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41장

이 장의 자리 · 38–41장 · 폭풍 속의 대답

두려운 괴물의 아름다움을 말씀하시는 하나님

욥기 41장에서 가장 놀라운 말은 리워야탄이 불을 뿜는다는 묘사가 아닙니다. 그토록 위협적인 존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리워야탄을 감히 건드릴 수 없다고 말씀하신 뒤, 뜻밖에도 「그 몸의 각 부분과 큰 힘, 아름다운 생김새를 두고 내가 잠잠히 있겠느냐?」(41:4) 하고 선언하십니다.

리워야탄은 인간에게 공포의 대상입니다. 날카로운 이빨이 있고, 몸은 무기로 뚫을 수 없으며, 움직이면 강한 자들조차 두려움에 빠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존재의 몸을 하나하나 살피시며 그 힘과 짜임새를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그 존재를 어떻게 피하거나 제압할지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그 존재가 얼마나 놀랍게 만들어졌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인간에게 두려움의 대상인 존재가 하나님에게는 감탄할 만한 창조의 작품으로 나타납니다.

이 차이를 발견하면 욥기 41장의 질문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이 괴물도 감당하지 못하는 네가 어떻게 나에게 대항하겠느냐」고 위협하시는 것일까요? 아니면 욥이 자신의 고난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전혀 다른 방식의 세계를 보여 주고 계시는 것일까요?

이 두 의미는 서로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41:2에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압도적인 힘이 강조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긴 묘사는 리워야탄의 무서움만이 아니라 그 몸의 정교함, 생명의 힘, 움직임의 장관까지 보여 줍니다.

앞 장에서 욥은 리워야탄을 낚싯바늘이나 작살로 붙잡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41장은 그 질문의 결론에서 시작하여, 이제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 존재를 머리부터 몸통, 그리고 지나간 자리까지 자세히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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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감당하지 못하는 존재 앞에서 하나님은 빚진 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욥기 41:1–3 본문 →

여호와야훼께서 욥에게 말을 이어 가셨습니다. 「보아라. 그것을 잡으려는 사람의 기대는 헛되고 만다. 그것을 보기만 해도 쓰러지지 않겠느냐?」욥기 41:1 · 두루새김

여기서 「그것을 잡으려는 사람」은 앞 장에서 리워야탄을 붙잡으려 했던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리워야탄을 사로잡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마주하는 순간 그 기대는 무너집니다. 싸워 보기도 전에 상대의 압도적인 모습만으로 힘을 잃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장면에서 리워야탄이 사람을 공격하는 모습을 묘사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그 존재를 보기만 해도 쓰러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위험은 실제 충돌이 일어나기 전부터 드러납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말씀의 방향을 갑자기 자신에게 돌리십니다.

「그것을 깨울 만큼 사나운 사람은 없다. 그러니 누가 내 앞에 맞서 서겠느냐?」욥기 41:2 · 두루새김

앞 문장은 리워야탄에 관한 것이고, 뒤 문장은 하나님에 관한 것입니다. 리워야탄을 깨울 만큼 사나운 사람조차 없다면, 리워야탄을 지으신 하나님 앞에서는 누가 자신의 힘을 내세울 수 있겠느냐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리워야탄을 자기와 같은 존재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둘 사이의 차이를 전제하십니다. 리워야탄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에 속한 존재이지만, 그 존재를 감당하지 못하는 인간이 창조주에게 자신의 능력을 근거로 맞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욥과 하나님의 긴 논쟁이 다시 떠오릅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사건을 변론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말을 들으시고 자신이 겪은 부당한 고난을 판단해 주시기를 요구했습니다(욥 23:3–7; 31:35).

하나님은 그 요구에 대해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단순히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입을 막는 장면으로 이해하면 중요한 부분을 놓칩니다.

그다음 말씀 때문입니다.

「누가 내게 먼저 무엇을 주었기에 내가 갚아야 하느냐? 온 하늘 아래 있는 것은 모두 내 것이다.」욥기 41:3 · 두루새김

그것은 힘의 문제가 아니라 빚과 보상의 문제입니다.

「누가 내게 먼저 무엇을 주었기에」라는 표현에는 누군가가 먼저 어떤 것을 주었고, 그 대가로 하나님이 갚으셔야 한다는 관계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먼저」(⁨קָדַם⁩)로 옮긴 히브리어 동사는 「내 앞에 먼저 나서다」, 「나보다 앞서다」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여기서는 먼저 무언가를 주어 하나님에게 갚으셔야 할 의무를 지울 수 있겠느냐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먼저 무언가를 드려 하나님을 빚진 분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이 말씀은 욥의 문제와 깊이 연결됩니다. 욥은 의롭게 살았습니다. 그 사실은 단순히 욥 자신의 주장이 아닙니다. 책의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직접 인정하신 사실입니다(욥 1:8; 2:3).

그런데 의롭게 살았다는 사실이 반드시 고통 없는 삶을 보장하는가요? 인간의 의로움은 하나님에게 특정한 보상을 주시도록 요구할 권리를 만들어 주는가요? 41:3은 바로 그 문제를 생각하게 합니다.

다만 이것을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책임지지 않으시므로 무엇이든 불의하게 하셔도 된다는 선언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정의를 무시하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속했으며, 누구도 하나님을 자기에게 빚진 분으로 만들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신뢰하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과, 자신의 의로움을 근거로 하나님에게 반드시 특정한 결과를 돌려주셔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욥의 고난이 마땅했다는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직 욥이 왜 고난을 당했는지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욥에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거래와 보상의 원리만으로 설명될 수 없음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하나님은 자신에게 속한 세계에 어떤 존재가 살아가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그 존재는 인간이 보기에는 무섭고 쓸모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의 아름다움을 말씀하십니다.

무서운 존재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시선

욥기 41:4–9 본문 →

「그 몸의 각 부분과 큰 힘, 아름다운 생김새를 두고 내가 잠잠히 있겠느냐?」욥기 41:4 · 두루새김

하나님은 이제 그 존재를 자세히 말씀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말씀하시려는 대상에는 큰 힘만이 아니라 「아름다운 생김새」도 포함됩니다. 여기에는 창조된 존재의 모습을 관찰하고 그 몸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묘사하려는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이 구절을 하나님이 그 존재의 몸과 능력을 설명하시겠다는 선언으로 읽기도 하고, 그 위세와 자랑에 관한 반문으로 읽기도 합니다. 다만 뒤따르는 내용이 실제로 리워야탄의 몸을 자세히 묘사한다는 점에서, 그 몸과 힘과 정교한 모습을 설명하는 도입으로 읽는 것은 충분히 자연스럽습니다.

벗길 수 없는 옷, 열 수 없는 문

「누가 그 몸을 덮은 겉옷을 벗길 수 있느냐? 누가 그 겹친 턱 사이로 들어갈 수 있느냐?」욥기 41:5 · 두루새김
「누가 문짝 같은 그 턱을 벌릴 수 있느냐? 둘레에 늘어선 이빨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욥기 41:6 · 두루새김

하나님은 리워야탄의 몸을 마치 옷을 입은 사람이나 문이 달린 건물처럼 묘사하십니다. 겉옷을 벗기는 것은 몸의 표면을 드러내는 행동입니다. 문짝 같은 턱을 벌리는 것은 닫힌 공간 안으로 들어가는 행동에 비유됩니다.

그러나 리워야탄에게는 그런 일이 통하지 않습니다.

평소에 닫혀 있는 입이 열리는 순간, 그 안에는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위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문짝 같은 턱이라는 이미지는 리워야탄의 입을 건물의 입구처럼 보이게 합니다. 하지만 이 문은 사람에게 출입을 허락하는 문이 아닙니다.

숨 쉴 틈조차 없는 방패들

「그 자랑은 방패처럼 줄지어 늘어선 비늘이다. 단단히 봉한 듯 꼭 닫혀 있다.」욥기 41:7 · 두루새김
「비늘 하나하나가 서로 바짝 붙어 있어, 그 사이로 바람도 들어가지 못한다.」욥기 41:8 · 두루새김
「서로 달라붙고 단단히 맞물려서 떨어지지 않는다.」욥기 41:9 · 두루새김

바람은 보통 아주 작은 틈도 비집고 들어갑니다. 하지만 이 존재의 몸을 덮는 비늘 사이로는 바람조차 들어갈 수 없다고 묘사합니다.

이어지는 두 구절에서는 붙어 있다는 사실이 반복됩니다. 이것은 몸이 얼마나 단단한지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부분이 하나의 몸을 이루는 정교한 결합을 보여 줍니다.

41:7의 「자랑」(⁨גַּאֲוָה⁩)에는 위엄이나 높아짐을 가리킬 수 있는 히브리어 낱말이 사용됩니다. 이 단어에는 문맥에 따라 교만이라는 부정적 의미도 있지만, 여기서는 단단한 방패 같은 몸을 자랑할 만한 위용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그 몸의 강인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인간이 보기에는 뚫을 수 없는 갑옷이지만, 창조주의 시선에서는 서로 맞물려 하나의 몸을 이루는 정교한 구조입니다.

무섭게 보이는 것과 놀랍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하나의 존재 안에 함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본문에는 41:4의 첫 낱말에서 기록 형태와 낭독 전승이 다르게 전해지는 문제가 있습니다. 기록된 형태는 「아니다」라는 부정을 나타내지만, 낭독 전승은 「그것에게」라는 표현을 전합니다. 또한 두루새김이 「그 몸의 각 부분」으로 옮긴 말에는 몸의 부위와 허풍 또는 자랑이라는 의미 사이의 해석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본 두 가지 읽기, 곧 몸과 능력을 설명하겠다는 선언과 위세와 자랑에 관한 반문이 갈립니다.

어둠의 괴물이 새벽의 눈을 가지고 있다

욥기 41:10–13 본문 →

이제 묘사는 단단한 몸의 표면에서 빛과 불의 이미지로 바뀝니다.

「재채기할 때마다 빛을 뿜어 내고, 그 눈은 동트는 새벽빛 같다.」욥기 41:10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동트는 새벽빛」(⁨עַפְעַף⁩)을 「새벽의 눈꺼풀」이라고 표현합니다. 새벽을 마치 눈을 뜨는 존재처럼 나타내는 것입니다. 어둠이 물러가면서 처음 밝아지는 빛은 눈꺼풀이 열리는 모습에 비유됩니다.

그런데 원문의 이 표현은 욥기에서 이미 등장했습니다.

바로 욥이 자신의 태어난 날을 저주하던 장면입니다. 욥기 3:9에서 욥은 자신이 태어난 밤이 빛을 기다리더라도 얻지 못하고, 새벽의 빛을 보지 못하기를 바랐습니다. 두 구절에서 히브리어 표현은 동일합니다. 아프아페 샤하르, 곧 「새벽의 눈꺼풀」입니다.

욥은 자신의 삶이 시작된 날에 새벽이 오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욥에게 리워야탄의 눈에서 새벽을 떠올리게 하는 빛을 보여 주십니다.

더구나 욥기 3:8에서 욥은 날을 저주하는 이들, 곧 리워야탄을 깨울 줄 아는 이들이 그 밤을 저주하기를 바랐습니다. 욥의 첫 탄식에는 리워야탄과 새벽의 이미지가 모두 등장했던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에서도 두 이미지가 다시 만납니다.

이것을 반드시 의도적으로 설계된 반전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원문의 동일한 표현이 서로 다른 장면에 놓인다는 문학적 사실은 분명합니다.

욥이 어둠 속에서 떠올렸던 바로 그 존재를, 하나님은 빛을 가진 생명으로 보여 주십니다.

이것은 욥에게 고통을 잊고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같은 세계를 인간의 고통에서 바라보는 시선과 창조주의 시선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불과 연기로 가득한 몸

「그 입에서는 횃불이 나오고, 불똥이 튀어나온다.」욥기 41:11 · 두루새김
「그 콧구멍에서는 연기가 나온다. 불을 지핀 솥과 타는 골풀에서 나오는 연기 같다.」욥기 41:12 · 두루새김
「그 숨결은 숯에 불을 붙이고, 그 입에서는 불꽃이 나온다.」욥기 41:13 · 두루새김

리워야탄의 몸은 이제 마치 불을 품은 화덕처럼 묘사됩니다. 여기서는 생물의 호흡과 불을 다루는 인간의 작업이 하나의 이미지로 결합합니다. 12절에서 연기는 불을 지핀 솥과 타는 골풀에서 나오는 연기에 비유됩니다. 인간이 불을 피우고 솥을 달구는 장면이 리워야탄의 호흡에 적용됩니다.

사람에게 익숙한 불, 연기, 횃불, 숯불이 하나의 살아 있는 몸에서 나타납니다. 리워야탄은 단순히 강한 동물이 아니라,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힘을 품은 존재로 그려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존재를 설명하시면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도망치지도 않으시고, 그 존재를 당장 없애지도 않으십니다.

인간에게 위협적인 모습조차 하나님의 긴 묘사 안에서는 관찰의 대상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묘사를 통해 리워야탄이 실제로 불을 뿜는 동물이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악어와 같은 현실의 동물을 시적으로 과장한 표현으로 볼 수도 있고, 불을 뿜는 괴수의 이미지가 사용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고대의 바다 괴물 이미지가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본문만으로 리워야탄의 정체나 묘사가 만들어진 과정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강한 자들을 두렵게 하는 존재는 사람의 무기를 비웃는다

욥기 41:14–21 본문 →

「그 목에는 힘이 깃들어 있고, 그 앞에서는 절망이 춤춘다.」욥기 41:14 · 두루새김

힘이 목에 깃들어 있다는 것은 힘이 그 존재에게 잠깐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몸의 일부처럼 늘 함께한다는 뜻을 나타냅니다.

절망과 춤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사람이 절망하면 주저앉거나 움직일 힘을 잃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절망이 마치 살아 있는 존재처럼 뛰어다니며 춤을 춥니다. 히브리어에서도 낙담 또는 기력을 잃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춤추거나 뛰는 동사와 연결됩니다.

거대한 존재가 아직 싸움을 시작하지 않았는데도, 주변의 사람들이 기력을 잃습니다. 리워야탄이 움직이는 순간 공포가 그 앞을 달려가는 듯합니다.

돌처럼 단단한 심장

「그 몸의 살주름들은 서로 달라붙어 있다. 몸에 단단히 부어 붙인 듯 흔들리지 않는다.」욥기 41:15 · 두루새김
「그 심장은 돌처럼 단단하고, 맷돌의 아래짝처럼 굳건하다.」욥기 41:16 · 두루새김

앞에서는 몸 바깥쪽의 방패 같은 비늘이 묘사되었습니다. 이제는 살과 심장까지 단단하다고 말합니다. 맷돌의 아래짝은 곡식을 갈 때 받침이 되는 무거운 돌입니다. 움직이지 않고 버텨야 하는 물건입니다.

여기서 심장을 돌처럼 단단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 존재가 감정이 없거나 도덕적으로 고집이 세다는 뜻으로 곧바로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앞뒤 문맥은 몸의 단단함과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는 힘을 묘사합니다.

리워야탄은 겉만 단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 중심까지 흔들리지 않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강한 자와 강한 무기가 모두 무력해진다

「그것이 일어서면 힘센 이들도 두려워하고, 부서지는 충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욥기 41:17 · 두루새김

평소에는 다른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던 강한 자들조차 리워야탄 앞에서는 두려워합니다.

그다음에는 무기들이 등장합니다.

「칼로 쳐도 그 몸을 뚫지 못한다. 창도, 날아드는 무기도, 던지는 창도 마찬가지다.」욥기 41:18 · 두루새김
「그것은 쇠를 지푸라기처럼 여기고, 청동을 썩은 나무처럼 여긴다.」욥기 41:19 · 두루새김
「화살도 그것을 달아나게 하지 못한다. 줄을 휘둘러 던지는 돌도 그것에게는 마른 풀과 같다.」욥기 41:20 · 두루새김
「몽둥이도 마른 풀처럼 여기고, 창이 날아오는 소리를 비웃는다.」욥기 41:21 · 두루새김

여기에는 인간의 전투 기술이 모여 있습니다. 칼로 베고, 창으로 찌르고, 멀리서 화살을 쏘고, 줄을 휘둘러 돌을 던집니다.

그런데 모두 통하지 않습니다.

이 묘사의 특징은 단순히 무기가 부서진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무기의 가치가 뒤집힌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에게 단단한 물건이 리워야탄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창이 날아오는 소리를 비웃는다」는 표현에서 리워야탄은 무기를 단순히 견디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이 자신의 힘을 믿고 내세우는 전투 수단을 우습게 여기는 존재로 나타납니다.

욥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변론하려 했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실제로 이루어져야 할 정의의 판결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에게 먼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십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힘과 기술이 무가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능력이 세상 전체를 통제할 만큼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진 힘은 분명한 현실이지만, 세상을 판단하는 최종적인 기준이 될 만큼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17절의 「힘센 이들」의 정체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용사들을 가리킨다고 읽을 수 있고, 매우 강력한 존재들을 폭넓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 말만으로 하늘의 존재들이 두려워한다고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또 이 장면에는 욥기 28장의 지혜 찬양과 통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28장에서 인간은 바위를 깨고 땅속 깊이 들어가 감추어진 보물을 찾아냅니다. 그러나 그렇게 놀라운 기술을 가진 인간도 지혜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내지 못합니다(욥 28:12–13). 두 장면 모두 인간이 실제로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의 끝에서 인간이 아직 다스리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가 나타납니다.

리워야탄이 지나가자 바다가 달라진다

욥기 41:22–24 본문 →

이제 장면은 리워야탄의 몸에서 그 몸이 지나가는 자리로 옮겨 갑니다.

「그 배 아래는 날카로운 질그릇 조각 같다. 진흙 위를 지나가며 타작 썰매가 지난 듯 자국을 남긴다.」욥기 41:22 · 두루새김

질그릇 조각은 날카롭고, 타작 썰매는 곡식을 잘게 부수기 위해 날이 달린 도구입니다. 부드러운 진흙 위를 지나가는 데도 마치 날카로운 타작 썰매가 그 위를 훑고 지나가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두 절에서는 훨씬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은 깊은 물을 솥처럼 끓어오르게 하고, 바다를 향기로운 기름을 끓이는 솥처럼 만든다.」욥기 41:23 · 두루새김
「그것이 지나간 뒤에는 물길이 환하게 빛난다. 깊은 물이 흰 머리카락처럼 보일 정도다.」욥기 41:24 · 두루새김

이것은 물결이 뒤집히고 하얀 거품이 일어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고요하고 어두운 깊은 물이 리워야탄의 움직임 때문에 희게 변하는 것입니다.

앞서 41:12에서 리워야탄의 콧구멍에서 나오는 연기는 불을 지핀 솥에서 나오는 연기에 비유되었습니다. 이제는 리워야탄의 바깥에 있는 깊은 물 자체가 끓는 솥처럼 묘사됩니다. 처음에는 몸 안에서 나오는 듯한 불과 연기가 강조되었습니다. 지금은 그 몸의 움직임이 주변 세계 전체를 흔듭니다.

시의 규모가 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리워야탄의 입과 이빨을 보았습니다. 다음에는 몸을 덮는 방패 같은 비늘들을 보았습니다. 그다음에는 숨결과 목과 심장을 보았습니다. 이제는 그 존재가 지나가는 바다 전체를 바라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장면을 보고 계십니다.

이 존재가 지나간 자리까지 자세히 묘사하실 만큼, 리워야탄의 움직임은 하나님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인간이 볼 때는 무질서한 힘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 움직임까지 자신의 말씀 안에 담으십니다.

조금 더 깊이

24절의 「깊은 물」은 깊은 바다나 깊은 물속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낱말로, 창세기 1:2에서도 깊은 물을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 그러나 같은 낱말이 등장한다고 해서 이 장면이 창세기 1:2의 혼돈 상태를 그대로 재현한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리워야탄이 움직이는 공간의 깊이와 넓이를 드러내는 것이 우선입니다.

모든 교만의 자식들을 다스리는 왕

욥기 41:25–26 본문 →

리워야탄에 대한 하나님의 묘사는 마지막 두 구절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땅 위에는 그것과 견줄 것이 없다. 그것은 두려움이 없도록 만들어졌다.」욥기 41:25 · 두루새김

리워야탄은 두려움이 없는 존재로 묘사되지만, 스스로 그런 존재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 역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리워야탄의 힘은 하나님과 경쟁하는 독립적인 힘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 안에 존재하는 힘입니다.

이어서 마지막 선언이 나옵니다.

「그것은 높은 것들을 모두 바라본다. 모든 거만한 것들을 다스리는 왕이다.」욥기 41:26 · 두루새김

히브리어에는 베네 샤하츠(⁨שַׁחַץ⁩), 곧 「교만의 자식들」이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이 말은 강력하고 위엄 있는 짐승들을 가리킨다고 읽을 수도 있고, 인간의 교만을 되돌아보게 하는 울림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의 직접적인 묘사는 리워야탄이 위엄 있고 강한 존재들 위에서 다스리는 모습입니다.

리워야탄을 사탄이나 악한 세력의 왕이라고 확정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욥기 41장은 리워야탄을 사탄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이 존재를 두려움이 없도록 만들어진 존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몸의 아름다움을 직접 묘사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왕을 쓰러뜨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리워야탄을 붙잡아 사슬로 묶지 않으십니다. 그것의 목을 꺾거나 바다에서 끌어내지도 않으십니다.

리워야탄은 마지막까지 강력한 존재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리워야탄조차 하나님이 만드신 존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존재를 완전히 제압하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끝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은 그 존재가 얼마나 강력한지 끝까지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모든 강한 존재를 즉시 제거하시는 행동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존재가 계속 살아가는 세계도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에는 인간이 통제하지 못하는 힘이 실제로 존재합니다. 그 힘은 위험할 수 있고, 두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통제 밖에 있다고 해서 곧 하나님의 통치 밖에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교만의 자식들」이라는 표현은 욥기 28:8에도 등장합니다. 그곳에서는 지혜를 찾는 길을 설명하면서 교만한 짐승들도 그 길을 밟지 못했고 사자도 지나가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28:8에서는 이 표현이 사자와 나란히 등장하므로, 위엄 있고 사나운 짐승들을 가리키는 말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마지막 말씀은 리워야탄이 강한 짐승들 가운데서도 으뜸이라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앞 장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교만한 자들을 낮추고 악인들을 굴복시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40:11–12). 그 문맥을 고려하면 인간의 교만을 되돌아보게 하는 울림도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그 표현이 만들어 내는 신학적 연결입니다. 리워야탄은 구약의 다른 본문들에서도 등장하지만, 언제나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 74:14에서는 하나님이 리워야탄의 머리들을 깨뜨리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이사야 27:1에서는 하나님이 큰 칼로 도망하는 뱀, 몸을 비트는 뱀인 리워야탄을 벌하시고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런데 시편 104:26에서 리워야탄은 하나님이 바다에서 놀도록 지으신 존재로 묘사됩니다. 그렇다고 모든 본문을 동일한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욥기 41장에서는 하나님이 리워야탄을 직접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하지 않으십니다. 이 점에서는 시편 104편의 창조 찬양과 더 가까운 면이 있습니다. 다만 욥기에서는 그 생명이 인간에게 주는 공포와 위협이 훨씬 강하게 강조됩니다.

바다 위에 남은 빛나는 길

욥기 41:1–26 본문 →

욥기 41장을 읽으면서 독자는 여전히 불편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욥은 억울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그의 고난의 원인을 설명하지 않으시고 거대한 괴물의 모습을 길게 묘사하시는가요? 본문 역시 그 간격을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욥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고통에 관해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질문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욥을 악인이라고 규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이 옳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의 통치 전체를 부당하다고 최종 판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자신의 삶을 충분히 알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계 전체를 아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처럼 욥이 숨겨진 죄 때문에 벌을 받고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욥에게 자신의 의로움이 거짓이었다고 인정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장 모든 고난은 하나님의 뜻이므로 선한 것이라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욥기 41장은 고난 자체를 선하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위험과 공포를 환영하라고 권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실제로 겪는 고난이 사라지거나 정의를 향한 질문이 필요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욥기 41장이 요구하는 겸손의 성격입니다. 단순히 자신을 무가치하다고 여기거나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 태도가 아닙니다. 자신이 실제로 알고 있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욥은 아직 자신의 고난의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그의 질문이 모두 해결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동안, 욥의 시선은 자신의 고난에서 출발하여 자신이 결코 통제할 수 없는 세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리워야탄이 깊은 물속을 지나갑니다.

거대한 몸이 움직이자 물은 솥처럼 끓어오르고, 그 뒤에는 환하게 빛나는 물길이 남습니다. 깊은 물은 흰 머리카락처럼 희게 변합니다.

인간은 그 존재를 붙잡을 수 없습니다.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도 제압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창조주께서는 그 존재의 몸을 아시고, 그 움직임을 아시고, 그것이 지나간 바다의 모습까지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묘사에서 리워야탄은 여전히 자유롭게 움직입니다. 그것은 두려움이 없도록 만들어졌고, 모든 거만한 것들을 다스리는 왕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왕이 지나간 깊은 물 위에는 환하게 빛나는 물길이 펼쳐져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두려움만 보이는 자리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지으신 존재의 놀라운 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