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바냐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3장 · 남은 백성의 기쁨
하나님이 그 가운데 계신다는 것
스바냐 3장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성읍이었는데,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읍이 됩니다.
이 변화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하나님은 불의한 성읍을 떠나시는 대신 그 안의 불의를 심판하시고, 새로운 백성을 남기시며, 마침내 그들 가운데 기쁨으로 머무십니다.
처음에는 관리들과 재판관들이 성읍 안에 있습니다(3:3). 그런데 바로 그 성읍 안에 하나님께서도 계십니다(3:5). 이후 하나님은 그 안에서 거만한 사람들을 없애시고(3:11),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을 남기겠다고 하십니다(3:12). 마지막에는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계신다고 선언됩니다(3:15, 17).
원문에서는 이 자리들에 「그 가운데」라는 표현이 거듭 나옵니다.
하나님이 계신 장소는 같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지 않는 성읍 — 예루살렘의 네 가지 거절
하나님의 성읍이 억압하는 성읍이 되다
아, 거역하고 더러워진 성읍아! 사람들을 짓누르는 너에게 재앙이 닥칩니다.스바냐 3:1 · 두루새김
2장의 마지막에서 스바냐는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를 묘사했습니다. 그 도시는 자기 힘을 믿으며 다른 누구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3장이 시작되자 비난의 대상이 바뀝니다. 이제 예언자는 예루살렘을 향해 말합니다.
성읍의 이름이 첫 절에 직접 나오지는 않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성소와 제사장들이 있고, 이후 시온과 예루살렘이 분명하게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 성읍은 예루살렘으로 이해됩니다. 니느웨의 교만을 들었던 독자는 이제 자신이 속한 성읍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이 교만과 불의로부터 자동으로 보호해 주지는 않습니다.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성전이 있었습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제사장들이 있었고, 정의를 실현해야 할 재판관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제도를 갖춘 도시가 사람들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스바냐는 종교 제도가 있다는 것과 하나님을 충실하게 섬기는 것을 같은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성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성읍이 거룩해지지는 않습니다. 그 성읍에서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가 중요합니다.
네 번의 부정 — 관계가 무너지는 과정
그 성읍은 여호와야훼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타이르는 말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야훼를 의지하지도 않고, 자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도 않았습니다.스바냐 3:2 · 두루새김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네 문장 모두에 「아니다」(לֹא)라는 부정 표현이 나옵니다. 이 반복은 성읍의 실패를 여러 각도에서 드러냅니다.
첫째,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지만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듣지 않는 것과 잘못을 바로잡아 주는 말을 거절하는 것은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둘째, 타이르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잘못을 지적받더라도 자신을 바꾸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다릅니다.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예배 제도가 있었지만, 그 성읍의 삶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성전에 출석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제한할 수 없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성읍 안에서 종교 활동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가장 깊은 실패는 하나님에 관한 것들이 사라졌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제도를 갖추고도 하나님 자신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백성을 지켜야 할 사람들이 백성을 잡아먹다
그 안의 관리들은 으르렁거리는 사자들입니다. 재판관들은 저녁에 나서는 이리들입니다. 아침까지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습니다.스바냐 3:3 · 두루새김
이들은 원래 백성을 보호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특히 재판관은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마음대로 해치지 못하도록 공정한 판결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나 스바냐의 예루살렘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백성을 지켜야 할 사람들이 백성을 먹잇감으로 삼고 있습니다.
「아침까지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습니다」라는 표현은 먹잇감을 덮치는 짐승의 탐욕을 극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들은 먹이를 조금 남겨 두거나 만족할 만큼만 취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사회의 중요한 기능이 뒤집힌 상황을 고발합니다.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 법을 이용해 사람을 해치고 있습니다.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보호를 담당하는 사람들 때문에 위험해졌습니다.
예언자들은 함부로 행동하며 배신을 일삼는 사람들입니다. 제사장들은 거룩한 것을 더럽히고 율법을 짓밟았습니다.스바냐 3:4 · 두루새김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전해야 합니다. 제사장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고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쳐야 합니다(레위기 10:10–11). 그런데 예언자들은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고, 제사장들은 자신들이 지켜야 할 거룩함을 더럽혔습니다.
사회의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함께 무너진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과 사회의 제도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모두가 불의한 그곳에 의로운 하나님이 계신다
그 성읍 안에 계신 여호와야훼께서는 언제나 올바르시며, 악한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아침마다 어김없이 자신의 판결을 밝히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사람은 부끄러워할 줄 모릅니다.스바냐 3:5 · 두루새김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계신다는 사실은 그 성읍이 언제나 안전하다는 보증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성읍의 불의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은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와 떼어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침마다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앞에서 재판관들은 저녁에 나서는 이리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들은 아침까지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습니다. 그런데 5절에서는 하나님이 아침마다 자신의 판결을 밝히 드러내십니다.
재판관들의 밤은 탐욕으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아침은 정의를 드러내는 시간입니다.
원문에서는 「아침마다」(בֹּקֶר)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이 반복은 하나님의 올바르심이 잠깐의 감정이나 우연한 행동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사람의 재판은 부패할 수 있습니다. 판결이 늦어지거나 강한 사람에게 유리하게 뒤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한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정의를 분명하게 드러내시는데도, 악을 행하는 사람은 부끄러워할 줄 모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정의가 숨겨져 있다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 정의 앞에서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위험한 상태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만이 아니라, 잘못을 드러내는 말씀 앞에서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다리셨지만, 그들은 일찍 일어나 악을 행했다
하나님은 이미 여러 민족에게 일어난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유다가 이러한 일들을 보고 타이르는 말을 받아들이기를 바라셨습니다.
「나는 『너는 분명히 나를 두려워하고, 타이르는 말을 받아들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 내가 그 성읍에 내린 모든 벌에도 그들이 사는 곳은 없어지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그들은 아침부터 서둘러 하는 일마다 악을 저질렀다.」스바냐 3:7 · 두루새김
주변 나라들의 몰락은 예루살렘에도 경고가 될 수 있었습니다. 다른 민족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자신들의 삶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일어난 일은 정반대였습니다.
원문에서는 이들의 행동을 일찍 일어나는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아침마다 정의를 드러내시는데, 그들은 아침부터 악을 행합니다.
그들은 아직 가르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미 타이르는 말을 들었고, 다른 민족의 심판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경험이 그들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나를 기다려라」라는 뜻밖의 명령
「그러므로 너희는 나를 기다려라. 내가 약탈하려고 일어서는 날을 기다려라. 나는 민족들과 왕국들을 모아 그들에게 내 분노를, 타오르는 분노를 모두 쏟아붓기로 결정했다. 내 질투의 불이 온 땅을 삼킬 것이다.」 여호와야훼께서 선언하셨습니다.스바냐 3:8 · 두루새김
2장에서 겸손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으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기다려야 할 것은 곧바로 찾아오는 평화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어나셔서 모든 민족을 심판하실 날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보복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일어나십니다. 그리고 모든 민족과 왕국이 그분의 판결 아래 모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납니다.
조금 더 깊이
7절의 「너는 분명히 나를 두려워하고, 타이르는 말을 받아들일 것이다」라는 표현을 하나님이 미래를 알지 못하셨다는 신학적 진술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언의 흐름에서 하나님은 백성이 마땅히 보여야 했던 응답을 자신의 기대라는 형식으로 드러내십니다. 「약탈하려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아드는 해석이 갈리는 표현입니다. 약탈물이나 먹잇감을 취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고, 모음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증인으로 나서는 모습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두 읽기는 심판 장면의 성격을 조금 다르게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씀에서 하나님이 민족들을 모아 심판을 실행하신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나를 기다려라」를 듣는 이들이 누구인지도 완전히 분명하지 않습니다. 앞에서는 불순종하는 성읍이 비판받았지만,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회복하실 백성의 미래가 이어집니다. 따라서 이 기다림은 불순종한 사람들에게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알리는 선언으로도,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그분의 행동을 기다리라는 요청으로도 들릴 수 있습니다.
불에 삼켜진 세상에서 깨끗한 입술을 가진 민족들이 나타나다
「그때 내가 여러 민족의 입술을 깨끗하게 바꾸겠다. 그들 모두가 여호와야훼인 나의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맞대고 나를 섬기게 하겠다.」스바냐 3:9 · 두루새김
8절에서는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분노 아래 모였습니다. 그런데 9절에서는 민족들이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본문은 심판을 무효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 심판 이후 하나님께서 새로운 관계를 이루실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왜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이 아니라 입술을 바꾸실까?
여기서 입술은 말을 하는 기관이지만, 문맥에서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과 그 말이 표현하는 예배를 가리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보다 누구의 이름을 부르느냐입니다.
3:2에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3:4에서는 예언자들이 배신을 일삼고 제사장들이 율법을 짓밟았습니다. 말씀을 듣고 전해야 할 사람들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민족들의 입술을 바꾸십니다.
하나님을 외면하던 사람들의 말이 하나님을 부르는 말로 변화됩니다. 이 변화는 3:13에서 이스라엘에 남은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게 되는 모습과도 연결됩니다.
스바냐가 그리는 회복은 말하는 방식의 변화까지 포함합니다.
어깨를 맞대고 섬기는 사람들
「어깨를 맞대고」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셰켐 에하드로, 글자 그대로는 「하나의 어깨」라는 뜻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일을 위해 함께 짐을 지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벨에서는 사람들이 하나의 언어를 가지고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 했습니다(창세기 11:4). 스바냐에서는 여러 민족이 변화된 입술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스바냐가 바벨 사건을 직접 언급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와 공동의 행동이 어디를 향하는가 하는 문제에서 두 본문은 의미 있는 대조를 이룹니다.
스바냐가 바라보는 회복된 세계는 모든 차이가 사라진 세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민족들이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세계입니다.
구스의 강들 건너편에서 오는 사람들
「구스의 강들 건너편에서 나에게 기도하는 사람들, 곧 흩어진 내 백성이 내게 바칠 예물을 가져올 것이다.」스바냐 3:10 · 두루새김
2장에서 구스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민족으로 등장했습니다(2:12). 그런데 3장에서는 구스의 강들 건너편이라는 먼 지역에서 예물을 가져오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미치는 범위만큼이나 하나님께 대한 예배도 먼 곳까지 넓어집니다.
다만 본문에 나오는 「나에게 기도하는 사람들」과 「흩어진 내 백성」이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그들을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으로 볼 수도 있고, 여러 민족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게 된 사람들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앞절에서는 민족들이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고 말하고, 뒷절에서는 시온의 회복이 이어집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민족들의 예배와 흩어진 백성이 돌아오는 일이 만나는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경계를 넘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남기시는 백성 — 교만을 제거한 자리에 무엇이 남는가
「예루살렘아, 그날에는 네가 나를 거슬러 저지른 온갖 일 때문에 더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내가 네 안에서 거만하게 뽐내는 사람들을 없앨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나의 거룩한 산에서 다시는 잘난 체하지 않을 것이다.」스바냐 3:11 · 두루새김
3:5에서는 악을 행하는 사람이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더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원문에서는 이 두 자리에 같은 부끄러움의 말이 쓰입니다. 왜 앞에서는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 죄의 증거였고 여기서는 구원의 약속일까요?
차이는 그 사이에 일어나는 일에 있습니다.
앞의 사람들은 죄를 저지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뒤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거만한 사람들을 없애시고 새롭게 하셨기 때문에, 과거의 죄로 인한 수치 아래 영원히 머물지 않게 됩니다.
첫 번째는 죄에 대한 무감각입니다. 두 번째는 죄와 수치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회복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를 일으키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문제를 단순히 외부의 적을 몰아내는 것으로 해결하지 않으십니다. 성읍 안에 있는 교만을 없애십니다. 외부의 위협이 사라져도 그 안에서 사람들을 짓누르는 일이 그대로라면, 성읍은 여전히 불의한 성읍입니다.
낮고 힘없는 사람들이 남는다
「내가 네 안에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을 남겨 두겠다. 그들은 여호와야훼인 내 이름을 피난처로 삼을 것이다.」스바냐 3:12 · 두루새김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을 단순히 마음이 겸손한 사람들로만 바꾸면 본문이 가리키는 사회적 처지가 사라집니다. 반대로 경제적으로 가난한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의롭다는 뜻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본문은 사회적으로 약한 처지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태도를 함께 보여 줍니다.
이들은 자신을 보호할 충분한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피난처로 삼습니다.
2장에서 겸손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으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 찾음의 결과가 구체적인 백성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자신의 힘이나 지위를 의지하던 사람들 대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성읍 안에 남습니다.
거짓말이 사라지고 두려움도 사라진다
「이스라엘에 남은 사람들은 악한 일을 하지 않고 거짓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입에서는 남을 속이는 말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그들은 양 떼처럼 풀을 뜯고 누울 것이며, 아무도 그들을 겁에 질리게 하지 않을 것이다.」스바냐 3:13 · 두루새김
처음에 예루살렘은 말씀을 듣지 않는 성읍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은 배신을 일삼았고, 재판관들은 백성을 해쳤습니다. 그런 공동체에서 말은 서로 믿게 해 주는 수단이 아니라 사람을 속이고 해치는 수단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이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들이 착한 말을 하게 된다는 뜻을 넘어섭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믿고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가 회복된다는 뜻입니다.
앞에서는 지도자들이 사자와 이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남은 사람들은 풀을 뜯고 편안히 눕는 양 떼처럼 묘사됩니다.
회복된 공동체의 모습은 모든 사람이 강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약한 사람도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11:6–9에서도 서로 잡아먹는 관계가 사라지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평화로운 다스림이 묘사됩니다. 미가 4:4에서는 각 사람이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도 두렵게 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스바냐의 남은 사람들도 그런 평안을 누립니다.
심판의 성읍이 기쁨의 성읍으로 — 하나님이 다시 그 가운데 계십니다
기뻐하라는 명령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딸 시온아, 기뻐 노래하여라. 이스라엘아, 환호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을 다해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스바냐 3:14 · 두루새김
스바냐서 앞부분의 심판 선언과 비교하면 매우 큰 변화입니다. 그러나 이 기쁨은 근거 없이 잘될 것이라고 믿는 마음이 아닙니다. 다음 절에서 그 이유가 제시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너에게 내리신 벌을 거두고, 네 원수를 몰아내셨다. 이스라엘의 왕 여호와야훼께서 네 가운데 계신다. 너는 다시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스바냐 3:15 · 두루새김
하나님의 구원은 단순히 재앙이 사라지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는 것으로 완성됩니다.
처음에도 하나님은 그 가운데 계시지 않았는가?
3:5에서 하나님은 불의한 성읍 안에 계신 올바른 재판관이십니다. 그분이 계시기에 성읍의 죄가 드러나고 심판을 받습니다.
3:15에서 하나님은 회복된 백성 가운데 계신 왕이십니다. 그분이 계시기에 그들은 안전하게 지내며 두려움에서 벗어납니다.
하나님이 다른 분으로 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거룩함과 올바르심은 처음부터 끝까지 같습니다.
달라진 것은 그분 앞에 있는 공동체입니다.
교만과 불의가 사라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백성이 남았습니다. 따라서 같은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신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심판의 근거가 되었지만, 이제는 기쁨과 평안의 근거가 됩니다.
늘어진 손을 다시 들게 하시는 하나님
그날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네 두 손을 힘없이 늘어뜨리지 마라.」스바냐 3:16 · 두루새김
두 손을 힘없이 늘어뜨리는 것은 힘이 빠지고 용기를 잃은 모습을 나타냅니다. 오랫동안 두려움 속에 살았던 사람은 위험이 사라졌다는 말을 들어도 쉽게 다시 일어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35:3–4에서도 약해진 손을 강하게 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오셔서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스바냐에서 이 명령의 근거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특히 이사야 12:6에서는 시온의 주민들이 기뻐 외쳐야 하는 이유를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신약에서도 시온의 왕과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약속, 민족들의 예배라는 주제가 이어집니다. 누가복음 1:32–33은 예수님의 왕권을, 요한계시록 21:3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머무시는 약속의 완성을 말합니다. 이는 스바냐 3장의 직접 인용이라기보다 구약의 여러 회복 약속을 이어받아 발전시키는 성경 전체의 연결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하나님도 기뻐하십니다 — 침묵과 노래 사이에 있는 사랑
「너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네 가운데 계신다. 그분은 너를 구하시는 용사이시다. 너를 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실 것이다. 너를 사랑하시며 잠잠히 계시고, 너를 보며 기뻐 노래하실 것이다.」스바냐 3:17 · 두루새김
14절에서 백성은 기뻐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향해 기뻐하십니다.
기쁨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백성을 위험에서 건져 내는 행동일 뿐 아니라, 그 백성을 다시 기뻐하시는 관계의 회복이기도 합니다.
구원하는 용사가 노래하는 분이 되다
17절의 첫 부분에서 하나님은 「용사」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이 절은 용사의 승리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구원하신 백성을 바라보며 기뻐하십니다. 원수를 물리치는 힘과 백성을 향한 사랑이 같은 분 안에서 나타납니다.
바로 앞에서는 백성을 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신다고 했고, 바로 뒤에서는 백성을 보며 기뻐 노래하신다고 했습니다.
그 사이에 침묵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며 잠잠히 계시고, 다시 기뻐 노래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한 가지 행동으로만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거만한 사람들을 없애신 뒤에 남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악한 일을 하지 않고 거짓말도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심판을 통해 새롭게 된 공동체입니다. 이 점에서 하나님의 기쁨은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는 태도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17절의 「용사」라는 표현은 출애굽기 15:3을 떠올리게 합니다.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전쟁의 용사로 찬양받으셨습니다. 잠잠하다는 동사를 용서하거나 사랑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로 풀어 읽는 해석들도 있지만, 두루새김은 「너를 사랑하시며 잠잠히 계시고」라고 옮겨 히브리어 본문에 나타나는 침묵의 이미지를 유지합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책망하지 않으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이 깊어 말없이 머무시는 모습을 나타낸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침묵의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침묵을 특정한 마음 상태나 행동으로 확정하기보다, 앞뒤의 기쁨 표현과 함께 읽는 것이 좋습니다. 이사야 62:4–5에서는 버림받은 땅이 다시 기쁨의 대상이 되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하듯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스바냐 3:17은 이러한 회복의 약속들과 함께 읽을 수 있습니다.
절뚝거리는 사람을 구하고 흩어진 사람을 모으다
기쁨의 노래 뒤에 스바냐는 마지막 약속을 전합니다.
절기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의 슬픔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절기를 지키지 못해 슬퍼하는 사람들을 내가 모으겠다. 그들은 네게 속한 사람들이었다. 너에게 닥친 모욕은 무거운 짐이었다.」스바냐 3:18 · 두루새김
예루살렘의 절기는 단순한 종교 행사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함께 기억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기쁨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함께 예배해야 할 사람들이 흩어져 있는 상태를 하나님께서 끝내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절뚝거리는 사람을 언급하실까?
「보아라, 그때 내가 너를 괴롭히는 자들을 모두 벌하겠다. 다리를 절뚝이는 이들을 구하고, 쫓겨난 이들을 모으겠다. 그들이 수치를 당하던 온 땅에서 칭찬받고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스바냐 3:19 · 두루새김
다리를 절뚝이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같은 속도로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쫓겨난 사람은 돌아갈 장소를 잃어버렸습니다. 둘 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스스로 얻기 어려운 상태에 있습니다.
이 이미지는 미가 4:6–7과 매우 가깝습니다. 미가에서도 하나님은 절뚝거리는 이들과 쫓겨난 이들을 모으시고, 그들을 남은 백성으로 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두 예언서는 회복을 강한 사람들의 승리로만 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돌아오기 어려운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찾아 모으시는 행동으로 묘사합니다.
이 표현을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처한 약함과 포로로 끌려간 상태를 나타내는 비유로 읽을 수 있습니다. 동시에 실제로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모습이 비유의 바탕에 있다는 점도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가장 강한 사람부터 회복시키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가장 돌아오기 어려운 사람들을 모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수치가 칭송으로 바뀌다
처음에는 악을 행하는 사람이 부끄러워할 줄 몰랐습니다(3:5). 이후 하나님은 회복된 성읍이 과거의 죄로 인해 더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3:11).
그런데 마지막에서는 다른 종류의 수치가 등장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쫓겨난 사람들이 겪었던 모욕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신 백성으로서, 자신들이 당했던 모욕과 반대되는 지위를 얻게 됩니다.
「그때 내가 너희를 데려오겠다. 바로 그때 너희를 모으겠다. 내가 너희 눈앞에서 포로로 잡혀 있던 너희의 처지를 바꾸어 줄 때, 땅의 모든 민족 가운데서 너희가 이름을 떨치고 칭찬받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스바냐 3:20 · 두루새김
백성이 스스로 돌아오는 장면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데려오시는 행동이 강조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포로 생활과 회복을 말하는 다른 예언서들과도 연결됩니다. 예레미야 30:3과 32:37–41, 에스겔 36:24–28에서도 하나님께서 흩어진 백성을 모아 다시 자기 땅으로 데려오시는 약속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스바냐는 단순히 사람들이 원래 살던 장소로 되돌아가는 모습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이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며,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는 관계의 회복까지 바라봅니다.
조금 더 깊이
18절은 히브리어 본문에서 문장들의 연결 관계가 특히 어려운 구절입니다. 절기와 관련하여 슬퍼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어떤 상황 때문에 슬퍼하는지, 모욕이라는 짐이 정확히 누구에게 지워졌는지를 하나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흩어져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공동체가 겪는 모욕 때문에 정상적으로 절기를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본문만으로 그 구체적인 상황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맺음말 — 기쁨으로 노래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올바른 분이시기 때문에 불의를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버려진 상태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불의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그 백성을 다시 모으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스바냐서는 그 노래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완전히 실현될지 상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남은 장면은 폐허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계십니다. 흩어졌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쫓겨난 사람들이 모이며, 다리를 절뚝이던 사람도 다시 공동체 안에 자리를 얻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거짓과 폭력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편히 눕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모으셨습니다. 처음에는 권력자들의 으르렁거림이 성읍을 채웠지만, 이제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기쁜 노래가 그 가운데 울립니다.
스바냐서의 마지막에는 인간의 승리 선언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되찾으신 하나님의 기쁨이 남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