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25장
이 장의 자리 · 13–27장 · 민족들에 관한 말씀
죽음을 삼키시는 하나님의 잔치
하나님이 성대한 잔치를 마련하십니다. 기름진 음식과 오래 묵힌 포도주가 준비되고, 모든 민족이 초대됩니다. 그런데 잔치가 시작되자 하나님은 손님들을 덮고 있던 천을 거두시는 데서 그치지 않고, 뜻밖의 일을 행하십니다.
24장에서는 세상의 질서가 무너지는 가운데 하나님이 시온에서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25장은 바로 그 통치가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지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장의 마지막에는 여전히 심판의 장면이 남아 있습니다. 잔치가 열리는 산에서는 하나님의 손이 머물지만, 모압은 짓밟히고 높은 요새는 무너집니다.
왜 이토록 아름다운 약속 뒤에 다시 심판이 등장할까요?
무너진 성읍 앞에서 시작되는 찬양
오래전에 계획하셨고, 이제 이루셨습니다
25장은 한 사람의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 주님은 저의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주님을 높이고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놀라운 일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오래전에 세우신 계획을 한결같고 신실하게 이루셨습니다.이사야 25:1 · 두루새김
앞 장에서 만군의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라는 선언이 나왔다면, 이제 한 사람이 그 하나님을 향해 직접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개인의 신앙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의 근거는 단순히 하나님이 강하시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분이 오래전에 계획하신 일을 신실하게 이루셨다는 사실입니다.
강한 존재라고 해서 반드시 믿을 만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통치자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도 마음을 바꾸거나 약속을 저버립니다. 그가 얼마나 강한지 아는 것과 그를 믿을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분의 능력은 신실함과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이사야 14:24에서도 만군의 하나님은 자신이 계획하신 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25장의 찬양은 그런 선언이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확신에서 나옵니다.
주님께서 도시를 돌무더기로,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폐허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외국인들의 궁전이 있던 곳을 더는 도시로 남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곳은 영원히 다시 세워지지 않을 것입니다.이사야 25:2 · 두루새김
왜 하나님의 신실함을 찬양하면서 도시가 무너진 일을 기뻐합니까?
이 구절을 모든 도시의 파괴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일이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도시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며, 뒤에서는 난폭한 세력의 위협과 몰락을 말합니다. 따라서 파괴 자체가 찬양의 이유라기보다, 난폭한 권력이 무너졌다는 사실이 찬양의 배경입니다.
이름 없는 성읍과 세계의 강한 백성들
25장 2절의 도시는 이름이 없습니다.
바벨론으로 이해하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사야 13–14장에서 바벨론의 몰락이 선언되었고, 24:10에도 혼돈에 빠진 이름 없는 도시가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 자체는 도시의 이름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특정한 역사 속 도시를 가리킬 수도 있고, 하나님께 맞서는 세상의 강력한 도시들을 대표하는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곳에는 성벽과 궁전이 있었습니다.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군사적 능력과 통치 권력을 가진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튼튼한 도시를 돌무더기로 만드십니다.
인간이 아무리 튼튼한 요새를 세워도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막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강한 백성이 주님을 높이고, 난폭한 민족들의 도시 사람들이 주님을 두려워할 것입니다.이사야 25:3 · 두루새김
하나님의 행동이 그분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다만 이 두려움이 곧 모든 민족의 자발적인 회개와 신앙을 뜻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며 우러러보는 마음일 수도 있고, 심판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들의 속마음을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한때 다른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던 강한 민족들이 이제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두려움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폐허, 어떤 사람에게는 요새
하나님은 누구의 요새가 되시는가?
주님께서 힘없는 이의 요새, 어려움에 빠진 가난한 이의 요새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폭우를 피하는 피난처, 뜨거운 열기를 피하는 그늘이 되셨습니다. 난폭한 자들의 숨결이 벽을 때리는 폭우 같기 때문입니다.이사야 25:4 · 두루새김
2절에서 하나님은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폐허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4절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요새가 되십니다.
난폭한 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의지하던 요새는 무너뜨리시지만,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친히 요새가 되어 주십니다.
같은 하나님의 능력이 누구에게는 심판으로, 누구에게는 보호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가난은 단순히 개인이 돈을 얼마나 버는지만을 가리키는 말로 좁힐 필요가 없습니다. 문맥상 난폭한 세력에게 시달리고, 자신을 보호할 힘이 부족한 사람들의 처지가 강조됩니다.
폭우와 뜨거운 열기
폭우는 갑자기 몰려와 사람을 압도할 수 있습니다. 뜨거운 열기는 피할 곳이 없다면 사람을 지치게 하고 생명을 위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폭우를 피할 피난처와 열기를 피할 그늘이 있다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폭우가 당장 사라지지 않더라도 사람은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열기가 여전히 뜨겁더라도 그늘 아래 있는 사람은 쉴 수 있습니다.
그분은 위험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즉시 만들어 주시는 분으로만 묘사되지 않습니다. 위험 속에 있는 사람에게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난폭한 자들의 위협이 벽을 때리는 폭우와 같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주변 사람들을 압박하고 두렵게 만듭니다.
5절에서는 이미지가 폭우에서 열기로 바뀝니다.
메마른 땅의 열기 같은 외국인들의 소란을 주님께서 가라앉히실 것입니다. 구름 그늘 아래 열기가 가시듯, 난폭한 자들의 노래도 잦아들 것입니다.이사야 25:5 · 두루새김
여기서 외국인들의 소란과 난폭한 자들의 노래는 앞에 등장한 위협적인 세력들의 소리를 가리킵니다. 앞에서는 강한 자들의 목소리가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위협과 승리를 자랑하는 소리가 사람들을 압도했을 것입니다.
이 장의 처음에서 무너진 것은 도시였지만, 이제 사라지는 것은 난폭한 자들의 소란입니다. 하나님의 승리는 단순히 더 큰 소리로 상대를 압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힘없는 사람들을 위협하던 소리를 잠잠하게 하시는 데 있습니다.
난폭한 자들의 소란이 잦아든 자리에, 이제 다른 종류의 기쁨이 찾아옵니다.
모든 백성을 위해 차려진 잔치
만군의 여호와야훼께서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을 위해 잔치를 마련하실 것입니다. 기름진 음식과 오래 묵힌 포도주로 차린 잔치, 골수가 듬뿍 든 기름진 음식과 잘 거른 묵힌 포도주로 차린 잔치입니다.이사야 25:6 · 두루새김
하나님이 직접 잔치를 마련하십니다
이것은 고대 세계의 왕실 잔치를 떠올리게 합니다. 왕이 마련하는 잔치에는 왕의 풍요와 권세가 드러납니다. 어떤 사람을 초청하는지, 어떤 음식을 내놓는지에 따라 왕의 지위와 너그러운 마음을 보여 줄 수도 있습니다.
이 잔치를 마련하는 분은 인간의 왕이 아니라 만군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초대받는 대상은 소수의 귀족이나 통치자가 아닙니다.
「모든 민족」입니다.
앞에서는 강한 민족들의 도시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러 민족이 하나님이 마련하신 잔치의 대상으로 등장합니다.
다만 「모든 민족」이라는 표현이 모든 개인이 아무런 구별 없이 이미 구원받았다는 선언인지는 구별해야 합니다. 본문은 잔치의 초대가 민족의 경계를 넘어 넓게 열려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잔치에 참여하는 개인들의 모든 조건과 마지막 운명을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이사야 2:2–4에서 여러 민족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배우러 시온으로 올라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25장에서는 여러 민족을 위한 잔치가 같은 산에서 열립니다.
풍성함을 거듭 강조하는 음식들
기름진 음식은 고대 식생활에서 풍요와 만족을 나타내는 음식이었습니다. 골수가 듬뿍 든 고기는 풍성한 잔치의 모습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오래 묵힌 포도주」는 오래 두어 찌꺼기가 가라앉은 포도주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잘 거른」이라는 표현까지 더해집니다.
이 장면은 앞에서 힘없는 사람들을 보호하시던 하나님의 모습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험에서 구하시는 데서 그치지 않으십니다. 그들에게 먹을 것을 마련하시고, 기쁨을 누릴 자리를 만들어 주십니다.
살아남는 것만이 아니라 풍요가 등장합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죽음이 존재합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고 아무리 좋은 포도주를 마셔도 사람은 결국 죽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마련하신 이 잔치는 무엇이 다릅니까?
잔치를 덮고 있던 천을 삼켜 버리다
모든 민족 위에 드리워진 덮개
여호와야훼께서는 이 산에서 모든 백성을 감싼 덮개와 모든 민족 위에 드리운 천을 삼켜 버리실 것입니다.이사야 25:7 · 두루새김
그런데 이사야는 하나님이 그 천을 단순히 걷어 내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삼켜 버리실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죽음이 삼켜지는 역전
죽음을 영원히 삼켜 버리실 것입니다. 주 여호와야훼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고, 온 땅에서 자기 백성의 수치를 없애실 것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이사야 25:8 · 두루새김
모든 민족을 덮고 있던 천이 사라지는 것과 죽음이 사라지는 것은 서로 연결된 행동입니다. 구약에서 죽음은 때로 입을 벌려 사람을 삼키는 존재처럼 묘사됩니다. 이사야 5:14에서는 스올이 욕망을 크게 하고 한없이 입을 벌립니다.
그런데 25장에서는 완전히 반대의 일이 벌어집니다.
죽음이 사람을 삼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죽음을 삼키십니다.
더구나 「영원히」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죽음의 힘이 근본적으로 끝나는 것을 바라보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잔치는 죽음을 잠시 잊게 만드는 자리가 아니라, 죽음 자체가 더 이상 사람들을 지배하지 못하게 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눈물을 직접 닦아 내십니다
이어서 이사야는 장면을 더욱 가까이 가져옵니다.
조금 전까지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덮은 천을 삼키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등장합니다.
「모든 얼굴」입니다. 눈물을 닦으려면 울고 있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그 사람의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구원을 거대한 승리의 선언으로만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 승리가 슬퍼하는 사람 한 사람의 얼굴에까지 미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죽음을 없앨 만큼 크고, 하나님의 돌보심은 한 사람의 눈물에 닿을 만큼 가까이 있습니다.
눈물과 치욕은 어떻게 다른가?
8절은 눈물을 닦아 주는 것과 자기 백성의 수치를 없애는 것을 나란히 말합니다. 눈물은 슬픔과 고통을 드러냅니다. 수치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겪는 부끄러움과 모욕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여러 민족의 침략과 억압 속에서 패배와 수치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 자체가 다른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땅에서」 없애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 구절은 「모든 얼굴」과 「자기 백성」을 구별합니다. 눈물을 닦는 행동은 모든 얼굴을 향하고, 수치를 없애는 행동은 특별히 자기 백성을 향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민족의 경계를 넘어 넓어지지만, 그 과정에서 이미 고통받아 온 자기 백성의 역사가 지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에는 짧은 선언이 붙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이 확실한 이유는 인간이 그런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기대에 있지 않습니다.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다는 사실이 과거를 해석하는 근거일 뿐 아니라 미래를 기다리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그것을 직접 정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절에서 하나님이 죽음을 영원히 삼켜 버리시고 눈물을 닦아 주신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천을 죽음과 애도의 현실을 나타내는 이미지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한편 덮개를 인간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도록 가리는 무지나 영적 어둠의 이미지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 역시 성경의 다른 본문들과 주제적으로 연결될 수 있지만, 이사야 25장 자체에서는 바로 이어지는 죽음과 눈물의 제거가 더 직접적인 설명을 제공합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만으로 부활의 구체적인 방식이나 이후 삶의 모든 상태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이사야 25장은 죽음을 영원히 삼키시는 하나님의 승리를 선언합니다. 그 승리가 어떻게 실현되는지에 관한 더 구체적인 전망은 이어지는 이사야 26:19에서 죽은 이들이 살아나는 모습으로 발전합니다. 신약에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54에서 이사야 25:8을 직접 인용하여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와 부활을 설명합니다. 요한계시록 21:4에서는 하나님이 눈물을 닦으시고 죽음이 더 이상 없을 것이라는 이사야의 이미지가 다시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사야 25장 자체를 먼저 읽을 때 중심에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아닙니다. 시온에서 왕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모든 민족을 위해 잔치를 마련하시고 죽음을 삼키신다는 선언입니다. 신약은 바로 그 구약의 약속을 받아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구원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오래 기다린 사람들이 마침내 말하다
그날에 사람들이 말할 것입니다. 「보아라, 이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분을 기다렸고,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 이분이 여호와야훼시다! 우리는 그분을 기다렸다. 그분의 구원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자.」이사야 25:9 · 두루새김
1절에서는 한 사람이 「주님은 저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9절에서는 여러 사람이 「이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합니다.
개인의 찬양이 공동체의 고백으로 넓어집니다.
기다렸다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이사야 8:17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얼굴을 숨기시는 상황에서도 그분을 기다리고 바라겠다는 고백이 나옵니다. 이사야 30:18에서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복되다고 선언됩니다.
그런데 25장에서는 그 기다림의 대상이 눈앞에 나타납니다.
그동안 기대하던 하나님이 실제로 구원의 행동을 이루시는 분으로 드러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기다리고, 그분이 이루시는 구원을 기뻐합니다.
기다림이 의미 있는 이유는 기다리는 사람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기다리는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기쁨의 고백은 예상하지 못했던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의 동사 형태와 문맥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이미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감격의 고백으로 읽을 수도 있고, 구원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는 말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이 구절에서 분명한 것은 기다림과 구원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잔치가 열리는 산과 짓밟히는 모압
왜 갑자기 모압이 등장하는가?
사람들이 이렇게 기뻐하는 것은 여호와야훼의 손이 이 산에 머물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압은 거름 구덩이에서 짚더미가 밟히듯, 제자리에서 짓밟힐 것입니다.이사야 25:10 · 두루새김
이사야는 의도적으로 구원과 심판을 나란히 놓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산」은 앞에서 잔치가 열린 산과 연결됩니다. 이사야 24:23의 문맥을 따르면 시온산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그 산에 머문다는 것은 그분의 능력과 보호가 그곳에 계속 나타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사야 16:6은 모압의 교만을 강조합니다. 모압의 오만과 자만, 분노가 언급됩니다. 그런 점에서 25장의 모압 심판은 갑작스럽게 새로 등장한 주제가 아닙니다. 이사야서가 이미 지적했던 교만의 문제와 연결됩니다.
이사야 15–16장에는 모압을 향한 슬픔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나옵니다. 따라서 이사야가 모압이라는 민족 전체를 아무런 구별 없이 미워하거나, 모압 사람의 존재 자체를 죄악으로 규정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25장에서는 모압이 교만한 세력의 한 사례로 등장합니다.
헤엄치듯 손을 뻗는 모압
모압은 헤엄치는 사람이 헤엄치려고 두 손을 뻗듯, 그 속에서 두 손을 뻗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는 모압의 교만을 그 능숙한 손놀림과 함께 꺾으실 것입니다.이사야 25:11 · 두루새김
즉 모압은 자기 힘과 능숙한 손놀림으로 상황을 벗어나려 하지만, 그 교만이 꺾일 것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끝까지 남는 높은 성벽의 이미지
여호와야훼께서 모압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높은 요새를 허물고 낮추어, 땅바닥의 먼지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이사야 25:12 · 두루새김
2절에서는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가 폐허가 되었습니다. 12절에서는 높은 요새가 땅바닥까지 낮아집니다. 그 사이에는 하나님이 힘없는 사람들의 요새가 되시고, 모든 민족을 위해 잔치를 마련하시며, 죽음을 삼키시는 장면이 놓여 있습니다.
특히 「땅바닥의 먼지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라는 마지막 표현은 완전한 굴욕을 보여 줍니다.
높은 곳에 서 있던 것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옵니다.
모든 백성을 위한 잔치와 모압의 심판은 모순되는가?
본문은 하나님이 여러 민족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면서도, 교만한 세력을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19:23–25에서 이집트와 아시리아가 이스라엘과 함께 하나님의 복에 참여하는 장면은 다른 민족도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반면 25장의 모압 심판은 하나님의 구원과 통치가 모든 인간적 교만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사야 25장이 강조하는 대조는 무엇보다 난폭한 권력과 보호받는 힘없는 사람들, 교만한 세력과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10절의 장소를 나타내는 표현은 전해지는 본문의 읽기에 따라 거름 구덩이와 물의 이미지를 다르게 제시합니다. 11절에서 누가 손을 펴고 누가 교만을 낮추는지, 「그 속에서」가 정확히 어떤 장소를 가리키는지도 원문의 문법만으로는 완전히 확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은 모압이 손을 뻗고 하나님이 모압의 교만을 꺾으시는 것으로 옮겼습니다. 여기서 헤엄치는 이미지를 실제 물속에서의 익사 장면으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두루새김처럼 앞 구절을 거름 구덩이로 읽었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두루새김은 12절의 성벽을 「모압의 성벽」으로 옮겼습니다. 원문에서는 누구의 성벽인지 이름을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바로 앞에 모압이 등장하므로 모압을 향한 말씀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2절의 이름 없는,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와 연결하여 더 넓은 교만한 권력의 몰락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차리신 식탁
하나님은 사람들이 잔치를 즐기도록 음식을 마련하실 뿐 아니라, 그들의 기쁨을 가리고 있던 것을 제거하십니다. 그 기쁨을 언젠가 끝낼 죽음까지 삼키십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들이 겪어 온 슬픔과 수치도 없애십니다.
이 장의 마지막 심판은 잔치의 약속을 취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잔치가 어떤 통치 아래 열리는지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곳에서는 난폭한 자들의 위협이 계속 유지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교만을 꺾으시기 때문입니다.
난폭한 자들의 노래가 잦아든 자리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의 기쁨이 시작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보아라, 이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다!」
이사야 25장에서 구원의 가장 깊은 모습은 사람들이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없는 상태만이 아니라, 그들을 보호하고 먹이시며 눈물을 닦아 주시는 하나님 앞에 있는 것입니다.
산 위에는 잔치가 차려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다리던 분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는 분이 바로 그 잔치를 마련하신 왕이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