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4장 · 아들을 통해 하신 말씀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분

히브리서는 뜻밖의 방식으로 시작합니다. 편지의 일반적인 인사말도 없고, 독자들의 형편을 묻는 말도 없습니다. 처음 등장하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 단 하나의 동사로 말합니다.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옛날에 예언자들을 통해 「여러 번에 걸쳐 여러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고,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과거의 말씀에는 긴 역사가 필요했고, 수많은 사람이 등장했으며, 서로 다른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그 모든 다양성에 대응하는 표현이 단 하나입니다. 아들.

저자는 옛날에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신 일을 거짓이나 잘못된 것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옛날에도 말씀하신 분은 똑같은 하나님이었습니다. 달라진 것은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장은 그 아들이 누구신지를 밝히는 데 거의 전부를 사용합니다. 저자는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보다, 그 말씀을 전하시는 분이 어떤 분인지를 먼저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은 새로운 정보의 모음이 아니라, 아들이라는 한 분 안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결정적으로 드러내신 일입니다.

이 장의 설명은 두 움직임으로 이루어집니다. 1–4절은 아들이 누구신지와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짧게 선언하고, 5–14절은 구약의 말씀들을 차례로 불러 그 선언이 무엇을 뜻하는지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분으로 등장하지만, 마지막에 이르면 하나님이 누구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는지가 설명의 중심이 됩니다.

읽는 시간 29분소단락 71장 본문 읽기 →

여러 말씀에서 아들 안의 말씀으로

히브리서 1:1–2 본문 →

옛날에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 여러 번에 걸쳐 여러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을 모든 것을 물려받을 분으로 세우셨고, 아들을 통해 온 세상을 지으셨습니다.히브리서 1:1–2 · 두루새김

과거의 말씀은 폐기되지 않았다

1절의 「여러 번에 걸쳐 여러 방식으로」(πολυτρόπως)는 원문에서 「여러 부분으로」(πολυμερῶς)와 「여러 방식으로」라는 서로 짝을 이루는 두 표현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신 말씀은 한 번에 하나의 완결된 설명으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가르치셨으며, 예언자들을 통해 죄를 지적하고 회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율법과 시, 예언과 이야기, 환상과 지혜의 가르침이 모두 그 말씀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이 다양성에는 시간에 따른 흐름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나온 역사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었고, 다윗에게 주신 왕조의 약속은 왕국이 무너진 뒤에도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 계속 이어졌습니다. 각각의 말씀은 그 자리에서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었으면서도, 동시에 더 큰 역사를 향해 열려 있었습니다.

히브리서가 앞으로 구약을 사용하는 방법도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저자는 시편과 율법과 예언서를 거듭 펼쳐 보이면서, 그 말씀들이 아들 안에서 어떻게 새롭게 이해되는지를 밝힙니다. 따라서 1절과 2절은 구약과 신약이 끊어졌다고 선언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같은 하나님이 시작하신 말씀의 역사가 어디에 이르렀는지를 알리는 문장입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 안에서, 그리고 아들 안에서 말씀하셨다

두루새김이 「예언자들을 통해」와 「아들을 통해」로 옮긴 두 곳에는 원문에서 「안에서」(ἐν)라는 뜻도 지닌 같은 전치사가 쓰였습니다. 원문의 대칭을 살려 읽으면, 하나님이 예언자들 안에서 말씀하셨고 이제 아들 안에서 말씀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옮기든 두 경우 모두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점은 같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신 두 방식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예언자들은 하나님에게서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이 그분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점에서는 그 흐름 안에 등장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물려받을 분이시며,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온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예언자들이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안에서 말씀을 전했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세계를 지으시는 일에 관여하신 분입니다.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전달했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일과 모든 것을 물려받는 일에 연결된 분입니다. 따라서 차이는 단순히 마지막에 가장 뛰어난 예언자가 나타났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마지막에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하나님이 이루시는 역사에 관여하신 분입니다.

2절의 「이 마지막 때」는 세상의 마지막 날이 몇 년 남았다는 계산이 아닙니다. 구약이 기다리던 하나님의 결정적인 행동이 이제 시작되었다는 시간 이해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자기 시대를 이미 그 마지막 때에 속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만물의 상속자이면서 시대들의 창조에 관여하신 분

2절에는 시간의 역전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아들을 「모든 것을 물려받을 분」으로 세우셨다고 말합니다. 물려받는다는 것은 마침내 모든 것을 받게 될 분이라는, 미래를 향한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온 세상을 지으셨다고 말하며 시작을 향해 시선을 돌립니다.

아들의 이야기는 역사의 마지막에서 시작하여 역사의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렇게 읽으면 세상을 지으시는 일과 물려받게 하시는 일이 하나의 큰 이야기를 이룹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 세계의 역사를 시작하셨고, 그 아들에게 모든 것을 물려받게 하십니다. 저자의 초점은 예수님께서 모든 것과 맺고 계시는 독특한 관계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계 안에 등장한 수많은 인물 가운데 하나가 아니십니다. 모든 시대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관계되어 있고, 모든 것이 예수님께서 물려받으시는 것과 연결됩니다.

이 선언은 다음 절을 준비합니다. 그렇게 모든 시대와 관계된 분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온 세상」(αἰών)으로 옮긴 원어는 시간의 시대들을 가리키지만, 문맥에 따라 그 시대들에 속한 세계 전체를 포함할 수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온 세상」으로 옮겨 창조된 세계 전체를 드러냅니다. 원문에는 시간의 흐름도 담겨 있으며, 이 낱말을 시간의 창조에만 한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히브리서 11:3에서도 같은 표현이 창조와 연결됩니다. 「이 마지막 때」의 관점은 뒤에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일을 설명할 때도 드러납니다(히 9:26).

하나님의 영광에서 나오는 빛

히브리서 1:3–4 본문 →

3절은 히브리서 전체에서 예수님께서 누구신지와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가장 빽빽하게 담은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들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에서 나오는 빛이며, 하나님의 본모습을 그대로 나타내시는 분이십니다. 아들께서는 자신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모든 것을 떠받치고 계십니다. 죄를 깨끗이 씻어 내신 뒤에는 하늘 높은 곳에서 위엄이 크신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리서 1:3 · 두루새김

우주 전체에서 시작한 설명이 죄를 깨끗하게 하신 일을 지나 하나님의 오른쪽에 도달합니다.

빛과 자국이라는 두 이미지

첫 번째 이미지는 「하나님의 영광에서 나오는 빛」입니다. 그리스어 아파우가스마(ἀπαύγασμα)는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고, 반사되어 빛나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전자의 의미에서는 근원에서 나오는 빛이, 후자의 의미에서는 근원의 영광을 드러내는 빛이 강조됩니다. 어느 쪽이든 이 이미지가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아들의 영광이 하나님의 영광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 설명은 「하나님의 본모습을 그대로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그대로 나타내시는 분」(χαρακτήρ)에 해당하는 원문의 낱말은 도장이 남기는 정확한 자국을 떠올리게 합니다. 도장에 새겨진 모양이 밀랍 위에 나타나는 것처럼, 본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게 하는 형상입니다. 두루새김은 자국이라는 비유를 직접 옮기기보다, 그 비유가 드러내는 뜻을 풀어 썼습니다.

「본모습」은 이 자리에서 하나님이 실제로 어떤 분이신지, 곧 하나님의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별도로 존재하시는 또 하나의 신이라는 뜻도 아니고, 그저 하나님과 닮은 피조물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이 아들을 통해 참되게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아들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에 관해 간접적인 정보를 얻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신 바로 그 일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1절과 2절의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왜 아들 안에서 주어진 말씀이 결정적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에 관한 가장 뛰어난 설명자이시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과 존재를 드러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만물을 떠받치시는 분이 죄를 깨끗하게 하셨다

그다음 표현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모든 것을 떠받치시는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떠받치고 계십니다」에 해당하는 원어(φέρω)는 짊어지거나 운반한다는 의미도 지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조된 세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지키시는 분이면서, 모든 것이 계속 존재하도록 능력으로 붙드시는 분입니다. 앞 절에서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 온 세상을 지으셨다고 했다면, 여기서는 세상이 지어진 뒤에도 예수님께서 모든 것과 계속 관계하고 계심을 밝힙니다.

그런데 곧바로 뜻밖의 말이 나옵니다. 「죄를 깨끗이 씻어 내신 뒤에는」.

저자는 온 세상의 창조,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본모습을 드러내시는 분, 모든 것을 떠받치는 능력을 말했습니다. 그만큼 거대한 이야기를 펼친 뒤 갑자기 인간의 죄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야기의 흐름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히브리서 전체가 향하는 중심으로 들어가는 순간입니다.

세계를 창조하고 지키시는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해결하셨다는 것입니다.

「죄를 깨끗이 씻어 내신」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용서 선언보다 제사와 관련된 깨끗함의 이미지를 강하게 불러일으킵니다. 구약에서 부정한 상태를 깨끗하게 하는 일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문제와 관계되어 있었습니다. 죄가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다면, 죄를 깨끗하게 하는 일은 하나님께 나아갈 길과 연결됩니다.

히브리서는 뒤에서 제사장과 희생 제물, 피와 성소를 길게 다룹니다(9:11–14; 10:11–14). 그러나 1장에서는 죄를 해결하는 방법을 설명하기 전에, 죄를 깨끗하게 하신 분이 모든 것을 떠받치시는 아들이라고 먼저 밝힙니다. 그래서 히브리서가 설명하는 구원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을 이루신 분이 누구신지에 있습니다.

죄를 깨끗하게 하신 뒤에 앉으셨다

3절의 마지막, 「하늘 높은 곳에서 위엄이 크신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는 짧지만 결정적입니다. 「위엄(μεγαλωσύνη)이 크신 하나님」은 원문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위엄」이라고 부른 표현을 풀어 옮긴 것입니다. 오른쪽에 앉는다는 것은 고대 왕권의 이미지에서 특별한 영예와 권위를 부여받는 자리를 뜻합니다. 그런데 아들은 앉으시기 전에 무엇을 하셨습니까?

죄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0:11–12에서는 제사장들이 계속 서서 제사를 드리는 모습과, 예수님께서 단번에 죄를 위한 제사를 드리신 뒤 앉으신 모습이 뚜렷하게 대조됩니다. 그 설명을 미리 고려하면, 1:3의 앉으심에도 일을 이루셨다는 뜻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앉으셨다고 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니며, 히브리서 7:25는 예수님께서 계속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신다고 말합니다.

이제 4절은 그 결과를 천사들과의 비교로 설명합니다.

아들께서 천사들보다 뛰어난 이름을 물려받으신 만큼, 천사들보다 훨씬 높은 분이 되셨습니다.히브리서 1:4 · 두루새김

여기에는 풀어야 할 긴장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온 세상의 창조에 관여하셨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제 천사들보다 훨씬 높은 분이 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2–3절은 아들의 존재와 활동을 설명하고, 3절 끝에서 4절로 이어지는 흐름은 죄를 깨끗하게 하신 뒤 높임받으신 아들의 지위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되셨습니다」를 예수님께서 본래 천사들과 같은 종류의 존재이셨다가 나중에 더 높은 종류의 존재로 변화되셨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저자의 설명에서 중심은 아들이 이루신 일과 그에 따른 높임받음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물려받으신 「뛰어난 이름」은 무엇입니까? 다음 절이 대답합니다.

조금 더 깊이

「하나님의 영광에서 나오는 빛」의 낱말은 지혜서 7:26에서 지혜를 하나님의 영원한 빛에서 빛나는 것으로 묘사하는 표현과도 연결됩니다. 이는 히브리서의 직접 인용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지혜와 영광을 빛으로 표현하던 유대교 지혜 전통과의 문학적 연결입니다. 「본모습」으로 옮긴 낱말은 히브리서 3:14와 11:1에서는 확신이나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관련된 문맥에서 사용되므로, 세 곳을 언제나 똑같은 철학적 뜻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셨는가

히브리서 1:5–6 본문 →

아들이라는 이름의 무게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께서 어느 천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또 어느 천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될 것이다.」히브리서 1:5 · 두루새김

이 물음에는 이미 답이 정해져 있습니다. 어느 천사에게도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구약에서는 하늘의 존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르는 표현이 등장하므로(욥 1:6; 2:1), 저자가 천사에게는 아들이라는 이름이 절대로 사용된 적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어떤 지위와 약속을 주셨는가입니다.

첫 번째 인용은 시편 2:7입니다. 시편 2편은 민족들과 왕들이 여호와야훼와 그분이 세우신 왕에게 맞서는 장면을 다룹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시온에 자신의 왕을 세우시고, 그 왕에게 아들이라는 선언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본래 왕이 왕위에 오르는 일과 관계된 선언입니다. 하나님이 다윗 왕조의 왕을 자신의 통치를 대표하는 특별한 아들로 세우신다는 뜻이므로, 「오늘」을 왕이 실제로 태어난 날이라고 이해할 이유는 없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도 아들이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으셨다는 선언에 이어 이 왕권의 선언을 인용합니다. 이 구절은 후대 기독교 신학에서 아들의 영원한 출생을 설명하는 데도 사용되었지만, 시편 2편 본래의 왕권 문맥과 히브리서가 높임받으심을 설명하는 흐름을 그 신학적 발전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번째 인용은 사무엘하 7:14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짓고자 했을 때, 하나님은 오히려 다윗을 위해 왕조라는 의미의 집을 세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삼하 7:11–16). 그 약속은 직접적으로 다윗의 뒤를 이을 왕과 그의 왕조에 관계되어 있었지만, 하나님은 다윗 왕조와 특별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맺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첫 번째 인용에서는 하나님이 왕에게 아들이라고 선언하시고, 두 번째 인용에서는 하나님이 그 아버지가 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서로 다른 역사적 자리에서 주어진 두 말씀이, 히브리서에서는 높임받으신 예수님의 지위를 설명하는 하나의 증언이 됩니다. 사무엘하 7:14 뒷부분에는 왕이 잘못하면 징계하겠다는 내용도 이어지지만, 저자는 그 모든 상황을 예수님의 삶과 하나씩 대응시키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왕권의 성격을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이렇게 보면 「아들」은 단순한 가족 관계의 이름을 넘어섭니다. 창조와 영광의 관계를 지니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왕권을 대표하며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선언입니다.

맏아들 앞에서 천사들이 절한다

6절에서는 장면이 바뀝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맏아들을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천사는 그에게 절하여라.」히브리서 1:6 · 두루새김

이번에는 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언이 아니라, 천사들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맏아들」이라는 호칭은 앞에서 등장한 물려받음의 주제와 연결됩니다. 고대 사회에서 맏아들은 재산을 물려받는 일과 가족을 대표하는 지위에 관계되어 있었고, 성경도 맏아들이라는 표현을 특별히 높은 위치와 지위를 나타내는 데 사용합니다.

특히 시편 89:27에서는 하나님이 다윗 왕조의 왕을 맏아들로 삼아 땅의 왕들 가운데 가장 높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문맥을 고려하면 히브리서의 「맏아들」도 예수님께서 최초로 창조된 존재라는 의미보다 높은 지위와 물려받을 권리를 드러내는 호칭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시」는 두 가지로 읽힙니다. 그리스어 팔린(πάλιν)이 「들어오게 하실 때」에 걸리면 하나님이 맏아들을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시는 일, 곧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일을 가리키고, 인용을 잇는 말이면 저자가 앞선 인용에 이어 「또」 다른 말씀을 인용한다는 뜻이 되어 예수님께서 세상에 들어오신 일로 읽을 여지가 커집니다. 두루새김은 첫 번째 읽기를 택했지만, 본문만으로 시점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 절의 핵심은 천사들이 절하는 대상이 맏아들이신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본래 이 명령은 여호와야훼의 승리와 통치 앞에서 하늘의 존재들이 절하는 문맥에 놓여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 명령을 아들에게 적용합니다. 이것은 뛰어난 피조물에게 특별한 존경을 보이라는 말보다 훨씬 큰 주장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영광에 연결되었던 경배의 장면을 아들의 지위에 연결하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존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 그들은 아들에게 절하라는 명령을 받는 존재로 나타납니다. 이제 저자는 천사들과 아들 각각에게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를 정면으로 비교합니다.

조금 더 깊이

「다시」를 하나님이 맏아들을 다시 들어오게 하시는 일로 읽는 쪽은 히브리서 2:5에서 말하는 앞으로 올 세상이나 9:28의 다시 나타나심과 연결됩니다. 6절의 인용 문구는 신명기 32:43의 고대 그리스어 본문 전승과 가깝고, 시편 97:7에도 하늘의 존재들이 절한다는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신명기의 이 자리는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과 그리스어 본문 사이에 차이가 있어서, 전해진 본문들을 비교하고 살피는 논의가 계속되어 왔습니다. 실제로 재산을 물려주는 관습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했습니다.

섬기는 이들과 다스리는 아들

히브리서 1:7–9 본문 →

천사들에게는 바람과 불꽃의 이미지가 주어진다

천사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천사들을 바람으로 삼으시고, 자기를 섬기는 이들을 불꽃으로 삼으신다.」히브리서 1:7 · 두루새김

7절은 시편 104:4를 인용합니다. 시편 104편은 여호와야훼가 온 세계를 다스리시고 지키시는 모습을 노래합니다. 하늘과 땅, 물과 바람, 식물과 동물이 모두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고, 그 안에서 바람과 불꽃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능력과 활동의 이미지로 등장합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이 구절을 선택한 이유는 천사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천사들을 자기 뜻에 따라 사용하시며,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존재로 묘사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다음 절에 오면 문장의 주제가 바뀝니다.

아들에게는 왕좌가 주어진다

그러나 아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주님의 왕좌는 영원합니다. 주님의 나라를 다스리는 지팡이는 올바름의 지팡이입니다.」 「주님은 옳은 것을 사랑하시고 악한 것을 미워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님의 하나님께서는 주님과 함께하는 이들보다 주님께 기쁨의 기름을 더 부으셨습니다.」히브리서 1:8–9 · 두루새김

7절의 천사들은 섬기는 이들이었지만, 8절의 예수님께서는 왕좌에 앉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왕의 권세를 말할 때 권력이 얼마나 강한지를 먼저 설명하지 않습니다. 「올바름의 지팡이」를 말하고, 곧이어 옳은 것을 사랑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셨다고 말합니다. 왕은 단지 높은 지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통치를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그 왕권은 정의와 올바름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인용의 출처인 시편 45편은 본래 왕의 혼인을 노래하는 왕실의 시입니다. 시인은 왕의 아름다움과 용맹, 정의로운 통치, 그리고 혼인의 영광을 묘사합니다. 히브리서는 그 가운데 왕좌와 통치, 기름부음에 관한 부분을 선택하여 아들에게 적용합니다.

8절의 「하나님, 주님의 왕좌는」은 두 가지로 읽힙니다. 「하나님」을 직접 부르는 말로 이해하면 왕좌에 앉으신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문장이 되고, 두루새김은 이 읽기를 택했습니다. 문법적으로는 하나님이 왕좌의 근거나 주체를 나타내는 말이라는 다른 읽기도 논의되며, 그 경우에는 하나님이 왕의 권위를 떠받치는 분이라는 방향으로 이해됩니다. 어느 한 읽기가 문법적으로만 유일하게 가능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히브리서에서는 8절 전체가 「아들에 대해서는」이라는 말 아래 놓여 있고, 이어지는 10–12절과 함께 읽으면 아들의 왕권과 하나님의 영광이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8절에서 아들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읽기를 택한다면, 9절의 「하나님, 곧 주님의 하나님께서는」은 그 아들에게도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두 진술을 조화시키기 위한 별도의 철학적 설명을 붙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깊이 연결된 예수님께서, 동시에 하나님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으시는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이는 히브리서가 사용하는 두 종류의 언어를 함께 보여 줍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과 존재를 드러내시는 분이라는 언어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왕권과 사명을 받으신 분이라는 언어입니다. 그 둘을 하나로 지나치게 단순화하지 않을 때 이 본문의 풍성함이 보입니다.

「기쁨의 기름」은 왕을 세우는 기름부음의 이미지이지만, 그 통치가 옳은 것을 사랑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는 성격을 지녔다는 진술 뒤에 놓여 있습니다.

왕권의 영광과 왕권의 올바름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가 예수님을 높이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다른 존재들보다 더 강한 권력을 가지셨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그 왕은 옳은 것을 사랑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는 통치를 이루시는 분입니다. 이제 저자는 왕이 다스리는 기간이 얼마나 긴가 하는 질문을 넘어, 그 왕과 온 우주의 시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104:4의 히브리어는 하나님이 바람을 자신의 전령들로, 불꽃을 자신의 종들로 삼으신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히브리서가 따르는 그리스어 성경의 표현은 반대로 하나님이 천사들을 바람이나 영들로, 섬기는 이들을 불꽃으로 삼으신다는 방향으로 읽힙니다. 두루새김은 후자의 방향을 따르면서, 바람과 영으로 옮길 수 있는 낱말을 「바람」으로 옮겼습니다. 8절의 두 읽기와 같은 번역상의 어려움은 시편 45편의 히브리어 원문에도 존재합니다.

하늘과 땅이 낡아도 남아 계시는 분

히브리서 1:10–12 본문 →

히브리서 1장의 구약 인용들 가운데 특히 뜻밖인 대목이 10–12절입니다.

또 아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 주님은 맨 처음 땅의 기초를 놓으셨고, 하늘도 주님의 손으로 만드셨습니다.」 「그것들은 사라지겠지만 주님은 계속 계십니다. 그것들은 모두 옷처럼 낡아 갈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겉옷처럼 말아 두실 것이고, 그것들은 옷처럼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같은 분이시며, 주님의 세월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히브리서 1:10–12 · 두루새김

이 말씀의 출처는 시편 102:25–27입니다. 그런데 시편 102편의 본래 문맥은 다윗 왕에게 주어진 약속이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이 여호와야훼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한 사람의 고통과 하나님의 변함없음

시편 102편의 기도자는 극심한 고통 속에 있습니다. 자신의 날들이 사라지고, 몸이 쇠약해지며, 삶이 저물어 가는 것을 느낍니다. 그에게 시간은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시의 중간에서 시선이 바뀝니다.

기도자의 날들은 짧지만 여호와야훼는 영원히 계십니다(시 102:11–12). 고통받는 사람의 삶은 사라질 듯 위태롭지만, 여호와야훼의 통치는 인간의 세대를 넘어 계속됩니다. 바로 그 대비를 우주적인 차원으로 넓힌 것이 히브리서가 인용하는 부분입니다.

하늘과 땅조차 오래된 옷처럼 낡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그대로 계십니다.

창조된 것은 아무리 견고해 보여도 창조주와 같은 방식으로 영원하지 않다는 선언입니다. 인간에게 하늘과 땅은 가장 광대하고 움직일 수 없는 현실처럼 보이지만, 창조주 앞에서는 그것조차 낡아 가는 겉옷에 비유됩니다. 인간의 눈에는 세계가 오래가고 자신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시편은 세계 자체도 변하지만, 세계를 지으신 여호와야훼는 변하지 않으신다는 더 큰 시야를 열어 줍니다.

히브리서는 왜 이 말씀을 아들에게 적용하는가?

앞의 인용들은 다윗 왕조의 왕권에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시편 2편과 45편은 왕에 관한 시였고, 사무엘하 7장은 왕조의 약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시편 102편은 다릅니다.

여기서는 왕에게 하신 약속이 아니라, 창조주이신 여호와야훼의 영원성과 변함없음을 찬양하는 말이 등장합니다. 히브리서의 주된 문맥에서는 이 말씀 역시 아들을 가리키는 증언으로 읽힙니다. 8절에서 「아들에 대해서는」이라는 인용의 틀이 시작되고, 10절에서도 인용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두루새김은 10절을 「또 아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라고 풀어 옮겨 그 연결을 드러냅니다.

다만 10–12절이 아들에게 직접 말하는 형식인지, 하나님에 관한 시편의 증언을 통해 아들의 지위를 간접적으로 설명하는 것인지는 해석상 논의가 있습니다. 아들에게 직접 적용하는 일반적인 읽기에서는 이 인용이 2절에서 선언한 아들의 창조 사역을 구약의 언어로 다시 드러내고, 아들의 영원성을 창조주의 변함없음과 연결합니다.

이 대목은 시편 저자가 처음부터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알고 예수님께 직접 기도했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여호와야훼에 관한 구약의 증언을 아들이 누구신지 이해하는 데 적용하고 있습니다. 원래 다윗의 후손에게 주어진 약속도, 여호와야훼를 찬양하던 시편의 언어도, 저자의 예수님 이해 안에서 새롭게 연결됩니다.

옷은 바뀌지만 주님은 언제나 같은 분이십니다

이 인용의 중심에는 두 번 반복되는 대조가 있습니다. 「그것들은 사라지겠지만 주님은 계속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옷처럼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같은 분이시며」. 사라짐과 계속 계심, 바뀜과 언제나 같음이 서로 맞섭니다.

여기에는 히브리서 1:3과의 연결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모든 것을 떠받치고 계십니다」라고 묘사되셨는데, 이제 그 모든 것이 옷처럼 낡아 가고 바뀐다고 말합니다. 창조 세계 자체도 변화하지만, 그 세계를 붙드시는 분은 세계의 변화에 휩쓸려 사라지는 분이 아닙니다.

시편 102편의 고통받는 기도자는 바로 이 사실에서 소망을 발견했습니다. 자신의 삶이 쇠약해져도 여호와야훼의 한결같으심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는 그 소망의 언어를 아들에게 연결합니다.

예수님께서 창조 세계의 변화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신실하심에 관계된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들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에 따라 쉽게 낡아 버리는 임시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모든 시대를 지으시고 붙드시는 분을 통해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장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 인용은 다시 처음의 왕좌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신 분과 보내심을 받는 이들

히브리서 1:13–14 본문 →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느 천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히브리서 1:13 · 두루새김

이 인용은 시편 110:1에서 왔습니다. 히브리서 1장의 시작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하늘 높은 곳에서 위엄이 크신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으셨다고 선언되셨습니다. 이제 저자는 그 자리가 구약의 어떤 말씀과 연결되는지 보여 줍니다.

시편 110편은 여호와야훼가 왕을 자기 오른쪽에 앉히시고 그 원수들을 굴복시키겠다고 선언하는 시입니다. 「발판」은 원수를 제압하고 승리한 왕권을 나타내는 이미지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패배한 자가 승리자의 발아래 놓이는 모습은 굴복과 지배를 표현할 수 있었고, 시편은 그 이미지로 왕의 원수들이 결국 여호와야훼의 권세 앞에 굴복할 것을 선언합니다.

히브리서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를 특별히 강조합니다. 천사들 가운데 누구에게도 이런 말씀이 주어진 적이 없습니다. 1장의 첫 번째 구약 인용이 「너는 내 아들이다」라는 선언이었다면, 마지막 인용은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라는 초청이자 명령입니다. 두 말씀 사이에서 저자는 아들이 누구신지를 설명했습니다. 왕의 아들, 천사들이 절하는 맏아들, 정의롭게 다스리시는 왕, 창조주의 영원성에 연결된 분.

이 모든 선언이 마지막에 하나님의 오른쪽이라는 한 자리로 모입니다.

원수들이 발판이 되는 「때까지」 앉아 있으라는 말씀은 그 후에는 왕권이 끝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왕권을 부여받은 분이 장차 온전한 승리를 이루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른쪽에 앉으셨지만, 원수들이 발판이 되는 일은 여전히 하나님의 행동으로 제시됩니다. 히브리서는 10:12–13에서 이 구도를 다시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위한 제사를 드리신 뒤 앉으셨고, 그 후 원수들이 발판이 되기를 기다리십니다.

죄를 깨끗하게 하신 완성된 일과 장차 드러날 승리가 한 왕좌의 이미지 안에 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보내심을 받는다

천사들은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영들로서, 구원을 물려받을 사람들을 돕도록 보내지는 이들이 아닙니까?히브리서 1:14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으십니다. 천사들은 보내심을 받습니다. 그러나 14절은 천사들이 아들보다 낮은 지위에 있다는 사실만 말하지 않고, 천사들이 누구를 위해 보내지는지를 밝힙니다.

여기서 독자는 뜻밖에 자기 자신의 자리를 발견합니다.

1장 앞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물려받을 분」이라고 불리셨고, 마지막 절에서는 「구원을 물려받을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물려받는다는 말이 처음과 끝을 이어 줍니다. 두 물려받음은 동일한 의미가 아니지만,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아들과 예수님께서 구원하시는 사람들이 관계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관계는 히브리서 2:10–11에서 많은 아들들이 영광에 이르는 이야기와,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으로 이어집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구원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물려받을 분이신 예수님께서 높임받으셨고, 천사들조차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의 목적을 위해 보내지는 존재들입니다.

독자들은 그 구원 계획의 바깥에 서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왜 히브리서는 천사들과 아들을 비교하는가?

저자는 왜 편지의 첫머리에서 이토록 많은 구약 본문을 인용하며 천사들과 아들의 차이를 설명합니까? 그 시대에 유행한 천사 숭배를 반박하려 했다는 설명도 있지만, 히브리서 본문은 이 편지를 받은 사람들이 실제로 천사를 숭배하고 있었다고 말하지 않으므로 이것을 확정적인 이유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더 직접적인 단서는 다음 장에 있습니다. 히브리서 2:2–3은 천사들을 통해 전해진 말씀과 주님을 통해 선포된 구원을 비교합니다. 유대교 전승에서도 천사들은 율법의 전달과 연결되었고, 사도행전 7:53과 갈라디아서 3:19에도 그 흔적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천사들을 통해 전달하신 말씀조차 중대한 의미가 있었다면,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주어진 말씀은 얼마나 더 중대합니까?

저자는 이것을 말하기 위해 천사들을 멸시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며 섬기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들과 아들의 위치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하늘 존재들의 서열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통해 결정적인 구원을 이루셨고, 이제 누구를 통해 말씀하셨는가에 관한 차이입니다. 이 편지를 받은 사람들이 정확히 누구였는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편지의 후반부를 읽으면 그들이 이미 고난을 경험했고(히 10:32–34), 인내가 필요했으며(10:36), 피곤하여 낙심할 위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12:3).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막연히 더 열심히 믿으라는 명령이 아니라, 그들이 붙들고 있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다시 보는 일이었습니다. 믿음을 계속 지킬 수 있는지는 개인의 결심이 얼마나 강한가에만 달린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명령부터 시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아들의 영광,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높임받으심부터 시작합니다. 2장에서 비로소 우리가 들은 말씀에 더욱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는 권면이 등장하는 것도 이 흐름 안에 있습니다(히 2:1).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앉으신 아들

히브리서 1:1–14 본문 →

히브리서 1장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아들이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으신 장면에 이릅니다. 그 사이에서 하나님은 누구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는지를 차례로 드러내셨습니다. 아들에게는 「너는 내 아들이다」와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를, 천사들에게는 그에게 절하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다는 사실은 과거 어느 시점에 권위 있는 가르침이 주어졌다는 뜻에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무엇을 이루셨는지, 어디에 앉으셨는지가 함께 하나님의 결정적인 말씀을 이룹니다.

지금까지 독자는 하늘의 왕좌와 천사들이 절하는 모습, 땅과 하늘의 창조, 낡아 가는 세계와 변함없는 영원성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절에서 그 장엄한 하늘의 광경 안으로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들어옵니다.

천사들은 그들을 위해 보내집니다.

히브리서 1장은 모든 것을 물려받으실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면서 시작하지만, 구원을 물려받을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하나님의 천사들을 보여 주면서 끝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섬김과 구원의 역사 위에, 죄를 깨끗하게 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