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풀어 읽기 · 44장
이 장의 자리 · 40–48장 · 새 성전 환상
닫힌 하나님의 문과 사람의 책임
에스겔 44장은 뜻밖에도 닫힌 문에서 시작합니다.
앞 장에서 여호와야훼의 영광은 동쪽 문을 지나 성전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다시 거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이 그 문으로 돌아와 보니 문이 닫혀 있습니다.
하나님이 돌아오셨다면 사람들도 기쁘게 그 문을 드나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그 문을 닫아 두라고 명하십니다.
이 장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다는 것은 더 많은 권한을 소유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권한과 행동을 제한받고, 삶의 기반까지 하나님께 맡긴다는 뜻입니다.
닫힌 동쪽 문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왜 제사장이 물려받을 몫의 문제로 끝나는지 살펴보면, 에스겔 44장이 보여 주는 거룩함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여호와야훼가 지나가신 문은 이제 사람의 길이 아닙니다
44장 1절에서 안내자는 에스겔을 동쪽을 향한 성소의 바깥문으로 데려갑니다.
그런데 문은 이미 닫혀 있습니다.
본문은 누가 문을 닫았는지, 언제 닫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문이 닫혀 있는 이유를 하나님이 직접 밝히십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문은 닫혀 있어야 한다. 열어서는 안 되며, 아무도 이 문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가 이 문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 문은 닫혀 있어야 한다.」에스겔 44:2 · 두루새김
문이 닫혔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일을 사람의 편의에 따라 다룰 수 없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닫힌 문은 하나님이 떠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이미 성전 안에 있습니다. 4절에서 에스겔은 그 영광이 여전히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또한 문이 닫힌 것은 동쪽을 향한 바깥문입니다. 성전의 모든 출입구가 닫힌 것이 아닙니다. 곧이어 에스겔 자신도 북쪽 문을 거쳐 성전 앞으로 이동합니다.
닫힌 문은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그곳에 들어오신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기억하게 합니다.
통치자도 하나님의 문 앞에서는 손님입니다
3절에서는 통치자가 등장합니다.
「통치자는 그 지위에 따라 이 문 건물 안에 앉아 여호와야훼 앞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다. 그는 문 현관을 통해 들어왔다가 같은 길로 나가야 한다.」에스겔 44:3 · 두루새김
여기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특별한 식사입니다. 제사와 관련된 식사로 이해할 만하지만, 이 구절만으로 정확히 어떤 제물을 먹는지, 누가 함께 앉는지까지 알 수는 없습니다.
닫힌 동쪽 바깥문을 뚫고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문 건물 안에 마련된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왕들은 때때로 성전에 대한 권한을 자기 왕권의 일부처럼 행사했습니다. 에스겔 43:7–9에서도 하나님은 왕들이 자신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던 과거를 고발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통치자는 자기 지위에 맞는 자리를 받으면서도, 그 지위를 넘어서는 행동은 허락받지 못합니다.
통치자는 존중받지만, 여호와야훼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뒤이어 45:8–9에서 통치자들에게 백성을 억압하거나 빼앗지 말라고 명하시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통치는 제한 없는 권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 아래에서 행사되는 권력입니다.
하나님은 건축의 문제가 아니라 출입의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4절에서 안내자는 에스겔을 북쪽 문으로 데려갑니다.
그가 나를 북쪽 문을 거쳐 성전 앞으로 데려갔습니다. 내가 보니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여호와야훼의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나는 얼굴을 땅으로 향하고 엎드렸습니다.에스겔 44:4 · 두루새김
그런데 하나님은 엎드린 예언자에게 특별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여호와야훼의 성전의 모든 규정과 모든 법에 관해 내가 네게 하는 말에 마음을 기울여라. 네 눈으로 보고 네 귀로 들어라. 성전으로 들어오는 곳과 성소에서 나가는 모든 곳에 마음을 기울여라.」에스겔 44:5 · 두루새김
에스겔은 환상을 보는 예언자이지만, 단순히 눈으로 보고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들은 말씀을 분별하고, 그 의미를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성전의 아름다움이나 규모가 아니라 출입구를 강조하실까요?
이스라엘은 성전을 더럽힌 일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 수 없습니다
「『너희가 내 음식인 기름진 부분과 피를 바칠 때, 마음에도 몸에도 할례를 받지 않은 다른 민족 사람들을 내 성소 안으로 데려와 내 집을 더럽혔다. 너희의 온갖 역겨운 짓에 더하여, 그들은 내 언약을 깨뜨렸다.』」에스겔 44:7 · 두루새김
하나님은 먼저 다른 민족 사람들을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너희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그들을 데려왔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 거룩한 것들을 맡아 지키지 않았다. 오히려 너희를 대신해 내 성소에서 그 일을 맡아 지킬 사람들을 세웠다.』」에스겔 44:8 · 두루새김
여기서 문제는 단순히 성전에서 일할 사람을 외부에서 데려왔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성소의 섬김 질서를 무시하고, 그 일을 맡을 자격이 없는 이들에게 거룩한 일을 맡겼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제사법에서 제물의 기름진 부분과 피는 특별히 여호와야훼께 속한 것으로 구별되었습니다. 레위기 3:16–17은 기름이 여호와야훼의 것임을 밝히며, 피와 기름을 먹지 말라고 규정합니다.
하나님이 여기서 「내 음식」이라고 표현하시는 것은 신이 인간처럼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제물 가운데 하나님께 바쳐지는 몫이 그분께 속한다는 제사상의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그 거룩한 제물을 바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규정을 어겼습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자신들이 성소에 들여놓은 사람들에게만 있지 않습니다.
거룩한 것을 지켜야 할 이스라엘 자신에게 있습니다.
다른 민족 사람에 대한 금지는 민족적 배제만을 말하는가?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마음에도 몸에도 할례를 받지 않은 다른 민족 사람은 아무도 내 성소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사는 다른 민족 사람에게도 모두 해당하는 말이다.』」에스겔 44:9 · 두루새김
할례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표지였습니다(창세기 17:9–14). 그런데 신명기 10:16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고 명합니다. 신명기 30:6에서는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셔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도 나타납니다.
따라서 마음의 할례는 단순한 몸의 표지를 넘어 하나님께 대한 내적인 충성과 순종을 가리킵니다. 에스겔 44:9는 마음의 상태와 몸의 언약 표지를 함께 언급합니다.
이것을 다른 민족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는 보편적인 선언으로 확대하면 성경의 다른 본문들과 충돌합니다. 출애굽기 12:48–49에서는 다른 민족 사람이 할례를 받고 유월절에 참여할 수 있는 규정이 주어집니다. 이사야 56:3–7에서는 여호와야훼께 속하여 그분을 섬기고 언약을 지키는 다른 민족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서 기쁨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에스겔 47:22–23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살며 자녀를 낳은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도 물려받을 땅의 몫을 나누어 주라고 명하십니다. 따라서 에스겔의 회복 환상 전체가 다른 민족 사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44:9의 제한을 없었던 것처럼 읽어서도 안 됩니다. 이 구절은 실제로 성소 출입을 제한하고 있으며,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와 관련된 경계를 분명히 전제합니다. 여기서 구별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 가운데 사는 것과, 하나님께 특별히 구별된 성소에 들어가 섬기는 것이 동일한 권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제한을 현대의 민족적 우열이나 사람의 가치에 관한 판단으로 직접 옮기는 것은 본문의 제사 맥락을 벗어납니다. 하지만 성소에 나아가고 그곳에서 섬기는 일에 자격과 책임이 있다는 본문의 주장은 분명히 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음 단락에서 다른 민족 사람들보다 더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을 지목하십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레위 사람들입니다.
조금 더 깊이
7절 마지막에는 해석하기 어려운 문장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바야페루(פָּרַר)는 삼인칭 복수입니다. 따라서 앞에서 반복된 「너희」와는 문법적 형태가 다릅니다. 가까운 문맥을 따르면 이 표현의 주어를 앞서 언급된 다른 민족 사람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체 문맥에서는 하나님이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책임을 묻고 계시기 때문에, 이 표현을 이스라엘의 언약 위반과 연결해 이해하는 길도 있습니다. 두 읽기 사이의 긴장은 본문에 남아 있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문장을 고쳐서 해결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났던 레위 사람들도 성전에서 일할 수 있습니다
10절에서 하나님은 이제 성전에서 섬기는 일을 맡았던 사람들의 과거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길을 벗어났을 때 내게서 멀어진 레위 사람들, 곧 자기들의 우상을 따라 나를 떠나 길을 벗어난 사람들은 자기 죄의 책임을 져야 한다.』」에스겔 44:10 · 두루새김
「『그들이 우상들 앞에서 백성을 섬겨 이스라엘 백성을 죄에 빠뜨리는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을 향해 손을 들어 맹세했다. 주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그들은 자기 죄의 책임을 져야 한다.』」에스겔 44:12 · 두루새김
그들은 백성 앞에서 종교적인 일을 맡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맡은 일을 이용해 백성을 잘못된 예배로 이끌었습니다. 그들의 책임은 자신들의 행동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에도 있습니다.
죄를 지었는데도 봉사의 자리를 남겨 두십니다
「『그들은 내 성소에서 일하며 성전 문들을 맡고 성전을 돌볼 것이다. 백성을 위해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잡고, 백성 앞에 서서 그들을 섬겨야 한다.』」에스겔 44:11 · 두루새김
그러나 곧이어 13절에서는 분명한 제한이 내려집니다.
「『그들은 내게 가까이 와서 나를 위한 제사장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가장 거룩한 것들을 비롯해 내 거룩한 것 어느 것에도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 그들은 수치를 짊어지고, 자기들이 저지른 역겨운 짓의 책임을 져야 한다.』」에스겔 44:13 · 두루새김
제물을 잡는 일과 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제물을 드리는 일이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전에 맡겨졌던 거룩한 책임을 배반한 사람들에게 아무런 변화 없이 같은 접근 권한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죄를 지은 레위 사람들은 봉사의 자리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지만, 자신들이 잃어버린 신뢰와 맡은 일의 제한을 감당해야 합니다.
누군가 잘못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남은 모든 역할과 가치를 부정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잘못을 저지른 뒤에도 이전의 모든 권한을 당연히 돌려받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본문은 레위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회개했는지, 이러한 역할의 조정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개인적인 회개에 따라 맡았던 일로 돌아가는 일반적인 절차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용서받는 일과 특정한 권한을 다시 부여받는 일은 반드시 같지 않습니다.
같은 표현이 세 번 나타납니다
8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거룩한 것들을 「맡아 지키지 않았다」고 책망하십니다.
14절에서는 레위 사람들에게 성전을 「맡아 지키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15절에서는 사독의 자손들이 과거에 성소를 「맡아 지켰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반복은 다음 단락에서 두 제사장 집단이 맡을 일이 달라지는 이유를 밝혀 줍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누가 어느 가문에 속해 있는지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그분께 맡은 책임을 지켰는지를 분명히 구별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의 「나는 그들을 향해 손을 들어 맹세했다」는 말씀은 이 결정의 엄중함을 보여 줍니다. 손을 든다는 표현은 구약에서 맹세할 때도 사용되고 위협의 몸짓으로도 나타납니다. 두루새김은 이 자리를 맹세하는 손짓으로 풀어 옮겼습니다. 이 문맥에서는 하나님이 그들의 죄에 대해 단호하게 대응하신다는 뜻이 분명하지만, 원문의 손짓이 지닌 의미를 한 가지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사람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는 사람
15절은 앞 단락과 뚜렷한 대조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인 사독의 자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나를 떠나 길을 벗어났을 때에도 내 성소를 맡아 지켰다. 그들은 내게 가까이 와서 나를 섬길 것이다. 내 앞에 서서 기름진 부분과 피를 내게 바칠 것이다. 주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에스겔 44:15 · 두루새김
10절에서 일부 레위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사람들입니다. 15절에서 사독의 자손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와서」 섬길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멀어짐과 가까워짐은 단순한 물리적 이동이 아닙니다. 우상숭배를 통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던 사람들과, 하나님께 충실했던 이들이 그분 앞에 가까이 나아가도록 허락받는 상황이 대응합니다.
사독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제사장으로, 솔로몬이 왕이 된 뒤 제사장의 지위를 확고히 했던 인물입니다(열왕기상 1:39; 2:35). 에스겔의 환상은 그 자손들을 성전에서 여호와야훼 가까이 나아갈 제사장 집단으로 특별히 구별합니다.
누구 앞에 서서 섬기는가?
앞부분의 레위 사람들은 백성 앞에 서서 백성을 섬기게 됩니다(44:11).
「『그들이 내 성소에 들어오고, 내 상에 가까이 와서 나를 섬길 것이다. 그들은 내가 맡긴 일을 지켜 행해야 한다.』」에스겔 44:16 · 두루새김
두 집단 모두 섬깁니다. 하지만 누구에게 가까이 나아가며, 어떤 일을 맡는지가 다릅니다. 레위 사람들은 백성을 위한 성전의 일을 맡습니다. 사독의 자손들은 여호와야훼 앞에 나아가 거룩한 제물을 바치는 제사장의 일을 맡습니다.
앞서 에스겔 41:22에서 안내자는 성소의 나무 제단을 가리켜 「여호와야훼 앞에 있는 상」이라고 불렀습니다. 44:16에서는 하나님이 그 상을 「내 상」이라고 부르십니다.
제사장은 자신이 주인인 식탁에서 사람들을 대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한 상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가까움은 소유권이 아니라 섬김의 책임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들에게 허락된 섬김이 어떤 삶을 요구하는지 설명하십니다. 그 설명은 뜻밖에도 옷의 재질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의 몸과 일상
17절부터는 제사장들의 복장과 생활에 관한 규정이 이어집니다.
「『그들은 안뜰의 문들로 들어올 때 아마포 옷을 입어야 한다. 안뜰의 문들과 성전 안에서 섬길 때에는 양털로 된 것을 몸에 걸쳐서는 안 된다.』」에스겔 44:17 · 두루새김
「『머리에는 아마포 머리쓰개를 쓰고, 아마포 속바지를 입어야 한다. 땀을 나게 하는 것으로 허리를 동여매서는 안 된다.』」에스겔 44:18 · 두루새김
땀은 부정한 것인가?
아마포는 아마 식물에서 얻은 섬유로 만든 직물입니다. 양털과 다른 재질이며, 고대의 제사장 복장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출애굽기 28:39–43에는 제사장의 옷과 속바지에 관한 규정이 등장합니다.
허리띠를 너무 조여 땀이 나게 하지 말라는 뜻일 수도 있고, 땀을 일으키는 재질이나 방식으로 허리를 동여매지 말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제사장이 섬길 때 입는 옷이 정해진 방식에 맞아야 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땀 자체가 죄나 부정함을 의미한다고 본문이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거룩한 옷을 입은 채 백성에게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백성이 있는 바깥뜰로 나갈 때에는 섬길 때 입던 옷을 벗어 거룩한 방들에 두고 다른 옷을 입어야 한다. 그 옷들로 백성을 거룩하게 해서는 안 된다.』」에스겔 44:19 · 두루새김
42장에서 설명된 거룩한 방의 용도가 여기서 다시 확인됩니다. 그 방은 제사장들이 제물을 보관하고 먹는 곳일 뿐 아니라, 섬길 때 입는 거룩한 옷을 벗어 두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제사법에서 거룩함은 단순히 마음의 경건을 뜻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특별히 구별된 사람이나 물건이 지니는 제사상의 상태이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거룩함은 정해진 절차 없이 일상의 영역으로 옮겨져서는 안 되었습니다.
제사장이 그 옷을 벗는 것은 자신이 거룩하지 않은 사람이 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맡은 일과 그 일을 위해 구별된 옷의 용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머리카락과 포도주에 관한 규정
「『그들은 머리를 밀어서도 안 되고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려서도 안 된다. 반드시 머리카락을 다듬어야 한다.』」에스겔 44:20 · 두루새김
고대의 머리 모양은 애도나 종교적 관습과 연결되기도 했습니다. 레위기 21:5에서도 제사장이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과정에서 머리를 미는 행위에 제한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 44:20이 특정한 다른 민족 종교의 머리 모양을 금지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떤 제사장도 안뜰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를 마셔서는 안 된다.』」에스겔 44:21 · 두루새김
포도주를 평생 마셔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아닙니다. 안뜰에 들어가 섬기는 때에 관한 제한입니다. 레위기 10:8–11에서도 제사장이 회막에 들어갈 때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명하며, 그 이유를 거룩한 것과 일상에 쓰는 것, 부정한 것과 깨끗한 것을 분별하고 백성을 가르치는 일과 연결합니다.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맡은 일을 분별력 있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곧이어 제사장의 가장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가 백성에게 올바른 구별을 가르치는 일이라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결혼에 관한 규정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들이 아내로 맞을 수 있는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의 처녀와 제사장의 아내였다가 남편을 잃은 여자다. 그 밖에 남편을 잃은 여자나 이혼당한 여자를 아내로 맞아서는 안 된다.』」에스겔 44:22 · 두루새김
레위기 21:7은 일반 제사장에게 이혼당한 여자와 제사 규정상 특정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여자와의 결혼을 금하지만, 남편을 잃은 여자와의 결혼을 모두 금하지는 않습니다. 반면 레위기 21:13–14는 대제사장에게 더욱 엄격한 결혼 규정을 적용합니다. 대제사장은 처녀를 아내로 맞아야 합니다.
따라서 에스겔의 규정은 레위기에 나오는 일반 제사장의 규정보다 엄격한 측면이 있지만, 대제사장의 규정과도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이 규정을 남편을 잃은 여자나 이혼당한 여자가 도덕적으로 열등하다거나 하나님께 덜 사랑받는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제사장에게 적용되는 결혼상의 자격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여성이 인간으로서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를 판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 제사장의 아내였다가 남편을 잃은 여자는 허용하면서 그 밖에 남편을 잃은 여자는 금하는지에 관해 본문은 직접적인 이유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제사장 가문의 제사상 지위를 유지하려는 목적과 관련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이상의 동기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복장과 머리카락, 포도주와 결혼까지, 제사장의 삶은 자신에게 맡겨진 특별한 일과 관련하여 규정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세부 규정이 단지 제사장 개인의 경건을 높이기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곧이어 하나님은 제사장이 백성을 위해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을 밝히십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 3:19에서 사람이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얻는다는 말씀과 연결하여, 제사장이 인간의 수고와 저주를 성소 안으로 가져오지 않아야 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에스겔 44장은 그러한 연결을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규정의 의미를 거기까지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제사장의 핵심 직무는 구별을 가르치고 공정하게 판결하는 것이다
23절은 앞의 복잡한 규정들 사이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들립니다.
「『그들은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일상에 쓰는 것의 차이를 가르쳐야 한다. 부정한 것과 깨끗한 것의 차이도 알려 주어야 한다.』」에스겔 44:23 · 두루새김
여기서 제사장은 제물을 바치는 사람을 넘어 백성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 모든 제사 규정과 율법을 완벽하게 판단할 수 있다고 전제하지 않습니다.
22:26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을 다음과 같은 잘못 때문에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것과 일반적인 것을 구별하지 않았으며, 부정한 것과 깨끗한 것의 차이를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44:23은 바로 그 실패를 뒤집습니다.
성전이 아름답고, 제단이 깨끗하고, 제사장의 옷이 규정에 맞더라도, 백성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 배우지 못한다면 과거의 잘못을 반복할 위험이 남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올바르게 지키려면 그곳에서 섬기는 사람들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 말씀을 백성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거룩함의 구별은 단순한 도덕 판단이 아니다
23절의 두 구분은 비슷해 보이지만 같지 않습니다.
「거룩한 것과 일상에 쓰는 것」은 하나님께 특별히 구별된 상태와 일반적인 상태를 가리킵니다. 반면 「부정한 것과 깨끗한 것」은 이스라엘의 정결 규정에 따른 구분입니다.
일상에 쓰는 것이 반드시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부정한 상태가 언제나 개인의 도덕적인 죄를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가족의 시신을 만져 정결 규정상 부정해진 것은 우상을 섬기거나 불의를 저지른 것과 같지 않습니다.
제사장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순히 금지 사항을 많이 만들어 내는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무엇을 어떻게 구별해야 하는지 정확히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제사장은 분쟁을 판결하는 사람이다
24절에서는 제사장의 역할이 성전 밖의 공동체 문제로 넓어집니다.
「『다툼이 생기면 그들이 재판에 나서서 내 법에 따라 판결해야 한다. 나의 모든 절기에 내 법과 규정을 지키고, 나의 안식일들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에스겔 44:24 · 두루새김
신명기 17:8–13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다툼이나 재판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 있는 제사장과 재판관에게 나아가 판단을 받도록 규정합니다. 그러나 에스겔 44장의 표현은 특히 재판의 기준을 강조합니다.
「내 법에 따라」.
제사장들이 자기 기분이나 개인적인 이익에 따라 판결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백성에게 옳고 그름을 가르치는 사람이 실제로 다툼을 판단할 때에는 자기 기준을 적용한다면, 그 가르침은 신뢰를 잃게 됩니다.
제사장은 다툼이 일어났을 때만 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백성이 정기적으로 하나님을 기억하고 예배하도록 공동체의 시간까지 지키는 사람입니다.
가르침과 재판, 절기와 안식일은 서로 다른 활동이지만 공통된 목적을 지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가족의 죽음 앞에서도 제사장의 책임은 사라지지 않는다
25절은 갑자기 죽음을 다룹니다.
「『제사장은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 형제나 결혼한 적이 없는 자매가 죽었을 때에는 그 시신에 다가가 부정해져도 된다. 그 밖의 죽은 사람에게 다가가 자신을 부정하게 해서는 안 된다.』」에스겔 44:25 · 두루새김
이 규정은 레위기 21:1–3의 일반 제사장 규정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의 정결법에서는 시신에 접촉하는 일이 제의적인 부정을 가져왔습니다. 민수기 19:11–13에서는 시신과의 접촉으로 생긴 부정과 깨끗하게 되는 의식에 관한 규정을 설명합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께 특별히 구별된 사람입니다. 하지만 가족의 죽음과 슬픔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족을 위한 예외가 허용된다고 해서 성소의 규정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26절에서는 깨끗하게 된 뒤에도 칠 일을 세도록 명합니다. 그리고 27절에서는 다시 거룩한 곳인 안뜰로 들어와 섬기는 날에 속죄제물을 바치도록 합니다.
제사장은 가족의 죽음을 외면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다시 성소의 직무를 맡아 행할 때에는 정해진 정결 절차를 따라야 합니다.
이러한 규정은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와 정결 규정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날 슬퍼하며 애도하는 사람이 부정하다고 판단하거나, 가족의 장례를 치른 뒤 특별한 속죄 의식이 필요하다고 일반화할 근거는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특히 26절은 깨끗하게 된 뒤 칠 일을 세도록 하므로, 일반적인 시신 접촉의 부정 기간과 단순히 같은 규정으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땅을 받지 않는 제사장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상속
28절에서 본문의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지금까지는 주로 제사장들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가 설명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무엇을 받게 될 것인지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는 물려받을 몫이 있다. 내가 바로 그 몫이다. 너희는 이스라엘 안에서 그들에게 따로 땅을 주어서는 안 된다. 내가 그들이 차지할 몫이다.』」에스겔 44:28 · 두루새김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특별히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들이지만, 그 때문에 다른 이스라엘 지파들처럼 자신들의 몫으로 땅을 물려받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물려받을 몫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상속 몫으로 받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실제로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하는지도 곧바로 설명하십니다. 29절에서는 곡식 제물과 속죄제물과 속건제물 가운데 정해진 몫을 그들이 먹도록 하십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마련하신 몫에 의존합니다.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몫을 제사장들에게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제사장들의 물려받을 몫이시라는 선언은 그들이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하나님이 책임지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백성에게 맡겨진 실제적인 책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첫 몫」이 제사장에게 돌아간다
30절에서는 「처음」과 「첫 몫」이라는 표현이 이어집니다.
「『처음 거둔 모든 것의 첫 몫과 너희가 따로 떼어 바친 모든 것은 제사장들의 몫이 되어야 한다. 너희는 반죽의 첫 몫도 제사장에게 주어 너희 각자의 집에 복이 머물게 해야 한다.』」에스겔 44:30 · 두루새김
이스라엘 백성이 수확물을 얻으면, 그 가운데 처음 난 것의 정해진 몫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것은 수확 전체가 하나님에게서 주어진 것임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잠언 3:9에서도 재물과 모든 수확물의 첫 열매로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가르침이 나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이 먹고살도록 돕는 일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빌미로 백성의 재물을 마음대로 차지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은 어떤 몫이 누구에게 돌아가는지를 하나님이 정하신다는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제사장들이 받을 권리가 있는 부분도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것이며, 백성이 드려야 할 부분도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양쪽 모두 하나님의 질서 아래 있습니다.
한 가정의 반죽에서 시작되는 축복
수확한 곡식이 집으로 들어옵니다. 그 곡식으로 음식을 준비합니다. 그 과정에서 첫 몫을 떼어 제사장에게 줍니다.
이처럼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예배와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음식 준비가 하나의 언약에 따른 질서 안에 놓입니다. 복이 머무는 곳은 제사장들의 방만이 아닙니다. 백성들의 집입니다.
이것은 제사장에게 일정한 몫을 주면 자동으로 부자가 된다는 거래의 약속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는 제물의 양에 비례한 물질적 보상의 공식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지키고, 그 질서 안에서 제사장들이 맡은 직무를 지속할 수 있도록 할 때, 하나님의 복이 공동체의 가정에 머무는 관계가 그려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다시 머무신다는 사실은 결국 그들이 살아가는 집과 식탁에도 의미를 지닙니다.
조금 더 깊이
하나님이 제사장들의 물려받을 몫이 되신다는 말씀은 민수기 18:20과 신명기 18:1–2에서 레위 지파에게 주어진 규정과 연결됩니다. 민수기 35:1–8에서는 레위 사람들에게 거주할 성읍과 그 주변 목초지를 주도록 규정합니다. 에스겔 45:4에서도 제사장들을 위한 거주 장소가 성소 주변에 마련됩니다. 따라서 44:28은 제사장이 집 한 채도 가질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지파와 같은 방식으로 독립적인 영토를 물려받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제사장에게 음식이 주어져도 아무 음식이나 먹을 수는 없다
이 장의 마지막 절은 매우 평범한 음식 규정처럼 보입니다.
「『제사장들은 새든 짐승이든 저절로 죽었거나 다른 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은 어느 것도 먹어서는 안 된다.』」에스겔 44:31 · 두루새김
이 규정은 레위기 22:8과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도 제사장은 저절로 죽거나 다른 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을 먹어 자신을 부정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명합니다. 그러한 죽음으로 얻어진 고기는 이스라엘의 정결 규정에서 문제가 되는 음식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몫을 먹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은 먹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자신의 물려받을 몫이 되신다는 사실은 막연한 종교적 감정이 아닙니다. 무엇을 받고 무엇을 거절할 것인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와 연결됩니다.
맺음말 — 제사장의 식탁에 놓이는 첫 반죽
에스겔 44장의 거룩함은 이렇게 성전의 가장 깊은 곳에서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통치자가 앉는 자리에도 있고, 레위 사람이 맡아 하는 일에도 있고, 제사장이 내리는 판결에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한 가정이 제사장에게 내어 주는 반죽의 첫 몫에까지 이어집니다. 거룩함은 사람에게 주어진 권한을 무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자기에게 맡겨졌고 무엇이 자기 것이 아닌지를 구별하게 합니다.
오늘날 에스겔 44장을 읽을 때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의 성전 제도를 현대의 종교 조직에 그대로 옮겨 놓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장을 근거로 특정한 가문만 종교적인 지도자가 될 수 있다거나, 오늘날의 종교 지도자들이 같은 결혼과 음식 규정을 지켜야 한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의 성전과 제사장 제도 안에서 주어진 말씀입니다.
높은 지위를 맡았다고 해서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이 정당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있다는 사실은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할 이유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더 책임 있게 섬겨야 할 이유가 됩니다.
이제 장면은 제사장의 식탁에서 멈춥니다.
그 위에는 하나님께 드려진 것 가운데 그의 몫으로 허락된 음식이 놓여 있습니다. 제사장은 그 음식을 먹고 살아갑니다.
그에게는 다른 지파와 같은 땅의 상속 몫이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향해 선언하셨습니다. 「내가 바로 그 몫이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