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40장

이 장의 자리 · 38–41장 · 폭풍 속의 대답

누가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릴 수 있는가

욥기 40장에는 뜻밖의 전환이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을 두고 하나님의 정의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욥에게 악한 사람들을 심판해 보라고 요구하신 뒤, 갑자기 베헤모트와 리워야탄이라는 거대한 존재들을 보여 주십니다.

교만한 사람들을 낮추고 악한 사람들을 짓밟으라는 명령과, 강가에서 풀을 뜯는 거대한 짐승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이 질문을 따라가면 욥기 40장의 핵심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정의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욥이 요구하는 정의를 온 세상에서 실현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물으십니다.

욥이 씨름해 온 문제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이 잘살고 의로운 사람이 고통받는 현실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요? 욥은 자신의 결백을 확신했으며, 하나님이 자신에게 이런 고통을 허락하신 까닭을 알고 싶었습니다. 욥기 27:2에서는 하나님이 자기의 권리를 빼앗으셨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욥기 40:8에서 하나님은 욥의 질문을 거꾸로 돌려놓으십니다. 「네가 옳다는 것을 밝히려고 나에게 죄가 있다고 판결하겠느냐?」

문제는 욥의 결백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옳다는 사실로부터 하나님의 다스림 전체가 잘못되었다는 결론까지 내릴 수 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40장은 이 질문에서 시작하여,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생명들 앞에서 끝납니다. 그 사이에 욥은 자신의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하나님은 욥에게 그 손으로 리워야탄을 붙잡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두 손의 움직임이 이 장의 깊은 의미를 보여 줍니다.

읽는 시간 21분소단락 540장 본문 읽기 →

욥의 침묵은 아직 대화의 끝이 아니다

욥기 40:1–5 본문 →

하나님이 욥에게 처음 요구하신 것은 대답이었습니다.

「트집 잡는 사람이 샤다이와 다투겠느냐? 하나님께 잘못을 따지는 사람은 이에 대답해 보아라.」욥기 40:2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앞선 하나님의 긴 질문들을 마무리합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땅의 기초, 바다의 경계, 별들의 질서, 들짐승의 생활,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자연을 차례로 물으셨습니다(38–39장). 그 질문들에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삶이 어떻게 다스려져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조차 온전히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40:2에서 사용하시는 말에는 법정에서 다투고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는 느낌이 담겨 있습니다.

이에 욥은 말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무슨 대답을 드리겠습니까? 제 손으로 입을 가렸습니다.」욥기 40:4 · 두루새김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קָלַל⁩)는 가볍다거나 미미하다는 뜻의 어근에서 나온 말입니다. 여기서 욥이 자신을 도덕적으로 악한 사람이라고 고백한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위치가 얼마나 작은지를 깨닫고 있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그는 자기의 주장을 거둔다는 자세한 진술도, 이전에 품었던 모든 의문을 해결했다는 고백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제 무엇을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한 번 말했지만 이제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두 번 말했지만 더는 보태지 않겠습니다.」욥기 40:5 · 두루새김

「한 번」, 「두 번」이라는 표현은 실제 발언 횟수를 정확히 세기보다 이미 거듭 말했으므로 더 보태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욥은 지금까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수많은 말을 했습니다. 친구들의 비난 앞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했고,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함을 판단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의 앞에 나타나 질문하시자, 그는 더는 자신의 말만 이어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의 침묵을 대화의 결론으로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곧바로 40:6에서 여호와야훼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욥은 입을 닫았지만, 하나님은 아직 욥에게 보여 주실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응답은 단순히 인간이 말을 멈추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욥은 자신이 아직 이해하지 못한 하나님의 다스림을 더 깊이 바라보아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하나님께 잘못을 따지는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에서 ‘잘못을 따지는 사람’은 모키아흐입니다. 같은 형태의 단어가 욥기 9:33에도 등장합니다. 그곳에서 욥은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서서 양쪽에 손을 얹을 중재자가 없다고 탄식했습니다. 그 단어는 문맥에 따라 양쪽을 판정하는 중재자나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앞에서는 욥이 하나님과의 다툼을 해결해 줄 판정자를 찾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욥을 하나님께 잘못을 따지는 사람으로 부르시며 대답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세상의 심판자가 되어 보라고 하신다

욥기 40:6–14 본문 →

여호와야훼는 다시 폭풍 속에서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자, 용사처럼 허리띠를 단단히 매어라. 내가 물을 테니, 네가 대답해 보아라.」욥기 40:7 · 두루새김

이 말씀은 38:3에서 처음 하신 말씀과 거의 같습니다. 허리띠를 단단히 매는 것은 행동할 준비를 갖추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욥이 방금 자신의 작음을 인정했는데도, 다시 일어서서 질문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질문의 방향이 더욱 분명합니다.

「너는 내 판결까지 뒤집겠느냐? 네가 옳다는 것을 밝히려고 나에게 죄가 있다고 판결하겠느냐?」욥기 40:8 · 두루새김

여기에는 법정의 언어가 사용됩니다. 「판결」은 히브리어 미슈파트(⁨מִשְׁפָּט⁩)로, 정의와 재판, 올바른 판단을 가리킬 수 있는 말입니다. 「나에게 죄가 있다고 판결하겠느냐」와 「네가 옳다는 것을 밝히려고」에는 각각 악하다고 판정하는 동사와 옳다고 인정되는 동사가 쓰였습니다.

욥은 자신에게 내려진 것처럼 보이는 판결이 부당하다고 호소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자신의 올바름을 밝히기 위해 하나님의 판결 자체를 뒤집을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죄 없이 겪는 고통을 호소하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욥을 흠 없고 올곧은 사람이라고 인정하셨습니다(욥 1:8; 2:3). 고난을 당한 욥에게 숨겨진 죄가 있다고 주장했던 친구들의 설명도 이 책의 결론에서 인정받지 못합니다(42:7).

그렇다고 이 질문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 옳으니 이유를 묻지 말라’는 선언으로 단순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창세기 18:25에서 아브라함은 온 땅의 심판자가 정의롭게 판단하셔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소돔의 운명을 물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정의를 묻는 행위 자체를 금지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제 하나님은 문제를 한 단계 더 넓히십니다. 욥이 자신의 사건에서 정의를 요구하는 것은 정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온 세상을 판결하는 자리에 선다는 것은 자신의 사건을 판단하는 것과 다릅니다.

「자, 위엄과 높은 위세로 네 몸을 꾸며 보아라. 영광과 빛나는 아름다움을 옷처럼 입어 보아라.」욥기 40:10 · 두루새김
「네 거센 분노를 쏟아 내어라. 교만한 사람을 하나하나 보고 낮추어라.」욥기 40:11 · 두루새김
「교만한 사람을 하나하나 보고 굴복시켜라. 악한 사람들을 그 자리에서 짓밟아라.」욥기 40:12 · 두루새김

하나님은 욥에게 단순히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 보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악을 직접 심판해 보라고 하십니다.

먼저, 하나님에게 속한 위엄과 영광을 입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교만한 사람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낮추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악한 사람들을 완전히 굴복시켜야 합니다.

「교만한 사람을 하나하나 보고」라는 표현이 11절과 12절에서 반복됩니다. 이것은 악이라는 막연한 개념을 비난하는 정도의 일이 아닙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모든 교만한 사람을 알아보고, 그들을 정확하게 판단하며, 그들의 악행을 막아야 한다는 요구입니다.

누가 실제로 교만한 사람인지, 누가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그 악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판단하는 일부터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것을 안다고 해서 모든 악을 막을 능력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평가하는 것과 하나님의 정의를 세상 전체에서 실현하는 것은 서로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그들을 함께 흙 속에 묻어라. 숨겨진 곳에서 그들의 얼굴을 싸매어라.」욥기 40:13 · 두루새김

흙 속에 묻고 얼굴을 싸매는 모습은 죽음과 무덤을 떠올리게 합니다. 악한 사람들을 단순히 꾸짖거나 잠시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위세를 완전히 끝내는 장면입니다.

「그러면 나도 네 오른손이 너를 구할 수 있다고 인정하겠다.」욥기 40:14 · 두루새김

팔과 오른손은 성경에서 힘과 능력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이미지입니다. 출애굽기 15:6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오른손이 원수를 무너뜨리는 능력으로 노래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이 욥에게 네 자신의 오른손으로 너를 구해 보라고 하십니다.

욥은 자신을 구원해 줄 판결을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세상의 악을 모두 굴복시킬 수 있다면 자기 자신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구원이 반드시 인간의 능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인간은 모든 악을 판단하고 없앨 수 없으며,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세상을 바로잡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모든 악을 심판할 능력이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이어서 인간이 굴복시키기조차 어려운 거대한 생명을 보여 주십니다.

그러나 이 두 장면을 연결한다고 해서 베헤모트 자체를 악한 사람이나 악의 상징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앞 장면은 정의롭게 다스리는 일에 관한 것이고, 다음 장면은 인간의 지배력을 벗어나는 창조세계에 관한 것입니다. 두 장면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베헤모트 — 인간의 지배를 받지 않아도 하나님의 세계에 속한 생명

욥기 40:15–24 본문 →

욥과 베헤모트는 같은 창조주에게서 왔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자, 베헤모트를 보아라. 너를 만든 내가 그것도 만들었다. 그것은 소처럼 풀을 먹는다.」욥기 40:15 · 두루새김

이 말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거대한 짐승의 힘이 아니라 「너를 만든 내가 그것도 만들었다」라는 표현입니다. 히브리어의 이 부분을 직역하면 ‘내가 너와 함께 만든’이라는 뜻입니다. 욥과 베헤모트는 서로 다른 존재이지만, 둘 다 창조주에게 생명을 받았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38–39장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인간이 알지 못하는 세계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는 욥과 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다른 피조물을 보여 주십니다.

인간이 길들이거나 다스릴 수 없는 존재라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세계 밖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베헤모트를 하마로 보는 읽기와 거대한 짐승을 시적으로 그려 낸 존재로 보는 읽기가 있지만, 본문 자체가 관심을 두는 것은 동물의 종류를 가리는 일보다 이 존재의 압도적인 힘입니다. 「그 힘은 허리에 있고, 배의 근육에도 힘이 넘친다」(16절).

「뼈는 속이 빈 청동 대롱 같고, 뼈대는 쇠막대 같다.」욥기 40:18 · 두루새김

청동과 쇠는 단단함을 표현합니다. 실제로 금속으로 이루어진 동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상대하기 어려운 단단한 몸을 묘사하는 시적 언어입니다.

그것은 소처럼 풀을 먹습니다.

엄청난 근육과 쇠막대 같은 뼈를 가진 존재가 하는 일은 풀을 뜯어 먹는 것입니다. 큰 힘이 반드시 공격성이나 악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힘은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한 생명의 특성으로 묘사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 가운데 으뜸이다. 그것을 만드신 분께서는 자기 칼을 가까이 들이대실 수 있다.」욥기 40:19 · 두루새김

「으뜸」은 창조된 시간상 첫 번째 존재라기보다, 창조의 작품 가운데 두드러진 존재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뒤의 「칼」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읽기가 가능합니다. 창조주만이 이 거대한 존재에게 칼을 가까이 가져갈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고, 창조주가 그 존재에게 자신의 무기와 같은 힘을 주셨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어 문장은 어느 쪽인지 명확히 판정하기 어렵습니다. 두루새김은 첫 번째 읽기를 따릅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강조점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베헤모트가 아무리 강력해도 그 힘은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만드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베헤모트에게 살아갈 자리를 주신다

이어서 묘사가 예상 밖의 방향으로 바뀝니다.

「참으로 산들이 그것에게 먹을 것을 내준다. 모든 들짐승도 그곳에서 뛰논다.」욥기 40:20 · 두루새김

조금 전까지 청동과 쇠로 묘사되던 거대한 생물이 이제 푸른 산과 들짐승들 사이에 놓입니다. 베헤모트는 홀로 떨어져 있는 괴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산이 내어 주는 먹이를 먹고, 다른 짐승들과 공간을 나누며, 물가에서 쉽니다. 인간이 기르거나 살피지 않아도 그 생명은 자기 삶을 이어 갑니다.

「그것은 로투스나무 아래에 눕고, 갈대와 늪 사이에 몸을 숨긴다」(21절).

「로투스나무가 그늘로 덮어 주고, 개울가의 포플러나무들이 둘러서 있다.」욥기 40:22 · 두루새김

베헤모트에게는 쉬어 갈 그늘과 몸을 감출 수 있는 장소가 있습니다. 그토록 강력한 존재도 쉼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세계에는 그 쉼터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고 자신의 삶이 무너지는 일을 경험했습니다. 자신을 지탱해 주던 보호와 평안이 사라졌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욥에게 인간의 눈길에서 멀리 떨어진 거대한 생명을 보여 주시며, 그 생명에게 먹을 것과 쉴 곳이 있는 세계를 드러내십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이 욥의 모든 상실을 보상하실 것이라는 약속은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경험만으로는 다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돌보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 점은 40:11–13의 심판 명령과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낮추고 악한 사람을 없앨 권세를 가지신 분이지만, 동시에 인간에게 별다른 쓸모가 없어 보이는 거대한 짐승에게 먹이와 그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오직 악한 사람을 벌하는 행위로만 설명하면 이 장의 절반밖에 이해하지 못합니다.

강물이 밀려와도 흔들리지 않는 존재

「보아라. 강물이 거세게 밀어닥쳐도 당황하지 않는다. 요단강이 입으로 쏟아져 들어와도 태연하다.」욥기 40:23 · 두루새김

강물의 기세는 인간에게 두려운 것입니다. 강이 넘쳐흐르면 사람은 집과 재산을 잃고, 때로는 생명까지 잃습니다.

요단강이 그 입으로 쏟아져 들어온다는 표현은 이 존재가 얼마나 물의 기세를 견딜 수 있는지를 강조하는 과장된 시적 표현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존재가 있음을 보여 주십니다. 이것은 욥의 고통을 작게 만드는 비교가 아닙니다. 인간의 경험을 세계 전체를 재는 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이 나옵니다.

「그것이 빤히 보고 있는데 누가 잡겠느냐? 덫으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욥기 40:24 · 두루새김

사람은 짐승을 잡기 위해 덫을 놓고, 붙잡은 짐승의 코를 꿰어 통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시에 묘사된 베헤모트는 인간의 지배력을 압도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에게도 통제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은 아닙니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일을 이해하기 위해 하나님의 다스림을 판단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존재도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있을 수 있음을 보여 주십니다.

이제 시선은 강과 늪에서 더 위협적인 존재로 옮겨 갑니다.

조금 더 깊이

베헤모트라는 이름은 짐승을 뜻하는 말의 복수형과 같은 형태이지만, 이 본문에서는 하나의 거대한 존재를 가리킵니다. 베헤모트를 하마와 연결하는 해석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풀을 먹는 모습, 물가와 늪에서 쉬는 습성, 거대한 몸집 등이 하마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이를 특정한 동물보다 거대한 짐승을 시적으로 그려 낸 존재, 또는 고대의 괴수 이미지가 반영된 존재로 읽는 견해도 있습니다. 17절의 꼬리가 백향목과 비교되는 표현은 하마와 곧바로 일치시키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여기서 꼬리의 동작을 나타내는 동사의 정확한 의미도 확실하지 않아(‘굽힌다’, ‘뻣뻣하게 세운다’, ‘움직인다’), 번역 차이를 근거로 동물의 정체를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로투스나무와 포플러나무로 옮긴 식물들의 정확한 종류도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23절의 표현만으로 실제 사는 곳을 요단강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리워야탄 — 인간이 원하는 방식으로 다룰 수 없는 존재

욥기 40:25–32 본문 →

본문 참고: 두루새김의 40:25–32는 히브리어 본문의 절 구분을 따른 것으로, 일부 영어 성경에서는 41:1–8에 해당합니다.

인간이 사용하는 도구와 방식은 통하는가?

「네가 낚싯바늘로 리워야탄을 끌어낼 수 있느냐? 밧줄로 그 혀를 눌러 내릴 수 있느냐?」욥기 40:25 · 두루새김

베헤모트의 정체가 분명하지 않은 것처럼, 리워야탄도 하나의 동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악어를 떠올리게 하는 특징이 있지만,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바다의 거대한 괴물이나 뱀처럼 묘사되기도 합니다(시 74:14; 사 27:1). 본문은 사람들이 알고 있던 크고 위협적인 물속 생물의 이미지와 거대한 괴수의 시적 이미지를 함께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꺼내시는 것은 낚싯바늘과 밧줄입니다.

「그 코에 풀로 꼰 줄을 꿸 수 있느냐? 갈고리로 그 턱을 뚫을 수 있느냐?」욥기 40:26 · 두루새김

이 질문은 인간이 이미 알고 있는 통제 방법을 바탕으로 합니다. 문제는 도구가 없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나름의 기술이 있습니다. 다만 그 기술로 모든 존재를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네게 거듭 간절히 빌겠느냐? 네게 부드러운 말을 하겠느냐?」욥기 40:27 · 두루새김
「그것이 너와 약속을 맺겠느냐? 네가 그것을 영원히 종으로 삼을 수 있겠느냐?」욥기 40:28 · 두루새김

갑자기 짐승이 말을 하고 약속을 맺는 장면으로 바뀝니다. 사람은 자신보다 약한 상대를 여러 방식으로 통제합니다. 힘으로 굴복시킬 수도 있고, 상대의 간청을 받아 조건을 정할 수도 있으며, 약속을 맺어 자신의 지배 아래 둘 수도 있습니다.

리워야탄은 그 모든 방식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영원히 종으로 삼을 수 있겠느냐」는 표현은 인간 사회의 지배 관계를 거대한 짐승에게 적용하는 질문입니다. 사람이 익숙하게 사용하는 지배의 언어가 리워야탄 앞에서는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여기에는 은근한 풍자가 담겨 있습니다. 인간은 세상을 관리하기 위해 도구를 만들고 제도를 세우고 약속을 맺습니다. 그러나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든 존재를 자신의 질서 안에 집어넣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장난감도 상품도 될 수 없는 존재

하나님은 질문을 더욱 일상적인 장면으로 옮기십니다.

「새를 데리고 놀듯 그것을 데리고 놀 수 있겠느냐? 네 집의 소녀들을 위해 묶어 둘 수 있겠느냐?」욥기 40:29 · 두루새김

거대한 존재를 작은 애완동물처럼 다룰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질문의 우스꽝스러움이 바로 그 효과를 냅니다. 리워야탄은 인간이 자기 필요에 맞추어 길들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놓고 흥정하겠느냐? 상인들끼리 그것을 나누겠느냐?」욥기 40:30 · 두루새김

여기서 리워야탄은 시장의 상품처럼 취급됩니다. 사람이 리워야탄을 잡아서 소유하고, 나누고, 팔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낚싯바늘로 잡는 일, 줄로 묶는 일, 복종시키는 일, 종으로 삼는 일, 길들이는 일, 시장에서 거래하는 일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인간에게는 이런 기술과 제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리워야탄 앞에 놓으십니다.

그리고 하나하나 무력하게 만드십니다.

「네가 그 가죽에 작살을 잔뜩 꽂고, 그 머리에 고기잡이 창을 잔뜩 꽂을 수 있느냐?」욥기 40:31 · 두루새김

인간이 사용하는 기술과 제도를 모두 동원해도 그 존재를 지배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더 좋은 무기를 개발하라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 시의 리워야탄은 인간이 힘과 기술로 세상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무너뜨립니다.

손을 대 보아라

하나님은 마침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에 손을 대 보아라. 그 싸움을 기억하고, 다시는 손대지 마라.」욥기 40:32 · 두루새김

40:4에서 욥은 자신의 손으로 입을 가렸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욥에게 리워야탄에 손을 대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원문에서는 앞의 ‘손’과 뒤의 ‘손바닥’에 서로 다른 낱말을 쓰지만, 두루새김은 두 자리 모두 「손」으로 옮겼습니다. 첫 번째 손은 말을 멈추는 손입니다. 두 번째 손은 인간이 감히 굴복시킬 수 없는 존재를 향해 뻗는 손입니다.

「그 싸움을 기억하고, 다시는 손대지 마라」는 리워야탄에게 손을 댔다가 싸움을 겪는다면, 다시는 그런 일을 시도하지 않으리라는 뜻입니다. 그 위험이 얼마나 큰지를 깨달으라는 경고입니다.

이 말씀에는 욥 자신이 하나님과 다투어 온 상황을 되돌아보게 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곧바로 ‘욥이 하나님을 공격했다’는 직접적인 비유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선은 리워야탄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는 장면으로 읽어야 합니다.

40장은 이 말에서 끝나지만, 리워야탄을 묘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다음 장에서도 계속됩니다. 욥의 눈앞에 아직 더 많은 질문이 남아 있는 채로 이 장이 닫힙니다.

조금 더 깊이

40:30의 히브리어 첫 동사는 문맥에 따라 거래와 관련된 표현으로 읽기도 하고, 그것을 잡아 잔치를 벌인다는 뜻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두루새김은 거래와 관련된 표현으로 읽습니다. 두 번째 질문에서는 원문에서 ‘가나안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 상인을 가리키는 용법으로 쓰였으며, 이와 비슷한 용법은 이사야 23:8에서도 확인됩니다. 리워야탄은 욥기 40장에서 처음 등장하는 이름이 아닙니다. 욥기 3:8에서 욥은 자신의 태어난 날을 저주하면서, 리워야탄을 깨울 수 있는 자들을 불러 그날을 저주하게 해 달라고 말합니다. 두 본문 사이에는 의미 있는 문학적 연결이 있습니다. 다만 욥기 40장이 의도적으로 3:8의 표현을 뒤집었다고 확정하기보다는, 동일한 이미지가 욥의 탄식과 하나님의 대답에서 서로 다르게 사용된다고 보는 것이 신중합니다. 시편 74:13–14와 이사야 27:1에서는 리워야탄이 하나님께 대항하는 혼돈의 세력을 표현하는 이미지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시편 104:26에서 리워야탄은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로, 넓은 바다에서 노니는 생명으로 묘사됩니다. 욥기 40장에서 하나님은 리워야탄을 악한 인간과 같은 것으로 보지 않으시고, 그것을 당장 죽이겠다고 선언하지도 않으십니다. 이 점에서 욥기 40장은 시편 104편의 창조 찬양과도 이어집니다.

맺음: 욥의 손과 리워야탄

욥기 40:1–32 본문 →

욥기 40장은 손의 움직임으로 기억할 만한 장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에는 심판받아야 할 악도 있지만, 인간이 통제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악하다고 할 수 없는 생명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둘 모두를 다룹니다. 욥은 ‘내가 옳은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옳다는 사실을 넘어, 세상 전체를 어떻게 다스릴 수 있는가’라고 물으십니다.

엄밀히 말하면, 40장은 욥이 왜 그런 고난을 당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하늘에서 있었던 일을 알려 주지 않으십니다. 욥의 고난이 정당한 처벌이었다고 말씀하시지도 않습니다.

물론 이 질문이 인간에게 정의를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부당한 일을 호소하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일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또 욥과 친구들을 똑같이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친구들은 욥에게 잘못된 죄책을 씌웠고, 욥은 자신의 실제 고난에서 정당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나님은 그 차이를 없애지 않으십니다.

처음에 욥은 자신의 손으로 입을 가렸습니다.

그 손은 자신을 변호하고, 하나님과 다투고, 자신의 억울함을 설명하던 말을 멈추는 손이었습니다.

중간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자신의 오른손으로 자신을 구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악한 사람들을 모두 굴복시키고 정의를 완전히 실현할 능력이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욥에게 리워야탄에 손을 대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앞에서 욥의 손은 너무 작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욥의 손이 작으므로 그의 고통도 하찮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작은 손으로는 다 붙잡을 수 없는 세계를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강물이 거세게 밀어닥쳐도 당황하지 않는 베헤모트가 있고, 인간의 낚싯바늘이나 약속이나 무기로도 다룰 수 없는 리워야탄이 있습니다.

그 존재들까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안에 있습니다.

욥은 아직 자신의 고난의 이유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의 의문이 모두 해결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자신이 알지 못했던 세계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세계의 끝에서 다시 물으십니다. 「그것에 손을 대 보아라. 그 싸움을 기억하고, 다시는 손대지 마라.」

욥기 40장은 인간의 손으로는 붙잡을 수 없는 거대한 생명 앞에서 멈춥니다. 그 거대한 존재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인간과, 그것을 자신이 만드신 세계의 일부로 말씀하시는 창조주 사이의 거리가 드러납니다.

욥은 아직 답을 얻지 못했지만, 자신이 질문하고 있는 세계가 얼마나 큰지는 보기 시작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