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3장 · 머리말과 탄생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오시는 날

누가복음 1장에는 두 아이가 등장합니다. 한 아이는 오랫동안 자녀가 없었던 노부부에게서 태어납니다. 다른 아이는 아직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한 적이 없는 처녀에게서 태어나실 것이라고 예고됩니다. 두 아이의 탄생은 모두 천사가 알리고, 두 어머니는 서로 친척이며, 두 아이 모두 태어나기 전부터 특별한 사명을 받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 두 이야기를 나란히 놓으면서도, 처음부터 두 아이가 같은 위치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첫 번째 아이는 하나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아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실 것입니다. 첫 번째 아이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아이는 다윗의 왕좌를 받아 영원히 다스리실 것입니다. 첫 번째 아이는 주님보다 앞서 길을 준비합니다. 두 번째 아이는 바로 요한이 길을 준비해 드려야 할 주님으로 드러나십니다.

요한의 탄생 이야기는 요한 자신에게서 끝나지 않습니다. 누가는 요한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밝힙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시작됩니다. 제사장 사가랴가 하나님 앞에서 향을 피우고 있을 때 천사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두 번째 이야기는 갈릴리 나사렛의 한 처녀에게서 시작됩니다. 성전도, 제사장도, 향을 피우는 일도 없습니다.

누가는 하나님이 성전을 버리고 나사렛을 선택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전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말씀이 나사렛에 이르면서 어떤 새로운 일을 드러내는지 보여 줍니다. 제사장에게는 앞으로 오실 분을 준비할 아들이 약속되고, 마리아에게는 그 준비의 대상이 되는 아들이 약속됩니다.

이렇게 보면 누가복음 1장의 주인공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으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이 장에서 직접 말씀하시지도, 눈에 보이는 행동을 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누구신지에 대한 약속 때문에 모든 일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기뻐하며, 오래된 예언이 다시 살아납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활동을 보여 주기에 앞서, 그분의 오심이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들려주려는 것입니다.

읽는 시간 30분소단락 81장 본문 읽기 →

확실한 이야기를 쓰려는 사람

누가복음 1:1–4 본문 →

누가복음은 뜻밖에도 신앙고백이나 기적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진 일들을 이야기로 정리하려고 많은 사람이 나섰습니다.누가복음 1:1 · 두루새김

누가는 자신이 처음 이야기를 발견한 사람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그 일을 직접 보고 말씀을 전하는 일꾼이 된 사람들이 전해 준 증언이 있었으며, 자신도 그것을 꼼꼼히 살펴 차례대로 정리한다고 밝힙니다.

그는 단순히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을 나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데오빌로가 이미 배운 가르침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게 하려 합니다. 그 믿음의 확실성을 위해 누가가 선택한 방법은 사건의 근거를 살피고, 증언을 정리하고, 하나의 이야기로 엮는 것입니다.

믿음과 역사적 탐구가 서로 반대편에 놓여 있지 않습니다.

물론 누가는 자신이 자료를 어떻게 모았고 어떤 출처를 선택했는지 자세한 방법을 남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는, 전해 내려온 증언 위에 세우려 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런 신중한 머리말이 끝나자마자 이야기는 전혀 다른 말투로 바뀝니다.

헤롯이 유대의 왕이던 때에 사가랴라는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비야 조에 속해 있었고, 아내 엘리사벳도 아론의 후손이었습니다.누가복음 1:5 · 두루새김

이제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 이야기에서 익숙한 문장 속으로 들어갑니다. 제사장 부부가 등장하고, 자녀가 없는 여인의 사정이 소개되고,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납니다. 원문에서는 앞부분의 정돈된 그리스어 서술과 달리 구약의 그리스어 번역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들이 이어집니다.

누가가 기록하려는 것은 과거와 끊어진 새로운 종교의 탄생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오랫동안 하신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 어떻게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조금 더 깊이

1절의 「이루어진 일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일이 성취되었다는 뜻으로도, 그 일에 관해 확신하게 되었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으며, 두루새김은 앞의 뜻을 택했습니다. 어느 쪽이든 누가가 다루는 것은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 이미 공동체 안에서 전해지고 있는 구체적인 사건과 증언입니다. 또 「차례대로」라는 말이 반드시 모든 사건을 날짜순으로 배열했다는 약속은 아닙니다. 누가는 사건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질서 있게 이야기를 풀어 가며, 이 첫 장부터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번갈아 놓아 두 사람의 관계를 드러냅니다.

성전에서 말을 잃은 제사장

누가복음 1:5–25 본문 →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이야기는 한 가지 긴장으로 시작됩니다.

두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의 모든 명령과 규정을 흠잡을 데 없이 지켰습니다.누가복음 1:6 · 두루새김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낳지 못했고, 두 사람 다 나이가 많이 들었기 때문입니다.누가복음 1:7 · 두루새김

고대 이스라엘에서 자녀는 하나님의 복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지였습니다. 자녀를 갖지 못하는 일은 개인적인 아픔일 뿐 아니라 사회적인 수치가 되기도 했습니다. 엘리사벳이 훗날 자신이 받던 「수치」를 언급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1:25).

그런데 누가는 부부에게 자녀가 없는 이유를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은 데서 찾을 가능성을 처음부터 막습니다. 그들의 고통은 신앙이 부족해서 찾아온 벌이 아닙니다. 이미 올바르게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도 오랫동안 풀리지 않은 아픔이 있었고, 하나님이 그들을 찾아오십니다.

그 모습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떠올리게 합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사라는 늙어 자녀를 낳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들을 약속하셨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이삭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시작하는 아들이었고, 사가랴에게 약속된 요한은 이제 그 이스라엘이 새로운 시대를 맞도록 준비하는 아들입니다.

모든 백성이 기도하는 시간에

사가랴는 자신의 차례가 되어 성전에서 일하고 있었고, 제비를 뽑아 향을 피우는 일을 맡습니다. 그가 성소 안으로 들어가자 백성은 밖에서 기도합니다. 한 제사장은 성소 안에 있고, 백성은 밖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때 천사가 나타나 말합니다.

천사가 말했습니다. 「사가랴야, 두려워하지 마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어주셨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여라.」누가복음 1:13 · 두루새김

사가랴는 무엇을 기도했을까요? 이어지는 말이 엘리사벳의 임신을 약속하므로 자녀를 달라는 오랜 기도를 가리킨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한편 성전에서 향을 피우는 제사장으로서 이스라엘을 위해 드린 기도와 연결해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날 사가랴가 무엇을 구했는지 직접 밝히지 않지만, 천사의 대답은 두 가지 모두에 닿아 있습니다.

사가랴는 아들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단지 부모의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많은 사람이 그들의 하나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누가복음 1:16 · 두루새김

한 가정의 기쁨이 이스라엘 전체의 회복이라는 더 큰 이야기 속으로 들어갑니다.

천사는 요한이 「엘리야의 영과 능력을 지니고」 주님보다 앞서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말라기는 하나님의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를 보내겠다고 예고했고, 그 본래 문맥에는 심판이 닥치기 전에 백성이 돌아서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습니다(말라기 4:5–6). 요한이 문자 그대로 엘리야 자신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고 주님을 맞을 준비를 시키는 예언자의 사명을 이어받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오실 분은 얼마나 중요한 분이기에, 그분이 오시기 전에 백성 전체를 준비시켜야 하는 것일까요? 누가는 아직 그 답을 말하지 않습니다. 먼저 사가랴의 반응을 보여 줍니다.

믿지 못한 사람에게 주어진 침묵

사가랴가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을 보고 이 일을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었고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누가복음 1:18 · 두루새김

얼핏 합리적인 질문입니다. 그런데 천사는 사가랴를 꾸짖습니다.

「보아라,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네가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20 · 두루새김

사가랴의 질문은 단순히 출산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물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약속을 무엇을 보고 확신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천사가 전한 약속만으로는 확신하기 어렵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주어지는 표징은 침묵입니다. 이 침묵은 믿지 않은 데 대한 꾸짖음이면서 동시에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게 하는 표징입니다.

성전 밖의 사람들은 사가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침내 나온 사가랴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그가 환상을 보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만, 정작 그가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성소 안에서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들은 제사장은 아무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사가랴는 집으로 돌아가고, 엘리사벳이 임신합니다. 엘리사벳은 하나님의 행동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주님이 나를 돌보셔서 이런 일을 해 주셨다.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받던 수치를 없애 주셨다.」누가복음 1:25 · 두루새김

성경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보신다는 말은 단순히 그들의 형편을 알아차리셨다는 뜻을 넘어섭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구원을 위한 행동을 시작하신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출애굽기 3:16에서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고통받던 이스라엘을 찾아오고 살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제 한 사람의 수치만이 아니라, 자기 백성의 오랜 기다림까지 돌보시려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역대상 24:10에 따르면 아비야는 다윗 시대에 정해진 제사장 조직의 여덟 번째 조에 속합니다. 천사의 「엘리야의 영과 능력」이라는 말은 말라기 4:5–6(히브리어 성경의 3:23–24)을 분명하게 반영하는 표현이며, 누가는 바로 그 말씀을 요한의 사명에 적용합니다.

나사렛에서 약속된 또 다른 아들

누가복음 1:26–38 본문 →

엘리사벳이 임신한 지 여섯째 달, 가브리엘이 다시 나타납니다. 이번에는 제사장이 아닙니다. 나사렛에 사는 마리아라는 처녀입니다.

두 장면은 매우 비슷하게 진행됩니다. 천사가 나타나고, 상대가 놀라며, 천사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아들의 탄생을 알리고, 이름을 정해 주며, 앞으로 그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될지 설명합니다. 그리고 질문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같은 구조 속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드러납니다.

「그는 큰 인물이 될 것이며」

천사는 요한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아이는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포도주나 독한 술을 결코 마시지 않을 것이며,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누가복음 1:15 · 두루새김

그런데 예수님에 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큰 인물이 될 것이며,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주 하나님이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좌를 주실 것이다.」누가복음 1:32 · 두루새김

요한의 위대함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사명을 다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위대함은 그분 자신의 신분과 왕으로서의 권한에 연결됩니다.

사무엘하 7:12–16에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의 후손을 일으키고 그 왕국을 굳게 세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왕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맺겠다고 하셨으며, 다윗의 왕좌를 영원히 굳게 세우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처음에는 솔로몬이 왕위를 물려받는 일과 관계되지만, 다윗 왕조가 실패와 무너짐을 겪은 뒤에도 이스라엘의 미래를 향한 중요한 소망으로 남았습니다.

「그는 야곱의 후손들을 영원히 다스릴 것이며,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누가복음 1:33 · 두루새김

1장의 탄생 이야기는 「헤롯이 유대의 왕이던 때에」라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독자는 이미 왕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다른 왕의 탄생을 알립니다. 그 왕은 헤롯의 궁전이 아니라 나사렛의 한 여인에게서 태어나실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헤롯을 대신할 정치적 후계자가 등장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윗에게 약속된 왕의 권한이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실현될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그 나라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는 아직 설명되지 않으며, 누가는 그 답을 이후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속에서 드러낼 것입니다.

마리아의 질문은 사가랴의 질문과 무엇이 다른가

마리아가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아직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한 적이 없는데,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겠습니까?」누가복음 1:34 · 두루새김

사가랴도 질문했고, 마리아도 질문했습니다. 그런데 사가랴는 믿지 않았다는 꾸짖음을 받고, 마리아는 설명을 듣습니다.

사가랴는 「무엇을 보고 이 일을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약속이 참이라는 것을 확인할 근거를 요구하는 질문입니다. 반면 마리아는 자신이 아직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한 적이 없는 상황에서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러나 질문의 문법만으로 두 사람의 마음속을 완벽하게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천사가 사가랴의 반응을 분명히 믿지 않은 것으로 평가한다는 점과, 마리아가 마지막에 말씀을 받아들이고 엘리사벳에게 믿은 사람으로 인정받는다는 점입니다(1:20, 45).

누가가 보여 주는 믿음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아무 질문 없이 받아들이는 태도와 같지 않습니다. 마리아는 묻고, 천사의 설명을 듣습니다.

믿음과 질문이 서로 밀어내는 관계로 그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능력이 너를 덮을 것이다」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성령이 너에게 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능력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이는 거룩한 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누가복음 1:35 · 두루새김

「덮을 것이다」는 그늘을 드리우거나 덮는다는 뜻입니다. 이 표현은 이스라엘이 성막을 완성했을 때 구름이 회막을 덮고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했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출애굽기 40:34–35).

천사는 이 일을 생물학적 과정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 아이의 탄생이 인간의 보통 생식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과 능력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32절에서는 예수님이 다윗의 왕좌를 물려받으실 왕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되십니다. 35절에서는 성령에 의한 특별한 탄생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하나의 이름 안에 왕의 신분과 특별한 탄생이라는 두 의미가 겹쳐 있는 것입니다.

누가는 아직 후대 기독교 신학이 발전시킨,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개념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만으로도 예수님을 단지 하나님께 선택받은 여러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해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말

가브리엘은 늙은 엘리사벳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말씀을 모두 이루실 수 있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37 · 두루새김

이는 창세기 18:14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불가능한 일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시며 이삭의 탄생을 약속하신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선언으로도,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능력을 잃지 않고 이루어진다는 선언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뒤의 뜻을 드러냈는데, 사가랴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고 천사는 때가 되면 그 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에 이 번역은 앞뒤 문맥과 잘 이어집니다.

이제 마리아는 바로 그 말씀을 듣고 대답합니다.

마리아가 말했습니다. 「저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를 떠나갔습니다.누가복음 1:38 · 두루새김

마리아는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그녀의 믿음은 자신의 미래를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신뢰입니다.

사가랴에게는 침묵이 남았습니다. 마리아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남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35절의 「덮다」와 출애굽기 40:35에는 같은 동사 계열이 쓰입니다. 다만 누가가 마리아를 새로운 성막이라고 직접 선언하는 것은 아니며, 두 본문의 연결은 낱말과 주제에 근거한 해석입니다. 37절의 「말씀」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레마는 단순한 발언만이 아니라 일이나 사건을 나타낼 수도 있어서, 위의 두 읽기가 모두 가능해집니다. 38절의 「여종」에 해당하는 원문의 말은 여성 노예를 뜻하며, 마리아가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권한을 인정하는 강한 자기표현입니다. 이것을 마리아가 법적으로 노예 신분이었다는 진술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태어나지 않은 두 아이가 만나다

누가복음 1:39–45 본문 →

마리아는 서둘러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마리아가 인사하자 엘리사벳의 뱃속에서 요한이 뜁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서 외칩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가 나를 찾아오다니, 나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누가복음 1:43 · 두루새김

엘리사벳과 사가랴는 제사장 집안에 속하며, 나이도 많습니다. 반면 마리아는 갈릴리의 젊은 여인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은 「내 주님의 어머니」가 자신을 찾아온 일을 놀라워합니다. 마리아의 나이나 사회적 지위 때문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품고 있는 아이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가득 찬 엘리사벳은 그 아이를 자신의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요한은 주님보다 앞서 갈 사람입니다. 그런데 뱃속에 있는 요한은 예수님을 임신한 마리아의 방문에 기뻐 뜁니다. 요한이 훗날 맡을 사명이 그의 탄생 이전에 이미 이야기 속에서 예고되는 셈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시선을 머무르게 하지 않고, 오시는 분을 가리키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당신에게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은 당신은 복이 있어요.」누가복음 1:45 · 두루새김

이 문장을 들으면 말을 잃은 사가랴가 떠오릅니다. 한 사람은 말씀을 믿지 못했고, 다른 사람은 그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와 그 뱃속의 아기가 복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45절은 한 가지를 더 보여 줍니다. 마리아는 특별한 아이를 품었기 때문에만 복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사람이기 때문에도 복됩니다. 누가복음 11:27–28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낳고 젖 먹인 여인을 복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의 복을 말씀하시는 것도, 마리아의 복됨을 부정하기보다 여기서 나타난 믿음의 의미를 넓혀 주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이제 그 믿음으로 자신이 경험한 일을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이어지는 노래입니다.

조금 더 깊이

뱃속 아기의 움직임 자체만으로 그가 무엇을 의식했는지를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에서 그 움직임의 의미를 설명하는 사람은 성령으로 가득 찬 엘리사벳이며, 누가는 그녀의 증언을 통해 이 만남을 기쁨과 주님의 오심을 알리는 사건으로 보여 줍니다.

한 여인의 기쁨이 세상의 질서를 뒤집다

누가복음 1:46–56 본문 →

마리아의 노래는 「내 영혼이 주님을 높여 찬양한다」라는 조용한 말로 시작됩니다.

「그분이 여종인 나의 낮은 처지를 돌아보셨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모든 세대가 나를 복된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누가복음 1:48 · 두루새김

「낮은 처지」를 단순히 마리아가 겸손한 성격을 지녔다는 뜻으로 읽으면 부족합니다. 그녀는 권력을 가진 사람도 아니고, 특별한 지위를 가진 인물로 소개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 자신을 돌아보셨고, 그 사실이 그녀의 기쁨이 됩니다.

하지만 노래는 곧 놀라운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왜 왕좌를 뒤집으시는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낮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높이셨다.」누가복음 1:52 · 두루새김
「굶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 먹이시고, 부자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셨다.」누가복음 1:53 · 두루새김

개인의 작은 기쁨이 갑자기 세상 전체의 질서를 뒤집는 노래로 커집니다.

이 노래는 사무엘상 2:1–10에 기록된 한나의 노래와 깊이 연결됩니다. 한나는 자녀를 낳지 못해 고통받던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무엘을 주셨을 때, 그는 자신의 기쁨에서 출발해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 배부른 사람과 굶주린 사람의 운명이 뒤바뀌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노래했습니다. 특히 사무엘상 2:5–8과 누가복음 1:52–53은 주제와 그려 내는 모습에서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그런데 두 여인의 노래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한나의 노래는 마지막에 하나님이 자기 왕과 기름 부음 받은 사람에게 힘을 주실 것을 바라봅니다(사무엘상 2:10). 마리아는 이제 바로 그 왕에 관한 약속이 이루어지려는 순간에 노래합니다. 그녀가 품은 아들은 다윗의 왕좌를 받으실 분입니다.

그러므로 낮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높이시는 하나님과 다윗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은 서로 관계없는 주제가 아닙니다. 그분의 나라는 세상의 기존 질서를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과 권력을 가진 사람, 부유한 사람이 의지하는 힘이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드러내시고, 낮은 처지에 있는 사람과 굶주린 사람을 돌아보시는 분입니다.

그렇다고 이 노래를 모든 부자가 반드시 가난해지고 모든 가난한 사람이 반드시 부자가 된다는 단순한 공식으로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마리아가 노래하는 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실 때 인간이 당연하게 여기는 힘과 지위의 질서가 뒤집힌다는 사실입니다. 동시에 굶주림과 가난은 실제 삶의 문제이기도 해서, 이 표현들을 오직 영적인 비유로만 해석하면 노래가 담고 있는 사회적 의미가 사라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6:20–26에서 가난한 사람과 굶주린 사람의 복을 선언하시고, 부유하고 배부른 사람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바로 그 예수님의 복음이 어떤 세상을 바라보는지 먼저 들려줍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왜 이미 일어난 것처럼 노래할까

마리아는 하나님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내리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으셨고, 본문에는 헤롯이 왕좌에서 내려왔다는 사건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 노래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미 일어난 하나님의 행동들을 돌아보는 노래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해당 동사들이 지나간 일을 나타내는 형태로 쓰였고, 이스라엘 역사에는 하나님이 교만한 세력을 낮추고 억눌린 백성을 건지셨다는 기억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앞으로 이루어질 구원을 확신하며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노래하는 예언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둘 가운데 어느 하나만이 옳다고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노래가 과거에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의 오심을 통해 펼쳐질 미래를 기대한다고 이해하면 문맥이 자연스럽습니다.

마리아는 갑자기 새로운 하나님을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던 이스라엘의 하나님, 약한 사람을 돌아보시고 교만한 사람을 낮추시며 자기 백성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여전히 같은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말은 바로 그 하나님의 변함없는 신실하심으로 향합니다.

「그분은 자비를 기억하시고 자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다.」누가복음 1:54 · 두루새김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영원히 자비를 베푸신 것이다.」누가복음 1:55 · 두루새김

창세기 12:1–3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통해 땅의 모든 민족이 복을 얻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창세기 22:17–18에서도 그의 후손과 관련된 약속을 거듭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셨던 약속을 잊으시고 완전히 다른 계획을 시작하시는 사건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 약속이 새롭고 결정적인 단계에 들어서는 사건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언약을 변함없이 지키며 행동하신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 행동의 중심에 예수님의 탄생이 놓여 있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요한입니다」

누가복음 1:57–66 본문 →

이제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습니다.

이웃과 친척들은 하나님이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소식을 듣고 함께 기뻐합니다. 천사가 말했던 「많은 사람도 그 아이가 태어난 것을 기뻐할 것이다」라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출산 자체보다 아이에게 이름을 짓는 일을 길게 이야기합니다. 여드레째 되는 날, 사람들은 아이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는 이름을 붙이려 합니다. 엘리사벳이 「아니에요. 이름은 요한이라고 해야 해요」라고 하자, 사람들은 친척 중에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다며 놀랍니다. 그들이 아버지 사가랴에게 손짓으로 묻습니다.

사가랴는 글을 쓸 판을 달라고 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요한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누가복음 1:63 · 두루새김

사가랴는 아이의 이름을 무엇으로 정하고 싶은지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정해진 이름을 확인합니다. 그 이름은 아버지가 생각해 낸 이름이 아니라, 천사가 하나님께 받은 말씀으로 정해 준 이름입니다.

본문은 이름을 물려주는 관습 자체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아이가 어떤 사람이며 무슨 일을 맡을지가 부모나 친척들의 기대에서 비롯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집안에 속한 아이이지만, 그가 맡을 일은 집안의 범위를 훨씬 넘어섭니다.

사가랴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사실을 믿지 못해 말을 잃었습니다. 이제 그 말씀이 이루어졌고, 사가랴는 그 말씀에 따라 아이의 이름을 확인합니다.

그때 침묵이 끝납니다.

바로 그때 사가랴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하나님을 찬양하며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누가복음 1:64 · 두루새김

그의 입에서 처음 나오는 것은 그동안의 답답함에 대한 설명이나 자신의 잘못에 대한 변명이 아닙니다. 찬양입니다.

앞에서 사가랴는 성소 안에서 들은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그가 말을 하고, 이웃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히며, 유대의 산간 지역 전체에 이 모든 일이 이야기로 퍼져 나갑니다. 처음에는 한 사람에게 주어진 소식이 사람들이 함께 듣고 마음에 새기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그 일을 마음에 새기며 말했습니다. 「이 아이는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까?」 주님의 손길이 그 아이와 함께했기 때문입니다.누가복음 1:66 · 두루새김

이 질문이 남겨지는 바로 그 자리에서 사가랴의 노래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사가랴는 뜻밖에도 자기 아들보다 먼저 다른 분에 대해 노래합니다.

사가랴가 자기 아들보다 먼저 찬양한 분

누가복음 1:67–79 본문 →

사가랴는 성령으로 가득 차서 예언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주님은 찬양받으실 분이다. 자기 백성을 찾아오셔서 건져 내셨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68 · 두루새김
「자신의 종 다윗의 집안에서 우리를 위해 구원의 뿔을 일으키셨다.」누가복음 1:69 · 두루새김

사가랴는 제사장이고, 엘리사벳도 아론의 후손입니다. 방금 태어난 요한 역시 제사장 집안에 속한 아이입니다. 그런데 사가랴는 자신의 아들이 속한 집안이 아니라 다윗의 집안을 노래합니다.

그가 노래하는 구원은 자기 아들의 탄생에서 완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그 구원을 준비하는 사람이고, 그 구원을 가져오실 왕은 다윗의 집안에서 나오실 분입니다. 이미 가브리엘이 예수님께 다윗의 왕좌가 주어질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구약에서 뿔은 힘과 권력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쓰입니다. 구원의 뿔은 구원할 수 있는 강한 능력이나 그 능력을 지닌 구원자를 가리킵니다. 사무엘상 2:10에도 하나님이 기름 부음 받은 왕의 뿔을 높이신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구원은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일까요?

원수에게서 벗어나는 구원

「우리를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이들의 손에서 구원하신 것이다.」누가복음 1:71 · 두루새김

그때 유대는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고, 헤롯이 왕으로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은 막연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에게서 구원받는다는 표현을 처음부터 순전히 영적인 의미로만 해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노래가 말하는 구원은 정치적인 해방보다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갑니다.

「우리가 원수들의 손에서 구출되어 두려움 없이,」누가복음 1:74 · 두루새김
「평생 그분 앞에서 거룩하고 올바르게 그분을 섬기게 하시겠다는 것이다.」누가복음 1:75 · 두루새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건지시는 이유는 그들이 또 다른 권력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 앞에서 거룩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출애굽기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속박에서 건져 내시지만, 그것은 이집트를 떠나 자유로운 민족이 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부름받습니다(출애굽기 3:12, 7:16, 19:4–6). 속박에서 구출되고, 두려움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사가랴는 마침내 자기 아들을 향해 말합니다.

요한이 알려 줄 구원의 비밀

「그리고 아가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고 불릴 것이다. 주님보다 앞서 가서 그분의 길을 준비할 것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76 · 두루새김

사가랴는 요한이 위대한 왕이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왕보다 앞서 길을 준비할 예언자가 될 것입니다.

「그분의 백성에게 죄를 용서받는 구원을 알려 줄 것이다.」누가복음 1:77 · 두루새김

앞에서는 원수들의 손에서 벗어나는 구원을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죄를 용서받는 구원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구원은 외부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백성이 외국 세력의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동시에 우상을 섬기고 불의를 행하며 언약을 깨뜨리기도 했다고 지적해 왔습니다. 예레미야 31:31–34가 새 언약과 죄의 용서를 함께 말하는 것도 이런 배경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죄의 용서는 정치적인 문제와 아무 관계없는 별개의 종교적 주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참으로 회복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질문에 대한 더 근본적인 대답입니다. 누가는 이 장에서 그 구원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두 설명하지 않지만, 요한이 준비할 분이 자기 백성에게 죄의 용서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유를 가져오실 분이라는 방향은 분명히 잡아 줍니다.

누가복음의 마지막 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에게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선포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누가복음 24:46–47). 그러나 지금 사가랴가 보는 것은 아직 그 모든 일의 시작입니다.

높은 곳에서 떠오르는 빛이 우리를 찾아온다

「이는 우리 하나님의 깊은 자비 때문이다. 그 자비로 높은 곳에서 떠오르는 빛이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누가복음 1:78 · 두루새김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비추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 것이다.」누가복음 1:79 · 두루새김

「깊은 자비」(σπλάγχνον)로 옮긴 말은 본래 몸속의 내장을 가리킵니다. 사가랴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이유를 그분의 몸 깊은 속에서 나오는 자비에서 찾습니다.

그 자비는 「높은 곳에서 떠오르는 빛」을 통해 나타납니다. 이 빛은 어둠을 밝히는 해가 떠오르는 모습으로도, 다윗에게서 새롭게 돋아나는 의로운 가지, 곧 왕의 모습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해가 돋는 곳은 땅 위의 지평선이지만, 이 빛은 높은 곳에서 우리를 찾아옵니다. 사가랴는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는 구원의 빛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빛이 비추는 사람들은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빛을 찾으러 달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이 찾아옵니다. 이 모습은 어둠 속에 있던 백성에게 큰 빛이 비친다는 이사야 9:2의 약속과 이어집니다.

구원의 빛은 단순히 세상을 밝게 보이게 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새로운 길로 이끕니다.

그리고 그 길의 이름은 평화입니다.

성경에서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공동체의 회복, 안전과 온전함을 함께 아우르는 풍성한 개념입니다. 사가랴의 노래는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받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그 구원이 향하는 곳은 평화의 길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다윗의 왕좌를 받으실 왕의 다스림은 단순히 새로운 권력이 옛 권력을 대신하는 것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죄의 용서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회복시키시고,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시며, 그들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끄실 분입니다.

조금 더 깊이

「떠오르는 빛」의 그리스어 핵심 낱말은 아나톨레입니다. 이 낱말은 해가 떠오르는 일이나 동쪽을 뜻할 수 있지만, 예레미야 23:5와 스가랴 3:8, 6:12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소망과 연결되는 「순」 또는 「싹」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입니다. 79절이 곧바로 어둠 속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는 장면으로 이어지므로 이 문맥에서는 해가 떠오른다는 이미지가 특히 두드러지고, 두루새김도 「떠오르는 빛」으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집안에서 구원의 뿔을 일으키셨다는 69절을 생각하면 왕의 순이라는 구약적 배경도 의미 있게 연결됩니다. 이사야 9:2의 본래 문맥에서 그 말씀은 고통받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구원과 새로운 다스림이 찾아온다는 소망을 전하며, 누가는 그와 같은 구원의 빛을 예수님의 오심에 연결해 읽도록 이끕니다.

광야에서 자라는 아이

누가복음 1:80 본문 →

누가복음 1장은 뜻밖에도 아주 짧은 문장으로 끝납니다.

아이는 자라면서 영이 굳세어졌습니다.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서는 날까지 광야에서 지냈습니다.누가복음 1:80 · 두루새김

누가는 요한이 광야에서 어떤 음식을 먹었고, 누구에게 배웠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제사장이 향을 피우고 백성이 기도하던 예루살렘 성전에서 시작되었지만, 장의 마지막에 요한은 성전이 아니라 광야에 있습니다.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그는 주님보다 앞서 가서 길을 준비할 예언자로 자랍니다.

광야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운 곳입니다. 이사야 40:3도 광야에서 하나님의 길을 준비하라고 외칩니다. 요한의 광야 생활을 곧바로 그 예언이 이루어지는 장면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독자는 이 짧은 설명 속에서도 이스라엘이 오래 품어 온 회복의 소망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요한은 태어났지만, 예수님께서는 아직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의 왕좌를 받으실 왕도, 높은 곳에서 떠오르는 빛도 아직 이야기의 무대에 나타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누구신지에 관한 약속은 이미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과 다윗에게 주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엘리사벳과 마리아를 돌아보셨으며, 그 자비는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죄를 용서하고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는 더 큰 구원을 향합니다.

마지막 장면에는 화려한 왕궁도, 많은 사람의 환호도 없습니다.

광야에서 한 아이가 자라고 있습니다.

그 아이는 언젠가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서서 길을 준비할 것입니다. 성전에서 들려온 약속과 나사렛에 전해진 소식, 두 여인의 기쁨과 사가랴의 찬양은 모두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신 한 분을 향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자라고 있고, 그가 길을 준비할 분은 마리아의 뱃속에 계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