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16장
이 장의 자리 · 3–31장 · 세 친구와의 논쟁
하나님께 상처 입고 하나님께 증인을 구하다
욥기 16장에는 이상한 법정이 등장합니다. 피고는 욥이고, 그를 고발하는 증인은 다름 아닌 그의 몸입니다. 바싹 마른 몸이 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고, 친구들은 그 모습을 죄의 증거처럼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욥은 그 법정의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늘을 바라보며 자신을 위해 증언할 다른 증인이 있다고 말합니다.
「바싹 마른 제 몸이 증인처럼 일어나, 제 앞에서 저를 고발합니다」(8절)와 「봐, 지금도 내 증인은 하늘에 있어」(19절), 이 두 문장이 16장의 양 끝을 붙들고 있습니다. 땅에서는 욥의 고통이 유죄의 증거가 되고 있지만, 욥은 하늘에 자신을 위한 증언이 있다고 믿거나 적어도 그렇게 호소합니다.
여기에 더 깊은 역설이 있습니다. 욥이 자신의 고통을 일으키셨다고 지목하는 분도 하나님이고, 마지막으로 눈물을 쏟아 놓는 대상도 하나님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적처럼 대하신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관여하시는 진실의 심판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욥이 원하는 것은 고통을 설명해 줄 이론이 아니라, 자신의 억울함을 끝까지 들어 줄 증인입니다.
괴로움을 주는 위로자들 — 말이 사람을 해칠 때
엘리파즈는 앞 장에서 욥의 말이 바람 같은 지식이며, 그의 입이 스스로 죄를 드러낸다고 주장했습니다(15:2, 5–6). 욥은 바로 그 표현을 돌려줍니다.
「이런 말은 이미 많이 들었어. 너희는 하나같이 괴로움을 주는 위로자야.」욥기 16:2 · 두루새김
「바람 같은 말은 끝도 없는 거야? 무엇이 너를 자극하기에 자꾸 대답하는 거야?」욥기 16:3 · 두루새김
욥의 첫 번째 비판은 친구들의 주장이 새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통적인 지혜를 풍부하게 알고 있고, 악인이 마침내 멸망한다는 원칙을 여러 방식으로 반복합니다. 하지만 욥은 바로 그런 이야기를 이미 충분히 들었습니다.
2절의 「괴로움을 주는 위로자」는 히브리어로 메나하메(נָחַם) 아말(עָמָל)입니다. 위로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과 고생·고통을 뜻하는 말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위로하려고 온 사람들이 도리어 고통을 가져오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역설입니다.
욥기의 시작에서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려고 찾아왔습니다(2:11). 처음에는 그의 고통이 너무 큰 것을 보고 일주일 동안 아무 말 없이 곁에 앉아 있었습니다(2:13). 그런데 말하기 시작한 뒤로 그들의 위로는 점차 욥을 심문하고 책망하는 방향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들은 욥의 고통을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문제로 이해했지만, 정작 고통당하는 욥이 무엇을 말하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3절의 질문은 친구가 고통당하는 사람의 이야기에 반응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기 생각이 도전받는 것을 견디지 못해 반박하고 있는지를 되묻게 합니다. 이어서 욥은 역할을 바꾸어 생각해 보자고 제안합니다.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어. 너희가 내 처지에 있다면, 나도 말을 엮어 너희를 공격하고 너희를 향해 고개를 흔들 수 있겠지.」욥기 16:4 · 두루새김
고통의 바깥에 서 있는 사람은 쉽게 말을 엮을 수 있습니다. 여러 원칙을 조합하여 앞뒤가 맞는 설명을 만들고, 그 설명에 맞지 않는 사람을 향해 고개를 흔들 수도 있습니다. 고개를 흔드는 행동은 성경에서 조롱과 비난을 나타내기도 합니다(시편 22:7; 예레미야 18:16). 친구들의 말은 단순한 논쟁이 아니라 상대를 낮추어 보는 태도를 담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다음 절은 뜻밖의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내 입으로 너희에게 힘을 주고, 입술을 움직여 너희 아픔을 덜어 줄 수도 있겠지.」욥기 16:5 · 두루새김
여기에는 두 가지 읽기가 가능합니다. 하나는 진정한 대조로, 욥이 친구들의 처지에 있었다면 실제로는 그들을 격려하고 아픔을 덜어 주는 말을 택했으리라는 뜻입니다. 다른 하나는 반어적인 읽기로, 4절의 고개를 흔드는 행동과 이어 읽으면 입으로 힘을 준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는 모습을 흉내 낸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어느 쪽인지 명확하게 결정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읽기 모두 친구들의 말이 실제로 욥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는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나는 말을 해도 아픔이 줄지 않아. 입을 다문다고 내게서 무슨 고통이 떠나겠어?」욥기 16:6 · 두루새김
말과 침묵 모두 고통을 없애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욥은 계속 말합니다. 그가 말을 멈출 수 없는 까닭은 아직 대답받지 못한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더 이상 친구들에게 충분한 위로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음 장면에서 자신의 말을 하나님께로 돌립니다.
자신의 몸이 자신을 고발하다
「이제 그분께서 나를 지치게 하셨어.」 욥이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제 곁에 있던 이들을 모두 무너뜨리셨습니다.」욥기 16:7 · 두루새김
욥은 하나님을 가리켜 「그분」이라고 말하다가 곧 「주님」이라고 직접 부릅니다. 친구들과 논쟁하던 사람이 이제 그들 앞에서 하나님께 말을 걸기 시작한 것입니다. 친구들은 그의 고통을 해석하려고 하지만, 욥은 자신의 고통이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풀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곁에 있던 이들」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욥은 이미 자녀들을 잃었고(1:18–19), 많은 관계가 무너진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자신의 삶을 이루던 인간관계가 무너졌다는 탄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 몸을 쪼그라들게 하셨고, 그것이 저에게 불리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바싹 마른 제 몸이 증인처럼 일어나, 제 앞에서 저를 고발합니다.」욥기 16:8 · 두루새김
엘리파즈는 욥에게 유죄를 선언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욥 자신의 입이라고 말했습니다(15:6). 엘리파즈에게는 욥의 말이 욥을 고발하는 증거였습니다. 이제 욥은 자기 몸까지 자신을 고발하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친구들이 생각하는 세계에서는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악인은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나 욥기의 독자는 친구들이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서두에서 하나님은 욥을 온전하고 정직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라고 평가하셨습니다(1:8; 2:3).
욥의 몸은 그가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지만, 그가 왜 고통받는지는 증명하지 못합니다.
친구들은 그 둘을 하나로 묶고 있습니다. 욥은 바로 그 잘못된 연결 때문에 두 번 고통받습니다. 한 번은 몸의 고통으로, 또 한 번은 그 몸을 보고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의 말로 고통받습니다.
더구나 욥이 느끼기에 그 불리한 증거를 만들어 놓으신 분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러니 그는 단순히 사람들의 오해를 풀어 달라고 요구할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런 상태에 두셨는지까지 물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의 「바싹 마른 제 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여기서 몸이 야위고 약해진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앞부분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구체적인 동작에는 번역상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제 몸을 쪼그라들게 하셨고」로 옮겼습니다. 그 결과가 욥에게 불리한 증거로 제시된다는 흐름은 분명합니다.
보호자가 공격자로 보일 때
이제 욥의 말은 급격히 거칠어집니다.
욥이 이어 말했습니다. 「그분께서 분노하여 나를 찢으시고 적으로 대하셔. 나를 향해 이를 가셔. 내 원수가 되신 그분께서는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셔.」욥기 16:9 · 두루새김
「나는 평온하게 지냈지만 그분께서 나를 산산이 부수셨어. 내 목덜미를 붙잡아 나를 으스러뜨리시고, 나를 그분의 과녁으로 세우셨어.」욥기 16:12 · 두루새김
「나를 무너뜨리고 또 무너뜨리시며, 용사처럼 내게 달려드셔.」욥기 16:14 · 두루새김
처음에는 짐승처럼 찢고 이를 가시는 모습입니다. 다음에는 공격자에게 넘겨지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어서 목덜미를 붙잡아 부수시고, 과녁으로 세워 화살을 쏘시고, 마지막에는 용사가 성벽을 뚫듯 거듭 공격하시는 모습이 이어집니다. 욥은 자신이 공격을 막아 낼 능력도, 피할 곳도 없는 상태라고 느낍니다.
12절은 시간의 대조가 선명합니다. 욥은 오래전부터 하나님을 거슬러 싸우다가 마침내 패배한 사람처럼 자신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평온한 삶 가운데 있다가 갑자기 무너진 사람입니다. 그의 집에는 자녀들이 있었고, 재산이 있었으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상의 질서가 있었습니다.
그의 고통은 단지 많은 것을 잃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믿었던 하나님의 보호와 지금 경험하는 현실을 어떻게 함께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데 있습니다.
13절에서는 그 공격이 몸속으로 파고듭니다.
「그분의 활 쏘는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 그분께서는 조금도 봐주지 않고 내 몸을 깊이 꿰뚫어 상처를 내셔.」욥기 16:13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콩팥을 꿰뚫고 쓸개즙을 땅에 쏟는 모습으로 이 공격을 표현합니다. 이는 실제로 화살을 맞았다는 기록이 아닙니다. 그는 피부와 뼈의 아픔을 넘어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이 파괴되는 듯한 고통을 말하고 있습니다. 14절의 「무너뜨리고 또 무너뜨리시며」는 전투에서 성벽이 잇달아 무너지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향해 입을 크게 벌리고, 모욕하며 내 뺨을 때려. 모두 한데 모여 나에게 달려들어.」욥기 16:10 · 두루새김
9절의 날카로운 눈, 10절의 크게 벌어진 입과 뺨을 때리는 손, 13절의 활 쏘는 사람들은 공격의 모습으로 서로 이어집니다. 본문은 그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공격이라고 느끼는 고통과 사람들의 모욕을 한 장면 안에 겹쳐 놓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사람들에게서도 보호받지 못합니다. 고통으로 약해진 사람이 도리어 비난과 조롱의 표적이 되는 모습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구별해야 합니다. 욥이 하나님을 폭력적인 공격자로 묘사한다고 해서, 이야기의 서술자가 하나님을 그렇게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1–2장은 욥이 알지 못하는 하늘의 장면을 독자에게 보여 줍니다. 욥에게 닥친 재난에는 고발자의 행동이 개입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용하시는 과정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욥은 그 장면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욥의 말을 단지 사실을 몰라서 하는 잘못된 불평으로 처리해서도 안 됩니다. 그의 말은 고통의 한복판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경험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은 13절의 콩팥과 쓸개즙 표현을 「내 몸을 깊이 꿰뚫어 상처를 내셔」로 옮겼습니다. 고대 히브리어에서 콩팥은 실제 신체 기관을 가리킬 뿐 아니라 인간의 깊은 내면과 연결되기도 합니다. 시편 26:2에서는 마음과 깊은 속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말할 때 이 표현이 사용됩니다. 14절의 「무너뜨리고 또 무너뜨리시며」에 해당하는 원문은 같은 계열의 낱말을 거듭 사용하는 표현으로, 한 번 뚫린 자리를 다시 뚫는 듯한 반복적인 공격이 강조됩니다.
먼지에 박힌 뿔과 깨끗한 손
격렬한 공격의 묘사가 끝나자 욥은 자신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나는 거친 자루천을 꿰매 맨살에 입고, 내 뿔을 먼지 속에 처박았어.」욥기 16:15 · 두루새김
자루천은 성경에서 슬픔과 애도를 표현할 때 자주 등장합니다. 야곱은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자루천을 두르고 오랫동안 슬퍼했습니다(창세기 37:34). 그런데 욥은 자루천을 단지 걸쳤다고 하지 않고 「꿰매 맨살에 입고」라고 말합니다. 슬픔을 나타내는 옷을 벗으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슬픔이 자신의 존재에 달라붙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뿔은 동물의 힘에서 유래하여 힘이나 위엄, 높아진 지위를 상징할 수 있습니다. 한나의 노래에는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뿔이 높아졌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사무엘상 2:1).
그런데 욥의 뿔은 위로 들려 있지 않습니다. 먼지 속에 박혀 있습니다.
이 장면을 힘과 명예가 땅에 떨어진 모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그 상징을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자신을 높이거나 지킬 수 없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내 얼굴은 울어서 붉어졌고,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어.」욥기 16:16 · 두루새김
「죽음의 그늘」은 눈꺼풀 위에 내려앉은 짙은 어둠을 통해 그가 얼마나 지쳐 있고 죽음 가까이에 있다고 느끼는지를 나타냅니다. 독자가 실제로 마주하는 것은 무기를 들고 맞서는 용사가 아니라, 자루천을 꿰매 맨살에 입고 얼굴이 붉어질 만큼 울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모습에 이어지는 17절이 이 단락의 의미를 결정합니다.
「내 손으로 폭력을 휘두른 적도 없고, 내 기도도 깨끗한데 말이야.」욥기 16:17 · 두루새김
욥이 느끼는 하나님의 공격에는 찢는 동작, 화살, 무너뜨리는 힘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손으로 폭력을 휘두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전혀 죄를 지은 적 없는 완전무결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내세우는 것은 자신이 이런 고난을 당할 만한 폭력을 저지르지 않았으며,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도 속임수나 악한 의도로 더럽혀지지 않았다는 항변입니다.
엘리파즈는 욥의 말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태도를 드러낸다고 비난했습니다(15:4, 13).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향해 차분한 말만 하지 않습니다. 분노하고, 질문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쏟아 냅니다. 그러면서도 그 모든 말을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자리에서 하고 있습니다.
욥에게 깨끗한 기도란 고통을 감추고 평온한 말을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숨기지 않는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이 진실을 누가 인정해 줄 것입니까? 친구들은 믿어 주지 않습니다. 자신의 몸조차 불리한 증거로 보입니다.
그래서 욥은 마침내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땅과 하늘에 말을 겁니다.
땅아, 내 피를 덮지 마라
「땅아, 내 피를 덮지 마라. 내 부르짖음이 머물러 멎을 자리가 없게 해라.」욥기 16:18 · 두루새김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하나님은 가인에게 아우의 피가 땅에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 4:10). 아벨은 죽어서 자신의 억울함을 직접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피는 땅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욥도 자신의 고통이 아무런 설명 없이 묻히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아벨의 피처럼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여기서 피를 덮는 행위는 단순히 시신을 묻는 일이 아니라, 잘못된 죽음의 흔적이 사라져 더 이상 그 사건을 따질 수 없게 되는 상황을 떠올리게 합니다. 욥이 두려워하는 것도 그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억울한 고통을 당한 채 사라지고, 남은 사람들이 그를 죄인으로 기억하며, 아무도 진실을 밝히지 않는 상황을 원하지 않습니다.
부르짖음이 「머물러 멎을 자리」가 없기를 바라는 말은, 그 소리가 멈추거나 잠잠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소원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침묵하게 되더라도 그가 제기한 질문만큼은 계속 남아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땅이 피를 덮지 않더라도, 그 피의 소리를 듣고 판단할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욥의 시선은 땅에서 하늘로 올라갑니다.
하늘의 증인 — 하나님과 다투는 사람을 위해 누가 말할 것인가
「봐, 지금도 내 증인은 하늘에 있어. 나를 위해 증언할 이는 저 높은 곳에 있어.」욥기 16:19 · 두루새김
8절에서는 욥의 바싹 마른 몸이 그를 고발했습니다. 19절에서는 하늘에 그를 위해 증언할 이가 있다고 말합니다.
증인의 방향이 바뀐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어려운 질문은 그 증인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내 증인」(עֵד)과 「나를 위해 증언할 이」(שָׂהֵד)에 해당하는 말을 나란히 놓지만, 그 정체를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첫째, 욥이 하나님 자신에게서 자신의 진실을 밝혀 줄 증인을 찾는다는 읽기입니다. 그의 결백을 완전하게 아실 수 있는 분도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욥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위해 말해 줄 하늘의 증인 또는 중재자를 바라본다는 읽기입니다. 바로 앞에서 하나님을 자신에게 적대적인 분으로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이 둘 중 어느 쪽인지 명확하게 확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21절에서 하나님과 옳고 그름을 따지는 장면이 이어지므로, 하늘의 증언이 욥의 억울함을 밝히는 일과 관련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욥은 9:32–33에서 하나님과 자신이 동등한 위치에서 재판을 받을 수 없으며, 양쪽 사이에서 판단할 사람이 없다고 탄식했습니다. 이제 16장에서 욥은 앞서 발견하지 못했던 중재의 가능성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증인이 실제로 나타나 말하거나 욥의 사건을 해결한 것은 아닙니다.
「내 친구들은 나를 비웃어. 나는 하나님을 향해 눈물을 흘려.」욥기 16:20 · 두루새김
여기에는 해석상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멜리차이 레아이 가운데 첫 낱말은 조롱하는 사람들과 관련하여 이해할 수도 있고, 말을 해석하거나 중재하는 사람과 관련하여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내 친구들은 나를 비웃어」로 옮겼습니다. 이것은 앞부분에서 친구들이 욥에게 괴로움만 주는 위로자들이 되었다고 비판한 흐름과 잘 어울립니다.
그런데 20절은 친구들에 대한 비판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이를 가시며 자신을 노려보신다고 말했습니다. 욥이 경험하는 하나님의 시선은 적대적입니다. 그러나 욥 자신의 시선은 여전히 하나님을 향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떠나셨다고 느끼면서도 하나님을 향해 울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해결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호소를 멈출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해 따져 주듯, 그 증인이 나를 위해 하나님과 옳고 그름을 따져 주면 좋겠어.」욥기 16:21 · 두루새김
이 문장의 히브리어는 문법적으로 간결하여 주어와 관계를 어떻게 연결할지 해석이 갈립니다. 한 가지 자연스러운 읽기는 누군가 사람이 친구를 위해 말해 주듯, 하나님 앞에서 한 인간을 위해 옳고 그름을 따져 주기를 바라는 것이고, 두루새김도 이렇게 옮겼습니다. 또 다른 읽기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따지는 일 자체를 사람 사이의 다툼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두 경우 모두 욥은 자기 자신만 말하는 상황에서 벗어나, 자신의 억울함을 대신 제시하거나 공정하게 다루어 줄 누군가를 원합니다.
「옳고 그름을 따져」는 다투어 따지고, 시비를 가리며, 옳고 그름을 밝히는 행위와 관련됩니다. 단순히 욥을 달래거나 위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고통이 끝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이 왜 이런 고통을 겪었는지, 자신이 정말 악인인지, 친구들의 판단이 옳은지를 제대로 밝혀야 합니다.
욥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잃어버린 자신의 진실을 되찾고 싶어 합니다.
「몇 해만 지나면 나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갈 테니까.」욥기 16:22 · 두루새김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은 하늘의 증인을 찾는 요구를 더욱 절실하게 만듭니다. 그는 아무 때나 진실이 밝혀져도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아직 살아 있고 말할 수 있을 때, 자신의 억울함이 들리기를 바랍니다.
이 장은 증인의 응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욥의 사건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21절에서는 특히 원문의 뒤쪽에 있는 「사람의 아들」과 「그의 벗」에 해당하는 말이 어떤 관계로 앞의 따지는 일을 설명하는지 쉽게 확정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다른 탄식들도 이러한 기도의 자리를 보여 줍니다. 시편 35편에서 시인은 거짓 증인들이 자신을 공격한다고 호소하고(35:11), 하나님께서 그 억울함을 보시고 잠잠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35:22–24). 시편 88편에서는 고통이 해소되었다는 선언 없이도 끝까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신약의 관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로 말하는 디모데전서 2:5와 주제적으로 연결해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기 16장이 그리스도를 직접 예언하거나 하늘의 증인을 명시적으로 그리스도라고 밝히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이 장은 구약의 고난받는 한 사람이 공정한 증언과 옳고 그름을 따져 주는 일을 얼마나 절실하게 요구하는지를 보여 주는 본문으로 읽어야 합니다.
땅에 남겨진 부르짖음
하나님께서 의로우시고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과, 어떤 사람에게 닥친 구체적인 고난의 원인을 자신이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욥의 친구들이 저지른 잘못은 하나님에 관해 말한 것 자체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한 내용을 가지고,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욥의 삶을 판결했습니다.
반대로 욥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인정하는 자리에서 말을 이어 갑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이렇게 대하시는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늘의 증인이 누구인지도 분명하게 밝히지 못합니다. 그의 항의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사라졌다는 단순한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진실을 아시고 그것을 바로 판단하실 수 있다는 기대가 여전히 그의 말속에 살아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이미 잃은 것을 되찾을 힘도 없고, 무너진 몸을 회복할 능력도 없습니다. 사람들을 설득할 말조차 거의 다 써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땅을 향해 「땅아, 내 피를 덮지 마라」 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며 「봐, 지금도 내 증인은 하늘에 있어」 하고 말합니다.
그 사이에 욥이 서 있습니다. 몸은 약해졌고, 얼굴은 울음으로 붉어졌으며, 친구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는 돌아오지 못할 길이 가까워졌다고 느낍니다.
그런데도 그의 눈은 하나님을 향해 있습니다.
그 눈에서는 아직 눈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욥은 눈물을 거두고 자신의 억울함을 잊는 대신, 그 눈물과 함께 자신의 사건을 하늘에 맡겨 놓습니다.
땅에서는 그의 고통이 죄의 증거로 읽히지만, 욥은 그 고통의 진실을 증언할 이가 하늘에 있기를 바라며 끝까지 부르짖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