분노가 언제나 어리석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불의를 고발하며 분노와 탄식을 표현했고, 하나님 자신도 악에 대해 진노하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코헬렛이 경계하는 것은 「성급하게」 화내는 태도입니다. 충분히 살피지도 않고 즉각적으로 반응하거나, 분노를 마음속에 계속 붙잡아 두면서 그것이 자신의 판단을 지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코헬렛은 분노와 연결하여 뜻밖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왜 옛날이 지금보다 더 좋았을까?」 하고 말하지 마라. 그런 질문은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전도서 7:10 · 두루새김

앞에서는 현재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성급하게 화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제는 현재를 과거와 비교하며 불평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질문이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닌 까닭은 옛날이 언제나 지금보다 좋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과거의 어떤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의 모든 조건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비교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현재의 어려움 때문에 과거를 돌아보면, 그때의 좋은 부분은 크게 보이고 어려웠던 부분은 흐릿해질 수 있습니다.

코헬렛은 과거에 실제로 더 좋은 점이 있었을 가능성까지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가 경계하는 것은 과거가 더 좋았다는 판단을 충분히 살피지 않고 확신하는 태도입니다. 현재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곧바로 분노하거나, 지금의 상황을 견디기 어렵다는 이유로 과거를 좋게만 생각하는 것은 지혜로운 태도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참을성과 지혜를 지닌 사람이 실제로 얻는 유익은 무엇일까요?

지혜는 물려받은 재산과 함께 있으면 좋고, 해를 보며 사는 사람들에게 이익이 됩니다. 지혜도 돈도 그늘이 되어 사람을 지켜 줍니다. 그러나 지혜는 그것을 지닌 사람을 살립니다. 이것이 지식이 주는 이익입니다.전도서 7:11–12 · 두루새김

여기서 코헬렛은 지혜와 재산을 서로 맞서는 것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물려받은 재산이 있고 지혜도 있다면 그 둘은 함께 유익할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11절을 지혜가 「물려받은 재산과 함께 있으면 좋고」라고 옮겼습니다. 지혜가 물려받은 재산처럼 가치 있다는 비교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함께」에 해당하는 전치사(⁨עִם⁩)는 문맥에 따라 이러한 의미 차이를 허용합니다.

12절은 두 가지를 그늘에 비유합니다.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그늘은 사람을 보호합니다. 돈도 사람에게 실제적인 보호가 될 수 있습니다. 먹을 것과 살 곳을 마련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선택할 여지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코헬렛은 돈과 지혜가 완전히 같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혜에는 그것을 지닌 사람을 살리는 유익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살립니다」는 말은 지혜로운 사람이 죽음을 피하거나 영원히 산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판단을 통해 위험을 피하고 삶을 지킬 수 있다는 일반적인 유익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혜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은 지혜를 통해 더 잘 판단하고 위험을 피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자기 뜻대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은 잠언 4:5–9에서 지혜를 얻고 굳게 붙들라고 권하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전도서는 지혜의 모든 가치를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지혜가 실제로 유익하다는 사실을 붙잡습니다.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곧게 할 수 있는가

전도서 7:13–14 본문 →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살펴보아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곧게 할 수 있겠느냐?전도서 7:13 · 두루새김

먼저 코헬렛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살펴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일을 바라보면 사람이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서 「굽게 하신 것」은 인간의 판단과 능력으로 바꾸기 어려운 현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굽게 하셨다는 말을 모든 도덕적 악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으며, 따라서 불의를 바로잡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코헬렛은 이미 같은 책에서 재판의 자리에 악이 있다고 고발했습니다(3:16).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살피라는 권고를 사회의 불의를 그대로 내버려 두라는 명령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삶에서 무엇인가를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처한 모든 조건과 사건의 결과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좋은 날에는 좋은 것을 누려라. 불행한 날에는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께서 좋은 날과 불행한 날을 모두 만드셨다. 사람이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알아내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전도서 7:14 · 두루새김

여기서 코헬렛은 좋은 날과 불행한 날을 나란히 놓습니다. 그런데 두 날에 대한 권고는 서로 다릅니다.

좋은 날을 맞았을 때는 그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미래에 불행한 날이 올지 모른다는 이유로 현재의 좋은 것까지 모두 거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반대로 불행한 날을 맞았을 때는 그 현실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생각해 보아라」라는 말은 반드시 그날의 고통에 숨은 특별한 목적을 찾아내라는 명령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인간의 한계를 돌아보라는 권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좋은 일이 생긴 사람은 앞으로도 계속 좋은 일만 겪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지금 어려움을 겪는 사람도 자신의 미래가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이어진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시간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은 인간이 그 시간의 의미를 모두 이해하거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면 앞으로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약속과 다릅니다. 또한 나쁜 일이 생겼을 때 그 이유를 반드시 알아내야 한다는 부담을 주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에서 그는 이러한 불확실성이 단순히 날씨나 재산의 변화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의로운 사람과 악한 사람에게도 기대와 다른 결과가 나타납니다.

의로운 사람이 죽고 악한 사람이 오래 산다면

전도서 7:15–18 본문 →

나는 덧없는 삶을 사는 동안 이런 일을 모두 보았습니다. 의롭게 살면서도 죽는 의로운 사람이 있고, 악하게 살면서도 오래 사는 악한 사람이 있습니다.전도서 7:15 · 두루새김

코헬렛은 세상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 가운데 하나를 말합니다.

그는 이것을 소문이나 가정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관찰한 현실을 이야기합니다.

이 장면은 전통적인 지혜의 가르침과 긴장을 이룹니다. 잠언 10:27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사람의 날들을 더하게 하지만 악한 사람들의 해는 짧아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코헬렛은 그 원리가 모든 개인의 생애에서 예외 없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의롭게 살았다고 해서 반드시 오래 사는 것은 아닙니다.

악하게 살았다고 해서 반드시 일찍 죽는 것도 아닙니다.

두루새김의 「의롭게 살면서도 죽는」과 「악하게 살면서도 오래 사는」이라는 번역은 두 사람의 삶과 결과가 어긋나는 역설에 초점을 맞춥니다. 히브리어의 「그의 의로움 안에서」와 「그의 악함 안에서」라는 표현은 의로운 사람이 의로움 때문에 죽거나, 악한 사람이 악함 때문에 오래 산다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읽힐 여지도 있습니다. 코헬렛이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은 삶의 도덕적 성격과 수명 사이에 단순한 대응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어서 하는 말은 더욱 당혹스럽습니다.

지나치게 의롭게 살지 말고, 너무 지혜로워지려 하지 마라. 어찌하여 스스로를 망치겠느냐?전도서 7:16 · 두루새김

성경이 지나치게 의롭게 살지 말라고 한다면, 적당히 의롭게 살고 어느 정도는 악하게 행동해도 된다는 뜻일까요? 문제는 이 경고가 정확히 무엇을 겨냥하는가입니다.

한 가지 읽기는 지나치게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태도와 지혜에 대한 과신을 경계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 죽고 악한 사람이 오래 사는 현실을 보여 주었으므로 이러한 읽기는 문맥상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지 마라」가 아니라 실제로 「지나치게 의롭게 살지 말고」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읽기는 코헬렛이 현실의 불확실성 속에서 인간에게 가능한 지혜로운 행동의 정도를 이야기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의로움을 지나치게 밀어붙이다가 자신을 망치는 상황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읽기를 택하더라도 코헬렛이 옳은 일을 포기하고 불의에 타협하라고 권고한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바로 다음 구절을 함께 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나치게 악하게 행동하지 말고,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마라. 어찌하여 네 때가 되기도 전에 죽겠느냐?전도서 7:17 · 두루새김

그렇다면 코헬렛은 의로움과 악함의 중간 정도가 가장 좋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읽으면 악함을 어느 정도 허용한다는 뜻이 되지만, 본문은 악하게 행동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리석음과 악행이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고 때 이른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다만 16–17절이 완전히 매끄러운 하나의 교훈으로 정리되는 것은 아닙니다. 코헬렛이 실제로 역설적인 권고를 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문장을 지나치게 안전한 일반 교훈으로 바꾸면 본문이 독자에게 던지는 불편한 질문을 잃게 됩니다.

의롭게 사는 것이 언제나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 세상에서, 사람은 어떻게 의롭게 살아야 합니까?

이 경고를 붙잡는 것이 좋다. 저 경고에서도 손을 놓지 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양쪽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전도서 7:18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이것」과 「저것」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논의의 여지가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앞의 두 경고를 모두 붙잡으라는 읽기를 따라 「이 경고」와 「저 경고」로 옮기고, 마지막을 모든 극단을 피한다는 읽기를 따라 「양쪽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로 옮겼습니다. 원문의 표현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앞서 제시된 여러 요구를 함께 감당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마지막 동사는 글자 그대로 「그 모든 것에서 나온다」(⁨יָצָא⁩)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장의 중심에 있는 기준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살아도 기대와 다른 결과를 맞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악하게 살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혜롭게 판단해도 모든 결과를 예측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어리석음을 선택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의로움이 언제나 보상받는다는 확신으로 하나님을 대신하지도 않고, 보상이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의로움을 버리지도 않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이 구절들의 가능한 해석을 종합한 이해이지, 모든 문법적 어려움이 해결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15절의 관찰은 욥기의 중심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욥의 친구들은 고난의 원인을 욥의 잘못에서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욥기는 의로운 사람이 고통받는 현실을 그렇게 쉽게 설명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16절에서 「지나치게」로 옮긴 히브리어는 많이 또는 지나치게라는 정도를 나타내고, 「너무 지혜로워지려 하지 마라」에서는 자신을 지혜롭게 만들거나 지혜로운 사람으로 행동하려는 태도가 표현됩니다. 이 문장을 오직 위선적인 의로움만을 겨냥한 말씀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본문에 설명을 보충하는 해석입니다.

성을 다스리는 사람 열 명보다 강한 지혜도 자기 죄 앞에서는 겸손해야 한다

전도서 7:19–22 본문 →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지혜가 성을 다스리는 사람 열 명보다 더 큰 힘이 됩니다.전도서 7:19 · 두루새김

코헬렛은 지혜의 한계를 이야기했지만 지혜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성을 다스리는 사람은 정치와 행정에서 권한을 가진 사람입니다. 여러 사람이 힘을 모으면 상당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코헬렛은 지혜가 그보다 더 강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지혜는 어려운 상황을 분별하고, 위험을 피하며, 올바른 판단을 내리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코헬렛은 지혜로운 사람에게도 피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좋은 일만 하고 죄는 전혀 짓지 않는 의로운 사람은 땅 위에 없기 때문입니다.전도서 7:20 · 두루새김

지혜는 인간에게 유익을 주지만 인간을 흠 없는 존재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코헬렛은 모든 인간의 행동이 똑같이 악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의로운 사람과 악한 사람의 차이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의로움과 지혜를 완전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마음을 두지 마라. 그러면 네 종이 너를 욕하는 소리까지 듣지는 않을 것이다.전도서 7:21 · 두루새김

당시의 사회 구조에서 종은 주인보다 약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주인은 자신의 지위와 권한 때문에 종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전혀 듣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앞에서 그는 지혜로운 사람의 꾸지람을 듣는 것이 어리석은 사람들의 노래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모든 말에 지나치게 반응하고,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말을 하나하나 확인하려는 태도를 경계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 대해 한 말을 모두 알고 싶어 한다면, 언젠가는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말도 듣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코헬렛은 이 권고를 단순히 마음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너 자신도 다른 사람들을 여러 번 욕했다는 것을 네 마음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전도서 7:22 · 두루새김

여기에는 뜻밖의 반전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욕했다는 사실에 화가 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 역시 다른 사람을 욕한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했던 말보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한 말을 더 크게 느끼기 쉽습니다.

이것은 앞의 20절과 연결됩니다. 땅 위에는 좋은 일만 하고 죄는 전혀 짓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에 대한 모든 부정적인 말을 들을 때마다 의로운 재판관처럼 다른 사람을 판단하려는 태도는 자신의 실제 모습과 어긋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구절을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약한 사람의 정당한 비판을 무시하는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주인의 잘못을 지적하는 종의 말이 언제나 부당하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종이 부당한 대우를 받아 주인을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판단할 수 있지만, 그 판단을 내리는 자신도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잊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자신의 탐구 전체를 돌아봅니다.

조금 더 깊이

19절의 「열 명」이라는 숫자를 특정한 성의 통치 체계를 가리키는 역사적 기록으로 확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성을 다스리는 여러 사람이 가진 힘을 크게 나타내는 비교로 읽을 수 있습니다. 20절은 열왕기상 8:46에서 솔로몬이 성전을 하나님께 바치는 기도를 드리며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고백하는 장면과도 연결됩니다. 시편 143:2에서도 시편을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지혜를 찾았지만 지혜는 멀리 있었다

전도서 7:23–25 본문 →

나는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해 보았습니다. 「지혜로워지겠다」 하고 말했지만, 지혜는 내게서 멀리 있었습니다.전도서 7:23 · 두루새김

코헬렛은 지금까지 자신의 관찰을 단순한 감상으로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비교하고 판단했습니다. 무엇이 더 나은지 살폈고, 어떤 행동이 유익한지 생각했으며, 삶에서 일어나는 모순을 이해하려 했습니다.

이것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그는 이미 지혜가 실제로 유익하다는 사실을 여러 번 인정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발견하지 못한 것은 지혜의 모든 내용이 아닙니다. 삶과 세상의 모든 문제를 완전히 이해하게 해 주는 지혜입니다.

이미 있었던 일은 멀리 있고, 깊고도 깊습니다. 누가 그것을 알아낼 수 있겠습니까?전도서 7:24 · 두루새김

「깊고도 깊습니다」라는 말에서 「깊다」가 되풀이되는 것은 지혜를 찾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강조합니다. 어떤 지식은 조금만 더 조사하면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코헬렛은 인간의 탐구가 끝내 다다르지 못하는 깊이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미 일어난 일조차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사건의 결과를 알고 있어도 그 모든 원인과 의미를 밝혀낼 수는 없습니다. 왜 의로운 사람이 일찍 죽었는지, 왜 악한 사람이 오래 살았는지, 왜 지혜로운 사람이 어리석은 선택을 했는지 모두 설명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사실을 깨닫고도 탐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나는 마음을 기울여 지혜와 일이 돌아가는 까닭을 알고 살피고 찾으려 했습니다. 또 악함이 어리석음이고, 어리석음이 미친 짓이라는 것을 알려 했습니다.전도서 7:25 · 두루새김

여기에는 여러 동사가 이어집니다. 알고, 살피고, 찾습니다. 코헬렛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더욱 진지하게 탐구합니다.

그가 찾으려는 것은 지혜뿐 아니라 「일이 돌아가는 까닭」입니다. 히브리어 헤슈본(⁨חֶשְׁבּוֹן⁩)은 계산이나 셈, 어떤 일이 돌아가는 까닭이나 설명을 찾는 활동과 관계됩니다. 사람은 여러 사실을 하나씩 모아 그 사이의 관계를 알아내려 합니다. 원문에서는 이 단어가 곧 27절에서 다시 등장하고, 29절에서도 같은 어근에서 나온 말이 쓰입니다.

그 복잡한 현실 가운데 특별히 한 가지 관계를 언급합니다. 죽음보다 더 쓰라리다고 말하는 여자와의 관계입니다.

조금 더 깊이

24절 앞에서 욥기 28장의 질문이 떠오릅니다. 그 장에서는 사람이 땅속 깊은 곳을 파고 귀한 보물을 찾아내는 능력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지혜가 어디에 있는지 묻고, 하나님만이 그 길을 아신다고 말합니다(욥기 28:20–28).

죽음보다 더 쓰라리다는 여자 — 코헬렛의 관찰을 어디까지 받아들일 것인가

전도서 7:26–28 본문 →

나는 덫과 같은 여자가 죽음보다 더 쓰라리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여자의 마음은 그물이며, 그 손은 사람을 묶는 줄입니다. 하나님께서 좋게 여기시는 사람은 그 여자에게서 벗어나지만, 죄짓는 사람은 그 여자에게 붙잡힙니다.전도서 7:26 · 두루새김

코헬렛은 한 여자를 덫에 비유하고, 그 마음을 그물에, 그 손을 사람을 묶는 줄에 비유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누군가와의 관계가 사람을 붙잡아 자유롭게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상황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여기서 몇 가지 사실을 구별해야 합니다.

첫째, 본문은 이 여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그녀가 실제로 코헬렛이 만난 특정한 사람인지, 위험한 관계를 대표하는 문학적 인물인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둘째, 이 구절을 모든 여성이 본질적으로 위험하거나 남성을 죄에 빠뜨리는 존재라는 선언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의 「그 여자」는 특정 인물이나 한 부류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셋째, 이 여자를 반드시 상징적인 「어리석음」으로만 해석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여자에 관한 부정적인 묘사는 구체적인 관계나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낸 어리석음이라는 두 방향으로 읽힙니다.

무엇보다 다음 구절이 문제를 더욱 어렵게 합니다.

코헬렛이 말했습니다. 「보아라. 내가 발견한 것은 이것이다. 까닭을 알아내려고 하나하나 맞추어 보았다.」전도서 7:27 · 두루새김

마치 계산하듯 사람과 사건을 하나씩 살펴본 것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계속 찾던 것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천 명 가운데 남자 한 명은 찾았지만, 그 모든 사람 가운데 여자는 찾지 못했다.」전도서 7:28 · 두루새김

이 문장은 26절보다 더욱 직접적인 남녀 비교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무엇을 찾았는지는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습니다. 의로운 사람을 찾았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고, 지혜로운 사람이나 자신이 찾던 까닭을 이해한 사람을 가리킨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천 명 가운데 의로운 남자 한 명이 있었고, 의로운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는 확정적인 통계나 신학적 명제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이 문장의 불편한 성격까지 없앨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코헬렛은 자신의 탐구 결과를 남자와 여자를 나누어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교에는 분명한 불균형이 있습니다. 그것을 단순히 남녀 모두 죄인이니 아무런 문제가 없는 표현이라고 정리하면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내용을 충분히 다루지 못하게 됩니다.

우선 이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발언이 아니라 코헬렛 자신의 탐구에 관한 진술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내가 발견한 것은 이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바로 앞에서는 자신이 지혜를 찾으려 했지만 지혜가 멀리 있었다고 고백했고, 28절에서도 자신의 마음이 계속 찾던 것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탐구 결과를 아무런 한계가 없는 완전한 지식으로 받아들일 근거는 본문 안에 없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코헬렛이 여성에 대해 잘못된 편견을 가졌다는 사실까지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들을 관찰했는지, 어떤 조건에서 이 비교를 했는지 구체적인 정보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의 문맥도 중요합니다. 전도서 7:28의 남녀 비교를 여성이 본질적으로 남성보다 지혜롭지 못하거나 의롭지 못하다는 일반적인 성경의 결론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이 구절은 코헬렛의 진술로서 그대로 읽되, 그가 직접 말하지 않은 자격이나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통계를 보충하지 않고, 성경의 다른 증언과 구별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그의 시선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구분을 넘어 인간 전체로 넓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26절의 이미지는 잠언에 등장하는 위험한 유혹의 여자와 비슷합니다. 잠언 7:6–27에서는 한 젊은이가 유혹하는 여자를 따라가다가 위험에 빠지고, 유혹은 처음에는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마지막에는 죽음으로 이어지는 길로 묘사됩니다. 이 점에서 26절을 사람을 파멸로 이끄는 유혹적인 관계에 관한 경고로 읽을 근거가 있습니다. 한편 잠언 9:13–18에서는 어리석음이 여자로 의인화되어 나타나므로 그러한 지혜 문학의 배경을 생각할 수 있지만, 전도서 7:26은 여자가 곧 어리석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지 않습니다. 원문에 쓰인 정관사만으로 「그 여자」의 범위가 정해지지도 않습니다. 28절과 관련하여, 창세기 1:27은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잠언 31:10–31에서는 지혜롭고 능력 있으며 신실하게 행동하는 여자가 매우 긍정적으로 묘사되고, 잠언 8장에서는 지혜 자체가 여성의 모습으로 의인화되어 사람들을 부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올바르게 만드셨지만

전도서 7:29 본문 →

「다만 보아라. 내가 알아낸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올바르게 만드셨지만, 사람들은 여러 가지 꾀를 찾아냈다.」전도서 7:29 · 두루새김

코헬렛은 마침내 자신이 알아낸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발견은 앞에서 등장했던 남녀 비교보다 훨씬 넓습니다. 여기서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אָדָם⁩)는 특정 남성 한 명만이 아니라 인간 전체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뒤의 절반에서는 원문에 「그들」이라는 복수 표현이 이어집니다. 두루새김은 이 자리를 「사람들은」으로 옮겼습니다.

인간 전체에 관한 말입니다.

먼저 그는 하나님이 사람을 올바르게 만드셨다고 합니다. 「올바르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יָשָׁר⁩)는 곧고 바르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을 올바르게 만드셨다는 말은 인간의 창조가 본래 잘못되거나 악하게 이루어졌다는 뜻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코헬렛은 인간이 그 상태에 머물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히슈보노트(⁨חִשָּׁבוֹן⁩)는 25절의 「일이 돌아가는 까닭」과 27절의 「까닭」에 해당하는 말과 같은 어근에서 나온 말입니다. 25절에서 코헬렛은 지혜와 일이 돌아가는 까닭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27절에서는 까닭을 알아내려고 하나하나 맞추어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꾀를 찾아냈다고 합니다.

코헬렛은 까닭을 찾으려 했지만 충분히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반면 인간은 수많은 꾀와 궁리를 만들어 냅니다.

원문의 말은 일반적으로 계획이나 계산, 생각해 낸 방법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올바르게 만드셨다는 선언과 대조되므로, 이 문맥에서는 그 바름에서 벗어난 인간의 복잡한 궁리와 행동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모든 계획과 기술, 지식을 얻으려는 탐구가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코헬렛 자신이 지혜를 찾는 일을 계속했고, 앞에서는 지혜가 실제로 큰 힘을 준다고 인정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만드신 올바른 길을 벗어나 여러 가지 꾀를 추구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악과 고통을 인간의 죄 하나로 설명하는 완성된 이론이 아닙니다. 전도서는 자연의 변화와 죽음, 예상할 수 없는 사건들까지 인간이 통제하지 못하는 현실로 다룹니다. 다만 여기서는 인간이 겪는 문제 가운데 인간 자신이 만들어 내는 복잡함과 비뚤어짐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조금 더 깊이

「올바르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구약에서 바른 길과 올바른 행동을 나타낼 때에도 사용됩니다. 29절의 앞부분은 창세기 1:31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고 매우 좋다고 평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 3장의 인간 이야기도 떠올리게 합니다. 창세기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자신이 보기에 좋은 것을 판단하고 선택하고, 그 결과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틈이 생깁니다. 전도서 7:29는 창세기 3장을 직접 인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두 본문을 완전히 같은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좋게 만드신 인간이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그 본래의 바름에서 벗어났다는 주제는 서로 연결됩니다.

더 나은 것을 분별하되,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삶

전도서 7:1–29 본문 →

코헬렛은 자신이 지혜를 완전히 얻지 못했다고 고백하면서도 무엇이 더 나은지 계속 분별했습니다. 지혜는 모든 답을 가졌다는 확신이 아니라, 더 나은 것을 분별하면서도 자신이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이 있음을 인정하는 능력입니다.

전도서 7장의 처음에는 사람이 죽어 슬퍼하는 집이 있었습니다.

죽음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한 사람의 생애가 끝난 자리에서 살아 있는 날들의 의미를 생각합니다.

장의 끝에는 또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하나 맞추어 보며 까닭을 찾는 코헬렛입니다. 그는 삶의 여러 사건을 살폈습니다. 의로운 사람과 악한 사람,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을 비교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것을 더해도 모든 것이 설명되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찾던 지혜는 여전히 멀리 있었고, 인간의 마음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복잡했습니다.

그런데 코헬렛은 마지막에 한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올바르게 만드셨지만, 사람들은 여러 가지 꾀를 찾아냈다.」

이것은 인간이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절망적인 선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모든 지혜와 능력을 다해 세상을 설명하려 했던 사람이,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것과 이해할 수 없는 것의 경계를 발견한 순간입니다.

그것은 지혜를 버리는 고백이 아닙니다.

인간의 지혜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아는 고백입니다.

마지막에 그가 바라보는 것은 자신이 찾아낸 수많은 꾀가 아니라, 하나님이 처음 만드신 인간의 바름과 그 길에서 벗어나 복잡한 궁리를 찾아 나선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는 그 차이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가 생겨난 모든 길을 다 밝혀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코헬렛의 탐구는 끝나지 않은 질문을 남긴 채 멈춥니다.

하나에 하나를 더해도 다 셀 수 없는 인간의 길들 앞에서.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