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28장
이 장의 자리 · 28–35장 · 잘못된 의지에 내릴 화
거짓 피난처와 하나님의 기초
이사야 28장에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건축가가 등장합니다.
한쪽은 자신들이 무너지지 않을 안전한 곳을 확보했다고 믿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어떤 재앙이 닥쳐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무언가를 세우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안전을 확보했다고 말하고, 하나님은 기초를 놓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선언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위기가 자신들을 비켜 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위기가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그 위기 앞에서도 의지할 수 있는 기초를 놓으십니다.
그런데 이 장은 기초가 될 돌의 약속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는 한 농부가 등장합니다. 그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곡식을 타작합니다. 작물마다 다른 방법을 사용하며, 곡식을 끝없이 두드리지도 않습니다.
왜 거짓 피난처에 대한 심판이 농부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일까요?
왕관을 쓴 도시가 발에 짓밟히다
에브라임의 왕관은 무엇인가?
이사야는 탄식으로 시작합니다.
아, 에브라임의 술 취한 자들이 뽐내는 왕관아!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있는 시들어 가는 꽃, 곧 포도주에 쓰러진 자들의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장식아!이사야 28:1 · 두루새김
여기서 에브라임은 북왕국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이름입니다. 북왕국의 수도 사마리아는 언덕 위에 자리한 도시였습니다(열왕기상 16:24). 따라서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와 「뽐내는 왕관」이라는 표현은 사마리아가 주변 지역을 내려다보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왕관은 왕의 권위와 영광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 왕관은 술 취한 자들이 「뽐내는」 왕관입니다.
도시의 높이와 아름다움이 자기 영광에 대한 확신으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왕관은 오래 유지되는 권위를 상징하지만, 꽃은 시간이 지나면 시듭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닌 힘과 영광이 튼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눈에는 그것이 이미 시들기 시작한 꽃처럼 보입니다.
이사야의 시대에 북왕국은 아시리아의 압박 아래 놓였고, 사마리아는 결국 함락되었습니다(열왕기하 17:3–6). 이 예언은 그러한 역사적 위기와 잘 어울립니다. 다만 본문 자체는 정확히 언제 선포되었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1절은 「술 취한 자들」과 「포도주에 쓰러진 자들」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7–8절에서는 제사장과 예언자들까지 술 때문에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술에 취해 판단력을 잃은 모습으로 그들의 지도력과 자신을 바라보는 태도의 문제를 드러냅니다.
폭풍 앞에서 시드는 꽃
보십시오, 주께 강하고 힘센 자가 있습니다. 쏟아지는 우박처럼, 파괴하는 폭풍처럼, 넘쳐흐르는 거센 물처럼, 그가 그 왕관을 손으로 땅에 내던질 것입니다.이사야 28:2 · 두루새김
이 존재가 누구인지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북왕국에 대한 아시리아의 군사적 위협을 생각하면 아시리아의 공격 세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그 세력이 얼마나 강한가보다, 그 힘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자랑하던 왕관이 마치 손에 들린 물건처럼 쉽게 던져집니다. 이어서 3절에서는 발에 짓밟힙니다.
높은 곳에 있던 것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옵니다.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있는 아름답지만 시들어 가는 꽃은, 여름이 오기 전에 먼저 익은 무화과처럼 될 것입니다. 누군가 그것을 보면 손에 쥐자마자 삼켜 버릴 것입니다.이사야 28:4 · 두루새김
여름 전에 먼저 익은 무화과는 발견하는 사람에게 반가운 열매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는 열매의 달콤함보다 그것이 얼마나 빨리 먹혀 버리는지가 중요합니다. 사마리아가 자랑하던 아름다움과 영광도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왕관은 떨어져 짓밟히고, 무화과는 순식간에 삼켜집니다. 하나는 높이의 상실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의 소멸입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왕관이 다시 등장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왕관이 되시는 날
아름다움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아름다움이 나타나다
그날에 만군의 여호와야훼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남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왕관, 영광스러운 꽃관이 되실 것입니다.이사야 28:5 · 두루새김
두 구절은 왕관과 아름다움, 영광을 나타내는 표현들을 되풀이합니다. 처음에는 도시가 자기 영광을 왕관처럼 쓰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자신이 남은 백성의 왕관이 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백성에게 다른 왕관을 선물하신다는 뜻보다 깊습니다. 그분 자신이 백성의 영광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심판은 철저하지만 모든 사람이 사라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남은 백성에게 새로운 영광을 주십니다.
재판하는 사람에게는 올바르게 판결하는 영이 되고, 성문에서 공격을 물리치는 사람들에게는 힘이 되실 것입니다.이사야 28:6 · 두루새김
여기에는 공동체의 두 가지 중요한 책임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정의롭게 판단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공동체를 위협하는 세력에 맞서는 일입니다.
원문에서는 성문을 향한 움직임이 자기 성문을 방어하는 상황인지, 적의 성문까지 밀어붙이는 상황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투의 압박을 되밀어 내는 힘이 필요하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사야가 바라보는 회복은 막연한 종교적 감정에 머물지 않습니다. 재판이 바르게 이루어지고, 사람들이 위협 앞에서 공동체를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본문은 다시 급격하게 방향을 바꿉니다.
제사장과 예언자들마저 비틀거리다
그런데 이들도 포도주 때문에 비틀거리고, 독한 술 때문에 헤맸습니다. 제사장과 예언자가 독한 술에 비틀거리고 포도주에 삼켜져, 술 때문에 헤맸습니다. 환상을 볼 때도 비틀거리고, 판결을 내릴 때도 휘청거렸습니다.이사야 28:7 · 두루새김
「그런데 이들도」라는 말은 앞에서 에브라임의 술 취한 자들을 묘사한 것과 연결됩니다. 여기서 장면의 범위가 북왕국에서 남왕국 유다와 예루살렘의 지도층으로 옮겨 간다고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14절에서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사람들이 직접 책망받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고 전해야 합니다. 제사장은 백성에게 하나님의 가르침을 알리고 올바른 판단을 돕는 책임을 가집니다(레위기 10:10–11; 신명기 17:8–11).
공동체가 올바른 방향을 찾는 데 필요한 지도력이 무너진 상태입니다.
모든 상이 토한 것과 오물로 가득 차서 깨끗한 곳이 하나도 없었습니다.이사야 28:8 · 두루새김
화려한 잔치의 모습이 역겨운 장면으로 뒤집힙니다. 이사야는 지도자들의 상태를 점잖게 포장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중요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과 실제로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뚜렷하게 대조합니다.
이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아이 말처럼 조롱하다
누가 누구를 가르치려는가?
그들이 비웃으며 말했습니다. 「그가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려는 거냐? 누구에게 소식을 설명하려는 거냐? 젖을 뗀 아이들에게냐? 이제 막 젖 먹기를 그만둔 아이들에게냐?」이사야 28:9 · 두루새김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를 우습게 여깁니다.
「『차브 라차브,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 카브 라카브, 거기 조금, 거기 조금』이라고 하니 말이다.」이사야 28:10 · 두루새김
본문이 이사야의 교육 방식을 설명하는 것인지, 그를 조롱하는 사람들의 말소리를 재현하는 것인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9절의 질문과 13절의 반전까지 함께 읽으면, 이 표현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의 태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해하기 싫어하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듣다
참으로 여호와야훼께서는 더듬거리는 입술과 다른 언어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이사야 28:11 · 두루새김
하나님의 말씀이 어린아이의 소리처럼 들린다고 조롱하던 사람들이 이제 정말로 알아듣기 어려운 언어를 듣게 됩니다. 이것을 이방 침략자들의 언어와 연결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백성에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앞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쉼이다. 지친 이를 쉬게 해라. 이것이 편안한 쉼이다.」 그러나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이사야 28:12 · 두루새김
「지친 이를 쉬게 해라」는 명령은 다른 사람의 피로와 고통을 덜어 주어야 한다는 사회적 책임도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의 뜻은 정의와 공정,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돌보는 삶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이사야 1:16–17).
그들은 이해할 능력이 없어서 듣지 못한 것만은 아닙니다. 듣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심판은 단순히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에 대한 처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신 쉼의 길을 거부한 사람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조롱하던 소리가 심판의 말씀이 되다
13절에서는 10절의 소리가 그대로 반복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야훼의 말씀은 그들에게 「차브 라차브,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 카브 라카브, 거기 조금, 거기 조금」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서지고, 덫에 걸려 붙잡히게 하려는 것입니다.이사야 28:13 · 두루새김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주는 길을 가르치지만, 그 말씀을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심판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말씀이 약해서 사람들을 구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쉼의 말씀을 조롱하며 거절했습니다.
지도자들은 말씀의 소리를 흉내 낼 수 있었지만, 그 말씀에 순종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가장 자연스러운 읽기 가운데 하나는 술 취한 제사장과 예언자들이 이사야의 가르침을 조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루새김의 「그들이 비웃으며 말했습니다」는 이 읽기를 따릅니다.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는 전통적으로 명령과 규칙, 측량줄이나 줄을 차례로 설명하는 말로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에 젖 뗀 아이들이 등장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표현을 어린아이에게 하는 말처럼 들리는 소리의 반복으로 이해할 근거가 있습니다. 다만 히브리어의 각 음절이 반드시 의미 없는 소리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규칙과 지시를 조금씩 가르치는 방식에 대한 불평일 수도 있습니다. 아시리아의 군대와 관리들은 유다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열왕기하 18:26에서는 유다 관리들이 아시리아 사신에게 아람어로 말해 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따라서 28:11을 하나님이 이방 민족의 공격과 지배를 통해 백성에게 심판을 알리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을 특정 민족으로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죽음과 언약을 맺었다고 믿는 사람들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의지한 것은 무엇인가?
내가 지도자들에게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야훼의 말을 들어라. 조롱하는 자들아, 예루살렘에서 이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아!」이사야 28:14 · 두루새김
이사야는 북왕국 에브라임의 교만에서 시작하여 남왕국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게 말씀을 돌립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너희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음과 언약을 맺었고, 스올과도 약속을 맺었다. 휩쓸어 오는 채찍이 지나가도 우리에게는 닿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거짓을 피난처로 삼고 속임수 속에 숨었기 때문이다.』」이사야 28:15 · 두루새김
이사야가 지도자들의 태도를 풍자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군사적 선택으로 어떤 재앙도 피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말 역시 지도자들이 실제로 자신들의 정책을 거짓이라고 인정하며 자랑했다는 뜻이라기보다, 이사야가 그들의 태도를 폭로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안전장치를 영리한 전략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이사야의 눈에는 거짓과 속임수에 불과했습니다.
거짓은 현실을 바꾸지 못합니다. 다만 현실을 잘못 보게 만들 뿐입니다. 사람들은 위험이 사라졌다고 믿을 수 있지만, 그 믿음 때문에 위험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거짓 피난처의 가장 큰 위험은 그것이 무너진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무너지기 전까지 자신이 안전하다고 믿게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아시리아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다른 강대국과 외교적 협약을 맺는 상황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특히 이사야 30–31장에는 이집트의 도움을 의지하는 유다의 정책이 등장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이집트와의 동맹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할 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15절은 이집트라는 나라를 직접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어떤 외교 협약이 이 말의 구체적인 배경이었는지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시온에 놓으시는 모퉁잇돌
거짓 피난처와 시험을 거친 돌
그러므로 주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시온에 기초가 될 돌을 놓는다. 시험을 거친 돌, 귀한 모퉁잇돌, 단단히 놓인 기초다. 믿는 이는 허둥대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28:16 · 두루새김
돌은 건물을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특히 모퉁잇돌은 건물의 방향과 구조를 결정하는 중요한 돌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돌이 믿을 만한 기초임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자신감 있는지 증명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의지할 대상이 실제로 튼튼한지를 보여 주십니다.
이 돌을 다윗 왕조의 정당한 통치, 시온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이 세우시는 튼튼한 통치 질서와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책으로 도시를 지키려 하지만, 하나님은 시온의 안전을 위한 참된 기초를 자신이 놓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믿는 사람은 왜 허둥대지 않는가?
히브리어 본문에는 서두르지 않을 것이라는 표현이 있으며, 두루새김은 이를 「허둥대지 않을 것이다」(חוּשׁ)로 옮겼습니다. 이 문맥에서는 위기 앞에서 다급하게 안전을 확보하려는 태도와 대조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을 가진 사람은 어떤 위기에서도 불안이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또한 현실적인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믿음은 위험을 부정하는 태도가 아니라, 위험 앞에서 무엇을 마지막으로 의지할 것인지 결정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으로 건물을 측량하시는가?
17절에서는 건축의 이미지가 더욱 구체적으로 발전합니다.
「내가 정의를 길이를 재는 줄로 삼고, 의로움을 벽이 똑바로 섰는지 살피는 추로 삼겠다. 우박이 거짓으로 만든 피난처를 쓸어 가고, 물이 너희가 숨어 있는 곳을 휩쓸 것이다.」이사야 28:17 · 두루새김
건축할 때 이런 줄과 추는 건물이 올바른 방향과 균형을 갖추도록 하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정의와 의로움을 그 도구로 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유치한 반복이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우습게 여기던 올바른 기준으로 그들의 피난처를 재십니다.
거짓 피난처는 그 기준 앞에서 버티지 못합니다.
이사야가 문제 삼는 것은 지도자들이 건물을 제대로 세우지 못했다는 기술적 실패가 아닙니다. 그들이 삶과 공동체를 세우는 기준 자체를 잘못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짧은 잠자리와 좁은 덮개
18–19절은 거짓된 안전이 실제로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어지는 심판은 한 번의 위협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침마다, 낮에도 밤에도 지나갑니다.
잠자리가 너무 짧아 몸을 뻗을 수 없고, 덮개가 너무 좁아 몸을 웅크려도 덮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이사야 28:20 · 두루새김
아무리 자세를 바꾸어도 편안해질 수 없습니다. 이 비유는 그들이 의지한 피난처가 실제로 필요한 안전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12절의 「쉼」과도 대조됩니다. 하나님은 지친 사람들에게 쉼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거절하고 거짓을 피난처로 삼은 사람들은 결국 제대로 누울 자리조차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려던 쉼을 거부한 사람들이, 스스로 마련한 피난처에서는 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문맥상 특별히 중요한 것은 이 돌이 「시온」에 놓인다는 사실입니다. 돌을 특정 인물 한 사람과 직접 동일시할 근거는 이 구절 자체에서 충분히 제시되지 않습니다. 시편 118:22에서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두 본문은 서로 다른 상황에서 돌의 이미지를 사용하지만, 인간의 판단과 하나님이 세우시는 기초 사이의 대조라는 공통된 주제를 지닙니다. 로마서 9:33과 베드로전서 2:6은 이사야의 돌에 관한 말씀을 인용하며,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을 설명합니다. 특히 신약의 인용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표현이 나타납니다. 이는 칠십인역이 이사야 28:16의 마지막을 옮긴 방식과 연결됩니다. 단단한 기초를 신뢰하는 사람은 위기 앞에서 당황하여 허둥댈 필요가 없고, 그 기초가 무너지지 않기 때문에 결국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방향으로 의미가 연결될 수 있습니다. 신약은 이 약속을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깊이 읽습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처음 전한 메시지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기초와 인간이 만든 거짓 피난처의 대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향해 일어나시는 낯선 일
프라침산과 기브온 골짜기를 기억하라
여호와야훼께서 프라침산에서처럼 일어나시고, 기브온 골짜기에서처럼 거세게 분노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일, 그 기이한 일을 하시려는 것입니다. 자기의 일, 그 낯선 일을 이루시려는 것입니다.이사야 28:21 · 두루새김
과거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적들과 싸우셨습니다. 이제는 그분이 예루살렘의 교만한 지도자들을 향해 일어나실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일어나셨던 그 방식이, 이제는 자기 백성의 잘못을 심판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구원 사건을 자랑하던 사람들에게는, 그 하나님이 자신들을 향해 일어나신다는 사실이 낯설고 충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에 하나님이 자신들을 위해 싸우셨다는 기억이, 지금도 하나님이 무조건 자신들의 편에 서 계신다는 보증은 아닙니다.
아직 경고가 끝나지 않았다
내가 경고합니다. 「그러니 이제 조롱하지 마라. 그러지 않으면 너희를 묶은 줄이 더 단단해질 것이다. 온 땅을 완전히 멸망시키기로 정하셨다고 내가 주, 만군의 여호와야훼께 들었기 때문이다.」이사야 28:22 · 두루새김
이 표현은 고집스럽게 듣지 않는 태도가 그들을 더 깊은 심판으로 몰아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앞의 모든 심판 선언은 단순히 미래를 알려 주는 정보가 아닙니다. 지금 듣는 사람들의 응답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사야는 다시 한번 방향을 바꿉니다.
심판의 무서움을 말하던 예언자가 갑자기 농부의 일상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프라침산은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친 사건과 연결됩니다. 사무엘하 5:20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적들을 무너뜨리셨다고 고백하며 그곳을 바알 프라침이라고 부릅니다. 기브온 골짜기는 여호수아 10장의 전쟁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셨고, 적군을 향해 큰 우박을 내리셨습니다(여호수아 10:10–11). 「온 땅」이 유다 전체를 가리키는지 더 넓은 범위를 뜻하는지는 문맥상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위협의 규모가 매우 크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농부는 왜 언제나 밭을 갈지 않는가?
하나님의 지혜를 설명하는 가장 평범한 장면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어라. 주의 깊게 내 말을 들어라.」이사야 28:23 · 두루새김
이 명령은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 했던 지도자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려운 환상이나 정치적 경고가 아니라 농사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씨를 뿌리려고 밭을 가는 사람이 언제까지나 밭만 갈겠느냐? 흙을 뒤집고 고르게 하는 일만 계속하겠느냐?」이사야 28:24 · 두루새김
밭을 가는 것은 씨를 뿌리기 위한 준비입니다. 땅을 일구는 일이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그것이 농사의 최종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밭을 갈기만 하고 씨를 뿌리지 않는다면 수확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행동에도 목적과 순서가 있습니다.
그분이 땅을 뒤집고 단단한 것을 깨뜨리실 때, 그것이 언제나 마지막 목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보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무질서하거나 목적 없는 행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비유입니다.
씨앗마다 다른 자리가 있다
「땅을 고르게 하고 나면 검은커민을 흩뿌리고 커민을 뿌리지 않겠느냐? 밀은 줄지어 심고, 보리는 정해진 자리에, 스펠트밀은 밭 가장자리에 심지 않겠느냐?」이사야 28:25 · 두루새김
검은커민과 커민은 서로 다른 향신료 작물입니다. 밀과 보리, 스펠트밀은 곡물입니다. 농부는 이 작물들을 아무렇게나 뿌리지 않습니다. 작물의 종류와 특성에 따라 알맞은 방식과 자리를 선택합니다.
「그의 하나님께서 올바른 방법을 일러 주시고 가르쳐 주신다.」이사야 28:26 · 두루새김
이것은 일상의 기술과 지혜를 하나님의 다스리심에서 분리하지 않는 구약의 사고방식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전쟁과 심판 같은 거대한 역사적 사건 속에서만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농부가 땅을 이해하고 작물에 알맞은 방법을 사용하는 일에서도 그분의 지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농부의 지혜는 씨를 뿌리는 일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농부는 곡식을 끝없이 두드리지 않는다
왜 작물마다 다른 도구를 사용하는가?
「검은커민은 날카로운 타작 도구로 털지 않고, 커민 위로는 수레바퀴를 굴리지 않는다. 대신 검은커민은 막대기로 두드려 떨고, 커민은 몽둥이로 떤다.」이사야 28:27 · 두루새김
수확물을 얻으려면 타작해야 하지만, 타작 과정에서 씨앗을 망가뜨리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타작은 곡식을 파괴하기 위한 행동이 아닙니다. 곡식을 제대로 얻기 위한 행동입니다.
곡식을 얻으려면 두드려야 하지만, 끝없이 두드리지는 않는다
「빵을 만들 곡식은 빻아야 하지만, 타작을 끝없이 하지는 않는다. 수레바퀴와 말들을 요란하게 몰아도 곡식을 으깨 버리지는 않는다.」이사야 28:28 · 두루새김
농부는 자신의 힘을 얼마나 세게 사용할 수 있는지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는 작물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그 목적에 맞게 행동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사야는 하나님의 일하심에도 지혜로운 목적과 분별이 있음을 말합니다.
이 비유를 근거로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같은 정도의 고난을 주시거나, 모든 심판이 언제나 가볍게 잘못을 바로잡는 일로 끝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농부의 비유는 각 개인이 겪는 고난의 정도를 계산하는 공식이 아닙니다. 이 장 전체의 문맥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심판과 구원의 일을 하나님의 지혜 아래에서 이해하도록 돕는 비유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인간의 훈육이나 고난에 무조건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농부가 곡식을 타작한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농부의 지혜가 보여 주는 것은 목적과 절제입니다.
「이것도 만군의 여호와야훼께서 주신 것이다. 그분은 놀라운 조언을 베푸셨고, 뛰어난 지혜를 보여 주셨다.」이사야 28:29 · 두루새김
하나님의 말씀을 어리석다고 여긴 지도자들보다, 하나님이 주신 질서를 따라 일하는 농부가 더 깊은 지혜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구절의 세부적인 동작에는 번역상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28절의 첫 문장을 곡식을 빻는다는 진술로 읽을 수도 있고, 그렇게까지 으깨겠느냐는 반문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수레바퀴와 말들의 움직임이 무엇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지도 완전히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흐름에서 농부가 타작을 끝없이 계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밭을 가는 농부의 손에서 끝나는 심판의 말씀
하나님은 허물어야 할 것을 허무시지만, 기초를 놓으시는 분이기도 하십니다. 거짓을 쓸어 버리시지만, 믿을 만한 돌을 마련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단순히 무너뜨릴 힘이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무엇을 무너뜨리고 무엇을 세워야 하는지, 언제 갈고 언제 심으며 어떻게 열매를 얻어야 하는지를 아시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그 지혜를 가장 평범한 농부의 손에서 보여 줍니다.
밭갈이는 끝납니다.
농부는 씨앗을 뿌립니다.
수확한 곡식을 타작할 때에도 그는 곡식을 끝없이 짓이기지 않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망가진 곡식이 아니라 거두어들일 곡식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28장은 그 농부의 분별 있는 손길을 보여 준 뒤, 그것마저 하나님에게서 나온 지혜라고 선언하며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