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풀어 읽기 · 13장

이 장의 자리 · 12–13장 · 성벽 봉헌과 개혁

성벽은 서 있지만 약속은 무너지고 있습니다

느헤미야 13장은 놀랍도록 불편한 결말입니다.

성벽은 여전히 서 있습니다. 성전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발견한 것은 공동체가 다시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성전을 버려두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성전에서 하는 일은 돌보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에 물건을 사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안식일의 시장은 계속 열렸습니다. 다른 민족들과의 혼인을 제한하기로 했지만, 그 약속 역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돌아와 이러한 문제들을 바로잡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앞선 장들의 기쁨과 전혀 다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됩니다. 그는 관리들을 꾸짖고, 물건을 내던지며, 성문을 닫게 하고, 사람들을 때리고 머리털을 뽑기까지 합니다.

마지막에는 백성 전체의 감격적인 찬양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선언도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느헤미야 개인의 짧은 기도가 남습니다.

왜 성벽을 다시 세우고 공동체를 회복한 일을 기록한 책이 이렇게 끝날까요?

이 장을 단순히 한 지도자가 타락한 백성을 바로잡은 성공담으로 읽으면, 결말이 남기는 불편함을 놓치게 됩니다.

느헤미야 13장은 무너진 성벽을 다시 세우는 것과 무너진 신실함을 회복하는 것이 얼마나 다른 일인지를 보여 줍니다.

돌은 한 번 쌓아 올리면 그 자리에 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약속은 사람들의 선택과 행동 속에서 계속 지켜져야 합니다. 지난날의 결심이 오늘의 순종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913장 본문 읽기 →

저주가 복으로 바뀌었던 역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느헤미야 13:1–3 본문 →

13장은 다시 모세의 책을 읽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날 백성이 듣는 가운데 모세의 책을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그 책에는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이 하나님의 공동체에 영원히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었습니다.느헤미야 13:1 · 두루새김

백성이 읽은 규정은 신명기 23:3–6에 나옵니다. 그곳에서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이 하나님의 공동체에 들어올 수 없다는 규정의 이유는 두 가지로 설명됩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왔을 때 빵과 물로 맞이하지 않았고, 발람에게 돈을 주고 시켜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의 역사적 배경은 민수기 22–2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여 발람을 불러 저주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말만 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던 시도는 오히려 축복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들이 빵과 물을 가지고 이스라엘 자손을 맞이하지 않았고, 발람에게 돈을 주고 시켜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 저주를 복으로 바꾸셨습니다.느헤미야 13:2 · 두루새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신을 공격하려는 모든 사람을 제거했기 때문에 그들을 보호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계획한 저주가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셨고, 오히려 복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백성은 바로 그 이야기를 읽고 자신들 가운데 섞여 있던 다른 민족 사람들을 갈라놓습니다.

백성은 그 율법을 듣고, 자기들 가운데 섞여 있던 다른 민족 사람들을 모두 이스라엘에서 갈라놓았습니다.느헤미야 13:3 · 두루새김

하나님께서 저주를 복으로 바꾸셨다는 기억과, 공동체가 특정한 집단을 구별하여 내보냈다는 행동이 나란히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무엇을 뜻하는가?

신명기 23장의 규정에서 공동체에 들어온다는 말이 정확히 어떤 권리와 지위를 가리키는지는 논의가 있습니다. 언약 공동체의 공식적인 구성원 자격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특정한 공적·종교적 참여 자격과 관련된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 규정이 모든 개인의 일상적인 접촉이나 거주 자체를 금지하는 말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느헤미야 13:3의 「섞여 있던 다른 민족 사람들」도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 본문에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혼인으로 생긴 자손만을 가리킨다고 좁혀서는 안 되며, 그렇다고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외국인을 무조건 추방했다는 뜻으로 넓혀서도 안 됩니다.

룻기는 모압 여자 룻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룻기 1:16), 보아스와 혼인하여 다윗의 조상이 되는 이야기를 전합니다(룻기 4:13–22). 따라서 신명기의 제한 규정과 룻기의 이야기를 아무런 구별 없이 하나의 단순한 원칙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느헤미야의 조치를 이해하려면 포로에서 돌아온 공동체가 자신들의 신앙적 정체성을 지키려 했다는 역사적 상황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조치를 모든 시대와 모든 민족 관계에 적용되는 무조건적인 배제 원칙으로 넓혀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4절에서는 이 공동체의 경계 문제가 훨씬 더 구체적이고 뜻밖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을 구별하려 했던 공동체의 한가운데, 그것도 하나님의 집 안에 도비야의 방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도비야의 살림살이가 들어오다

느헤미야 13:4–9 본문 →

이 일이 있기 전, 우리 하나님의 집에 딸린 방을 맡은 제사장 엘리아십은 도비야와 가까운 사이였습니다.느헤미야 13:4 · 두루새김

도비야는 느헤미야서 초반부터 성벽을 다시 세우는 일에 반대했던 인물입니다. 느헤미야 2:10에서는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위해 일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불쾌해했고, 4:3에서는 성벽을 비웃었으며, 6:17–19에서는 유다의 귀족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느헤미야에게 압력을 가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도비야에게 성전 안의 큰 방이 제공되었습니다.

엘리아십은 도비야에게 큰 방 하나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 방은 원래 곡식 제물과 유향과 성전 기구들을 두던 곳이었습니다.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사람들과 문지기들에게 주도록 정해진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 제사장들에게 줄 예물도 원래 그곳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느헤미야 13:5 · 두루새김

하나님의 집에서 사용하도록 구별된 공간이 특정한 인물의 개인적인 용도로 바뀌었습니다.

더욱이 그 공간은 성전에서 하는 일을 계속 이어 가는 데 필요한 물품을 보관하던 장소였습니다. 독자는 그 방이 무엇을 위해 사용되어야 했는지 알고 난 뒤, 그 공간이 도비야를 위해 제공되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느헤미야가 없는 동안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나는 예루살렘에 없었습니다. 바벨론 왕 아닥사스다가 다스린 지 32년째 되던 해에 왕에게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뒤 나는 왕에게 떠날 허락을 청했습니다.느헤미야 13:6 · 두루새김

느헤미야가 돌아와 그 일을 알게 되었을 때 보인 반응은 매우 거칩니다.

나는 이 일이 몹시 못마땅해서 도비야의 살림살이를 모두 그 방 밖으로 내던졌습니다.느헤미야 13:8 · 두루새김

이어 성전의 방들을 정결하게 하도록 지시하고, 하나님의 집 기구들과 곡식 제물과 유향을 다시 들여놓습니다.

도비야의 살림살이는 밖으로 나가고, 성전의 본래 물품은 안으로 돌아옵니다.

본문은 도비야의 살림살이를 내던진 느헤미야의 행동을 그대로 기록합니다. 그렇다고 오늘의 독자가 종교적 공간을 둘러싼 모든 갈등에서 물리적인 강제력을 사용해도 된다는 일반적인 허가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행동은 페르시아 제국 아래 유다 공동체의 총독으로 활동하던 느헤미야의 구체적인 조치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무너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의 한 방은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렸습니다.

느헤미야는 그 공간을 다시 원래의 용도로 돌려놓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밝혀지는 문제는 방 하나의 잘못된 사용보다 더 넓습니다.

성전에서 일하던 사람들 자체가 자리를 떠나 있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엘리아십은 성전의 방을 관리하는 제사장이었습니다. 느헤미야 3:1에는 제사장들의 우두머리인 엘리아십이 등장하지만, 여기서 성전의 방을 맡은 엘리아십이 반드시 같은 인물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바벨론 왕 아닥사스다」는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가 바벨론을 포함한 제국을 다스리는 통치자였다는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이 버려져 있다는 말의 의미

느헤미야 13:10–14 본문 →

느헤미야는 성전의 방을 바로잡은 뒤 또 다른 사실을 발견합니다.

나는 레위 사람들에게 돌아갈 몫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성전에서 일하던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밭으로 달아나 있었습니다.느헤미야 13:10 · 두루새김

성전에서 일하던 사람들에게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양식이 있었습니다. 공동체가 그들의 생활을 지원하지 않자, 그들은 생계를 위해 자기 밭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성전에서 하는 일을 버렸다고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필요한 몫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문제의 원인으로 제시합니다.

성전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자리를 떠났다는 결과만 본다면 그들의 책임을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먼저 그들을 지원해야 할 공동체의 책임을 문제 삼습니다.

나는 관리들을 꾸짖으며 말했습니다. 「왜 하나님의 집이 버려져 있느냐?」 그런 다음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사람들을 모아 각자 일하던 자리에 다시 세웠습니다.느헤미야 13:11 · 두루새김

이 질문은 느헤미야 10장의 마지막 서약을 정면으로 떠올리게 합니다. 그때 백성은 자신들의 하나님의 집을 버려두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10장에서는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13장에서는 왜 버려져 있느냐는 꾸짖음입니다.

백성이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바로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버려둔다는 것은 반드시 건물을 무너뜨리거나 문을 닫는 행위만을 뜻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이 본래의 목적대로 사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할 책임을 돌보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집을 버려두는 일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관리들을 꾸짖은 뒤, 떠나 있던 사람들을 다시 모아 각자의 자리에 세웁니다. 그러자 온 유다 사람들이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창고로 가져옵니다.

나는 제사장 셀레먀와 서기관 사독과 레위 사람 브다야에게 창고를 맡겼습니다. 또 맛다냐의 손자이며 삭굴의 아들인 하난을 세워 그들을 돕게 했습니다. 이들은 믿을 만한 사람들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동료들에게 몫을 나누어 주는 일이 이들의 책임이었습니다.느헤미야 13:13 · 두루새김

공동체가 물품을 바치기로 약속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 물품이 제대로 보관되고, 맡은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했습니다. 성전의 일을 위해서는 신앙적인 열심뿐 아니라 실제로 믿고 맡길 수 있는지도 중요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일을 마친 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나는 기도했습니다. 「저의 하나님, 이 일로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제가 저의 하나님의 집과 그곳에서 하는 일을 위해 한 선한 일들을 지워 버리지 마십시오.」느헤미야 13:14 · 두루새김

여기서 「기억해 주십시오」라는 말은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잊지 않는다는 뜻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행한 일을 인정하시고 그에 맞게 대해 주시기를 바라는 간구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를 느헤미야가 자신의 선한 일들로 하나님의 구원을 사려고 했다는 뜻으로 곧바로 해석할 근거는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감당한 일을 하나님께 아뢰며, 그 수고가 헛되이 사라지지 않기를 구합니다.

이 기도는 앞으로 세 번 더 모습을 달리하여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기도들이 나타나는 자리마다 느헤미야는 공동체의 또 다른 문제와 마주합니다.

안식일에 열린 시장과 닫힌 성문

느헤미야 13:15–22 본문 →

느헤미야가 다음으로 발견한 문제는 성전 안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시장과 성문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나는 유다에서 사람들이 안식일에 포도즙을 짜는 틀에서 포도를 밟고, 곡식 더미를 가져다가 나귀에 싣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포도주와 포도와 무화과와 온갖 짐도 안식일에 예루살렘으로 가져왔습니다. 나는 그들이 먹을거리를 팔던 날에 경고했습니다.느헤미야 13:15 · 두루새김

포도즙을 짜는 틀에서 포도를 밟는 생산 활동이 있었고, 짐을 나귀에 싣는 운송 활동이 있었으며, 성읍 안에서 물품을 사고파는 상업 활동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에도 평일의 경제활동이 거의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미 안식일에 물건을 사지 않겠다고 서약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느헤미야 10:31).

안식일을 더럽힌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유다의 귀족들을 꾸짖으며 말했습니다. 「너희는 어째서 이런 악한 일을 하여 안식일을 더럽히느냐?」느헤미야 13:17 · 두루새김

여기서 「더럽히느냐」라는 표현은 정결하지 못한 물건이 묻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신 날을 일반적인 영업일처럼 취급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안식일은 창조와 출애굽의 기억에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20:8–11에서는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곱째 날에 쉬신 것을 근거로 삼고, 신명기 5:12–15에서는 이집트에서 종이었던 이스라엘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합니다. 특히 신명기는 집안의 종들까지 쉬도록 명령합니다.

이 배경을 고려하면 안식일의 쉼은 단순히 개인이 종교적인 활동을 하는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노동과 생산과 거래가 언제나 인간의 삶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상인들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서 물건을 사는 사람들과 그 거래가 이루어지도록 허용하는 지도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는 외부 사람들이 물건을 가져오는 행위만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 할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그 일을 막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책임을 물었습니다.

왜 성문을 닫았을까?

안식일을 앞두고 예루살렘 성문에 어둠이 깔리자, 나는 성문을 닫게 하고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열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또 내 시종들 가운데 몇 사람을 성문에 세워, 안식일에 짐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느헤미야 13:19 · 두루새김

성문은 본래 성읍의 출입과 방어를 위한 시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성문이 공동체의 경제생활을 조절하는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문제가 즉시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장사꾼들은 성문이 닫히자 예루살렘 밖에서 밤을 지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에게도 경고합니다.

나는 그들에게 경고했습니다. 「너희는 왜 성벽 앞에서 밤을 지내느냐? 한 번 더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손을 대겠다.」 그때부터 그들은 안식일에 오지 않았습니다.느헤미야 13:21 · 두루새김

두 번째 기억의 기도

나는 레위 사람들에게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와서 성문을 지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저의 하나님, 제가 한 이 일도 기억해 주십시오. 주님의 풍성하고 한결같은 사랑으로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느헤미야 13:22 · 두루새김

처음에는 느헤미야의 시종들이 성문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레위 사람들이 정결하게 한 뒤 그 임무를 맡습니다. 이렇게 성문을 지키는 일은 단순한 경비 업무를 넘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일임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공동체의 규칙을 실제로 지키게 하려면 제도적인 조치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도적인 조치가 곧 사람의 마음속 신실함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14절에서 그는 자신의 선한 일들을 기억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22절에서는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덧붙입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수고를 하나님께 기억해 달라고 구하면서도, 자신이 의지하는 마지막 근거를 하나님의 풍성하고 한결같은 사랑에 둡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지점에서 예레미야 31:31–34의 새 언약 약속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율법을 백성의 속에 두시고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느헤미야 13장이 그 예언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밖에서 규정을 정하고 엄중한 약속을 하는 일과, 사람들이 실제로 그 말씀을 계속 따르는 일 사이에 간격이 있다는 점에서 두 본문은 중요한 신학적 질문을 공유합니다. 에스겔 36:26–27에서도 하나님은 백성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시고 자신의 영을 그들 속에 두어 규례를 따르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예언들은 사람이 어떤 명령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명령에 순종하는 삶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문제를 다른 방향에서 다룹니다.

자녀들이 유다 말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왜 문제가 되었을까?

느헤미야 13:23–24 본문 →

느헤미야는 또 다른 문제를 발견합니다.

또 그 무렵 나는 아스돗 여자들과 암몬 여자들과 모압 여자들을 아내로 맞아들인 유다 사람들을 보았습니다.느헤미야 13:23 · 두루새김

그러나 이어지는 24절은 단순히 혼인 관계만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자녀들 가운데 절반은 아스돗 말을 했습니다. 자녀들은 저마다 각 민족의 말을 했고, 유다 말은 할 줄 몰랐습니다.느헤미야 13:24 · 두루새김

여기서 「유다 말」은 당시 유다 공동체의 언어를 가리킵니다. 열왕기하 18:26과 이사야 36:11에도 원문에서 같은 표현이 등장하며, 그곳에서는 아람어와 구별되는 유다의 언어를 뜻합니다.

또한 자녀들의 절반이 아스돗 말을 했다는 표현과 유다 말을 할 줄 몰랐다는 뒤의 진술 사이에는 범위의 문제가 있습니다. 유다 말을 할 줄 몰랐다는 설명이 앞서 언급된 절반에게만 적용되는지, 더 넓은 집단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언어와 공동체의 기억

언어는 단지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공동체의 이야기와 법, 관습과 기억이 전달되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율법을 듣고, 조상들의 역사를 배우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익히는 일이 언어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신명기 6:6–7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고, 집에 앉았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웠을 때나 일어날 때나 이야기하라고 명령합니다. 따라서 자녀들이 유다의 언어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느헤미야에게 단순한 언어 교육의 문제가 아니었을 수 있습니다. 부모 세대가 알고 있는 말씀과 공동체의 전통이 자녀 세대에 어떻게 전달될 것인가 하는 우려와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본문은 유다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다거나, 율법을 다른 언어로 배울 수 없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느헤미야의 우려를 모든 다른 언어의 사용이 곧 불신앙이라는 보편적인 주장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이 장면에서 확실한 것은 느헤미야가 언어의 변화와 혼인 관계를 공동체의 정체성이 약해지는 징후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솔로몬은 왜 등장하는가?

느헤미야는 이 문제를 지적하면서 솔로몬의 사례를 듭니다.

「이스라엘 왕 솔로몬도 이런 일 때문에 죄를 짓지 않았느냐? 수많은 민족 가운데 그와 같은 왕은 없었다. 그는 자기 하나님께 사랑받았고, 하나님은 그를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다. 그런 그마저도 다른 민족 여자들이 죄를 짓게 했다.」느헤미야 13:26 · 두루새김

이 주장은 열왕기상 11:1–8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곳에서 솔로몬은 여러 다른 민족 여성을 사랑했고, 그들이 그의 마음을 다른 신들에게 돌리게 했다고 기록됩니다.

그런 솔로몬조차 우상 숭배로 기울었다면, 느헤미야 시대의 사람들이 자신들은 결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1장에서 솔로몬의 죄는 단순히 다른 민족 출신 여성과 결혼했다는 사실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신들을 섬기고 하나님께 온전히 충성하지 않았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느헤미야는 솔로몬의 역사에서 다른 민족과의 혼인이 하나님께 충실하지 못한 삶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를 끌어옵니다. 그렇지만 그 경고를 모든 시대의 모든 국제결혼에 똑같이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포로기 이후 유다 공동체가 자신들의 언약적 정체성을 지키려 했던 역사적 상황을 다룹니다.

느헤미야의 폭력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느헤미야 13:25–27 본문 →

이 장에서 가장 불편하고 신중하게 다루어야 할 구절은 25절입니다.

나는 그들을 꾸짖고 저주했으며,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을 때리고 머리털을 뽑았습니다. 또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게 하며 말했습니다. 「너희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과 결혼시키지 마라. 또 그들의 딸들을 너희 아들들의 아내로도 너희 자신의 아내로도 맞아들이지 마라.」느헤미야 13:25 · 두루새김

이 행동을 단순한 엄중한 훈계로 부드럽게 바꾸어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분명히 신체적인 폭력을 기록합니다.

본문은 그 행동을 느헤미야 자신이 일인칭으로 서술한 기록에 담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람들을 때리고 머리털을 뽑으라고 명령하셨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 행동을 하나님께서 분명히 칭찬하셨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따라서 느헤미야가 공동체를 개혁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과, 그가 사용한 모든 방법이 정당했다는 판단은 구별해야 합니다.

특히 이 장에서는 느헤미야가 자신의 행동을 하나님께 기억해 달라고 기도하지만, 그 기도 자체가 하나님의 승인으로 제시되지는 않습니다. 성경이 한 인물의 행동을 기록한다는 사실과, 그 행동을 모든 시대의 신앙인이 따라야 할 모범으로 제시한다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올바른 목적을 추구한다는 사실이 모든 수단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머리털을 뽑았습니다」라는 행동은 공개적인 수치와 모욕을 주는 처벌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에스라 9:3에서 에스라는 공동체의 혼인 문제를 듣고 자기 머리털과 수염을 뜯습니다. 그는 자신의 몸을 통해 충격과 슬픔을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 13:25에서는 그 행동이 다른 사람을 향합니다. 두 사람 모두 공동체의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지만, 그것을 표현한 행동은 같지 않았습니다.

제사장들의 우두머리 가문까지 이어진 관계

느헤미야 13:28–29 본문 →

느헤미야가 혼인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이유는 일반 백성의 가정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제사장들의 우두머리인 엘리아십의 아들 요야다에게는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된 아들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를 내 앞에서 쫓아냈습니다.느헤미야 13:28 · 두루새김

산발랏은 느헤미야가 성벽을 다시 세우는 일을 계속 방해했던 인물입니다. 느헤미야 2:10과 2:19, 4:1–2, 6:1–14에서 그는 성벽을 다시 세우는 일을 방해하거나 느헤미야를 위협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다른 민족과의 혼인이라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종교적 지도층이 느헤미야의 개혁을 방해했던 외부 권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장의 앞부분에서는 도비야가 성전 안에 방을 얻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산발랏이 제사장들의 우두머리 가문과 혼인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제 성벽 밖에서 공격하는 적대자로만 등장하지 않습니다. 성전의 공간과 제사장 가문의 관계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세울 때에는 주로 외부의 방해와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마주한 문제는 공동체 내부의 관계와 결정 속에서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느헤미야는 세 번째로 하나님께 기억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나는 기도했습니다. 「저의 하나님, 그들이 한 일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들이 제사장직을 더럽히고, 제사장직과 레위 사람들에 관한 언약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느헤미야 13:29 · 두루새김

앞선 두 기도와 달리 이번에는 자신이 아니라 「그들이 한 일」을 기억해 달라고 합니다. 자신에게는 선을 위한 기억을 구하고, 제사장직을 더럽힌 사람들에게는 그 잘못을 하나님께서 기억해 달라고 구합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실제로 어떻게 심판하셨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가 그들의 행위를 하나님께 고발하는 장면입니다.

마지막 개혁은 다시 일상의 책임으로 돌아간다

느헤미야 13:30–31 본문 →

이제 느헤미야서는 마지막 두 절에 이릅니다.

나는 그들에게서 다른 민족에게 속한 모든 것을 없애 정결하게 했습니다. 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일을 나누어 맡겨, 저마다 자기 일을 하게 했습니다.느헤미야 13:30 · 두루새김

여기서 「다른 민족에게 속한 모든 것」이라는 표현은 범위가 넓고 압축적입니다. 바로 앞에 혼인 문제와 제사장 가문의 관계가 등장하기 때문에 그것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나 관습을 모두 포함하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느헤미야가 공동체 안의 모든 다른 민족 출신 사람을 한꺼번에 추방했다거나, 특정한 모든 외국 문화 요소를 제거했다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어지는 31절은 나무와 첫 수확물을 바치는 일을 정했다고 말합니다.

정해진 때에 나무를 바치는 일과 첫 수확물을 바치는 일도 정했습니다. 나는 기도했습니다. 「저의 하나님, 저를 기억하시고 제게 좋은 것을 베풀어 주십시오.」느헤미야 13:31 · 두루새김

성벽을 다시 세우기 시작했던 느헤미야는 이제 나무를 언제 바칠지, 첫 수확물을 어떻게 가져올지 정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 10:34–35에서 백성은 정해진 때에 나무를 가져오고 첫 수확물을 바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13장에서 그 약속은 다시 정비되어야 했습니다.

율법을 읽는 일은 필요했습니다. 공동체가 서약하는 일도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약속이 자동으로 유지되지는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지도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관계에 따라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돌아왔을 때 그가 해야 했던 일은 새로운 성벽을 세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정해져 있던 책임들을 다시 실행하도록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좋게 기억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이 기도가 그가 자신의 개혁을 완전한 성공으로 확신했다는 선언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마지막 기도는 자신이 모든 일을 완성했다는 승리 선언이라기보다, 자신이 행한 일을 하나님 앞에 맡기는 간구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마지막에 남은 짧은 기도

느헤미야 13:1–31 본문 →

느헤미야서의 마지막 장면은 성벽 위의 환호가 아닙니다.

느헤미야서는 공동체를 다시 세우려는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지 보여 줍니다. 동시에 그 노력이 모든 불순종을 끝내지는 못한다는 사실도 숨기지 않습니다. 성벽의 회복과 공동체의 신실함은 연결되어 있지만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책의 처음에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제 책의 마지막에서도 그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완성된 성벽과 아직 완성되지 않은 공동체, 다시 나누어 맡긴 일과 앞으로도 지켜야 할 약속이 함께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앞에서 한 사람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의 하나님, 저를 기억하시고 제게 좋은 것을 베풀어 주십시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