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26장

이 장의 자리 · 13–27장 · 민족들에 관한 말씀

바람을 낳은 사람들과 죽은 이를 깨우시는 하나님

이사야 26장에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듯한 두 장면이 등장합니다.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고통 속에서 몸부림칩니다. 아이를 밴 여자가 아이를 낳으려고 진통하듯 애썼지만, 그들이 낳은 것은 아이가 아니라 바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는 죽은 사람들이 일어납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온 힘을 다했지만 아무것도 낳지 못했습니다. 반면 죽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으로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 장은 부활의 약속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성문을 활짝 열라는 노래가 들리고, 마지막에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으라는 명령이 내려집니다.

이 두 장면은 모순됩니까?

이사야 25장은 하나님이 마련하신 잔치에서 죽음 자체가 삼켜질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26장은 그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그리고 그들의 기다림에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시는지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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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이 아니라 구원으로 세워진 도시

이사야 26:1–6 본문 →

무엇이 이 도시를 강하게 만드는가?

이 장은 노래로 시작합니다.

그날에 유다 땅에서 이런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우리에게 튼튼한 도시가 있다. 여호와야훼께서 구원을 성벽과 바깥 방어벽으로 세우실 것이다.」이사야 26:1 · 두루새김

보통 사람은 성벽을 세워 안전을 확보합니다. 그런데 이 노래에서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 자체가 성벽이 됩니다.

이사야 26장의 첫 여섯 절은 두 도시를 대조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구원으로 보호하시는 튼튼한 도시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높아졌지만 하나님이 먼지 속까지 낮추시는 도시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안전의 근거를 두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높음에 의지합니다.

본문에서 두 도시를 모두 구체적인 지명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첫 번째 도시는 시온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구원의 약속과 연결되지만, 두 번째 높은 도시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습니다.

높은 도시를 바벨론이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계의 도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정 도시 하나로 확정하기보다는, 이사야가 두 도시를 통해 보여 주는 믿음과 교만의 대조를 먼저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문은 누구에게 열리는가?

2절에서는 성문을 향한 명령이 들립니다.

「성문들을 열어라. 신실함을 지키는 의로운 민족이 들어오게 해라.」이사야 26:2 · 두루새김

이 도시는 힘 있는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닫힌 요새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신실한 사람들이 들어오는 도시입니다.

이사야 1:26에서는 예루살렘이 회복되어 의로운 도시라 불릴 것이라는 약속이 나왔습니다. 26장의 노래는 그런 도시의 모습과 잘 연결됩니다.

온전한 평화는 무엇인가?

「주님은 마음이 굳게 선 사람을 온전한 평화 속에 지키십니다. 그가 주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이사야 26:3 · 두루새김

원문은 샬롬 샬롬(⁨שָׁלוֹם⁩), 곧 「평화, 평화」라고 같은 낱말을 반복합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이렇게 반복하여 의미를 강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두루새김이 「온전한 평화」로 옮긴 것은 그 강조를 자연스럽게 전달합니다.

여기서 평화는 단순히 싸움이 없거나 마음이 편안한 상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샬롬은 관계의 온전함, 안전, 삶의 안정과 번영까지 포함할 수 있는 폭넓은 말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모든 상황을 다스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평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평안은 자기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하면 쉽게 무너집니다.

이사야가 말하는 평화는 다른 근거에 서 있습니다.

평화는 사람이 자기 마음을 완벽하게 붙들어 얻는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을 지켜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것을 어떤 어려움도 겪지 않게 된다는 약속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같은 장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고난과 징계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반석과 티끌이 된 성읍

4절은 노래를 듣는 사람들에게 직접 권합니다.

「여호와야훼를 영원히 의지하여라. 야 여호와야훼께서는 영원한 바위이시다.」이사야 26:4 · 두루새김

바위는 단단함과 보호를 나타내는 이미지입니다. 이스라엘의 노래에서도 하나님은 바위로 불리십니다(신명기 32:4; 시편 18:2).

「그분이 높은 곳에 사는 자들을 낮추셨기 때문이다. 높이 솟은 도시도 낮추실 것이다. 낮추어 땅바닥까지, 먼지 속까지 끌어내리실 것이다.」이사야 26:5 · 두루새김

하나님은 바위이시지만, 인간이 스스로 높이 세운 도시는 먼지 속까지 낮아집니다. 5절에서 「낮추셨기」, 「낮추실」, 「낮추어」처럼 낮추는 행동이 반복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튼튼해 보이던 것은 무너지고, 참으로 튼튼한 분은 남으십니다.

「발이 그 도시를 짓밟을 것이다. 가난한 이들의 발이, 힘없는 이들의 발걸음이 짓밟을 것이다.」이사야 26:6 · 두루새김

그들은 높은 도시의 통치자가 아닙니다. 강력한 군대를 거느린 정복자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발이 그 도시를 밟습니다.

이것을 가난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잔혹하게 짓밟아도 된다는 허가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폭력 행위를 위한 명령이 아니라, 힘의 관계가 뒤집히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높은 도시는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보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도시가 낮아져, 그곳에서 억눌렸을 법한 사람들이 그 위를 걸어갑니다.

그런데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의 삶이 처음부터 평탄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판결을 기다리면서 걷는 길

이사야 26:7–11 본문 →

의로운 사람의 길이 평탄하다는 말

「의로운 이의 길은 평탄합니다. 올곧으신 주님, 주님께서 의로운 이의 길을 고르게 하십니다.」이사야 26:7 · 두루새김

8절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판결을 따르는 길에서도 하나님을 기다렸다고 말합니다. 16절에서는 고난과 징계 속에서 하나님을 찾았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올곧으신 주님」이라는 부름은 길을 고르게 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성품을 드러냅니다. 히브리어 문장의 연결을 다르게 이해하면 올곧음이 길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으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루새김처럼 하나님을 부르는 말로 읽을 경우, 중요한 관계가 생깁니다.

하나님이 올곧으신 분이기 때문에 의로운 사람의 길을 고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판결을 피하는 일이 아니다

8절에서 노래는 더 직접적인 기도가 됩니다.

「여호와야훼, 저희는 주님의 판결을 따르는 길에서도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저희는 주님을 마음 깊이 바라며, 주님의 이름을 기억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이사야 26:8 · 두루새김

사람들은 보통 심판이나 판결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이 기도에서는 하나님의 판결이 기다림의 대상과 연결됩니다.

「밤에 저는 마음으로 주님을 간절히 바랐습니다. 제 안의 영으로도 주님을 애타게 찾습니다. 주님의 판결이 땅에 미칠 때,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의로움을 배우기 때문입니다.」이사야 26:9 · 두루새김

이사야가 말하는 하나님의 판결에는 잘못을 드러내고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는 의미가 있습니다. 불의가 아무런 제지 없이 계속되는 세계에서는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옳은 일이 힘을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판단하시고 행동하시면,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겼던 불의가 잘못된 것으로 드러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단순히 자신을 구해 주시기만 바라는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세상에 드러나기를 바라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밤에 하나님을 찾는 마음

앞에서는 민족이 노래했습니다. 이제는 한 사람이 밤에 하나님을 찾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밤에」라는 표현은 실제 밤에 하나님을 찾는 모습을 그립니다. 이를 고난의 어두운 시기에 대한 비유로도 읽을 수 있지만, 본문이 반드시 밤을 상징적인 의미로만 사용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음으로」, 「제 안의 영으로도」라는 표현은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온전히 하나님을 찾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곧바로 세상 사람들이 의로움을 배우는 문제로 이어집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과 세계의 정의가 하나의 문장 안에서 만납니다.

은혜를 받아도 정의를 배우지 않는 사람들

그런데 10절은 이러한 기대에 어려운 질문을 제기합니다.

「악한 사람은 은혜를 받아도 의로움을 배우지 않습니다. 올바름이 자리 잡은 땅에서도 악을 행하고, 여호와야훼의 위엄을 보지 않습니다.」이사야 26:10 · 두루새김

이사야는 사람들이 좋은 환경에 놓이거나 은혜를 경험하기만 하면 저절로 올바른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판결을 통해 의로움을 배우지만, 어떤 사람은 은혜를 경험하고도 자기 행동을 바꾸지 않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올바른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마주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여호와야훼, 주님께서 손을 높이 드셨지만 그들은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서 백성을 위해 쏟으시는 열정을 보고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주님의 적들을 향한 불이 그들을 삼킬 것입니다.」이사야 26:11 · 두루새김

여기서 본다는 것은 단순히 눈으로 어떤 모습을 확인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보는 것입니다.

「보고 부끄러워할 것입니다」라는 표현은 앞으로 그들이 보게 되리라는 예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원문의 문법으로는 그들이 보게 해 달라는 청원으로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향한 심판은 단순한 분노의 폭발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백성을 위해 쏟으시는 열정」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겪는 불의에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이 장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기다리는 것은 적들의 멸망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들이 끝내 바라는 것은 평화입니다.

다른 주인들에게 다스림받았던 사람들

이사야 26:12–15 본문 →

평화를 이루시는 분은 누구인가?

「여호와야훼, 주님은 저희에게 평화를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저희의 모든 일도 주님께서 저희를 위해 이루셨기 때문입니다.」이사야 26:12 · 두루새김

3절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을 온전한 평화 속에 지키신다고 했습니다. 12절에서는 하나님이 공동체에 평화를 마련해 주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개인의 마음에서 시작된 평화가 공동체 전체의 삶으로 넓어집니다.

본문은 의로운 길을 걷고, 신실함을 지키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행동을 이미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이루어진 좋은 결과가 결국 하나님이 하신 일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깁니다.

「저희 하나님 여호와야훼, 주님 말고 다른 주인들이 저희를 다스렸습니다. 저희는 오직 주님을 의지해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이사야 26:13 · 두루새김

「다른 주인들」이 누구인지 본문은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억눌렀던 다른 나라의 통치자들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아시리아나 바벨론 같은 제국의 지배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 표현에는 하나님 아닌 권세에 매여 살아온 경험을 넓게 아우르는 의미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절을 근거로 특정한 왕이나 제국의 이름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다른 주인들에게 복종해야 했던 현실과, 자신들이 끝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고백하는 신앙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시기를 겪었지만, 자신들의 하나님이 누구인지 잊지 않았습니다.

다른 주인들이 그들의 삶을 다스릴 수는 있었지만, 그들이 마지막으로 부르는 이름까지 소유할 수는 없었습니다.

죽은 주인들은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14절은 그 다른 주인들의 운명을 선언합니다.

「죽은 그 주인들은 살아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넋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들을 벌하여 없애셨고, 그들에 대한 모든 기억도 지워 버리셨습니다.」이사야 26:14 · 두루새김

14절의 「죽은 그 주인들」은 바로 앞 절에서 언급된 「다른 주인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지배하던 권력자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일어나지 못한다는 말은 우선 그들의 지배가 되살아나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으로 읽어야 합니다.

반면 19절에서는 「주님께 속한 죽은 이들」이 살아납니다. 그는 사람들을 억누르던 권력자들의 끝과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약속을 대조합니다.

그렇지만 이 대조가 모든 악한 사람에게는 어떤 형태의 부활도 없고 의로운 사람만 부활한다는, 마지막 때에 관한 완결된 규정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이 분명히 강조하는 것은 다른 주인들의 지배와 기억은 끝나지만,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의 소망은 죽음에 의해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민족을 늘리시는 하나님

15절은 다시 공동체의 회복을 찬양합니다.

「여호와야훼, 주님은 저희 민족을 늘리셨습니다. 저희 민족을 늘리시고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땅의 모든 경계를 멀리 넓히셨습니다.」이사야 26:15 · 두루새김

여기서는 「늘리셨습니다」, 「늘리시고」처럼 민족을 늘리셨다는 말이 반복됩니다. 백성을 억누르던 자들의 권력은 끝나고, 그 아래에서 고통받던 공동체는 다시 번성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단순히 백성을 억누르던 자들을 없애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뒤에 살아남은 백성이 다시 삶을 이어 가고 성장하는 일까지 포함합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는 이 공동체가 겪었던 고난이 다시 등장합니다.

진통을 겪었지만 바람을 낳다

이사야 26:16–18 본문 →

고난 속에서 겨우 나온 기도

「여호와야훼, 그들은 고난 속에서 주님을 찾았습니다. 주님의 징계가 그들에게 닥쳤을 때, 속삭이듯 기도를 쏟아 냈습니다.」이사야 26:16 · 두루새김

앞부분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노래가 힘 있게 울려 퍼졌습니다. 성문을 열라는 명령이 있었고, 하나님을 영원히 의지하라는 권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람들이 속삭이듯 기도합니다.

「속삭이듯 기도를 쏟아 냈습니다」라는 표현이 반드시 소리의 크기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통 속에서 간절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잘 전달합니다. 이사야는 신앙의 모습을 승리의 노래로만 그리지 않습니다. 힘이 없어 겨우 하나님을 찾는 모습도 함께 보여 줍니다.

이사야 26장의 공동체가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의 징계와 연결해 고백했다고 해서, 오늘 겪는 모든 실패나 고통의 원인을 같은 방식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구원을 낳을 수 없었던 사람들

「아이를 밴 여자가 낳을 때가 가까워져 진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부르짖듯, 여호와야훼, 주님 앞에서 저희도 그랬습니다.」이사야 26:17 · 두루새김

아이를 낳을 때가 가까운 여자는 고통을 겪습니다. 그 고통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사야는 바로 그 모습으로 고난받는 공동체를 설명합니다.

그런데 18절은 예상과 전혀 다른 결과를 보여 줍니다.

「저희는 아이를 배고 진통을 겪었지만, 낳은 것은 바람뿐인 것 같았습니다. 저희는 땅에 구원을 이루지 못했고, 세상에 살 사람들이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이사야 26:18 · 두루새김

진통의 고통은 실제였습니다. 그러나 기대했던 생명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노력으로 기대했던 구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 이미지는 고난을 겪은 사람들이 느끼는 깊은 허무를 표현합니다. 그동안의 수고가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들의 실패를 마지막 말로 남겨 두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נָפַל⁩)로 옮긴 히브리어 동사는 기본적으로 떨어지거나 쓰러지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쓰러지지 않았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기도하는 사람들은 적들을 쓰러뜨리지 못했다는 실패를 말하는 셈입니다. 반면 두루새김처럼 앞의 임신과 출산 비유를 따라 읽으면, 새로운 생명을 세상에 내놓지 못했다는 뜻이 됩니다.

땅이 죽은 사람들을 내놓다

이사야 26:19 본문 →

「주님께 속한 죽은 이들은 살아날 것입니다. 저의 죽은 몸도 일어날 것입니다. 티끌 속에 누운 이들아, 깨어나 기뻐 외쳐라! 주님의 이슬은 빛의 이슬이기 때문입니다. 땅은 죽은 이들의 넋을 내놓을 것입니다.」이사야 26:19 · 두루새김

사람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구원을 만들어 내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죽음의 영역에까지 생명을 가져오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속한 죽은 이들」은 누구인가?

이 표현은 앞에서 다른 주인들이 죽어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는 14절과 대조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죽음 가운데에서도 소망이 있습니다. 그들의 생명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완전히 끊어진 것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앞에서는 「주님께 속한 죽은 이들」이라는 복수 표현이었는데, 이제는 「저의 죽은 몸」이라는 단수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 표현은 부활의 소망을 막연한 민족의 회복에만 가두지 않습니다. 말하는 사람 자신의 죽음과도 연결합니다.

민족의 회복인가, 실제 죽은 자들의 부활인가?

첫 번째는 이 구절을 민족의 회복을 나타내는 비유로 읽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 구절이 실제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바라본다고 읽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회복이라는 역사적 소망이 죽은 사람들의 생명에 관한 더 깊은 소망과 겹쳐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만으로 부활 이후의 삶이 어떤 모습인지, 그 일이 어떤 순서와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이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죽음에 머물러 있던 자기 백성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이슬이 등장하는가?

메마른 땅을 적시는 이슬처럼, 하나님에게서 오는 생명의 능력이 티끌 속에 누운 사람들에게 미칩니다. 이사야는 부활의 소망을 거대한 천둥이나 전쟁의 이미지로만 그리지 않습니다. 작고 조용하게 내리는 이슬의 이미지로도 표현합니다.

잠든 사람을 깨우는 명령

19절은 죽은 사람들을 향해 직접 말합니다.

「티끌 속에 누운 이들아, 깨어나 기뻐 외쳐라!」

앞에서 고난받던 백성은 속삭이듯 기도를 쏟아 냈습니다. 그런데 이제 티끌 속에 누운 이들에게 기뻐 외치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속삭이던 기도가 기쁨의 외침으로 바뀝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부르던 노래에, 이제 죽은 사람들까지 초대되는 것처럼 들립니다. 죽음 때문에 그 노래에 참여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까지 생명의 약속이 미칩니다.

그러나 이사야 26장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죽은 이들을 깨우라는 말 다음에, 살아 있는 백성을 향해 방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이 내려집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느벨라티(⁨נְבֵלָה⁩)는 문자적으로 「나의 주검」이라는 1인칭 단수 표현입니다. 문맥상 공동체를 대표하여 말하는 사람이 자신을 그 죽은 사람들과 연결한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또한 개인의 죽음과 공동체의 운명이 시적으로 겹쳐지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원문에서 말하는 대상이 바뀌는 것을 모두 매끄럽게 설명할 수 있는 확정적인 해석은 없습니다. 민족의 회복을 나타내는 비유로 읽는 경우, 앞에서 공동체는 억눌렸고, 자신들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지 못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죽은 이들이 살아난다는 것은 거의 사라진 것 같았던 하나님의 백성이 다시 회복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 37:1–14에 나오는 마른 뼈의 환상이 좋은 비교 대상입니다. 그곳에서 마른 뼈가 살아나는 장면은 이스라엘이 절망에서 회복되는 사건을 설명합니다. 실제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바라본다고 읽는 경우, 본문은 「죽은 이들」과 「죽은 몸」을 직접 말합니다. 더구나 바로 앞 장인 이사야 25:8에서는 하나님이 죽음을 영원히 삼키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빛의 이슬」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농업 환경에서 이슬은 생명과 번영을 나타내는 중요한 이미지였습니다. 호세아 14:5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은 분이 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죽은 사람들이 깨어난다는 19절의 약속은 다니엘 12:2와 연결됩니다. 다니엘은 땅의 티끌 가운데 잠자는 사람들이 깨어나는 모습을 말합니다. 신약에서는 요한복음 5:28–29에서 무덤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나오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이사야 26장의 죽은 이들에게 깨어나라는 명령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성문을 열었던 사람들이 이제 문을 닫는다

이사야 26:20–21 본문 →

「내 백성아, 가서 너희 방으로 들어가」

백성을 향한 경고가 이어집니다. 「내 백성아, 가서 너희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라. 분노가 지나갈 때까지 아주 잠깐 숨어 있어라.」이사야 26:20 · 두루새김

이사야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장면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 구원을 기다리는 백성이 심판의 시간에 어떻게 보호받을 것인지도 말합니다.

2절에서는 「성문들을 열어라」라고 했습니다. 20절에서는 「문을 닫아라」라고 합니다.

이 두 명령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의 구원 안으로 들어오도록 초대받는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동안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하나님이 백성에게 문을 닫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을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심판 가운데서 지키시려는 행동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의 밤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

이 장면은 출애굽기 12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집트에 마지막 재앙이 내리기 전,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양의 피를 문 양옆의 기둥과 위쪽 틀에 바르고 집 안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출애굽기 12:22에서는 아침까지 아무도 자기 집 문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두 본문 모두 심판의 때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다만 이사야 26장이 출애굽기의 유월절 밤과 동일한 사건을 반복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는 어린양의 피나 유월절 의식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왜 심판을 행하시는지는 마지막 절에서 밝혀집니다.

땅이 더 이상 피를 숨기지 않는다

「보아라, 여호와야훼가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를 물으려고 자기 거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땅은 그 위에서 흘린 피를 드러내고, 죽임당한 사람들을 더 이상 덮어 숨기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26:21 · 두루새김

이사야는 하나님이 막연한 악을 심판하신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살해된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피가 땅 위에 흘려졌으며, 그 사실이 감추어져 있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땅은 단순한 배경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저지른 폭력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자 그 흔적을 더 이상 감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피를 잊지 않으십니다.

죽은 이들을 내놓는 땅과 피를 드러내는 땅

19절에서는 땅이 죽은 이들의 넋을 내놓는다고 했습니다. 21절에서는 땅이 흘린 피와 죽임당한 사람들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두 구절 모두 땅이 지금까지 품고 있거나 가리고 있던 것을 내놓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다릅니다.

19절에서는 생명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21절에서는 심판의 선언입니다. 사람들이 죽임당한 사실과 흘린 피가 더 이상 감추어지지 않습니다.

그분은 생명을 일으키시는 분이면서, 생명을 빼앗은 폭력의 책임도 물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언제나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멈추고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기다리는 것도 신뢰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불의에 무관심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지막 절에서 하나님 자신이 감추어진 피를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기다리는 사람은 세상의 폭력을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여길 수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20절의 「아주 잠깐」은 고난이나 심판의 기간이 실제로 얼마나 짧은지를 계산할 수 있게 하는 표현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 분노의 시간이 영원히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54:7–8에서도 잠시 버림받은 듯한 시간과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대조됩니다. 또한 21절의 흘린 피에 관한 선언은 창세기 4:10에서 시작된 주제를 발전시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하나님은 아벨의 피가 땅에서 자신에게 부르짖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35:33에서도 흘린 피가 땅을 더럽힌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사야 26장의 마지막은 24장에서 땅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잘못으로 더럽혀졌다는 선언과도 이어집니다. 신약의 요한계시록 6:9–11에서도 죽임당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정의로운 판단을 요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억울하게 흘린 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주제적 연결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26장은 그러한 후대의 환상을 미리 자세히 설명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생명과 그들이 당한 불의를 모두 기억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두 개의 문 사이에서

이사야 26:1–21 본문 →

처음에 사람들은 구원으로 보호받는 도시의 문을 열었습니다. 마지막에 그들은 하나님이 지켜 주시는 방의 문을 닫습니다. 그리고 그 문 밖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정의를 행하십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구원을, 하나님은 죽음의 자리에서조차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실패가 반드시 놀라운 성공으로 바뀔 것이라는 보증이 아닙니다. 이사야 26장의 평화는 불의를 모른 척하기 때문에 가능한 평화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감추어진 피까지 드러내어 판단하시는 분이기에 기다릴 수 있는 평화입니다.

그들은 아직 모든 심판이 끝난 세상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이 막연한 두려움으로만 가득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을 향해 「내 백성아」라고 부르시는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그들에게 숨을 곳을 알려 주시고, 심판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분 자신은 자기 거처에서 나오십니다. 땅에 사는 사람들의 죄를 물으시기 위해서입니다.

문은 닫혀 있고, 백성은 잠시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숨어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이 자기 거처에서 나오시자, 땅은 더 이상 그 안에 감추어져 있던 죽임당한 사람들의 피를 숨기지 못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